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구름 나그네 2010. 12. 27. 21:31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누가복음2장1-7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나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곳들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소비자가 필요한 곳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집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보다 장사꾼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더 반기는 듯 합니다.

 

아니 예수님 탄생이 이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습니다.

 

이천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는 모두가

다 아담안에 갇혀 사는 인간들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땅에 첫 번째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몇몇사람들에게는 환영받았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나 목자들은 주님께서 보내신 자들이지요.

주님의 지시로 이들은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7절을 한번 봅시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맏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이 어디에 누워 있습니까?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이유는 방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오심이 하필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이 내린 싯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 합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있다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 갔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태어 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호적하러 사람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여관에 방이 있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예약하고 호텔에 머물면 될 텐데.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에는

이런 인간들의 바쁜 상황 중에 오셨습니다.

 

소도 키워야 하고, 구제역 예방도 해야 하고

, 장가도 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쁩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셔도 어느

누구하나 돌아 보는 자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보낸 자들 동방박사나

 목자들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방이 없어 구유에 누워계신

 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이 동화 같은 것을 읽다보면 나그네들이

 잘 곳이 없으면 헛간 같은 곳에 잠을 자지 않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을 때에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이렇듯 동물들이 여물을 먹는 통 위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나타나 뭐라고 합니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방이 없이 구유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랍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 어떤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대박나는 것 아닙니까?

 

호텔 같은 곳에서 밥먹고, 비싼 차 타고,

비싼 옷 입고, 비싼 집에서 사는 것.

이런 것이 큰 기쁨의 소식 아닙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일등을 해 왔다.

월급이 많이 올랐다.

 

병이 나았다. 이런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구유에 누인 아기가 큰 기쁨의 소식이랍니다.

상상이 갑니까?

 

이것은 마치 우리 자녀가 모든 과목을

영점 맞았는데 큰 기쁜 소식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교인한명 남았는데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목사가 주일날 설교단에 섰는데 교인 한명,

 그것도 자기 와이프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목자가 고생하면서 한밤중에 양떼를 지키는데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구유에 누인 아기가

 큰 기쁜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천사의 말이니 그래도 들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자신들의 처지와 구유에 누인 아기의

 처지가 어떻습니까?

 

목자들에게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이 큰 기쁜 소식이 될까요?

특급 병원에 아기가 누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급 호텔에 아기가 누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리어리한 왕궁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혹 모르지요. 예수님께서 이런 곳에 누워계시면

 목자들이 기뻐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늘의 군대와 천사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관이 있을 곳이 없어, 방이 없어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를 가져 온다는 말입니까?

 

엄청난 돈을 갖고 있고,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아들로 왕궁에 태어 났다면 좀

이해될 말씀이 아닙니까?

 

차라리 가이사 아구스도의 아들로 태어

났다면 천군천사들의 찬양을 납득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어느 곳에 모입니까?

 

이런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들,

돈 되는 곳에 모이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가야 기쁨이 있고 이런 곳에 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요?

 

교회가 만들어 내는 예수님은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구유도 치장을 합니다.

 

구유도 아름답게, 그리고 안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를 다니면서 만든 구유의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아늑하게 보입니까?

 

어떻게 보면 특급호텔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저께 호텔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니 구유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과자로 만들어 놓았지요.

 

구유를 연상 시키는 집인데요.

물론 장사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어요.

그렇습니다.

 

장사가 잘되는 구유.

돈 되는 구유야 말로 참으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지요.

이런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까요?

 

교회마다 트리를 하고 반짝반짝이는 불꽃을 장식합니다.

물론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호텔, 길거리, 식당, 어느 곳이든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정말 구주가 오셨기에 그렇게 할까요?

 

매 성탄절 때 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설 날이면 떡국을 먹듯이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트리를 장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문화가 되어 버리고,

기도하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다 인간들이 하는 하나의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지요.

이것은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이런 문화라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증거하느냐 말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배를 이용하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 기도를 이용합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설교합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의 구유에 누우심을 이용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도 그렇게 합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인간들의 즐거움, 쾌락이 가득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괜히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지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외면당합니다.

요한복음1장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요한복음1장에서는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유대인들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즉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구유에 그냥 내벼려 둡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시편2편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사도행전4장27-28절을 봅시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군왕들이 열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들이 열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가지로 부국, 부자되는 것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결박 끊기입니다.

