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구름 나그네 2010. 9. 12. 21:57

 

칭찬과 명성         스바냐3장18-20

스바냐1장에 보면 요시아라는 이름과 히스기야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스바냐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굽니까?

히스기야왕입니다.


히스기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열왕기 18장3-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을 평가하시는 대목입니다.

여러 산당이나 주상, 아세라 목상, 모세가 만든 놋뱀의

 단을 깨뜨리고 부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과 만나는 장소에는 항상 어떤 자들이 함께 할까요?

권력자들입니다.


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공존하는 장소가 산당 같은 곳 아닙니까?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이런 것들을 다 깨뜨리고 부

수었다는 것은 힘을 의지 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7-9절을 보면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7절에 보면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않았다는

 말씀 속에서 그가 무엇을 믿고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힘을 의지 하지 않은 그가

오히려 블레셋 사람을 쳤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18장13절 이하를 보면 앗수르왕 산헤립이

 올라와 이스라엘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취해버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면서 항복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왕이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을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의뢰하는 왕, 

 다윗왕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는데, 앗수르 왕을 의지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도

 쳤다는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펄쩍 뛰겠지요.


산당도 제하고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는데 앗스르

 왕 산헤립에 의해 쫄딱 망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싹 다 끌어 가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기야왕이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앗수르 왕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합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군사도, 무기도,

 어떠한 능력도 갖지 않았습니다.

앗수르 왕이 싹 다 끌어 가버렸는데 남은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앗수르 군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가 의뢰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이들도 히스기야 왕이 의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웃습니다.


19절부터 보겠습니다.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 하였느냐 이제 네게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지 못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그 말 탄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리라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치며 내굽을 의뢰하고

그 병기와 기병을 얻을 듯 하냐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


랍사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할 뿐입니다.


얼마나 제대로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뜻에 의해 지금 유다를 멸하러 올라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을 알았을까요?


알고 있었겠죠.


그런데 이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을 해석하는 입장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입장에서의 해석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대로 해석해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랍사게가 말하는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 있어야 말을 하지요.


군사가 있습니까?

핵무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도와줄 원병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를 들면 돈도 없고, 병이 들었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 있습니까?


그런데 난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조롱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다 이런 조롱을 당했습니다.


사도바울만 보더라도 그의 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큰 소리 뻥뻥 칩니다.


사도요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어찌 그리 큰 소리 칩니까?


물론 증인으로서 큰소리입니다 마는.


다른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유배지에 너무 오래 있어서 정신병 걸려서

쓴 글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감각박탈이라는 제목에서 두 가지 실험이 나옵니다.


한 실험은 전혀 만질 물건이 없는 방음 장치가 된 컴컴한

방에 36시간동안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29명중 25명이 환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복잡한 광경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자기 동일성 감각도 잃어버렸답니다.

 

아마 이런 논리에 의하면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이 혼자 너무

외롭다 보니 정신병 걸려 그렇게 외치고 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조롱할 것입니다.


히스기야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히스기야 왕이 미쳤습니까 아니면 랍사게가 문제입니까?


히스기야 왕이 미친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난 모양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여호와께서 앗수르 군대를 처리해 버립니다.


19장7절을 보면  “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앗수르 군대는 스스로 물러가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교만하던 앗수르 왕도 반역자의 칼에 죽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히스기야왕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18장 3절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라고 평가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의 삶은 그야 말로

극과 극을 경험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린 경험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승리를 얻은 경험.


이 중심에 히스기야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삶이 있습니다.


20장에서는 히스기야왕이 병들어 죽게 된 상황도 나와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게 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 징조로 해가 십도를 물러가게 하는 것을 히스기야 왕이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징조를 보여 주셨지요.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15년을 더 살게 됩니다.


그때 바벨론 왕 브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냅니다.


20장13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황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결정적으로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이 보인 모든 것들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않게 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로 살아간 히스기야가 아니라 다시 15년을

더 산다는 기쁨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바벨론 사자에게 보여 준 것이지요.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히스기야 왕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요시야 왕을 살펴봅시다.

요시아 왕은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왕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요시아 왕입니다.


스바냐는 이 시대에 써졌습니다.

열왕기 하 22장 2절을 봅시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25절에 보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러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질투의 불로 심판하심과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사사시대부터 시작하여 이렇게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요시야 왕시대에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말입니다.


