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4
지층
고린도전서14장39-40
지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여러분들이 다 배웠을 것입니다.
지층이 만들어지려면 그 층을 구성하는 내용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지층이 만들어집니다. 쌓이는 퇴적물이 많을수록 지층은 두꺼운 지층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우기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나름 지층을 만들고 있습니다. 흘러온 세월만큼의 두꺼운 지층을 만들고 있지요. 그 속에는 자신들이 벌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지층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 여러 지층이라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세계사를 읽어보면 그 특징이 뚜렷이 나옵니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전쟁의 역사로 보입니다. 영토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는지 힘의 논리에 따라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속에 쌓인 퇴적물은 뻔합니다.

어떤 퇴적물이 쌓였을까요?
유명한 사람이든, 훌륭한 사람이든, 뛰어난 장군이든, 임금이든, 왕이든, 과학자든, 철학자든, 신학자든 힘이 없으면 망하든지 죽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연역법으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주님은 연역법이 아닙니다.
귀납법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간접경험이든 직접경험 이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자체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데아를 이야기 한다 해도 그 이데아에 대한 설명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서 할 뿐입니다.
신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여행을 해 보면 성당마다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근거해서 그린 그림입니다마는 누구나 다 이해되는 그림들이잖아요. 그런 그림은 오래된 절간에 가도 다 있습니다.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저 세상은 없습니다. 죽음 후의 세상은 항상 지금 현 세상과의 연속성을 갖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힘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어 보고 그 다음 죽으면 천국 가겠다는 것이지요.

세계사나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아주 단단한 지층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고 그런 시대에 살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역사라는 지층을 연구하고 보면서 자신은 지금의 지층위에 새로운 지층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저께 텔레비전을 보는데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지방대학 출신인데 한국에서는 갈 만한 직정을 잘 찾지 못하니 일본에 가서 취직을 했다는 것입니다.

낯선 땅에 가서 직업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단순히 생존 때문이 아니잖아요. 자신만의 단단한 지층을 만들기 위해서잖아요. 만들어서 뭐하려고요. 그건 잘 몰라요. 그 지층이 만들어지면 새로운 지층을 또 만들기 위해 그 지층에서 탈출하겠지요. 이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지층,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영토 만들기입니다.
자기 영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탈주하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름 자신이 자신의 자리, 영토를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낯선 것이 덮칩니다. 바로 죽음이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비로소 알게 되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자신이 만든 지층, 자신이 만든 영토가 아니라 외부적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이렇게 내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기를 무서워 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걷어 내기 위해 자신만의 영토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겁니다.
오늘은 이쪽 놀이동산에서 놀다가 내일은 저쪽 놀이동산에서 놉니다. 그러다 심심하면 다시 다른 놀이동산으로 옮깁니다.

자신이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제가 앞서 인간들은 연역법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했잖아요. 물론 귀납법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 귀납법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의 귀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주님이 누구시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나름 만들어내는 영토들, 나름 자리 잡아 그곳에서 말 타고 즐겁게 뛰어노는 고원조차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왜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는 인생,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는가에 대한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왜 아담과 여자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만들었습니까?
왜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구원했습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정말 배에 탄 짐승들보다 못한 사람들입니까?
왜 아브라함만 선택했습니까?
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왜 이방인들은 지옥가야 마땅합니까?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입니까?
왜 모든 것이 예수님 마음대로입니까?
왜 우리에겐 어떠한 자주권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지층을 보게 되면 화석들이 나오는데 그 화석들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지요. 확정된 자리입니다.

성도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성도 아닌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가 확정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자리인지 긍휼의 자리인지 그 자리는 내가 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화석처럼 고정되었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정되면 좋은데 우리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고정된 것이 아니지요.

어저께 바닷가에 가보니 녹조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듯이 우리의 삶이 그렇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놀이공원, 안전하고 더 이상 불안감이 없는 놀이동산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물론 이것도 얼마 갈지 모릅니다.

