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구름 나그네 2012. 7. 1. 13:38

왕이 없음과 소견에 옳은대로 행함

사사기19장27-21장

레위사람이 자신의 첩이 죽은 것을 보고 나귀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보냈습니다.

30절을 봅시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레위사람의 첩이 베냐민 불량배들에게 나쁜 짓을 당해 죽은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스바에 다 모였습니다. 칼을 빼는 보병 사십만 명이 모였습니다.

여러분 사사기를 보면서 이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전체가 모여 여호와께서 멸하라 하신 자들을 진멸하는 내용을?

없어요. 그러면 이들이 왜 이렇게 모였는가?

레위 사람이 자신의 첩에게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고 말합니다.

레위사람이 이렇게 베냐민을 제외한 지파들을 불러 모을 위치에 있었든 것일까요?

어찌되었던 그는 베냐민을 제외한 지파들에게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한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제비를 뽑아 기브아 불량배를 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됨이냐 기브아 사람들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달라.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브아에 모여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합니다.

군사의 수는 이만 육천 명, 그중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왼손잡이입니다. 물매 돌 전문가들입니다.

싸움을 엄청 잘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 만 명인데 다 전사입니다.

벧엘로 올라가 여호와께 묻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올라갈 지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베냐민에게 대패합니다. 이스라엘 이만 이천 명이 죽었습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그런데 또 다시 이스라엘 전사 만 팔천 명이 죽었습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울며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시는 지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벧엘에 있는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비느하스입니다. 비느하스는 모세와 함께 활동했던 제사장입니다. 출애굽기6정25절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건은 사사시대 초기의 사건이지요.

그렇다면 왜 사사시대 초기의 사건을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기록해 뒀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 봅시다.

마치 아이 성을 칠 때와 같이 베냐민을 칩니다.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명이 죽었습니다.(20:35)

살아남은 군사는 육백 명입니다. 넉달동안 림몬 바위에 도망하여 지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 자손들의 성읍과 가축,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습니다.

마치 여리고성, 아이성을 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베냐민 지파를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지요.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미스바에서 자신의 딸들을 베냐민 지파에게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남은 남자 육백 명이 죽으면 베냐민 지파는 끝이 나 버리지요.

그래서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여.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지요.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했는데 베냐민 지파를 치려고 할 때 올라 오지 않은 자 야베스 길르앗에 사는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갓지파 소속성읍입니다.

그래서 군사 만 이천 명을 보내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쳐 죽였습니다. 처녀 사백 명 외에는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베냐민 지파 중 살아남은 육백 명에게 평화를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자가 부족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해 뉘우쳤다고 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21:15)

이렇게 하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다시 꾀를 냅니다.

자신들의 맹세는 지키고 여자를 베냐민 지파에게 주는 방법을 말입니다.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올 때 각각 한 여자를 붙들어 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들이 그렇게 행하였고 자기 기업으로 돌아 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습니다.

나머지 다른 지파들도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들이 볼 본문입니다.

물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사사시대 초기, 즉 비느하스가 제사장인 시대 사건을 사사기 마지막에 배치해 두었느냐 말입니다.

의도가 분명히 있지요.

이스라엘을 규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규정하겠다는 것이지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온 가운데 흘러넘치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건이 발생 했을 때 이들은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먼저 결정을 자신들이 다 내려놓고 마지막에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여호와께 묻지요.

이게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쳤습니다.

물론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다음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또 자기들 소견에 옳은대로 결정하고 행동하지요.

맹세는 지키고, 이제는 갓지파에 속한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을 몰살시키지요. 물론 처녀 사백 명만 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맹세를 어기지 않기 위해 꾀를 내지요.

실로에서 처녀들을 납치하라고 베냐민사람들에게 알려 주지요.

그야 말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어요.

사사기 1장에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유다지파가 선봉에 나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베냐민을 치기 위해 유다지파가 선봉에 섭니다. 그러나 실패하지요. 두 번째는 그냥 올라가고, 또 실패하고, 세 번째 베냐민지파를 치는데 성공합니다.

마치 가나안 땅을 정복하듯이 베냐민 지파를 치려고 하지요. 그런데 실패 합니다. 두 번이나 실패하지요.

세 번째는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곧장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살 자격이 있습니까?

땅이 과연 이스라엘을 용납할까요?

