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 발표자료

김연선 2009. 9. 6. 17:22

      


호텔경영학 원론                      주별 강의안(1-15주)   

Hotel Business Administration




(제1주 강의)

 

       제1장 호텔의 역사  


   제1절  숙박시설의 기원


    1. 호텔산업의 역사 및 발전사


   숙박업은 인류가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이동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로 인간이 정착지를 정하기까지의 이동행위는 원시적인 형태로서 주로 생활필수 물자획득이라고 하는 생명의 보존 및 종족유지를 위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농경사회와 더불어 정착(定着)이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이 시작되었고, 부족한 생활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물물교환이라는 상거래형태가 개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행이라고 하는 생활양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었다. 여행과정에서 숙박시설이 등장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동․서양의 고대문헌에서도 엿볼 수 있는 데 동양에서는 중국고전인 『주역』에서 관광(觀光)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서양에서는 『성서』와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에서도 기록이 남아있다.



   숙박시설의 역사는 인간의 이동 및 사회활동과 같이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기원전의 숙박시설로는 고개의 이집트나 그리이스 시대에 이미 상인들을 위한 캐러번(caravan)이 있었고,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캐러번서리(caravanserrai)가 발생하여 숙박행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여행 및 관광의 왕래현상은 교통의 발달과 소득의 증가, 그리고 여가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추진되었고, 그 결과로서 숙박시설의 등장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현대관광은 일찍이 역사 속에서 그 특징이 형성되어서 오늘의 인류는 여행하면서(travelling) 자고(lodging), 먹고(eating), 즐긴다(entertaining)는 총체적인 관광의 개념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특히, 여행 중에 쉬고 머문다는 것은 여행기간을 연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관광현상을 확대시키는 결과로 발정하게 되었다.

2.  고대의 관광 및 숙박산업


  1) 이집트시대


   일찍이 성경에서도 시바의 여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왕을 배알하려고 여행을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고,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도 킬로이(kiloys)라는 글씨와 그림이 함께 새겨져 있는 여행의 기록을 바위나 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투스(herodotus)도 이집트인들의 관광현상에 대하여 기술한 바가 있어, 그를 고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여행자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일찍이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중심으로 관리들에 의한 여행이 성행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단지 중앙정부와 지방간의 통신을 위한 여행으로 제국의 성장과정에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여행증가는 점차 호스피탈리티센터(hospitality center)라는 호텔의 개념과 같은 숙박시설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현재의 그리이스 영토인 크레테(crete) 섬에는 BC 1500년경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호스텔(hostel)   이 남겨 보존되고 있다. 이 호스텔은 크놋서스(cnossus)의 궁전으로 가는 해변 길가에 위치한 우아한 유물로서, 몇 개의 객실(rooms)과 주방 그리고 식당이 갖추어진 숙박시설도 있어, 당시 여행의 형태와 숙박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있는 역사적인 것이다.


   이집트에 있어서 또 한가지는 대사원과 피라미드(pyramids) 등의 유물들은 오늘날의 관광객에게 호기심과 역사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크나큰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대 이집트의 여행은 무역과 같은 상용여행, 관용여행과 종교적인 행사로 여행이 성행하면서 숙박시설의 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 BC 1100년경에도 페니시아(phoenicia)인들이나 페르시아(persia)인들은 그리이스와 로마 등과 같이 이웃나라들과 통상무역을 행하면서 지중해연안의 왕래가 빈번하여 상업상의 여행과 종교상의 여행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여행의 증가는 도시형성의 요인이 되기도 했고, 도로건설과 더불어 도로주변에는 민간의 숙박업도 성행하여 일반인들의 여행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2) 그리이스시대


   근동(近東)에서 그리이스와 로마로 서양문명이 유입되면서 관광이 새로운 양상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그리이스인들은 올림포스(olympus)산 위에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제우스(zeus)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추앙하는 종교적 활동으로 여행의 왕래가 많았고, 기원전 776년 이후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경기대회에는 객지로부터 수많은 여행자들을 불러들여 관광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가져다주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이스는 무엇보다도 근동지역과 아프리카 일부와 해상무역이 성행하여 에게해(sea of aegean) 주변과 특히, 델로스(delos)섬을 중심으로 상용목적의 여행객들이 많이 집중되고, 또한 도시간에도 관광루트가 잘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 그리이스에서 여행을 촉진하게 된 동기는 무역의 번창은 물론, 그리이스어가 일반공용어로서 사용됨에 따라 지중해 연안의 관광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 시대의 관광이 새로운 차원의 전기를 제공하였고 그리이스에서는 상용여행, 관용여행 및 종교여행이 역시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델포이(delphoi)에 있는 아폴로 신전과 아테네의 제우스나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의 신전이 유명하여 여행객들을 많이 유치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주민들은 여행자를 모두 제우스신으로부터 보호받는 "신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후대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와 같은 보호의 정신이 "호스피탈리타스(hospitalitas)"로서 여행자를 접대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이스 도시국가가 발달되면서 특히 위락관광으로서 무대 쇼(floor shows)와 무녀, 그리고 도박(gambling)이 성행하였고, 또한 시민들의 해외여행과 관용업무여행에 도움을 주는 "프록스모스(proxemos)제도" 즉 오늘날의 tour guide와 consultant 같은 여행안내와 상담자의 역할이 등장하게 되었다.


  3) 로마시대


   일찍이 관광역사의 정점은 로마제정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시대의 군사 및 정부조직은 제국주의의 제도하에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 문화적으로 서양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의 분쟁 속에서도 대체로 여행의 안전과 자유는 오랫동안 보장되면서 여행이 성행하였다.

   특히, 고대 로마의 여행은 네 가지 조건에 의해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a) 로마의 화폐는 여행자들의 이동조건의 매개물이었고

    b) 잘 개발된 육로와 수로는 여행활동의 촉진역할을 하였고

    c) 그리이스어와 라틴어가 공용어로 통용되면서 의사소통에 불편을 덜어 주었고

    d) 법률시스템이 당시 외국법정과 재판권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3. 중세 및 근대의 관광현상과 숙박산업


