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4. 5. 18. 15:22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인도

로마서1522-24

잠언161절을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마음의 경영을 누가 합니까? 우리가 계획을 세울 때 누구 뜻대로 계획을 세웁니까?

 

내가 내 뜻을 가지고 계획했고 그 결과물을 지금 보고 있노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취업이나 결혼, 사업, 자녀 교육 등등 우리 손에서 계획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항상 마음속으로 계획하여 행동에 옮깁니다.

 

그런데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다.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그러면 우린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계획은 내가 짜지만 걸음은 주님이 인도하신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 편에 서서 하시는 말씀 같잖아요.

계획은 여러분이 열심히 세우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이 처리할 겁니다. 상당히 듣기 좋은 소리 아닙니다.

그러면서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그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겠지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 주지요.

 

그런데 로마서에서 사람을 무엇으로 규정합니까?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주어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거울처럼 열심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에게서는 죄 외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 죄의 창끝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언 16장에 나오는 이 말씀도 이런 입장에서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죄인들이 갖고 있는 인식구조는 자신이 계획하여 그 일을 실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내가 무엇인가 계획을 잡을 수 있다는 자체가 죄인의 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죄인의 본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만 주님께서는 그 죄인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해 버립니다.

 

잠언16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바로 로마서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 직접 이 땅에 오시니 행위가 자기 자신이 보기에 너무나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들이 주장이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깨끗한 생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잠언 162절 말씀을 읽으면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가 보기에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니, 자기 시각에서 깨끗하게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게 살자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자들이 유대인들이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싫어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어떨까요?

과연 잠언서가 하시는 지혜의 말씀을 깨닫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 수준에서 말씀을 해석 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계획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그 계획이 심령을 감찰하시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어떠하다고 생각합니까?

더 나아가 그런 악한 계획조차 심령을 감찰하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걸음들을 사용하심을 믿습니까?

 

창세기40장을 보면 요셉이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꾼 꿈은 자신 앞에 포도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그 사람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그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리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꿈해석은 간단합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청을 하나 합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합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자신의 마음속의 계획이 있었지요.

사실 꿈을 꾸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해석하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지금 꿈과 해석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계획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깜빡 잊어버리게 하시지요. 그런데 만 이년 후에 때가 되니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고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어 야곱의 자녀들을 살리기 위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은 메시아가 아니지요. 주님이 아닙니다. 요셉은 사람일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술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꾸게 하셨고, 하필 그때 요셉이 보디발 아내로 인해 억울함을 당하여 왕의 죄수들이 갇힌 감옥에 있었습니다.

 

요셉이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것은 후에 바로 왕 앞에 서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됩니다. 그러나 이 디딤돌은 요셉을 부정하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릅니다.

억울한 일을 벗어나는 것이 요셉의 계획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다가 총리가 되어 자신을 죽인 형제들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깨끗한 일,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을 계획하고 싶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면 대학을 진학할 학생이 있다면 제가 어느 과를 갈까요? 제가 어느 과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합니까?

 

결혼할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주님 제가 어떤 여자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 뜻대로 결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믿음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사업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그러면서 그 사업을 하나님이 주신 사업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의 행위가 깨끗하고 정당하고 하나님 뜻에 합당하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러니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니엘229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장래 일을 생각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밀한 것을 왕에게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어떤 장래 일을 생각했을까요?

즉 계획했다는 말이지요.

 

금의 제국을 꿈꾸었겠지요. 자신이 왕으로 있는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 뒤에 일어나는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니엘이 해석해도 전혀 분내지 않고 오히려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던 겁니다.

 

여기에도 사람의 계획이 나오지만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따로 있지요.

다르게 말씀드리면 느부갓네살 왕이 장래 일을 생각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그런 길을 걷게 하는 것도 주님이시고 결국 이들, 짐승의 나라가 아들을 죽이는 사건을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분 막혔나니

여러분 생각엔 어떻습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순전히 좇아 복음을 전하겠다는데 하나님께서 왜 막으십니까?

 

왜 방해하는 자들을 만들어서 로마로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사도바울도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각에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니 그가 가진 생각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곤란합니다. 앙대요.

왜 이것이 중요한고 하면 우린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모두다 정당화 할 가능성이 높아요.

 

사도 바울을 막았다는 것은 주님이 사도바울을 통해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나름대로 계획이 세웠지요. 그러나 절대로 그 계획대로 주님께서 하게 두시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118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 속에 사도바울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계획과 주님의 원함이 늘 쨍쨍 부딪힙니다. 부딪히면서 죄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피 공로가 높아집니다.

 

젊어서만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것 아닙니다.

늙어서도 원하는 곳만 가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원하는 곳만 가려고 하는 것조차 띠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도는 자신이 가는 길이 늘 자신이 계획하고 원해서 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길조차 주님의 뜻,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하셨음을 믿게 됩니다.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23,24절을 봅시다. “이제는 이 지방(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대체적으로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다메섹 등)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여러해 전부터 즉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획을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로마가 정치와 문화 중심지, 오늘날로 말하면 서울이잖아요. 서울 가서 복음 전하고 싶잖아요.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생각에 가장 서쪽 지역이라 여겨졌던 스페인에도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꿈도 야무져요. 로마 교인들이 스페인으로 파송해 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바울이나 오늘날 목사들이나 별로 다를게 없어요.

 

그런데 그게 계획대로 될까요?

 

계획대로 안 됩니다. 거룩한 계획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이런 죄인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일을 하십니다.

 

우린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계획이 다 죄니까 계획세우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계획 안 세울 인간 있습니까? 무계획적으로 사는 인간 이 땅에 없습니다.

있다면 잠언서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를 않아요.

 

우리도 부지런히 계획을 세웁시다. 세웁시다 이야기 하지 않아도 세우지요. 그런데 그 계획이 다 무너지는 계획이 되고, 오직 주님의 뜻만 이루는 일에 그 헛된 계획들이 사용됩니다.

 

그 최종적인 자리가 죽음의 자리지요.

야고보서 413-17절을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