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구름 나그네 2008. 8. 28. 11:36

처절한 싸움

디모데전서6:20-21

20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성도가 지켜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디모데 전서를 보아 오면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면 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복음 이외의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당장 이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외에는 왜 모든 것을 피해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야 지옥가기 때문입니다. 영생과 상관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사람들이 왜 십자가 복음외에 것에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 봅시다.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과부나, 그의 가족들, 아니면 감독, 집사, 돈 많은 교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항상 십자가 복음외 다른 것에 마음을 둘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왜 자꾸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려고 합니까?

그야 뻔하지요.

우리의 본성, 죄인들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항상 자기중심적인 생각 즉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6:5절을 보게 되면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자신의 삶의 고상한 모습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처사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고, 교회에 봉사를 열심히 하는 이유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장로가 되려고 하고, 집사가 되려고 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속의 탐욕을 그대로 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집사가 목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남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행세할 수 있는 자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지요. 요즘은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사가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 어 자기가 목사라고 저렇게 말하는가?

게는 가재 편이라더니.

 

사람들이 왜 목사와 동일하게 되려고 합니까?

그야 뻔하지요. 나도 잘 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모임이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십자가 복음만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모두 다 잘 나서 목사를 청빙하지 않습니다.

 

우리끼리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기도하고, 또 강사를 불러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야 맞지요.

그런 때 막상 그곳에 들어 가보면 저들은 결코 배울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좀 말씀대로 한다는 모임에 가보면 거의다가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그 중에 한 모임인지 모릅니다.

 

이유는 마음이 강퍅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을 마음은 없고, 내가 이렇게 잘 났네 하면서 고개를 쭉 내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복음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고, 남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말씀 앞에 낮아지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지요.

어린아이가 전하든 집사가 말하든, 목사가 말하든 주님의 증거하는 말씀이라면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할 터인데 그럴 마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생활이야 많은 절제도 하고, 말씀도 많이 보고 그렇게 합니다마는 결국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피해야 하는 것을 피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21절에서 이것을 좇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렸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지요.

 

민수기23장20,2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 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야곱의 허물을 보셨다면 야곱은 미움의 대상입니다. 저주의 대상이지요. 그러나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허물이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의 긍휼이 그를 사로잡아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해석됩니까?

우리의 허물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성도는 결코 십자가복음 외에 다른 것을 쫄쫄 따라 나서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생명 이냥, 영생 이냥 따라 나서는 자들이 아니지요.

오히려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누가 주님이신가 하는 싸움을 처절하게 하는 자들이지요.

그런 가운데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는 자들이지요.

디모데 전서를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고,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자는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하는 자인지도 알았습니다.

맹탕 맹탕 노는 자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에는 잘 들어가셨는지요?
울산에서 뵙고 이번에 뵈었을 때 넘 반가웠습니다.
여전히 모습은 그대로이시던데요...살은 쫌 빠지신걸로 기억되네요...
예쁜 사모님 그리고 똘똘하고 귀엽고 예쁜 아가(?) 함께 만나뵐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파견근무로 중국에 간 가정을 소개해 드릴려고 했는데-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때 전화번호를 적어주신거 기억나시죠?_몇 주 지나다보니 그저께 다시 돌아오게 되었더라구요....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오래 머물줄로만 알고 있었는데....이래저래 감사할 뿐입니다.



"민수기23장20,2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 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야곱의 허물을 보셨다면 야곱은 미움의 대상입니다. 저주의 대상이지요. 그러나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허물이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의 긍휼이 그를 사로잡아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해석됩니까?

우리의 허물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성도는 결코 십자가복음 외에 다른 것을 쫄쫄 따라 나서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자는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하는 자인지도 알았습니다.

맹탕 맹탕 노는 자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가족들 모두 건강하시고 창세전에 예정하신대로 또 만나뵙게 될 날이 이르겠지요....

 
 
 

디모데전서

구름 나그네 2008. 8. 28. 11:34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성도

디모데전서 6:11-16

주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성도를 왜 부르셨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우리 탐욕을 좇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성도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3-10절을 보게 되면 다른 복음, 즉 다른 교훈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의 관심은 오직 힘이 되는 돈에만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결코 사람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사람에 움직여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러니 이것들을 피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라고 하십니다.

성도가 싸워야 하는 것은 돈을 얻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싸움을 하는 자입니다.

성도의 관심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이 땅의 것을 얻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영생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자입니다.

도대체 성도가 무엇을 믿습니까?

십자가지신 주님을 믿지 않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소망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늘 우편에 계신 그분만이 진짜 소망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당연히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13절을 보면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로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예수님은 실상 목숨을 취할 권세도 버릴 권세도 있으신 분입니다.

만물을 살리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말입니다.

