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구름 나그네 2011. 5. 22. 18:24

극렬히 타는 풀무불과 치료하는 광선

말라기4장1-6

모든 주도권을 사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 질수 있다고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따져 보면 성경말씀을 누가 기록했습니까?

사람이 기록했잖아요.

성경말씀자체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성령을 받은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람이지요. 역시 사람이 기록한 성경일 뿐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해석도 얼마든지 사람의 지혜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해석을 할 때 그 중심에는 항상 누가 서 있을까요?

사람이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조차도 사람 중심으로,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최고라고 합니다.

4장1절에 보면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의 날이 임하는데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불로 살라버린답니다.

완전히 다 살라 버린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잔인하십니까?

사실 우리가 알듯이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를 다 사른다고 하신다면 여기에 해당사항 없는 사람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교만한 자요 악을 행하는 자라고 누가 선언합니까?

하나님께서 선언해 버리십니다.

인간들이 인정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풀무불에 다 타버려야 하는 인생들입니다.

물론 죄인의 근거가 막연하게 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을 근거로 교만하다 악하다라고 하시지요,

지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묘한 반전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왜 치료하는 광선이 필요합니까?

2절을 제대로 풀어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본래 풀무불에 타야 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서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뛸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외양간도 쉽게 보고 송아지도 쉽게 보았습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어떻게 뛰는지 알지요.

여기 있는 우리 어린이들은 잘 모르겠지요.

예를 들면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탕, 초콜릿을 준다면 정신을 못 차리죠.

그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얼마나 기쁜지 자기 통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풀무불에 타야 할 인간이 오히려 심판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을 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누가 이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느냐 말입니다.

5절을 봅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미리 보내신답니다.

보내서서 하는 일이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풀무불 같은 날을 맞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으면 저주를 피할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선지 엘리야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킨답니다.

마태복음 11장10-15절을 봅시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사람이니라”

예수님께서 오리라한 엘리야가 누구라고 하십니까?

세례요한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7절-12절을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의 말에 의하면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하지요.

곧 임박한 진노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지요.

이미 도끼에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 곧바로 세례요한으로 이어졌지요.

그런데 그 다음을 한번 보세요.

세례요한 뒤에 오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신답니까?

심판하신다지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답니다.

그리고 키를 들고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답니다.

이 일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문제는 알곡과 쭉정이를 누가 나누느냐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말에 의하면 모두 다 심판의 대상입니다.

임박한 진노를 받을 대상입니다.

그런데 누가 알곡으로 인정받을까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순종하면 될까요?

분명 말라기에서는 선지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이 일을 해야 하지요.

따라서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진노를 피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누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한다고 합니까?

바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그렇게 한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이 분명 말라기4장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4장 말씀을 이루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일에 포함되어 버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참으로 오리라 한 선지 엘리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십자가의 피로 하셨습니다.

그냥 회개하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율법을 기억하고, 회개하면 될 문제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녀의 마음만 돌이킬 뿐이지요.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회개했다. 돌이켰다.

심판을 피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며 가르치지요.

그러나 의로운 해는 누구에게만 떠오릅니까?

예수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때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극렬한 풀무 불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 서론에서 사람이 중심이 된 성경해석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중심에서 오늘 같은 설교를 들으면 무슨 생각하겠습니다.

무슨 신화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뭔데 사람을 구원하고 지옥 보내느냐 말입니까?

예수라는 분은 좋은 분이에요.

사람을 사랑한 분이지요.

당신같이 성경해석하면 안되지요.

왜 그런지 아시오.

알아듣는 말을 해야 알아들을 것 아니요.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알아듣는 말. 즉 사람이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내십니다.

물론 천국 가는 자도 주님이 자신의 피로 치료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아 천국백성이 됩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싫어합니다.

풀무불은 그냥 이 땅에서 착하게 살아라고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절간에 가도 이런 그림들이 있잖아요. 종교라면 다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성경도 마찬가지이겠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은 모두 첫째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에덴동산도 알고 화염검도 알고, 죽음도 알아요. 물론 죽음 그 후도 알지요.

물론 모든 것들이 짝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알아요. 우상 하나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예수를 믿어요.

그래서 어디에 살고 있든 성경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립니다.

그저 옛날 옛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마치 백성공주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 3-1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좀 길지요.

지금이 말세입니다.

말세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롱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합니다. 그리고 조롱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여당당입니까?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부정하는 말이지요. 꼭 창조론자들 같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는 믿어요. 그런데 주의 강림하심을 안 믿어요.

이유가 뭘까요?

