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강해

구름 나그네 2009. 8. 7. 00:32

흩어심
야고보서1:1
우리가 가끔 등산을 합니다. 등산을 하다가 숲이 우거진 산 속 깊이 들어가게 되면 이런 세상도 다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특히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찌달리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다고 산행을 하게 되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지요.

베드로가 왜 초막 셋을 변화산에 만들려고 했는지 이해할 만도 합니다.

가끔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업을 하든지, 아니면 직장생활을 하든지간에, 갑자기 모든 것을 접고 목사가 되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그 중에 정만 소명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마는 대부분은, 아마 거의 다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생활사에 너무 찌달린다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그렇고, 무엇인가 거룩한 일이 없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신학교에 다시 입학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무엇을 배우는고 하면 십자가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운영할 수 있을까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에도 나이 많은 사람이 신학교에 와서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배우고 쫓아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철이 없어서 정말 제대로 된 신학을 한다고 덤벼들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어떻게 하면 교회를 유지할까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조용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고 싶어지만, 모양새만 다를 뿐 여전히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는 곳이 교회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생각할 본문은 야고보서 일장 일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분 흩어져 있다는 말이 어떤 식으로 와 닿습니까?
우리들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든 안정성, 모아짐과 거리가 상당히 멀지요.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흩어진다는 것을 상당히 싫어 합니다.
왜냐하면 모여야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본성적으로 흩어지는 것을 싫어 합니다.
아담의 범죄 후 인간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습니다.
쫓겨 난후 곧장 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입니다. 케슬이지요. 롯데 케슬 같은 것 말입니다.
왜 성을 만듭니까?
바로 힘입니다. 힘을 모아 주님을 대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노아 홍수심판 이후에도 인간들은 흩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대적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흩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알르레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조금만 불안한 것은 견디지 못하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죽음을 당한 후에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옵니다.
이 핍박으로 인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버립니다.

이야 당연하지요. 핍박이 오니 당연히 흩어질 수 밖에 없지요.
여러분 같으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흩어짐이 그냥 흩어짐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흩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흩으심은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흩으심입니다.

누가복음 24장47절을 봅시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 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구약의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고, 그 약속대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주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들이 결국 주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되신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죽고 핍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이 죽고 핍박이 일어나고, 사도 외에는 다 흩어지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약속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차원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 입장에서는 스데반이 죽은 것이나, 핍박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각지로, 자신의 고향을 떠나 흩어지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차원에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로 여겨지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주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일들이 곧 안정된 것을 버리게 하시고 흩어 버리시는 일로 되어 진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다 우리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결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생각지 않았다면, 내가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저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자식을 낳지 않았더라면 등등.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속에서 불만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되어지는 일들, 모든 일들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되게 하시기 위해서, 흩어시고, 불안하게 하시고, 불안정하게 하시는 줄로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주님 앞에 부족함이 없는 자
야고보서1:2-4
일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흩어 버리신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성도란 늘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약속인 십자가를 늘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에겐 늘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즉 죄인에게는 시험이라는 것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2:16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참으로 우리를 당황케 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세상에는 괜찮은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맛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건전하게 돈을 벌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 없이도 정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보세요. 죽어서도 자신의 몸을 기증하여 남을 살리지 않습니까. 이런 일 조차도 악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까?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면, 아무리 아담이 범죄하였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있어서 그래도 약간의 정의가 있고,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고, 공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인간의 가능성을 두고 신학을 펼칩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고 하면, 인간은 가능성이 있으니 이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시동만 걸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동을 누가 걸어주는가?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가능성이 있는 인간에게, 시동을 걸어 주어서 그 다음은 인간이 알아서 율법도 지키고, 시험도 참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해야 된다고 주장하지요.

이론이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묘해서,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어라. 예수님 혼자 다 하셨다고 하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지요.
예수님도 하시고, 나도 좀 끼어들어서 무엇인가를 할 때 기분이 좋고, 예수님을 믿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평생 믿고 산다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이런 식으로 반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요한 1서에서의 이야기이지요. 다른 구절은 인간의 가능성을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있는지 아세요. 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성경을 보든, 어떤 것을 보던 자신의 마음속에 들은 것을 기준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게 되더라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도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 마음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은 벗어났다. 나는 이제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고 백날 외쳐도 그 육신 덩어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까? 그 육신 덩어리가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속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육신을 벗어 버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이상, 어떤 인간도 이런 굴레 속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성도라 해도 별 수 없습니다.
늘 상 이런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상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세상을 사랑하고픈 마음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은 본문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항상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가끔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납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시험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성도에게는 시험이 오는가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가 아닌 자는 시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야 말이 맞죠. 시험이 있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겠습니까?
받으실 이유가 없으시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영이 없다면 시험이라는 자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한편인데, 이런 느낌조차 갖지 못하고 그냥 자신의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저께 수인이가 엿장수 마음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 말이 여기에 딱 맞는 말입니다.
완전히 엿장수 마음이지요. 우리 동네 말로 하면 엿제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이 엿제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시험이란 것이 없습니다.

다 세상과 한 통속으로 굴러가는데, 거기에 무슨 시험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시험이 있다는 것은, 즉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게 하는 일들이 본인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기쁘게 여겨야 되는 일입니다.
무슨 말이지 아시겠지요.

성도가 아니라면 갈등이라는, 즉 십자가 앞에서 갈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성도에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요,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늘 확인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이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 주는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란 시련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면 닥칠수록 더욱더 뚜렷하게 보이고,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길이와 넓이와 높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즉 이전에서 이 세상의 것을 내가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의 영을 받고 보니 내가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인내란 무엇입니까? 참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곧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인내란 다름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4절이 이해가 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완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거룩이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지요.
인내한다고 완벽한 거룩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보아야지.
그래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고, 그렇게 해 보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 줄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묘해서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이 잘한 일에만 무게를 둡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말로 거룩한 줄로 착각하지요.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말씀을 자기 구미에 맞도록 본 사람입니다.

