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사적/관아,전각

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11. 18:02

전주 객사 풍패지관 (全州 豊沛之館)- 보물제 583호 

 


전주 풍패지관 정면



전주 풍패지관 뒷면

 

전주객사(全州客舍)  - 지정번호 : 보물 제583호 - 소 재 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3가 1  

- 소 유 자 : 국유 , - 지 정 일 : 1975년 3월 31일 - 규모양식 : 본 전(정면 3칸, 측면 4칸),

동익사(정면 3칸, 측면 3칸) , 서익사(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맞배+팔작지붕 - 시 대 : 조선시대


전주객사는 조선 초에 전주부성의 개축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전주객관조에는 1471년(성종 2)에 관찰사 조근(趙瑾)이 전주사고를 건립하고 남은 자재로 동익사 보다 낮고 좁은 서익사를 개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76년 보수할 때 발견한 묵서를 통해서 1872년(고종 2)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객사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관찰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국가의 큰일이 있을 때나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의식을 통해서 임금에 대한 충성과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짐하는 곳이었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이나 외국사신의 접대처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다.


따라서 지방의 관아 가운데 객사는 가장 중요한 시설였으며 그 위치도 부성 또는 읍성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전주객사는 부성의 동문부터 서문을 연결하는 동서가로와 남문부터 동서가로에 접속되는 남북도로가 T자형으로 교차하는 부성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였다.




전주 풍패지관 주관과 서익사



풍패(豊沛)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말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유방이 고향인 지금의 강소성 패군 풍현에서 기병(起兵)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帝位)에 오르자 고향 사람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해 준 일이 있다. 그 뒤부터 제왕의 고향은 모두 풍패라고 대칭(代稱)한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자 전주 이씨의 관향(貫鄕)으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전라도 전주(全州)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풍패지향이고 조선시대 전라도의 위상을 말해주는 전국8도중 가장크고 웅장했던 전라감영의 건물중 외국사신등의 귀빈들을 위한 객사에 중국사신이 적어놓은 풍패지관이란 현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또한 전주성은 풍패지향의 성이라 하여 남대문은 풍남문(豊南門), 서대문은 패서문(沛西門), 동대문 완동문(完東門), 북대문 공북문(拱北門)으로 사대문을 명명하였으며 문루인 풍패루(豊沛樓)가 있었고 아직도 풍남문이 남아있으며 5월에는 전라북도 풍남제가 열린다.


1900년, 고종(高宗)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신(碑身)에는 ‘太組高皇帝駐畢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으며, 이는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전주 풍패지관 주관 앞쪽 툇간



전주풍패지관 주관 정면


옛날에는 주관과 양 익헌은 물론 매월당(), 청연당() 등 부속건물이 들어서고 뒤뜰에는 진남루()라는 누각이 있었으며 삼문() 형식의 정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주관과 서익헌, 1999년 말 다시 복원한 동익헌, 그리고 수직사만 보일 뿐이다.

주관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건물이다. 주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편액이다. ‘’(풍패지관)이라고 쓴 글씨가 보통 큰 게 아니어서 한 글자의 키가 1m를 넘으니, 옆으로는 칸살 하나를 다 차지하고 위로는 창방에서 서까래 끝동까지를 가득 메웠다. 담긴 뜻은 이미 풍남문에서 보았듯이 ‘풍패향 전주의 객관’이 되겠다. 편액이 이 정도니 집 또한 거기에 걸맞게 높직하고 큼지막하다.



전주풍패지관 주관 전면 편액 '풍패지관'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명칭이 왜곡돼 고유 이름인 ‘풍패지관’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에따라 '전주 객사' 대신 '풍패지관'으로 환원되었다.


전주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있었는데,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풍패지관은 조선에 온 중국 사신 주지번이 익산의 선비 송영구를 찾아가던 중 이곳에 들렀다가 쓴 글씨로 전해진다.


장대석으로 두른 외벌대 기단이 야트막하다.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이 훤칠하게 길 뿐더러 칸살 또한 아주 넓어 비록 3칸집이지만 풍패향의 객사답게 당당함을 자랑한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지르고 주심()에만 공포를 짜올렸다.


주심포집이다. 주두 위에 짜맞춘 공포는 도리 방향으로는 주심도리를 받는 첨차와 외목도리를 받는 행공첨차에 모두 소첨차와 대첨차를 겹쳐 올렸으며, 보 방향으로는 쇠서가 날카로운 살미첨차를 3단으로 두었다.


첨차 아랫부분이 모두 굴곡이 많게 초각되어 꽤나 장식적인 모습이다. 주심포 양식의 말기적인 수법으로 보인다. 정면에는 칸마다 사분합문을 달았으며, 그 위로는 흡사 홍살문처럼 살대를 촘촘히 꽂아 독특한 모양새를 보인다.


분합문은 띠살문인데, 기둥이 높다보니 문짝 또한 길쭉하여 시원스러우면서도 은근한 권위가 느껴진다.



