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구름 나그네 2009. 11. 29. 17:18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사무엘하24장1-25

한국 텔레비전에 보면 일박이일이라는 오락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곳에 나오는 엠씨들이 즐거하는 게임 중에 복불복 게임이 있습니다.


게임을 해서 게임에 지면 벌칙을 받게 되고 게임에 이기면 벌칙을 면하는 것을 두고 복불복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느냐 복을 받지 못하느냐는 그날 게임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만 아니면 된다고 외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1절이죠.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ㄹ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무슨 이런 말씀이 다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기 위해 다윗을 감동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 시켜서 약속의 땅에 집어 넣으려고 하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9가지 재앙을 내려도 바로왕은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바로 왕이 강퍅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다가 방금 읽은 본문에 와서는 여호와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가장 거북스럽고 기분 나쁘게 하는 말씀이 이런 말씀입니다.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상황.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 결정권이 자신의 손안에 있어야 합니다.

저주든 복이든 내 뜻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 져야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왕이 모든 주도권을 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바로왕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를 보니 어떻습니까?


바로 왕이 주도권을 행사 했습니까?

아니죠?


바로왕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자신이 느끼는 대로 보이는데 마음가는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자기 뜻과 의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런 것이 아니었죠?


이 땅에 사는 사람 모두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바로 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자기 손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말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볼수록 당황스럽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왕이라면 당연히 자기 백성수를 세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성 수를 세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입니까?


왕이라면 당연히 백성수를 세어 보면서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라고 별거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요압장군이 한마디 합니다.

3절을 보세요.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이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 하시나이까 하되”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이 할 말을 요압이 하고 있고 요압이 해야 할 말을 다윗 왕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를 이미 1절에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다윗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세요.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 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참 희한하죠.

인구 조사가 끝나니 마음에 자책했습니다.


요압장군이 말할 때에는 듣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무나 지극히 인간적이죠.

첫째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죠.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이 이런 모습 아닙니까?


주님 사랑하는 일이 아닌 줄 아면서 그냥 그 앎이 내 마음과 행동을 정지 시키지 않죠. 그러고는 꼭 그 일을 행한 후에는 마음에 자책합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2,13절입니다.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이 뭐라고 답합니까?

14절을 한번 봅시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게 무슨 말씀인줄 알겠습니까?


다윗이 지금 무엇을 고백합니까?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의 손에 빠진다는 말은 갓을 통해 세 가지를 말씀하신 재앙 중 두 가지는 사람의 손에 빠질 수 있는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칠년 기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준비하든지 해결하려고 하겠죠.

석달 동안 대적에게 쫓겨 도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을 도저해 댈 수 없는 재앙, 즉 삼일 동안에 온역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당하기만 해야 합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온 몸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지금 이런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다윗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 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할 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정반대이죠.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한 다윗이 지금은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죽음의 자리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곧 자신이 죽어야 될 당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할 때와 온역이 자신이 인구 조사한 땅에 임했을 때에는 완전히 바뀐 다윗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갓을 통해 다윗에게 행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참 희한하죠. 왜 하필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일까요?

왜 이방인이었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일까요?


아라우나의 태도를 보세요.

20-21절을 봅시다.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햐앟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자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뭐라고 합니까?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소의 멍에는 아시겠죠. 소를 부릴 때 머리나 목에 얹어 짐을 끌도록 하는 나무 막대 또는 나무 틀을 말합니다. 제구는 탈곡기입니다.


지금 아라우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전재산 다 내 놓겠다는 말입니다.

자기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다 드려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하는 마음과 다른 마음입니까?

누가 말입니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이방인이었던 아라우나.

진멸당해야 했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결국 다윗은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여부스 사람의 것이 다윗 왕 자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감동시키신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까?


왕이란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자입니다.

희생의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희생을 통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을 통해 참 왕되신 예수님이 하실 일을 다윗 왕이 제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번제물이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자기백성 즉 참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제거 되었습니다.


저주가 제거 되었습니다.


우리의 손에, 인간의 손에 복과 저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께 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로마서3장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런데 인간들은 늘 우깁니다.

복과 저주에 대한 주도권이 나한 테 있지 예수님께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어제 시장에 갔습니다.

어느 상점에 들어가니 그곳에 재물신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값비싼 것입니다.


왜 그 우상을 상점에 두었겠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땀 흘려 번 돈을 투자해서 신을 모셔 두었으면 우리 집에 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의도지요.


이런 사람은 무엇을 모릅니까? 복과 저주가 뭔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정권을 안정시킨 것이 복입니까?

힘을 가진 것이 복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죽음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아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심을 전하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처럼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다 드리는 자, 이런 자가 바로 예수님이 주님되심을 제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처럼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예수님의 피로 인해 재앙이 끝났음을 담대히 전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 하

구름 나그네 2009. 11. 23. 10:09

다윗의 용사

사무엘하23장8-39


교회든 세상이든 영웅이 필요합니다.

교회든 세상이든 영웅이 되려고 합니다.

교회든 세상이든 영웅이 대접받습니다.


제가 그저께 2012 영화를 보았습니다.