  1) 중세시대


    도시생활은 경제적 전문화에 기인하면서 빠른 문명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말하자면 중세에 있어 유럽의 도시문명은 무역과 제조업의 성장과 함께 도시인구의 증가, 상인들의 이동, 중산층의 탄생, 십자군의 원정 등은 다시 활발한 여행활동을 촉진하였고, 더욱이 문명의 서광으로서 작가들의 활동은 르네상스(renaissance)의 무대를 등장시켜 여행의 활성화를 유도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열광적인 종교활동과 모험심은 동방에 대한 여행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중세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성지관광은 최고의 목적지가 되었다. 따라서 중세유럽의 관광은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문화의 공동체였던 탓으로 종교관광이 이루었던 로마도시가 제2의 순례지가 되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드 꼼뽀스떼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는 야곱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하여 1082년에 대성당이 건립되면서부터 제3의 성지로서 순례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 당시의 관광은 주로 지금까지 설명된 성지순례(pilgrim)의 형태이었고, 또한 그 여행자들은 수도원에서 숙박하고 승원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면서 가족단위로 관광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를 통하여 정적문화로부터 동적문화로 변형되었고, 사회는 개인주의적, 비종교적, 또는 도시적으로 변형되었다. 그 동안 동서의 교역은 성장을 거듭하여 여행의 동기를 더욱 유발시키고 부와 여가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및 이집트에서 생성되어 더욱 여행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16 및 17세기에는 여행에 대한 많은 수필들이 쏟아져 나와 영국에도 그 영향이 크게 확산됨으로써 엘리자베스여왕 시대(elizanethan ages)에는 젊은이들에게 여행에 의한 견문(見聞)교육이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중산층의 등장은 또한 예술과 르네상스 사상의 극치를 성취하면서 지금의 현대관광 전통으로서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개념을 성장시키게 되었다.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등극은 관광발전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하였고, 영국해군에 의한 무역의 팽창은 상업의 성장을 가져다주었고, 이러한 결과는 소위 그랜드 투어의 탄생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영국에서 만의 현상은 아니고 프랑스, 이탈리아 및 독일 등의 국가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들이 1700년도에 와서는 세계의 경제와 사회의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대량관광(mass-tourism)이 발전하게 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관광에 새로운 전환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호텔의 개념으로서 숙박시설이 필요에 따라 설립되면서 대량관광의 형태를 부분적이나마 수요할 수가 있었다.



  2) 그랜드 투어(grand tour)시대와 영국


   그랜드 투어는 17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성행하였던 관광의 유형으로서, 처음에는 상류층의 자녀들을 교육목적으로 견문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서유럽 등의 순환여행을 실시하였던 때부터 생겨났다. 존 타우너(john towner) 박사는 그랜드 투어를 연구하는데 자료가 불충분하여 그 당시의 일기, 편지 및 여행기록 등의 기초적 정보자료에 근거를 두고 그랜드 투어를 연구하였다.


   그랜드 투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옛날 명문 집안의 젊은 층들이 교육의 기초과목으로 유럽내의 관심 있는 도시와 지역 등을 여행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본래 서유럽의 특정지역과 도시는 정해 있지 않고 교육과 위락의 목적으로 여행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서 18세기를 걸치는 동안 그랜드 투어는 관광객의 사회계급적 제한 혹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채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그리이스, 로마, 근동지역을 포함해서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의 서구지역 어느 곳이던지 여행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랜드 투어는 한 사회계층에 국한되지 않는 특수 관광객의 순환관광으로 관찰되어 진다.


    영국인들의 순환관광(grand tour)은 주로 파리와 베르사이유(versailles)궁전, 이탈리아의 론(rhone)계곡의 고적지 방문, 베니스, 투린, 로마, 나폴리 등을 정점으로 하여 돌아오는 여정이 있었고 독일의 라인강을 따라 다른 국가들도 여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의 관광은 고전적이며 복고풍(renaissance) 취미에 대한 여행이 많아 즉, 이탈리아 전지역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해상도시의 관광 및 관광개발이 뚜렷하고, 따라서 프랑스 및 독일의 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통과연계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지역들은 수로교통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그랜드 투어가 성행하여 자연경관을 즐기기도 하였으며, 여행기간은 16세기 중엽에는 평균 40개월이었으나 1830년대에는 4개월로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의 숙박시설로는 도로변에 호스텔 및 여관과 같은 숙소와 성지순례와 상인들이 이용했던 간이숙박시설 서비스가 있었다. 그러나 시골 외곽지대에서의 시설은 형편이 없었고, 유럽지역의 성곽들은 부유층의 관광객용 숙소로 개조되기도 했다. 반면에 18세기 후반부터는 은행들의 부수적인 업무로 환전업무를 실시하기도 하면서 호텔을 안내하고 여행객들의 짐도 운반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여행은 대체로 순례나 상업 혹은, 공용업무의 성격여행이었다. 하나, 1519년 포르트갈의 마젤란(magellan)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소위, 원거리 해외여행과 세계일주의 여로가 트이게 되고, 이를 동기로 모험여행과 더불어 16세기말부터는 개인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초에 들어서면서 영국에서는 부유층을 위한 온천지역 개발이 확대됨으로써, 이에 대한 편의시설이 증가하고 온천 이용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효과로서 해수욕을 즐기는 계층의 여행객이 생겨나, 스카보로우(scarborough)외 브라이튼(brighton)은 온천 및 해수욕장으로서 유명하여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숙박지로도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당시 브라이튼 지역을 자주 찾던 웨일즈((wales) 왕자는 1784년에 이곳에다 유명한 별장을 짓고 소일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공업도시에 인구가 집중되고, 국내․외의 시장유통과 원료공급으로 인한 식민지의 활용, 그리고 철도와 기선의 이용으로 여행이 용이해짐으로서 관광객의 대량이동에 따른 중산층의 숙박시설 이용의 필요성도 시대적으로 강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호텔(hotel)이란 단어는 1760년에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600년도에 세계최초로 영국의 써랍셔(shrophshire) 지방에서 목조2층의 건물로서 "Feathers Hotel of Ludlow)"가 등장하여 벌써 호텔이란 말이 생겨나고 있었다.


   호텔이 등장하기 전에 여행은 대개의 경우, 목적지에서 민박을 청하거나 하숙(lodging)이나 셋방(chamber)에 숙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774년에 벌써 로우(david low)에 의해서 코벤트(covent) 정원인 아처경(lord archer)경의 농가에 First Family Hotel이라는 현대적 호텔의 모형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60년 동안 영국의 도시 및 휴양지에 현대식의 호텔들이 건립되면서 1838년에는 유스튼(euston)에 First Railway Terminal Hotel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1840년 이후에는 철도역 등에 유람자들을 위한 철도휴게소가 생기고, 도심지에는 호텔용 빌딩과 산책로, 공공위안시설물과 회의장소 등이 생기면서, 1851년 2월에는 호텔과 여관을 포함한 런던의 숙박시설 현황이 발간되었고, 1854년도에 들어와서는 The Royal Hotel Guide란 책자에 영국 전체의 호텔 8,000여 개소가 소개되고 있었다


   당시 철도당국은 훌륭한 호텔과 서비스의 제공이 곧, 교통량의 증가추세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호텔의 발전과 아울러, 칼 베데커(karl baedeker)와 존 머레이(john murray)는 각각 여행안내서를 발행하여 여행의 관광욕구를 끌어내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민들에게는 외식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많은 인구가 교외에 거주하기 때문에 점심식사하러 집에 갈 수 없는 사람이나, 낮에 쇼핑하러 시내 중심가로 들어온 시민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음식점과 커피샾이 증가하였다. 터번(tavern) 같은 곳에서는 시민들이 이곳에서 숙박과 커피, 그리고 간이음식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코칭 하우스(coaching house)에서 현대적인 호텔의 개념으로 변형된 런던 호텔 중의 하나는 First Family Hotel보다도 훨씬 앞서 세워진 18세기 중반의 The Bull and Mouth 여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이후에 포틀랜드궁(portland palace)의 langham hotel과 1885년에 세워진 metropole hotel은 주로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Adelphi Hotel은 리버풀(liverpool)에 위치하여 미국호텔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준 대단히 현대적인 호텔이었고, 포츠머스(portsmouth)에는 The George라는 여관이 호텔로 불리워지었고 특히 1800년초에 유명하였다.