전주 풍패지관 주관과 동익사의 전면



전주 풍패지관의 주관 툇마루와 분합문(주관과 동익사의 이음 부분에서 본 모습)



전주 풍패지관 주관 앞쪽의 툇칸과 분합문 (동익사 쪽) -문틀위에는 홍살문이 있다 



전주풍패지관의 서익사와 주관의 툇마루 (서익사쪽에서 본 모습)




전주풍패지관 주관과 서익사의  툇칸 마루 (주관에서 서익사쪽으로 본 모습)



전주풍패지관 주관의 내부



전주 풍패지관 주관의 문틀위에는 홍살문이 설치되어있다



전주풍패지관 주관의 전면 분합문



이 건물은 3동의 건물이 길게 옆으로 배치된 모습인데 가운데 본전을 두고 좌우에 익사를 배치하였다. 본전은 전패를 모시는 객사의 중심공간이며 익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원이나 외국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정면에서 보면 주관은 지붕을 높게 맞배지붕으로 구성했고 익사는 주관 보다 낮게 지붕을 구성하여 주관의 지붕이 높게 솟아 있는 모양이다. 또한 동서 익사 지붕의 양쪽 끝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여 조형적 완결성을 높혔는데 이와 같은 지붕 구성은 객사건축의 전형적 형태이다.


주관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이다. 전퇴를 구성하여 마루를 깔고 고주열에 맞추어 매 칸마다 4짝 띠살문을 달았다. 내부는 본래 통칸으로 되어 있었으나 보수하면서 뒤쪽 평주열에 맞추어 2개의 내진주를 세워 대들보 밑을 받쳐 구조적으로 보강하였다.




전주 풍패지관 주관과 동익사의 이음 부분의 추녀




전주 풍패지관 주관과 동익사의 이음 부분의 처마와 귀공포



전주 풍패지관 본전 앞쪽 처마와 서익사 귀공포



전주 풍패지관 본전 앞쪽 처마와 귀공포




가구는 1고주 9량 구조이다. 고주와 뒤쪽 평주간에 대들보를 걸고 고주와 전면 평주사이에는 퇴보가 결구된다. 고주는 직접 종보와 중도리를 받으며 한쪽은 포대공을 설치하여 고주와 함께 중종보를 받는다. 중종보 위에 4분변작으로 종보를 얹고, 가운데 화반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는 구조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포가 있는 주심포 형식이다. 외1출목 구조로서 세 개의 익공형 살미가 처마 밑을 꾸미고, 주두 밑에는 운공형 헛첨차 위에 소로를 놓아 초익공 살미를 받게 하여 짜임이 독특하다.


내부는 살미 전체를 운궁으로 처리하였고 첨차는 하단에 연속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주간은 창방 위에는 화반 하나씩을 배치하여 지붕의 하중을 분담토록 하였으나 기둥의 간격이나 건물의 규모에 비해 전체적으로 부재가 약해 보인다.



전주 풍패지관 주관(오른쪽)과 서익사(왼쪽)의 이음 부분



전주풍패지관의 서익사 대청마루 전면 (우측에서 본 모습)



전주 풍패지관 서익사 전면



전주 풍패지관의 서익사 앞쪽 툇칸마루



전주 풍패지관 서익사 툇마루에서 본 방 동쪽의 작은 대청 (윗사진의  오른쪽)



전주 풍패지관의 서익사 대청마루 천장 가구



전주 풍패지관의 서익사 대청마루 쪽에서 본 방 분합문과 천장 모습



전주 풍패지관의 서익사 뒷면 모습 (작은 마루방 - 방 - 대청마루이다)





전주 풍패지관 동익사 전면


주관 동익사의 마루와 방의 넓이가 서익사 보다 작아 보이는데 원래 건물이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던것을 최든 복원하는 과정에서 도로확장으로 한 칸이 없어져서 작게 복원되었기 떄문이라고 한다




전주 풍패지관의 동익사 방의 서쪽 작은 대청 마루




 전주 풍패지관 동익사  뒷면


서익헌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이다. 지붕은 독특하여 주관과 맞닿은 동쪽은 맞배, 반대쪽 서편은 팔작지붕이다. 두 건물을 바짝 붙여 지을 때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인 동시에 동익헌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주관과 연결된 전체가 팔작지붕의 장중한 단일건물로 인식되는 효과가 있다.


부분부분을 구성하는 수법은 대개 주관과 흡사하다. 하지만 공포의 짜임은 약간 달라서 주두 위의 첨차나 행공첨차 모두 첨차를 하나씩만 쓰고 있으며, 살미첨차 역시 2단으로 정리하여 주관보다 격을 낮추고 있다.


평면은 중앙의 3칸에 넓은 대청이 있고, 그 양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방을 배치한 다음 앞쪽으로는 전체에 툇마루를 깐 형식이다. 가운데 대청을 툇마루보다 한 단 높게 만든 것이 눈에 띈다.



