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구름 나그네 2011. 3. 22. 20:33

여호와의 날

스가랴14장1-21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미 앞에서 여호와의 날이 어떠할 것을

이미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는 일들을 한번 볼까요?

 

1절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절에는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절에는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5절에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6,7절입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

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10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1절“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12,13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15절“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6-19절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고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20절 “그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많은 일들이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심판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 보니 세상끝날이 한 사건으로 끝나지가 않습니다.

한셑트로 묶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뉴질랜드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일본에서도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목사들은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이 가깝다고 합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요.

우리인간들이 느끼기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열방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오히려 열방의 배후 세력을

 사로잡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승리로 자기 백성들은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지진이 일어날 때, 쓰나

미가 덮쳐 올 때 피하는 사람의 행세를 합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성도의 모습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금방 알 수 있죠.

 

쓰나미로 모든 것이 떠내려 가버리고 폐허가

된 곳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 보셨습니까?

성도의 모습이 세상에서는 그런 꼴이랍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전쟁에 개입하셔서 열방을 치셨는데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 꼬라지가 너무 초라합니다.

고린도 전서4장9-13절을 한번 봅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우리가 기대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듯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보이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한꺼번에 심판하시고 성도를 높이 드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본지진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좀 속 시원하게 일을 처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와 함께 하는 거룩한 자의 모습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답니다.

주님은 분명 십자가로 승리하셨는데 성도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어린이 여러분은 어떤 가요?

이런 삶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당연히 싫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었으면 14장 21절

 말씀과 같이 가나안 사람이 다시 없는 세상.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있는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좀 대우를

 받는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대우 받는 자리, 힘을 가진 자리에 있습니다마는.

물론 이들은 말씀에 의하면 모두 참 성도가 아닙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가 아닙니다.

 

이들은 너무나 깨끗하고 만물 중에 고귀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말씀과 상관없는 자들이요 거룩한 자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도가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시키시는데 너무 일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일을 하실 때 사람과 의논하시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단지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한쪽은 저주받는 쪽입니다.

다른 한 쪽은 피하는 자들입니다. 즉 주와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는 쪽에 살게 됩니다.

 

다른 한 쪽은 철저하게 저주와 재앙 속에 살게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주와 축복으로 나눕니까?

욥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왜 재앙이 닥쳤습니까?

 

땅의 사람들은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야 알지요. 욥기를 읽어보면 나오니 말입니다.

 

1장 6-8절에 보면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여호와께서 먼저 사단에게 욥을 자랑합니다.

그러자 사단이 뭐라고 합니까?

 

9-11절입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당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의 말이 놀랍지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땅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땅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이지요.

이것을 치면 욥이 주를 욕할 것이라고 장답합니다.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유물을 뺏어가는 것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사단이 심부름꾼 같이 행세를 하지요.

욥이 재앙을 받은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피와 관련 있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피와 관련 있다는 말은 곧 죄와 관련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시발점이 되셔서 사단의 제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내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물론 일차전은 여호와께서 승리합니다.

그렇다면 이차전은 어떻게 벌어집니까?

 

2장5절에 보면 사단이 욥의 뼈와 살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할 것이라 장담하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쪽으로 몰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욥의 세친구가 등장합니다.

욥의 세친구는 욥이 왜 재앙을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이들은 전능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은 고난이 죄를 지은 결과로 일어나는 일로 간주합니다.

하늘의 일을 모르니 땅의 일을 자신들이

아는 하나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 받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나쁜 짓 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결론을 보면 욥이 왜 고난 받았습니까?

이미 서론에도 나오지요.

 

사단과의 내기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단지 그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내기는 결국 욥을 세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자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괜한 고난이 아니라 세친구의 구원을 위한 고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친구의 죄를 제대로 끄집어내고, 즉 전능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우상숭배였음을 밝히셨습니다.

이들의 죄를 위해 욥이 번제를 드립니다.

 

욥기42장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참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단과 일을 벌이시니

 땅에서는 우상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고개를 쫘 내민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욥의 재앙이 재앙이 아닙니다.

 

정말 재앙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전능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다는

 자들에게 죄용서함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혜택이 누구의 뜻대로 주어졌습니까?

여호와의 뜻입니다.

 

이것은 욥의 세친구의 뜻이 아닙니다.

욥의 뜻도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서 일방적으로 벌이시는

일에서 놀라운 죄용서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엘리후라는 사람이 있지요.

 

이 사람은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이 혜택에서 제외됩니다.

완전 일방적입니다.