 

물론 저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조종하는 마귀는 알고 있지요.

저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들의 행동하나하나의

 목적은 주님과 연결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독립적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것이지요.

 

몇일 전 뉴스를 보니 북한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처형한다고 합니다.

물론 감옥에도 보내고 말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북한이 아주 나쁜나라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요 하나의 종교집단이지요.

 

그러나 사실 한국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을 내 뱉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합니다.

 

만일 저들이 할 수만 있다면 죽였을 것입니다.

단지 법이 이런 것을 허용하지 않지요.

그래서 못 죽일 뿐이고 감옥 못 보낼 뿐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꿈꾸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독립.

 아니 주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짓밟아 버립니다.

 

뭉개 버립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성공 성공, 축복 축복으로 말입니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인정해 주지 않는

 예수님은 필요치 않습니다.

 

자신들의 조직을 와해 시키는 예수님은 죽이고 싶어 안달입니다.

누가복음9장57-62절을 보겠습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게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면 별로 밉지가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을 잡고 예수님을 한번 믿어 보겠다고,

 따라 보겠다고 나서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십니다.

 

부친을 잠시 가서 장례식 치르고 오겠다는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잠시 가족과 먼저 작별인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해도 너무한 말씀이 아닙니까?

 

겨우 마음을 잡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려는데 왜 초를 칩니까?

이러한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말씀을 여기에 한번 적용해 보세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 보는 자가 아닙니다.

 

죽은 아버지가 있어도 작별할 가족이

있어도 장례식은 죽은 자들에게, 작별도 하지 말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른 자들에게 주님은 평화를 주셨습니다.

참으로 고약한 말씀 아닙니까?

 

이런 고약한 말씀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런 고약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철저하게 소외 당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철저하게 소외당하십니다.

이 소외당하시는 주님과 함께 소외당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십자가의 피 복음만 전하기 때문에 미움받고 소외 당하는 자가 평화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사는, '우리' 눈에보이는 세상 아닌 다른 세상,실체가 있고,창조주가 있다는게 믿어지십니까? , 섬찍한 느낌조차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 웬 아기, 웬 평화 ,웬 성탄?,그냥 우리끼리 크리스마스 먹고 마시는 날입니다. 모텔은 방이 없어 못 팔고 빚내서 장사하는 술집마다 한숨 돌리는 명절이지요. 산타나 오면돼지 부담스럽게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까진 필요없는 세상입니다. 죽은자들의 세상에서 헛짓하면서 살게하시는 그분이 한없이 낯설게 다가오는 날입니다. 맨날 그렇지만.
사랑△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기적의 병치료법으로 기적을 이루어 보세요.건<font color=#ffffff>⒴</font>강<font color=#ffffff></font>

 
 
 

누가복음

구름 나그네 2010. 7. 25. 22:45

 죄란?

누가복음4장1-13

R.C 스프라울이라는 사람이 죄의 증상에 관해 쓴 시입니다.


죄의 증상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합리화나 자기 변호가 아니라

바로 용서다.

- R. C. 스프라울


그리고 어떤 사람이 저에게 보내 온 글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를 지은 이유에 대해

그럴듯한 변명을

찾거나 만들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 앞에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입니다.


 방금 읽어 드린 시와 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죄를 지었다. 죄를 지었기에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자기 변호를 하면 안된다. 오직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용서를 받아야 한다.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 글에서 우리의 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모습이 어떨까요? 그것은 변명않고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것.


여러분 생각에는 이런 모습이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들은 늘상 죄에 대해 변호하거나 합리화 하는 것이 기본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면 꼴도 보기 싫죠.


그래서 스프라울이라는 사람이 죄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거나 변호하지 말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스프라울이라는 사람의 말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말하면 어떨까요?

전혀 부담감이 없죠?

세상의 윤리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나 다 동의할 만한 그런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늘상 찾아 나섭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동일한 것이 성경에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의 핵심도 자신이 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방송을 보는데 수천명이 모인곳에서 미국목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저는 밑에 자막을 읽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 설교의 핵심은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이지요.


긍정의 힘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말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 목사도 마찬가지죠.

성경에서 꺼집어 내는 것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이 탐욕과 조금 전 죄에 대한 인식과 한 점에서 만납니다.


죄의식을 없애려고 하는 탐욕과 땅에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려고 하는 탐욕.


이들은 무엇을 모릅니까?

