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4. 4. 6. 21:09

성령

로마서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 기쁨, 평강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드나요?

소망,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인가?

여러분의 기쁨은 어떤 것인가?

여러분은 어떠할 때 평강을 느끼나요?

 

아프리카 기니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 전에 에볼라 의심환자가 발생해 127명 중 83명이 죽었답니다. 그래서 주변국들이 국경폐쇄조치까지 취하고,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슬람 순례자들의 비자 발급도 잠정 중단했답니다. 침이나 피나, 땀에 의해 전염되는 병이랍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떤 소망을 갖게 될까요? 어떨 때 기쁘며, 어떨 때 평강을 누리겠습니까?

 

그야 병원균이 빨리 사라지는 소망,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소망,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되어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는 소망이 생기겠지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기쁨과, 병들었다가 다시 나았다는 소식이 기쁨을 줄 겁니다.

 

평강이란 에볼라 병균이 감쪽같이 사라질 때 평강을 느끼겠지요.

 

사람들의 소망이나, 기쁨, 평강의 조건은 항상 변합니다.

 

지난 주 제가 말씀드린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에서는 그들의 소망이 남한으로 가는 겁니다. 자유가 억압된 곳에서는 자유에 대한 소망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또 다른 소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변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소망, 기쁨, 평강이라는 것이 하루에도 수도 없이 바뀝니다.

 

창세기16장을 보게 되면 아브람이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즉 자녀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 왔습니다. 자신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도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상속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래가 출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시 풍속대로 종을 통해 상속자를 낳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왜 이런 방식을 선택했을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소망을 이루고, 기쁨을 얻고, 평강을 얻는 방식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갈이 아이를 갖게 됨으로 오히려 집안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갈이 집 주인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결국 사래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사래를 학대합니다. 결국 하갈이 도망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 즉 약속의 자손에 대한 해석을 나름대로 한 결과 소망은커녕, 기쁨은커녕, 평강은커녕 집안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어떤 소망이 생겨나겠습니까? 힘들지 않는 삶을 꿈꾸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소망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애굽에 머물든 애굽에서 빠져 나가든 지금보다 나은 삶을 소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신 후 바로의 군대와 마병을 물에 수장시켰을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사건후 삼일이 지나 말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원망합니다. 물이 없으면 가장 소망하는 것은 물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가장 소망합니다. 환경에 따라 소망이 달라지고, 환경에 따라 기쁨이 달라지고, 환경에 따라 평강도 달라집니다.

제가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 늘 평안하지 못할까?

주님을 믿으면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불안할까?

 

여러분 왜 평강하지 못합니까? 왜 늘 기쁘지 않을까요? 왜 소망은 자꾸 바뀌나요?

 

그러면 소망을 붙잡으면 됩니까? 평강하려고 노력하면 될까요? 늘 억지로라도 웃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까?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서입니까? 물론 그것이 맞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소망이란 인간이 규정할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소망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소망의 소유권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망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소망 없는 짓만 하는 겁니다. 자신이 소망을 만들었다가 무너뜨리고, 또 만들었다가 무너뜨리고, 그러니 기쁨은커녕 좌절과 슬픔밖에 없습니다. 결국 죽음을 맞닥뜨려야 하는데 그 앞에서 무슨 평강이 있겠습니까? 죽는 것이 소망이 아닌 이상 누가 죽음을 좋아합니까?

 

얼마전에 저의 친척이 죽었습니다. 재산이 삼십억 정도 있었습니다. 토지 보상을 많이 받았지요. 그런데 심장쪽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오래 살려고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수술 순간 피가 멈추지 않아 죽었습니다.

 

돈이 있으니 얼마나 살고 싶겠습니다.

자신이 소망을 갖고 있는 이상 주님의 소망이 들어갈 자리까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소망이란 본래 애당초부터 인간이 넘 볼 수 없는 겁니다.

생명, 영생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소망을 계속해서 조작해 냅니다. 심지어 영생, 구원, 천국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소유주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소유주가 주실 때에만 참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모든 기쁨, 평강도 인간이 역시 손댈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쁨, 평강 없이는 불안해서 살수 없지요. 그러니 기쁨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평강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들이 조작한 기쁨과 평강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몸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바뀝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소망은 ,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은 성령께서 주시는 소망이요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했지요. 죄인은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세요.

갇혀 있는 자는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늘 쪽에서 성령을 주셔야만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평강이 생깁니다.

 

그런데 갇혀 있는 자의 탐욕이 활동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소망, 기쁨, 평강을 육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이것을 자기 소유화 하려고 하지요.

 

사울을 왕으로 만드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겸손했지요. 그런데 왕이 된 후 사울왕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자신을 세우신 분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왕인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왕으로 세우신 분이 진짜 왕이심을 증거하라고 세웠는데 자신이 진짜 왕이라고 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평강을 주신분이 누군지를 증거하라고 성령으로 소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당장 자신이 소망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기뻐야 하고, 자신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노력하고 애를 써요.

그런데 그게 생각대로 됩니까?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모든 것이 미끄러져 가버립니다. 잡히지가 않아요.

 

할례의 추종자 되시는 분이 더 이상 이 땅과 관련 없이, 육과 관련없이 하늘로부터 나는 자들을 만들어 내셔서 그들에게 소망을, 기쁨을, 평강을, 믿음을 주십니다.

이 소망과 기쁨, 평강, 믿음은 더 이상 우리의 노력이나, 간구나, 희생이 손을 댈 수 없는 영역입니다. 오직 할례의 추종자 되신 분이 이 일을 친히 주님으로서 행하심을 보여주는 증거물들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그러니 거꾸로 보아야 하겠지요. 여러분 혹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혹시 죄용서 받은 기쁨이 있습니까?

그것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혹시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죄용서함을 받은 평강이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주님이 주신 평강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할례의 추종자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결과물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소망도 , 기쁨도, 평강도 깜빡 깜빡이는 불빛과 같습니다. 참으로 어렵지요.

우린 항상 소망, 기쁨, 평강을 늘 간직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말씀은 거꾸로 하지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넘치게 하심을 말씀하잖아요. 그러나 그분이 주시지 않으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나의 평강을 만들어 내면서 살아가요.

 

오늘도 얼마를 벌까? 오늘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오늘 시험을 잘 봐야 할텐데. 소망이 만나는 것마다 바뀌고 또 바뀝니다.

줄타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애가 알아서 공부를 잘해도 돈 없어 보세요.

 

그런데 돈 많은 집에 애가 공부를 못해요.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자기 밖에 몰라요. 자신의 소망, 자신의 기쁨, 자신의 평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제공한 소망, 십자가의 피로 제공함 기쁨, 십자가의 피로 제공한 평강에는 관심이 없어요. 믿음. 콧방귀 낍니다.

왜 그렇습니다.

 

육이 누르는 것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 못하게 느끼지니 그렇습니다.

그런데 힘을 발휘합니다. 십자가가 제공한 평강, 기쁨, 평강 때문에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긴 걸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주님이 주신 소망, 주님이 주신 평강, 기쁨과 자신의 소망, 자신의 기쁨, 자신의 평강과 싸움 속에서 주님의 피를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