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서 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26

아름다운 소식

나훔1장1-15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면 좋겠어요?

좋으신 하나님이시면 좋겠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면 더 좋겠죠?

우리의 꿈과 희망을 팍팍 채워주시는 분이면 좋겠죠.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한번 살펴 볼까요?

2절에 투기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

 대적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하나님

3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권능이 크신 하나님,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7절에는 선하신 하나님,

 

8절에는 멸하시는 하나님,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는 하나님

 

9절에는 온전히 멸절하시는 하나님, 다시는

 재난을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12절에는 멸절하시는 하나님,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

, 다시는 괴롭게 하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

 

13절에는 결박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14절에는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시는

하나님, 무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15절에 악인을 진멸하시는 하나님.

 

꿈과 희망을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나훔서 1장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말씀입니다.

또한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에게도 나훔서 1장

말씀은 없어서면 좋겠다는 말씀이지요.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심판하고 다시 구원해 주지만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구원해 주고 심판해

버리는 형국이니 그렇지 않겠습니다.

 

 7,80년 전 요나 선지자의 외침에 회개한 저들이

 결국은 멸절당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대하게 대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은 당혹스럽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참 우끼지 않습니까?

사람도 아니고, 그것도 여자도 아닌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구원해 주었으면 쭉 가야지 멸망시키는 이유는 또 뭐냐 말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서 심판을 했으면 끝내야지 왜 다시

또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느냐 말입니다.

 

로마서 9장 19-23절을 보겠습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 마음대로, 원하시는 대로

긍휼을 보여줄 자와 진노를 보여줄 자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런 분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긍휼을 보여 줄 자와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줄자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2절을 한번 해석해 봅시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을 그 발의 티끌이로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유다 즉 이스라엘이나 니느웨 모두 보복을 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나 니느웨 모두 여호와를 거스리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다 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7절에 선하신 하나님이 등장하고,

 환난날에 산성이신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누가 의뢰합니까?

 

이 땅에 여호와를 의뢰하는 인간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있다고 하시면서 아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 알다시피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은

 오직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 뿐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자들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가 있는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니느웨와 유다의 차이점입니다.

심판의 도구와 긍휼의 도구말입니다.

 

이제 15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 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로마서 10장15절에서 간단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좀 풀어 놓고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20절 말씀입니다.

 

나훔에서 좋은 소식은 누가 듣게 됩니까?

유다가 듣는다고 하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피해갑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만 이 좋은 소식을 듣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좋은 소식이라는 말은 니느웨성 사람들이나

 유다에게는 모두 해당사항 없음이 됩니다.

 

그래야만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신다는

말씀이 일관성있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미가서를 볼 때 사마리아와 유다가 여호와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보복당해야 하죠.

 

그런데 유다의 죄악으로 니느웨도 진멸대상속으로 편입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이런 방식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범죄한 유다가 심판받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심판의

 대상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복수거리를 만들어내신 것이지요.

죄를 지어 심판받는 유다를 사용하셔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상황을 만드셔서 사람들이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들추어내십니다.

 

그들도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인 우상숭배와 교만이 가득합니다.

9절과 14절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교만했는지,

얼마나 우상숭배를 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었을때 본인들도 하나님의 대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참 놀랍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들이 여호와의 대적임을 밝혀내십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고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다고 하니 유다사람들은 좋아서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은 자들의 멸망소식은

 고통속에 있었던 자들에겐 참으로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수 없습니다.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자신들을 괴롭혔던 앗수르를 진멸시키시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단지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좋은 소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전에 희미하게 전하였던 좋은 소식, 즉 앗수르의 멸망이나

 바벨론의 멸망 같은 소식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예수님에 의해 전파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대적합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자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들을 결박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메시야라면 좋은 소식을 전하시는 분이라면

반드시 자신들 편이 되어 자신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궁리를 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기분나쁜 소리만 해 댑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일을 무시합니다.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

 봉사하는 것 , 예배드리는 것, 구제하는 것 싹 다 무시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싹 다 무시한 것이 아니고 잘못된 부분만 지적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잘못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네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잘못된 부분만 고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마태복음5장2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너무 많이 오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인정하신 것처럼 말씀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꾸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본받자고 합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운 자가 되자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런 차원이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의 한계말입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의 의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즉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면적 부정입니다.

 

부분적 부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희생제물되신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는 것으로만 천국에 갈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성경읽고, 착하게 살고, 열심히 살아도 천국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에겐 복음으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나쁜 소식입니다.

 

복음이 아니라 저주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죠?

모든 인간은 좋은 소식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멸망당한 경험이 있는 자만이 좋은 소식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아름답게 들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