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강해

구름 나그네 2014. 2. 3. 08:27

신명기28장1-6

이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본문이며 동시에 우리들 기분을 좋게 하는 본문이지요.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복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이 원하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꼴지 하기를 바랍니까?

좋은 남편, 좋은 아내 만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 복을 나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아닙니까?

얼마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 본문을 보내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네게” 복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느낌 아니까 이미 여러분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겁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보아야 하지 왜 다른 해석을 하려고 더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다르게 보아야 합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임의대로 조작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맞지요.

맞습니다. 그러면 네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28장1절에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이게 조건입니다.

네가 복을 받으려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킬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겠지요.

신명기27장26절을 보면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갈라디아서3장10절을 보면 이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말씀대로 항상 실행하지 않는 자들은 항상 저주를 받고, 율법의 말씀대로 항상 실행하는 자들은 항상 복을 받습니다.

이게 신명기27장28장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명기31장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리고 21절을 봅시다.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의 생각하는 바를 아노니”

여호와 하나나님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신명기28장에서는 축복과 저주는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달렸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축복과 저주는 인간손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축복을 받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든지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신명기31장을 보면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축복과 저주의 갈림기를 제시했지만 이들은 반드시 저주만 받을 자임을 이미 아신답니다.

그러면 우린 이런 반문을 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어차피 말씀지킬수 없을 것 같으면 율법 주시지 말고 그냥 구원해 주시든지.

왜 꼭 저주 아래 집어 넣어야 합니까? 저주 아래 집어 넣지 말고 구원해 주시든지.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너무 많아요.

우리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신다면 왜 그런식으로 율법을 주시느냐고 따지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집어 던져 버립니다.

성경 안 읽어요. 성경말씀을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해답을 알았잖아요.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 홀로 구원하시는 일이니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네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발자취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철저하게 율법에 근거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는지를 그들 전 역사를 통해 그대로 보여 줍니다.

로마서7장7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몫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 말씀에 근거해 보면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의 죄가 제대로 꽃을 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스라엘 외에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겐 죄가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에겐 율법을 주셨지요.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의 죄가 만개했습니다.

그 만개한 내용들이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신약시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린 저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우린 예수님을 믿는 자들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보는 수준과 저들이 보는 수준이 다르지 않습니까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 보겠습니까?

로마서13장8-10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빚도 지지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제 자신과 같이 사랑할하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합니까?

우리들이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지는 알지요. 그렇다면 이 본문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이웃 사랑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인지를 물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답변을 하겠습니까?

네 이웃을 제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본문을 어떻게 봅니까?

대충 넘어 갑니까 아닙니까?

어차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전하니 볼 것도 없다는 입장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린 신명기를 읽으면서 갖는 악감정이 똑 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린 저주 아래 있는 자일 것 같으면 왜 율법을 주시나요. 왜 말씀을 주시나요.

말씀이 왜 필요한가요라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시겠다는데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뭘합니까?

자기 돈벌기 바빠요. 자기 자식 키우기 바빠요. 사업확장하기 바빠요.

주님은 이스라엘을 율법안에 두셨습니다.

율법 안에 두심으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그들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율법과 다른 노선으로 주어지는 의를 증언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그분만이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죄인으로 드러나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도는 어떠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말씀앞에서, 즉 말씀은 십자가 지신 주님을 전하기 때문에 , 십자가 앞에서 늘 죄인으로 드러나는 조치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피공로만 자랑하도록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반드시 말씀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십자가 지신 그분이 주님으로 홀로 말씀을 다 이루심을 증언하는 증인의 자리에 성도를 세우셨습니다.

다시 로마서13장으로 가 봅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발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러면서 율법을 언급하고 있지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가 나옵니다.

마태복음5장27-28절을 보면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생각만 해도 간음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으면 간음하지 않을텐데.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간음을 해 버립니다.

로마서에서 왜 이 부분을 가장 앞장세웠는지 이해가 되지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을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살인죄에 해당되고,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갖고 싶다고 하는 순간 이미 도둑질해버렸습니다. 탐내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이것들을 다 지킬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킨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랑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 사랑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나는 아니요가 나오지 않아요. 내가 사는 삶이 긍정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게 되면 나는 아니요가 나오고 십자가 지신 분만이 주님입니다가 나옵니다.

우리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가두어두시면서 십자가 사랑만이 참 사랑임을, 그 사랑을 베푸는 분이 주님임을 전하라고 성도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런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러면 우린 이런 반문을 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왜 주셨겠습니까? 율법이 없는 예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법이 아닙니다.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지켜야 하였습니다. 여기 지킨다는 것은 법을 지키는 그런 지킴이 아닙니다. 율법에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