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16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미가7장11-20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과 성경의 관심이 너무 다릅니다.

성도의 관심과 성도 아닌 자의 관심이 너무 다릅니다.


그저께 우연히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20년 이상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장사를 했답니다.


그러니 늘상 잠은 여관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밥은 당연히 식당에서 먹었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에겐 작은 소망이 있었답니다.

아이 손잡고 아내랑 시장도 가고 함께 놀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사람 만나고 좀 여유롭게 사는 것이 바람이랍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바라는 소망이 달라집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을, 자식이 아프면 자식이 건강하기를.


자식이 공부 못하면 공부 잘하는 것을.


남편이 말 안들으면 말 잘 듣는 남편이 되기를.


아마 사람이 백명이면 사람들의 소망은 수천 수만가지가 될 것입니다.

아니 늘상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정말 무한대가 될 것입니다.


환경에 따라 바라는 것이 수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 나옵니다.


왜 이런 것이 자꾸 튀어나옵니까?

환경에 따라서 바라는 것들이 왜 자꾸 내 속에서 튀어 나옵니까?


그것은 나라는 자신의 유동성을 고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정착이라는 것이지요.


나그네 삶은 싫다는 말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같은 인생은 내가 바라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인생은 늘 형통하고 고통없고 고난없고 재앙이 없는 인생입니다.

소득은 나의 바램보다 늘상 더 많은 인생이길 바랍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후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세기4장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죄인된 자로 당연한 인생이죠.

그런데 죄인이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 들입니까?

안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유리하지 않습니다. 정착합니다.


성을 쌓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 에녹성이라고 이름까지 붙입니다.


유리하는 인생, 저주받은 인생을 보여줄 마음이 없습니다.

아벨을 죽인 장본인입니다라고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이 죽어야 하는 인생임을 보여주는 아벨계열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삽니다.


성도란 죽음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모두가 다 살려고 발부둥 치고 목사님도 살려고 발부둥치지않습니까?

세상에 죽음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자가 어디있습니까?


성경에 가득합니다.

창세기5장만 보아도 아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함을 증거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7-12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겼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사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골로새서 3장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믿든지 늘상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흔적입니까 아니면 살아 있다는 흔적입니까?


가인이 왜 성을 쌓습니까? 그것도 자신의 아들 에녹의 이름을 붙여가면서 말입니다.

자기 이름 내세우기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도는 예수의 생명이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것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안개같은 인생임을 담대히 전하는 자입니다.

단지 안개같은 인생인데 오직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자로 안개같은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조금 전에 고린도 후서 4장7-12절을 보았습니다.

성도에겐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기 인생은 늘상 죽음에 넘기우는 인생.


그래 난 죽어야 마땅한 인생임을 보여주는 인생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래야만 누가 증거됩니까?


생명되신 예수님이 증거됩니다.


고린도후서4장18절을 봅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넘기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가인의 경우 그에겐 보이는 것을 붙드는 자입니다.

영에 속한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드는 자입니다.


그러니 성경 어디에도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드는 성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려고 할때 주님은 그 보이는 것을 다 제거해 버리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 미가서로 들어가 봅시다.

언약대로 성실과 인애로 하실것 같았으면 왜 굳이 유다를, 이스라엘을 죄가운데 두시고 멸망시키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느냐 말입니다.


물론 이 속에는 다른 열방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죄라는 것은 빼버리고 , 죄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냥 은혜로 구원하시면 안됩니까?

왜 반드시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어서 구원하시느냐 말입니다.


왜 너들너들한 인간의 삶들이 , 허물과 죄악들이 가득한 인간들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까?


그냥 천국에 집어넣어주면 안됩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안듭니까?

그러실것 같으면 그냥 구원해주면 안됩니까?


어차피 주님홀로 다하시는데 왜 그곳에 우리 인간에 들어가서 죄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까?

이런 반박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맞아 . 어차피 주님홀로 다하시니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나는 죄인이니 그냥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백날 들어도 그말이 그말이니 뭐 들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답을 다 아는데.


나는 죄인이고 주님의 용서로 구원받았음을 다 아는데 성경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성경읽을 이유도 없습니다.


설교 들을 이유도 없죠.


