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구름 나그네 2013. 10. 21. 13:50

누가 천국에 갈수 없는가?

마태복음20:1-16

여러분, 천국은 누가 갈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간다라고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물어 보아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러면 반대로 부처를 믿으면 천국 갑니까 못갑니까? 못가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을 믿는다면 천국갈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시 갈수 없겠지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떤 예수님을 믿는고 하면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믿어요.

말이 좀 어렵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수님을 믿습니다.

제 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지요.

예수님이면 같은 예수님이지 자신이 만든 예수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예수가 있어요.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따로 있어요.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천국 간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거든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약속하셨으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당연히 그 예수는 우상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심 없이 목사가 설교하는 내용이 진리라 생각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점이 있지요.

성경은 분명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디로부터 온다고 합니까?

주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앞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문제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문제가 되지요.

내가 믿는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 믿음을 성경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영이 임한 사람만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고백하지요.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나 예수님을 믿어요. 그러니 천국갈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사실 성령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흘리신 피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구원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천국갈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주일마다 예배당에 나와서 말씀도 듣고 찬양도 드립니다.

또한 성경공부, 새벽기도회도 열심입니다. 헌금도 열심히 하지요.

그러니 이렇게 희생하고 이렇게 헌신하는 자신을 주님께서 구원하시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천국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이 있고 포도원 주인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고용하려고 품꾼을 찾아 나섰습니다. 품꾼을 찾아서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일당 한국 돈 8만원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는 제 삼시(오전 아홉시)에 장터에 나갔는데 그곳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어요. 이들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냅니다. 물론 일한만큼 주겠다고 하고서 들여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육시(정오 열두시), 제 구시(오후세시)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 십일시(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보니 종일토록 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이렇게 종일 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포도원에 들어간 일꾼들의 면면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이른 시간에 포도원으로 일하러 들어간 품꾼들을 살펴봅시다.

이들은 제일 일찍 인력시장에 나와서 포도원 주인의 택함을 받아 포도원에 일하러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받아서 들어갔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은 자신들이 일한 시간에 대한 정당한 대가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당연히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오전 아홉시나 정오, 즉 낯 열두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를 받을지를 모릅니다. 다만 자신들은 할 일 없이 놀고 있었습니다. 할 일 없이 노는 자신들을 벌써 노동시작시간이 몇 시간이 지났고 벌써 끝나 가는데 포도원 주인이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상황이 이런 상황입니다.

자 이제 하루 일이 끝났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한 값을 품꾼들에게 줍니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누구부터 줍니까?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가장 이른 아침에 온 사람 순으로 품삯을 주라고 청지기에게 명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주인의 셈법이 참 독특하지요.

품삯은 분명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인데 일 끝나갈 때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어린 아이들도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학교에는 맨날 종회할 때 들어와서 출석체크만 해요. 시험도 안쳐요. 당연히 공부 못하겠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백점을 줘 버려요. 그러면 어떤 아이들이 화를 낼까요?

당연합니다. 아침 일찍학교와서 자습하고 선생님 말씀잘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잘 쳐서 백점맞은 아이들이 화를 내겠지요. 물론 백점 맞은 아이들만 화를 낼까요? 아닙니다. 비록 백점은 못 맞았어도 자신들은 매일 종회 때문 오는 아이보다는 훨씬 더 착한 학생이고, 공부도 저 아이 보다 더 열심히 했으니 당연히 기분 나쁘겠죠?

이 느낌 알잖아요. 만날 노는 것 같은데 시험 치면 점수 잘 나오는 친구들 있잖아요. 괜히 기분 나쁘잖아요.

포도원 주인의 행동에 먼저 온 자들이 굉장히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들은 화를 내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자신들은 백점이 아니라 이백 점, 삼백 점을 줄 거라 확신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먼 저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계산 빠릅니다. 나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보다 몇 시간을 더 일했지. 그렇다면 나는 다섯 데나리온 정도는 받겠지.

이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온 모든 사람들이 다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오후 세시에 온 사람, 정오에 온 사람, 오전 아홉시에 온 사람, 이른 아침에 온 사람. 모든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만 원망하면 우리들이 좀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전 아홉시, 정도, 오후 세시엔 온 사람들도 모두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을 일했다고 나오지요.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라면 온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사람들에겐 더 많은 돈을 주셔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똑 같은 돈을 준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시간에 가서 일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오후 다섯 시에 가서 일하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까?