이게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란 분명 늘 시험 속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시험이 없다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런 시험 가운데 성도는 더욱더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알아갑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더욱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런 자를 일컬어 주님께서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혜와 믿음
야고보서1:5-8
세상 사람들은 항상 양 쪽에 발을 걸쳐 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 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안한 요소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래서 돈을 투자를 해도 한꺼번에 한곳에 다 하지 않습니다. 여러 곳에 분산해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양쪽에 발을 걸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는 것도 보면, 물론 잘 못된 믿음이지만, 자신이 안정된 후에야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 되었든, 육체적 건강이 되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세상에 한발, 주님께 한발 걸쳐 놓고, 언제든지 이곳 저곳을 넘나 들면서 자신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더라도 언제든지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예수님이고 무엇이고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게 되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항상 자신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당장 내가 어떤 지혜가 부족하지. 그렇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런 지혜가 부족하구나.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너무 엉뚱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아에 자신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도구로 보고 성경을 대합니다.

그러면 그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 보면 다 나옵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듯이 지혜는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삶 자체가 곧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 말은 곧 십자가의 길이 곧 지혜로운 삶입니다.

누가복음16장에 보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정말 이상한 본문이 나옵니다.
1절에서 13절을 봅시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도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이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로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는 자가 주인의 말을 듣고 자기 임의대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어떻게 지혜로운 일입니까?
여러분 보시기에는 나쁜 놈 아닙니까?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는 것을 넘어, 재물을 마치 자신의 것이냥 처리하는 것이 무엇이 지혜로운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안목으로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오직 자신이 살기 위해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위해서는 재물도 버리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윤리적으로 깨끗한 분인 줄 알았는데,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지혜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걸었던 길입니다.
나그네로, 감옥으로, 죽음으로 말입니다. 때로는 직접 천막을 만들어 팔아 생활도 하고 말입니다.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항상 지혜가 부족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세상을 사는 지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지혜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란 항상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사는 자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바울이 그렇게 지혜롭게 살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날마다 참 지혜이신 주님께서 그를 지혜롭게 살게 하셨기 때문에 자존심이고 무엇이고 없이 그냥 주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이 있습니다.
양 다리 걸치는 자들이지요.
이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주시면 주시고 말면 말지라는 식으로 구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믿음으로 이런 일들은 결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지요.

그러니 이런 자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주님의 길을 걸어 갈 수 없습니다.

이들에겐 중심이 없습니다.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성도란 항상 믿음으로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이리 가볼 까 저리 가 볼까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데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향방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히 주실 것입니다.





낮은 형제 부한 형제
야고보서1:8-11
돈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가장 중요한 문제로 거론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거론 되는 것이 곧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것입니다.

역사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항상 경제적 부를 누리는데 초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면, 경제적으로 얼마나 부유한가 부유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의 질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자꾸 잘사는 나라, 선진국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써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고, 부한 자들은 부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었을 것입니다.
허리케인이 뉴올리언주에 몰아 쳤을 때, 그곳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이 어떠한 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의외로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우리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일류 초강대국 아닙니다. 강대국도 아니고 초강대국 말입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그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 될 듯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돈을 많이 벌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우리가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볼 때, 볼 수 있는 사실은 돈을 벌면 벌수록 사람들은 자꾸 다른 것을 찾아 헤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것을 찾아 헤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족함을 느끼니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몰라도 한참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지 않는 이상 만족함을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결코 하나님처럼 될 수 없기에 만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돈을 아무리 벌어도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교 대상이 단순히 옆에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아닌데, 비교 대상이 항상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인간들은 항상 옆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이 밑바닥에 하나님과 한판 붙어 보려는 것이 깔려 있고요.
그래서 그 대리전을 항상 옆 사람과 치르는 것입니다.

옆 사람이 돈이 많으면 자신도 돈을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질투도 하고 시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옆 사람이 가난하면 비교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또 다른 정복자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사는 재미를 누리지요.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그야 말로 부자가 되고 싶지요.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교묘하게 자기의 본성을 감춥니다.
그래 나는 이렇게 가난해도 그냥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나도 언젠가 저런 큰 부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지배하고 있지요.

인간이 아담 안에 살아가는 이상 이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도는 분명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마음이 없을까요?

없다면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마음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이 있는 한 이 마음은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꽉 잡고 있지요.

이런 마음이 없다고 하는 분이 혹 계시다면 그분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소용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난 자 들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이 끓어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비록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부한 자이고, 높아진 자인지를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잘 안됩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우리의 죄악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내가 이렇게 가난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만 부하고, 높은 자리에 않아 있는 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1-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성도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얼마나 자신이 높은 자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 생명이 우리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가 얼마나 존귀한 자들입니까?
그런데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가난하고, 자신의 지위가 낮은 것 때문에 슬퍼한다면, 기죽어 있다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도 잘 살아 보겠다고 눈을 부릅뜬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아담의 본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야 말로 시험에 제대로 빠져드는 꼴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의 긍휼은 여기에서도 발휘됩니다.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지요.

내가 가난해도,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자리에 있어도 주님이 나를 얼마나 높이셨는가를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해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실상 인생이란 풀의 꽃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인생인데 아담에 속한 자는 풀의 꽃 같은 인생이 아니라고 자꾸 우기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부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잠깐인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긍휼을 입었는 지를 생각지 않습니다.

부한 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줄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욱더 붙잡으려고 합니다. 꽉 부여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자꾸 비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참 지혜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합니다.
물론 그렇게 안 될 때도 있겠지요. 있을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중심을 십자가로 자꾸 끌고 가십니다.

그러니 부한 자들이 있다면 부한 자들도 여전히 후히 주시는 분에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조금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1절에서 부한 자들의 행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부한 자들을 텔레비전이나 우리 주변에서 봅니다.
그들의 하는 일들이 어떠해 보입니까?

부럽지요.
계속 갈 것 같지요.

이들의 모습이 무엇과 비교하는고 하면 풀의 꽃에 비유됩니다.
풀의 꽃은 아름답지요.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갑니까?

아름다움이 가시고 나면 쓰레기통에 집어넣지 않습니까?

성도는 시각이 다른 자들입니다.