레위기18장24-30절을 봅시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니 여호와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에게 행동한 것은 잘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완전히 끊어야 합니다. 완전히 제거해야 하지요. 그런데 저들이 왜 후회합니까?

한 지파가 없어지는 것을 왜 그들은 염려하느냐 말입니다.

분명 베냐민 지파의 행동은 말씀대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끊쳐져야 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은 제거해야 하지요.

그러나 막상 제거하고 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말씀대로 해 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베냐민 지파를 유지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시 갓 지파에 속한 자들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베냐민 지파 남은 자들에게 아내를 구해줍니다.

그래도 부족하니 꾀를 내어 자신들의 맹세를 살짝 피해가게 하여 베냐민지파를 살립니다.

이유는 베냐민이 그들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여호와의 말씀은 다시 저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 하면서 음행과 망령되게 행한 자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제이지요. 말씀보다 자신들의 형제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범죄로 인해 나머지 다른 지파도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임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땅이 이들을 토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의 행동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순종해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서도 아닙니다.

이들 위해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덮쳐져 있기 때문에 이들이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사기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던져주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면 처음보다는 나중이 더 나은 신앙생활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제 결론은 처음보다 더 못한 아니 애굽의 바로가 같은 수준으로, 가나안 땅 사람들 수준으로 끌어 내려 버렸습니다.

바로 왕이 자신이 주님 노릇했지요. 가나안 땅 사람들도 그러했지요. 그래서 자기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사기 결론에서 사사시대 초기의 사건을 근거로 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이 바로 왕이고 너희들이 가니안땅 사람들이다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아보려고 하는 자들이 사사기를 보면 실망스럽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 결론 부분을 사사기 앞부분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아도 별수 없습니다. 그러면 단지파의 우상숭배가 결론으로 나게 됩니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9장18절을 봅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바로 왕을 예로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강퍅케 하셨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앞부분입니다.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강퍅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 잘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4장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불법한 자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없다가 아니라 죄를 가리움 받고, 죄를 인정치 않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가 복 받은 자 즉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성도는 이미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의해서 자신의 죄가 다 드러났습니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 모습이 내 모습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비밀댓글입니다

 
 
 

사사기

구름 나그네 2012. 6. 24. 23:59

                                 소돔과 베냐민지파

사사기19장1-26

1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왕이 없을 그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가 한 번도 없었지요.

따라서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말은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레위인이 첩을 취하였으니 문제 삼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신명기21장15절을 보면 첩을 취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이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문제를 삼으시는 것은 장자를 누구로 삼는가를 문제 삼으시지 왜 두 아내를 취하였느냐를 문제 삼으시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악한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레위 사람이 첩을 취했다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레위기21장7절을 보면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장13절을 보면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아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레위기21장 말씀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민수기8장19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레위인은 제사장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에게도 레위기21장의 율법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문제 삼는 것은 이 첩이 행음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의하면 행음한 여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여인이 왜 행음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나오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없지만 대항하여 라는 전치가가 있어요.

남편에 대항하여 행음한 이유가 뭘까요?

남편이 원인을 제공했을까요?

어찌되었든 레위인의 첩이 자기 친정 아버지집인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넉 달이 지났습니다.

넉달동안 레위인이 무얼 했을까요?

왜 곧장 첩을 데리러 가지 않았을까요? 율법을 두고 고민했을까요?

그 내용을 알수가 없지요. 그러나 넉달후 이 여자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멸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지요. 누굴 보는 것 같습니까? 삼손을 보는 것 같지요.

아주 다정하게, 마음을 돌려놓는 말을 해서 데려 오려고 처갓집에 갔지요.

삼일동안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떠나려고 했지만 장인의 간청으로 하루 더 머물게 되었고, 또 하루더 머물게 되었습니다.

다섯쨋 날 드디어 아내를 데리고 자기가 살던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돌아갑니다.

문제는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 즉 예루살렘에 가까지 갔을 때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여부스까지는 약10 킬로미터 됩니다.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지요.

베들레헴에서 실로까지는 약42킬로미터 정도랍니다. 그러니 새벽 일찍 출발했으면 충분히 실로까지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지요. 그런데 여부스에 도착할 때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베들레헴에서 늦게 출발했겠지요.