어차피 똑 같은 돈 받는데 굳이 아침 일찍부터 일할 필요 있나요? 차라리 하루 종일 빈둥 놀다가 막판에 가서 일하고 일당 받으면 최고잖아요.

그런데 만일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누구와 사고방식과 일치합니까?

바로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사고방식과 일치합니다. 그렇지요.

한 시간만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겠다는 심보가 바로 온 종일 일했으니 한 시간만 일한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주셔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합당하다고 여겨집니까.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집니까?

합당하지 않지요?

합당하게 여겨진다면 그런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보세요.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나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약속대로 주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똑깥은 돈을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15절입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누구것이라 합니까?

주인 거라 하지요. 품꾼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애당초 없었지요. 주인의 것을 주인 마음대로 하는데 품꾼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악합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지금 품꾼이 주인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악하다고 평가하지요.

본래 품꾼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품삯을 받을 수 없는 빈둥빈둥 시장 모퉁이에서 노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품삯을 받을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인이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먼저 품삯 한 데나리온을 줌으로 말미암아 앞서 온 품꾼들의 마음을 확 뒤집어 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 비유의 말씀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은 이미 마태복음19장30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데 19장2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라라”

그리고 하신 말씀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하시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는 20장1절에서16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품꾼들이 어떤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도 버리고 형제도 자매도 부모도, 자식도, 전토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버리는 것도 버리는 기간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스무 살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 50세 때 만난 사람, 90세 때 만난 사람 다 다르지요.

또한 버리는 것도 상당히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형제를 버린 사람이 있고, 부모를 버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전토를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값어치가 다 다르지요.

성경말씀이 간단하지 않지요. 예수이름을 위해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를 버린 자가 영생을 상속받는다 하셨습니다. 우리 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했듯이 새벽기도 나오지요. 주일 예배 참석하지요. 제사 지내지 않지요. 헌금하지요. 어찌 되었던 이런 일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당연히 천국갈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누구와 비교해서. 이렇게 버리지 않은 자와 비교해서. 아이면 자신과 비교해서 자신보다 더 적게 버린 사람과 비교해서 그렇지요.

그런데 이런 자는 천국갈수 없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이런 자를 골라내서 지옥 보내버리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참 독특하지요? 어떻게 골라냅니까? 아주 일찍 예수님을 믿게 합니다. 충성을 다하게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게 해서 지옥 보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러면 난 죽을 때 예수 믿고 천국 가겠어요. 그런 사람 많이 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면서요. 그러면 난 죽을 때 예수님을 믿고 천국갈래요.

이런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람입니까? 이른 아침부터 일했으니 당연히 한 시간 일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야 된다는 사람과 똑 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설교 서론에서 우상 예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상 예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자신이 수고한 만큼 주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기도했으니 나의 삶이 잘 풀릴 것이라는 생각. 자신이 헌금을 많이 했으니 주님께서 더 많이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 자신이 예배를 빠지지 않았으니 나에게 우한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사실 이런 것들은 기복신앙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처나 자식, 부모, 형제, 전토까지 버렸으니 천국에는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바로 우상 예수의 특징입니다.

즉 예수가 자기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15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시지요.

성도는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자신은 단지 빈둥빈둥 노는 자, 즉 죄인일 뿐입니다. 오히려 처를 버리게 하시고, 자식을 버리게 하시고, 전토를 버리게 하시고, 헌금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나의기도, 눈물, 희생, 헌금, 봉사 등을 계산하는 자는 지옥 갑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그렇다면 누가 교회에 봉사하고 헌금하겠습니까?

누가 전토를 버리고, 자식 버리고, 처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보세요. 주님 것이라 했는데 아직도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누가 천국에 갈수 없는 자인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구름 나그네 2008. 12. 29. 10:47

임마누엘

마태복음1장18-25

지난 목요일이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예수님과 관련된, 기독교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에서 많이 방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관련 프로그램들은 잘 나타나지 않고 어느새 오락프로들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했습니다.


크리스마스시즌이 되면 부르는 노리들을 크리스마스 캐롤이라고 하는데 이 노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들이 장난반 오락반. 예수님의 오심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축 성탄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성탄절이 하나의 오락절, 노는절기, 아니면 연인들의 날 이런 의미로 바뀌어 졌습니다.