꽃을 보고도 쓰레기같이 볼 수 있어야 하지요.

뭐 성도가 도인이라도 되어라는 말입니까?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
야고보서1:12-18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특징은 참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무엇을 참지 못하는고 하면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 다른 한편에서는 그래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는데, 로봇도 아니고, 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얼마든지 나의 재량권이 있다 말이야.
그런데 무슨 전적인 인간의 타락이라,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의가 하나도 없다느니, 이런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잘 못 해석한 것일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 오늘 같은 본문을 보게 되면 그래 바로 이거야 라고 말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주님께서 우리의 인간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지.
우리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인데. 그냥 무식하게 로봇 부리듯이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시지.

우리가 얼마나 열심을 내어야 하는지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지. 그러면 그렇지.
주님 혼자 하신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주님 혼자 다 하실 것 같았으면 우리 인간을 왜 만들었지. 인간을 만드실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래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방법은 인간이 없으면 결코 자신을 알리실 수 없지.
인간이 없어봐. 하나님을 어떻게 증거하겠어.

예수님도 마찬가지야.
우리 인간을 통해서만 복음이 전파되지. 우리 인간이 없으면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어.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만 주시지 않았고, 긍휼만 베푸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가능성을 인정하셔서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셨지.

그러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어.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성경 구절을 주셨지. 그러니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옳지 않은 거야.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니.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시험을 참아 옳다 인정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어. 이 말씀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딱 맞는 말씀이야.

성경을 너무 편협하게 풀면 안 되지. 그럼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 우리가 할 것이 없고, 주님이 다 하셨다는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지요.

그런데 이 의문조차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의 다하심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 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못 받아들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자꾸 성경을 보면서도 이런 본성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 말입니다.
바로 율법의 말씀으로 우리를 경직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닙니다.
부분적이 아닙니다.
완벽한 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도의 모습 속에는 분명 시험을 참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 또한 주님의 영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12절 말씀을 제대로 한번 봅시다.
12절을 쉽게 풀기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봅시다.
생명의 면류관을 누구에게 준다고 했습니까?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한번 봅시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땅에 있습니까?

이 사실을 알려면 사복음서를 보면 됩니다. 물론 다른 곳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이지요.
십자가의 영을 받기 전에는 죽어도 안 됩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현실이지요.

그러니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참 성도는 시험을 받을 때에 항상 옳다 인정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쪽에서, 인간 쪽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시험에 빠져 들어가 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 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을 내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험을 받을 때에 옳다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성도라는 것이 이정도로 확실합니다.

확실한데, 그런데 시험이 있다는 것이고, 옳다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13-15절을 한번 읽어 봅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성도는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탐욕으로 인하여 모든 시험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탐욕이 결국 어디까지 우리를 끌고 가는고 하면 죄를 낳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지옥가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우리 자신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시험을 참고 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결코 시험을 통과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가야지요.

그러니 이게 다가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가만 두시지 않으시지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이 시험을 참게 하십니다.

그러며 시험을 참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완전한 삶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면류관을 얻는 삶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누가 어떻게 주십니까?
주님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주시지요.

그러면 시험을 참아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었다고 한다면, 결국 시험을 참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 공로가 아니겠습니까?

17절을 한번 보세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면 결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왔습니다. 아버지께로서 내려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은 완벽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완벽한 선물을 성도에게 주셨을까요?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18절을 보세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좋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요한계시록14:3-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d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처음 익은 열매, 첫 열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성도를 첫 열매라고 표현하는가?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어린양의 피공로만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24장48절을 보게 되면 성령 받은 자들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증거하는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을 당할 때에 십자가의 피 공로가 얼마나 큰지를 알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피공로를 확 증거하는 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욕심덩어리입니다.
바로 지옥 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이 첫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시험을 참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면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멍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 즉 진리의 말씀되신 주님,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를 낳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욕심덩어리인, 지옥가는 인생을 첫 열매가 되게 하시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마음껏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버릴 것과 받은 것?
야고보서1:19-25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능동적인 도덕적 행위자’라고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선악기준 즉, 판단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판단을 한 후 옳다고 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더라도 그렇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능동적인 도덕적 행위자로 간주해 주는 인상을 받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십자가를 빼버리고 보면, 그 본문이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본문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십자가의 영이 없는데 성경을 당연히 십자가와 상관없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우리들이 보는 본문에 걸려 넘어 집니다.
왜 걸려 넘어질까요?
다른 성경들은 그냥 믿음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데, 유독 우리들이 함께 보고 있는 야고보서만은 행위에 대한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게 되면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무슨 도 닦는 말씀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어떤 인간도 껌뻑 넘어가지 않을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는 것은 더디 하는 것이지.
20절에 보니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그래 성은 아애 내지 않아야지!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런 말이야 누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이고, 동의할 수 있는 말이고, 들어야 되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를 사업하는 사람에게 해 보세요. 당연하지요. 사람을 만났을 때 듣기를 잘하고 말하기는 신중하게 해야 하고, 화를 내는 것은 절대 안 되지요.

상담하는 사람에게 해 보세요. 이게 상담의 철칙 아닙니까?
들어 주세요. 그리고 신중하게 답변을 해 주세요. 답변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들어주기만 해도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화는 내지 마세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심리치료사, 상담사라도 된 듯이 말을 합니다.

요즘 심리학을 목사들이 많이 배운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심리를 이용해 사람을 교회에 잡아두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불안을 상담을 통해 약간씩 해소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만을 해소해 주겠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상담을 하게 되면 불안감이 약간씩은 사라지고, 불만도 해소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으로 둔갑시킵니다.
물론 이런 것이야 우리 어릴 적부터 해 왔던 것이 아닙니까?
소위 부흥회라는 것 말입니다.

한 바탕 신명나게 놀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 않습니까?
기도를 소리 내어서 하고 싶은대로 해 보세요. 얼마나 속이 후련해 지는지 모릅니다.
찬송가를 손뼉을 치면서 부르고 싶은 대로 크게 불러 보세요.
가사에 자신의 감정을 넣어서 말입니다.