그 때 종이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레위사람이 여부스 땅은 아직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땅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가가자고 합니다.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유숙하자고 합니다. 나름대로 경건하지요. 이방인과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브아까지는 6킬로미터 정도, 라마까지는 9킬로미터 정도랍니다.

드디어 베냐민지파에 속한 땅 기브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하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명기10장18-19절을 봅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땅에는 이 법을 지키는 인간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나그네를 영접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들 일행을 영접합니까?

에브라임산지 사람, 이 사람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 지파사람인가? 그것은 잘 알수 없어요.

16절을 보면 이 사람을 소개할 때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에 이 노인도 역시 객, 나그네와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라는 말씀과 대조하여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이방인일 가능성도 있지요.

불량배들이 이 노인의 집에 왔을 때 하는 말을 보면 이방인인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러니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이방인 나그네 노인보다 더 못한 사람이지요.

레이인은 자신이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영접하는 자가 없다고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물론 잠만 재워주시면 된다고 했지요. 노인은 기꺼이 영접합니다.

문제는 집에 들어가 마음이 즐거울 때에 기브아에 사는 베냐민 불량배들이 찾아 와서 레위인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나쁜 짓 하겠다는 것이지요.

마치 어디를 보는 것 같습니까?

창세기19장을 한번 볼까요?

1절에서 11절을 봅시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 밖에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에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이 본문이 무슨내용인지 아시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서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후 천사들이 방문하여 확인하는 과정이지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이런 똑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소돔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요.

오히려 이방인인 노인이 레위인 나그네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롯이 말했던 것과 흡사하게 말을 하지만 베냐민 사람들은 막무가네입니다.

소돔사람들과 똑 같지요.

결국 첩에게 나쁜 짓을 했고 첩이 죽었습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 레위인의 움직임을 통해 베냐민 지파가 소돔과 같이 악한 자들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정도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심판하셔야 하지요.

소돔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불로써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냐민 지파도 불로써 심판 하시든지 어떻게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사사기에 불로 사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정작 불사름을 당해야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시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요. 베냐민 지파가 이러하다는 것은 다른 지파도 볼 것 없다는 말입니다.

20-21장을 보면 다른 지파도 똑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나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경험하였고, 율법을 받은 자들의 삶이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삶을 사는가입니다.

이게 상상이 갑니까?

워낙 경건한 사람들이라서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문제는 왜 이들을 심판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런 나쁜 놈들은 심판해야 하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받았듯이 이런 인간들을 불로서 심판해 버려야 내 속이 시원할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놈들은 살려 두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베냐민 불량배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은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 함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는 자라고 자부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런 자들에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사람이나 베냐민 불량배는 자신과 상관없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음행한 여인도 그러하고요.

자신은 노인과 같은 자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노인을 이 본문에 배치한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봅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니라 하였음이라”

레위 사람 한번 보세요. 율법을 편리하게 지키지요. 조금 지킨 레위 사람이나 소돔 사람처럼 행한 베냐민 불량배나 갈라디아서 3장10절 말씀에 의하면 모두가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레위사람은 아직 그것을 모르지요.

지금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는 입장에서 사사기를 보고 있지요.

그래서 우린 알지요. 그래요. 내가 베냐민 불량배와 같은 죄인이고 레위 사람과 같이 내 편리한대로 말씀을 지키는 자임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 같은 말씀은 성경에 없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 베냐민 지파가 소돔 사람처럼 살았다.

이게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전도하는데도 도움이 안 되지요.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베냐민 사람처럼, 레위사람처럼 살지 말자고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지요.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3:12

물론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지요.

사람들은 성경이 예수님을 전하고 있음을 믿지 못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성경이 전하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모든 것들이 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되심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의 자리에 꼭 앉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님이 이루심을 믿지 않고 자신이 말씀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하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로가 있다고 말합니다.

레위 사람과 베냐민 불량자들을 보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고맙고 감사함이 나와야 해요.

이렇게 살았던 자들이 누구를 죽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거부하는 행위들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입니다.

문제는 죄의 기준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두지 않고 이런 행위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한분께로 모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기준으로 성경을 보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반성의 태도와 결심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언급하지요.

그러나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않아 있고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에 불과합니다.

레위사람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이 왜 이렇게 살아갑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겐 왕이 계십니다.

