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산책

먼 발치 매운 눈 2008. 8. 28. 10:23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쓸쓸한' 말년

 

부하들과 함께하고 있는 홍범도(가운데) 장군 
  
봉오동 전투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항일 의병장 홍범도(1868~1943년) 장군은 말년에 소련군 편입과 강제 퇴역에 이어 극장 야간 수위와 정미공장 근로자를 전전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인 관련 장편소설을 집필중인 고려인 작가 정장길(鄭長吉. 65)씨는 홍 장군의 탄신 140주년(27일)을 하루 앞둔 26일 그간 소장해온 1968년 8월27일자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전신. 1938년 창간)의 홍 장군 특집기사를 공개했다.

 

이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3개월 후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일제의 만주지역 독립군 진압작전이 강화되자 연해주를 거쳐 카자흐에 정착해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세부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여서 주목된다.

 

1990년 폐간때까지 카자흐 크질 오르다에서 발행된 레닌기치는 특집기사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 1921년 6월28일 이후 홍범도 장군은 휘하 병력 약 300명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고 전했다.

 

레닌기치 기자로 일했던 정씨는 "홍 장군이 연해주로 이동한 1921년은 소련군과 일제 및 러시아 백군(볼셰비키 혁명반대 세력)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있던 시기였다"며 당시 지원세력이 절실했던 `붉은 군대'(소련군)는 홍 장군에게 소련군 편입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소련군은 당시 홍 장군의 독립군 부대외에 연해주로 피신해온 5천여명의 여러 독립군 부대에 대해서도 "우선 소련군과 손잡고 일제ㆍ백군과 싸우면 차후에 조선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며 휘하 편입을 압박했다고 정씨는 설명했다.

 

홍범도 장군 가족사진. 큰아들 양순(왼쪽)을 190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잃었다.

 

하지만 대다수 독립군 부대가 항일투쟁이 급선무라며 편입을 거부하자 소련군은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을 일으켜 독립군 제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독립군이 희생됐다. 살아남은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로 되돌아가야 했다.

 

정씨는 "당시에는 연해주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고려인 독립군 부대들이 만주에서 넘어온 조선 독립군 부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있던 데다 소련군마저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군을 끌어들이려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홍 장군은 '일단 살아남아 항일투쟁을 계속한다는 생각을 한 것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그러면서 홍 장군이 1921년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동방근로자대회'에 초청받아 레닌으로부터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후 얼마되지 않아 25군단 조선인 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소련군의 고려인 배제정책이 노골화되면서 1923년 군복을 벗어야 했다.

 

홍 장군은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일하다가 1937년 카자흐스탄 크질 오르다로 강제이주됐다. 크질 오르다에서는 고려극장의 야간 수위 생활을 했으며, 조국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눈을 감기 직전엔 정미공장 근로자로 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크렘린에서의 홍범도 장군

 

레닌기치의 1943년 10월27일자에는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 부고자: 크질 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이라는 부고가 실려 있다. 현재 그의 묘소는 크질 오르다에 있다.

 

정씨는 "한국의 어느 백과사전에는 '홍 장군이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다 사망했다'고 돼 있는 등 한국내에선 홍 장군의 사망경위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같다"고 안타까워하면서 "레닌기치에 실린 부고내용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유창엽 특파원yct9423@yna.co.kr

 

참으로 못난 후손들을 대신하여 사죄드립니다. 하루 빨리 유해를 대한민국 현충원으로 모시고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