물론 극장가서 본 것은 아닙니다.


흐릿한 화면에 그것도 한국말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외국어만 두 개가 나오는 영화.


그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와 노아홍수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아주 재미 있습니다.


물론 물로 온 지구가 덮힙니다.

물론 화산도 폭발하지만 궁극적으로 물로 온지구가 덮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그러면 누가 살아 남는가?

극비리 진행된 지구 멸망대비 계획에 따라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운 좋은 사람, 그리고 사람들에의해 택함을 받아 공수받은 동물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 만든 최 첨단 방주에 들어가게 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참 재미 있는 것은 노아 홍수 심판후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과 정반대로 행한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의 모습과 이 영화는 너무나 닮았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심판과 정 반대로 지구의 멸망과 구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즉 노아 홍수심판은 인간의 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을 얻습니다.

물론 동물들도 알아서 방주로 들어 옵니다.


그런데 2012에서는 자연적 현상입니다. 정보를 가진 소수의 인원들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멸망에 대비하여 준비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면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노아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방주 문이 닫힐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준비되어져야 할 배 하나가 덜 완성 되어 그곳에 탈 사람들이 그냥 수몰되어야 하는데 후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고 설득한 한 젊은 과학자의 설득으로 그들도 대부분 방주에 올라 탑니다.


물론 이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방주에 타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들의 뜨거운 사랑은 쉼 없이 보여 줍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영웅이 있습니다.

누가 영웅입니까?


모두가 다 영웅입니다.

살아남은 인간 모두가 다 영웅들입니다.


모두가 다 영웅입니다.

이들은 모두 살아남을 만 했습니다.


돈이 많았던 권력이 있었던 운이 좋았던 어찌되었든 이들은 살아 남을 만했고 이들은 보통 사람들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는 영웅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별거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습니까?


노아는 비밀리에 방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다 보고 알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2에서의 방주는 은밀히,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곳으로 들어가 멸망을 피하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물로 지구가 다시 멸망한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성경 말씀과 정 반대로 영화가 진행됩니다.


구원은 은혜 받은 자가 얻는 것이 아니라 돈있고 권력있고 운 좋은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의 용사들이 나옵니다.

다윗의 용사들을 이렇게 기록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권을 행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용감한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상식이고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을 뒤엎어 버립니다.

전쟁에서, 싸움에서 승리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한 구절이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립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용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인간의 상식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다. 그러나 다윗의 용사들이 있었기에 그 승리가 가능했다라고 말입니다.


요즘도 우리가 늘 듣는 말 아닙니까?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그 인간이란 다름아닌 영웅.

영웅없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가 아닙니까?


믿음 없는 자가 하는 말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봉사하지 않고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전도하지 않고 내가 헌금하지 않으면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이들은 꼭 자신을 영웅 자리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인공 자리에 집어 넣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이해되고 받아 들여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면서 말합니다.


그렇지 하나님도 이렇게 일하시지.

영웅. 용사들이 있었지.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보면 딱 지옥 갈 자들이 보는 성경관입니다.


왜 다윗의 용사들을 말할까요?

그 이유는 다윗의 용사들이 분명 필요했습니다.

이들을 앞장세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힘도 없는 쫄병들을 내세워서 하시면 더 극적이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게 인간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일 하실때에는 그 사람이 용사든지 왕이든지 쫄병이든지 노예든지 어느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노예가 되었든지 왕이 되었든지 주님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인간들은 영웅이 되기를 바라고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합니다.


십자가는 눈에 거슬립니다.


자신이 영웅이 되고 주인공이 되는데 방해물입니다.


만일에 십자가가 눈앞에 있으면 결코 자신이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있으면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4장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사람에게 대한 열심, 이것을 끌어 내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열심, 사람 사랑. 사람 영웅 만들기, 자신 영웅 되기, 자신이 주인공 되기.


사람의 세상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없어져야 합니다.


인간들은 꿈을 꿉니다.

인간만이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짜증납니다.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영웅, 사람들과 함께 죽어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수많은 다윗의 용사들을 기록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헛빵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8장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하는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웅을 구하는 것이지요.

누구처럼. 

이방국가 처럼.


그래서 우리도 땅땅 거리며 살아보자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사무엘 하 끝부분에 와서 용사들을 열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왕과 용사들이 앞장 서서 너희의 싸움을 싸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싸움을 하셨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다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눈이 없는 자는 눈 뜬 소경입니다.













 
 
 

사무엘 하

구름 나그네 2009. 11. 15. 21:05

영원한 언약

사무엘하23장1-7

어느 한국 기독교 단체에서 여론 조사를 했답니다.

누구를 대상으로 했는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답니다.


여러분 여론 조사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 결과는 뻔하겠죠?

저 단체가 왜 여론 조사를 했을까요?


성경어디에 여론 조사가 나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여론조사해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렇게 생각하니,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니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은 이런 행동을 하라.


그래야 이방인들이 믿고 따를 것이 아니냐?


이런 성경말씀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죄인들은 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여론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볼까요?


기독인들은 언행일치가 없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 부정적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응답을 했답니다.