사사기 2장21-23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이 말씀만 들으면 우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개고생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 왔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곳에 있는 자들을 싹 쓸어버리시고 지상낙원을 건설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주 의도적으로 열국들을 속히 쫓아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들 시각에는 분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열국들을 진멸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해석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들과 안 맞아요.

우리를 이 더운 여름을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직장을, 왜 이런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우린 나름대로 할 말이 많지요. 제가 대학전공이 이러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전공이 그러한데 그 전공한 친구들이 다 나와 동일한 직장에 다닙니까?
그것은 아니잖아요. 내 나름대로 나만의 층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피 땀 흘려 노력했습니까?

지금의 나의 사업이 누구 때문에 여기 이 자리까지 왔습니까? 지금 장사가 안 되는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압니까?
정치가들이 잘못 정치해서 그런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름대로 나만의 지혜를 발휘해서 이 어려운 시기에도 돈을 벌고 있다는 겁니다.

우린 우리의 수고밖에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께서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진 이유를 몰라요.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하셨는데 우린 평평한 고원을 원합니다. 말을 타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초장을 원하지요.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내가 만든 자리고 이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은 자신들의 힘에 의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곳에 힘 있는 자들을 진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십년 동안 뺑뺑이 돌았으면 철이 들어도 한참 들어야 하는데 인간은 안 됩니다.
사십년이 아니라 사백년 아니 육천년 동안 뺑뺑이 돌아도 여전히 처음 그 자리입니다.

첫째 아담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나름의 영토 만들기에 급급합니다.

방언과 예언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차라리 방언과 예언을 안 주시면 좋잖아요.
그런데 또 하는 말이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느 인간이 적당히, 질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해야 적당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질서대로 하는 겁니까?

그러니 차라리 방언 예언 없애버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번거로운 것이 싫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주가 되는 꿈이라고 부모들이나 형제들이 해석해 주었잖아요.

우리가 만일 요셉이라면 주가 되는 과정이 어떠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요셉도 그런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천국 간다면 이 세상에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싹 걷어 내 버리고 보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녹조를 청소하는 배가 싹 걷어 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은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고, 노예로 팔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다 하더라고 그의 신분은 여전히 노예일 뿐이지요.
뿐만 아니라 주인마님의 계략으로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야 이미 요셉이 그 다음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요셉의 삶을 찰나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것도 찰나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린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수에 칠 가치도 없습니다. 999년을 살아도 수에 칠 가치가 없고,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린 이 거추장스러운 인생을 살기 싫잖아요. 바로 이겁니다. ‘살기 싫어’ 하라고 이 삶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살기 싫어라고 준 삶을 살기 좋은 나만의 저 푸른 초원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 우깁니다. 물론 잠시 뿐입니다. 롯데가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이 헛됨을 알라고 많은 돈을, 대기업을 주셨음을 알아야 하는데 어디 죄인들이 그렇습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다른 ‘말을 마음껏 달릴 초원’을 꿈꾸겠지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날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우린 이 사건을 보면서 사복음서를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지 말고, 십자가지지 말고 성령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이런 신앙생활을 꿈꿉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는 거추장스럽습니다. 그야말로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얼른 걸림돌인 십자가를 저 멀찍이 치워버립니다. 그리고 나만의 푸른 초원을 만들기 바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여준 죄인의 모습은, 예수님 십자가 지신 모습은 모두 다 과거로 돌려 버립니다. 오직 나에겐 미래만 있다. 과거는 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식입니까? 나를 죄인으로 가두어두기엔 기분이 안 좋아요.

나름대로 말을 타고 이 고원 저 고원을 뛰어 다녀야 살맛이 나는데 한 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너무나 지루하고 자기 본성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이용해 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증인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다 받은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 받은 인생이 꼬락서니가 영 말이 아닙니다. 꼬라지가 영 말이 아닐 때 주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만든 초원이 무너질 때 진정 구원이 임합니다. 제자들의 꿈이 좌절되는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작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