그러면 날아갈 듯합니다.

사람들이 왜 새벽기도를 열심히 가는지 아십니까?
우리같이 게으른 사람이야 가지 않지만, 그 새벽기도의 묘미가 이런데 있습니다.

자신의 능동적 열심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되어지는 해소법이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사업이 안 됩니까? 기도해 보세요. 주님은 들어 주십니다.
문제가 있고, 인간의 능동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이 행동에 근거하면 주님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야 말로 옳은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님의 백성이 잘 살고, 건강한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껏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합니다. 회개하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세요라는 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갔다 온 사람이나 불공하러 갔다 온 사람의 얼굴을 보면 평온합니다.
왜 그런지 이제 아시겠지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곧장 이 말씀을 지키려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했습니까?
성경을 보면, 듣는 것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 버리십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실 말씀만 하셨습니다.

너무나 외골수입니다.
물론 성내는 것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어떻습니까?
남의 말을 안 듣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합니다.
물론 화를 내는 것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실 때에는 항상 십자가 중심으로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2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점잖다는 이야기를 들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에 대해서 성도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의 말씀입니다.

22절을 보게 되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어떠했습니까?
듣기만 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있었습니까?
둘 다 있었지요.

누가 말씀을 듣습니까?
바로 주님이 택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택한 자들은 십자가의 도를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지 않은 자들, 지옥 보낼 자들은 듣기만 듣고 전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듣기는 더디 하고 말하기는 속히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내는 것도 아주 빨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르호보암왕이 나옵니다.
6-11절을 봅시다.
“르호보암 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이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이 노인이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겠느뇨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이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 손가락이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
하나님 말씀 듣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견을 개진하기 바쁩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12: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 듣기는 더디 하게 하시고 말하기는 속히 하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누가 화를 냅니까?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저들이 얼마나 분이 끓어올랐습니까?

사도 바울을 보게 되면 그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오직 듣는 자의 입장에 놓여 있었고 순종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도를 듣고 행하는 자였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였습니다.
진정으로 듣고 잊어버린 자가 아니라 듣고 실행하는 자였습니다.

바울이 도대체 무엇을 실행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만을 증거하는 자였습니다.
윤리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긍휼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야 복을 받을 것이 아닙니다.
25절 끝에 복이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복이 무엇입니까?
르호보암왕은 자신이 강력한 힘을 행세할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고의 열매를 얻는 것을 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된 자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25절에서 “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만 제대로 본다면 우리가 결코 오늘 본문을 윤리적인, 도덕적인, 인간의 능동적 자유를 말씀하고 있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십자가의 영을 심어 주셨습니다.
이런 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해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것이요, 복음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하셨는데 화 낼 일이 있겠습니까? 화를 내는 이유도 보면 다 자신의 기준 때문이지요. 이런 것으로는 결코 십자가를 증거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왜 말을 많이 하려고 합니까? 자기가 잘났다는 것이지요.
자기에게도 의가 있다고 생각하니 말을 많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듯 자신이 받은 것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갑니다.





믿음과 외모
야고보서2:1-13
사무엘 상16장7절을 함께 찾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사울 왕을 버리고 다른 왕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베들레헴 사람 이새라는 사람의 집에 갔을 때 사무엘의 처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인정하는 선지자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이런 사람이면 사람들을 척 보면 그 속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우리들이 성경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성경을 읽어 보신 분이라면 사무엘을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하나님의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을 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앞으로 될 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직통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입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패한 후에 여호와께서 세우실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새의 집에 가보니 정말 왕으로 세울 만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엘리압입니다.
사무엘에 보기에 엘리압이 정말 사울 왕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무엘상10장 23, 2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 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왕으로 세워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니 이새의 아들들 중 엘리압을 보니 당연히 이런 정도의 사람이면 여호와께서 세우실 왕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압을 보자 말자 마음속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기준이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외모로 보는 것이 사람의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사람을 볼 때 그 기준이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즉 외모라는 기준입니다.
외모라고 하니 그냥 단순히 옷 입는 것, 차타는 것, 잘 생긴 것, 키 큰 것 이런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런 것을 포함한 외모입니다. 그 집안이나, 아니면 그의 학력, 그의 재력, 그의 품성 등등을 다 포함한 것이 외모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이런 의견을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집안이나 학력, 재력은 외모라 하더라도 그의 품성도 외모에 들어갑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중심을 보신다고 했을 때에는 그 속에 여호와께서 주신 긍휼이 있는가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아는가라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인간 덩어리 자체를 외모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대할 때에 항상 외모로 사람을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중심을 본다고 해서 그 중심조차도 외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다지요.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다가 아닙니까? 이것으로 능력을 평가하고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외모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제 말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죄인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들이 사람을 대할 때 항상 외모로 사람을 대합니다.
우리들이 그렇지요. 좋은 옷을 입으면 우와 멋있다, 잘 사는 구나. 키 크고 잘 생긴 남자 보면 우와 멋있다.
이렇게 되지요.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면 우와 부자겠구나.
지난 주에 제가 흉내내기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렇게 외모를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되고픈 욕망을 발산합니다.
물론 거지를 보면 눈을 돌려 버리지요.

키 작은 사람, 못 생긴 사람을 보면, 욕을 하든지. 여기에서도 여전히 저런 사람같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이 쏙 올라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무엇인가 된 인간처럼 생각합니다.
이게 거지가 되어도 똑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라고 하시면 주님이 그러시다고 말씀하시니 그렇습니다.
물론 인간들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욕망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항상 있지요.
욕망이라는 것이 있는 한 인간은 사람을 외모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왜 갑자기 외모로 보는 것과 인간의 욕망, 탐욕을 연결 짓고 있습니까?
이것이 줄이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대합니까?
희망 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년도 더 된 듯한데, 희망사항 이라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김치 볶음 밥을 잘하는 여자 등등 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자 상을 표현했는데, 완전히 자기 기준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이지요.
그 욕심을 희망사항이라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하고, 가난한 자는 그 자리에 서 있든지 아니면 저 아래쪽에 앉든지 마음대로 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깁니까?

