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구름 나그네 2007. 7. 24. 15:57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15장38-47                186,188

사람이 무언가를 믿을 때에는 믿을 만한 끈덕지가 있어야 믿습니다.

옛날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 보러 간 사이 자신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때 그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그 어미가 그 꼴을 보니 완전 거짓꼴입니다.


그러니 자기 딸은 완전히 지금껏 헛짓 했구나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웃기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

그렇지 않습니까?

암행어사가 암행어사다워야 암행어사지.


사실 암행어사가 암행어사다운 것이야 그 행세를 변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모습이 분명 암행어사의 행세중 하나인데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 어미의 기대는 적어도 과거 장원급제 했다면 말 타고 머리에 무엇을 써고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거지 꼬락서니를 하고 와서 허기져 밥이나 얻어먹는 모습이니 어떻게 그를 암행어사로 보겠습니까?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기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만일 정말 메시아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적어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하고, 나쁜 짓 한 놈들은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하는데,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누가 이런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그야 여러분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잖아요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정말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본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면 아들이 아들다워야 아들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전혀 아들답지 않는 모습.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다는 사실.


누가 이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53장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이사야 52장 14절 보세요.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그러니 누가 이런 모습을 한 사람을 보고 구세주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을 잘 생각해 봅시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드는 것이 아니고 사실대로 예를 듭니다.

여러분 중에 몸이 아픈 자가 있습니까?


우리의 상식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으면 아프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안그렇습니까?


아파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하시는분 있다면 정말 믿음 좋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새벽기도 열심히 나가면 건강하고, 아프지 않고 집안 일들이 다 술술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풀리는 방식이라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일 주일 예배, 저녁 예배, 수요예배, 심야 기도회, 새벽기도 등등 빠지지 않고 잘하는 데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해서 그런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을 냅니다. 그 액운을 풀기 위해서. 갑자기 제가 여러분들이 듣기 거북해 하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액운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액운이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액운이 떨어져 나간다는 말은 모든 일들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마치 이사를 할 때에도 날을 받아서 하듯이, 그러면 집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들은 액운을 떼려고 합니다.

이것이 춘향이 어미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자신의 액운 떼어주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방식도 액운 떼는 방식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헌금을 많이 하든지, 기도를 많이 하든지, 예배를 열심히 참석하든지, 아니면 봉사를 열심히 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부자 되기 위해서, 건강하기 위해서 헌금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고, 봉사 열심히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볼 때에도 액운 떼듯이 성경 말씀봅니다.


제 아내는 예수님을 잘 믿지만 장모님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부적을 붙여 놓았습니다.

처형 집에 가도 붙여 놓았습니다.


왜 부적을 붙입니까?


잡귀는 물러가라. 우리 집에 좋은 일만 생기고 복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처형이 지금은 아기를 가졌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아기를 못 가졌습니다. 그래서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어요.


제가 작년에 갈 때에는 부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부적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그들은 부적 덕택에 아기가 생겼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마음한 구석에 그것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나 교회 와서 액땜 하려는 모습이나 무엇이 다릅니다.


말로는 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 실제로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등쳐 먹으려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기도 열심히 오시는 여러분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면 새벽기도 열심히 오시든 오시지 않든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잖습니까?

우리교회에서는 한분도 없으신 줄 압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면 마귀라는 놈이 항상 우리에게 무엇으로 미혹하는고 하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여,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여.


너가 부자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자식 잘 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여. 그래야 전도도 잘되지.

너꼬라지가 그러면 어떻게 전도가 되겠어.

예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니 너를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이여 라고 미혹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있을 때 어떤 한국사람 한 분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5년인가 6년인가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빠졌데요.

그것을 저에게 자랑삼아 하는데. 그래서 자신의 사업이 잘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잘 되지도 않았는데.


성도가 새벽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말씀 앞에서 주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서에 날마다 모이기를 힘써라는 말씀이 우리속에 임하는 말씀아닙니까?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헌금합니까?

주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새벽기도하고, 헌금을 합니까? 그래서 예배에 나옵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그러면 왜 자꾸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다움이란 자신의 기도를 다 들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상입니다.

자신이 필요를 다 채워주시는 예수님 상입니다.

사실 성경말씀에 입각한 예수님과 정 반대지요.