이렇게 되면 주님의 증인이 될수 없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될려면 죽음에 넘기우는 인생, 죄가 드러나는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미가서 7장18절을 봅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릉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이 말씀속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죄를 지었다 , 죄 용서 했다가 담겨있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용서받은 자의 삶이 담겨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믿으면 되지 뭐.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삶속에 믿음의 흔적이 담겨있습니다.


바로 용서받은 증거물들이 수도없이 줄줄줄 흘러 나온다는 말입니다.


죄용서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사도바울의 삶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미가서를 읽어 보면 우린 나쁜 놈들을 보는 것 같았죠?

그러다가 고린도 후서 4장을 보면 아주 휼륭한 성도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쪽은 죄만 보여주고, 한쪽은 예수님만 전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모습아닙니까?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과 사도바울이 다릅니까?


자꾸 헷갈리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린 자꾸 어디에 관심이 있는고 하면 선악에 관심이 있습니다.


구약이스라엘은 나쁘고 바울은 좋고.

그런데 사도바울이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두가 다 무엇을 전하는 자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전하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속에는 미가서 7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공로가 사도바울을 휘감고 있습니다.


그가 천막장사를 왜 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맞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맞습니다.


우리의 죄는 죄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 죄를 덮어서 주님은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성도 입에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리까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미가서7장16절을 봅시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핧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


성도의 삶이 이러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성경을 들추어 보면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덮어버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두려움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육에 속한 자 처럼 살 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이 누구를 전하는 자로 사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자신은 가인의 계열임을 전할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십자가 피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을 들여도 보면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공로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유리하는 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삶속에서 보여집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늘 흘러 나오기를 바랍니다.


 
 
 

미가서 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16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인생

미가7장7-10

어떤 글을 읽어보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이었다. 많은 참관인들이 보인다.

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지구와 하늘 너머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명확해 질 것이다. 안개가 걷히듯 그곳에 도리스가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설명을 듣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수많은 우발적인 가능성들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생의 전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한 순간에 수많은 가능성들이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무의미의 상태에서 얼마든지 많은 의미도 받을 자세로 존재한다.


 그것이 본래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의미로 가득하다.


 인간의 생은 카오스 적이다. 그러나 카오스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이전의 상태이다. 코스모스는 질서가 지워진 상태이다. 배열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규칙성이 지배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그러면 카오스는 질서 이전의 상태이다. 그것은 다른 방식의 규칙이 적용될 수도 있는 상태이다.

우리의 삶에 부여된 질서는 그것으로 인간의 모든 측면을 통합하고 포섭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아직 많은 질서 지워지지 않은 영역에 남아있다. 그것이 카오스 이론의 핵심이 아닐까”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한번은 겪어야 하는 현실이다.

죽음이 마지막 종착지라면 삶의 모든 우발적 사건들은 결국 죽음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질서지워진 상태가 아니지만 인생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죽음으로 맞추어진다.

이것이 카오스 이론의 핵심일까? 그래서 죽음너머에 뭔가 희망을 거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의미를 두는가?

그래서 자살을 하는가?


인생은 예측대로 살수가 없다. 여기 저기서 사건이 툭툭 튀어 나온다. 두더지 게임처럼.

그러나 결국 두더지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다 되었다.


죽음이 인생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래서 카오스에 질서를 끼어 넣기 위해 확실한 죽음조차 희망으로, 의미로 바꾸어 버린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인생이 아무리 우발적 사건속에 살지만 인생은 결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다.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버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의미를 의미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예술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으려는 모습으로서 의미를.


살아 있다는 자체가 의미 있다.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죽음, 즉 허무함, 의미 없음, 없어짐, 사라짐의 반대로서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 조차도 하나의 통과의례로 볼 뿐이지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생각입니다.

죽음이후에 뭔가 있다는 것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죽음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퍼즐이 있을까요?


물론 다른 퍼즐조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지막 퍼즐 조각이 있습니다.


첫째 아담때부터 주님이 다시오셔서 영원히 다스리실 때까지 마지막 퍼즐조각이 있습니다.


성도는 늘상 정답을 갖고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의미있니 의미 없니, 죽음이 해결책이니 아니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7-10절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으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죄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 심판을 당하지만 다시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누가 보는고 하면 대적이 이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이해가 됩니까?

범죄한자가 철저하게 심판을 받는데 심판을 받고 다시 심판받은 그를 인도하여 광명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대적을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적이 거리의 진흙처럼 밟힐 것을 심판받은 자가 눈으로 똑똑히 본다는 것입니다.