왜 부자는 좋은 자리에 앉아라 하고, 가난한 자는 무시합니까?
인간이 본성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습니다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자는 높은 자리에 앉으시고, 가난한 자는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하시되 제 밑에 앉으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6,7절을 보시면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해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무엇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인고 하면 교회 안에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는데, 왜 부자 성도를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6,7절이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기초 작업을 해 놓아서니 간단하게 해결되지요.

너희들이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남위에 군림하고자 하지 않느냐.
이런 것은 주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일이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이 어디까지 연결고리가 닿아 있는지를 주님께서 소상히 밝히시고 계십니다.

성도란 영광의 주님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인간에게 없는 것이 있는 자들입니다.

믿음이지요. 영광의 주님이란 곧 십자가 지신 주님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탐욕을 이웃을 보면서 발산하는 모임이라면 어떻게 그 모임을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꼼짝없이 지옥가야 하는 인생이 아닙니까?
아니 어느 누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10,11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든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마태복은 5장에서 7장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문제를 율법준수문제가 끌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꼼짝없이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 됩니다.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성도란 믿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준은 세상 기준과 다릅니다.
성도의 기준은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사랑, 그 긍휼히 기준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대상이며, 증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이 나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또한 성도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늘상 탐욕이 일어나지요.

마치 야고보서를 읽는 성도들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늘상 불꽃놀이 폭주처럼 터지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십자가의 긍휼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 두신 이유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드러내라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라고 우리를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외모로 취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긍휼을 더 깊이 알아갑니다.





죽은 믿음과 산 믿음
야고보서2:14-26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하나하나를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살아가지요.
그래서 행동에 있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괜찮다 싶으면 주의 은혜로 간주하여서 붕 떠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을 고수합니다.
자존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행위를 벗어날 수 없는 인생, 정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탄식이야 말로 성도만이 뱉어 내는 탄식입니다.

성도가 아니라면 이런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소위 제대로 된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탄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 형제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탄식을 같이 하면서도 그 마음의 중심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한쪽은 우리는 원래 그런 죄인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한쪽은 똑같은 말을 하면서도 상한 심정이 되면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항변을 하는 자들의 특징은 남의 가르침에 귀를 막아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은 말씀을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 같은 무리들은 목사를 별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애 목사가 전하는 말씀도 무시해 버립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목사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저에게 이런 반론을 제기합니다.

목사만 복음 전하느냐?
맞습니다.
목사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하면 목사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듣지 않는다면, 성도가 듣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려고만 든다면 이것은 자신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이용해 자신이 왕노릇 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겠다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상 남의 가르침을 받기를 싫어하는 족속들입니다.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역사를 보면 답이 나오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까? 듣지 않았습니까?
듣지 않습니다. 자신들 나름대로 생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 귀찮게 하십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하겠습니다. 말씀을 지킬 때에도 내 마음에 합하게 해석하여 말씀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일장을 보면 너무 잘 나와 있지요.
예배를 얼마나 열심히 잘 드립니까?

그런데 그들 속은 딴 마음이지요.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 중에도 얼마든지 이런 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주도권 싸움, 즉 자존심 싸움을 하겠다는 것은 십자가를 자기편으로 끌어 당겨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한번 읽어 봅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 꼴을 보게 되면 이 말씀 앞에 입을 다물고, 쪽 팔리고,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그러면서 좀 그럴듯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4절 말씀을 십자가를 끼어 넣어서 한번 읽어 보세요.
믿음과 십자가, 행함과 십자가가 상충됩니까. 일치 됩니까?

우리는 십자가 하면 믿음을 먼저 떠올리지요.
그런데 십자가가 단순히 이론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런 외적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합니까?
행위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합니까?

그렇다면 이런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삶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첫째는 그들의 고백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 속에서는 늘 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알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지금 야고보서에서 하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믿음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 따로 행동 따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이 수반됩니다.
이 말이 상당히 어렵지요.
쉽게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게서 행동이 나오지요.
어떤 행동이 나옵니다.
모든 것이 갈등입니다. 싸움입니다. 전쟁입니다. 주님의 책망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행동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진짜 독특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있습니다.

어떤 자들인고 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으니 자신의 삶은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자들입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셨고,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고, 여러분 생각하시기에는 얼토당토 않는 믿음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이들에게는 확실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삶을 자기가 원하는 소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상한 심령이 없습니다.
13절에서 말씀하신 긍휼히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뻣뻣합니다.
애타하는 것도 없고, 답답해하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자기 편한대로 해 버립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주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상한 심령이 없습니다.
형제에 대해 애타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모든 것은 주관합니다.

그러면서 타인에게는 큰 긍휼을 요구하지요.
자신의 수고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맡긴다고 해버리죠.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정말 예수님을 믿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서신서의 대부분은 날아가 버립니다.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항상 타인과 관련지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형제자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관계, 그리고 라합이 이스라엘 사자를 만났을 때 믿음이 드러납니다.

남과 엮여지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믿음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에게 책망하는 그런 거짓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믿음이라는 것이 참 믿음인지 거짓믿음인지 드러나지요.

이제 본문 속으로 더 들어가 봅시다.
가난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형제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따뜻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시지 마시고 평안히 가시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의 행동을 집어 넣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한 믿음처럼 보입니까?
전적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아닙니까?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에 왜 이렇게 말합니까?

자신은 손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믿음이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을 17절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 믿음 없는 자들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단순히 말만한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 주에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습니까?
사무엘 상에서 사무엘이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난한 자에게 평안히 가시오 주님이 먹이실 것입니다 라는 말 속에 , 그 사람의 중심이 얼마나 악독한 마음인가를 밝혀내시고 계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이용해 자기를 부인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장난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에겐 상한 심령이란 없습니다.
상한 심령이 없다고 하면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데 주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아는데, 상한 심령이 없냐고요?

그러나 상한 심령이 없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에게 지금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서 상한 심령은 누구나 할 수 있죠.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상한 심령이라면 형제에게 이렇게 대할 수 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반박할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한데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합리화지요.