전주 풍패지관의 동익사 도쪽 측면 처마와 공포



 전주 풍패지관 동익사 동쪽 측면 툇칸



동·서 익사는 현재 규모가 서로 다르다. 서익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동익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본래는 같은 모습이었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남문에서 북문을 잇는 도로 개설의 명분아래 동익사 일부가 잘려 나가면서 초석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익사의 평면을 보면 건물 전체에 전퇴를 구성하여 본전과 연속성을 주었고 서쪽 끝 칸도 퇴를 구성하였다. 본전으로부터 첫 번째 칸은 마루이고 둘째 칸에 방을 들였다. 나머지는 모두 대청마루로 꾸며 주위를 완전히 개방하였으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대청 상부 가구는 1고주 5량구조이며 방이 있는 쪽은 2고주 5량으로 처리하였다.


공포는 헛첨차 위에 두 개의 살미를 겹치고 행공첨차를 놓아 외목도리를 받게 함으로써 본전 보다 간략하게 꾸몄다. 기단도 본전 보다 한 단 낮게 구성하여 본전과 공간적 위계(位階)를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주객사의 기단은 현재 장대석 외벌대이다. 건물의 전체 규모에 비해 기단의 높이가 너무 낮게 되어 있는데 전면 도로 면에 맞추어 마당을 돋우면서 기단부가 묻혔기 때문이다.


고지도를 보면 본래 객사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외삼문에서 내삼문에 이르는 각 문들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공간의 깊이가 있었고, 객사 주위에도 맹청(盲廳), 무신사(武臣祠), 책판고, 군기고, 화약고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또한 객사 뒤에는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의 부족한 형세를 풍수적으로 비보(裨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낮은 산을 조성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주변의 땅이 사유지로 매각되거나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객사 앞에 수직사 1동만 남아있다.



수직사의 전면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풍패지관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머물렀던 장소이다



수직사(守直舍)의 뒷면 (서익랑쪽에서 본 모습)



전주객사를 관리하던 수직사(守直舍)의 동쪽에서 본 모습


서익헌의 앞쪽에 있는 수직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동쪽 2칸이 온돌방, 서쪽 1칸이 마루이며, 앞쪽의 반 칸은 툇마루를 낸 구조이다. 측면에서 보면 도리가 다섯 줄 걸린 5량가()임을 알 수 있다.


도리는 단면이 네모진 납도리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납도리를 받치는 부재로 장여만을 썼을 뿐 다른 어떠한 부재도 첨가하지 않은 이른바 민도리집이다. 박공판은 폭이 좁아 서까래를 채 가리지 못하고 있으며, 종보나 들보는 휘어지고 비틀린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필요최소한의 부재를 사용하여 집을 얽고 있음이 한눈에 드러난다. 어찌 보면 너무 궁색스럽지만 달리 생각하면 천연덕스럽다. 그래 그런지 수직사의 옆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도 마음도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완산부지도' 중 전주부성


완산부 지도를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객사 부속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전주의 옛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완산부지도에서 객사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데  현재 객사는 주관과 익헌, 수직사만 남아있어 시민들은 그냥 작은 건물로만 알고 있지만,  지도를 보시면 삼문과, 매향청, 청연당 등이 있어 지금과 다르게 객사는 꽤나 큰 규모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객사는 지방에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주관 옆으로 서익사와 동익사가 있는데 동익사는 품계에 따라 3품 이상 당상관, 서익사는 정 3품 이하 당하관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동익사의 경우 전라도 행정, 사법,군사 등 모든 실권을 가진 종 2품 전라도 관찰사의  집무장소로도 사용하였다, 주관과 달리 서익사와 동익사에는 방과 함께 마루, 온돌이 배치되어 있는것을 보면 유추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익헌의 옛날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것인데 지도에서는 주관 양옆 익헌들이 같은 구조(4칸)으로 이루어져 건물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현재 서익헌은 정면 5칸, 동익헌은 3칸으로 되어있어, 지도의 모습과 다를뿐더러 균형미가 무너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에는 전주 역사에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전주는 본향이자 왕권을 상징하던 도시였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흔적을 차츰 지우기 시작한다. 전주읍성이 무너지고, 경기전, 전라감영이 큰 상처를 입게 되었고 왕실을 상징하던 객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시 근대화라는 이유로 북문과 남문을 잇는 도로를 건설하게 되면서 동익헌과 부속건물들을 철거하게 된다.

이후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 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이었던 곳은 일제 내에서 다용도 건물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을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유흥 공간으로, 1922년 수공예 제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오다
광복 이후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써 사용되오다가 1999년 지금의 동익헌을 복원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899년 전주 객사 원경(송갑섭씨 소장)



전주객사 원경 1920년



1968년 2월에 촬영한 것으로 당시 객사를 전주시 부녀회에서 임대, 미용실과 양재점, 편물점, 학원 등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동국사에서 발견된 1907년경 촬영된 <전주부성 서문>




1930년대 전주 객사



전라북도 물산진렬관(산업장려관)으로 이용된 전주 객사 19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