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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13. 09:19

[허연의 일본문학기행②]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고도(古都)',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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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일본문학기행-가와바타 야스나리①』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6

『허연의 일본문학기행-가와바타 야스나리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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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자그마한 표지석은 그의 인생처럼 너무나 차갑고 어두웠다"



▲ 오사카에 있는 야스나리의 탄생지터.

오른쪽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이곳이 야스나리의 탄생지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탄생지는 태어날 당시 오사카시 북구 하나마치다. 지금은 상점가로 유명한 텐진바시(天神橋) 근처 미나미모리마치(南森町) 지역이다.

이곳을 가는 찾아가는 길은 별로 어렵지 않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오사카 어디에서 출발하든 일단 히가시우메다(東梅田)역을 거치는 게 좋다. 히가시우메다역은 오사카 교통의 요충지인 우메다역에서 도보로 쉽게 이동을 할 수 있다. 간사이 공항에서 들어오든 아니면 오사카 다른 지역을 거쳐 시내로 들어오든 일단 우메다를 기점으로 생각하면 된다.

야스나리 탄생지가 있는 미나미모리마치는 히가시우메다역에서 딱 한 정거장이다. 다니마치선을 타도 한 정거장이고 사카이스지선을 이용해도 마찬가지다. 근처에 JR 도자이선 등이 지나고 있어서 다른 역에서 내리는 방법도 있지만 미나미모리마치에서 찾아가는 게 가장 쉽다. 



▲ 야스나리 생가터 건너편에 있는 텐만구 신사.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시고 있어 입시철 기도처로 유명하다.



야스나리가 태어난 집은 미나미모리마치역에 내려 텐만구(天満宮) 신사 방향으로 5분 정도 이동하면 텐만구 정문 근처에 있다.

야스나리가 두 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생가터는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만큼 작고 소박하다. 집터에는 아이오이루라는 간판이 걸린 음식점이 들어서 있고 작은 정원 한쪽에 이곳이 야스나리의 탄생지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서 있을 뿐이다.

야스나리는 이곳에서 1899년 6월 14일 태어나 아버지가 사망한 1901년 그러니까 만 두살 때까지 살았다. 이후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오사카 히야시요도가와로 잠시 옮겨가 살았으나 어머니 마저 채 1년도 안 되어 사망하자 조부가 있는 이바라키시로 가서 성장하게 된다.

야스나리의 부모는 모두 결핵으로 사망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은 국가와 대륙을 막론하고 '결핵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결핵균이 만연한 시기였다. 당시 결핵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20세기 중반 범용의 결핵치료제가 유통되기 전까지 결핵은 수많은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특히 결핵은 전염성 질환이라 가족이 함께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야스나리 가문의 비극도 결핵균 전염 때문에 일어났다.

야스나리 가문은 지방의 명문가였다. 부계가문은 대대로 영주의 측근이자 토지 관리인이었고, 어머니쪽 가문도 지역의 대지주였다. 야스나리에게 이모부가 되는 요시카즈 집안은 당시 중의원 의원을 지내는 등 힘깨나 쓰는 집안이었다.

가문의 위세는 야스나리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갓난아기 시절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된 야스나리가 그나마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뼈대 있는 가문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야스나리 자신도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나는 빈곤한 학생이면서도 취미활동은 특급으로, 여행할 때 여관은 일류여야 한다는 허영심이 있었다. 촌락의 명가였던 우리 일족의 피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탄생지 터는 야스나리가 불과 두 살까지밖에 살지 않은 곳이라 관련 유적이라고 해봐야 집터와 표지석이 전부지만 사람들이 꽤나 북적대는 편이다.

오사카를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한 곳인 텐만구신사 정문 바로 앞이기 때문이다.

오사카 텐만구는 대학입시철이 되면 학부모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유명한 기도처다.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철만 되면 영험하다는 기도처를 찾아 공을 드리는 건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마찬가지다.

오사카 텐만구는 650년에 최초 건립된 아주 오래된 신사다. 지금 남아있는 본전 건물은 184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날렵한 일본 사찰 건축의 미학을 보여준다. 규모도 큰 편이라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다.

미나미모리마치는 일본에서 가장 길다는 텐진바시스지(天神橋筋) 상점가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상점가는 텐진바시 1초메에서 7초메까지 지하철 3정거장 정도인 길이 2.6㎞에 걸쳐 있다. 유명 브랜드보다는 소박한 간사이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몰려 있어서 오사카에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찾는 장소다.

탄생지 터에서 머물렀던 1시간여 나를 지배한 건 쓸쓸함이었다.

너무 뜻밖이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야스나리 생가 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표지석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신기해 하는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어서 무심했을 수도 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표지석이 작아서 미처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야스나리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사카의 6월 햇살만이 사선으로 집터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야스나리의 생가 터를 떠나며 허벅지 높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야스나리 탄생표지석에 손을 얹어 보았다. 대리석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의 생애만큼이나 어둡고 차가웠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28.조숙한 소년이 첫 번째 조사를 썼던 곳…그곳엔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 야스나리의 스승 구라자키 준이치로 영결식이 열렸던 히가시혼간지 이바라키 별관



 야스나리 탄생지에서 그가 성장기를 보낸 이바라키시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탄생지에서 미나미모리마치역으로 걸어 나와 지하철을 이용하면 된다.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코스는 미나미모리마치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거리인 히가시우메다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오사카역으로 이동해 JR 교토선을 타고 6정거장 떨어져 있는 이바라키역으로 가는 것이다. 보통열차가 아닌 쾌속을 타면 2정거장이므로 유의해야 한다. 간사이 공항에서 이바라키로 바로 갈 경우 공항 리무진 버스로 1시간20분 정도 걸린다.

이바라키 일대는 야스나리가 부모가 모두 사망한 1902년부터 1917년 진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야스나리는 이곳에서 조부모와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06년 도요카와 진죠우 고등소학교(현재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 6년제 이바라키중학교(현 오사카부립 이바라키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소년으로 성장한다.

이바라키역에 내리면 역 구내를 나오자마자 절이 하나 보인다. 이 절이 바로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이바라키 별관이다. 이 별관은 야스나리 개인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야스나리가 중학 5학년일 때 존경하던 스승인 구라자키 준이치로가 사망한다. 그때 영결식이 이곳 별관에서 열렸는데 5학년생 전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영결식이 끝난 후 야스나리는 영결식 장면을 묘사한 산문 '스승의 관을 어깨에 메고'를 학생잡지에 발표한다. 야스나리의 글이 미디어에 발표된 첫 번째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바라키중학 시절 야스나리가 여러 문학잡지에 글을 투고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등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의 글이 활자화되지는 못했다. 또 그의 초기작인 '16세의 일기'도 중학 3학년 때 초고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1925년 '문예춘추'를 통해서였으므로 '스승의 관을 어깨에 메고'가 첫 번째 활자화된 글이라고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히가시혼간지 이바라키 별관은 규모가 꽤 크다. 안으로 들어가보면 꽤 고풍스러운 본전이 있고, 넓은 마당도 있다. 마당 한쪽에 부설 유치원까지 있는 걸로 봐서 지역사회에서 이 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넓은 마당에서 100년 전쯤 야스나리의 스승 구라자키 준이치로의 영결식이 열렸을 것이다.