주님은 이런 것을 용납지 않습니다.

아애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믿는 자들을 향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믿음 이야기 하지. 그래 믿음 좋다 , 그렇다면 그 믿음을 내게 보여봐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 줄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할 정도였다면 야고보서를 쓸 당시에도 이미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동일한 일들이 일어났음이 분명합니다.
당연하지요. 죄인이 언제 바뀐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19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는 믿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사람 앞에서는, 사람과 관련되어서는 어떻습니까?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허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편한대로 생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는 날마다 죽이시고 부인하게 하시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제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주님께만 헌금하고, 기도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기 부인이 반드시 따릅니다.
손해 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욱더 십자가를 깊이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용서하는 마음이고, 감정적으로는 용서가 안 되더라도, 마음이 그럴 지라도,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없다면 주님은 성도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죽은 믿음을 가졌는데 무슨 성도입니다.

지옥 가는 자들이 평소에, 늘상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따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런 짓은 과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들의 반복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산 믿음을 가진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3:1-2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시고”

이 기도문에서 우리는 이 땅을 사는 인간들의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신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얻지 못했던 자리를 자식들을 통해 얻으려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본성상 남 밑에 묵묵히 따라 다니는 것을 싫어합니다.
물론 묵묵히 따라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돈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힘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고, 돈이 주어지면 결코 묵묵히 남의 뒤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제가 주변에 사시는 여러 사장님들을 만나봅니다.
직원이 천명이상인데도 있고 그 이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무슨 일을 해도 묵묵히 뒤따라가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위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왜 남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공서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말은 기가 막히도록 잘 듣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손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서는 돈도 내 놓을 수도 있고, 당당함도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야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또 그런 모습을 늘상 보면서 살지 않습니까?

민수기16장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하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소소한 일들, 허드렛일이나 하고 좋은 역할은 다 모세와 아론이 담당하니 열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이 놀랍습니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스스로 높인다는 말만 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앞장서 섬기게 하셨습니다. 희생하게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레위자손들이 보이기에 그 모습이 희생이 아니라 마치 바로 왕처럼 권세 있는, 뽐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 모습도 그런 식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고라와 함께 하는 자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레위지파는 모두가 다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 대신에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희생물입니다.

그런데 희생물들 가운데서 어떤 희생물은 좋은 역할,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희생물은 시시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 받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열 받는 일이겠지요.

같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았는데, 그리고 함께 레위지파에 속했는데, 누구는 사람들이 보기에 괜찮은 일, 누구는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게 여길 일을 담담하니 열 받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고라 자손, 즉 레위 지파들이 어떻게 희생물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결코 이런 열 받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았다면, 더더욱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몸소 보여주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면 각 사람들이 어떤 기능을 담당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 생각 아닙니까?
그 자리가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렇게 열 받고 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라와 그 일당들이 반발하고 나온 그러한 생각들이 특별히 그들이 별나서, 악해서 나온 생각들이 아닙니다.

이후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신명기 31장 16-21절을 함께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을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이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들이시기 전에 이미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상, 즉 마음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고라와 그 일당처럼 모두가 다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럴 것을 다 아시면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느냐 말입니다. 왜 꼭 그곳에 데리고 가시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고라와 그 일당이나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이나 모두가 다 한 통속입니다.
항상 주님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이지요.
그래서 우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필요하고, 선지자도, 제사장도 필요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주님에 대한 욕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도 그 이용물로 애용됩니다.

보세요. 고라와 그 일당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물로 택함을 받았는데, 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가치가 떨어지는 희생물이냐라고 대들지 않습니까?

오늘 1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죄지 말라”

선생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 아닙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라고 할까요.

목사라는 말이 식상하면 지도자, 인도자, 영도자라고 하면 어떨까요?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는 반드시 선생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을 주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이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서 하는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왜 세우셨습니까?
레위자손의 역할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가르치는 자가 레위자손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앞서서 증거하라고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앞서서 증거하라고 세운 사람이 시기가 납니다.
질투가 납니다.

자신도 선생이 되고 싶은 것이지요.

마치 고라와 그 일당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똑 같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죄인의 본성이 바뀐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그렇게 선생이 되고 싶으냐? 목사가 되고 싶으냐? 그러지 마라. 선생된 자들이 더 큰 심판 받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기야 이런 것을 안다면 누가 교회에서 목사가 되고 싶어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다 철 없을 때 갖는 생각이 아닙니까?
그러나 철이 들어도 선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목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왜냐고요. 그 놈의 주인 행세를 자신이 꼭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부러워 보입니까? 하기야 여러분이 보시기에 목사가 부러울 리가 없지요.
그러나 성도가 조금만 많아지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두 사람만 모여도 이것이 약하게 드러납니다.
몇 명만 더 모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이 확 드러납니다.

그러나 선생된 자들이 얼마나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지를 주님께서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의 본성에 대해 고발하고 계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행함과 함께 있을 때에만 믿음이라고 이미 말씀했습니다.
믿음을 미리 당겨 보여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선생들이 말씀을 가르칠 때 자신의 모든 것이 노출됩니다.
자신의 본성이 튀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인간의 한 행위입니다.

그러니 특별이 말을 많이 하여야 하는 입장에 있는 선생으로서는 늘 실수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목사를 욕하려면 얼마든지 욕할 수 있잖아요.
말씀으로 따져 들어가면 일반 성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 믿음과 다른 부분들을 지적할 수 있잖아요.

이런 자리를 왜 그리 탐을 내는지.

