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구름 나그네 2009. 3. 2. 17:41


 

성도의 죽음

사무엘상31장 1-13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라 할 찌라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려고 발부둥쳐도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께도 제가 아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을 보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자식들을 다 잘 키워 놓았고 자녀들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장남이 어머니를 찾아 뵈러가니 이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듣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세상살이도 다 부질 없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 모인 우리들은 너무 젊어서 그럴지 모릅니다마는 아마 연세가 드신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남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효도를 하자, 늙으신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사실이요 그 죽음엔 인간들이 보기에 괜찮은 죽음이 있고 또한 그렇지 못한 비참한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죽음을 두고 인간이 두 가지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김수환 추기경 같은 경우엔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복된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방금 예를 든 할머니 같은 경우는 김추경과는 비교가 안 되는 죽음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인가 어느 즈음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어떤 여 집사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는고 하면 새벽기도 갖다 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저희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그런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이 평소 난 오래 살 마음이 없다고 하더니만 그렇게 빨리 죽었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개죽음인가 아니면 호상을 맞을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보면 인간들은 죽기를 무서워 합니다.

그래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음도 무서워 하지만 어떤 죽음을 맞느냐에 따라 마치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역시 죽기가 무섭다는 것이지요.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좋은 죽음을 맞아야 하며 그래야 좋은 곳에 가서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과 요나단이 동일한 죽음을 당합니다.


사울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죠.

그러면 요나단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운 다윗을 위해 자신의 자리라도 기꺼어 내어 놓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사람입니다.

예수님만 증거 하다가 인생을 끝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보니 너무 서글퍼게 보입니다.

어떻게 사울 왕과 같은 죽음을 당합니까?


사울 왕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요나단이 너무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인생을 이렇게 구별되지 못한 죽음을 당하게 하신다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 호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젊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창인 나이에.

우리가 믿는 주님이 이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뜻을 실행하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울은 어떤 죽음을 맞이했습니까?

역시 제 명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았던 사람들 중에 호상당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목숨이 단축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 하는 일 때문에 죽은 자들이 참 성도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친척들이 그리고 친구들이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25-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 모든 인생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증거하는 도구들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고 그 인생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요 성도 아닌 자는  심판의 그릇으로 그 인생을 살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죽음을 맞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관심은 십자가 지신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둡니다.

시편 73편 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경악할 정도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이런 죽음 어떻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3절을 보게 되면 악인이 만사 형통한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는 다른 사람과 같은 고통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습니다. 너무나 잘나갑니다.

너무나 잘나갑니다.


모두가 다 부러워 하는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결말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호상입니까?

고통없는 죽음. 객사 당하지 않는 모습.


그러나 이런 죽음의 모습으로는 절대로 천국과 지옥을 나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다가 개죽음 당하는 인생이 오히려 천국 백성임을 확인 시켜 줍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관심은 십자가 지신 주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기 몸입니다.

육체입니다. 

썩을 것에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의 죽음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홀로 있다가 죽은 할머니나 새벽기도 갖다 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나 온 국민이 슬퍼하는 죽음을 당한 김 추경 이들에게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공로가 없다면 정말 모두가 개죽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 흘리심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면 복된 죽음입니다.


이런 시각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이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2-49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악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평생 죽음의 자리에 있었슴이 보이지 않다가 그 죽음의 자리가 현실로 드러난 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형편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주님의 입장에서 병, 건강, 죽음, 모든 것들을 보셨습니다.

"죽은 자에게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에게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와서 교제하자고 했던 어느 목사의 말이 생각이 나네요.....
부친의 죽음앞에 있는 자들에게.......그 목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때 무척이나 화가 났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는 죄만 나오는 이 육신이 죽는 죽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

 
 
 

사무엘상 강해

구름 나그네 2009. 2. 22. 17:00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무엘 상30장23-25

마태복음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과 그 주인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어떤 품꾼은 하루 종일 일했고, 어떤 품꾼은 단지 한 시간도 안 되게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일삯을 주는데 똑 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을 더위와 싸워가면서 땀을 뻘뻘 흘린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주인의 처리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참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주지 않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천국과 상관 없는 즉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은혜와 상관 없는 자들의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항상 자신들이 땀 흘린 만큼 받을 수 있다는 당위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 속에 산다고 하면서 그 마음의 생각이 피흘리심의 은혜와 상관 없는 자들이 수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아주 큰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한국카톨릭의 아버지라고 할까요. 김수한 추기경이 죽었는데 온 나라가 난리입니다.