 

성도는 이십 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가 참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한 성도입니다.

14절을 보면 우리는 또 한번 마음이 움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명령을 도대체 어떻게 지킵니까?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을 정도로 주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 속에 있는 본성과 연결될 때에는 우리는 곧장 율법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 관한 것입니다.

행함의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영생은 결코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해 달라고 해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믿음의 선한싸움을 하는 것이지 행함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선한 싸움은 끝이 없는 싸움이 아닙니다.

끝이 있는 싸움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때가 되면 주님 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인간이 한 약속이 아닙니다.

복되신 하나님, 홀로 한분이신 능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분이 하신 약속입니다.

오직 이분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 지어다 아멘.

 

이런 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성도가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러니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서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을 의식하면 디모데전서 6장3절에 나와 있듯이 다른 교훈을 좇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고 돈을 따라 가게 됩니다. 이것들이 마치 영생을 줄듯이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결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생각지 못합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분이, 빌라도를 살게 하시는 분이 빌라도의 신문을 받아야 하시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아마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데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까?

빌라도와 잘 타협을 해서 좋은 세상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계속해서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빼면 금방 넘어져 지옥 가게 하는 것들을 의지하는 어리섞은 자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더욱더 의지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디모데전서

구름 나그네 2008. 8. 28. 11:32

다른 교훈과 바른 말

디모데전서6:3-10

우리는 복음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간단하게 생각하는고 하면 내가 복음을 안다는 것이지요.

내가 복음을 어떻게 아는가?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공로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끝입니까?

아니면 그 다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화론 자들이 주장하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성화론 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에 바빠서 정작 우리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을 돌아볼 마음이 없지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리의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십자가 복음에 착념치 않는 자들이 어떤 악한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는 교만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늘 가까이 하지 않으면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늘 깊이 생각하는 삶이 아니면 교만이라는 것이 불쑥 튀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항상 우리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변론과 언쟁입니다.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논리를 끄집어냅니다.

아니면 말싸움을 합니다. 단순히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 편파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항변하실지 모르지만, 과연 그럴까요?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죄인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교훈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생각에는 여기에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고, 그 믿음 안에 있는데 내가 다른 교훈을 따른다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과연 무슨 교훈을 따라 하루하루를 살고,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합니까?

자식들을 가르칩니까?

 

이제야 인정하시겠습니까?

말씀을 떠나 버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른 교훈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두고 교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하니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4절을 한번 보세요.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특이하지요.

교만한 자에게서 저절로 이런 생각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성도가 십자가의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마치 매미가 수액을 빨아 먹기 위해 나무에 딱 붙어 있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서 튀어 나오는 것들이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방해하는 것들만 튀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마음이 부패하여 지고 진리를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다투겠지요.

십자가 복음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려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들끼리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상입니다.

모두가 다 십자가 복음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자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또한 겉모습으로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기는 모습이니, 이들을 다른 교훈에 착념하는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용해 어떻게 한 미천 잡아 볼까 생각해서, 새벽마다 땡깡부리고, 아침마다 조용히 땡깡부립니다.

이들에겐 결코 지족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말씀에 딱 달라붙어 사는 자들은 경건이라는 것이 큰 이익이 됩니다.

동일하게 이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앞선 이익은 자기 배를 채우려는 이익이고, 지금 이익은 십자가 복음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이익입니다. 은혜를 더 깊이 알아 가는데 이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떨까요?

 

7,8절을 봅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니까 우리의 현실을 재대로 봅니다.

이 말씀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지요.

말은 같지만은 그 의미는 천지차이입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지요. 그러나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어느 누구도 이 세상 것을 가지고 갈 인간이 없습니다. 다 지옥가야 할 인생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9절을 보게 되면 부하려 한다고 합니다.

왜 자꾸 사람들은 부하려고 합니까?

은혜를 모르니 그렇지요.

 

그러니 부자 되려고 하다보니 결국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곳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는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부자 되세요 하는 텔레비전 선전과 같이 우리의 속에서부터 부자 되려고 하는 욕구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면 돈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합니까?

돈이 신의 경지에 올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나 옛날이나 돈만 있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들 세상입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할 때 어떤 식으로 유혹을 했습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이 속성을 그대로 자신들의 속에 담은 아담 후손들이 어떤 일을 합니까?

돈으로, 다른 말로 하면 힘으로 하나님 행세를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당연히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콸콸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면 당연히 믿음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뿐만 아니지요.

얼마나 많은 근심에 사로잡히겠습니까?

복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십자가로 가까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까?

 

십자가로 더 가까이 가는 성도는 오직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밖에 없습니다.

제발 우리의 본성을 자꾸 더 드러내는 인생이 되지 마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삶이 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하는 그런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