나는 검은 교복을 입고 있는 야스나리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죽음에 관한 글은 그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조숙한 소년에게 이미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에게 죽음은 눈앞에서 목도한 차가운 현실이었을 것이다. 소년은 죽음 앞에서 놀라지도 허둥대지도 공포에 떨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영결식장에 있던 그 어느 동급생보다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야스나리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나는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는 미학이자 문학적 자기장의 중심이었다.

나는 야스나리를 떠올리면 늘 벚꽃 생각이 났다. 죽기 직전의 모습이 이다지도 화려한 꽃이 벚꽃 말고 또 있을까. 벚꽃은 절정의 시기를 잠시 보여주고 꽃비가 내리듯 소멸을 향해 간다. 어느새 돌아보면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잎만 남는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장 빠르게 지나가는 것임을 알려주듯. 이바라키의 벚꽃도 그렇게 영혼처럼 떨어져 갔으리라.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29. 야스나리가 다닌 고등학교 담벼락엔 흡혈소년의 전설이 적혀있었다.



▲ 야스나리가 이바라키 고등학교 재학시절 자주 드나들었던 토라야세세도 서점 간판. 건물은 개축했지만 당시 간판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히가시혼간지 이바라키 별관을 나와 이바라키 고등학교 방향으로 100m 정도 걸어가면 자그마한 신사이바시 상점가 골목이 시작되는데 이곳 입구에도 야스나리와 연관된 장소가 있다.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상점가여서 눈여겨보아야 한다.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살펴보면 상점가 입구 왼쪽 건물 벽에 오래된 목조 간판 하나가 걸려 있는 게 보인다. 간판에는 '토라야세세도 서점(虎谷誠堂書店)'이라고 적혀 있다. 이 서점은 1895년에 창업해 122년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노포(老鋪)다. 이바라키 중학교에 다니던 야스나리가 훗날 유명한 논픽션 작가가 된 후배 오야 소이치와 자주 들렀던 서점이다.

개업 당시에는 2층 목조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당시 건물은 사라지고 간판만 보존하고 있다. 건물이 남아 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122년전 간판을 내다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벽에 걸어놓은 주인의 정성이 더 고마웠다.

토라야세세도 서점에서 다시 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500m쯤 골목을 걸어가면 서점이 또 하나 있다. 개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흰색 4층 건물 1층에 있는 이 서점도 야스나리가 자주 들렀던 서점이다. 서점의 이름은 호리히로아사히도다.


1874년에 창업했다고 적혀 있으니 토라야세세도보다 20년 먼저 문을 연 서점이다. 이 서점도 창업 당시 간판을 건물 외벽에 부착해 전시하고 있었다. 한자리에서 대를 이어 1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숭고해 보였다.

지금은 창업자의 후손들이 경영하고 있는 서점 내부에는 이곳이 바로 야스나리가 꿈을 키운 장소라는 것을 알려주듯 그의 저서와 평전 등 관련 서적들이 많이 진열돼 있었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았던 야스나리는 이곳에 들러 선 채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이곳 마을의 골목은 일본 소도시 뒷골목이 지닌 단아한 정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현대화의 물결에서 잠시 비켜선 듯한 민가와 상점들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나지막한 집들의 짙은 색 기와 지붕이 무척 다정하게 느껴졌다.

서점에서 나와 고개를 돌리면 야스나리 시대부터 있었다는 인쇄소, 양복점, 잡화점 등도 보인다. 작고 소박하지만 한 소년이 꿈을 키우며 성장하기에 충분한 무엇인가가 그 골목에 있었다. 야스나리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보내고, 인쇄소에 들러 등사기로 문집을 만들고, 책보따리를 등에 메고 사색에 빠진 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길을 건너 학교를 향해 걸어가다 보면 집집마다 작은 정원을 가꾸어 놓은 걸 볼 수 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는 봄날의 한 낮, 나지막한 집들과 햇살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호리히로아사히도에서 느린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드디어 야스나리가 다닌 오사카부립 이바라키 중고등학교(옛 6년제 이바라키 중학교)가 나온다.

학교 외양은 우리나라 변두리 오래된 고등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돼 보이는 운동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축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아쉽게도 학교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학교 방침에 따라 미리 공문을 보내서 허락을 받지 않은 외지인에게는 방문과 사진촬영이 허락되지 않았다. 절차를 생명보다 중시하는 일본인들 특유의 꼼꼼함이 느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학교 담장을 한 바퀴 돌면서 정문 후문 중문 등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학창 시절 몰래 빠져나와 빵을 사먹고 하던 그 철문의 모습과 똑같았다. 흡사 한국에 있는 내 모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정문 앞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

다시 학교 측에 사정해 문학비는 촬영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문학비는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에는 야스나리가 친필로 쓴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글로써 벗을 만나다'라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학교 측에서 야스나리에게 부탁해 받은 글씨를 돌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 이바리키 고등학교 후문 근처, 흡혈소년에 관한 전설이 적힌 안내판 옆에 서 있는 필자 

이바라키 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가장 강렬하게 눈길을 끈 것은 중문 근처에 있는 초라한 철제 안내판이었다. 대충 읽어 보니 이 마을에 살았다는 흡혈소년에 관한 전설이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야스나리의 이미지 속에는 '흡혈소년'의 느낌도 있는 듯했다. 문득 창백한 흡혈소년 같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0. 작문 성적 꼴찌였던 소년이 노벨상을 받기까지···그 50년 동안 무슨 일이?



▲ 중학시절 가와바타 야스나리


야스나리의 중학 시절은 일본 근대문학이 막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봉건 질서의 붕괴와 근대문물의 유입으로 일본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문학에 있어서도 근대화의 바람은 거셌다. 일본의 청소년들은 막 번역되기 시작한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스탕달, 에밀 졸라, 발자크 등을 읽으며 문학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열풍이 상당했다. 소설 '죄와 벌' '부활' 등의 영향으로 집안 좋은 대학생들이 불운한 여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서구 문학에 경도된 청춘들은 자기 나름의 소냐와 카츄샤를 찾아 연정을 불태웠다.

야스나리도 중학 졸업 이후 대학 2학년 때 이토 하쓰요라는 카페 여종업원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이 역시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열풍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야스나리는 그와 약혼까지 하지만 결국 그의 변심으로 파혼하게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야스나리의 사랑관과 여성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여튼 서구문학 붐에 영향을 받아 야스나리도 이때부터 광적인 독서에 매달린다. 경쟁심 같은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학 때 이미 문단에 등단하는 작가들도 나오기 시작했을 만큼 당시 청소년들의 문학적 수준은 매우 높았다. 야스나리와 나이가 같은 미야모토 유리코(宮本 百合子)는 중학 5학년 때 문단에 데뷔해 파란을 일으켰다. 작품의 수준이 높았던 데다가 여성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야스나리는 중학 시절 자국 작가 중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을 좋아했는데 특히 그의 시집을 많이 읽었다. 그는 전통적인 7·5조의 일본시 형식에 서구의식의 이미지즘을 결합한 시를 많이 썼는데 다루는 주제는 주로 청춘의 고뇌였다고 한다. 