몇 년 전에는 성철 중이라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때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 죽은 것에 대해 너무나 안타까워합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사람들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얼마나 우리 인간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가신 분들인가라고 보도합니다.


그저께 뉴스를 보니 세상의 빛이었다고 맨트를 달았습니다.


수십만이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 선 모습.


참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너무나 비교되는 죽음이요 장례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 자신들이 볼 때 자신들의 가치에 합당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 대해서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단편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 고통을 함께 하는, 진심어린 사랑으로 산다고 합니다. 단편들 내용의 핵심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톨스토이가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해 두었습니다.


진심어린 사랑이 곧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인데, 김수환 추기경의 행동이 천국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 지금도 뉴스에 나오는 강모씨라는 살인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런 인간은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저런 인간이 천국가면 우린 천국 안가겠다는 것이 인간들 입장아닙니까?


살인자의 모습과 사람들이 보기에 수많은 선한 일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면서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주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로 사는가? 아니면 자신의 노동을 먹고 사는가?


틀림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수고의 댓가, 땀 흘림의 댓가를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아말렉과 전쟁을 한 후 의견이 나누어 집니다.

한 쪽 의견은 전장에 내려갔던 사람이 더 많은 분깃, 즉 수고의 댓가를 더 많이, 다 가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고 피곤하여 다윗을 따르지 못한 이백명에게는 싸움의 댓가를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일에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하여 얻은 결과물을 타인과 똑 같이 나누라면 나누겠습니까?


아마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저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똑 같이 나누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옳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피흘리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나 피곤하여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사람 모두가 동일하게 나눕니다.


그 근거를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입니다.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이지요.


전쟁은 여호와 홀로 하신 전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자신도 그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여시키심은 오히려 참여한 인간을 부인시키기 위해 참여시키셨는데 인간은 자신의 수고댓가를 찾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1-15절을 보면 연보에 대해 나옵니다.

좀 길지만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러므로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조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 보면 연보라는 것이 나오는데 연보한 것을 칭찬합니다.

그냥 생각 나서 연보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쪽에서 돈이 얼마정도 필요하다를 알려 주었고 마케도냐 교회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도 작정하여 연보를 시작했으니 작정헌금을 다 하라는 뜻하게 들립니다. 마치 삯꾼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통해 성도가 무엇으로 사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보면 진실한 사랑,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는 진실한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것 같습니다.


죽은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는 삶, 아니면 성철 중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심어린 사랑을 바울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지 결코 돈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돈이란 어떤 것입니까?

생명과도 바꿀수 있는 것이 돈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피같은 생명같은 돈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생명을 내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엇으로 살아가는 지를 증거하는 인생입니다.


물론 돈을 내어 놓았다 , 내 피같은 살같은 돈을 내어 놓았다. 그러니 내 주님의 은혜를 알지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흘리심,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는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 했으니 당연히 이 돈은 내 것이요, 내가 수고했으니 내 수고의 댓가를 내가 챙겨야지가 아닙니다.


9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성도는  무엇으로 삽니까?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로 삽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 어떻게 참여할 수 있습니까라고 적극적으로 그것도 간절히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답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은혜를 받은대로 하시오가 아니라 지금 얼마가 필요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은혜를 아니가 그냥 알아서 하고 알아서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 같은 모습이죠.


나 누구를 돕고 싶은데 얼마가 필요합니까? 얼마가 필요합니다.

뭐가 다릅니까? 별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이 결과물을 자신에게 돌리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자신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비슷하고 동일한 모습을 보이면서 성도는 그 속에서 주님의 피흘리심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요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댓가를 먹고 살지만  성도는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강해

구름 나그네 2009. 2. 15. 19:56

싸움의 대상

사무엘 상29장 1-11

사람은 한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고약한 버릇이 나옵니다.

자리 유지하려는 버릇, 대접받고자 하는 버릇, 그 자리를 영구히 고착화 하려는 버릇.


인간이라면 그렇지 않은 인간 없습니다.

그래서 남을 죽이는 것 쯤은 여사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 자리를 위협하느냐?


누구든지 내 자리를 위협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라멕이 부르는 노래에 우리는 경악하는 것이 아니라 맞다 맞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 땅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싸움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쳐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9장27절입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니다”


왜 자기를 쳐 복종했겠습니까?


자기 속에서 늘상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들이 튀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자기를 쳐 주님께 복종할 이유가 없지요.


