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이주일의 小史

양관용 2013. 5. 16. 16:52

 

 

 

 

 

<46> 이후락·김일성 평양 극비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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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4일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한 이후락(왼쪽) 중앙정보부장이 같은 해 11월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다시 찾아 김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2년 5월 4일 새벽 1시 평양 모란봉 초대소. 이틀 전 판문점을 통해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잠을 자던 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장 동지! 급히 가셔야 할 데가 있습네다."북한의 대남 실무를 맡고 있던 유장식이었다.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와 이미 두 차례 회담을 마쳤던 터라 남은 건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뿐이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리라 당황스러웠지만 이부장은 황급히 양복을 갈아입으며 주머니 속에 넣어 온 청산가리를 확인했다. 비상 상황이 닥치면 입에 털어 넣으려 서울에서 올라올 때 챙겨왔던 것이다.

이부장을 태운 차는 대동강변 포장도로 대신 모란봉 뒷길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북측에서 미리 겁을 주려는 의도였다. 빗길을 뚫고 한 건물 앞에 도착하니 육중한 체구의 김일성이 악수를 청해왔다. "환영합네다. 공산당 때려잡는 정보부장 이선생이 평양까지 오시다니..."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던 이후락은 주춤했다. 캡슐이 녹아 손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캡슐을 떼고 나서야 이부장은 김주석의 악수에 화답했다.

한반도 전역이 냉전의 그늘에서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던 72년, 대한민국 최초의 대북 밀사였던 이후락과 김일성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이부장의 방북 이후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답방을 해 박정희와 면담을 가졌고 남북관계는 급속히 해빙 무드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남북은 7ㆍ4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후락과 김영주는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했으며 분단 27년 만에 이뤄진 이 합의는 이후 남북의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이 됐다

남북이 이같은 합의에 이르게 된 계기는 핑퐁외교로 대변되는 미국중국의 국교정상화 등 국제적인 화해 무드가 큰 힘을 발휘했다.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당국자들간의 비밀회담을 통한 합의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남북조절위를 통해 대화의 물꼬가 마련됐지만 이후 권력유지를 위한 남한의 10월 유신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채택으로 남북 관계는 다시 빛을 잃어갔다.

비밀회담의 주역이었던 김일성 주석은 94년 사망했고 이후락 부장 또한 2009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이 있은지 40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남북 관계는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