▲ 야스나리가 청소년시절 탐독했던 작가 무샤노코지 사네아츠.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의 책도 많이 읽었는데 자연이나 낭만을 뛰어넘는 이지적인 그의 문학세계를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네아쓰는 한국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는데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 방문 때 그의 일화를 연설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잠깐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다. 김 대통령은 일본 국회에서 토마토와 가지가 그려져 있는 흰 접시 위에 '나는 나, 너는 너, 그러나 사이좋게'라고 사인을 했던 사네아쓰의 일화를 인용했다. 한일 양국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제안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야스나리는 다른 일본의 청소년들과 달리 당시 스타 작가였던 나쓰메 소세키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 작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때부터 이미 무용이나 희곡 영화 등 다른 예술장르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성년이 된 이후 야스나리가 신감각파라는 새로운 사조의 선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경계를 넘어선 청소년시절의 독서 경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건 중학 시절 야스나리의 작문 점수가 높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이바라키 중학 성적표에는 야스나리의 작문 성적이 전교생 88명 중 86등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두 가지 유추가 가능하다. 하나는 야스나리가 중학 시절 아직 작문에 눈을 뜨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야스나리의 성장 과정을 보면 그는 조숙하기는 했으나 표현력이 비범한 소년은 아니었다. 섬세하고 예민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능숙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당시 중학 과정의 작문 평가기준과 야스나리의 성향이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야스나리는 당시 유행과는 사뭇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야스나리는 글쓰기에 빠져 있는 골수 문학소년이라기보다는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촉을 세우고 있던 '예술지상주의자'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놀랍다. 중학교 작문 성적이 88명 중 86등이었던 학생이 50년 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5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 50년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1. 싸늘한 석조건물···흑백사진과 육필원고 사이를 오랫동안 거닐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5살때까지 살았던 조부모의 집. 건물은 신축했지만 집터는 그대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손바닥 소설(掌篇小說)'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10장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들을 쓰곤 했다. 가와바타 연구자들에 의하면 현재 남아 있는 손바닥 소설은 170여 편이다. 이 중 68편이 한국에서 출간됐는데 그중 '어머니'라는 작품이 있다. 가장이 병에 걸린 집안 이야기인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병에 걸린 남편과 아내가 대화를 나눈다.

"병하고 동반자살하고 싶지 않아. 나하고 당신 그리고 병균, 이렇게 셋이."

점점 아내를 멀리하는 남편이 이렇게 말하자 아내가 대답한다.

"멍하니 지켜보긴 싫어요. 당신의 병은 제게 옮지 않아요. 부모와 똑같은 일이 자식한테도 꼭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자 다시 남편이 말한다.

"아이 생각을 좀 해. 아이…."

어찌보면 그저 그런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대목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바로 가와바타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앞뒤 문장을 더 살펴보면 남편은 폐결핵으로 추정되는 가슴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핵은 전염되는 병이다. 남편은 가족들에게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간호하는 아내조차 멀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아내는 희망을 잃지 않고 남편을 간호하려고 한다. 말을 듣지 않는 아내에게 남편은 아이라도 살리자는 궁극의 말을 한다. 그리고 침묵이 흐른다.

한 집안을 몰살시킨 결핵균 속에서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난 아이가 바로 가와바타다. 자신의 일을 어쩌면 이렇게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지 짧은 소설 속에는 냉기가 흐른다.

이렇게 살아남은 세 살짜리 가와바타는 조부모에게 맡겨져 성장하게 된다.

가와바타가 고아가 된 세 살 때부터 이바리키 중학 3학년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 이바라키에 남아있다.

집이 있는 곳은 이바리키 인근 수쿠노쇼라는 한적한 마을이다. 가는 길은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 이바라키 중심부에서 버스를 이용해 가거나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나는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는 그곳에 가와바타 관련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가와바타가 이 지역에 살았다는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기야 택시기사가 그 집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와바타가 살았던 집을 지역민이라고 해서 알고 있을 확율은 매우 낮다. 가와바타가 그곳에 살았던 시기가 100년이라는 긴 시간 이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결국 친절한 택시기사와 나는 근처에 택시를 세워놓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야 했다. 그러다 작은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비석에는 일본식 한자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선생 구적'이라고 쓰여 있었다.

집은 예뻤다. 얼핏 봐도 상당히 넓었고 잘 가꾸어진 마당과 안채가 단아하게 들어 차 있었다. 100년 전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평온한 동네 분위기와 지방 명문가였던 가와바타 가문의 위세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와바타는 이곳에서 이바라키중학교까지 6km가 넘는 길을 매일 걸어서 통학을 했다고 한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논과 밭, 작은 시냇물을 지나 학교를 오갔을 왜소한 소년의 모습과 마을 풍경이 묘하게 겹쳐졌다. 집 내부에는 가와바타가 늘 걸터 앉아 책을 읽곤 했던 커다란 바위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가와바타의 조카뻘 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집은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아쉽지만 까치발을 하고 담장 안을 들여다보거나 철제 문 사이로 내부를 염탐할 수밖에 없었다. 


▲ 이바라키시립 야스나리 문학관. 육필원고와 사진, 학창시절 교복 망토 등이 전시되어있다

꽤 오랫동안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결국 집으로 들어가보는 걸 포기하고 찾아간 다음 행선지는 이바라키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었다. 이바라키 중학교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데 가는 길에는 두툼한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의 공식적인 명칭도 '가와바타 도리'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은 자그마한 2층 건물이었다. 이바라키 시민에게는 입장료가 무료지만 다른 지역 사람이나 외국인은 2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전시장 내부는 가와바타가 살았을 당시 집의 모형과 학창 시절 사진, 자필 원고, 초판본 책 등 400여 점의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출세작인 '이즈의 무희'와 노벨상 수상작인 '설국'의 무대가 된 장소를 보여주는 3분짜리 비디오도 상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 동안 문학관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석조 건물 내부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스산함을 느끼며 빛바랜 사진과 육필원고 사이를 오랫동안 거닐었다. 흑백사진 속 소년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2. '고도'는 천년도시 교토에 바쳐진 소설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교토(京都)를 사랑했다.

교토는 일본의 역사와 고유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보석이다. 모든 여행자들이 추앙하는 이 도시를 야스나리 역시 각별히 사랑했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도 '일본미(美)'를 논했던 야스나리에게 교토는 가장 확실한 '일본미의 증거'이기도 했다. 게다가 오사카부 이바라키 출신인 그에게 교토는 옆동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오사카 중심부에서 교토는 신칸센으로는 15분, 전철 쾌속으로는 30분이 걸린다.

1958년 당시 일본 펜클럽 회장이었던 야스나리는 교토에 대해 이런 헌사를 바친적이 있다.

"나는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이렇듯 아기자기한 애정과 우아한 미를 자랑하는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본 적이 없다. 로마의 일곱 언덕보다도 좋다."



▲ 1974년 출간된 소설 '고도' 특장판 표지

야스나리는 이 헌사를 남긴 후 '교토'에 바치는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한다. 1961년 10월부터 1962년 1월까지 107회에 걸쳐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던 소설 '고도(古都)'가 그 작품이다.

