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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8. 17:46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41회~80회]

기마인물형명기, 은제관식, 금동관, 동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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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1회~4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3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1회~8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4




41.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 '요절한 왕자'의 무덤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국보 91호, 국립중앙박물관.


경성에 머물며 금관총 발굴품을 정리하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에게 불려갔다. 경주 주민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고분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으니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신라 고분에 관심이 많았던 차라 단박에 승낙했다.

경주 봉황대 남쪽에 동서로 배치된 폐고분 2기가 발굴 대상이었다. 5월 1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발굴을 시작했다. 고분 주변에 여러 채의 초가집이 들어서면서 봉분은 이미 많이 깎여 나간 상태였다. 서쪽 고분의 경우 남아 있는 봉분 지름은 약 18m, 높이는 4.5m 정도였다.

우메하라는 금관총처럼 이 무덤도 봉분만 제거하면 바로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추정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봉분을 제거했지만 고분 상부를 덮었던 돌무지는 지하로 함몰된 양상이었고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무덤 주인공을 안치한 공간이 지하 3m 지점에 자리한 지하식 구조였던 것이다.
 

유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5월 19일이다. 이날 토제 방추차(紡錘車) 1점이 출토된 것을 시작으로 매일매일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5월 22일에는 정교한 금령(金鈴), 5월 27일에는 금관이 차례로 발굴됐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연이어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틀 후 토기와 칠기(漆器) 무더기를 조사하던 중 옆으로 쓰러진 토기 2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자(注子)의 형태였지만 의관을 정제한 주인과 그를 어디론가 안내하는 시종의 모습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요절한 왕자를 다음 세상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라 해석하고 있다. 실제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다른 것보다 작아 그러한 추정에 부합한다.

발굴 후 보고서를 준비하던 우메하라는 스승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제언을 받아들여 '서쪽 무덤'에 금령총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이 금령총이 94년 만에 다시 발굴된다고 한다. 경주박물관의 재발굴로 금령총을 둘러싼 수수께끼들이 풀리길 기대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주인상과 하인상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두 인물상은 두꺼운 직사각형 판(板)위에 다리가 짧은 조랑말을 탄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 모습이다. 말 엉덩이 위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긴 부리가 돌출되어 있어 비어있는 말의 뱃속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인물상의 모습은 말 장식이 화려한 주인상의 경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三角帽)를 쓰고 다리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하인상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짐을 메고 오른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고 있어 길을 안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인물상 형태의 토기는 신라인의 영혼관과 당시의 복식,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문화재청]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주인상, 국보 제 91호,

주인상 높이 23.4㎝·길이 29.4㎝, 경주 금령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하인상, 국보 제 91호,하인상 높이 21.3㎝·길이 26.8㎝, 경주 금령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주인상은 높이 23.4㎝·길이 29.4㎝, 하인상은 높이 21.3㎝·길이 26.8㎝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인상은 삼각형 관모()를 쓰고 마구()를 갖춘 말을 타고 있다. 인물 뒤에 있는 배형()의 구부()는 속이 빈 말의 몸통으로 통하는 병아가리이고 말꼬리는 손잡이 구실을 한다.

하인상은 주인상과 같은 형태이나 상투머리에 수건을 동여 매었고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전대()를, 오른손에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말의 앞가슴에 뻗친 것은 물을 따르는 부리이다.

삼국시대의 공예조각으로서는 드문 수작()이며, 1924년 가을에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제작된 기마인물형 토기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유물로서, 입수구와 출수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점으로 보아 액체를 따라 마시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 기마형 토기는 당시 신라의 기마 풍습과 복식, 무기, 마구, 공예의장() 등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두산백과]



42. 후포리 유적의 『마제석부』 - 신석기인들의 '집단 매장터' 


​1983년 3월 26일, 경북 울진군 후포리 주민들은 등기산 정상에서 조경수 식재용 구덩이를 파다 석기 34점을 발견했다. 4월 25일 한병삼 관장과 최종규 학예사 등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긴급 발굴에 착수했다.

겉흙을 제거하니 남북 3.5m, 동서 4.5m 규모의 원형에 가까운 구덩이 윤곽이 확인됐다. 주위에는 띄엄띄엄 자연 석괴가 놓여 있었다. 흙을 조금 파냈을 때 그곳에 크고 작은 마제석부(磨製石斧) 여러 점이 쫙 깔려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석부 주변 흙을 노출하던 조사원들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많은 인골이 뒤엉킨 채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제석부, 후포리유적, 국립경주박물관


석부 발견 지점부터 바닥 면까지는 약 60㎝ 정도의 두께를 이뤘다. 그 사이에 여러 겹의 인골이 겹쳐 있었다. 인골은 최소 40구 이상이 묻혀 있었다. 감정 결과 남녀 비율은 비슷했고 치아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이 유적에선 주민들이 신고한 것까지 합치면 석부 180점, 석제 장신구 4점이 출토됐다. 석부 가운데 큰 것은 길이가 50㎝나 됐다.


