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7. 12. 22. 09:47

복음

로마서1625-27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 나타내신바 되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쓰인 선지자들의 글, 즉 성경이 이 비밀에 대한 글입니다.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도 비밀의 글입니다. 나타내어주신 비밀의 글입니다.

이 비밀이 이제는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비밀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에베소서1장을 보면 비밀을 알게 된 자들은 그냥 알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복이 어떤 복인고 하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복입니다.

 

4절에서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는 겁니다.

 

은혜의 내용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은혜의 풍성함이란 곧 그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성도에게 넘치게 주셨기 때문에 그 뜻의 비밀을 알게 된 겁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는 것이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예정된 것이요 비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 말씀은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한다는 말씀은 로마서91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밀, 즉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민족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 가지 비밀이 있다고 칩시다. 예를 들면 제가 재벌의 아들이라는 것이 비밀이었는데 여러분에게 알려주면 여러분들은 제가 재벌 아들인 것을 다 알게 되겠지요.

세상에서 말하는 비밀이란 그렇습니다.

 

알려주면, 나타내 주면 누구나가 알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비밀은 알려줬다고, 나타내 줬다고 해서 알려주고 나타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밀은 알려 주시면서 비밀로 만들어 버립니다.

 

지혜와 총명을 그분이 주셨으니 비밀을 알게 된 주체가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밀을 알았다. 그러니 여러분들에게 알려 주겠으니 들으시오. 그러면 여러분들도 그 비밀을 알 수 있소라는 논리가 성립이 안 됩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지혜와 총명을 주실 때에만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쫓아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알리셨다는 이 말씀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자만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비밀이 나타낸바 되었다고 해서 누구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 비밀을 안다고 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사실도 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들이 여기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어떤 것입니까?

 

주식을 매수 했는데 열배 올랐다입니까?

집을 구입했는데 집값이 두 배로 뛰었다.

자녀가 시험을 쳤는데 올 백이다.

몸이 좋지 않아 걱정하면서 검진 했는데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이런 것들 외에 뭐가 있을까요?

땅과 관련된 이 몸과 관련되어 플러스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기쁜 소식입니다.

 

심지어 돈 벌기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으로 몰래 들어가려다가 죽어도 그 죽는 자가 내가 아니기에, 내 자녀가 아니기에 복음이 됩니다. 그래서 아파해 주고, 슬퍼해 주고, 눈물 흘려 줍니다.

 

비밀을 알았다. 창세전에 감추워졌던 그 비밀을 알았다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그 비밀이 밥먹여 줍니까 건강하게 해 줍니까 돈 잘 벌게 해 줍니까 가정을 화목하게 해 줍니까? 민족과 국가를 번영하게 해 줍니까?

 

그렇지 않지요.

지난주 말씀드렸듯이 목숨을 잃는 자리로 가는 자가 영생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창세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을 알았다는 것이 로또 이천 원짜리 당첨된 것보다 더 못해요.

 

그저께 시월드라는 티비프로그램을 보는데 엄마가 개를 키우는데 여행을 갈 때 딸 집에 맡겨둔 모양입니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전화 와서 개와 영상통화 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잘 있느냐, 별일 없느냐? 알아듣지도 못하는 개한테 그렇게 해요. 그러자 옆에 있는 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엄마는 나에겐 그런 애절한 사랑이 왜 없느냐고 따지는 것을 봤어요.

 

제가 그랬어요.

그 딸이 개가 되면 그 엄마가 그렇게 애절하게 할 거라고.

 

십자가의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이 그래요. 사람들은 십자가의 달려 피 흘려 죽어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필요한 것들도 제공해 주셔야 그게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도하면 기도하는대로 응답해 주고, 떡을 원하면 떡을 주시고, 능력을 원하면 능력 주시고, 세상 권세를 원하면 세상권세를 주셔야 복음이지 고난 받는 자리, 외로운 자리, 왕따 당하는 삶은 결코 복음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1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말하면서 왜 부끄럽다는 단어를 꺼집어 낼 까요?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고 하면 목회20년 했는데 예배당하나 없다는 것, 아니면 성도 숫자가 몇 명 안된다는 것.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가 여기서 벌써 십오 년 이상 있었는데 성도 아홉 명, 어른 네 명. 그것도 아내 빼면 세 명.

다른 사람들이 물어 보면 어떤 마음이 들어요. 부끄러워요 부끄럽지 않아요?

 

인간들은 말씀을 믿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땅의 것과 비교해요.

타인과 비교하죠.

복음이라는 것도 타인과 비교해서 복음이 되었다고 안되었다가 왔다 갔다 해요.