연재가 끝난 뒤 신초사(新潮社)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고도'는 교토를 배경으로 헤어져 살다 다시 만난 쌍동이 자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이라는 틀 위에 앉혀진 소설 '고도'는 흡사 교토를 보여주기 위해서 쓴 작품이라 할 만하다. 소설 곳곳에 교토의 명소와 풍물이 직접적으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 2016년에 만들어진 영화 '고도'에서 치에코 역을 연기한 배우 마츠유키 야스코


기온마쓰리, 가모마쓰리 등 지역 축제에서부터 헤이안신궁(平安神宮), 히가시야마(東山), 기타야마(北山),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이세신궁(伊勢神宮), 가모가와(鴨川) 등 교토의 명소가 거의 다 등장한다.

소설 '고도'는 일본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로 수차례 만들어지는 등 인기 있는 콘텐츠지만 한국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줄거리를 잠시 소개하면 이렇다.

주인공 치에코는 교토에서 전통 기모노용 옷감을 공급하는 뼈대 있는 포목상 가문의 외동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아가씨지만 그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가문의 친딸이 아닌 것이다. 집 앞에 버려져 있는 갓난아기를 데려다 키운 것이다.

부모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키웠고, 치에코 스스로도 부모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구석 출생에 대한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그러던 중 기온마쓰리에 간 치에코는 우연히 자신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여성 나에코를 만난다. 나에코가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나에코는 도심에서 사는 치에코와는 달리 기타야마의 스기무라라는 산골마을에서 혼자 살아가는 씩씩한 처녀다.

그날 이후 둘은 운명적인 동질성 때문에 더욱 가까워지고 둘의 인연은 점점 복잡해진다. 나에코는 언니 치에코의 소개로 히데오라는 남자를 만나 청혼을 받지만 히데오가 원래는 치에코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떠나 보낸다.

나에코의 존재를 알게 된 치에코의 부모도 나에코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나에코는 표표히 자신이 살던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으로 돌아간다.

희극이랄 것도 비극이랄 것도 없고, 박진감이나 반전과도 거리가 먼 이 건조한 소설은 한 편의 심리드라마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교토'라는 배경이 더해져 그 개성을 뽐낸다. 소설에서 교토의 명소는 흡사 건축의 '오브제'처럼 활용된다. 이런 식이다.

"기요미즈 이곳에서 넓은 교토의 석양을 바라보면 내가 정말 교토에서 태어나기는 한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치에코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뭔가 미심쩍은 생각에 빠지는 상황과 기요미즈는 사실 직접적인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 글에서 기요미즈가 빠져도 의미 전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너무나 당당하게 기요미즈는 소설의 한 부분에 들어박힌다. 이런 대목도 있다.

"따님인 치에코상이 주구지(中宮寺)나 고류지(廣隆寺)의 미륵 앞에 서면 따님이 그보다 훨씬 아름다울 것이예요."

그냥 미륵만 이야기해도 될 것을 굳이 교토에 있는 절 두 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걸 보면 야스나리가 얼마나 교토에 의한, 교토를 위한, 교토에 의한 소설을 남기고자 했는지 짐작이 간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3. 가슴이 뻥 뚫리는 나무냄새···산 아래 도시는 아득하기만 했다



▲ 영화 고도의 한 장면. 왼쪽부터 치에코와 나에코


소설 '고도'에 등장하는 교토의 명소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중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면서도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기타야마(北山)의 삼나무 숲이다. 기타야마는 긴카쿠지(金閣寺)가 위치해 있는 교토 북부 기타구에 있는 마을이다.

삼나무는 '설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설국의 삼나무가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쓰였다면, '고도'에 등장하는 삼나무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와 주제를 암시해주는 결정적 모티프다.

'고도'에서 삼나무 숲은 하나의 환상적인 공간이자 소설의 시작과 끝이다. 갓난아기 때 헤어진 쌍둥이 자매 치에코와 나에코가 태어난 곳이 바로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이다. 따라서 삼나무 숲은 두 자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다. 소설 속에서 치에코와 나에코가 서로 자매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소도 삼나무 숲이다. 소설 마지막에 나에코가 같이 살자는 치에코의 제의를 뿌리치고 돌아가는 곳도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이다.

기타야마 삼나무 숲은 이처럼 소설 곳곳에 중요한 암시를 던져준다. 소설 초반에 보면 자신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치에코가 무엇이 끌린 듯 삼나무 숲에 가고 싶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치에코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 교토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


"기타야마의 삼나무가 보고 싶어. 다카오에서 가까워. 쭉쭉 뻗은 기타야마 삼나무의 멋진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후련해지거든, 삼나무를 보러가지 않을래?"

그로부터 얼마 후 치에코는 자신이 쌍둥이였다는 출생의 비밀과, 자신의 생부가 기타야마에서 삼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중 추락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치에코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마을에 가보고 싶은 것도 아름다운 삼나무 숲을 보고 싶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혼이 불러서 그랬던 것일지도 몰라."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은 '설국'에서 에치코유자와가 그랬듯 하나의 거대한 '환상 공간'이다. 도시와는 떨어진 원초적이며 영적인 공간인 것이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장면에도 삼나무 숲이 반드시 등장한다.


치에코가 삼나무 숲에서 나에코와 함께 있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진다. 그 순간 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익숙한 나에코가 겁에 질린 치에코를 끌어안아준다. 그 장면을 야스나리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산속에 내리는 소나기는 손끝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 안아주고 있는 나에코의 온기가 치에코의 몸에 스며들어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친근하고 따뜻했다. 치에코는 잠시 행복감에 잠겨있다가 거듭해서 '나에코상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어머니 뱃속에서도 나에코상에게 이렇게 안겨 있었을까요?…'"

두 자매가 빗속에서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은 흡사 어머니 뱃속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삼나무 숲은 소설에서 두 주인공이 근원을 발견하는 장소이자 더 나아가 일본미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야스나리는 서양문명과 도시화에 무너지고 있는 일본의 정통미와 생명력를 다시 살려내고 싶어했다. 소설의 핵심 배경을 도심과 떨어진 숲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타야마는 교토 중심부에서 JR버스를 이용해서 가면 좋다. 버스를 타고 기타야마 그린가든 앞에서 내리면 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긴카쿠지에서부터 교토의 거리와 숲을 즐기면서 걸어가는 것도 좋다. 인공적으로 조림한 국가 산림공원이라 성인 300엔 정도의 입장료가 있다.