   근대의 영국 호텔은 무엇보다도 리츠(cesar ritz: 1850-1918)에 의해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즉, 그는 1889년에 런던에 세워진 Savoy Hotel을 인수하면서 호텔경영은 물론, 식당업을 번창시켜 미국의 외식산업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1899년에는 역시 런던의 Carlton Hotel을 개업하면서 영국에서는 최초로 호텔욕실을 구비하기도 하였다.


   그후 1974년 영국의 총객실수가 500,000여개에 달하고 있으나 객실수용능력의 절반이 해변지역의 휴양지호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호텔경영자들은 주로 순수호텔업자, 주류업자, 호텔 및 캐이터링업자, 기타 등으로 구분되면서 Trusthouse Forte 호텔그룹은 보유하고 있는 총호텔수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그 그룹형태가 방대하게 되었다.




▶ 영국지도















  참고 : 그랜드 투어란?

   그랜드 투어는 17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성행하였던 관광의 유형으로서, 처음에는 상류층의 자녀들을 교육목적으로 견문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서유럽 등의 순환여행을 실시하였던 때부터 생겨났다. 존 타우너(john towner) 박사는 그랜드 투어를 연구하는데 자료가 불충분하여 그 당시의 일기, 편지 및 여행기록 등의 기초적 정보자료에 근거를 두고 그랜드 투어를 연구하였다. 그랜드 투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옛날 명문 집안의 젊은 층들이 교육의 기초과목으로 유럽내의 관심 있는 도시와 지역 등을 여행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본래 서유럽의 특정지역과 도시는 정해 있지 않고 교육과 위락의 목적으로 여행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서 18세기를 걸치는 동안 그랜드 투어는 관광객의 사회계급적 제한 혹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채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그리이스, 로마, 근동지역을 포함해서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의 서구지역 어느 곳이던지 여행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랜드 투어는 한 사회계층에 국한되지 않는 특수 관광객의 순환관광으로 관찰되어 진다.


   Classical Grand Tour(17-18세기)

       유럽의 고대문화와 르네상스의 문화(고대문화의 복원)에 관심을 두었다.

       주로 이탈리아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크게 두 개의 코오스가 있었다.

      • Turin - Milan - Verona - Vicenza - Venice(북부지방)

      • Piacenza - Parma - Reggio - Modena - Bologna  

         두 코오스는 볼로냐(Bologna)에서 교차되었다.

        특히 순환코오스인 Bologna-Florence-Rome-Naples-Rome-Ancona-Bologna          는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후반까지 존재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 Paris-Lyon- 이태리(또는 Rhone valley, 휴양지Montpellier)


   Romantic Grand Tour(18-19세기)     

      유럽의 문화 보다는 자연경관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프랑스, 이태리, 라인강(Mainz에서 Cologne), 브랏셀, 스위스 등이 대상이었다.  



  3)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러 절대 왕권제도하에서 왕후 및 귀족을 대상으로 특권계급전용의 호화스러운 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왕족들의 사교장으로 숙박과 음식이 잘 훈련된 종업원으로부터 제공되었다. 미국에서도 호텔산업의 초기에는 종업원의 교육과 요리기술 습득을 위하여 흔히 프랑스의 유명한 호텔로 종업원을 파견하여 교육을 받게끔 하였다.


   역시, 호텔(hotel)이란 용어도 프랑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초기의 프랑스에서는 부유층이나 저명인사의 거주지나 공공건물을 Hotel de Ville 혹은, Hotel de la Monnaie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기간에 많은 사유주거지가 공유물로 전환되면서 자연히 그들의 집을 Hotel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시 여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하던 프랑스의 시골집들은 Auberg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 프랑스가 1790년대에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미국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또한 프랑스에서는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호텔의 어원이 미국으로는 1791년부터 불리워지기 시작할 정도로 프랑스의 호텔업은 미국에 있어서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역시 철도회사들은 부대시설로서 철도역이나 터미널 근처에 간이숙박시설들을 부설․영업하면서 독립된 회사조직으로 큰 호텔들이 건립되어 왔다.


그중 1850년에 파리에 건립된 Le Grand Hotel은 회사경영조직으로는 최초이었다. 그리고 1855년에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 파리에 Hotel du Louvre이 건립되었다. 이는 관청형의 거대한 호텔로서 당시 귀족들의 사교중심지가 되었고, 187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호화롭다고 하는 Hotel Grand National이 세워져 유럽 상류사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후 1898년에 리츠에 의해서 현대 호텔산업의 호텔서비스의 원형을 탄생시킨 Ritz Hotel이 파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호텔은 유럽각지에 18개의 리츠계열의 호텔들을 출현하면서 호텔산업계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되었다. 


   리츠가 창안한 "고객은 항상 옳다(Guest is always right!)" 라는 표어는 후에 호텔업을 근대산업으로 육성시킨 미국의 스테틀러(statler)에게 적절한 슬로건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 표어는 당시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귀족을 대상으로 한 이념이 농후하였지만, 오늘날의 호텔경영자들은 아직도 판매촉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The Ritz Hotel in Paris>



   

      

     

 

 

 

   


          

 


  

       <Cesar Ritz>  따라서 리츠호텔은 여러 나라에 많은

       체인을 형성하게 되어 근대체인호텔(chain hotel)의

       시스템의 효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태틀러는

       자본을 결합한 개념으로 체인경영을 추구하였지만,

       리츠는 단순히 호텔경영에서의 합리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가 호텔맨으로서 성공한 이유중의 하나는

       서양요리사상 가장 유명한 요리사인 에스꼬피에(G.

       A. Escoffier: 1846-1935)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프랑스는 또한, 1912년에 남부지방의 유명한 휴양지 칸느에 루마니아출신의 네그레스코(Henri Negresco)에 의해 건립된 Hotel Negresco가 휴양지호텔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의 호텔산업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와 항공기의 발달로 관광이 대중화되면서 호텔이 기업화, 국제화, 대형화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프랑스 호텔시장은 대중화되기 이전에 벌써 특권층의 관광에 의해 구성되고 있었으며, 2차대전 후의 항공기의 발달과 자동차의 보편화로 인하여 호텔기업도 대중화 추세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의 호텔도 변형되면서 진보적인 상업화 구조의 변화, 경영방식과 설비의 현대화로 인하여 호텔은 더욱 안락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현재 Ritz Paris의 객실 전경>

              

  







         

              


  4) 독일


    독일에서 호텔의 등장은 1807년에 근대호텔의 개념으로 온천지인 바덴바덴에 건립된 Badische Hof를 지적할 수 있다. 이 호텔은 초기의 여관에 비해 대단히 호화스러운 숙박시설로서 건물구조도 웅장하고 크고 작은 응접실, 발코니, 오락실, 독서실, 식당, 침실 및 욕실 등이 조직적으로 잘 설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냉수와 온수의 공급이 원활하게 제공되었고 또한 정원 등이 마련되어 있어서 근대호텔과 다를 바 없었다.