그리고는 무분별한 선교, 타종교 비방, 기업화현상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답변을 했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윤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행함을 말하고 있죠.


그런데 그 행함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행함이 아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발생한 인간적 기준에서의 윤리입니다.


저들은 성경말씀을 쓰레기 취급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탐욕밖에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제대로된 기독교라면 여론 조사가 이렇게 나와야 하죠.

십자가 복음 때문에 난 기독교가 싫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십자가 복음은 저들의 반응 자체를 다 부정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담지된 복음이란 윤리 그 이상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거짓 복음을 전한 자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자신의 윤리기준으로 깨끗하게 걸러서 인간 윤리의 기독교로 만들어 버리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어느 인간도 이 윤리 즉 옳고 그름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습니다.


항상 인간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말이 맞거든요.


성경을 읽어 보니 말이 됩니다.

모든 본문들이 해석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옳은 것을 따라 십자가 복음 속으로 들어 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옳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것은 틀렸고 이것은 옳다가 아니라 저쪽은 사망이고 이쪽은 생명임을 알여 주는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심사가 꼬입니다.


자신은 분명 옳다고 해서 이 길로 들어 왔는데 들어 와 보니 들어 온 인간들이 옳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상식적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생각할 때 목사나 성도들이 항상 그렇게 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죠.

생명안에 산다는 것이 옳고 그름으로 판단되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생명 안에 산다는 것 조차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니 속에서는 늘상 갈등이죠.

십자가 복음이 맞기는 맞는데 왜 이런 문제가 많을까?


이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자신의 선악기준으로 선택한 결과로서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물론 이 복음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지만 문제는 생명안에서가 아니라 선악과 안에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판단할 때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복음을 아는 목사가 저렇게 해서는 되는가?

복음을 아는 성도가 저렇게 해서는 되는가?

복음을 안다는 자가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복음을 아는 목사가 남에 대한 배려도 없고..


제가 서론에서 말씀드린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은 판단 기준으로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고 있죠.


그러니 참 웃끼지 않습니까?

생명 안에 있다는 말은 사나 죽으나 내껀 없다는 말입니다.

없다는 말은 없다가 아니라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꾸 오해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없다고 하니까 부인 할게 없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자의 관심은 항상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헌금 안하고 봉사 안하고 배려 하지 않는 행동보고 삐질게 아닙니다.


복음만 전하면 되죠.

저들이 어찌 목사소관입니까?


저들이 어찌 내 소관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주님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했는데 증인이 되는게 아니라 주인행세하고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없다라는 말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 보면 어떻습니까?

마치 바울이 주인 행세하는 것 같이 보이지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계시라는 것을 받아 들이지 않아요.

성령에 의해 쓰여진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말씀임을 믿지 않아요.


그러니 주님 전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에 차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하면서 쓴 찬양이 나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이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코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


물론 여기에 문제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런 구절이야 그냥 다윗을 자신으로 대체해서 해석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 선수들이 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6-7절이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물론 이 구절도 내가 사악한 자 아니니 라고 해석해 버리면 됩니다.


이게 여론 조사한 자들의 마음아닙니까?

영원한 언약은 다윗과만 세우셨죠.


물론 이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워 놓으시고 다윗을 통해 영원한 언약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본문이 우리 인간들이 가진 상식이나 윤리, 아니면 욕심에 부응할 수 있는 찬양입니까?


그렇지 않죠.

인간들을 상당히 기분나쁘게 하는 말씀입니다.


취미생활하면서 교회 오는 자들에게 돌 팔매질 하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영원한 언약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세우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은 뭐가 됩니까?


모든 인간은 다 사악할 뿐임이 선언되는 것입니다.


단 , 십자가 피 공로로 죄용서 함을 받은 자 만이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그 외에는 다 불사름을 당할 대상들입니다.


뭐 인간의 윤리나 기준, 바램 이런 것들은 깡그리 다 무시해 버립니다.


마태복음3장10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살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행동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워져야 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좋은 열매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 주면 됩니까?


먹을 것을 없은 자에게 나눠 주면 됩니까?

물론 누가복음3장에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좋은 열매일까요?

이런 것 쯤은 요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까?


기부천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저들은 도끼 심판을  피할 수 있겠네요.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천국가기 참 쉽죠. 그쵸.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는 땅에서 맺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것 같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죠.

우리 인간끼리 여론 조사해서 부족한 것 채워나거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좋은 열매 맺는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 자녀를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것이라야 기껏해야 옷 나눠 주고 돈 나눠 주고 밥퍼주는 것 뿐입니다.

그래도 지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이 덮치게 되면 생명입니다.

이런 자들은 좋은 열매가 맺혀 지죠.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양선과 절제와 평강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전히 선악기준에 있는 인간들이 또 함정에 빠져 들죠.


바로 십자가를 전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꼴이 어떤 모습이라도 내세울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게 좋은 열매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자기 꼴 안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옆에 달린 강도도 마찬가지죠.


자기 꼬라지 안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만 보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주님이 행하신 구원과 불사름을 담대해 찬양하며 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