입구를 지나 걸어 올라가면 진경이 펼쳐진다. 13세기부터 일본 귀족들이 정원수를 만들기 위해 조성된 삼나무 숲은 너무나 정갈하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수십만 그루의 삼나무 군락은 신비스러울 정도다. 인공적으로 조림을 해서 삼나무들의 크기가 거의 균일한 것이 오히려 신령스러움을 더한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이 얹혀 있는 모양새가 사람 같기도 하고 무슨 기념 조형물 같기도 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나무 냄새에 취하면 산 아래 도시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소설 '고도'는 한국에서 인기가 없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너무나 일본적이다. 야스나리가 작심하고 일본미에 바치는 기획소설을 쓴 것 같다. 그래도 이 소설은 실패하진 않았다. 읽는 내내 교토에 가고 싶어지니 말이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4. "흐르는 눈물도 붉은 색" ... '이즈의 무희'엔 절대미가있었다



▲ 1974년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한 영화 '이즈의 무희' 포스터


소나기 지나간 고개의 찻집에
맑은 동반자 여행의 하늘
귀여운 무희 북을 들고
걸어 가는 길에 흰 꽃

오늘 잠자리는 온천의 여관인가?
하얀 욕조에 물드는 살갗
귀여운 무희 연회석에 둘러싸여
샤미센과 북, 미닫이 창문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리지만
검은 머리 엷은 화장
귀여운 무희가 고개를 갸웃
웃는 눈언저리의 부끄러움

배가 떠나가는 시모다의 바닷가를
또 만날 날은 올까
귀여운 무희 가볍게 흔드는 손가락에
흘리는 눈물도 붉은색
- 영화 <이즈의 무희> 주제가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라는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가 있다. 나는 그녀를 흐릿한 인터넷 화면에서 처음 봤다. 그녀가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은 은퇴 선언 직후 부도칸에서 가진 1980년 마지막 공연 장면이었다. 최전성기를 누리던 21살짜리 대형 가수의 은퇴 선언에 일본은 떠들썩했다.

그녀의 은퇴 공연은 눈물바다였다. 공연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함께 출연한 동료 가수들도 공연 내내 눈물을 닦았다. 그만큼 그녀의 은퇴는 당시 일본 대중문화계에 엄청난 상실감을 안겨줬다.

마지막 공연 장면을 보던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21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녀의 처연한 눈빛이었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어떤 초월자의 눈빛 같았다. 그녀는 그런 눈빛으로 '안녕의 저편'(さよならの向う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맺으며 "제멋대로인 절 용서하세요. 행복하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무대를 영영 떠났다. 그가 은퇴를 선언한 건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미우라 도모카즈와의 결혼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14살의 나이에 연예인 발굴 프로그램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그야말로 대형신인이었다. 우수어린 한을 담은 허스키 목소리, 나쁜 소년 같은 중성적 매력, 화려하면서도 슬픈 외모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일본 대중문화 유입을 제한한 한국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도였지만 중국이나 대만, 홍콩에서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매염방이나 장국영은 그녀의 광팬이었고, 그녀의 노래를 여러 곡 번안해서 불렀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나를 더 극적으로 환기시킨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가 한국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일본열도를 뒤흔든 1세대 대형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그랬듯 2세대 여왕이었던 그녀도 한국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모모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가정에 불성실한 한국계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소녀가장이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아 그랬구나! 이제 그녀의 눈빛이 이해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내던지고 완벽한 가정을 꾸리는데 집착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가수뿐만이 아니라 영화배우로도 크게 성공한다. 그녀의 출세작이 바로 1974년 니시카와 가츠미(西河克己) 감독이 연출한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가오루 역을 열연한 그녀는 스크린 스타 반열에까지 오른다. 훗날 남편이 된 기무라 도모카즈와는 이 영화에서 함께 주연을 맡으며 교제를 시작했다.

영화에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르는 주제가가 흐른다. 앞부분에 가사를 소개한 바로 그 노래다. 노래는 야마구치의 독특한 허스키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하이쿠의 미학을 연상케 하는 가사도 좋았다.

"시모다의 바닷가를 또 만날 날은 올까 /

귀여운 무희 가볍게 흔드는 손가락에 /

 흘리는 눈물도 붉은색"

이라는 대목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음색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듯한 어떤 절대미가 느껴졌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출세작인 '이즈의 무희'는 '설국'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는 소설이다. 야마구치 모모에 이야기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설국'에서는 늘 첫 문장이 화제가 됐지만, '이즈의 무희'에서는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배에는 생선과 바다의 냄새가 물씬거렸다. 어둠 속에서 소년의 체온이 느껴지며 나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머리가 온통 맑은 물로 변했고, 물이 주르르 흐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듯 달콤한 쾌감이었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5. 대학생이 된 야스나리 이즈반도로 여행을 떠나다



▲ 단행본 이즈의 무희 표지

'이즈의 무희'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한글 번역본 기준으로 단행본 40쪽 정도에 불과한 단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소설은 야스나리의 대표작으로 꾸준히 거론된다.

그 이유는 초기작인 이 작품이 이후 펼쳐질 야스나리 문학세계의 예고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의 무희'는 야스나리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물론 1920년 '초혼제 일경(一景)'으로 등단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문명을 문단 안팎에 각인시킨 계기가 된 건 '이즈의 무희'가 주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즈의 무희'는 1926년 '문예시대'에 처음 발표되었고 1927년 금성당에서 간행된 단편집에 수록되었다. 발표는 1926년이었지만 야스나리가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그로부터 6, 7년전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야스나리가 1919년 교우회 잡지에 이즈반도를 여행한 글을 실었고, 1922년에는 '유가시마의 추억'이라는 또 다른 글을 통해 '무희'의 존재를 다시 언급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봤을 때 야스나리는 1919년 무렵부터 이 소설 구상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야스나리가 이즈반도를 처음 여행한 것은 그가 스무 살인 1918년이었다. 당시 야스나리는 구제(舊制) 제일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무렵 야스나리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당시 일본의 학제를 알아야 한다.

구제고등학교는 우리가 연상하는 일반 고등학교가 아니다. 명칭만 고등학교일 뿐 실제로는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구제도하의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구제고등학교는 당시 일본 전역에 39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학교는 각 지역에 설치된 국립대학의 교양과정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야스나리가 다닌 제일고등학교는 도쿄제국대학의 예과였다. 제이고등학교는 도호쿠제국대학, 제삼고등학교는 교토제국대학의 예과였다. 그러니까 구제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건 동경제국대학 재학생이 됐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야스나리가 구제고등학교 입학 전 졸업한 이바라키고등학교의 당시 명칭은 이바라키중학교였다. 당시 중학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쳐놓은 6년제였다. 그러니까 당시 학제는 '초등학교-중학교(6년제)-구제고등학교(대학 교양과정)-대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일본이 1950년 지금의 '6(초등)-3(중등)-3(고등)-4(대학)'식 교육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사라졌다.

일본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도 비슷한 변천과정을 거쳤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도 예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지금은 일본과 같은 '6334' 학제를 쓰고 있다.

일본의 현재 학제와 과거 학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한국에 돌아다니는 야스나리 학창 시절 기록을 보면 이바라키고등학교(6년제 중학)와 제일고등학교(대학 예비학교)를 혼동하거나 아예 구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시대 구분을 할 때 제일고등학교 입학 시절부터를 야스나리의 성인시절이라고 보면 된다.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야스나리는 대학생이 됐고, 도쿄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17년 오사카 이바라키중학을 졸업한 야스나리는 도쿄로 올라와 사촌집에 기숙하면서 제일고등학교를 다닌다. 매우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본인들이 우러러보는 엘리트 코스인 도쿄제국대학 입학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학업부담은 본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신분은 확실하지만 의무는 그에 미치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 시간을 활용해 야스나리는 이즈(伊豆)반도로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의 기록이 곧 소설 '이즈의 무희'라고 보면 된다. 워낙 짧은 소설인 데다 눈에 띄는 갈등구조를 만들지 않는 야스나리 작법의 특성상 외형적인 줄거리는 밋밋하다.