    이 호텔의 등장은 스위스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전 유럽의 호텔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후 1874년에는 베를린에 Kaiser Hof가, 1876년에는 라인강변에 Frankfurter Hof가 건립되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유스 호스텔(youth hostel)이 탄생하여 숙박시설의 역사에 큰 의의를 던져주고 있다. 즉, 1874년 동프러시아 태생인 셔만(r. shirmann)의 착안에 의해 루루지방의 공업지대에 건전한 숙박시설로서 유스 호스텔을 개발한 것이다. 1910년에 알테나성에 셔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민학교 인데아테네를 유스 호스텔로 전용하여 사용하였는데 말하자면, "알테나성 유스 호스텔"이 세계 최초의 유스 호스텔이 된 것이다. 1914년에는 전국으로 83개의 유스 호스텔이 건립되면서 세계 각국으로 점차 파급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셔만 자신이 위원장이 되어 독일의 유스 호스텔협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5) 스위스


   스위스는 자연적인 관광자원으로 예로부터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런던에서 파리, 그리고 로마를 연결하는 길목의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부터 스위스는 유럽의 독특한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곳의 호텔들은 결과적으로 세계인들의 휴식처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스위스의 호텔들은 휴양지(resort)호텔로서 여겨지고 있다.


      1411년에 Tavern으로 건립된 Hotel Krone(Crown)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로 여겨지고 있다. 이 호텔 옆으로는 당시 라인강과 제네바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그 이용도가 아주 활발하였다. 이 호텔은 Ours성 성당 반대편의 solothurn에 위치하여 타번으로 운영되던 것이 개발․확장되면서 현대적 호텔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14세기에는 Guild of Landlords가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400여 년을 유지했었던 호텔이다.


   1681년에 건립된 Beau Rivage와 1908년에 증축된 Palace호텔과 복합된 두 호텔은 Beau-Rivage-Palace Hotel이라고 칭해졌으며, 그 호텔의 벽에는 평화기념의 상징인 비문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으로 더욱 유명한 호텔이 되었다. 또한, 그 벽에는 유럽의 지도와 위대한 국가를 상징하는 많은 그림들과 1912년 이탈리아와 터키 사이의 Tripoli에서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Peace of Lausanne"이 새겨져 있어 더욱 유명하다. 그리고 가의 같은 시대에 또 다른 Beau-Rivage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863년에 건립된 Grand Hotel Beau-Rivage인 것이다. 이 호텔은 70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호수를 내다볼 수 있는 전면에는 단 11개의 창문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데 1925년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 단장하여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838년에 세워진 Zurich에 있던 Hotel Baur는 그리 쾌적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같은 시대에 스위스에 있어서는 호텔기업의 시초이었다. 이 호텔은 건축에서나 디자인은 수준급의 호텔이었다. 당시 이 호텔은 우체국과 함께 개업한 최초의 호텔이었으며 140개의 침대와 큰 식당을 구비하고 있었다.


   Baur의 아들 Theodor Baur는 Tschurni와 함께 Ouchy에서 호텔전문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Theodor Baur는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팁(tips)제도의 폐지를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Lucerne의 Grand Hotel National은 1871년에 개업하여 6년 후에는 프랑스에서 Ritz가 27세의 나이로 지배인으로서 종사했던 유명한 호텔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유럽지역의 왕족들이 방문하기도 한 이 호텔은 특히, 벨기에의 앨버트 왕과 왕비가 신혼여행 중에 투숙한 후 그의 왕족들이 정기적으로 이 호텔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스위스는 유럽인들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사랑 받는 휴양지로서 무수한 고급호텔들이 속속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4.  미국 호텔산업의 발전과정


  1) 초기의 숙박시설


   영국은 미국식민지를 본국상품의 판매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보는 중상주의정책을 채용하여 식민지의 상공업 발달을 억제하였다. 이렇게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하여 식민지인들의 본국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지고 반항운동이 고조되면서 식민지인들에 의한 이동이 빈번하여 자연히 영국과 같은 Tavern이나 Inn들이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벌써 영국의 숙박시설 형태를 복제한 Tavern이 미국에도 1607년도에 생겨나고 있었고, 비록 영국의 것과 같이 그 시설은 좋지 않았으나 여행자의 피난처에 불과한 Jamestown Tavern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의 타번은 대부분 유럽풍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지만 미개척된 황량한 지역에 존재하였다는 것이 특징일 것이다. 또한, 항구가 있는 곳에 여관(inn)들이 산재하였고, 도시를 잇는 도로주변에도 Inn과 Tavern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고객 역시 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1634년도 새뮤엘 콜스(samuel coles)에 의해 건립된 Coles Ordinary는 미국에서 여관의 형태를 갖춘 첫 번째의 숙박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를 후에 Ships Taver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응 새뮤엘이 보스톤에 세운 영국식의 여관으로서, 새뮤엘은 보스톤 최초의 시민이 되었고 제일교회의 집사이면서 Harvard 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



  2) 시티호텔의 등장과 제1차 황금기


   미국 식민지 시대와 합중국 시대의 뉴욕에서는 City Hotel이란 호텔이 일찍이 등장하고 있다. 1794년에 미국 최초의 호텔인 City Hotel(70객실)이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건립되었다. 이 호텔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여관주인들은 그들의 숙박시설을 단순히 개조하여 자신의 숙소로서 혹은, 가정으로 겸용하면서 여관을 운영했었다. 따라서 City Hotel은 실제로 여관이 발전된 숙박시설의 유형이었지만, 당시 거대한 시설로 모든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호텔은 당시 약 3만의 뉴욕시민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되었고 또한, 시민들의 사교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이때 미국에서는 주류판매를 금하는 금주회가 있었지만, 이 호텔의 홀에서는 주류판매와 숙박을 겸하고 있었다. 그 후 일반적으로 호텔은 자체에서 주류를 판매하는 바(bar)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펜실베니아의 Wilkes-Barre에 Arndt's Tavern은 1787년에 개업한 인기있는 호텔로서, 이 호텔의 주인이자 판사인 안트(Ardnt)는 세계최초로 무연탄이 불에 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였으며, 이후에 무연탄이 호텔의 벽난로에 널리 이용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1807년에 Exchange Coffee House란 거대한 호텔이 생겨, 그 후 40여 년간 명성이 대단하였고, 미시간주에서는 훌(General W, Hull)이 1807년에 Wales Hotel을 최초로 벽돌건물로 지어 유명하기도 하였다. 역시 보스톤에 Exchange Coffee House, 볼티모어에 City Hotel, 그리고 뉴욕의 Adelphi Hotel은 당시 6층 건물로서 마천루(skyscraper)의 효시가 되어 유명하였다.