열왕기 하23장26,7절을 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가장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듣는 요시야 왕 시대에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과거 왕들이 아무리 잘못 했어도 요시야 왕이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갔지 않습니까?

그러면 심판을 돌이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특히 히스기야왕이 뭐가 그리 잘못했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서 잠시 기분이 너무 좋아 왕이 가진

 모든 것을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 주었을 뿐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좀 너무 한 처사가

아닙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히스기야왕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너무 허무하게 죽어버립니다.

애굽왕에게  므깃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율법대로 살았다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제 스바냐로 돌아 가봅시다.

왜 심판하신다고 합니까?

우상숭배와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이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백성들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스바냐 선지자의 외침은 아마

요시야 왕이 율법 책을 발견하기 전,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전이라서 그럴까요?


물론 주석을 보면 아마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은

요시야 왕이 본격적으로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기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 말씀을 보면 스바냐 선지자

 말씀대로 이루어져 버립니다.

요시야 왕이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고 이끌어도

 결국은 심판을 당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처럼 되었지요.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야 왕, 가장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상숭배와 힘을

 의지하는 인간의 죄를 막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이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자고 외쳐 보았자

 그것은 요시야 왕 혼자만의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백성들은 그냥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뿐이겠지요.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습니다.

힘만 의지하는데, 믿을 것은 힘, 돈 밖에 없는데

무슨 말씀으로 돌아 가자가 의미 있습니까?


왕이 그러자 하니 마지못해 따라 갔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래도 힘이

최고야. 말씀 좋아하고 있네.


요시야 왕이 허무하게 죽잖아요. 그럴 때

저들이 뭐라 했을까요?

별것 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칭찬과 명성입니다.

 

사로잡힘을 돌이키실 때에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답니다.


도대체 이 일이 언제 이루어집니까?


한번 보세요. 요시야 왕이나 히스기야 왕이 뭐 특별한 게 있습니까?

다른 악한 왕들과 같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여호와 보시기에는 칭찬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게 중요하죠.


사람들은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고 하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이 어떤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힘을 자랑하는 바벨론, 앗수르 , 애굽과 같은 상황입니다.


죄의 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은 철저하게 강력한 힘의 의지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믿는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칭찬 명성 없습니다. 온 세상으로부터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상으로부터는 오로지 미움밖에 받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을 의지하는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는 일입니다.

 
 
 

스바냐

구름 나그네 2010. 9. 5. 16:16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스바냐3장9-17

마태복음25장 1-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은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보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느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할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쉽게 대합니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Sidney Greidanus 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는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해 놓고 성경 해석을 예수님 쪽에서 성경본문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본문해석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이성에 근거하여 성경해석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말하는 것 같죠.


그런데 이 사람은 철저하게 사람 중심적입니다.

본문해석이든 뭐든지 철저하게 성경말씀 중심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에서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추해 냅니다.


유추는 보통 글을 해석할 때 다 하는 것이니 유추까지는 해석을 할 때 인정합니다.


그런데 강해 설교의 모델을 끝 부분에 제시했는데 그것을 한번 보면 이 사람이 왜 구약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말입니다.


설교본론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설교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결론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이슈를 도입하지 말라, 초점을 좁히고, 확대하지 말라, 셋째 설교 목표를 떠나지 말라 넷째 결론은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설교된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청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당신은 보다 구체적인 제안들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렇게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 설교하라는 말입니다. 즉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설교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 해 놓고 설교 결론은 적용으로 끝마칩니다.


이렇게 되면 제가 설교 처음에 읽었던 본문 마태복음25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깨어 있자라는 반응이 나오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이해하고 수용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설교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이 되죠.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 모두가 졸며 잤잖아요.

그러니 깨어 있어서 신랑을 맞이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지요?

기름을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충분히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마치셨으면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고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말씀하시니 만들어 졌습니다.


요한복음1장으로 가보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지어졌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능력으로 말씀하시니 어느 하나도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지요.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의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이 학문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말씀이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역사적, 문예적, 통시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말씀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이야 해 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석해 보아야 육적해석입니다.

즉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죽이는 해석입니다. 지옥 보내는 해석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난 척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성령으로 거듭나겠다고 덤비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씀이지요.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에만이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육으로 난 사람은 알아먹을 수 가 없어요.

기껏해야 육적으로 알아들을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25장으로 가서 열 처녀 비유를 보면 예수님의 비유가 좀 맞지 않아요.