교회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과거는 좋았고 지금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의 풍조가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과거의 풍조는 놀이라기보다는 약간 진지함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경제가 발전되고 사회가 발전되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오락, 쾌락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보더라고 그렇습니다.


20년전, 10년전, 현재의 교회놀이들을 보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엔 그래도 성경말씀이 많은 부분은 차지 했습니다마는 지금은 놀이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것도 예배라고 하여서 말입니다.


왜 교회가 이런식으로 바뀌는데, 설교의 내용은 다르게 생각하더라도 그 형식이 왜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함은 골치만 아픕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에는 피곤한 것이지요.

항상 쪼개어야 하니 말입니다.

진지함속에 토론을 , 논쟁을 하다보면 얼굴도 붉히고.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사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지함을 제거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집 아래를 내다보면 천연잔디구장과 인조잔디구장이 보입니다.

이전에는 둘다 천연잔디구장이었는데.


요즘을 그렇습니다 마는 날이 조금 따뜻한 날보면 주일 아침9시도 되기전에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찹니다.

뭐가 그리 재미 있는지.


아마 재미있겠죠.

저와 가까운 어떤 사람도 축구가 종교일 정도로 열심히 축구를 하니 말입니다.

예배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축구가 중요하죠.


성도들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축구인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죠.


그리고 그 룰을 지켜 줄때 왕 따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교회보다 축구를 아니면 다른 운동을 , 아니면 놀이를 더 좋아할까요?


자기를 발산 할 수 있거든요.


제대로된 설교는 자기 자신을 팍팍 짓누릅니다.

자신의 욕망과 배치되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축구야 룰을 지켜 주면 그만이죠.

그러나 말씀안의 모임은 룰이 좀 까다롭습니다.


모일때 마다 룰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사람들의 모임이 복잡하잖아요.

특히 말씀을 이야기 하게 되면 열명이 모이면 열명의 의견이 나오고 여기에 좀 강한 견해를 가진 자 둘만 있으면 분위기가 삭막해 지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놀이는 그렇지 않죠. 물론 가끔 깽판지기는 사람이 나오긴 하지만 이런 사람은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그렇지 않잖아요. 쉽게 제거가 안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도 놀이터로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제거도 하고, 가금적이면 논쟁은 제거하고. 싸움이 없는 정말 평화로운 곳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이사야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장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듣기에 좋은 말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땡 잡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수 있는 분이잖아요.


나의 놀이를 지지해 주고, 더 즐겁고 재미있게 해 주실 분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사야 8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제가 참혹한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면 참혹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사야8장을 보게 되면 임마누엘의 등장이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의 지배로 짓밟힐때로 짓밟힌 상황에서 임마누엘의 등장은 이 원한을 갚는 등장입니다. 


이들의 뜻이 필경 이루지 못하고 저들이 필경 패망하도록 하시는 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8장13-15절을 보면 매우 혼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자로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앗수르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요, 예루살렘 거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 나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두부류로 쫙 갈라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피할 곳이 되고 한쪽은 올무가 되고.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들에게 올무로 작용합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피할 곳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무가 되고 함정이 됩니다.


고린도 전서1장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십자가라는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어느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물론 이런 자들은 있죠. 자기 긍정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들 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조차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성탄트리의 화려함 속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미련한 자임을 드러낼 뿐입니다.


인간들은 걸리고 넘어지고 잡혀지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놀이터로 만드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란 싸움이 없어야 된다.

그게 아니죠. 교회란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싸움. 치열한 논쟁도 벌어지고 때론 얼굴도 붉히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미련함을 드러내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온 세상이 소동, 난리법석을 떨듯이 우리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면 당연히 난리가 나야 합니다.


난리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내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겐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특징은 늘상 싸움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도 바울 보세요. 죽을때까지 싸움꾼압니까?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죽으면서까지도 상대들을 열받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피하는 곳도 되고 걸림도 되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놀이터로 생각지 마세요. 그냥 오랫동안 다녔으니까 또 모인다가 아닙니다.


걸림돌과 피할 곳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다시 확인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구름 나그네 2008. 12. 22. 10:11

참혹한 크리스마스

마태복음2장1-18

거리를 나가보면 크리스마스라고 사람들이 난리를 피웁니다.

