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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KUKU 2016. 9. 18. 02:27

삼국 시대의 복식

 

고구려인의 복식

 

고구려인은 추운 북쪽지방에 위치해 있고 중국의 침입을 걱정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구려인의 입었던 의복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고구려 옷의 기본적 구조는 님자는 머리에 모자(관모)를 썻으며 좁은 소매의 저고리와 말을 타기 위한 바지, 목이 긴 신발이었다. 여자는 저고리의 길이가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어 띠를 매었고, 바지 위레 치마를 입었으며 추위를 이기기 위해 두루마기를 덧입었다.

 

왕과 귀족들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벽화를 토대로 고구려 왕과 왕비를 재현한 그림이다. 왕이 ㅆ고 있는 모자는 백리관으로 평소에 착용 하는 관모이다. 왕비는 홍색 두루마기 차림에 높은 얹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남자 귀족의 모습
 
편안하고 풍성한 차림새 속애서 머리에는 절풍을 쓰고, 귀에는 귀고리를 하였다. 아침에는 실내외에서  평상복으로 다 입을 수 있으며 , 절풍에 깃털을 꼿고 비단 두르마기를 입으면 바로 고급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여자 귀족의 모습

 

머리, 치마, 저고리가 모두 길고 풍성하며 늘어진 소매에도 여유가 넘친다. 눈두덩의 붉은 화장과 붉은 연지 , 붉은 입술이 귀부인의 품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고급 비단에 자수를 곁들인 저고이 아래단과 색색천을 이어 붙인 색동 주름치마가 세련됨을 더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의 모습
 
삼실총의 수문장 그림을 토대로 재현한 고구려장수의 모습이다. 좌우로 뿔 모양장식이 솟은 투구를 쓰고, 목가리개를 하였으며 비늘 갑옷을 걸쳤다. 또한 바닥에 송곳처럼 끝이 날카로운 쇠막대를 촘촘이 박은 금동신발을 신었는데  기병이 보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덧신은 신발이다.
 
 
평민의 모습
 
결혼한 여자의 머리는 단정히 묵었고, 남성은 흑건을 섰다. 검은색 사각바지를 삼각으로 접어서 양끝을 묵은  흑건을 젊은 사람들이 애용하였다. 허리에 맨 띠는 삼국시대에 일반적인 것으로 대개 앞이나 옆에서 매듭을 짓고  짧에 늘어뜨렸다. 고구려 여자들은 주름치마를 주로 입었는데 삼베나 짐승 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다.
 
 
 

귀족의 시녀 

 

활동이 많는 시녀의 옷은 주인 부부에 비해 몸에 맞게 되어 있다. 소매는 짧고, 좁으며 치마도 짧게 재단되어 속바지가 보인다.

 

 

왕의 시녀

 

머리에 가채를 얹고 저고리 위에 쪼끼, 또는 숄 처럼 보이는 겉옷을 두르고 있다

 

 
 
그밖에 벽화에 나타난 옷
 
 
무용총 벽화로 여러명이 긴 소매를 늘어 뜨리고 소매춤을 추는 장면이다. 새의 꼬리를 한 뭉치 꽂은 절풍을 쓴 사람이 앞장을 서고 두루마기를 입은 여자  2명이 뒤를 따르고 있다

.

 

 

덕흥리 고분 벽화로 오른쪽애 서있는 직녀가 소를 끌고 가는 견우를 떠나 보내는 장면이다

 

  

소가 끄는 수레를 탄 귀족이 250여명의 악사,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차하는 모습이다.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과 악단 , 재주꾼 등을 볼수 있다.

 

  

무용총 벽화로  주인과 손님이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머리가 짧고 주름치마를 입은 왼쪽 두사람이 손임인 스님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관모를 쓰고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주인인 귀족이고 가운데 작게 그려진 사람이 시종이다.

 

 

실제 벽화의 모습

 

귀족 부부가 나들이 가는 모습을 그린 벽화이다. 부부 뒤에는 시종들이 일산을 받쳐 들고 있다. 나들이 앞에는 재주꾼들이 장대 걷기, , 통굴리기 등 재주를 펼치고 있다.

