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구름 나그네 2012. 9. 16. 17:33

룻기강해 9 4장18-22

베레스의 계보



음성설교

룻기4장18-22

조금 있으면 추석이 됩니다. 추석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때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면 조상을 기리는 것입니다. 조상덕분에 일 년 농사를 잘할 수 있어 감사 제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조상 상에 올리는 제물을 햇곡식으로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은 죽은 조상이 신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조상신을 섬기면 조상신이 자신들을 잘 보호하고 인도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양선교사들이 복음을 한국 땅에 전했을 때에는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당연히 성경에 근거하여,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에 따라 복음을 전했지요.

그런데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조상신을 섬기고 있는데,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면 자신들의 축복이 날아가게 되잖아요. 또한 저주가 임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제사를 허용하는 분위기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대학다닐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사 음식 만드는 것은 괜찮으냐 괜찮지 않느냐?

아니면 추도예배는 어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돌아가신 날에 가족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어떤가?

이 정도에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가 처음부터 믿는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시편106편 28절을 보면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이 사건은 민수기25장에 나오는 사건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는 신입니다. 모압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한 음식도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민수기25장에서는 제사음식을 먹고 우상에게 절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시편106편에서는 제사한 음식을 먹은 자체가 주님을 격노케 한 행위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은 제사음식 먹는 것과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구분하고 싶어 하지요. 무엇을 하든지 자기 행위를 정당화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제물을 먹었다는 말은 이미 그들이 모압여인들에게 어떻게 보여졌다는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보시는 것과 똑 같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음식을 먹은 것을 두고 격노하셨다는 말씀은 곧 이스라엘 백성과 모압백성이 동일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남자와 모압여인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창에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지요.

인간들은 꼭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사 음식만 먹었지 그 다음은 단계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늘 중간지점을 확보해 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심보지요.

그런데 민수기25장의 사건을 시편106편에서는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었다는 자체가 이미 브올의 바알과 연합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2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의 음욕은 이미 간음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시작을 했다는 자체, 즉 제사음식을 먹었다는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 전서8장을 보면 우상 제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상은 없다고 말합니다. 시편106편 말씀과 동일합니다.

죽었다는 말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고전8:4)

문제는 우상제물을 먹는 나를 보고 믿음이 약한 자가 우상제물을 먹게 되어 결국 멸망당한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자신이 우상을 섬겼다고 생각하다가 결국 멸망당합니다.

로마서14장22-23절에서는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20절에서는 만물이 다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상제물이 되었던 아니든 다 깨끗한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우상제물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린도전서8장에 나오는 믿음이 좋다고 우상제물을 먹는 자를 통해 오히려 믿음 없는 자를 가려내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우상이 없기 때문에 우상의 집에 앉아 먹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먹음으로 그는 우상이 없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믿음이 약한 자, 즉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이것을 볼 때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을 흉내 내어 우상제물을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결국 멸망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가 옳다하는 바, 즉 사람이 옳다하는 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믿음에서 파선합니다.

문제는 성도는 어떻게 사는 가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그러니 음식 먹는 것도 주님을 전하는 음식 먹음이 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10장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무엇을 하든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자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조상제사가 왜 문제가 됩니까?

조상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 즉 십자가 사랑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자에게 제사한 것에 대해 주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우상 숭배했다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했다는 것은 곧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즉 자신은 복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요.

자신은 저주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멸망시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과 오늘 본문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룻기에 나오는 계보를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예수님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든 조상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얼마나 든든했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당연히 천국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정성도 빼놓지 않았고요. 자신들의 열심, 수고, 봉사, 기도, 헌신을 아브라함이라는 조상에 덧붙혀질때 이들은 당연히 영생을 얻을 줄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천국 간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상 잘 둬서 천국갈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오늘날 제사지내는 자들과 다르지 않지요. 뭐가 다르지 않습니까?

자신의 죄를 몰라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룻기 4장18-22절을 몰랐을까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룻기4장18-22절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자신들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입장에서 이 본문을 이해했습니다.

이 계보를 보면서 얼마나 뿌듯하게 생각했을까요?

이 계보를 보면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죽어야 돼 라고 생각할 사람 있을까요?