심판이 없어야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왜 아직 오시지 않나요.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를 대하여 오래참으사 다 멸망치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정반대로 생각하지요.

끝내버리려면 빨리 끝내버리지.

아니면 강림 없다. 심판 없다.

이 둘 중 아닙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이지요.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입니다.

주님의 강림하심으로 풀무 불 심판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다르게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성도 속으로 밀려오지요.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 우리가 볼 때 아주 이상하게 끝나는 것 같지요?

그런데 말씀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강림하심이 없다는 자들.

이들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설교 서론에서 사람들은 성경을 자신들 중심으로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강림조차도 없다고 해 버립니다.

물론 없다고는 하지 않지요.

다만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주의 강림하심을 믿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말씀에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생계, 생존에만 관심 있습니다.

자기 자식, 가족에만 관심이 있지요.

돈을 좀 많이 버니 여가 즐기기 바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히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오래 참으심에 대해 감사하는 자세로 살 것입니다.

이런 두 부류가 나타나는 자체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강렬하게 전하는 모습입니다.

 
 
 

말라기

구름 나그네 2011. 5. 18. 22:16

분별하리라

말라기3장16-18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한쪽은 지옥 보내고 한쪽은 천국 보낸다.

여러분 듣기에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이 나의 행동과 상관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가고,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지옥 간다면 어떻겠습니까?

행위라고 하면 행위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분 있으시죠?

행위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순종했다는 행위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순종하고 지켰기 때문에 천국 간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중히 생각할 경우 천국갈 수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 그 정도면 나도 천국갈 가능성이 많지.

내가 노력하면 천국갈수 있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런 식으로 이해될 본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천국 갑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존중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3장9-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가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 의거하여 오늘 본문말씀을 보게 되면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지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너희는 너희의 행위로, 너희의 열심과 노력으로 여호와의 기념책, 즉 생명책에 기록될 인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사람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자체가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도 율법이지요. 이 말씀의 기능은 모든 인간들이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런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까?

왜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십니까?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십자가지신 에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위해서입니다.

참 싱겁지요.

이것 하시려고 이렇게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나의 삶은 어쩌란 말입니까?

내 삶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지옥 가는 자는 얼마나 억울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타인의 삶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주님으로 높임을 받는 일엔 관심이 없지요.

나의 욕망을 따라 살기 바쁜데 어디 예수님 생각합니까?

내 속에서 일어나는 탐심들이 가득하고 그 탐심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예수님 생각할 겨를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두부류로 나눕니다.

한쪽은 천국, 다른 쪽은 지옥갈자로 나누어버립니다.

그것도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천국지옥을 주님 홀로 결정하시니 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가야 할 자가 반드시 지옥 감을 드러내는 모습이니 말입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을 나눕니다.

그런데 나누는 방법이 아주 고약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물로 히브리서11장 4절에 나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믿음을 추적해 보니 그 믿음이 아벨의 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믿음이더라 말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죠. 이것도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이렇게 되니 당연히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 가인 열 받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차별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차별의 정도가 아니지요.

자신의 열심을 무시해 버리는 하나님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가인자신과 아벨을 비교할 때 자신이 부족한 것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위치였다는 것은 그 당시에 가인이 훨씬 더 잘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똑똑하고 권력도 있고 등등 이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열심과 상관없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죽여 버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둘로 나누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한쪽은 지옥 보내고 한쪽은 천국 보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그냥 곱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은 죽게 만들고 한쪽은 죽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참 잔인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 싫어합니다.

잔인한 하나님을 싫어하지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좋아하지요.

우리 인간들의 본이 될 만한 하나님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잔인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윤리와 도덕을 집어넣습니다.

윤리와 도덕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의 노력 아닙니까? 행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힘쓰고 애쓰면 천국갈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반발을 만들어 내십니다.

가인이 품었던 그 적의를 모든 인간들이 품을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그렇지요.

태중에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서로 경쟁할 이유 없습니다.

당연히 에서가 장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집안 꼴이 어떻게 됩니까?

두 편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심술쟁이 하나님 아닙니까?

한 가정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셔도 믿을까 말까한데 한 가족을 두 편으로 나누어버립니다.

두 자식이 싸우는 꼴을 부모가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 참 볼만한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나눕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나누시기 전의 인간들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무엇이 착하다, 무엇이 옳다, 무엇이 악하다, 무엇이 그릇되다라는 생각자체가 없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이들에겐 이 선악에 대한 기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가렸습니다.

이런 행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음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릇되었다는 생각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야 말로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받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무엇이 옳다 그릇되었다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들은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 옳다 그릇되었다도 모릅니다.