 

  
귀부인의 뒤를 따르는 날씬한 시종들은 모두 회색 주름치마에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실제 벽화의 모습

 

평양시 덕흥리 고분 벽화로 차례로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화살로 과녁을 가장 많이 맞힌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백제인의 복식
 
백제의 벼슬아치의 품계를 16품으로 정하고 관모, 의대,색깔등으로 위 아래를 구별하였다.  1품에서 6품까지 관모에 은으로 장식을 하게하고 의복은 6품 이상이 보라색, 12품이상은 붉은 색, 16품이상은 푸른 색을 입었다.
 
왕의 모습
 

  

  

왕은 자주빛의 소매가 넓은 웃옷에 통 넓은 청색 비단 바지 를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매고 , 검은 가죽신을 신고  머리에는 금장식한 검은 비단관 을 썼다

 

왕비의 모습

 

 
고깔형의 관모에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두르마기나 반소매 옷인 반비를 덛입고 있다. 금실이나 금박으로 옷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고급 장신구로 치장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화려한 장신구
 
무녕왕릉에서 나온 금동투조무늬 관식으로 불길 모양을 형상화한 것인데 너울 거리고 반짝거리면서 불길의 입체감을 살려주는 무늬가 규칙적으로 뚫려있다. 고구려의 구름 무늬나 불길무늬와 비슷화면서도 더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백제 특유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무녕왕릉에서 나온 귀고리로 귀에 거는 작은 고리와 고리 밑에 드리워진 장식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와 장식이 경주 부근에서 나온 신라의 금귀거리와 비슷하다. 고리에는 두줄의 장식이 매달려 있다. 순금으로 만든 백제 금속 공예의 으뜸이다.
 
 
금모곡옥으로 비취색 굽은 옥에 누금 세공을 한 금제 모자를 쒸운 것으로 무녕왕릉에서는 장식으로 금모자를 쒸운 유물이 모두 25개가 발견되었다
 
 
양 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귀족을 재현한 그림
 
양직공도는 6세기 중국의 양나라의 원제라는 황제가 즉위하기 전 전형주자사로 있을 때 편찬한 그림책이다. 여기에는 판본에 따라 24명 또는 32명의 외국 사신 들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다. 백제 사신은 단아한 용모에 관모를 쓰고 무릎을 약간 덮은 두르마기를 입고 있다.
 
 
 
 
백제의 장인의 모습
 
양직공도를 토대로 기와전문가인 와박사를 재현한 그림이다. 박사는 교육을 맡아 보던 관직으로 기술자를 우대하던 백제에서 박사는 꽤 높았던 신분이 었다
 
 
 
귀족들의 거주지를 재현한 그림
 
백제에서는 일찍 부터 신분에 따라 옷의 색갈을 구별하여 입는 제도가 있었다. 관리는 붉은 색깔의 옷을 입었고 허리띠의 색으로 서열을 표시하였다. 6품관 이상은 모자(관모)이 양쪽에 은 꽃을 장식하였다
     

  

 
 
 
평민들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
 
평민은 붉은 옷을 입을 수 없었고 청올치(칚에서 뽑아낸 속 껍질) 나 삼베를 옷감으로 사용하였다
 
 
물꼬를 트는 농민
 
 
음식창고에 있는 아녀자
 
 
신라인의 복식과 화장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국력이 강해지고  문화와 문명도 찬란하 밫났으며 불교 예술이 번성하였다. 신라 복식은 관모,저고리, 두루마기,신발 등을 입었다. 당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드리면서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는데, 관모로는 복두, 옷으로는 단령등이 있다.
 