스무 살의 주인공 '나'는 이즈반도로 여행을 떠난다. 고아 기질 때문에 뒤틀린 성격을 고치고, 태생적인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떠난 여행이었다. 이 여행에서 나는 우연히 유랑극단 일행을 만나 동행을 하게 된다.

가족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극단에는 14살짜리 무희 가오루(薫)가 있었다. 나는 가오루를 지켜보면서 내 자신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이 소녀가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소녀의 티 없이 맑은 성정을 느끼면서 나의 의심과 우울감도 사라진다.

순간 순간 가오루가 보여주는 나에 대한 작은 관심은 내 일그러진 성격을 밝게 만들어주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가오루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네"라고 나를 평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둘 사이의 애틋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내가 도쿄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행이 시모다 항구에 도착한 날 나는 도쿄행 배에 오른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면서 서 있고 나는 선실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이런 줄거리 때문에 혹자들은 '이즈의 무희'를 '일본판 소나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직 연정이나 욕망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설렘'으로 그려내는 부분은 두 작품이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소나기'는 죽어서 이별을 하고, '이즈의 무희'는 살아서 이별을 한다는 것이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6. 이즈반도의 14살 춤추는 소녀···그녀가 '나'를 치유했다



▲ '이즈의 무희'는 영화로만 6편이 만들어졌다. 1963년 서하 카츠미 감독이 만든 영화의 한 장면

 


'이즈의 무희'는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의미를 더하는 상징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나'와 유랑가무단 소속의 타비게닌(旅芸人) 5명이다. 가무단원 5명은 리더인 어머니와 큰딸인 치요코, 치요코의 남편인 에이키치, 작은딸인 14살짜리 카오루, 그리고 구성원 중 유일하게 가족관계가 아닌 17살 유리코다.

소설은 '나'와 유랑가무단이 아마기 고개에서 우연히 만난 후 동행하는 이야기인데,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여행 중 나와 카오루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이다. 두 주인공이 미성숙한 호감과 연정 같은 걸 느껴가는 과정은 소설의 중심 이미지를 구성한다.

주인공 '나'는 아마기의 찻집에서 카오루를 처음 봤을때 그녀에 대해 불순한 마음을 갖는다. 그녀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최하층 천민인 타비게닌에 속한 여인을 윤락 여성처럼 대하는 당시 일본 사회의 그릇된 인식도 한몫했다.

불순한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묘한 연정으로 변해간다. 가무단이 공연하는 소리를 자신의 숙소에서 들으며 나는 카오루가 더럽혀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얼마 후 온천욕을 하던 카오루가 자신을 발견하고 알몸으로 뛰어나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순수한 아이였음을 깨닫는다. 카오루에 대한 생각이 성적인 욕망에서 순수한 감정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 부분을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린다.

"어두컴컴한 욕실 안쪽에서 갑자기 발가벗은 여자가 달려 나오는가 싶더니, 탈의장 끄트머리에서 냇가로 뛰어내릴 듯한 모습으로 서서는 양손을 번쩍 들고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수건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게 무희였다. 어린 오동나무처럼 보기 좋게 쭉 뻗은 하얀 나체를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깊은 숨을 내쉬고 나서 킥킥 웃었다. 어린애였다."

카오루를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처녀로 생각하고 욕망으로 들끓던 나는 이 장면 이후 달라진다. 속세의 사랑이 정신적 사랑으로 옮겨갔으며 순수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유랑가무단과의 동행을 받아들이게 된다.

흥미로운 건 '나'에 대한 14살짜리 카오루의 생각인데, 그녀 역시 마음이 흔들린 것으로 묘사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분명 그녀도 마음속에 설렘 같은 게 자리를 잡고 있다. 카오루가 차(茶)를 엎지르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을 보자.

"무희가 아래층에서 차를 날라 왔다. 내 앞에 앉더니, 새빨개지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이 떨려서 잔이 차 받침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급하게 다다미에 내려놓는 바람에 차를 엎지르고 말았다. 너무나 심하게 수줍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소설에서 주인공과 카오루가 분홍빛 밀당을 주고받기 시작한 순간을 야스나리는 찻잔을 엎지르는 것으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조금 더 소설이 진행되면서 묘사는 조금 더 진해진다. 나와 카오루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다.

"처음엔 멀찌감치 앉아서 손을 길게 뻗어 돌을 놓더니 점점 자신도 모르게 바둑판 위로 몸을 기울여 왔다. 아름다운 머리칼이 내 가슴을 스칠 정도가 됐다. 그 순간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실례하겠어요. 야단맞으니까요"하면서 돌을 내던지고는 뛰쳐나갔다. 공동탕 앞에 어머니가 서 있었던 것이다."

순수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설렘으로 다가오는 카오루를 보면서 '나'는 세속의 고민과 불안에서 벗어나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가지고 있었던 뒤틀린 고아의식과 우울함이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치유의 느낌은 카오루가 타인에게 자신을 평하는 말을 엿듣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은 좋아."

주인공은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보편적인 의미로 좋은 사람임을 카오루의 말을 통해 신내림 받듯 깨닫는다. 카오루는 자신의 서툰 애정 표현으로 한 남자의 영혼을 구제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소설은 불현듯 마을 어귀에 있는 푯말을 보여준다.


푯말에는 '거지와 유랑가무단은 마을에 들어오지 말 것'이라고 써 있다. 왜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영혼이 치유되는 순간 이 푯말이 등장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차별받는 대상들과 함께 마음을 열고 길을 걷는 '좋은 사람'으로서의 주인공 모습을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소설 전체에 가득한 상징들을 간과하면 이 소설은 그 빛을 잃는다. 야스나리의 소설이 모두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작은 상징적 사건들을 거치며 종교적인 정화의식을 치르듯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7. 상처를 씻어준다는 여신의 땅 이즈반도


 이즈반도는 혼슈 남동부 시즈오카(靜岡)현에 있는 남북 길이 50㎞ 정도의 반도다. 온난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데다 바다가 접해 있어서 '물'에 관한 전설이 많은 곳이다.

한국에서 이즈반도로 가는 길은 그다지 간단치는 않다. 더구나 반도의 주요 지역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소설 '이즈의 무희'에 나오는 장소들을 꼼꼼히 훑어보려면 상당히 복잡한 루트를 설정해야 한다.

일단 이즈반도로 가는 방법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도쿄를 기점으로 설명한다 해도 비용과 시간, 목적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코스가 가능하다.

루트는 반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아타미(熱海)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가면서 슈젠지, 유가시마, 아마기터널, 시모다(下田)항 등을 들르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반대로 반도의 끝이자 소설 마지막 배경인 시모다항으로 먼저 간 다음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경로도 있다.

우선 가장 저렴하게 가는 방법은 전철 JR도카이도선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도쿄역을 비롯해 신바시 시나가와 등에서 이즈반도 입구인 아타미까지 가면 된다. 아타미에서는 목적지별로 이즈급행선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해 이동하면 된다. 도쿄시내에서 아타미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아타미에서 시모다항까지 전철로 1시간40분 정도 걸린다.