죄를 몰라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죄도 모르고 예수님을 믿어요.


오늘 본문을 한번 살펴 볼까요?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성령충만 입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성령님께 이끌린 상황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지요.


우린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마귀랑 상관없는 자가 될 것이다.


마귀가 얼씬도 못한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가 함께 놉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성령님과 상관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마귀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성령충만을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알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을 입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마귀가 함께 논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나 성도는 늘상 마귀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어떤 자인가를 마귀가 활동함으로 밝히 드러냅니다.


앞서 예를 든 그런 사람들이 활동하는 것을 성도만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시험 내용이 재미있죠.

사십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귀가 이 상황에 딱 막는 시험을 가져 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하라”

우리가 늘 부딪히는 시험아닙니까?


이런 시험 안 해 봤습니까?

마귀는 상황에 맞게 시험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에서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이 빠졌습니다 마는.


사람들은 굶주릴때 생각하는 것이 밥입니다. 떡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살지 다른 무엇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다른 것으로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적 있나요?


성도라면 해 보셨겠죠?


그러자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 줍니다.

네가 내가 절하면 이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예수님께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이렇게 말하죠.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마귀가 지금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에게 절만하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보다 주님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응수하셨습니다.


여러분,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만 경배하는 것을 택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같으면 주님도 경배하고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도 동시에 달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노림수가 그런 것이지요.

주님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마귀에게서 뺏어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성경구절을 언급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밥도 안되고 세상권세도 안되니 이제 말씀을 갖고 시험을 합니다.

말씀대로 해 보라는 것이지요.


우리속에 마귀가 살고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가나요?


1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였느니라


우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이루어 주세요, 능력도 주시고, 병도 낫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게 하시고, 물위도 걷게하시고.


말씀을 믿으니 믿음대로 해 주세요.


그러니 마귀와 어찌 그리 똑 같습니까?


마귀는 굶주리는 자에게 밥을, 그리고 세상 권세와 영광을, 그리고 말씀대로 능력을 보이라고 시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본문과 서론에서 말씀드린 죄와 무슨관계가 있습니까?


그걸 찾아 보고 오늘 설교 마치겠습니다.


마귀는 지금 예수님과 자신을 어떤 관계에 놓습니까?

별개의 관계입니다.


독립적 관계입니다.


아니 독립적 관계를 뛰어 넘어 예수님을 주도적으로 자신의 편으로 끌어 오려고 하죠.

자기 편 만들기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긴다는 말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이용만 해 먹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상관없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는지를 몰라요.


그러니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쇠똥구리가 똥속에서 굴러 다니듯이 죄 속에서 떼굴떼굴 굴러 다니는 것을 몰라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짓을 우리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니 죄를 예수님의 피흘리심과 관련짓지 못하고 자꾸 자신이 행한 나쁜짓을 죄라고 생각해요.


마귀가 무슨 나쁜짓 했나요?

배고플때 돌로 떡덩이로 만들어라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다.


세상권세 영광을 주겠다는데 그게 무슨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나요?

단지 한번 마귀에게 절할 뿐인데.


말씀대로 해보라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사람들은 늘상 말씀말씀하지 않습니까?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이 나쁘다면 무엇이 마귀에게 절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게 돈을 번단든가 하는 짓을 생각해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부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하면 돈을 벌기 위해서 세상 권세를 위해서 십자가 피와 상관없이 살겠다는 것이지요.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 피를 이용해 먹겠다는 것이지요.

마귀의 근본 사고 방식과 똑 같죠. 

여러분은 주님되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관련 있게 삽니까 아니면 피와 상관없이 살아갑니까?

 
 
 

누가복음

구름 나그네 2009. 8. 7. 01:14

낙망하지 않는 기도
누가복음 18:1-8


오늘 본문 말씀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도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에 대한 선입견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끈질긴 기도의 필요성’

과연 이런 제목이 맞을까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면 기도응답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과부가 끈질기게 불의한 재판관에게 요청을 하니 불의한 재판관이 그의 원한을 풀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우리의 요청을 끈질기게 하면 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끈질기게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면 들어주실 줄로 믿고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이런 식의 기도와 응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본문부터 풀어 봅시다.
1절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사람인고 하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아 되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도는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지고, 동시에 낙망할 정도의 처절한 상황에 놓여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할 수 밖에 없는가? 낙망할 처지가 어떤 처지인가?