왕의 모습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화려한 두루마기를 두르고 있으며 허리에는 요패를 두르고 있다
 
 
 

 왕비의 모습

 

얹은 머리에 귀걸이와 곡옥으로 만든 목걸이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습을 상상한 그림이다

 

 

여왕의 복식

 

이화여대 패션디자인연구소(소장 김혜연 교수)’가 디지털로 복원한  신라시대 여왕이 착용한 복식이다  

 

 
여성이 나랏일을 돌본 사례는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볼 수 없는 신라시대의 특별한 경우이다.
 
신라시대 여왕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금관, 대, 이식, 경식 등을 모아 당시의 복식 착용 모습을 그려보았을 때, 여왕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그 위에 겉옷으로 포를 걸치고 각종 화려한 장신구를 달았다

 

금관은 산자식 입식을 3, 4단 세우고 뒤쪽에 사슴 뿔 모양의 장식을 비스듬히 세웠는데 각 입식에는 300개의 비취, 57개의 곡옥(곱은 옥)이 금실에 달려 있다.

 

곡옥과 달개가 가득 달려 있는 넓은 관 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 뿔 장식을 접합한 금관이 있다.

그 관 테에는 상하 가장자리에 2줄의 점열무늬와 파상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파상무늬 사이 사이에 원권무늬가 찍혀 있다. 포의 깃, 도련, 수구에는 화려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 허리에 두른 화려한 과대에는 여러 줄의 요패가 길게 늘어져 있다.

 

이식은 귀에 거는 장신구로서 귀를 뚫어 꿰는 것과 귓바퀴에 거는 것이 있다

 

 

복두와 단령

 

중국 당태종의 입상으로 복두와 단령을 입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평민들의 모습

 

평민들은 의복 뿐만 아니라 장신구, 허리띠, 신발 심지어 빗도 계급에 따라 다른 것을 썼는데 주로 삼베 로 만든 옷을 입었다

 

 

 

 

 

 

신라의 토용으로 보는 신라의 복식 - 의상

 

1986년 신라 사람들의 입성거리와 사회생활을 알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토용이 신라땅 용강동에서 나왔다. 특히 이 토용은 '흥덕왕 복식금제'에 나타난 명칭들을 푸는 열쇄가 된다. 입성거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물이다.

 

그중에서 필육(직물)으로 만든  옷이 있다면 모약,색,크기,재료, 바느질을 알아 볼수 있어 좋겠지만 오랜 시간 견딜수 없고, 더구나 전란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문헌, 그림, 조형물 및 전해오는 이야기 거리도 좋다. 이에 못지 않은 것이  사람의 모습을 앞 뒤,옆 머리 , 발등  모두를  알아볼수 있게 만든 것이 토용이다. 토용이라면 얼른 생각나는 것이 있다. 중국 진시황릉의 등신대 토용이다. 용강동에서 나온 토용은 남자 15점,여자 13점 이다. 크기는 아쉽게도 남자는 13.8cm ~ 20.5cm, 여자는 11.7 ~17.2cm 이지만, 등신대 토용 못지 않게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인의 입성거리에 대한 답은 오리 무중이다. 금,은으로 만든 관이나 허리띠, 신, 칼, 목걸이, 귀걸이 반지 같은 것들은 많건만 입성 모양새를 알 옷가지는 없다. 다행이도 신라인의 풍속이나 옷이 중국 기록에 가뭄에 콩 날 만큼 보이는데 '고구려와 비숫하다'라고 했다.  이런 기록이나 다른 자료들로 보충되는 데 고구려시대의 입성과 생활상에 대한 연구 거리로는 옛 그림에 그려 있는 그림이 일품이다.

 

최근 자료로 중국 집안 주변에 31기, 북한 평양 주변에 76기, 합이 107기나 된다고 한다. 벽화는 4세기 부터 7세기가지 400년이나 그렸으며 이 중에서 입성을 알 수 있는 안악 3호분의 250명이 있는 행렬도는 매우 좋다.