창세기3장을 보면

뱀이 여자에서 찾아와서 이렇게 간사하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에 대해 여자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이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들이 죽음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더 놀라운 말을 하지요.

5절에 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 후 여자가 그 나무를 보자 어떤 마음이 생겼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런 마음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지요.

이들 마음에는 선악기준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이 선하다 악하다라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사단과의 대화자체가 선악기준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사단의 말과 여자의 말에서 이미 선악이 보이지요?

그게 왜 그런고 하면 이미 우린 선악체계속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악하다 무엇이 선하다라는 기준, 즉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행동을 할 때 이것은 선하고, 이것은 악하다라는 판단을 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고로 여러분들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과 같이 되었는데 죄인이라고 하니 듣기에 거북합니까 기분좋습니까?

어떤 사람이 선한일을 열심히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요. 그리고 가급적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들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선한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세계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키려는 본성이 있음을 아시고 그에 따라 지키라고 말씀을 주셔서 너희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들추어 내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악기준이 없는 인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다 지옥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와중에 주님께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이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상식적으론 없지요. 천국 가는 사람은 그냥 감사할 따름이고 지옥갈 사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지옥갈 사람은 절대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국에 그냥 집어 넣으시고 지옥에 그냥 집어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제사였습니다.

가인과 아벨 둘 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둘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죄인인 인간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라요. 또한 저주가 무엇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현장학습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은혜를 받았지요. 그런데 나타나는 현상은 어떻습니까?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저주가 무엇인지 볼까요?

아벨을 죽입니다. 힘 있는 자리에 앉습니다. 지배하는 자리에 앉습니다. 이게 저주입니다.

이해됩니까?

둘 다 이해되지 않지요.

이것 이해되어야 성도인데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저주를 못 받아들일까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는 것은 나쁘다. 사는 것이 좋다. 적게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많이 가지는 것이 좋다.

권력을 갖고 싶다. 이런 마음자체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들을 둘로 나누시는 방식은 한가지 밖에 없지요.

은혜라는 것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둘로 나눕니까?

이미 앞서 말씀드렸지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사항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즘은 돈 많은가 자랑하려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밥하게 하려고 자동차 만든 것 아니지요.

사람을 만드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대충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개입시키셔서,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을 주셔서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을 열 받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성령 받은 자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자들이 어떠하기에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미워하고 죽이려고 할까요?

간단합니다.

우린 모두 죄인하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만왕의 왕이시더라는 것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람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해도 죄라고 규정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착한 일을 해도, 율법을 지켜도, 봉사를 해도 다 죄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사람은 부정되고 오직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만 주님이심을 전하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은혜의 개입입니다.

왜 나의 행위를 무시하느냐 말입니다.

오늘날도 똑 같습니다. 십자가의 피만을 전하니 사람들은 싫습니다.

나의 삶도 좀 인정해 주시오. 나의 수고도 좀 인정해 주시오. 라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자신의 죽음으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전했듯이 오늘날도 주님의 백성은 이렇게 미움 받으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게 됩니다.

주님은 꼭 이렇게 반드시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일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사용해 인간들을 아주 기분 나쁘게 만드시면서 말입니다.

 
 
 

말라기

구름 나그네 2011. 5. 18. 22:14

말라기3장7-12

십일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레위기27장30-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신명기26장으로 가면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26장11절 말씀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십일조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소유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을 고백하는 행위가 됩니다.

십일조가 나의 것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두 소유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라는 고백으로서 십일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결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적이 없다고 우깁니다.

여기에 대해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십일조 하지 않습니다. 헌물도 드리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십일조를 하지 않을까요?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은 지금 십일조와 헌물을 여호와하나님께 드리지 않음으로 축복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되지요?

농사를 지었습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수확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적지요.

여기서 십일조하고 헌물을 드려 버리면 남는 것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당연히 적지요.

십일조 안하는 것이야 말로 헌물 드리지 않는 것이야 말로 복을 채우는 것 아닙니까?

아직도 이해 안됩니까?

십일조 안한 만큼 곡식이 남았습니다. 돈이 남았다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 볼게요.

여러분 헌금하지요?

헌금을 하는데 갑자기 경제가 어려워졌어요.

그러면 헌금하고 나면 돈이 줄어듭니까 늘어납니까?

줄어들지요. 그러니 헌금하지 않으면 그만큼 돈이 있게 됩니다.

헌금을 십분의 일이나 이 정도를 안 해서 그래요.

헌금을 십분의 일을 한번 해 보세요.