예수님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편이십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주님이심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끌어당기시지 우리 자신을 위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을 자신들 임금 삼으려고 끌어당기려고 하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다 돌려 보내버립니다.


너희들은 내가 택한 백성이 아니다.

그 증거물로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고방식을 들추어 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새벽에 왜 여기에 왔습니까?

말씀이 좋고 예수님이 좋고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아시기에 왔습니까?

아니면 내가 새벽마다 기도함으로 주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시합해 보려고 왔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말씀을 들을 터이고, 기도를 할 터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판인지 새벽기도 많이 한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 보기 왜 그리 어렵습니까?


새벽기도 열심히 한다는 사람치고 말씀에 굴복하는 사람 잘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이야기 하기 바쁩니다. 성경말씀은 집어 치워라고 합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행위를 앞장세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새벽기도 못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고, 심지어 조롱까지 합니다.

새벽기도도 못 오는 주재에.


우리가 새벽마다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없으면 하루라도 살수 없다는 고백의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정말 예수님 믿는 자 다워야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는 정말 죽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복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액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모든 모습, 가난해도, 건강해도, 부유해도, 아파도, 죽을 병 들어서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런 자가 천국백성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제대로 아는 자입니다.



 










 
 
 

마가복음

구름 나그네 2007. 7. 24. 15:55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가복음 15장33-37

 시편 22편을 먼저 보겠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 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당하시며 어떤 일을 행하실 것까지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삶이 다윗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아니 다윗이 다윗 자신의 삶을 살았지 다른 삶을 살았습니까라고 질문하실지 모르지만, 물론 그는 그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분명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사용하시여 장차오실 예수님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너무나 참담한 심정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처지가 되었습니까? 자신의 권력에 대한 야망 때문입니까? 자신의 꿈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자 되고자 하여서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죠? 이 이유 때문에 다윗의 인생은 꼬인 인생이 되었고 급기에 이런 시편이 그의 입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길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않습니까?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조차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을 정말 멀리하셨다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신음소리조차 듣지 않으시는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이 상황이 어떤지 짐작도 못할 상황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때문에,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일을 당하였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부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원수들로부터 이런 상황으로 내 몰린 것입니다.


다윗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응답하신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 상황입니까?

자신을 벌레, 사람의 훼방거리, 백성의 조롱거리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자신을 보는 자는 다 비웃고, 입술을 삐쭉삐쭉, 머리를 흔들며 말합니다.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다윗의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짐작은 가죠.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고 자신이 젖을 먹을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 라고 고백합니다.

놀랍지요.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자신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멀리계신 것 같고, 환난이 있고, 도울 자도 없습니다.

부르짖는 사자 같이 힘 센 자들이 자신을 둘러 있습니다.


자신은 지금 물같이 쏟아 졌고,  모든 뼈는 어그러졌고, 마음은 촛밀 같아 다 녹았고,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혀가 잇틀에 붙었다고 합니다.


악한 자들이 자신을 둘러 수족을 찔렀습니다.

자신의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의 형편에 처했습니다.

겉옷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고, 완전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잃어 버리고 자신의 몸 마져 잃어버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기도합니다.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런 경험 후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조롱하고 비웃고 죽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이시는 것을 사용하시어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대속제물이 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장면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예수님을 이런 인간들을 위한 대속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윗은 단순히 자신의 고난에 대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대속 제물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속에 의인을 죽이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조롱하고 죽이는 인간들의 죄악이 포함되어 있고, 동시에 죄인들의 대속물이 되시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영 되시는 성령님께서는 십자가의 영으로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짓을 했는 지를 알려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인 그분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해 놓으셨는지도 알게 하시지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모든 것은 주님 홀로 이루신 일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먼저 이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왜 이렇게 조롱받고 미움 받고,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갔는가 말입니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사울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 자리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 대해서 말입니까?

다윗에 대해서.

다윗만 보면 좋은 마음 품었다가도 바로 바뀌어 다윗을 죽이려고 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울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심리학적으로 풀어 냅니다.

물론 엉터리죠.

정신적인 문제로 푸는 것이 아니라 죄 문제로 풀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처음부터 왕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기어코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야 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지만 그 하나님을 이용해서 실제로 왕처럼 행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라이벌이 나타나니까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자신도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무조건 다윗이 미워집니다. 이 마음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들입니다.