최 학예사는 인체 각 부분의 뼈가 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 점, 두개골·대퇴골 등 비교적 굵은 뼈만 골라 묻은 점, 2~3구의 인골이 섞여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세골장(洗骨葬·육탈 후 뼈를 추려 다시 묻음)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석기를 분석하여 이 유적이 신석기시대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근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무덤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발굴됐다. 신석기인들은 무덤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주검을 처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서도 울진 후포리의 사례는 특이한 편이다. 바다로 돌출된 산정에 자리한 자연 구덩이를 묘지로 택해 다수의 인골을 차례로 묻었으며, 세골장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점이 그러하다.


올해로 발굴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이 유적을 둘러싼 여러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기다려진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3. 구의동 유적의 장동호(長胴壺), - 한강변의 고구려 유적


1977년 5월 29일, 서울시 구의동 소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개토제(開土祭)가 열렸다. 정부가 추진하던 화양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부지에서 지름 25m의 큼지막한 고분 1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주관하고 여러 기관이 지원하는 방식의 발굴 조사였다.

윤대인, 윤덕향, 최은주 등 조사원들은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며 조심스레 파 내려갔다. 며칠 만에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정연하게 쌓인 석축(石築)의 전모가 드러났다. 가장 높은 곳은 높이가 1.8m나 됐다. 무덤의 호석(護石)치고는 상당한 규모였다. 게다가 고구려 산성 같은 돌출부가 확인되자 유적의 성격을 둘러싼 의문은 커져 갔다



장동호(長胴壺), 구의동 유적, 서울대박물관


정상부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하면서 조사원들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네모난 무덤구덩이를 예상했지만 둥근 구덩이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그 속에선 불타서 주저앉은 기둥과 판재, 온돌이 차례로 나왔고 유물이 쏟아졌다. 1354점의 철기 가운데 화살촉이 1300여 점에 이르렀다.

6월 13일, 김원룡 단장은 긴급히 조사위원회의를 소집했다. 참석한 조사위원 모두 처음 보는 유적이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어려웠다. 무령왕릉을 발굴한 바 있는 김 단장은 이 유적을 백제의 장례 전통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1989년에 이르러 새로운 해석의 단초가 열렸다. 서울대박물관 박순발 조교가 몽촌토성 출토품을 정리하다가 고구려 토기를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같은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구의동 유적 토기가 고구려 양식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어 최종택 학예사가 1991년 이래 구의동 유적 발굴품을 새롭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임을 밝혀냈다.

서울에 고구려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는 이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최초'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치명적 매력'의 이면에는 언제나 해석의 오류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4. 화왕산성의 『목각 여인상』- 연못 속의 목각 여인상


2005년 2월 7일 경남문화재연구원 정의도 실장과 김시환 연구원 등은 경남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 739m의 화왕산 정상에서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발굴을 시작했다. 3년 전 찾아낸 연못 내부를 조사해 유적의 성격을 해명해볼 참이었다.



목각 여인상, 화왕산성, 국립김해박물관



정방형 연못의 호안 석축은 한 변 길이 14m, 높이 2m 규모였고 그 속엔 진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연못은 통상 오랫동안 사용되므로 어떤 유물이 어느 층위에서 출토되는지를 잘 살펴야 했다. 김 연구원 등은 켜켜이 퇴적된 흙을 조금씩 제거하며 조사에 임했다.

오래지 않아 백자 조각, 상평통보 등의 모습이 보였고 임진왜란 때 위력을 떨쳤다고 전하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출토되면서 이 연못이 조선시대에 사용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신라 토기 조각도 여러 점 섞여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기가 많아져 조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날 연못 안에 쪼그려 앉아 꽃삽으로 진흙을 제거하던 조사원들은 나무토막 하나를 발견했다. 길이가 49.1㎝였고 한쪽이 둥글게 가공되어 있었다. 물로 깨끗이 닦아내니 마치 금방 만든 것처럼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각 여인상이었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놀라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면엔 거친 붓 터치로 그려진 반라(半裸)의 여인상이, 다른 면에는 세로로 빼곡히 내려쓴 묵서가 있었다. 모두 판독하긴 어려웠으나 용왕(龍王)이란 두 글자가 선명했다.