주님이 계십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에겐 어떤 왕이 계십니까? 왕이 있는 자들은 그 왕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사기

구름 나그네 2012. 6. 17. 13:36

단지파

사사기18장1-31

본문을 살펴 보기 전에 먼저 로마서5장12-14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기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에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모세전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법이 없으면 법을 범하는 것이 없습니다. 법이 있어야 법을 범한 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합니까? 죄가 없다고 합니까?

아니지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 속에 죄가 있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지요. 단지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는 있는데 그 죄를 죄로 말할 기준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이 없던 시절에도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증거물을 제시합니다. 바로 사망이 왕노릇했다는 사실입니다. 14절을 보면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가 무엇입니까? 불순종이지요.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담 이후에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따먹지 않았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들 위해도 여전히 사망이 왕노릇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곧 아담이후 모든 사람들은 첫째 아담의 확산입니다. 즉 사망이 아담의 후손위에 왕노릇하는 것을 볼때 이들은 아담과 똑 같이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선악가를 따먹지 않았다고 해도, 난 불순종하지 않았다고 우겨도 사망이 왕노릇 하는 이상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사망이 왕노릇한다는 말은 죄가 왕노릇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5장에 나온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 없는 시대를 살던 율법 있는 시대를 살든 모두가 다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입니다. 사망이 이들위에 왕노릇합니다.

사사기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로마서 5장을 말씀 드린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도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도에게만 오늘 말씀이 들려지겠지만 말입니다.

아담 한사람을 길게 늘여뜨려 놓은 것이 역사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 지파의 경우에도 역시 첫째아담의 역사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열두지파중 한 지파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을 심판하시고 만든 자들입니다.

이들은 출발점은 애굽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뿐만아니라 가나안 족속들과도 근본이 다릅니다.

이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도 받은 자들입니다. 하늘에 있는 성전의 모형도 받은 자들이지요. 그러니 이들은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위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난 두 주간은 미가개인 가정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단지파가 어떻게 집단적으로 행동하는지를 살펴 봅시다.

꼭 기억하세요. 이들이 어떤 자들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요 율법을 받은 자요, 성막도 실로에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18잘1절을 보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를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그들의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분명 여호수아 때에 땅은 모두 분배되었습니다.

여호수아19장40-46절을 한번 찾아 봅시다.

“일곱째로 단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림몬과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 편 경계가지라”

이 지역이 단지파과 여호수아로부터 제비뽑아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입니다.

물론 47절에 “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더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나오는 레센은 곧 라이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명이름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오늘 본문 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볼수 있지요.

중요한 사실은 왜 아직까지 단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느냐는 말입니다.

표현이 재미있지요.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 꼭 누구 탓 때문에 기업을 얻지 못했다고 말씀하는 것 같지요.

여호수아가 이미 제비뽑아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왜 아직 까지 기업을 얻지 못했을까요?

이들이 차지해야 할 땅은 누가 사는 곳입니까?

삼손할 때 나온 지명이 나오지요. 소라.

사사기13장2절에 나오지요. 소리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마노아는 삼손의 아버지입니다.

삼손이 누구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고 합니까? 블레셋이지요.

그렇습니다.

블레셋 족속이 단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을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삼손이 죽은 후 시간이 좀 흘렀는지 단 지파는 블레셋이 두려워 거할 곳을 찾아 헤메는 중입니다.

사사기1장 34절을 보면 아모리 자손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 오기를 용납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때 단 지파는 블레셋과 아모리족속의 힘에 의해 기업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 이들을 모두 진멸하는 것이 이들이 해야 할 일인데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여호수아13장3절을 보면 블레셋 땅도 이스라엘백성이 얻어야 할 땅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대하18장1절을 보면 다윗왕이 블레셋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단 지파는 여호와께서 주신 땅은 버려두고 다른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이 없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보다 자신들의 판단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19장47절에서는 이런 행동을 긍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마는 그것은 다르게 보아야 부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들이 라이스 땅을 차지한 것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모습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2절입니다. 용맹스런 다섯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왜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땅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까요?

아모리와 블레셋에 대해서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들은 에브라임산지 미가의 집에 유숙하게되었습니다. 왜 하필 미가 집인지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미가 집에 있는 레위소년의 음성을 알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경상도 사람이 말하면 금방 알아 차리지요. 아니면 전라도 사람이 말하든지.

레위소년의 출신이 어디입니까? 유다땅 베들레헴 아닙니까?