베드로나 나머지 제자, 그리고 가룟유다, 이들 속에서 사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음대로 안 됩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따른다고 해도 안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비웃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자리가 마치 왕의 자리인냥,  세상의 주인이 되느냥 모든 것들이 자기들 마음대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갖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런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한 일은 기껏해야 예수님을 조롱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었는데 예수님 홀로 구원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찬미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전도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하시고, 찬미도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합류된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자가 천국백성입니다.














 
 
 

마가복음

구름 나그네 2007. 7. 24. 15:53
 

마가복음15:16-32

오늘 새벽 설교 제목을 왕으로 정했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떠올립니까?


십자가와 왕 이것이 서로 상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기야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당연히 상관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관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놀라운고 하면 예수님이 너무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그야 십자가 지시기 위해 오셨으니 무기력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문둥병, 손 마른자등 모든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등, 많은 사람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우리들이 읽은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볼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저들이 예수님을 두려워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을 익히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능력이 있으신지 눈으로 보고 자신이 직접 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예수님을 팔아 먹으면서도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 살 것을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저들 눈을 멀게 하셔서 유유히 빠져 나가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람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 엘리사를 잡으려고 할 때 일어난 일을 기억했는지도 모릅니다.


충분이 이것을 기대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까? 알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을 두려워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하나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합니까?


하나의 놀잇감으로 예수님을 조롱하지 않습니까?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 같으면 그러지 않을텐데 하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들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리를 지킨다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하지않습니까?

두려워 했다면 왜 선악과를 따먹겠습니까?


이게 죄인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항시 하나님 행세를 하려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가차 없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면서 인간들  생각엔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냥 당하고만 계십니다.


심지어 강도와 같이 여김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15장 2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네 말이 옳도다.


그래서 군병들이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왕에 대한 예를 표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합니다.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꿇어 엎드리어 절합니다.


희롱을 다한 후에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끌고 갑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29절 하반절부터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함께 목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에서 인간들의 본모습을 너무나 적나라게 보게 됩니다.

인간들은 십자가 지는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보다 약한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에게 비실비실 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조롱거리와 하나의 놀잇 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손에 못을 박고 나무십자가를 지고 걷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들이 다 무슨 짓에 해당되는고 하면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조롱하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겠다고 덤빈다는 것은 예수님을 조롱해도 이만저만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비웃음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통해 인간들이 모두다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행위라는 사실을 저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는 자임을 인정치 않는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죠.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신들이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보려고 합니까?

고난주간만 되면 금식하고 난리법석 야단입니다.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흉내는 과거 유대인들이 최선을 다해서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다 고발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금식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사야 58:6,7절을 봅시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을 아는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대로 지켰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참된 금식은 주님께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영생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귀머거리가 들으며 소경이 눈을 뜨며라는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눈뜨게 함, 듣게 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요구합니까? 땅의 현상들을 요구하죠.

처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하든 그 말을 이들이 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마귀의 쫄개로 인간들이 하나님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인냥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주님의 고난을 흉내 낼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영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구나.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도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히려 사람들이 싫어하는 복음, 자신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고난에 동참시키십니다.


이제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사람 시몬을 생각해 보고 마치겠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얼른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로 바쁜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런데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가 사도 바울입니다.


자신은 자신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을 내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행위였습니다. 조롱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은 만나시어 자신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인생으로 삼으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보기에 억지로 주님께서 지우신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는 자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께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주님이시니 그 능력으로 이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세요.


십자가에서 내려 오셔서 이 나쁜 놈들을 혼내 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만유의 왕다운 모습이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 졌다. 그것을 알고 있느냐.

이것을 믿고 있느냐?


그리고 죄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지를,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알아라고 하십니다.

왕다운 모습, 신다운 모습을 사랑하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돌로 떡덩이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고,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는 것.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이 이 짓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 왕노릇하려고 하고, 모든 권세를 부리려고 하고, 신적 능력을 행하려고 하고, 없는 돈이 많이 생기기를 소원하고 소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 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불쌍한 인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길을 가는데 괜히 붙잡혀서 십자가를 지는 구레네 시몬처럼 나는 내 욕심대로, 내 인생의 욕망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왠 은혜인지 나를 부르시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행운을 얻은 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사야 53:5-6절입니다.

주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님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주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왕이 이러하시다면 우리는 어떠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