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땅의 고대문화

먼 발치 매운 눈 2016. 4. 28. 09:28

 

탐라가 처음 역사에 기록된 건 3세기 경에 진수가 쓴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편에 의해서다.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면 ‘주호가(洲胡)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다’고 되어 있다.

 

그때 당시 중국에는 탐라가 아닌 ‘주호’로 소개되어 있고 위치가 마한(백제)의 서쪽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답사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전한 것을 기록했기 때문이지만 제주를 말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제주고씨세보’에 의하면 탐라의 개국을 BC 2337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시기와 비슷하다.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백제ㆍ고구려ㆍ신라와 각각 교역한 것으로 ‘삼국사기’ 등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어 왔다. 이 무렵 중국의 ‘신당서’의 기록에는 “용삭 초년(신라 문무왕 원년, 661)에 탐라(耽羅)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인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황제를 뵙게 하였다. 그 나라는 신라의 무주(지금의 광주광역시) 남쪽 섬 위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근래 어느 재야 학자가 탐라는 섬에 국한된 나라가 아니라 한반도 본토 일부를 점령하고 통치하던 국가라는 설을 내놓아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편의 기록을 그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는 ‘탐라 27세 지운왕(484~508) 때에 백제가 탐라를 치려고 무진주(광주)까지 내려왔다. 이에 탐라는 사신을 보내 화의하고 백제군을 회군시켰고 이후 탐라는 백제의 간섭으로 신라 및 고구려와 교역을 중단했다’는 기록을 전거로 하고 있다. 여기서 탐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온 것도 아니고 광주까지 내려온 백제의 장군과 화의를 했다는 것은 당시 탐라의 강역이 전라 나주까지였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백제가 탐라를 치려는 이유가 담왕 때(476년)에는 백제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쳐 탐라왕은 좌평(佐平), 사신은 은솔(恩率) 벼슬을 받았으나 이후 탐라는 백제에는 조공을 하지 않고 고구려에 특산물 진주를 보내고 신라와 교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주가 탐라의 점령 하에 있다는 것은 지명에서 나주의 옛 이름 ‘발나’는 ‘별의 나라’(星主의 나라)는 뜻이고, 용담동에서 발견된 옹관이 제주에서 만들어진 옹관과는 다른 나주의 옹관과 같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했다.

 

고려 시대 삼별초 점령시기에는 남해안 일부까지를 통치아래 두었던 기록이라든지 이후 백여 년 몽골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세종조(1402년)에 와서 조선에 완전 편입되기까지 탐라는 독립 국가였다.

 

잃어버린 탐라의 역사를 찾아서 中에서

강용준, 한국문인협회 이사·작가, 제주신보 논설위원

 

 

 

흥미로운 가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