 

신라 의생활의 면모를 보자

 

백관의 공복이 법흥왕 10년(523)에 제정되었는데 손에는 홀을 들고 관모는 복두를 쓰도록 히얐다. 그후 진덕왕 3년(649)에는 중국의 의복을 받아들이고 문무왕 4년(664)에는  부인들 차림도 중국 것으로 바꾼다. 신라 기록에는 문무왕 5년(665) 부터 당으로 부터 성덕,효성,원성, 경문왕 5년(865)까지 왕 이하 재상들의 관복과 옷감이 왔다. 

 

통일 이후 성덕왕대(702 ~736)에는 당현정으로 부터 가장 많은 관복을 받아 드렸으니 조정에서는 당풍이 성행하였을 것이다.태평성대를 누리던 중 사치와 낭비가 심해지고, 복식제도가 문란해지자 42대 흥덕왕 9년(834)에 금제가 나왔다.

 

진골대등, 진골에서 부터 6두품,5두품,4두품, 평민가지 각기 남녀를 6등급으로 나누고 금제 항목은 모자부터 신 버선,옷감의 굵기, 색까지 21가지를 정했다. 금제사항은 남성보다 여성이 2배가많았다.

 

과연 용강동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느 시기이며, 토용은 왜 넣었을까?

처음 보는 색을 입힌 토용과 함께 크기는 작지만 왕의 묘 주변에 호석으로 두르는 청동십이지상(7점)까지 나왔으니 모두 흥분했다.

 

처음에는 무덤의 주인공을 왕王급일 것이라 여기고, 시기는 각기 나온 물건 및 무덤의 축조기술이나 502년 지증왕 때에 순장제를 금한 다음 무덤 안에 토용을 묻기 시작한 점을 참조로 7세기 초에서 8세기 후반까지로 보았다.

 

용강동 출토 토용은 흙으로 빚었으며, 겉에는 흰색과 붉은색[緋色]으로 다르게 칠한 것으로 나뉘는데 상류계층으로 보이는 것은 크고 붉으며 갖춤이 복잡하다.


여인용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공통으로 머리는 정수리에 바짝 올려 넓게 서려 얹고, 풍만하고 살찐 몸매에 여유 있고 넉넉한 옷을 입었다. 치마말기는 저고리 위로 얹은 다음 가슴 위치에 매고 허리띠를 매었는데 띠는 다시 앞으로 늘여 내렸다.

 

그리고 목 아래 가슴팍은 훤히 드러내놓았으며 치마는 풍성하고 땅에 끌리게 길다. 이중에서도 제일 크고 퉁퉁한 여인 하나는 소매가 넓고, 신코는 살짝 치마 밖으로 솟아올라 신코 끝에다 땅에 끌리는 긴치마 단을 살짝 얹어 놓았으며, 또 다른 목 부분이 없어진 큰 여인과 함께 어깨에 어깨걸이를 둘렀다. 이 어깨걸이를 당에서는 “피백”이라 하고, 신라 흥덕왕 때 금제에는 “표”라고 했다.

 

 


남인용은 차림새나 크기로 여인용에 비해 여러 등급으로 나뉜다.

상류계급용은 단령을 입고, 복두를 썼으며, 옆에 패식을 차고, 손에는 홀을 든 것도 있다. 중간계급용은 소매통이 좁고 짧은 단령을 입고 복두를 쓰거나 건을 썼고, 가장 아래 계급용은 소매가 좁고 짧으면서 옆이 트인 포를 입고 운동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인용 중에는 코가 크고 눈이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 이는 괘릉掛陵 앞의 부리부리한 눈에 곱슬머리의 서역사람 같은 지킴이 하고도 상통하는 느낌이다. 당시 당唐은 세계로 통하고 거기에 통일신라도 같이 합세했으니 신라도 국제무대에 같이 했을 터이고, 이에 국제 용병도 있을 법하다.

 

이쯤 해서 용강동 토용의 시대와 무덤주인공의 계급을 그려보자.

 

신라의 관계官階를 보면 17등급이다. 진골 이상 급은 1~5까지, 6두품 급은 6~9까지이며 옷을 보면 진골 이상은 자의紫衣에 아홀牙笏, 6두품 급은 붉은 옷에 아홀을 들었다. 그런데 제일 상위층이 복두를 쓰고, 붉은 옷을 입고, 홀을 들었으니 이는 6두품에 해당한다.