   보스톤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United States Hotel은 현대적인 규모로 1824년에 건립되어, 당시 보스톤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거대한 구조의 호텔로서 유명하였다. 무엇보다도 City Hotel이 등장한 이후 1829년까지의 35년간을 미국 호텔산업의 제1차 황금기(The First Golden Age of Hotels in the United States)라고 부르고 있다



  3) 미국 근대호텔의 출현


   1829년에 보스톤에 최초의 본격적 현대적 호텔인 트리몬트 하우스(tremont house)가 건립되었다. 이 호텔을 가리켜 소위 "근대호텔산업의 원조(The Adam and Eve of the Modern Hotel Industry)"라고 부르면서 미국이나 유럽에 있어 동시대의 새로운 호텔경영의 이정표를 제사하게 되었다.

 트리몬트 하우스는 객실 170개를 보유한 호텔로서, 당시로서는 미국은 물론, 유럽에까지 최대로 호화스럽고, 가장 많이 건축비가 소요되었고, 근대적인 경영방식으로 호텔을 운영한 최초의 호텔이 되었다. 또한, 이 호텔은 건축의 권위자인 Isaian Rogers에 의해 건립된 최대의 호텔로서, 그 후 그는 향후 50년간 호텔건축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트리몬트는 당시 200석 규모의 식당홀을 구비하고, 객실에는 최초로 욕탕(bath room)을 설비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지고, 1932년 뉴욕에 세워진 Astor House와 함께 전국에 호텔의 새로운 물결을 이루었다. 트리몬트 하우스의 등장은 호텡경영에 있어 전미굼 및 유럽을 통하여 호텔의 규모, 구조, 설비, 투자액 및 경영기술 등에 있어서 무조건 "최초의" 창안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트리몬트 하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여관들은 한 개의 객실에 수 개의 침대를 넣고, 동시에 수 명을 투숙 시켜야 채산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리몬트는 이런 고루한 종래의 경영방식을 과감히 혁신하여 오늘의 호텔객실처럼 충분한 프라이버시(privacy)를 만끽할 수 있는 1인용 객실(single room)와 2인용 객실(double room)을 최초로 확보하면서 호텔업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객실뿐만 아니라 각 객실에는 열쇠와 체인을 부착하여 새로운 객실관리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최초의 호텔로서 다음과 같은 경영기술을 창안하기도 하였다.


   a) 각 객실에 무료로 세면대(bowl), 물주전자(pitcher), 신문 및 비누를 제공하 였다.

   b) 지배인 제도(boyden family)하에 고객을 정중하게 접대할 수 있도록 스텝 (staff)을         채용하여 교육, 훈련시켜 고용하면서 자본과 경영의 분리제도 운 영을 실천하였다.

   c) 호텔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요리(French cuisine)를 제공하였다.

   d) 벨 보이(bell boy)와 객실전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호출기를 도입하였다.


   트리몬트는 향후 65년간 세계적인 호텔로서 명성을 누렸으며, 19세기에 있어 호텔 경영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역사적인 호텔이었다.


   그리고 트리몬트 건너편에는 1855년에 Parker House가 건립되어, 처음으로 유럽피안 플랜(European plan)제도를 도입하여 성공하였고 또한, 롤빵(bread roll)에 직접 호텔 이름을 새겨 고객에게 제공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1860년의 Continental Hotel은 8층 건물로서 미국동부에서는 가장 인기가 있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로 여겨졌으며, 링컨 대통령도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이 있다(1861. 2. 21). 이 호텔은 당시 1년에 4만 달러씩 약 12년간 Paran Stevens라는 임대를 주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소위, 임대호텔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러한 호텔이 등장하고 난 후, 적어도 호텔 붐이 서부지역으로 옮겨가서 태평양 연안을 따라 1830년에서 1850년 사이에 흥분과 경쟁 속에서 호텔산업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1875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지어진 Palace Hotel은 800실을 보유하면서 흑자는 보지 못했지만, 그 외형의 규모나 시설 및 설비에 있어서는 가장 호화로운 최고급의 호텔로서 자랑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호텔들은 건축기술의 혁신을 가져다주면서, 급수를 위한 배관공사로 욕실이 붙은 객실설비가 가능하였고, 전등설치, 실내전화 설치, 엘리베이터 설비 등이 가능하였고, 호텔 주변에는 경제활동의 금융중심지가 형성되고 실업가들에 의한 철도의 부설과 공장의 발전으로 더욱 거대한 호텔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20세기가 들어서기 직전인 1890년에 뉴욕의 중심가에 Waldorf Astoria Hotel이 1,000실을 갖고 애스터(William Waldorf Astor) 일가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호텔은 서비스 제일주의의 호텔경영 이념하에서 지배인으로 슐츠 볼트를 고용함으로써 세계 제일의 서비스 제공업체가 된 것이다. 후에 볼트가 사망하자, 위대한 호텔맨으로 유명한 르샤스 퓨마가 고용되면서 윌돌프 매뉴얼(Waldorf Manual)를 작성하여 호텔서비스의 영업지침으로 삼았는데, 이를 현재에 와서 호텔서비스에 있어서 호텔맨의 성서라고 칭하고 있다. 그 후에 금주법 및 소득세법에 의해 영업중지가 부득이 했지만, Waldorf Astoria의 상호를 단 1달러에 양도하여 1920년에는 거대한 새로운 Waldorf Astoriafmf 탄생시켰던 것이다.


    르샤스 푸마는 슐츠 볼트의 업무를 인계하면서 곧 호텔의 서비스 매뉴얼을 작성하고, Horwath & Horwath 사의 협력으로 근대적인 호텔관리회계를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4) 미국 호텔산업의 제2차 황금기


   미국의 호텔산업계는 20세기에 들어와 새로 늘어나는 여행인구에 대한 서비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여행객들이 원하는 숙박시설의 형태(types of accommodations), 새로운 서비스의 개발(new service)과 중산층에 적합한 숙박시설과 서비스, 또는 이들에게 적합한 운영형태, 적당한 수익을 위한 객실요금(room rates) 등으로 호텔업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호텔의 혁명왕으로 불리우는 스테틀러(E. M. Statler)가 호텔업계의 기린아로 등장하게 된다. 유럽의 왕족 및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채산운영을 도외시한 서비스를 개발한 스테틀러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새로운 경영방식을 채택하여 근대호텔산업의 혁신을 꾀하였다.


   그는 1908년 1월 18일에 미국호텔산업에 새로운 시대를 맞는 Buffalo Statler Hotel을 버팔로에 건립하였다. 스테틀러는 오랫동안 호텔업계에 종사한 이력으로 독창적인 호텔의 경영방식을 개발하여 중산층 이하의 고객을 대상으로 "쾌적하고 편리한 호텔서비스"를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호텔의 비품들에 대한 표준화, 능률화, 그리고 합리화된 관리를 꾀하고, 적정한 요금으로 호텔이용의 대중화를 유도하면서 경영의 합리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스테틀러는 풍부한 경험과 창의적인 사고로 현대 호텔경영에 많은 경영기술과 서비스의 개선에 혁명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1달러 50센트로 욕실이 딸린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a room and a bath for a dollar and a half)" 라는 슬로건을 창안하여 중산층 고객을 호텔업계로 흡수하였다.