게다가 정수리, 목, 몸통의 급소 6곳에 홈을 낸 다음 금속제 못을 박았던 흔적들이 확인됐다. 주변에선 9세기 무렵의 신라 유물들이 쏟아졌다. 마구, 차를 갈던 다연, 통나무를 깎아 만든 북[鼓] 몸체, 쇠솥 등이 포함돼 있었다.

발굴 성과가 공개되자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화왕산성에서 거행된 제사를 기우제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뤘지만 목각 여인상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용왕에게 바친 인신희생의 대용품으로 보기도 하고, 특정 여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분신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5. 육곡리 7호분의 『은제 관식』- 백제 고위 관료의 상징


1986년 6월 13일, 안승주 관장과 이남석 학예사 등 공주사대박물관 조사원들은 충남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에서 한 달 예정으로 백제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왕도인 공주·부여와 달리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지방의 고분 문화를 밝혀 볼 셈이었다.



은제 관식(측면), 육곡리 7호분, 국립공주박물관


발굴 대상 능선 곳곳엔 도굴꾼이 훑고 간 흔적이 뚜렷했다. 이 학예사는 도굴로 파괴된 1호분을 조사한 다음, 또 다른 고분을 찾아 나섰다. 1호분 서쪽으로 약 45m 떨어진 곳에서 지형이 조금 봉긋한 부분을 발견하곤 무덤일 것으로 생각하고 파보았다.


예상대로 석실이 있었다. 2호분이라 이름 붙인 이 무덤에서는 금동 귀걸이와 함께 다량의 토기가 출토됐다. 뚜껑접시(蓋杯) 1점에는 계란껍데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당초 모든 고분이 도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2호분 발굴을 계기로 '중요한 발견'에 대한 희망이 생겨났다. 희망은 곧 현실이 됐다. 1호분 동쪽에서 찾은 무덤 가운데 7호분은 큼지막한 판석(板石)을 조립해 만든 석실분으로, 석실 단면이 육각형을 띠는 등 부여 능산리의 백제 왕족묘와 흡사했다.

석실 입구를 처음 열었을 때 어두컴컴한 바닥에 무엇인가 잔뜩 깔려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며 자세히 살피니 머리를 북쪽으로 둔 채 묻힌 성인 세 사람의 인골이었다.


그중 석실 서벽 쪽 인골의 두개골 주변에는 경험 많은 고고학자들도 좀체 발견하기 힘든 특별한 유물 1점이 놓여 있었다. 길이 18cm에 5개의 꽃봉오리 모양 장식을 갖춘 은제품이었다.

이 학예사는 이 유물을 '삼국사기' 등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의 나솔(奈率) 이상 관료들이 관에 꽂았던 은꽃(銀花)' 실물로 해석하면서 소유자를 7세기 무렵 세상을 뜬 백제의 고위 관료라 추정했다.


나주 흥덕리, 남원 척문리, 부여 하황리에 이어 네 번째로 발굴된 것이지만 학술조사를 통해 출토 맥락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첫 사례였다. 은제 관식은 그 후로도 간간이 출토되어 현재는 13점을 헤아리며, 백제 관료들의 복식 연구와 복원에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6. 만의총 1호분의 『토우장식 서수형 토기』- 조선 義兵의 무덤이 된 백제 고분 


2008년 12월 26일, 동신대 문화박물관 이정호 교수와 이수진·홍민영 연구원 등은 전남 해남 옥천면 성산리에서 만의총(萬義塚) 1호분 발굴을 시작했다.

이 무덤은 정유재란 때 왜군과 전투하다 순절한 의병들을 합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실시한 시굴 조사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있었기에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확인해볼 참이었다.

수많은 의병이 묻혔다면 봉분에서 유골이 여럿 나올 가능성이 있어 조사원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흙을 걷어나갔다. 80㎝가량 내려간 곳에서 검은색을 띤 토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굴 때 이 층에서 흙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인(phosphorus) 성분이 많이 나와서 더욱 주의를 기울였으나 유골은 남아 있지 않았다 



토우 장식 서수형 토기, 만의총 1호분, 동신대 문화박물관 



아래로 더 파 내려가자 정연한 석곽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굴 때 조사원들을 놀라게 한 '예상치 못한 발견'이 바로 이것이다. 뚜껑 돌을 제거하자 인골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백제 웅진 시기의 유물이 쏟아졌다.