 

따라서 주인공은 이 계급을 거느릴 수 있는 왕 이하의 왕족급이나 진골 이상이 될 것이다. 입성거리나 모습들로 보면 시기는 중국 당이 번창했던 시대로, 우리는 통일신라 이후 8세기 초에서 중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649년에 “시복중조의관始服中朝衣冠”이라 하였으며, 16년 뒤에 여자 것도 바꾸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국제의 관복제도는 중국 것으로 바꾸어 조선말까지 1,3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물론 상류층도 속에 입는 옷이나 집에서는 우리 옷인 저고리에 바지와 치마를 입고, 겉옷이나 의례 때는 중국제를 입어야 하는 이중구조를 이루어온 것이다.


용강동 출토 토용은 남녀 용 모두 중국풍이다.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는 복잡한 이 시기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준다. 649년 가장 강한 나라 중국이라는 이웃의 관복을 취해야 했던 당시 신라 조정의 속내, 그러면서 그 후부터 1,300여 년 동안 이어진 사건들…. 그런 흔적들 중 하나가 이 땅 경주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선린우호의 징표인가? 통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통일신라 이전 것들을 보자.

 

단석산 신선사의 암벽에 새긴 공양인물상, 경주박물관의 이차돈의 공양당에서 우리의 전통 옷인 바지와 저고리를 본다. 황남동 출토라는 부부 토우에서 남자는 상투를 틀고 통이 좁고 발목이 보이는 좁은 바지를 입고, 여자도 발등이 보이는 치마를 입고 있어 청상 가까이 계셨던 우리네 할아버지 어머니상이다. 말 무덤이라고 불렸던 황성동에서 나온 토용 인물 6점에서는 신라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특히 황성동 남인용은 중국인물과 혼용되었으나, 여자는 가르마를 정수리까지 타고 뒤통수에서 비틀어 묶은 머리, 수줍은 얼굴을 한 자태와 확실치는 않지만 좁은 소매의 웃옷에, 긴치마를 입은 모양은 전형적인 한국형이다. 황성동 여인은 용강동 여인과 달리 국속 지킴이의 귀한 자료이다. 이 여인들이 있어 비교하기 좋다.  *************<고부자/ 단국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 / 문화재청 전문위원> 

 

 

신라인의 화장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 부녀의 화장을 "분대하지 않고 가발을 아름답게 땋아서 머리에 두르고 구슬로 장식했다"고 기록돼 있어 화장문화가 크게 일반화되지 않고 옅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간직했으며 생활 수준 역시 고도화되었으므로 통일 이전 엷은 화장의 경향이 통일 이후 다소 화려해진 것으로서 신라인들은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史想)에 의한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고 미남, 미녀를 선호하고 존중까지 하였다.

 

신라시대 3백여명 낭도(郎徒)의 우두머리인 원화(源花)는 아름다운 여자 중에서 선발하였는데 첫 원화로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 발탁되었으나 시샘 끝에 살인하는 불상사가 생겨 이들 대신 화랑(花郞)을 선발하였다.

 

화랑들은 아름다운 미소년(美少年)으로서 아름다운 색깔의 옷차림에 귀고리를 달고 분을 바르고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한다.

 

화장용구로는 족집게로 눈썹모양을 가다듬거나 일부를 뽑거나 이마를 넓게 보이기 위해 잔털을 뽑고, 또 분 바르기 전에 안면의 솜털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수발형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화장형태도 초기에는 주술적 경향이 강했으나 점차 미화수단으로 발전됐다.

이는 그 당시의 보편적인 종교였던 불교의 보급과 함께 목욕의 생활화가 이뤄져 더욱 가속화 됐다.

 

삼국시대에 널리 행해지던 목욕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절정을 이루게 되며 이에 따라 화장풍속도 더욱 유행하게 됐다

[출처] 삼국 시대의 복식|작성자 ohyh45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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