베레스는 우리들이 잘 알지요.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이방여인 다말이지요. 창세기38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어 이방여인과 결혼해 살다가 첫째 아들이 죽으니 마지못해 둘째 아들을 며느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도 죽으니 이젠 자기 방식을 고수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며느리 다말이 기생분장을 하고 나타나서 시아버지와 동침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베레스입니다. 그러니 베레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죄를 생각해야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룻기를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은 베레스를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해요.

또 우리들이 아는 이름이 있어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가 누구인지 아시지요. 룻기에 보면 유력한 자라 해서 믿음 좋고 돈도 많은 사람. 자신을 희생해서 기꺼이 기업을 무를 자로 드러났지요.

그런데 보아스가 누구 아들이지 아세요?

기생라합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1장에 보면 나옵니다.

정말 놀랍지 않아요?

기생라합은 여리고성 사람이지요. 진멸당해야 하는 자인데 정탐꾼을 숨겨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디가고 지금 기생라합의 아들 보아스가 기업무를자로 등장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죄가 제대로 드러나지요.

그리고 오벳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룻이 낳은 아들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나열하시면서 너희들이 얼마나 죄인인지 아느냐를 물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민족인지를 자랑합니다.

시편106편6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가 사도행전7장에서 설교하던 내용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말을 시편106편에서 미리 앞당겨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주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한다는 자체는 조상을 무엇으로 보겠다는 말입니까? 우상으로 봅니다. 우상으로 본다는 말은 조상이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조상이 자신을 위해 복 빌어주고 축복을 내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에겐 십자가의 피가 어떻게 여겨질까요?

십자가의 피도 자기 조상을 위해 흘린 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부모, 가족의 행복을 꿈꾸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목사들이 왜 강하게 제사문제를 부정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정이고, 개인입니다.

복음이 가정을 깨면 안 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교회오지 않습니다.

복음이 개인을 깨면 안 되지요. 개인을 존중해 주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가 가든지 다른 종교를 택해버립니다.

그래서 목사는 십자가의 피 앞에 이런 문제를 죄로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합리화 시켜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주기에 분주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계보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범죄한 자임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지만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조상들은 곧 우리의 조상이 됩니다.


 

 
 
 

룻기

구름 나그네 2012. 9. 10. 00:04

룻기강해 8 4장13-22

오벳



음성

룻기4장1-22

룻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가 읽은 본문은 룻기 결론부분입니다. 그런데 룻기라고 하면 룻이 주인공으로서 행복하게 살았다로 결론이 나야 하지 않을까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나 그런 동화들이 다 그런 류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룻기를 읽으면서 룻이 백설 공주처럼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모압여인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고, 시어머니께 효성도 다하니 결국은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전체를 두고 설교한다면 룻처럼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자신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으면 주께서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물론 이혼한 과부가 들으면 더 기분이이 좋겠지요. 꼭 이혼한 과부가 아니라도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있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했던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착하게 살면 보아스와 같은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다 이런 이유입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성실히 한다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룻을 보라. 그녀는 이방여인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으니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용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 땅에서 크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돈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을까요? 똑 같습니다. 전도서 1장8절을 보면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어느 누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 날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교회를 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쳐도 이들이 원하는 예수는 육신의 정욕을 위한, 안목의 정욕을 위한, 이생의 자랑을 위한 예수입니다.

 

요한1서2장15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 세상에 있는 것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사람의 눈에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지요. 자식, 남편, 돈, 회사, 집, 교회, 집사, 장로, 목사 등등. 이 모두가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요한일서2장15절에서는 이런 사람에서는 아버지의 사랑, 즉 십자가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를 합니까?

사람을 위해 설교를 하지요. 노골적으로 세상 것을 사랑하라고 설교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설교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날마다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이 변명을 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말씀을 지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을 지키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지요.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말씀을 지켜서 복 받겠다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 지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지킵니다.

 

주일 예배 빠지지 않기, 새벽기도 빠지지 않기, 수요예배 빠지지 않기, 십일조 떼어먹지 않기, 감사헌금하기, 선교헌금하기 등등.

 

이런 것들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또 한 부류는 좀 다른 부류지요. 이들은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합니다.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자신들의 수준은 좀 높다고 생각하지요.

 

 

또 한 부류는 그냥 교회 다니기입니다.

예배 드려주기입니다.

그래도 천국은 가야 하니까? 혹 내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 예배 드려주는 것이지요.