바울이라고 해서 완벽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울이기 때문에 우리와 뭔가 다르지 않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나 우리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 7장22-8장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하는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도란 구원 받았으니 더 이상 곤고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란 구원 받았기에 늘 상 십자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를 해방해 주셨음에 너무나 감사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곤고한 인생이기에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지요.

곤고한 인생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소용없습니다.


이미 구원받아 신의 경지에 올랐는데 무슨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성도는 늘상 자신과 싸우는 자입니다. 물론 성도 자신이 싸우는 싸움은 아닙니다.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과 또 다른 분의 역사로 싸움이 이루어 지는 현장이 성도의 몸, 죄된 몸입니다.


이런 싸움이 없는 몸은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가 이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싸움은 외부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6장10-17절을 봅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말씀을 보면 이보다 더 치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복음을 치열한 싸움으로 보기를 싫어합니다. 그냥 복음 전파로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복음 전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전쟁용어로 영전 전쟁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과거 구약시대 때, 즉 요즘 우리들이 보는 다윗의 전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는 칼로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지만 지금은 복음으로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내용은 다르지만 전쟁의 방식은 일치합니다.

오직 한가지입니다.


피흘림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과거 진짜 칼을 들고 전쟁을 할 때나 지금 말씀의 검을 들고 할 때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군사수가 많고 좋은 계략가가 있어도 피 흘림의 정신이 없으면 전쟁은 백전 백패입니다.


다른 점은 그 당시 승리자는 승리자의 기쁨을 육체적으로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 전파의 승리로 육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런 승리로 인해 더 많은 핍박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순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입니다.

뭔가 비장감이 듭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의 이상한 행보가 나옵니다.


다윗은 어떤 전쟁을 해야 합니까?

여호와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 즉 이스라엘의 원수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랑 전쟁하려고 합니까?

블레셋의 원수인 이스라엘과 전쟁하려고 합니다.


이게 제정신입니까?

자신이 블레셋 아기스와 함께 이스라엘을 치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이 블레셋 사람이냥 착각을 한 것일까요?

싸움의 대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때 누가 다윗을 막아섭니까?

바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입니다.


다윗의 과거 행적을 알기에 다윗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가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


이것이 다윗의 진심일까요? 진심이지요.


그래서 30장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전쟁, 어떤 싸움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부분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가버렸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들이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다윗은 블레셋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의 터전이 불타버리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여인들을 다 잡혀 가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가져오라 하여 여호와께 묻습니다.


그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게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다윗이 진정 해야 할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터전을 불태워 버리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사로잡혀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진정 어떤 전쟁을 해야 할 지 제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쟁의 대상은 여호와의 원수들입니다.

그래서 전리품 배분에 있어서 그는 철저하게 이 전쟁이 여호와 전쟁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윗의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려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겉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과 지략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전쟁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대상이 누군지를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는 모습을 통해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성도는 싸움꾼입니다.

싸움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혈과 육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더 부자 되느냐 얼마나 더 건강 하냐 얼마나 내 자식이 잘 되느냐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 흘리심을 널리 전하는 것이 싸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전할 때 피 터지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회개하는 자가 생기는가 하면 대부분은 미움을 받는 일, 핍박받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자가 다윗처럼 세상에 속하여 살다보니 싸움의 대상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주님의 성도는 이방인 즉 멸망받을 대상을 사용하셔서라도 성도의 갈길을 알려 주십니다.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차기 하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 진영에 오래 살다보니 그 자리가 자신이 머물 자리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 날려 버리셨습니다.


만일 성도가 영적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안정성을 유지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에게 있어 싸움의 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되신 예수님이 됩니다.

마귀의 적은 사람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 이기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곳엔 반드시 충돌이 있겠지요. 복음만 전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선 추앙받고 선종 할수 있습니다.김추기경 같이. 교회를 갖고 놀든, 삼위일체를 갖고 놀든 성화를 갖고 놀든 교인을
갖고 놀든 마귀는 대적치 않습니다. 도와줄순 있어도...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근본 되시는분 에게서 독립 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복음의 훼방꾼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력으로 나로부터 출발해서 저 생명나무로 기어이 닿아보려는 쫒겨난 아담의 현실 입니다.
살아갈수록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흘려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더 가깝고 더 크게 다가옵니다. 목사님 두 공주님 잘 도착 했나요
한보따리 피의 은혜가 널리 전파 되었으면 좋겟습니다. 또 연락 합시다.
잘 들어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만 전파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