백제 도성에서 만든 귀금속 장신구와 함께 가야 토기, 왜에서 반입한 청동 거울 등이 포함돼 있었다. 만의총 1호분의 원주인은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토기 한 점이었다. 이 토기에는 용처럼 생긴 상상의 동물과 그 동물 등에 올라탄 남성이 조각되어 있었다. 원래 주자(注子)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구가 따로 달려 있지 않고 구멍만 뚫려 있었다.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옮기는 모습을 나타낸 듯하다.

이 교수는 만의총 1호분을 '국제 교역에 종사한 백제인의 무덤을 정유 재란 때 다시 활용한 복합 유적'이라 평가했다.

어찌 보면 남의 무덤을 파 다시 무덤을 쓴 것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둘 사이에는 900여 년이란 시차가 있다. 봉분이 무너져 무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재차 무덤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 후 주민들의 정성스러운 관리 덕분에 백제 무덤은 도굴당하지 않은 채 원래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7. 덕천리 16호묘의 동검 -  겉흙 아래 숨어 있던 '초대형 묘역' 



동검, 덕천리 1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1992년 10월 20일, 유장근 경남대박물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은 경남 창원 동면 덕천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 건설 예정이던 육군종합정비창 터에서 지석묘(支石墓)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추수를 끝낸 논밭엔 지석묘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5기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1호묘라 이름 붙인 것만 홀로 떨어져 있었다.

11월 1일, 이상길 연구원이 책임 조사원으로 부임하면서 발굴에 속도가 붙었다. 1호묘에 대한 본격적 조사에 앞서 주변을 정리하던 조사원들이 석렬(石列)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예상과 달리 남북으로 62.3m, 동서로 21m나 이어진 정연한 석축이었다.

이어 큼지막한 상석(上石)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뒤 내부 조사를 진행했다. 주검이 안치되었을 석곽의 바닥은 지하 4m 지점에 있었다. 국내 선사시대 무덤 가운데 가장 깊은 것으로 기록됐다. 중요 유물 발견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이미 도굴된 뒤라 돌화살촉과 대롱옥[管玉] 일부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연구원은 토층 및 유물 출토 양상 등을 근거로 석축이 1호묘의 묘역 시설이라 주장했지만 학계에선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문화재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한 위원이 '조선시대 건물지와 중복된 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며 핀잔을 준 일은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고심 끝에 이 연구원은 발굴 구역 전체의 겉흙을 제거하기로 했다. 지석묘를 발굴할 때 상석 주변만 조사하고 마무리하는 종전 방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1호묘의 거대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무덤들이 속속 확인돼 23기로 늘어났다. 16호묘에서는 석검과 함께 동검이 출토됐다.

덕천리에서 이룬 새로운 발견이 기폭제가 되어 그 후 영남 곳곳에서 초대형 묘역을 갖춘 지석묘 발굴이 이어졌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 지석묘란 세상을 뜬 권력자의 무덤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의(祭儀) 공간이자 기념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8] 길두리 안동고분의 금동관 - 상자에 담긴 백제 금동관

2006년 2월 14일, 임영진 관장이 이끄는 전남대박물관 조사단은 전남 고흥 길두리에서 시굴 조사를 시작했다. 임 관장은 오래전부터 길두리 안동고분(雁洞古墳)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분구(墳丘) 정상에 드러난 덮개돌로 보아 전남 지역 다른 석실분과는 구조가 다를 것이라 추정했다.


금동관, 길두리 안동고분, 전남대박물관


직경 36m, 높이 3m에 달하는 분구의 정상부를 정리하니 도굴로 교란된 것 이외에도 2개의 덮개돌이 더 있었다. 그것을 제거하자 동서로 길쭉하게 배치된 석곽이 드러났다.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 형태였고 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널길을 갖춘 석실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내부에 대한 본격 조사에 앞서 도굴 구덩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부슬부슬한 흙이 채워진 도굴 구덩이가 바닥을 향해 계속 이어지자 '혹시나?' 했던 일말의 기대마저 여지없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런데 1.2m가량 하강한 지점에서 교란된 흙이 사라지고 조금 단단한 흙이 나타났다.

조사원들은 잔뜩 긴장한 채 노출을 계속했다. 도굴 구덩이가 끝난 곳 조금 아래에서 짙은 갈색으로 변한 흙이 보였다. 철기에 녹이 나면서 철기를 감싸고 있던 흙 색깔마저 바뀐 것이다. 곧 조사원들은 연이어 탄성을 터트렸다. 동벽 아래에서 갑옷과 투구, 중앙에서 청동거울과 칼, 서벽 쪽에선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백제 양식 금동관이었다. 백제 왕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흥반도에서 당대 최고급 물품이 출토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은 컸다. 게다가 다른 금동관과 달리 망자의 머리에 씌워준 것이 아니라 상 자에 담아 부장한 점이 특이했다.