 

초막절이 나오지요.16,18,19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7장에 초막절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39절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이 무슨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성령을 주십니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 주신 자들만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에겐 저주가 퍼부어 집니다.

스가랴식으로 표현하면 12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신약식으로 표현하면 잘 나간다는 말입니다.

 

성령받지 못한 자가 정말 스가랴식의 꼴이 되면

 우리 기분이 좋을 텐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오히려 참 성도들이 만물의 찌끼와 조롱거리가 됩니다

.

그러나 이런 모습이 주와 함께 하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들의 자랑은 어린양의 피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이 자랑하고 싶어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내몰리는 것이지요.

 

자신은 나오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사용됩니다.

동시에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것을 그대로 다 쏟아 냅니다.

 

그러나 그 쏟아 냄이 자신들의 죄를 쏟아내는 것이 됩니다.

이들은 정말 막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십자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받은 자의 삶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못한 자는 막 쏟아 내면 죄밖에 안 나옵니다.

그것으로 끝나버리지요.

이것 때문에 성도는 고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서론에서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쓰나미를 피해 도망하는 자와 같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의 주되심의 증거입니다.

 

스가랴14장9-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요한계시록 21장2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이 신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기대하는 종말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우리들의 기대를 피해가는 종말입니다.

 

*www.woorigarak.org 로 오시면 동영상, 음성설교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스가랴

구름 나그네 2011. 3. 13. 22:56

칼아, 짝된 자를 치라

스가랴13장7-9

본문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칼에게 명하십니다.

 

칼이 활동할 것을 명하십니다.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와 짝된 자를 칠 것을 명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칼에게 명하여서 자신의 목자, 자신의 짝된 자를 치라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 땅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소위 자신의 오른팔이라는 사람도 얼마든지 제거해 버립니다.

자신의 자리를 탐한다거나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면 그렇게 하지요.

물론 판단이 흐려져서 제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목자, 짝된 자가 여호와께 모반을 꾸며 칼로 치라고 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의 짝된 자를 칼로 치라고 합니까?

 

도무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아닙니까?

 

왜 이런 일을 여호와께서 벌이셔야 합니까?

로마서3장9절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기가찬 말씀 아닙니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말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모든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럴 것 같으면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이럴 것 같으면 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면 왜 지키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을 완전 개보다 더 못하게 취급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최첨단 컴퓨터를 만드는

인간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까?

아니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선언합니다.

너희들은 심판아래 있어!!

 

이렇게 되면 스가랴 13장이 이해가 됩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열려야 하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지요.

그런데 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칼로 자신의 목자, 자신의 짝된 자를 치심으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명으로 활동하는 칼이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의 짝된 자를 치심으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열립니다.

 

우리들이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답답해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바보 같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그렇게 많이 경험하고도 왜 우상숭배를 할까?

나라면 안 그럴 텐데.

이게 우리들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다르게 보십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너희들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자들이야.

너희들은 처음부터 범죄한 인간이야.

너희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야 라고 말입니다.

듣는 인간 기분 나쁘지요.

 

마태복음 26장31절 이하를 보면 이와 똑같은 인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스가라13장7절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초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에 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양떼가 흩어진다는 것에 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왜 양떼가 흩어집니까?

여호와가 여호와의 목자를 치기 때문입니다.

칼로 치시기 때문에 양떼가 흩어집니다.

 

상당히 의도된 행동입니다.

목자를 치심으로 너희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들추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33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 자존심 상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아니 예수님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다녔고 기적도 행했고 하나님 나라 복음도 전한 접니다.

너무 합니다.

 

35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모든 제자도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것이지요. 죽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제자들의 진심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이 진심대로 되어질까요?

제자들은 자신들을 몰라요. 몰라도 한참 모릅니다.

자신들이 어떤 자인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몰라요.

그래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 예수님을 칼로

치심으로 말미암아 양떼로 생각했던 자들이 다 흩어져 버립니다.

예수님을 버립니다.

 

양떼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2절입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 말씀을 제자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왜 못 알아들을까요?

 

자신들은 자신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이유를 몰라요.

그러니 자신 있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목자를 칼로 치셔야 하는지를 저들은 도무지 몰라요.

자신들이 심판아래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처지를 모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요.

그러니 이 세상이 천국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세계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자신의 자식밖에 모르고 자신의 남편 밖에

 모르고 자신의 아내 밖에 모릅니다.

자신의 직장밖에 모르고 , 자신의 나라밖에 모릅니다.

자신의 교회밖에 몰라요.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 자신만 사랑해요.

이런 인간에게 백날 말씀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 말씀조차 자기 자신을 위한 말씀으로 바꾸어 버리니 말입니다.