 

복음을 내 뱉으면 친구가 없어 질까 해서 복음을 외치지 않지요.

 

요한복음4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슴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관리들의 경고에 대한 대답입니다.

 

비밀, 복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전하면 사람들은 듣기 싫어해요. 기분 나빠하죠.

상대가 화를 내지요.

 

저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을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복음을 가르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진짜 복음을 숨겨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성도는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창세기12장에 보면 아브람이 기근이 심한 가나안 땅을 벗어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쁜 모양입니다. 미스애굽만큼 예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결국 아내를 팔아 많은 재물을 얻었지요.

 

여기까지는 좋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합니다. 바로 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립니다.

그래서 바로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줄 알게 되어 받은 재물과 함께 아내를 보냈습니다.

 

이 말씀 보면 우린 또 탐이 납니다. 무슨 탐이 납니까?

나도 아브람처럼 생존하기 위해 거짓말 하고, 도둑질 하고, 사기 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얻은 재물과 함께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교주 하다 죽은 자처럼 말입니다. 성경 이렇게 풀어주면 교회 오는 사람 얼마나 많겠어요.

일단 믿음이라는 것은 보장되어 있고, 그 다음 하는 행동은 어떤 것이라도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결과물로 주어지니 이것보다 좋은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지요.

오히려 아브람이 여호와의 언약에 붙들려 있는 꼴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풀어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환난, 인내, 연단, 소망 속에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영세 전에 감추어졌다가 나타낸바 된 비밀을 알았다고 이제 삶이 술술 풀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26절 끝부분에 보면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제대로 풀면, 환난이 오면 인내를 만들어 주시고, 인내가 오면 연단을 만들어 주시고 연단이 오면 소망을 만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로마서835절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렇게 말하면 또 꿈꾸지요. 그래 나도 환난이 와도 곤고해도, 박해가 와도, 기근이 와서 굶어 죽어도, 어떤 위험이나 칼 앞에서라도 예수님을 믿어야지.

 

이거 아닙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지요. 십자가 지신 주님을 전하는 자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견고한 자로 주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증인으로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브람처럼, 아니면 다윗처럼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면서, 아니면 삼손처럼 여자꽁무니만 따라 다니게 하시면서,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그때그때 마다 다르게 주님께서는 십자가 지신분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아주 견고하게 그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말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세상이 말하는 반대로 사는 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그분만을 자랑하는 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 무궁하도록 돌립니다.

 

이것을 위해 창세전에 택함을 하셨고 비밀을 알려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자 대접 받았듯이

우리도 부끄러운 자 대접 받는 것 당연합니다.

 

우린 부끄럽지 않은 비밀을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4. 7. 27. 18:02

지혜의 하나님

로마서 1627

성경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 할 때에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이 지혜 있다고 표현할 때에는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 합니다.

 

모태신앙인 사람들은 많이 들었을 겁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라고 기도하고 가르치지요.

 

만일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다며 그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요?

너나 할 것이 없이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왜 읽습니까? 성경 말씀을 왜 배웁니까?

전 그것이 궁금합니다.

지혜롭기 때문에 말씀을 보는지 아니면 지혜를 얻기 위해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지?

 

시편119105절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기 때문일까요?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선악과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합니다.

먹음직과 보암직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표현은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과일을 보면서 보암직하다, 먹음직스럽다, 아니면 배부르겠다고 하지 음식이 무슨 지혜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쁜 사과를 먹으며 지혜롭게 되고, 못난 사과 먹으면 어리석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성경구절 읽으면서 그런 생각해 본적 없나요?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지요.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과일이 여러분을 지혜롭게 할 것 같습니다. 호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이와 같은 현상입니다.

예를 들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사단이 개입하면 과일을 먹는 것이 인간 자신을 지혜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해 버립니다. 즉 하나님이 가진 지혜를 자신도 소유하여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브람이나 이삭이나 야곱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말씀만 주시면 그 말씀을 자신이 반드시 지켜서 자신이 얼마나 지혜로운 자인가를 보여 주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깁니다.

 

사무엘하24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다윗은 자신이 왕으로 세워진 것이 다윗 자신이 이스라엘 왕 노릇하라고 세우신 줄로 생각해 버립니다. 요압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습니다.

내가 왕이다라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이 되었지만 다윗은 자신의 이스라엘 왕됨이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왕됨을 드높이는 데 사용합니다.

 

이미 지혜자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지혜자가 되었다는 것을 더욱더 노골적으로 밝히는데 유용합니다.