뭐 별 어려운 것이 없죠?

늘 듣든 말씀아닙니까?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에베소서2장1-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다시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가서 7장 7-10절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 나가 미가선지자 자신도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범죄함으로 심판받는 이스라엘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2장으로 오니까 나라는 주체가 사라집니다.

우리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우리라는 주어도 주인역할 못합니다.


상황은 미가서에 나오는 내가 겪은 일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미가서에서는  주님의 하신일을 목격하는 자로 , 마치 제 3자의 입장처럼 표현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으로 오니까  제 3자의 입장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긍휼, 하나님의 큰 사랑만을 전하는 자로 성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자로 말입니다.


대적이나 심판이나 구원이나 모든 것이 오직 한분,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에 집어 넣어셔서 이스라엘로 만드시어 궁극적으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퍼즐 조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처음부터 영원까지의 마지막 퍼즐조각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의미가 없니, 죽음이 어떠니, 삶이 어떠니 저떠니 다 헛소리입니다.


처음부터 인생은 자신의 의미를 찾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예술이 인생의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어준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도 죄의 흔적일 뿐입니다.


죽음도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지막 퍼즐조작은 죽음이 아니라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


이분이 우리 인생에게 마지막 퍼즐조각입니다.


그러니 죽음 후에 뭔가 다 알겠지.

이런 생각은 성도가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죽음후에 다 알겠지라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지.

왜 우발적인 사건들의 연속속에서 부딪히고 깨지고 하면서 살아가는지.


이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우발성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쪽에서는 결코 우발성이라는 것이 없었지요.


철저하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들로 그들을 때를  따라 부르시고 사용하시고 내버려 두시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겐 믿음이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육목표가 따분하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기 라고 합니다.

참 재미있죠.


성도들도 아마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따분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성도가 따분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도가 따분함을 느끼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아닙니까?


이스라엘 자체엔 의미 없습니다.

미가 선지자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을 사용하시는 주님되신 예수님만이 참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삼지 못하고 나의 삶의 행적들을 통해 따분함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에베소서2장을 보니 죽고 사는 일이 나로부터 떠난사건입니다.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까?


단지 우린 믿어질 뿐 아닙니까?


본문 어디에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미가서 7장7-10절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체들은 범죄한 주체밖에 없습니다.


대적들이 짓밟히는 것도 주님께서 보게 해 주셔야 볼수 있는 것이지요.


이게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제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마세요.

십자가 안에 이미 마지막 퍼즐이 처음부터 영원까지 확 밝혀져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주님의 원수가 됩니다.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증인일 뿐입니다.

거지나사로로 살다가 죽어도 말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무슨 인생이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본을 삼을 사람을 거지 나사로입니다.

 
 
 

미가서 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15

원수 만들기

미가7장1-6

1절을 좀 쉽게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아, 답답하구나. 여름 과일을 따러 나섰다가, 포도 송이를 주우러 나갔다가, 먹을 만한 포도 송이 하나 얻지 못하고, 먹고 싶던 맏물 무화과 하나 만나지 못하듯”

2절로 가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절은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말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4절은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5절에서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절은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단지 이 말씀이 유다나라에만 국한 된 말씀일까요?

사람들은 오늘 같은 본문을 대하게 되면 이런 나쁜 인간들이 있던 시대는 극히 제한 적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이것이 나의 모습이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가요?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모습인가요?


사람들은 사람들의 본 모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조차도 우리의 본질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라 생각지 않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본질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라고 인정하는 자라면 방금 제가 한 단정적인 말에 당연히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분을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이용해 먹는다는 말은 자신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 인정 받을 만한 사람, 지옥가지 않아도 될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야, 정말 유다는 멸망받아 마땅하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인간은 멸망받아 마땅하다. 나도 그러하다라고 생각해야 될 터인데, 나는 쏙 빠져버립니다.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미가 선지자가 단지 자신의 시대에 유다땅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는 것입니다.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나 정직자가 없다는 것은 지구상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로마서3장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리라고 하십니다.

 

5장12절에서는 분명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으르렀느니라”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미가선지자 말씀은 미가 선지자 말씀이고 로마서는 로마서로 취급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언제나 쏙 빼버립니다.


어디에서 말입니까?

죄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로마서4장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여기시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다.