 

이들은 모두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부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내가 어떻게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 자들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의 능력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들의 자랑은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함입니다.

 

자신들의 행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기복신앙, 즉 무조건 복 받겠다고 하는 자들보다 다 무서운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들 모두를 합쳐 놓은 자들이지요.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다니는 모습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당신 유대인들이 다 행했던 행함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룻기를 결론 내면서 왜 룻은 아기 낳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오벳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까?

 

룻이 낳은 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오벳입니다.

오벳의 뜻은 섬기는 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까?

 

나오미를 위한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15절을 보면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 네 노년의 봉양자로써 오벳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정말 희한하게 지었지요.

좋은 이름 그렇게 많은데 왜 종이라는 이름, 섬기는 자라는 이름으로 지었을까요?

제가 대학다닐때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친구가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 이름이 하민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부를 때 하종이라고 불렀어요.

친구가 별로 안 좋아하지요.

그런데 이름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누구를 위한 오벳입니다.

자기를 위한 오벳이 아닙니다. 나오미를 위한 오벳입니다.

룻의 인생이 그렇지요. 룻이 어떻게 살았다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까?

단지 아기 낳고 그 아기는 나오미를 위한 아들로 살아가게 됨을 말씀할 뿐이지요.

인간들은 꼭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속이 후련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학교를 다녀도, 일을 해도, 모든 일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기분이 좋지요.

 

왕따라는 말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따돌려도 혼자 놀면 되잖아요. 물론 때리고 괴롭히면 문제가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혼자 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꼭 소속되고 싶어 하거든요. 그런데 소속된 것으로 만족할 인간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주님의 피로 구원해 주셔서 성령의 은사들을 각 사람들에게 내려 주셨어요.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로 감사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은사를 갖고 자신이 교회의 중심에 서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아가는 인생,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인생. 그 인생은 다름 아닌 룻이었습니다.

 

룻을 보면 그야 말로 섬기는 인생이었지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자리에서는 빠져 버립니다. 시키는 대로 살다가 사라져요.

오벳이라는 인물이 왜 중요합니까?

오벳의 손자가 다윗이 되잖아요.

 

다윗 왕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섬기는 자로, 종으로 살아야 참된 왕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곧 예수그리스도, 종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섬기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룻은 오벳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실 분,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룻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성도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인생은 보여주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무엇을 보여줄까요?

 

십자가를 보여주는 인생, 십자가를 전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이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지요.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며 살아갑니다.

룻이나 오벳이나 나오미, 이들 모두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은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삶을 주님께서 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모압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게 하다가 말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고,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오벳을 낳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풍족하게 베들레헴에서 살았지만 탐욕을 따라 모압땅으로 내려갔지요. 그곳에서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룻을 통해, 보아스를 통해. 오벳을 통해.

 

이들의 삶은 십자가지신 예수님, 즉 종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는, 생명을 살리시는, 영원히 죽지 않게 하신 주님을 전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요한일서2장17절을 봅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붙들고 싶고 잡고 싶은 것은 다 지나갑니다.

꺼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올라오는, 마치 창조주처럼 행세하는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을 보면 분명히 나와 있지요.

주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전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면 사랑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데 무슨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자신이 복 받을 수 있는 자요,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자기 복 받는 것이 중요하고, 말씀을 지키는 자신이 소중한데 형제 사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도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직 예수님의 증인으로만 살다가 인생이 끝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룻기

구름 나그네 2012. 9. 2. 21:46

룻기강해 7 4장1-12

나오미와 룻



음성설교

룻기4장1-12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엘리멜렉의 땅을 돈 주고 사는 것은 좋습니다. 문제는 그 기업이 자신의 기업이 되지 않고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고 하면서 신을 벗었습니다. 신명기25장5-10절을 보면 계대결혼법이 나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거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 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긴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레위기25장22-28절도 보겠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모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보아스가 첫 번째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지요.

이 사람은 단지 레위기25장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은 신명기 25장과 연결해서 보아야 함을 보아스가 알려 주지요.

그러니 희년이 되기까지 자기 소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익이 되니 좋은데, 문제는 그 소유가 룻이 낳는 아들 소유로 가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손해 보는 장사지요.

그래서 이 사람은 기업 무를 자 됨을 포기합니다. 물론 수치심을 무릅쓰고.