 

누가복음16장에 지혜로운 청지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로운 청지기의 본보기를 알려 주셔주셨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자가 자신의 청지기 직무를 다하지 못하게 됨을 알고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우니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장부 조작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인이 이렇게 행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이 누굽니까? 빛의 아들들이라 하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지요.

당시 이들은 누가 보아도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고 하면 비웃었습니다.

물론 그 앞에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만 그러할까요?

이 땅에 사는 누가 보아도 비웃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비웃는다는 말은 자신이 돈을 사랑한다는 방증입니다.

 

스스로 빛의 아들들이요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비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겉으로 예수님 말씀이 무조건 옳지요 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래도 그건 아니지요가 되어 버립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을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람의 지혜와 대조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야고보서 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합니다.

야고보서를 말하면 가강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행함이지요. 물론 믿음과 함께 떠오른다고 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으니 결국 행함이 아니겠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 결국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고보서나 로마서나 동일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지혜는 반드시 땅의 지혜로부터 공격받고 조롱당하고 비웃음을 당합니다.

 

야고보서에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대표적임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미 이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지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받은 지혜가 지혜롭다가 우기는 자들 위에 펼쳐집니다.

 

그 지혜의 모습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받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그러면 세상 지혜자들은 이런 행위를 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엄청나게 욕하겠지요.

도무지 이런 믿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하는 독자,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비웃음 거립니다.

 

예수님이 그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10:36). 이 말씀을 누가 좋아합니까? 누가 아멘 합니까?

사랑하는 내 자신, 내 목숨을 걸고 낳고, 목숨을 걸고 양육한 자녀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주님의 원수 곧 나의 원수다.

 

생각하기도 싫지 않습니까?

 

나름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혜자가 말씀하시는 지혜는 자신이 가진 지혜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지혜가 바탕에 깔리고 그 지혜가 깨어지면서 하늘의 지혜가 덮쳐진 상태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지혜입니다.

 

만일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행함이라고 정의를 내렸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의 행위를 행함이 있는 믿음, 즉 믿음이라고 하지요.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2:15-16).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 먹이시고 십자가 지셨습니다.

떡을 주시면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십니다.

열두 제자외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십자가 이야기 하지 않으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않는 자들은 돌려 보내야 합니다.

 

헐벗은 자를 입히고, 굶주린 자를 입히는 것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과 동일시합니다.

 

헐벗은 형제 자매에게 쓸 것 주는 것, 먹을 것 주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하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를 전하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하늘에서 주신 지혜를 보여 주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십자가, 즉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이지요.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그 행함을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기생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자기 국가를 배반한 기생라합입니다.

행실도 올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족까지 배반한 라합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동의 하겠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 창녀의 친구인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지혜되신 예수님은 이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라합같은 자는 배신자, 매국노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하십니다.

그 행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지혜로운 하나님이라 하시지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1:18-20)

 

기생라합이나 아브라함을 보면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한 것으로 보는 사람 누가 있을까요?

괜찮은 사람, 훌륭한 사람, 누가 보아도 믿음 있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당합니다.

 

자신들이 내어 놓은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신 것, 즉 은혜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지요.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하고 찾는 겁니다.

십자가의 도, 즉 지혜는 세상의 천한 것들을,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오히려 역전이지요. 십자가 전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요. 오히려 십자가 복음 전하는 자들이 폐함을 당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도 인간들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열매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뽐내려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헐벗은 자 입을 것 주고, 굶주린 자 먹을 것 줌으로 세상사람 어느 누가 보아도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받는 자들이 있지요. 이런 자들은 지혜가 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셨습니까?

누가 보아도 나에게 도움 안 되고, 누가 보아도, 쓸데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눈곱만큼의 가치도 없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죽여야만 자신이 살수 있다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았기에 지혜를 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1:5).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들은 십자가의 길에 놓인 자들입니다.

 
 
 

로마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4. 7. 20. 17:53

하나님께 영광

로마서162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어릴 때부터 늘 듣던 말이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되는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회사에서 상사로부터 칭찬을 받고, 부하직원들로부터는 존경받는 사람, 공부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 삶. 앞으로 커서 세계만방에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

 

여러분들은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

아니면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나요?

 

아마 누구나 다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 되는 삶.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왜 그렇게 살고 싶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늙어 죽지 못하고 오십에 죽는다. 오십에 죽는 것도 과거에 비하면 오래 사는 것인데, 우리들 나이가 오십을 향해 가니 오십에 죽는다 칩니다.

아직 자식들은 이제 중학생, 고등학생인데 이럴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일까요?