또 하나는 JR특급 오도리코( 踊子)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즈의 무희' 여행지를 상품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열차인데 보통열차와는 달리 시모다항까지 곧바로 간다. 시모다항에서 거꾸로 올라오는 경로를 선택할 때 좋다. 이 밖에 신칸센을 이용해서 아타미까지 가는 길도 있다. 시간이 가장 절약된다.

각 장소에 갈 때마다 전철이나 버스를 계속 갈아타는 것이 귀찮은 사람들에게는 렌터카를 이용하는 방법도 권하고 싶다. 이 방법은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밀도 있게 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 운전석이 한국과 달리 오른쪽에 있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이것만 적응이 된다면 이즈반도를 가장 상세하게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일본은 도로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비교적 길 찾기가 쉽다. 더구나 툭 튀어나온 반도여서 길을 잘못 든다 해도 결국 반도 안에 있을 테니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우려는 별로 없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야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쫓아왔다."

소설의 첫 장면에 나오는 아마기터널은 아마기산(天城山)에 있다. 해발 830미터의 아마기 고개를 관통하는 터널이 건설된 것이 1905년이었다. 전 공정을 거의 사람 손으로 뚫었다는 길이 445미터의 아마기터널은 당시로서는 일본 최장 터널이었다. 일본 최초로 중요문화재에 지정된 터널이기도 하다.


더 아래쪽에 신(新) 아마기터널이 새로 뚫렸지만 여전히 옛 아마기터널로 사람과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다. 뚫린 지 110년이 넘은 으스스한 옛 터널을 지나면 이즈반도의 남쪽 가와즈 방향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소설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컴컴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남이즈로 나가는 출구가 앞쪽에 조그맣게 뚫려 있었다."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파가 운영하는 찻집은 지금 없다. 하지만 나머지 풍광은 110여 년 전 야스나리가 지나쳤을 때 모습 그대로 여행객을 맞는다. 


▲ 이즈반도 카와즈 시치다키 폭포 앞에 있는 '이즈의 무희' 주인공들의 동상


터널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7개의 폭포가 연이어 있는 가와즈 시치타키가 시작된다. 이 중 4번째 폭포인 쇼케이(初景) 앞에는 두 주인공의 동상이 서 있다. 이즈반도 곳곳에 '이즈의 무희' 관련 동상이 있지만 여기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폭포를 배경으로 가오루가 새침하게 앉아 있고 그 모습을 남자 주인공이 잔잔하게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야스나리는 왜 치유의 여행지로 이즈반도를 선택했던 것일까. 고아의식과 뒤틀린 심사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곳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즈 여행길에 오른 걸까. 아마 야스나리는 이즈반도의 기운과 지세를 선택한 것 같다.

이즈반도는 시즈오카현에 있다. 시즈오카는 고요한(靜) 산등성이(岡)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소비되는 녹차의 절반을 생산할 정도로 온화한 기후와 풍광이 야스나리를 매혹시켰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이즈반도라는 땅이 지닌 기운 때문이다. 이즈반도는 일본 고대역사서 고지키(古事記)에 이즈노메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즈노메는 화를 씻어주는 여신을 의미한다. 이즈노메는 일본 고서에서 신성함과 청정함으로 부정한 것을 씻어주는 여신으로 종종 등장한다. 따라서 이즈반도는 대대로 속죄와 정화(淨化)의 땅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제서야 의문이 풀린다. 야스나리는 정화의식을 치르러 이즈를 찾아갔던 것이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8. 수국이 가득 핀 시모다항···앳된 무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이즈의 무희' 등장인물들이 묵었던 료칸

 이즈반도의 남북을 종단하는 가노강 중간지점에 있는 유가시마(湯ヶ島溫泉) 온천은 오래전부터 도쿄 사람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였다. 도쿄에서 가까우면서도 강과 산과 온천이 함께 있고, 기후까지 온화했기 때문이다.

유가시마의 숲속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무대였으며, 그가 체류하면서 소설을 썼던 여관 유모토칸이 있다. 지금은 여관 정식 명칭이 '가와바타노야도 유모토칸'(川端の 宿 湯本館)이다. 마케팅을 위해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실제로 이 여관과 야스나리의 인연은 상당히 깊다. 야스나리는 처음 이즈반도를 여행했던 1918년 이후 '이즈의 무희'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거의 매년 이곳에 들렀다고 한다.

여관은 에치고유자와의 다카한과는 달리 거의 완벽하게 100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다카한이 화재 때문에 재건축을 하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반면 유모토칸은 그때 건물이 그대로 있다. 주변 풍광도 달라진 게 없어서 아주 생생하게 소설의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여관 운영도 당시 주인의 손자가 3대째 경영을 하고 있다. 운만 좋으면 사장이 직접 설명해주는 유모토칸과 야스나리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유모토칸 내부. 소설에서 주인공이 춤추는 무희를 내려다봤던 계단이 보인다


야스나리의 방은 2층에 있는데 겨우 3평이나 될까 싶은 작은 다다미 방이다. 현재 이 방은 손님들에게 개방하지는 않고 기념관으로만 쓰고 있다.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야스나리의 사진과 그동안 제작된 다양한 '이즈의 무희' 영화 스틸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아아. 무희는 아직 술자리에 앉아 북을 치고 있군. 북이 그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빗소리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중략) 덧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또 탕에 들어갔다. 탕을 거칠게 휘저었다. 비가 그친 뒤 달이 나왔다. 비에 씻긴 가을밤이 청명하게 밝아졌다. 맨발로 욕조를 빠져나왔지만 뾰족한 수도 없었다. 2시가 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질투로 잠을 못 이루던 그날 밤의 모든 것도 그대로 있었다. 욕조와 덧문, 그리고 물소리까지.

료칸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주말이었는데도 대부분의 방이 비어 있었다. 애써 이곳까지 온 사람들도 사진만 찍고 바삐 돌아간 듯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가노강의 물소리는 더욱 커졌다. 구불구불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는 오래 들으면 들을수록 북소리와 닮아 있었다.

이즈의 무희를 따라가는 여행의 대미는 역시 시모다항이다.

칠월에 찾아간 시모다는 수국이 만발해 있었다. 에도시대부터 도쿄를 드나드는 배들이 들렀다 가는 기항지로 이름을 날린 곳이었지만 아담하고 소박했다. 이곳 어디선가 앳된 무희와 주인공이 이별을 했다는 생각을 하니 소설 속 문장이 활동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배 타는 곳으로 가까이 가자 바닷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무희의 모습이 가슴으로 덮쳐왔다. 곁으로 갈 때까지 그녀는 꼼짝 않고 있었다.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어젯밤에 한 화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더욱더 나를 감정적으로 흐르게 했다."