그 탐욕이 바로 주님의 자리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리를 탐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늘 말씀을 배우면서 그 큰 긍휼을 알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달라고 늘 기도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의의 열매를 거두는 자
야고보서3:1-12
마태복음 15장18-2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리라”

이 말씀이 왜 나오는고 하면 2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율법에서 말씀하신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었던 모양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떡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보편타당한 원리로 여겨졌음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 것인가를 고심 고심하다가 떡먹는, 밥먹는 순간에도 우리 몸을 더럽혀서는 안되기 때문에 손을 씻는 규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생각입니까?
율법에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씀에 따라서 하루에 늘 행하는 밥 먹는 순간조차도 우리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밥 먹을 때 마다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면 이것이 무엇이 잘못이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행동에 대한 이중성을 보고 계십니다.
이들이 손을 씻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마음을,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5장4-9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으니라 하시고”

이들이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내용이 어떻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우선 순위가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만, 주님만 잘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 중에 하나이잖아요.
그렇다면 부모를 통하지 말고 곧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면 부모에게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데, 그 돈을 교회에 헌금으로 내 놓으면 우리 마음이 어떨까요?
마음이 편할까요 편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그 정도라면 오히려 잘 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많이 정도가 아니라 항상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되었지 다른 무엇이 뭐 필요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부모님을 공경하느냐,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당장 이렇게 덤빌 것입니다.
그래 주님을 사랑하면서 부모를 공경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헌금도 하고 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조절이 됩니까?
통제가 됩니까?

19절을 보세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
우리에게 이런 것이 없습니까?
마음속에 꼭꼭 챙겨두었다가 기회만 되면 튀어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그러면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이게 칭찬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해당사항없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 말씀에 여기 있는 우리들뿐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이 이 말씀에 포함됩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이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오시면 그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야 가능하죠. 그런데 우리의 본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제 야고보서를 봅시다.
야고보서도 똑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혀를 갖고 말씀하십니다.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혀로 나오는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6절을 봅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동 중 대표적인 행동이 바로 말입니다.
말을 통해 우리의 생은 지옥 불에 타는 삶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혀를 통제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우리의 마음을 통제할 사람이 없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데,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하면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산물을 생각하면 됩니다.

불씨하나가 얼마나 넓은 지역을 불사릅니까?
이것이 혀의 위력입니다.

우리가 가끔 허풍떠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도 허풍떠는 사람들이지만 말입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우리에게 얼마나 크게 와 닿습니까?

사실은 별일 아닌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우리가 늘상 접하는 일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양빚을 값는다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말은 어찌되었든지 적게 하고 신중하게 해야 하고 꼭 할 말만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됩니까?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게 우리 죄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말을 안 하고 살려는 자들이 있지요. 도를 닦는 자들 말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악한 것들이 사라집니까?
입을 여는 순간, 행동을 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상황만 발생하지 않았지 환경만 주어지만 한꺼번에 나옵니다.
막힌 댐이 무너지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우리 현실인데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야고보서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데, 혀를 통제할 수 없는데 되도 않는 것을 통제하라고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빠져 들지요.
되지도 않는데 애라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살자, 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살자라고 말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대로 라면 우리는 어차피 통제 불능 인간들이니 그냥 사는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할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즉 혀입니다. 혀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샘이 한 구멍을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란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성도에게서도 여전히 단물로 짠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런 말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양 갈래의 마음이 없다면 결코 이런 말씀을 줄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성도라는 자들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그 종착점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꾸 잊어 버리는 것이 무엇인고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믿는다고 해놓고 막상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잊고 삽니다.


그러면서 곧장 어디로 달려가는고 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이용해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이용해 형제를 저주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독한 시기와 다툼만이 있지요.

14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성도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생겨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입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입으로 말할 경우에는 이것이 진리를 거스리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의 요점이 드러났습니다.
시기와 다툼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시끄럽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17절을 함께 봅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사람들로 더불어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의 마음이 있고, 선한 열매가 가득한 모습, 편벽과 거짓이 없는 모습, 이런 모습이야 말로 하늘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를 죽일 때에만 이런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화평하려면 자신을 죽이기 않으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관용도 그러하지요.
양순도 그렇습니다. 긍휼도 그렇습니다.
편벽과 거짓이 없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성도는 자기를 드러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주 추상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제들과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던 진리 싸움은 이제 교회 안에 없습니다.

있습니다. 만일 야고보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에게조차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까?
십자가를 자기 자랑으로 내세우는 자들과도 화평해야 합니까?
그럴까요?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이들과는 전쟁이지요.
싸움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성도란 다른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을 죽이면서 말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 자신을 부인하면서 화평하고 관용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어야 합니까?
이럴 때에야 제대로 생명을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 어떻게 남을 살릴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말씀을 통해 잘 압니다. 성령님이 알려 주시죠.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이용해 또 우리의 특기를 살리려고 합니다. 자기 긍정입니다. 자신만을 살아야 돼 나만은 너 위에 군림해야돼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 모습으로는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자기 편한대로 임의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불편하고, 어려워지고 힘들어 지는 자리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짐이 아닙니다. 아주 가벼운 짐이지요.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내가 손해 봐야해. 왜 내가 참아야 해. 이런 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무엇을 증거하는가?
야고보서3:13-18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말이 많습니다.
서로 모여서도 말이 많고, 돌아가서도 말이 많습니다.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신앙생활까지도 뒤 흔들어 놓습니다.
지난주에 3장 13절 이하를 간단하게 말씀 드렸기 때문에 좀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본문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는 참으로 괜찮은 인간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은 주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자가 누누냐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꼭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 오래 하고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지요.
물론 말씀을 아주 깊이 있고, 제대로 아는 것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말씀에 대해 깊이 알고 말씀으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점은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이 아는 자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왜 자신이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이런 생각은 항상 남과 비교하는데서 발생하는 생각입니다.

함께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니 자신이 너무 괜찮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타인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대하겠습니까?

온유함이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태도를 볼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신이 잘 났는데 무슨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정말 지혜와 총명이 있으면 너희로 나오는 모든 것이 온유함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성질 더러운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말씀이지요.

그러나 성질 더러운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간단하게 표출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질 더러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지요. 물론 입에서 조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마음은 속일 수 없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 말이 부드러운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람을 속여도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부드러운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아담 안에서 항상 경쟁하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없을 때에는 자신의 악함이 드러나지 않지만 남과 함께 있게 되면 곧장 그 마음의 것을 드러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니 나 잘났다, 나 지혜 있어, 총명이 있어라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만일 혼자 기도하고 말씀 보았다면, 인터넷 보고, 기도하고 말씀 보면 자신이 굉장히 믿음 좋은 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였을 것이고요.