 

공부를 하는데 맨날 꼴찌를 해요. 하나님께 영광될까요? 사업만 하면 망해요. 이럴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노처녀로 늙어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사람의 상식은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것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오직 긍정적인 것, 희망적인 것, 사람들이 주인 되는 세상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즘 유혹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10억 때문에 자신은 감옥가야 하고 장인어른 아파트는 날릴 판인데 아주 돈 많은 여자가 10억을 줄 테니 당신의 삼일을 달라고 합니다.

 

유혹이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유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유혹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유혹을 하고 있지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어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뱀의 유혹이지요.

이 유혹에 여자가 넘어갑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안달 나게 유혹해서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소유합니다. 다르게 포현하면 선악지식을 인간이 소유할 개념이 아니고 선악지식속에 인간이 먹힌 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아니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백의 백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뱀이 여자를 유혹한 것은 결단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창세기 3장을 보면서 아쉬워합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어. 화를 냅니다. 분노를 내지요.

 

하나님께 영광과 자기 자신의 안락함은 땔래야 땔수 없는 관계라 생각합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안 될까요?

그렇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어떨까요?

 

창세기 6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되지 않을까요? 심판만 남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이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바 받았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의 합작품입니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창세기37장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 곧 요셉이 형들이 요셉을 죽입니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이런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창세기38장에는 유다가 자신의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 사건은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5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셔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하셨을 때 바로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런 강퍅한 자의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출애굽기52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셨는데, 이들을 향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들 생각에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를 보게 되며 1장 후반부에 이방인들의 죄악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이런 모습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29-30절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32절처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우린 성경을 읽으면서 들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앞서서 그런 말씀드렸지요.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선악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악이 인간이 집어 삼켰어요.

 

그래서 무엇을 보든, 행하든, 알든 선악이 덮쳐진 상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말씀을 백독하고, 손으로 수십 번 필사를 해 보아도 선악에 집어 삼켜진 인생은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가 없어요.

 

로마서1132절에서

하나님께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라고 하면 아멘 하면 되는데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아멘이 안돼요.

 

그래서 로마서 1장부터 다시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 긍휼을 입었는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찾아내어 보니 선악기준을 따라 선하게 행한 자들이 긍휼을 입었다는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셨으면 그 속에 내가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속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성령을 받아야 들어가지요.

성령을 못 받았으니 난 이제 불순종에서 벗어난 자다. 난 순종할 수 있는 자다.

무엇에 순종하느냐?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 율법대로 사는 것이야 말로 순종하는 자다. 이런 자야 말로 긍휼을 입은 자라고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결국 순종하는 나 자신, 그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꼴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을 앞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했지요.

 

오히려 말씀은 불순종하는 것이 긍휼을 제대로 드러낸다고 말씀합니다.

즉 불순종이야 말로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좋은 바탕이 됩니다.

그래야 긍휼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만일 갇혀진 불순종이 없다면 긍휼이라는 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자신이 알아서 긍휼 받았다고 할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7)”

하나님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인간이 불순종가운데 갇혀 있다는 증겁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오히려 긍휼을 베푸셔서 긍휼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불순종가운데 갇혀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드러낼수록 예수님의 긍휼, 사랑은 더욱더 깊이 드러나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불순종가운데 갇혀있지 않다고 해 버리면 긍휼은 없고 하나님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순종하는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로마서를 끝내면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살면서 불순종 가운데 철저하게 갇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로 인해 그 큰 사랑을 더욱더 깊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존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이제 불순종하는 자들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 헌금, 십일조, 봉사, 전도, 선교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라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이런 말에 대해 아멘아멘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화목재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아멘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나는 절대로 하나님께 영광 안 되는 인간이구나입니다.

 

영광 안 되는 인간을 깔아놓고 그 위해 십자가를 엎어버립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는 것조차 결국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선악과 따먹지 않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 것, 기도 하는 것, 남을 속이지 않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정직하게 사는 것 이런 것들 앞에서 우리 자신이 선악의 포로임이 발각됩니다.

 

그러니 돈 벌면서, 자식 키우면서, 설교하면서, 기도하면서, 전도하면서, 말씀 읽으면서 불순종하는 자임이 발각되십시오.

 

로마서 520절을 읽겠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인간이 사는 세상에 율법 없는 곳이 없습니다. 선악의 지배를 받지요. 율법 있는 곳에는 반드시 행함이 있습니다. 행함은 범죄를 더하는 행함일 뿐입니다.

그 속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우리의 삶이 은혜가 넘치는 삶, 즉 죄가 더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