모두 죄인인데 누가 의인인가 했을때에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이를 믿는 자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에 여기에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뜻은 7,8절에 나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주도권을 다 주님께서 쥐고 계시죠.

믿는다는 믿음의 행위를 갖고 의롭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세상을 평가하시는 주님의 평가가 지금 미가 선지가를 통해서 평가하시는 그 평가와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장5절에 의하면 참 빛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나머지는 다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은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빛을 받아 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 할 주도권이 없는 어둠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미가서 7장1-6절을 보면서 단지 인간들이 악한 모습을 보일때에만 저런 악한 모습일 뿐이다라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상 표면만 봅니다.

물론 그 내면을 보려고 애써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말씀에 근거하여 내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 본질을 보는 인간 없습니다.


물론 성령받은 자만 그렇게 봅니다.


미가 선지자가 그렇게 보듯이.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 특별히 좀더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본문입니다.

6절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니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35,36절에서 인용하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가서에서의 말씀을 보면 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이 됩니까?


선한자가 없기 때문이죠.

믿을 놈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악한 자들이고, 모두가 다 악을 부지런이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 조차도 원수가 됩니다.


그러면 왜 집안식구가 원수가 됩니까?

무슨 악을 행하기에 그렇습니까?


악한 사욕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탐심이죠. 오늘날로 표현하면 돈입니다.

돈 때문에 집안식구가 원수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 종종 듣고 봅니다 . 그죠.


돈 때문에 아들 죽이고 아버지 죽이고 이혼하고 난리아닙니까?


그러면 우린 괜찮아서 아들 죽이지 않고 아버지 죽이지 않습니까?


우린 휼륭해서  아버지 안 죽입니까?


여건만 되어 보세요.

환경만 되어 보세요.


아버지고 어머니고 형제고 자매고 없습니다.

탐욕을 위해서는 모두가 다 자신들의 희생제물들이죠.


그러니 우린 이런 사건들을 들으면서 접하면서 우리의 본질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런 내용의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영 다르게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0장34절부터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앞서 미가서 말씀에 의하면 왜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까?

탐욕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재앙의 상황이라 간주합니다.

집안식구가 원수가 되는 상황은 저주받은 상황이지요.

이것은 곧 심판만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거꾸로 집안식구를 원수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집안식구가 원수가 안되는 것이 오히려 저주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미가 선지자를 통해 집안식구가 원수되는 것이 심판의 근거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원수관계가 성립되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집안식구끼리 원수 만들기에 나서신 것입니다.


참으로 난해한 말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집안식구끼리 원수가 되지 않고 서로 화목하게 살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재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실때에는 오히려 반대로 이루어버리십니다.

집안식구는 반드시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집안 식구끼리 원수가 될 때에야 비로소 미가 선지자의 말씀이 제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렵죠.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은 미가 7장6절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제발 집안식구끼리 원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예수님을 잘믿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집안식구끼리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은 가족입니다.

무얼해도 가족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가족우선이죠.

좋을 것을 보아도, 먹어도, 입어도.

무얼해도 자기 가족 생각하지 남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얼해서, 무엇을 먹어도, 입어도, 늘 상 예수님이 우선시 되어 보세요.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수됩니다.

상대는 당연히 우선 순위가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상대가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되다 보니 상당히 기분이 나빠집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비나 어미를 사랑합니다.

아들과 딸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됩니까?

예수님이 개입됩니다.


이럴 때 무엇이 발생합니까?

미움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십자가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땅에 원수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원수를 고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작업에 우리가 걸려 든 것입니다.

성도가 여기에 걸려 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못 배워 먹었다. 예의가 없다. 어른공경 모른다. 자기 자식 사랑 모른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소리 듣게 성도를 몰아 붙이십니다.

십자가의 피로 그렇게 하십니다.


성도가 십자가의 피를 말하지 않으면 원수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임을 알지 못합니다.


집안 식구라는 표현을 좀 확대해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이유를 말하는 순간 주님의 원수만들기 작업은 성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늘 이렇게 끌어가십니다.

요즘 좋은 가정만들기에 미친자들이 있죠. 행복한 가정만들기에 미친 목사들.

정말 미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찌그리 정반대로 해석합니까?

행복한 가정을 꿈꾸게 되고 만들려고 하면 십자가는 제거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원수만들기에 기꺼이 함께 참예되는 복받은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