누가복음18장9-14절을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우린 바리새인은 나쁜 놈이라는 인식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면 우리 중에 박 집사님은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또한 십 분의 2를 헌금하고, 주일날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 집사님은 매일 성경도 읽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주일날도 심심하면 빠집니다.

누가 더 나쁩니까?

간단하지요.

 

그야 최집사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몰라야 하는 분 있지요.

눈치 빠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그래요.

우리 마음은 당장 박 집사는 신앙 좋은

사람이 되고 최집사는 신앙 나쁜 사람 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가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둘도 유대교 안에서 살아요.

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처음 아셨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비교 대상인 세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은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자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말씀 지켰음을 남과 비교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말씀이 자신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말씀순종이라는 무기를 갖고 말입니다.

말씀을 갖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인간으로 보고 있습니까?

 

이런 인간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짝된 자를 칼로 치시는 이유를 모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하는 지를 모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긍휼만이 살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짝된 자를 치셔야만 자신이 살길이 열림을 알지 못해요.

에베소서2장2절을 봅시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가 꿈에도 생각도 못한 말씀 아닙니까?

 

이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답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랍니다.

마귀 즉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그러니 무슨 율법을 순종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말씀이 개입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그렇게 뽐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개입됨으로 , 자신과 비교대상이

 개입됨으로 자신이 마귀의 하수인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리와 같이 되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왜 자신의 목자, 자신의 짝된 자를 칼로 치셔야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버리셔야 합니까?

 

버리셔야 그들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버리셔야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26장26-28절에서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왜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결코 죄 사함이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죽이신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죄용서함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스가라 13장8-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 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리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게 코스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를 칼로 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백성들도 여전히 불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건 구원받았으니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구약 백성들이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니 예수님을 죽인 것이지요.

 이것이 마귀의 종으로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불 가운데를 통과 합니까?

 

제가 어릴 때 들은 설교는 그렇습니다. 견뎌야 한다고 말입니다.

누가 뭘 어떻게 견딥니까?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여호와의 목자, 짝된 자를 칼로 치심으로 그 목자를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뒷짐 지고 노실까요?

주님의 본격적인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이 뭘까요?

 

주님의 주되심을 자기 백성,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9절에서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고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의의 종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까요?

이들이 별천지에 사는 사람처럼 살까요?

아닙니다.

 

구약백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백성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갖고 자기 자랑합니다.

 

똑 같이 넌 아론자손이냐, 난 고라자손이다라고 설칩니다.

그런데 이들은 곧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여전히 기적을 원하고, 지혜를 원합니다. 그런데 곧장 이들은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주 전에 말씀드렸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그냥 기적을 원할 뿐입니다.

지혜를 원할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도 잘났다고 떠들어 댑니다.

 이들에겐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것 또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 짝된 자를 치신 결과입니다.

짝된 자를 주님으로 세우셨다는 증거입니다.

 

날마다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목자를 치신 이유를 알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감사 합니다.

 
 
 

스가랴

구름 나그네 2011. 3. 6. 16:54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스가랴13장1-6

1절에 나오는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마치 에스겔 47장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1절에서 1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항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측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 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리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조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마치 천지창조를 보는 듯 합니다.

물론 다른 점은 성소 동편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 물은 생명수입니다.

살리는 물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수는 피해갈 곳은 반드시 피해 가 버립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흘러 내립니다.

요한복음 7장37-39절을 봅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은 곧장 우리를 요한복음 4장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영생수를 주실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를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2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성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47장의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온전히 이루심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예수님의 일은 영생줄자와 영생주지 않을 자를 철저하게 가려 내 버립니다.

영생줄 자에겐 성령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겐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돌아서 버리게 만드십니다.

요한복음10장 3절에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무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영생수의 혜택은 아무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참으로 얄밉습니다.

예수님이 미워요.

영생수를 주시려면 그냥 주시지 왜 하필 혜택입지 못하는 자들을 꼭 만들어 내시는가 말입니다.

생명수를 그냥 온 세상에 다 흘러넘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죽은 땅을 만들어 내고야 맙니까?

다시 13장 1절로 가 봅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기도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

듣는 유다 기분 좋지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어떨까요?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다윗의 족속이 뭔데, 예루살렘이 뭔데 그들에게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 말인가?

에베소서2장12절을 보면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합니다.

이게 이방인들의 현주소입니다.

이방인들은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의 혜택은 본래 볼 수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누가 이렇게 정했습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정하셨습니다.

약속의 언약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소망도 없이 지옥가야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상당히 기분 나쁘게 하지 않습니까?