기름을 준비 못한 미련한 처녀의 문제점을 다루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것을 말씀하셨다면 깨어 있으라고 비유 결론을 맺으시면 곤란하지 않습니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잖아요.

앞뒤가 맞아야 되는 것이 상식이요 기본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문법도 이해 못한 무식한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들이  연구하여 갖게 된 글의 해석능력을 갖고 성경을 해석한다면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쪼다가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하셨으면 슬기로운 처녀는 깨어 있어서 신랑을 맞았고 미련한 처녀는 졸거나 잤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를 해야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 비유 등을 다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육으로 난 것은 육임을 분명히 해 버리시고 성령으로 난 자들만을 쏙 뽑아 내 버리십니다.


그러니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은 말씀하시는 주님 되신 예수님에 있습니다.


신랑 되는 분은 처음부터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처녀들만 혼인잔치에 참석시킬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이 없을 때 신랑이 온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신랑이 기름을 준비하러 간 여인들을 만나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왜 하필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만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예수님의 함정이 있습니다.


지옥가야 할 자들은 지옥가야 하기 때문에 말씀 속에서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육적인 인간들은 반드시 준비하자는 쪽으로 덤비도록 만들이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라는 말씀 속에 우리는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 성도에겐 깨어 있으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성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다 졸며 자지만 주님이 깨어 있으시기에 졸며 자도 상관없이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들은 참여 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우린 성경을 해석할 때 자꾸 인간이 구원받는 쪽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갈라내는 작업을 하시는 말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다우심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복음이 전파되면 항상 갈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를 갈든지 아니면 어찌할꼬라고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설교는 중립지대를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인간들이 그 중립지대에서 무언가 결정을 하면 마음대로 천국 갈수 있듯이 설교합니다.


이게 마태복음25장에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함정입니다.

지옥가야 할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옥가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너무 많이 둘러 왔습니다.


9,10절을 봅시다.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된 이후에 있게 되는 일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11절 말씀을 봅시다.

“그날에 네가 내게 죄를 범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마치 교만한 자만 제거했기 때문에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을 비춰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12절부터 봅시다.

“내가 곤고하여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 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런 인간 없습니다.

그러니 교만한 자의 제거란 교만한 자만 제거했다는 것이 아니라 새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창조해 내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교만을 제하여 버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누구만 자랑하는고 하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여호와가 너희 형벌을  제하였고 너희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희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복음1장47-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릅니까?

49절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임금,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왕 여호와, 곧 이스라엘왕 예수님이 너희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38,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이유는 34,35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정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은 성도가 늘 정죄를 당할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죄할 것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왕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것도 성도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에서의 화란 포로로 잡혀가거나 죽음을 당하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화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같은 것은 화 축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화란 지옥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과 상관없는 것이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런 두려움이 없겠지요.


17절을 봅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3장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사실 하나님 여호와가 기뻐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스바냐 3장17절을  보면서 우리 인간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입에선, 삶 속에선 늘 주님의 피공로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주님의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개인이란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몸만 움직이고 활동합니다.

그래서 온 땅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전합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주님께 마음껏 농락 당하는 은혜를 즐거워 하는 사람이 주님의 몸 입니다.

 
 
 

스바냐

구름 나그네 2010. 8. 29. 13:05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스바냐3장1-8

1절부터 보이는 말씀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 화 있을 진저라고 합니다.

패역하다, 더럽다. 포학하다는 규정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시는 말씀일까요?


사람들은 그 기준을 무엇으로 둘까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그 기준점입니다.


예를 들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더럽다. 패역하다. 포학하다는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저께 이런 질문을 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삶, 예를 들면 마케도니아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런 것이 성도에게 지속됩니까 아니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지속될까요 아니 될까요?


사람들의 관심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서 자신이 이해할 수준의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게 누구의 사고방식입니까?

질투의 불로 소멸될 구약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해방식입니다.

이들이 성경을 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까요?


이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율법을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제사법을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그렇다면 이들이 율법을 무시해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제사를 안 드려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공로를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나요?


모세오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인데,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만 제대로 이해해도 상황파악이 금방 되잖아요.

그러니 저들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한 사람들이에요.


왜 자신들이 과거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는지 다 알아요.

그것은 말씀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임도 다 알아요.


오늘 2절 말씀에 나오듯이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이런 말씀을 다 알아요.