스무 살의 야스나리는 시모다항을 떠날 때는 아마 어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고아의식과 외로움, 인간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걸 버려두고 배에 올랐을 것이다. 이즈의 정갈한 기운으로 정화된 그는 소녀가 전해준 순정한 영혼을 가슴에 안고 뱃전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주인공이 인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묘사한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타인들을 왜곡된 눈으로 보아왔던 주인공에게 대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정화된 '나'는 불쌍한 노파와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낯선 사람들의 부탁에 기꺼이 응하고, 김초밥을 나누어주는 처음 보는 소년의 호의도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인물이 되어 도쿄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다 녹아들어 받아들여졌다"는 소설의 구절은 시모다항을 떠날 때 정화의 순간이 그를 찾아왔음을 말해준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39. 야스나리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토 하쓰요'



▲ 가와바타 야스나리(왼쪽)와 약혼까지 했었던 이토 하츠요


2014년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루지 못한 아픈 사랑이 담긴 편지가 발견됐다는 보도를 쏟아낸다.

무슨 편지였을까. 일본 언론들이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고 지칭한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발견된 편지는 애석하게도 부치지 못한 상태였다. 편지의 수신인은 이토 하쓰요(伊藤初代).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약혼까지 했다가 파혼한 바로 그 여인이다.

편지는 아마도 파혼 통보를 받은 직후 쓴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내용은 애절했다.

"병이 난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밤에도 잠을 잘 수 없다. 울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쓰인다" 등 노심초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걸로 봐서 당시 그는 연락을 끊고 사라진 이토 하쓰요 때문에 커다란 심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함께 발견된 이토 하쓰요가 보내온 편지에는 "왜 파혼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쓰여 있었다. 그 편지를 받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토록 간절한 답장을 썼던 것이다. 결국 부치지도 못한 답장을….

그가 이토 하쓰요를 처음 만난 건 스무 살 무렵인 1919년이었다. 그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주 드나들던 도쿄에 있는 카페의 여직원이었다. 당시 14살이었던 그녀는 부모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일찍 부모를 잃은 동병상련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열었고 이내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러던 중 카페가 문을 닫게 되고 이토 하쓰요는 카페 마담과 함께 기후(岐阜)현으로 내려가 있게 된다. 떨어져 있기 힘들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성급하게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인다. 1921년의 일이다.

하지만 달콤한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토 하쓰요가 파혼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편지를 보내고 잠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은 그는 기후로 달려갔지만 이미 그녀는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녀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토 하쓰요와의 파혼 사건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큰 상처로 남는다. 그는 죽기 1년 전인 71세 때 출간된 전집에서 이때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밝혔다.

"이유도 모른 채, 허무하게 이별한 것이 커다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

웬만해서는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성격인 그가 50년 전 일에 대해 이 정도 고백을 한 것으로 봐서 파혼 사건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짐작이 된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이즈의 무희' 주인공인 가오루가 바로 이토 하쓰요의 분신일지도 모른다고 입을 모은다. 처음 만났을 때 둘의 나이가 모두 14살이었다는 공통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토 하쓰요에게서 처음 느꼈던 감정이 소설 속에서 가오루를 향한 감정으로 치환된 것 같다는 이야기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이토 하쓰요와 소설 속 가오루 둘 다 계급을 넘어선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제국대학의 예과생이었고, 부모님이 일찍 사망하기는 했지만 오사카 지방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하지만 이토 하쓰요는 평민 출신의 가난한 카페 여급에 불과했다. 신분제라는 구습의 그늘이 남아 있던 20세기 초반 일본 사회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짝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가오루 역시 계급을 뛰어넘은 연정이다. 유랑극단에 속한 사람들, 즉 다비게닌(旅芸人)은 최하층 천민집단이었다. 다비게닌은 무사 귀족 승려 아래 계급인 사농공상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불가촉 하층민이었다.

소설에서 도쿄대생인 주인공은 신분을 뛰어넘어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로 인해 자신이 성숙한 인간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토 하쓰요의 그림자가 소설에 남아 있다고 보는 이유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0. 유학생 백석이 찾아갔던 이즈반도에는 금귤이 익어가고 있었다



▲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평양 영생고보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1937년 무렵의 백석


저녁밥때 비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했슥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아 아즈내인데 병인은 미역냄새 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 같이 눟었다
-<가키사키(枾崎)의 바다> 전문


누구의 시일까? 지금은 쓰지 않는 표기법들이 눈에 띄는 걸로 봐서 꽤 오래전에 쓰여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평안도 사투리도 여기저기 보인다. 그리고, 가키사키는 어디일까?

이 시는 한국의 시인 백석이 1930년대에 쓴 시다. 가키사키는 이즈반도 남쪽에 있는 어촌마을이다. 시모다항 바로 옆이다.

그렇다. 백석은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시를 남긴 것이다.

1930년 백석은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등단을 한다. 이것을 계기로 동향 출신의 조선일보 경영자였던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백석은 1930년 4월부터 1934년 3월까지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를 다니게 된다.

위 시는 백석이 일본 유학 시절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돌아와 쓴 작품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백석의 글 중에 이즈반도를 소재로 쓴 것은 시 2편과 산문 1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록만 가지고는 백석이 언제 무슨 이유로 이즈반도를 여행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기가 힘들다.

그가 남긴 3편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앞서 인용한 시 '가키사키의 바다'는 백석이 배편을 이용해 이즈반도로 향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쿄에서 이즈반도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기차편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선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백석이 남긴 글에 이타미나 슈젠지 등 기차를 타고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이즈반도의 다른 지역 이름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백석은 남이즈의 해안가만을 둘러봤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당시 기선을 이용한 여행은 기차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세련된 여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신문물의 상징인 대형 기선을 타고 따뜻한 남국의 바닷가를 여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인기 있는 여행 코스였다.

시모다에서 조금 떨어진 가키사키 해변은 관광지가 아니다. 시모다에 도착한 백석은 일부러 작은 포구 마을에 며칠 묵었을 것이다. 왜 그곳에 묵었을까. 그곳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삶이 있는 곳이었다.


시에서 드러나듯 백석은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포구와 가까운 방에 묵는다. 죽창에 고기를 꿰어서 말리는 집, 그 작은 집에서 백석은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을 만난다. 백석다운 선택이다.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남긴 또 다른 시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에도 많은 단서가 남아 있다.

녯적본의 휘장마차에
어느메 촌중의 새새악시와도 함께 타고
머ㄴ바다가의 거리로 간다는데
금귤이 눌 한마을마을을 지나가며
싱싱한 금귤을 먹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 전문


이 시의 제목에는 일단 분명하게 '이즈(伊豆)'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즈반도의 해안길을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마차 안에서 백석은 금귤을 먹는다. 금귤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과일이다. 일본의 남쪽 해안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과일이다. 이즈반도의 금귤은 겨울이 제철이다. 따라서 백석이 이즈반도를 여행한 계절이 겨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백석은 왜 이즈반도로 여행을 갔을까. 짐작에 불과하지만 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를 읽었을 것이다. 1926년 발표된 '이즈의 무희'는 1920~1930년대 일본에서 선풍적으로 읽히는 인기 소설이었다. 아오야마학원 학적부에 취미가 독서라고 적혀 있는 백석이 '이즈의 무희'를 읽지 않았을 리는 없다.

따듯한 남녘의 유혹과 새롭게 등장한 기선여행의 낭만, 그리고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이런 것들이 유학생 백석의 발길을 이즈반도로 이끌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