단지 유다백성이 아닌 이유로 지옥가야 한단 말인가?

소망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 조상들 중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이 다 소망 없던 자였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습니다.

결정권자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이방인에게도 혜택이 돌아 가죠.

물론 이 혜택도 제한적입니다.

로마서8장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완벽하게 홀로 다 끝내 버리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자 다시 스가랴 13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릴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여기에 별로 관심없죠.

오직 관심은 그다음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이게 인간 아닙니까?

늘 내일을 생각하는 인간.

그러니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다음은 다음은?

늘 이런 질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주님도 우리 인간의 마음을 다 아시고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2절이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 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 옷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무슨 말인지는 아시겠지요.

확끈하고 분명하게 뒤처리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우상 제거. 거짓 선지자 더러운 사귀 제거.

거짓 예언자는 낳은 부모가 칼로 찔러 죽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고 거짓선지자 노릇하는 자도 입을 꾹 다물게 된답니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 아닙니까?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얼마나 큰소리치며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까?

오히려 죄용서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두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라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생명수를 부어 주셨습니다.

일어 어떻게 진행됩니까?

초반엔 마치 스가랴 13장 말씀의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완전히 용두사미입니다.

시작은 거창하게 했지만 끝은 흐지부지 하게 끝나버립니다.

오히려 죄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고 죽습니다.

요한계시록12장11절을 봅시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김의 방식이 희한하지 않습니까?

죄용서의 샘물이 터지면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이 살고 오히려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용서의 샘물이 터지니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은 죽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죽인 자들은 살아 남았지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어린양의 피때문입니다.

우린 어린양 피 다음을 늘 생각하고 구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다음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누구를 죽일까요?

어린 양의 피를 증거하는 자를 죽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자들이 도대체 뭐라고 증거했길에 죽임을 당했을까요?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이 왜 사람에게 살인 본능을 일으키게 합니까?

죽은 자의 대표자 스데반 집사님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님의 설교가 나옵니다.

사도행전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왜 살인 본능을 발동시켰는지 잘 나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냥 이스라엘의 역사를 쭉 나열해 놓았지요.

그런데 그 역사 속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그들 조상의 죄가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전 메소보타미아에 있었다고 하죠.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는 분?

여호수아24장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라고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설교를 듣는 너희들도 원래는 우상 숭배자였다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지요.

듣는 사람 상당히 기분 나쁘겠지요.

9절을 봅시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여러 조상이라는 말이 등장하죠.

이 조상이 누구 조상입니까?

바로 스데반 설교를 듣는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요셉을 시기하여 판 조상의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도 똑 같은 놈들이라는 말입니다.

모세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35절입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참으로 미운 말은 골라가면서 합니다.

스데반 선지자가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거절하던 모세라는 말을 집어 넣음으로 너희가 그런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라고 합니다.

좀 작작 하지.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너희들은 무얼했다.

송아지 우상 만들어 우상숭배했다고 지적합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이 무로 돌아가 버린 상황입니다.

사십년 광야생활동안 우상숭배했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맞아 죽을 짓을 골라가면서 합니다.

51-53절을 봅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여기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그 일당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54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때 스데반 집사님은 더 불을 지릅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해 버립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죽여 버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린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 숭배자였다는 말입니다.

결국 선지자를 죽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말입니다.

누가 말입니까?

바로 인간들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지금 주님이시라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죽였습니다.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분 나쁩니까 안 나쁩니까?

안 나쁘지요.

왜 그렇습니까?

나의 조상이 아브라함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만일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를 언급해 봅시다.

당신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상 숭배자였고, 어머니도 그러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기분 어떻습니까?

아직 감이 안 옵니까?

그러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당연히 천국갈 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 어머니는 지옥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 하늘 우편에 계신 주님 되신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기분 안 나쁩니까?

유대인들은 지금 스데반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숭배자다. 우린 주님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다.

주님의 피가 아니면 우린 소망없다라는 것을 전하면 상대가 서서히 화를 내지요.

왜 그럴까요?

자긴 십자가를 지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할까 준비 중인데, 믿고 구원받은 자신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고 하니 어떻겠습니까? 기분 상당히 나쁘겠지요.

이런 사람 많이 보고 만납니다.

이런 사람은 온 세상이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설교에서 빼버립니까?

아닙니다.

자신도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스가랴 13장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신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성도를 십자가에 가두어 버리니 말입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성도를 밀어붙입니다.

오히려 성도가 죽임을 당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이 더욱더 힘을 발휘합니다.

십자가만 전하는 성도는 미움을 받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에 씻김을 받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