   그의 호텔서비스 운영방식의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a) 계단에 화재시 비상구 설치

   b) 어두운데서도 쉽게 열 수 있는 객실열쇠

   c) "Do Not Disturb" 라는 표시를 문고리에 걸고

   d) 어두운데서도 쉽게 켤 수 있는 객실내의 전등 tm위치 설치

   e) 개인용 욕탕

   f) 전신크기의 거울

   g) 객실에 얼음물(ice water) 제공

   h) 객실에 신문 무료 제공


   이상과 같은 새로운 호텔운영의 묘로 성공한 스테틀러 호텔은 이후 40여 년간 근대호텔 건립의 모델이 되었고, 안락한 서비스와 청결의 신조로서 많은 고객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호텔은 상용호텔(business hotel)의 효시를 낳았고, 거대한 기업(Statler Hotel Company)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적 불황을 맞이하면서 스테틀러 호텔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 호텔의 융성기(1910-1920)를 이른바 미국호텔산업의 제2차 황금기라고 부르고 있다.


   이 당시의 호텔들은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대규모 호텔들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뉴욕에서 만도 다수의 호텔들이 신축되었고, 소도시에서는 현대식 호텔 없이는 도시의 체면이 안선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그 중에 1919년에는 당시 세계제일의 Pennsylvania Hotel이 22층으로 2,200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개업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에 New Yorker(Ralph Hitz's Hotel)가 이 호텔을 능가하게 되었다. 1920년에는 New Waldorf Astoria 호텔이 47층에 2,150개의 객실을 가지고 개업을 하였으며, 1927년에는 3,000개의 객실을 보유한 Stevens Hotel(현재의 Conrad Hotel)이 시카고에 건립되었다.

      

 5) 공황기


    호텔건설의 붐도 1930년도 미국이 경제대공황기를 맞이하면서 호텔의 황금기가 종적을 감추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를 가리켜 호텔산업 사상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호텔산업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산업으로 생각되면서, 전체 호텔의 85퍼센트 이상이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도 스테틀러의 몇몇 호텔들은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경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당시 특권계급을 상대로한 호화호텔들은 환경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해 도태되었으며, 이 경제불황기를 통해 호텔경영은 일반대중을 주고객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지론이 되면서 합리적 경영을 위한 체인(chain) 호텔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 호텔업자들은 소유하고 있는 호텔부동산을 헐값에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호텔에는 고객들의 발길이 끓기고 조용한 가운데 모든 객실이 텅 빈 상태였다. 일부 호텔들은 객실료의 인하를 모색하여 보았지만 실패하기가 일쑤였다. 당시 호텔 투숙율은 65퍼센트가 손익분기점인데도 1935년도의 투숙율은 51퍼센트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호텔산업의 재무전문가들도 호텔산업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산업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6) 회복기


   대공황이 지나고 1949년 이후에는 차차 미국의 호텔산업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군인들의 이동과 더불어 여행빈도가 많아져서 당시 호텔들은 객실의 부족으로 즐거운 비명을 울렸다. 그리고 자동차와 기타 운송장비의 급격한 증가는 여행객들이 원하는 곳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가 있게 하였다. 따라서 1947년도에는 평균 객실투숙율이 90퍼센트로 상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호텔들은 고객수요의 증가로 인하여 투숙율은 높았으나, 인력과 용품은 절대 부족하여 뉴욕 같은 곳에서는 연3일간 투숙할 수가 없었고, 음식물은 배급제였고, 린넨(linen) 같은 것은 구입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 후 1950년대에는 호화스러운 대규모의 호텔의 출현은 드물었으나 휴양지 호텔이나 모텔(motel)의 등장은 많은 시기였다. 따라서 호텔이 불리한 입장에서 모텔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통수단의 발달로 오히려 도심지의 호텔은 그 이용도가 감소되고 있었다. 즉, 자동차 여객들은 목적지를 쉽게 갈 수가 있어 도로변의 모텔들을 손쉽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항공기의 발달도 역시 마찬가지고 그리고, 대도시 중심지에는 상권에 의한 대부분의 토지값이 상승하여 호텔부지 보다도 사무실로 용도를 전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많은 규제가 풀리면서 여행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내에서는 낡은 호텔(12년 이상)들이 점차 개량되면서 투숙객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체인호텔과 리퍼럴(referral) 시스템이 팽창되고 있었으며 대집회, 외국 상용여행객 및 일반여행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판촉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자동차와 항공기를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급증하면서 호텔의 체제일수가 짧아져 호텔투숙율이 낮아지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 주변과 시내 또는 고속도로 및 공항부근에는 프랜차이징 시스템(Franchising System)에 의해 호텔과 모텔들이 낮은 세금의 혜택으로 대량 건축됨으로써 객실공급과잉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각 업체간의 과대한 경쟁과 운영비용의 상승으로 호텔경영이 전문적인 경영기술을 가진 기업에 위탁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호텔예약은 즉석예약방식이 채택되고, 여행시장의 팽창으로 이에 대한 시장조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목할만한 사실은 1962년에 미국호텔협회(American Hotel Association)가 미국호텔모텔협회(American Hotel and Motel Association: AH&MA)로 개칭되면서 미국의 호텔경영자들이 이 협회를 통하여 결속과 협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추세와 더불어 체인호텔시스템이 도입되어 The Hilton Corporation과 Sheraton of America 등은 쌍벽을 이루어 체인호텔 경영방식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Seraton의 창업자는 어니스트 핸더슨(Ernest Henderson: 1897-1967)이고, 힐틍호텔의 창업자는 호텔왕으로 불리는 콘래드 힐튼(Conrad N, Hilton: 1887-1979)으로서, 이들은 기존 호텔들을 매입하여 기업을 확장시켰고 또한, Holiday Inns의 창업자인 케먼스 윌슨(Kemmons Wilson: 1913-)은 프랜차이즈 경영방식으로 급속하게 호텔체인망을 구축하였다.

 

7) 모텔(Motel)의 발전기


   고속도로의 건설과 자동차의 증가로 여행객들은 좀 더 멀리, 그리고 좀 더 오랫동안 여행을 즐기면서 숙박비가 비싸고 투숙절차가 까다로운 호텔보다 이용하기 쉽고 저렴한 모텔을 선호하게 되었다.


   처음 모텔형식으로 생겨난 것은 1930년대의 Tourist Cabin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보다도 Milestone Motel이 San Luis Obispo에서 개장된 때는 1925년이었으나 이 모텔은 4년 후에 실패하고 말았다.