그러니 말투도 에브라임사람 말투가 아닌것이 금방 드러났겠지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사장 목소리가 독특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목사들 목소리가 그렇잖아요.

목소리 쫘 깔고. 중요한 것은 단지파 정탐꾼의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는 사실입니다.

질문을 볼까요?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이미 미가 집의 형편이 어떤지를 알았을 것이 아닙니까?

부잣집 제사장. 뭔가 느낌이 오지요.

레위소년이 대답합니다.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빙하여 나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

표현이 재미 있지요.

자기를 대접하여 자기를 고용해서 지금 자기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미가집 생활이 짭짭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정탐꾼이 레위소년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물어보아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 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그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여호와께서 앞길 환하게 열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묻자 말자 답이 나왔지요.

레위소년이 뭐 알아서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제사장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지요. 무당역할말입니다. 오늘날 목사들같지 않습니까?

그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다. 라이스에 이르러 보니 백성들이 염려없이 거하고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평안했습니다.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거리가 멀어 아무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한마디로 말하면 뺏앗아 살기 좋은 땅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레위소년의 말처럼 되어 버렸네요.

그러면 그다음 단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탐 보고를 합니다.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너희가 가면 편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마치 민수기13,14장에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온 갈렙의 보고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14:9)

내용의 의미가 거의 동일하지요.

단지파 육백명이 병기를 갖고 출발합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생각나지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라이스를 치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지요.

에브라임산지 미가의 집입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에봇, 드라빔, 새긴 신상, 부어 만든 신상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묻지요. 그러자 그 입 다물라 라고 하지요.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는 것이 낫겠느냐

괴가 솔깃한 제의아닙니까?

쥐꼬리 만한 사례 받기 보다 몫돈 나오는 것으로.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자기가 직접 챙깁니다. 에봇, 드라빔, 새긴우상을 .

돈되는 곳이면 어디든가 가겠다는 마음아닙니까?

아골골짝 빈들에도 .

돈만 많이 준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설교, 제사, 예배 얼마든지 드리려 주겠다는 것이지요. 물론 기도가 빠지면

안되겠지요.

그러자 미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내것 내 놓아라 하겠지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힘이 딸리는데.

나의 피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 그리고 나의 제사장을 왜 빼앗아가느냐 돌려 달라는 것이지요.

결국 살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접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레위소년 제사장의 말대로 라이스를 쉽게 차지했다는 사실입니다.

27-28절을 봅시다.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시돈 지배하에 있었는데 워낙 거리가 머니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곳 이름도 바꿉니다. 단이라고

이정도 되면 드라빔과 에봇, 새겨만든우상, 부어만든 우상, 제사장은 어떤 대우를 받겠습니까?

보지 않았도 듣지 않아도 뻔하지 않겠습니까?

30절을 봅시다.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레위소년 제사장은 어디로 갔을까요?

단 지파를 한수 더 높은 제사장을 고용합니다.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으로 단지파의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사기20장28절을 보면 벧엘에 언약궤가 있는데 그곳에서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누굽니까? 아론의 형이지요. 그렇다면 그 직계 자손이 자신들의 제사장이 되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예배드려주고, 제사 지내 준다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일까요?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집이 분명 실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축복축복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개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단지파 전체가 단체행동을 하고 있지요.

이 단체 행동이 나중엔 이스라엘 전체로 확산됩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로마서 5장을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아담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속에 사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단지파는 이스라엘백성가운데 한 지파로서 율법을 받은 상태에서 어떤모습의 죄인으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이 왕노릇하기 때문이지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 얻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단 지파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통해 아담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신앙의 경험이라는 것이 무용지물임을 알려 주십니다.

예레미아31장31-34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의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의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19장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5장39절을 보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6장14절을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16:7). 그 보혜사는 곧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오셔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전한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어디가운데 옵니까?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들 가운데 오게 되지요.

이것이 예레미라31장 말씀의 성취입니다.

성령받은 자는 말씀이 이미 그 사람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 2장27절을 봅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성령이 성도 안에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가르침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는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는지를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왜 옛언약은 안되고 예수님의 피로 이룬 새언약이어야 하는 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니 우리속에 단지파가 행하는 행동들이 담겨 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집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언제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단지파는 지금 단지파를 전하면서 살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의 행동을 통해 십자가를 전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20절을 봅시다.

“율법이 들어 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