3월 25일 임 관장이 '5세기 초 고흥반도 일대에 대규모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라며 발굴 현장을 공개하자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임 관장의 주장을 수용하는 연구가 많았지만 그와 달리 고흥반도가 근초고왕 대 이래 백제의 지방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해석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무덤 주인공을 왜에서 망명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49] 인안리 2호 집터의 『토기호 - 삼국시대 초기의 '투룸'


토기호, 안인리 2호 집터, 강릉원주대박물관


1989년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 일대에 영동화력발전소 회(灰) 처리장이 설치될 예정이었다. 학계에선 인접한 하시동 신라 고분군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우려했다. 현장을 찾은 강릉대박물관(현 강릉원주대 박물관) 지현병 학예사가 공사 부지에서 여러 점의 토기 조각을 발견하면서 관심은 안인리 쪽으로 옮겨졌다.

강릉대·강원대·관동대 등 3개 대학 박물관이 연합팀을 구성해 조사를 시작한 것은 그해 12월 21일이었다. 강풍과 폭설 속에서 조사를 이어가던 지 학예사와 고동순 조교는 모래흙 아래에 묻혀 있던 집터 윤곽을 확인했다. 남북으로 배치된 크고 작은 집터 2기가 중복된 것처럼 보였다. 북쪽이 25.9㎡로 10.52㎡인 남쪽보다 넓었다.

둘 사이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좁은 도랑을 파기로 했다. 곧 점토를 다져 만든 작은 집터의 바닥이 드러났고 그것은 비스듬한 경사로를 따라 더 낮은 곳에 위치한 큰 집터의 바닥으로 이어졌다. 원래 2기가 아니라 하나였던 것이다. 남쪽에 작은 방, 북쪽에 큰 방을 갖춘 구조였다.

불탄 집터 안에서는 갑작스러운 화재에 살림살이를 그대로 놓아둔 채 피신한 듯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입구 쪽 작은 방에서는 숫돌과 철기가, 큰 방에서는 저장 및 취사용 토기류가 다량 출토됐다. 2호 집터에서는 서북한 지역 토기가 출토되어 눈길을 끌었다.

조사원들은 처음 발굴된 특이한 이 집터에 '여(呂)자형 주거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출입 시설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그것은 '철(凸)자형 주거지'라 부르기로 했다. 발굴은 1991년까지 이어졌고 발굴된 집터 는 40기로 늘었다. 동해안에서 처음 발굴된 철기시대 마을로 기록됐다.

이 유적 발굴을 신호탄으로 '여자형 집터'는 강원 영서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일부 지역에서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처럼 특이한 구조를 갖춘 집터에 살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학계에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됐다. 마한, 백제, 그리고 예(濊)의 주민들로 보는 견해가 중심을 이룬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 




[50]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의 『동식리 - 한 무덤에 묻힌 韓·中·日 유품


금동식리,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도르래를 설치하고 조심스레 체인을 당기자 덮개돌이 조금 들리며 컴컴한 석실 내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최 소장은 반짝이는 유물 실루엣을 확인하곤 덮개돌을 원위치에 내려놓으라고 다급하게 지시했다. 오랜 세월 고분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의 '감(感)'이었다. 그 감은 적중했다.

급격한 환경 변화로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 전문가들과 함께 조사를 이어간 것은 9월 초의 일이다. 덮개돌을 제거하고 내려다보니 석실 안은 1500년 전 무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고 바닥 전면에 유물이 쫙 깔려 있었다.

유해에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대도, 동제잔과 받침, 중국 남조에서 들여온 청자, 왜에서 만든 제의용 토기, 야장의 심벌 단야구(鍛冶具)가 포함되어 있었다. 압권은 주인공의 발에 신겼던 금동식리였다. 보존 상태가 완벽 해 육안으로도 인면조, 봉황 등 화려한 무늬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사단은 이 석실이 5세기 후반에 축조되었으며 마한 전통을 계승한 백제 지방사회의 유력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한·중·일 세 나라 유물이 한곳에서 발견된 점도 이채로울 뿐만 아니라 출토 맥락이나 보존 상태까지 완벽해 이 무덤은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의 기준 자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멱사문화학과 교수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