그러나 긴밀하게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 다 깨어져버리지요.
자신속의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독한 시기와 다툼이 나옵니다.
남과 비교하지요. 자기만 잘났나. 나도 잘 났다.

자기만 예수님을 믿나, 나도 예수님을 믿는다.
남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꼴을 못 봅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자리에 끼어들기를 원합니다.

헌금을 해도 경쟁이요, 기도를 해도 경쟁이요, 성경공부를 해도 경쟁이요,
책을 많이 읽어도 경쟁이요, 모든 것이 경쟁입니다.

그래서 나도 잘났다는 것을 기필코 드러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이 모이면 다툼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시기와 다툼이 많이 나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대로 소위 자신이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이런 모습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같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 함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경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좀 잘났다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잘난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부분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각자가 다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인 견해차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견해차가 없어도 함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겁나거든요. 부딪히고, 깨지고, 다툼이 나는 것을요.
그래서 아애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을 용납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독한 시기와 다툼을 피하려면 만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면 만나지 않았다가 다시 만나 보세요.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또 그렇게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의 문제를 혼자 있음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되지.
모이지 않으면 되지.

이게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임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갈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독한 시기와 다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마음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진리를 거스리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이 말씀이 그리 쉽습니까?
마음은 독한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떻게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이것을 지혜라고 표현했는데, 자랑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지혜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입니다.
결코 주님이 주신,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닙니다.

이런 지혜, 즉 마귀가 주는 지혜, 자신이 잘났다는 지혜의 결과는 항상 무엇을 만들어 내는고 하면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 내고, 결국은 요란하고 모든 악한 일들을 일어나게 합니다.
너무 시끄럽지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라고 간판을 단 교회들은 무엇을 힘쓰는고 하면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써요.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진리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피해갑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끄럽거든요. 그러면 주님의 뜻이 아니잖아요.
모두가 다 담임 목사의 말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뽑아서, 반대하는 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숙청해 버립니다.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좀 시끄러운 자들은 왕따를 시키지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탄이 자신의 힘을 발휘해서 화평케 하는 능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제거되었다고요.

그런데 제거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여전히 말씀을 인용해 화평케 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화평케 하라고 하시니까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싸우지 않는 것이 화평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화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화평입니다.
말씀 앞에서 화평이지요.

말씀으로 산산이 깨어지는 화평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화평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화평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말씀을 받아들여 결심한다고 이렇게 살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렇게 하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탄식밖에 나올게 없습니다. 물론 감사도 나오겠지요.

이런 주님의 능력가운데서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특기인 편가르기와 거짓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리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형제를 만나게 해 주셔서, 우리의 속내를 다 드러내시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이루신 일을 반드시 보시고자 하십니다.

성도는 이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살인
야고보서4:1-3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싸움이, 다툼이 일어납니다.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적이든 상관없이, 그것과 비교하면서 시기와 질투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한번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아이를 키우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자기 아이만 보게 되면 자기 아이가 제일 똑똑하고 잘 났고,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가 옆에 있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돌변합니다.

우리 아이가 왜 이리 못났나, 왜 이리 똑똑하지 못할까?

이 후에는 어떤 일이 생깁니까?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가합니다.

최소한 다른 아이와 같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축구 월드컵이 열립니다.
사람들이 왜 죽으라고 응원합니까?
왜 꼭 이겨야만 합니까?

왜 내 마음은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고, 내가 응원하지 않는 팀이 지면 기분이 나쁘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아담이 어떻게 했길래 그렇습니까?
선악과의 유혹을 받을 때부터 이미 아담은 하나님과 경쟁관계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마음은 하나님 그 이상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사가 어떻겠습니까?

남을 지배하려고 하고, 말 안 듣고, 자기를 조금이라도 해롭게 하면 죽여 버립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죽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과연 아벨을 죽일 이유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시기와 질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가는고 하면 살인까지 갑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에 보면, 라멕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노래를 한번 봅시다.
23,24절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

살인을 쉽게 해 버립니다.
자기를 조금 다치게 했다고 사람을 죽입니다.
가인은 어떻습니까?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아서 아벨을 죽여 버렸죠.
라멕은 어떻습니까?
라멕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해롭게 하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땅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지존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1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정욕 때문에 싸움과 다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교회라는 것이 별것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이 있다면 세상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싸움과 다툼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살인까지 갑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냐, 라멕이 소년을 죽인 것과 똑같은 상황이 교회 안에서 발생합니다.

너무나 충격이 아닙니까?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왜 일어납니까?
바로 정욕 때문이라고 합니다.

탐욕이지요.

마음이 아애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는 열심히 구하는데 그 모든 간구가 오직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간구가 되다보니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게 됩니까?

남을 죽이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탐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기도하라 하셨는데, 이웃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라이벌이고 경쟁의 대상으로, 그들이 가진 것 이상으로 자신이 갖기를 간구하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안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칼로, 총으로 서로를 죽이지는 않지만, 항상 마음속으로는 남을 죽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자신이 살고 자신이 높아지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왜 교회라는 무리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그냥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하면 되지.

그래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혼자 예수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요, 워낙 교회가 개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깨끗하게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것을 싫어하지요.
그렇다고 그 속에 있는 탐욕이 감추어지겠습니까?
결코 감추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혼자 있든, 여럿이 모이든 이런 인간의 탐욕을 식을 줄을 모릅니다.
목사가 되었든지, 장로가 되었든지, 평신도가 되었든지 항상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탐욕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결코 이런 탐욕을 내 버려두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하는 곳이지요.

주님의 영이 놀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오늘 말씀을 통해 회개시키시고 우리의 탐욕을 부인하게 하십니다.
또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참 주님이심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경쟁대상이 아니라 내가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그렇게 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앉으면 기도하는 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 자신의 탐욕을 부인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되고, 우리 가족이 잘되고, 우리 교회가 잘되고, 우리나라가 잘되고, 세계가 잘되고 등등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도를 마치고 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부인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