십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가 됩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십분의 일을 내야 합니다.

수고비, 농약비, 비료비 등을 다 제합니까 제하지 않습니까?

무조건 십분의 일입니다.

가축의 십일조를 보세요.

막대기를 세워놓고 지나가게 해서 열 번째 지나가는 것은 그 가축이 제일 좋은 것이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거기에 무슨 자신의 수고비, 인건비 빼고 하는 것 없습니다.

그러니 십분의 일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러분이 받는 돈의 십분의 일을 하게 된다면 작은 돈입니까 큰돈입니까?

뭐 해 봤어야 알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너무 힘들게 살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근거하여 저주가 내려진 것이지요.

저주를 내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일조 안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조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십일조만 갖고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주의 이유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소산이 적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우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했습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10절을 보게 되면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근거해 볼 때 이들이 나름대로 십일조를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긴 하는데 챙길 것은 챙기고 십일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며 온전한 십일조를 이야기하실 이유가 없겠지요.

그래야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했습니까라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판 그 자체로 보시면 안 됩니다.

자신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여호와 섬기기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젠 온전한 십일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말씀에 관심이 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삶입니다.

현재 펼쳐진 삶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 삶 속에 말씀을 다 끼워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신들의 형편에 맞게 적용하여 순종합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하나님께서 나의 규레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럴 때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하지요.

이 말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도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어떻게 지키라는 말씀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꼭 우리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너무나 빡빡하지 않습니까?

돈도 벌어야 하고 자식도 키워야 하고, 이 바쁘고 바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시간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보세요.

제가 일주일에 한번은 성경 봅니다.

하루에 그래도 세 번 기도합니다. 밥 먹을 때.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성경 읽을 시간 어디 있습니까?

그 시간에 잠이라도 좀 더 자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 읽은 것이야 밥 먹고 할 일 없는 목사나 할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같이 먹고 살기 바쁜 사람에겐 성경 읽은 것 말도 마세요.

주일날 모임에 와서 말씀 듣는 것도 나에게는 대단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정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어요.

그런데 먹고 살려면 이 생존의 세상에서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이런 항변이 나오는 상황 자체가 뭐라고 하십니까?

저주를 받은 상황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저주받은 상황임을 알지 못해요.

저주받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회개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규례를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저주받은 상황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너희들의 지금 상황이 저주받은 상황임을 알려 주십니다.

지금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상황이 바로 축복의 상황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열방들이 보기에도 저주받은 민족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지요.

현 이스라엘 꼬라지가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저주를 저주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본문을 두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고 협박합니다.

물론 약간 양심이 있는 인간은 그냥 십일조를 하라고 하지요.

웬만한 교파들 교회법을 보면 십일조를 율법조항처럼 집어 넣어 놓았습니다.

물론 이것뿐만 아니라 성도가 해야 할 일들을 새로운 율법으로 만들어 놓았지요.

사기꾼들은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지요.

말씀이 이렇게 놀라운 일을 벌이십니다.

저주받은 자가 어떤 자인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오늘 본문 말씀이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저들은 모릅니다.

자신들이 저주 받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지어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3장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 대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본문을 이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십일조를 어떻게 했을까요?

완벽하게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제대로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라기 말씀을 배웠습니다. 들었습니다.

축복받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저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죠.

내 형편에 맞추어서 십일조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시키는 대로 십일조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저주를 퍼붓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그 저주를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다 말입니다. 이게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 이들이 왜 저주 아래 있는지가 밝혀집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지가 않아요.

아주 부분적으로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맛보기만 보여줍니다.

마치 말라기에서 온전한 십일조 언급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밝혀졌습니다.

의와 인과 신이 담겨있는 십일조가 온전한 십일조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에서 말씀한 십일조라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일조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해 보면 어떤 인간도 온전한 십일조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의라는 것, 인이라는 것, 신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가 하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실 때에만 있는 것이 의요 인이요 신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라기로 들어가 십일조 내라, 돈 내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야만 화 있을 찐저라는 말씀도 오늘날 여전히 역사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려 주신 축복의 고백이라고 했지요.

에베소서 4장7-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 교사로 말입니다.

성도가 받은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삶이됩니다.

구약적 표현에 의하면 이것이 십일조가 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이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서 십일조가 되시는 것이 맞습니다.

십일조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도 여전히 십일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십일조가 뭐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받은 모든 것입니다.

성도가 받은 모든 것은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하나가 주님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돈의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좋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탐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들을 수확했기 때문에 늘 십일조를 드리도록 성도를 조치하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