경제는 어렵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장사한번 잘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곳곳에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이라고 써 붙이고 식당마다, 호텔마다 화려하게 장식을 해 놓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제대로 안다면 결코 그렇게 즐거울 수 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즐거워하고 선물하고 기뻐합니까?

그거야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이거야 뭐 잘못되었다 잘했다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니 자기들끼지 선물주고, 물건 팔고, 희희낙락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을때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때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한 아기와 한 왕의 전쟁이 벌어 집니다.


한 왕, 즉 헤롯왕은 한 아기로 인해 정신이 확 돌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찌되었든지 아기 예수를 제거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지시하여 애굽이라는 곳으로 예수님을 피신시키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두 살 아래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슬픔을 가져 왔습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인데 왜 우리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가 그 동네에 살았다고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


예수님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우리 아이들이 병들어 죽었다 하더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땅에 찾아오심은 이렇게 참혹함을 대동하고 찾아 오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땅이 애굽화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애굽이라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유일하게 선택받은 백성들이 사는 땅이 애굽이라면 이 땅의 모든 곳이 다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다 애굽이라는 말입니다.


애굽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대적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원수아닙니까?


그리고 심판받는 대상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모두 심판 받아 마땅한 애굽과 같은 곳이라고 확정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심판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헤롯왕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는 죽자사자 제거 작전에 돌입하기 때문입니다.

이 헤롯 속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나는 그렇게 헤롯처럼 악독하지 않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것이 곧 헤롯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나의 단언이 아니라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즐거움을 누릴 것인가?

돈을 좀 더 벌 것인가에 마음이 빼앗겨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강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거 자꾸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아기 탄생의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동시에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고대합니까?

고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이 불에 다 타버릴 것인데 예수님의 강림이 기쁘겠습니까?


기쁘지 않습니다.

예수님 제발 오시지 마세요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인간의 소망으로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분명 기쁜 소식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참으로 예수님의 오심이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겐 참혹함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도 반드시 참혹함의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아기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성도라 볼 수 없죠.


이 경험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내가 경험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지요.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2장18절 말씀이 성도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 졌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단합니다.

자식 죽었는데 위로받기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자식이 죽었습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레미아31장15-17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희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자식들이 다 죽었는데 소리를 내어 울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식을 잃고도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성도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참혹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혹함을 경험하면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는지 분명히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소망을 둔다는 것에 온 힘을 다해  거부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에게 소망이 있음에 즐거워합니다.


성탄절이 그러하죠.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은 참혹한 성탄절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런 참혹함이 일어나고 그래서 사람들의 위로를 받기를 거절하고,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가 주님의 참 백성입니다.





12월은 가족들의 모임,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 연인들의 데이트로 바쁜 달인것 같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무에 매달려 아름답게 반짝이는 불빛들...

사람들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들떠서 걷는 것처럼 가볍게 보인다.

이토록 찬란한 거리의 풍경들을 즐긴다.

즐기지만 이것이 다는 아닌것 같다......

무대의 화려함 뒤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나뒹굴듯이 세상의 화려함 저편이 오버랩되어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난 mp3에 저장된 이은미의 <애인있어요>를 들어본다.



아직도 넌 혼잔 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건가 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걸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 내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걸

알겠죠 나 혼자 아닌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걸





세상에 주눅든 자아를 숨기기에는 딱맞는 가사이다.

애인은 곧 자기를 지켜주는 보디가드이기에 애인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그 무엇으로도 주눅이 들지 않을테니까..

라고 생각은 해본다. 맞는 말일까???

지금은 애인에 대한 감정이 흐려졌기에 믿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세상의 화려함에 대한 억울함을 보상받는 길로서 자아를 정당화시키는 것 밖에는 없었다.

어제는 눈 까지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징조로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기 때문이다.

쭉 즐겨왔던 쾌락을 한꺼번에 발산시키듯이 다 쏟아붓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품질마크처럼 정해놓고, 마음껏 즐기는

인간들의 쾌락의 날에 하늘에서도 축복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제는 돈 없으면 즐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벌써부터 눈이 오면 일나갈 걱정 차막힐까봐서 걱정....오로지 돈 버는데 지장이 생길까봐서 걱정이다.

눈도 비도....추위도 더위도 다 짜증낸다. 인간들이 돈 버는데 훼방을 놓는 그 무엇도 적일 뿐이다.

사람들의 욕망에 맞게 눈도 와줘야 하고 비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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