비유를 살펴 봅시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있습니다.
과부가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무엇을 풀어 달라고 합니까?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줄 것이라는 것은 아마 0.001%도 생각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믿을 곳을 불의한 재판관 밖에 없습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서 원한을 풀어줍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이 7,8절입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이 밤낮 부르짖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원한 갚아 달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원한 갚아달라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 하는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면 꼭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를 들어 주시는고 하면 원한 갚아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원한이 돈에 대한 원한 일까요?
아니면 건강에 대한 원한 일까요?
아니면 자식 잘되게 해 달라는 원한 일까요?

마태복음 6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는 정성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드라마를 보면 한 겨울에도 물 한그릇 떠 놓고 하얀 소복입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끈질기게 기도합니까?
이방인들의 사고 방식은 말을 많이 하고 오래하면, 정성을 다하면 신이 자신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들어 줄때까지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마태복음 6:31-3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이 목숨걸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건강하게 해 주세요. 잘 살고 부자되게 해 주세요. 자식 잘 되게 해 주세요. 우리 나라 부강한 국가 되게 해 주세요. 이런 내용의 기도입니다.

이들은 이 내용의 기도를 이루기 위해 정말 끈질기게 목숨 걸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기도가 이루어 질까요 지지 않을까요?
이루어 지는 것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주몽을 보면 아주 잘 표현 해 주었는데, 대소왕자가 주몽이를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죠. 그런데 벼락맞아 신녀가 죽습니다. 그런데 주몽이는 자신의 지역에 역병이 돌고, 식량난이 왔을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되죠. 어떻게, 정보를 얻어 해적질 하는 사람을 만나 약재와 양식을 공급받지 않습니까?

결국 이게 무엇입니까?
땅의 것들 아닙니까?

기도한 것들이 땅의 것들이니까 당연히 땅의 것으로 응답되어질 있습니다. 물론 응답이 아니 될 수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저들은 이것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신께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되든 자신들 임의대로 신의 응답이다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땅의 것이 아닙니다.
땅의 것이라면 우리도 역시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정성을 다해 기도 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의 것, 땅의 기도는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성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끈질김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항상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요,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왜 항상해야 합니까?
원한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이라는 것은 이방인과같이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님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원한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6:9-11절을 봅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 까지 하시려 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가지 하라 하시더라”

원한이 어떤 원한입니까?
심판해 달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말입니까. 자기피를 흘린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왜 저들에게 피흘림을 당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을 보게 되면 이 복음 때문에 핍박을 당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을 좋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걷어 치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걷어 치우면 왜 사람들이 기쁠까요?

십자가만 제거하면 자신들의 자랑거리와 자신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내세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정성을 다하는 기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가 제거되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욕망대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십자가만 제거 되면 얼마든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훌륭하고 괜찮은 인간인가를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렇죠?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는 꼴이죠. 왜 그럴까요?
십자가는 인간이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인데,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내세우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고 자랑하니까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감옥으로, 죽음으로 내 몰립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자신이 가진 증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증거 말입니까?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십자가만 앞장 세우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만 앞장 세우는데 왜 사람들이 미워하는가?
그 이유는 십자가가 사람의 행위일체를 인정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요.
이게 성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원한 갚아 달라는 것이지요.
무슨 원한,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핍박을 당하니 그 원한을 갚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에 가면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8절 후반부를 보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자가 올 때에는 세상에서 믿음을 보기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시겠다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과부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과부는 믿을 것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누굽니까? 불의한 재판관이죠.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믿을 것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까?
아니면 예수님도 믿고 다른 것도 믿고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까?

여기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믿을 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낙망한다는 말은 어떠하길래 낙망을 할까요?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기대하는 것과 주님이 주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7장 33절에 보면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런 원리가 주님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가 작용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어떤 기도를 할까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가는 자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자기목숨을 보존하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전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밤에 두 남자가 자리에 누웠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성도는 외형적으로는 사실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회사나 공장이나 가정에서 일할 때 믿지 않는 자들과 구분이 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나 마음은 어떻습니까?
다릅니다.

저들은 무엇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탄식하고, 주님만 증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지요.
그러니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의지 하니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 항상 기도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나의 힘과 수고와 노력이라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주님되신 예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성도는 인자의 날에 믿음 있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서야 1절과 8절이 연결 되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긍휼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며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 지신 주님만 더욱더 의지하는 자입니다. 믿을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