문제는 말씀이 없어서 망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예수님의 해석과 너무 다르지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물론 이 말씀 속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심판하시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아니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갈라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3장에 흔히 말하는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씨가, 복음이 뿌려짐으로 나타나는 땅의 본모습들입니다.


땅이 복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땅을 규정해 버립니다.

복음이 떨어짐으로 그 복음이 친히 일을 하십니다.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곧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버리는 형국이 됩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것을 마귀가 빼앗을 수 없는 노릇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부류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는 받아요. 그런데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복음이 환난과 핍박을, 말씀이 환난과 핍박을 발생시킵니다.

사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자체가 이런 사람 속에 들어가 활동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활동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을 초래함으로 말미암아 이 역시 복음과 상관없던 자였음이 드러나죠.


숨길 수 없습니다. 말씀의 활동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 다음 보면 가시떨기에 뿌려진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고 합니다.


말씀과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은 병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염려 속에 사는 인간들, 재리의 유혹, 즉 돈이죠. 이 돈에 미친 인간들을 다 걸러냅니다.


마치 거름종이 같습니다.

말씀이 거름종이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스스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주님이시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은 저희 죄에서 구원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말씀으로 심판의 이유를 확실히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23절에 보면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합니까?

열매 맺어라고요.


전도의 열매, 헌금의 열매 등등.


그런데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이 친히 말씀대로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죠.

본래 인간이 죄인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인정하든 하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물론 성경전체를 보면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일치합니다마는 우리의 이해 선에서와 상관없이 말씀의 활동결과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죄인입니다.

말씀이 그 결과물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앞잡이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샘플중의 샘플입니다.


인간이 지옥가야 할 죄인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자로서의 사울, 그런 자가 말씀이 일하심으로 열매 맺는 모습.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말씀이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이것을 보여주지 못했죠.

말씀이 스데반을 통해 사울에게 전해졌지만 말씀자체가 누구를 거부합니까?


사울을 거부해 버리죠.


그런데 말씀이 사도바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니 열매 맺는 자의 모습이 바울 속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이 열매는 말씀이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에베소서4장7-16절을 봅시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문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기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누가 이 일을 하십니까?

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해요.

땅의 언어로, 역사적 언어로,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하나님께서 낮아지시어 말씀하셨음을 이해 못해요.


무슨 말이냐고요.

지금 이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그 말씀을 이루십니까?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이루시잖아요.


말씀을 다 이루신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가 이룬다는 말씀입니까?

머리되신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린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죄인이죠 뭐.


그러면 어떻게 죄인으로 드러납니까?


말씀대로 목사의 은사를 받았다 칩시다.


목사의 은사는 주님이 주셔서 친히 실행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목사 짓을 하면서 죄가 드러날 수 있나요.


당연하죠. 성령님은 죄를 늘상 들추어 내시면서 일을 하시니 그렇습니다.

인간을 부인시키면서 일을 하신다 말입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집사님이 죽으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집사님이 훌륭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러면 우린 스데반 집사님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죄인을 뿐이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부활하신 주님 되신 예수님이 하셨지.


이게 정답 아닙니까?

그러면 간단한 것 아닙니까?


로마서 7장21절 이하를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장으로 넘어갑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능력이  한시라도 없으면 육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거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이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핍박과 환난을 자신은 견딜 수 없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친히 열매를 맺으십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실 성령께서 주도하시지요.


로마서 7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사람들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탄식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죄인 속에 주님이 일하심으로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질투의 불에 소멸되는 입장에 처해야 합니까?


3절을 봅시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개판이죠.


그런데 5절을 봅시다.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아침마다 공의를 보이시는데 재판장들, 선지자, 제사장들은 어떻습니까?

딱 반대로 행합니다.


7절을 봅시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백날 말씀해도 안 듣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말씀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들이 돈을 위해 삽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돈 외에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여러분 이런 질투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치사하지 않습니까?


다른 신에게 절했다고 그것을 질투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소멸하는 불로서 심판해 버리신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치사하게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소멸하는 불로서 심판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표현하면 우리가 믿는 주님 되신 예수님이 그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소멸하는 불로써 심판하십니다. 째째하시잖아요. 분명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게 하는 것도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아서인데, 자신이 그래놓고 질투해서 소멸하는 불로써 지옥보내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들은 말씀을 백날해도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도대체 누구냐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장이 세상입니다.


그러니 백날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는 자들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게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주님의 능력입니다.


요한계시록22장11절을 봅시다.

“불의를 하는 자들은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