   1940년대에는 모텔의 최초 그룹인 Quality Courts가 탄생되면서 모텔에도 서비스와 경영상의 표준화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당시 호텔들은 도산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모텔만은 군사캠프와 군수물자 공장주위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모텔은 건축이 용이하고, 부대시설이 단순하고, 주차가 편리하고, 객실료가 저렴하다는 특징으로 그 수요자가 날로 증가하게 되었다.


   1948년 이전부터 몇몇 호텔들이 체인화 되면서 호텔들이 모텔화 되었다. 즉, Holiday Inns, Ramada Inns, Marriott, Congress of Motor Inns, Superior와 Howard Johnson 같은 호텔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1950년 중반이래 Hilton, Sheraton, Albert Pick, Boss, Knott, Schimonel 등도 모텔로 점차 건립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위스컨신주의 Mead Inn이 1951년에 세워지면서 완전한 호화호텔의 설비를 갖추어 모텔로 개업하였다. 또한, 캔사스주의 Topeka에서는 Jayhawk Junior Highway Hotel(Alsonett Hotels)이 처음으로 호텔경영방식으로 세워졌다. 당시 호텔업자들은 모텔의 등장을 그리 대수롭게 생가하지 않고 있었다. Holiday Inns의 윌슨(Kemmons Wilson)에 의해서 모텔이 체인화가 활성화되면서 소규모의 모텔에서 100실 이상의 모텔을 건립하여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텔들은 기존호텔의 기준을 능가할 정도로 욕실, 연회장, 라운지, 식당, 냉난방, 수영장은 물론이고, 카페트 등의 최신식의 시설을 확보하였다.


   San Francisco Hilton 같은 모텔은 주차장과 객실이 인접하게끔 설계하여 자동차를 탄 채로 데스크에서 등록수속을 한 후, 객실로 직접 자동차를 타고 가서 문앞에다 주차를 시키고 입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텔이 대형화되면서 투자의 위축과 고객들의 수요감소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는 객실은 좁고 시설은 단조롭지만 고객의 성향에 의해서 더욱 저렴한 Budget Motel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한때 Days Inn은 버짓모텔의 체인으로서 가장 거대한 체인으로 성장하였다.



5. 한국 숙박산업의 발전과정


  1) 고대의 숙박시설


    한국의 숙박시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관영(官營)으로서 역관(驛館)이 신라 소지왕 9년에 개설되었다. 역관은 주로 관리들의 지방 순찰시 숙소로서 이용되었던 곳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후 장보고에 의해서 당(唐)나라에 신라방(新羅坊)이 건립되어 정치․외교사절이나 유학을 하고 있는 신라인들에게 숙소로 제공되었다.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목에는 신라관(新羅館)이나 신라원(新羅院)이 설치되어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려(高麗)시대에는 참역제(站驛制)가 발달하여 역마를 두고 역장, 역리 등의 관리가 있어 공문서의 전달, 공물의 수송, 공무로 왕래하는 관리들에게 교통 및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최초로 공설주막이 개설되어 선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절간에서도 숙식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리고 고려말에는 송(宋)나라와 활발한 무역거래를 행하면서 두 나라 상호간에 속박시설을 만들어 사신과 상인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였다.


  2) 조선(朝鮮)시대의 숙박시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참역제가 지속되어 역이 산재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국에 약 537개의 역이 있었으나 새로운 숙박시설인 관(館)이 여행을 하는 관리들을 위하여 지방관위에 부설되었으며, 하급숙박시설로 원(院)이 설치되었으나 원은 그 사용범위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점차로 폐지되고 일반여행자를 위한 점(店:주막)이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관은 대부분 한성에서 의주까지 설치되었다. 한성에는 명나라의 사신을 위한 태평관, 일본의 사신을 위한 동평관, 여진족을 위한 북평관이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태평관이 불타버리자 과거시험 장소인 모화관을 태평관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조 초기에 생겨난 점의 영업형태가 커지고 교역행위가 확대됨에 따라 객주(客主)라는 계층이 나타났다. 이에는 주요도시와 항구를 중심으로 위탁매매를 주업으로 하는 물상객주와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보상객주가 있었으며 조선말기에는 객주조합을 결성하여 전국의 경제활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객주들은 19세기말에는 인천, 부산, 원산 등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에 약 480여 개소에 달하였다.


   3) 구한말(舊韓末)의 숙박시설과 호텔의 생성


    1876년 한국이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부산, 인천, 원산이 개항되고 일본공사관이 설치되었으며, 신미양요 이후인 1882년에는 미국과도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국 공사관도 설치되었다. 이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한국진출을 꾀하는 등 한반도는 열강들의 이권쟁취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박업은 주로 외국인들에 의하여 발전하였고 그 수요자들도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다. 1887년에 요정과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시천여관(市川旅館)이 일본인에 의하여 건축된 것을 시발로 하여 남산주변과 충무로 지역을 중심으로 숙박시설이 증가하게 되었다. 1908년에는 전국의 여관이 123개에 이르렀고 1927년경에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크게 확대되었으나 운영형태는 대부분이 한식과 일식으로서 호텔의 발전과는 궤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외국인에 의해 세워진 서구식 숙박시설인 호텔의 등장은 우리나라의 숙박산업에 커다란 전환점을 제공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숙박시설의 개념은 온돌과 침구를 구비한 한식여관과 다다미로 꾸며진 일식여관이 전부였으나, 여기에 침대와 가구가 설치된 호텔의 개념이 새로이 부가된 것이다. 인천, 부산, 원산이 개항되자 인천은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대표적인 항구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한국최초의 호텔이 등장하는 곳이 되었다.


    1888년에 일본인 호리 리기다로에 의해서 인천 서린동에 대불(大拂)호텔이 3층 11실의 벽돌건물로 한국최초의 호텔이 건립되었다. 유럽인, 미국인 등 한국을 방문하는 외교관, 상인들이 이 호텔을 자주 이용하게 되자, 청국인인 이태(怡泰)라는 사람이 대불호텔 건너편에 2층건물인 스튜어드(steward)호텔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899년에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자 외국인들은 굳이 인천에서만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인천의 숙박산업은 더 이상의 큰 발전은 기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서울에서는 1902년에 독일여인 손탁(Sontag)이 손탁호텔을 건립하였다. 손탁은 당시 한국에 부임한 러시아공사 웨버(Weber)의 천거로 궁중에서 서양문물 소개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동에 위치한 대지를 하사 받았고 여기에 2층 양옥을 건축하여 호텔을 개업했다.


   손탁호텔에는 객실, 식당, 연회장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당시의 외교모임인 정동구락부가 이 호텔에서 개최되었고, 기자시절 영국의 처칠(Churchill)수상과 같은 유명인사가 숙박하는 등 널리 명성을 떨치었다. 그러나 1909년에 이화학당에 매각되어 이 자리에 학교시설인 Frey Hall이 세워졌다.


