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구름 나그네 2011. 3. 13. 22:56

칼아, 짝된 자를 치라

스가랴13장7-9

본문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칼에게 명하십니다.

 

칼이 활동할 것을 명하십니다.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와 짝된 자를 칠 것을 명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칼에게 명하여서 자신의 목자, 자신의 짝된 자를 치라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 땅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소위 자신의 오른팔이라는 사람도 얼마든지 제거해 버립니다.

자신의 자리를 탐한다거나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면 그렇게 하지요.

물론 판단이 흐려져서 제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목자, 짝된 자가 여호와께 모반을 꾸며 칼로 치라고 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의 짝된 자를 칼로 치라고 합니까?

 

도무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아닙니까?

 

왜 이런 일을 여호와께서 벌이셔야 합니까?

로마서3장9절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기가찬 말씀 아닙니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말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모든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럴 것 같으면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이럴 것 같으면 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면 왜 지키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을 완전 개보다 더 못하게 취급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최첨단 컴퓨터를 만드는

인간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까?

아니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선언합니다.

너희들은 심판아래 있어!!

 

이렇게 되면 스가랴 13장이 이해가 됩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열려야 하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지요.

그런데 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칼로 자신의 목자, 자신의 짝된 자를 치심으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명으로 활동하는 칼이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의 짝된 자를 치심으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열립니다.

 

우리들이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답답해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바보 같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그렇게 많이 경험하고도 왜 우상숭배를 할까?

나라면 안 그럴 텐데.

이게 우리들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다르게 보십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너희들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자들이야.

너희들은 처음부터 범죄한 인간이야.

너희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야 라고 말입니다.

듣는 인간 기분 나쁘지요.

 

마태복음 26장31절 이하를 보면 이와 똑같은 인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스가라13장7절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초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에 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양떼가 흩어진다는 것에 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왜 양떼가 흩어집니까?

여호와가 여호와의 목자를 치기 때문입니다.

칼로 치시기 때문에 양떼가 흩어집니다.

 

상당히 의도된 행동입니다.

목자를 치심으로 너희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들추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33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 자존심 상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아니 예수님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다녔고 기적도 행했고 하나님 나라 복음도 전한 접니다.

너무 합니다.

 

35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모든 제자도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것이지요. 죽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제자들의 진심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이 진심대로 되어질까요?

제자들은 자신들을 몰라요. 몰라도 한참 모릅니다.

자신들이 어떤 자인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몰라요.

그래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 예수님을 칼로

치심으로 말미암아 양떼로 생각했던 자들이 다 흩어져 버립니다.

예수님을 버립니다.

 

양떼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2절입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 말씀을 제자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왜 못 알아들을까요?

 

자신들은 자신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이유를 몰라요.

그러니 자신 있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목자를 칼로 치셔야 하는지를 저들은 도무지 몰라요.

자신들이 심판아래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처지를 모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요.

그러니 이 세상이 천국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세계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자신의 자식밖에 모르고 자신의 남편 밖에

 모르고 자신의 아내 밖에 모릅니다.

자신의 직장밖에 모르고 , 자신의 나라밖에 모릅니다.

자신의 교회밖에 몰라요.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 자신만 사랑해요.

이런 인간에게 백날 말씀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 말씀조차 자기 자신을 위한 말씀으로 바꾸어 버리니 말입니다.

누가복음18장9-14절을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우린 바리새인은 나쁜 놈이라는 인식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면 우리 중에 박 집사님은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또한 십 분의 2를 헌금하고, 주일날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 집사님은 매일 성경도 읽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주일날도 심심하면 빠집니다.

누가 더 나쁩니까?

간단하지요.

 

그야 최집사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몰라야 하는 분 있지요.

눈치 빠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그래요.

우리 마음은 당장 박 집사는 신앙 좋은

사람이 되고 최집사는 신앙 나쁜 사람 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가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둘도 유대교 안에서 살아요.

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처음 아셨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비교 대상인 세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은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자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말씀 지켰음을 남과 비교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말씀이 자신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말씀순종이라는 무기를 갖고 말입니다.

말씀을 갖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인간으로 보고 있습니까?

 

이런 인간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짝된 자를 칼로 치시는 이유를 모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하는 지를 모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긍휼만이 살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짝된 자를 치셔야만 자신이 살길이 열림을 알지 못해요.

에베소서2장2절을 봅시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가 꿈에도 생각도 못한 말씀 아닙니까?

 

이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답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랍니다.

마귀 즉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그러니 무슨 율법을 순종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말씀이 개입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그렇게 뽐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개입됨으로 , 자신과 비교대상이

 개입됨으로 자신이 마귀의 하수인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리와 같이 되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왜 자신의 목자, 자신의 짝된 자를 칼로 치셔야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버리셔야 합니까?

 

버리셔야 그들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버리셔야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26장26-28절에서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왜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결코 죄 사함이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죽이신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죄용서함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스가라 13장8-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 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리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게 코스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를 칼로 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백성들도 여전히 불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건 구원받았으니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구약 백성들이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니 예수님을 죽인 것이지요.

 이것이 마귀의 종으로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불 가운데를 통과 합니까?

 

제가 어릴 때 들은 설교는 그렇습니다. 견뎌야 한다고 말입니다.

누가 뭘 어떻게 견딥니까?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여호와의 목자, 짝된 자를 칼로 치심으로 그 목자를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뒷짐 지고 노실까요?

주님의 본격적인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이 뭘까요?

 

주님의 주되심을 자기 백성,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9절에서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고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의의 종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까요?

이들이 별천지에 사는 사람처럼 살까요?

아닙니다.

 

구약백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백성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갖고 자기 자랑합니다.

 

똑 같이 넌 아론자손이냐, 난 고라자손이다라고 설칩니다.

그런데 이들은 곧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여전히 기적을 원하고, 지혜를 원합니다. 그런데 곧장 이들은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주 전에 말씀드렸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그냥 기적을 원할 뿐입니다.

지혜를 원할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도 잘났다고 떠들어 댑니다.

 이들에겐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것 또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 짝된 자를 치신 결과입니다.

짝된 자를 주님으로 세우셨다는 증거입니다.

 

날마다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목자를 치신 이유를 알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