그 집안이 신 벗긴 자의 집이라 명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세요.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수치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이지요.

보아스는 어떻습니까? 엘리멜렉과 기룐, 말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누구편을 들겠습니까?

보아스 편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기업 무를 자를 거부한 사람 편에 서겠습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은 보아스 편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성경을 보는 관점은 교훈적인 관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로마서1장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도가 의인이라면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지요. 그런데 이 본문조차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해석을 믿음으로 믿음의 행위에 이른다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행위를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있어도 행위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믿음 없다가 되지요. 마치 야고보서 처럼 말입니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야고보서를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육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유대인들이 구약을 해석하는 방식과 똑같이 해석을 합니다.

자 . 문제는 십자가의 피능력 만을 믿으면 구원이 되지 않습니까?

이 말도 다시 풀어야 합니다. 피 능력을 믿는 믿음은 주님이 성령을 통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구원이 부족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지요.

분명히 의인도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행위들이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결과물이라는 말입니까? 믿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려 주시는 분만 내어 놓습니다.

예수님만 전하는데 그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이라 하지않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지요.

이렇게 되면 자신은 부인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파됩니다.

요한복음10장에 보면 삯군과 선한 목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기업 무를 분은 자기 목숨을 양을 위해 버리는 분입니다.

룻기를 통해 보면 기업 무를 분은 누구를 위해 기업을 무릅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자기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이지요.

그런데 그 양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입니까?

빈손입니다. 기업 무를 자가 없으면 거지처럼 살아야 하고, 굶어 죽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한복음10장은 요한복음9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9장에 무슨 사건이 나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9장39-4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의 양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 지옥가야 마땅할 자,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양 아닌 자들은 어떨까요? 똑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이 양들을 찾아 주니, 불러 주니 자신이 어떤 자임일 고백합니까?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자입니다. 저는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을 모르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문제없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야. 나는 맹인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야. 저 인간은 저주 받아 태어났지만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받은 인간이야.

이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겐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소경인자, 저주받은 자를 위해 피 흘려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자의 영도 받게 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갈5:21).

따라서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만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삯군은 어떨까요?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20장33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고"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사나운 이리, 즉 삯군목자의 등장과 비교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목자는 절대로 양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양떼를 이용할 뿐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야 그런 것 쯤 다 분별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나운 이리가 양의 탈을 썼다는 것입니다.

양의 탈을 얼굴만 쓸까요? 아닙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합한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10장에서 삯군들은 곧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말씀을 말했지 자기만을 했습니까?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철저하게 성경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십일조 하세요. 감사헌금하세요. 봉사하세요 하지요.

이 말이 뭐가 나쁩니까 나쁘지 않죠. 성도라면 헌금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도.

문제는 무엇을 위해 이것들을 하라고 합니까?

주님을 위해. 말은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할까요? 자기 배를 위합니다.

목사 자신을 위해 기도, 전도, 봉사, 헌금을 하라고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치지요.

그렇다면 성도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말을 잘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물론 그 목사가 이리라고 삯군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인들도 무엇을 원합니까? 성공을 원하지요. 땅의 축복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께 빌어야 하겠지요.

내 행위를 잘 해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 말을 잘 듣지요.

주님께서 시켜서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켜서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노리는 바, 즉 축복을 노리고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죽이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니 목사는 설교를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지키고 행하면 축복해 주십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는 쪽으로 몰아가지요.

십자가로 죄 용서 받은 것은 기본일 뿐이고, 천국이야 이미 확보해 두었고, 이제는 이 땅에서 축복받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의 마음이 룻과 같겠습니까?

이런 사람의 마음이 소경과 같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마음이지 지금은 시간이 지났지 않으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 잘했지요. 지금은 내 마음이 전혀 소경같지 않고, 룻과 같지 않다는 말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감사하지 않다는 말이잫아요.

자기 이익만 챙기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오늘 나오는 기업 무를 자를 포기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들에겐 오직 한 가지 목표밖에 없습니다. 내가 성공하는 것.

그러나 예수님의 양인 자들도 오직 한 가지 목표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성공해서 주님을 더 잘 전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지요.

사도들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그러나 성경은 그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로 가시고 십지가 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빈털터리였는데 이미 풍족하게 다 받았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