  4) 철도(鐵道)호텔의 발전


    일본이 만주대륙 진출을 위해 한반도에 철도를 개설하게 됨으로써 여행의 형태가 철도여행으로 전이하게 되었다.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 개통을 시초로 1905년에 경부선의 개통, 1906년에 경의선의 개통으로 부산-신의주간에 급행열차 융희(隆熙)호가 운행되면서 열차내 에 식당이 생겨나 승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한반도와 만주사이에 철도가 완성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만주로 이동함에 따라 철도역 주변에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간자본이 투자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여 철도회사 자체적으로 건설하고 운영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자연히 호텔업은 철도사업의 부대사업이 되었다.


   먼저 부산역사를 2층으로 건립하여 1층은 대합실로 2층은 호텔객실로 꾸며 1912년에 개관하였는데 이 호텔이 국내 철도호텔의 효시이다. 이어서 신의주철도호텔, 조선경성철도호텔, 금강산호텔, 장안사호텔, 온양온천철도호텔이 계속 개관되었다. 특히 조선경성철도호텔은 69개의 객실을 갖추고 1914년에 개관하여 국내의 서양요리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1915년에는 최초로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호텔이 처음으로 중요한 회의장소로 이용되었다. 철도호텔의 등장과 더불어 지방도시의 휴양지에는 온천지역을 중심으로 리조트 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5) 한국 현대호텔의 등장과 발전과정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1929년에 일본항공의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지자 1936년에 일본인 노구찌에 의해서 국내최초의 본격적 상용호텔(commercial hotel)인 반도호텔이 개관되었다. 반도호텔은 미국의 스테틀러호텔의 경영방식을 도입하였고, 일반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한 당시 한국 최대의 시설 및 규모를 갖춘 호텔로 111개의 객실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반인들의 여행이 극도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시설이 되었고 호텔사업도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호텔업은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이했으나 해방직후의 사회혼란과 남북분단, 6․25동란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1950년 초까지 호텔업은 정체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일제말에 총독부와 개인이 운영했던 철도, 열차식당, 역구내식당과 조선호텔, 반도호텔, 부산철도호텔 등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서 관리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교통부로 이관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많은 미군들과 군속 그리고 전후 UN한국부흥단 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점차 관광사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정부조직에 관광과가 설치되었고 여행사와 민영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54년 교통부 육운국에 관광산업 촉진을 위한 관광과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에 세계관광기구(WTO)의 전신인 국제관광가구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58년 3월에 중앙 및 지방관광위원회가 설립되어서 본격적인 호텔산업의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한편, 국내 최초로 대한여행사가 개업하였고, 민영호텔로는 1952년 대원호텔, 1955년 현 소피텔 앰베서더호텔의 전신인 금수장호텔, 1957년 해운대관광호텔, 사보이호텔 등이 각각 개관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사업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민간기업인들이 노력으로 외화획득 산업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61년 8월 22일 관광진흥법의 제정과 다음해 제정된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관광호텔들에게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설을 기준으로 우수한 호텔을 선정, 관광호텔로 분류하여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최초의 관광호텔로 선정된 호텔은 메트로호텔, 아스토리아호텔, 뉴코리아호텔, 사보이호텔, 그랜드호텔 등이었다.


   1962년 6월 국제관광공사가 설립되면서 반도호텔, 조선호텔 그리고 지방 7개의 호텔들의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1963년 4월에 개관한 워커힐(Walker Hill)호텔은 한국 호텔산업에 있어 최초의 현대적인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호텔은 254개의 객실을 보유한 당시 동양 굴지의 리조트호텔로서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였다. 1965년 3월 국무총리실 직속으로 관광정책심의위원회가 구성되고 4월에는 제14차 PATA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호텔업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1970년 3월 한국관광공사와 미국의 아메리칸항공사(America Airlines)가 합작투자한 조선호텔이 개관되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호텔이 등장하게 되었다. 동년 5월에는 관광호텔 등굽화제도(특급, 1급, 2급, 3급)와 관광호텔 지배인 자격시험제도를 실시하여 호텔의 질적 수준과 경영의 전문성을 도모하였고 호텔서비스를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에서는 관광호텔의 적극적인 개․보수를 촉진하기 위하여 개․보수에 소요되는 일부 자재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면제해주는 세제상의 지원과 관광진흥개발기금으로 소요자금의 일부를 융자해주어 업자들의 투자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으로 관광호텔의 질적 및 양적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관광객이 증가하였고 1973년에는 국내관광사상 유래가 없는 679,311명의 외래관광객이 입국하여 269,434 달러의 외화수입을 기록하게 되었다.


   1972년 하반기부터 국내기업의 경제활동 무대가 급속히 국제화되어 가는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정부는 미국 보잉(Boeing)사에 용역을 의뢰하여 "한국관광종합개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한국관광의 미래상을 제시하였고 국제관광공사가 운영하던 워커힐호텔, 반도호텔, 대한항공사 등을 민영화하였다.     


   아울러 관광법규 재정비에 착수하여 1975년 12월 31일 관광사업진흥법을 관광기본법과 관광사업법으로 분류하였고 대규모 관광단지 개발을 위해 경주 보문단지와 제주 중문단지의 기반시설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또 1976년에 서울 플라자호텔, 1978년에 하얏트호텔, 부산 조선비치호텔, 코모도호텔, 경주 코오롱호텔 등이 각각 개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78년 1,079,396명의 외래관광객이 입국하여 약 4억 8천만 달러의 관광외화를 벌어들였으며, 특히 이해는 한국관광사상 최초로 외래관광객 백만명 돌파의 대기록을 세운 해이기도 하였다.


   1979년과 1980년 사이에 호텔신라, 호텔롯데, 경주 조선호텔, 경주 도뀨호텔, 부산 서라벌호텔, 서울 가든호텔 등의 대규모 호텔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다투듯이 개관하여 국내 호텔산업의 중흥기를 연상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1979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세계경제는 침체속으로 빠지고 10․26사건으로 시작된 80년대의 정치격변은 사회 및 경제적으로 혼란을 가져와 국내 호텔산업은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호텔들은 생존을 위한 극심한 경쟁을 하게 되고, 서울 조선호텔과 부산 조선비치호텔, 경주 조선호텔의 운영권이 미국의 아메리칸항공사에서 웨스틴(Westin)호텔로 인계되었다. 이 시기에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대규모 국제관광단지의 개발계획에 따라 경주 보문단지(1974-1979)와 제주 중문단지(1978-1986)의 기반시설 정비작업이 착수되었다.         

        

   1981년부터 내국인의 해외여행이 부분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고, 1983년에는 대우그룹이 소유하는 힐튼(Hilton)호텔이 개관되고 제53차 ASTA 세계총회를 개최하였으며, 19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개최하였다. 한편 1988년 제24회 올림픽(Olympic)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게 되자 이에 대비한 숙박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유수한 외국 체인호텔들이 올림픽 전까지 개관하였는데 스위스그랜드(SwissGrand)호텔, 인터컨티넨탈(Inter-Continental)호텔, 라마다(Ramada)호텔, 롯데월드(Lotte World)호텔 등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