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강해

구름 나그네 2009. 12. 20. 20:25

그를 사를 것인즉

오바댜1장17-21

본문 1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꼭 이렇게 야곱족속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까?


우리들이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호와께서는 정말 피흘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창세기부터 한번 읽어 보세요.


처음에는 그럭 저럭 이지만 노아 홍수심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됩니까?

여덟 명 빼고 다 죽여 버립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물에 빠져 죽게 합니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자신들의 소유로 만든 땅, 그 땅이 가나안 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있는 자들은 진멸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치 않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장자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을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홍해에 몰살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그렇죠.

포학을 행한 에서 족속에게 불 심판이 임합니다.


그렇다면 구약만 그럴까요?


신약은 다를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 심하다고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이 불 심판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둘째 죽음, 잠시잠깐의 죽음이 아니라 아주 긴, 아주 긴긴, 영원한 죽음, 괴로움의 죽음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저를 이단이라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을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시는 하나님이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교회다니는 사람 누구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살리시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신이라면 우리 인간을 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수십년간 영혼을 살리기 위해 청춘을 바친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는 일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목사에게, 전도자에게 한번 물어 보세요.


왜 복음을 전합니까?

구원하기 위해서죠라고 합니다.


다른 말 들어 본적 잘 없죠.

아니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들은 것이 전도란 항상 구원과 관련지어 배웠습니다. 그리고 심판이란 구원에 탈락한 자들이 받는 일이라 여겼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구약을 읽어 보면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과 심판은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와 심판 받을 자는 결코 자리 바꿈을 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자리가 그러하고  이삭과 이스마엘의 자리가 그러하고 에서와 야곱의 자리가 그렇습니다.


절대로 자리 바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구원의 자리 심판의 자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발악을 해도 그 자리가 바뀔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옥가야 할 자가 천국가고, 천국가야 할 자가 지옥 가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엉터리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합니까?


자리 확인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누가 구원의 자리에 있나, 누가 지옥의 자리에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식으로 복음이 전파 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잔인한 하나님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지게 됩니다.

즉 제대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시는 여호와 하나님처럼 제대로 예수님이 전파된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까?


스데반의 설교를 보세요.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꺼집어 내지 않습니까?


51-52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에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이 말은 곧 너희들은 불사름을 당할 대상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찔려 이를 갑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한마디 더 하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러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입니다.

스데반이 한마디 더 한 것이 왜 그들의 결단을 내리게 했습니까?


스데반 지는 하나님도 보고 있고 인자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은 안 보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스데반이 자신들과 구별해 버립니다.


난 보이는데 너희는 안 보이지.


그 말은 곧 너희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다. 아니 상관 없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인자,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고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전도를 참 희한하게 하죠.

우리들 같으면 어떻게 되었든지 좋은 말을 해서 설득을 해서 교회 나오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할텐데.

이건 전도하면서 무슨 애 다루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스데반은 뭐라고 말하면서 죽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더 열불나게 만들고 죽어 버립니다.

물론 스데반 자신은 성령님께 이끌리어 전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마는.


듣는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잘 죽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기도가 사도바울에겐 해당사항이 있게 됩니다.

희한하죠.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의 증인이었지만 즉 다른 말로하면 함께 돌로 쳐 죽인 자였지만 예수님께서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도바울을 만나주십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돌로 치는 현장에 있었던 사도바울은 스데반보다 더합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가 성도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의 크나큰 분노를 사게 됩니다.

이 원칙에 입각해서 복음을 전하니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뽑아 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뽑아냄을 입지 못한 자들은 지옥가야 마땅함을 선언하는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인간이든 뭐든 다 하나님 어떤 분이신가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지옥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사람을 죽이시는 일을 예사로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할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 중에 사랑의 주님을 전하기 위해 죄 용서함을 받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전합니까?

주님되신 예수님을 전하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을 과감히 내 뱉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빠져 나옵니다.

동시에 지옥가야 하는 자들은 그들의 위치가 더욱더 확고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이 뭡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피 흘리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참 복음 전파입니다.

 
 
 

오바댜강해

구름 나그네 2009. 12. 13. 16:59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오바댜1장10-16

사도행전5장29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 나셔서 만유의 주님이 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권력을 가진 자들 즉 힘이 센 자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복음 전함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때 한 말이 바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즉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겐 그래 맞습니다라고 순종되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겐 이 말씀이 정말 듣기 싫은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말씀을 정말 듣기 싫어하는 자들의 태도를 한번 봅시다.

33절에 보면 사도들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들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이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법사 가마리엘의 의견에 이들이 동조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는 말 말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 가마리엘의 말엔 일리가 있어 동조를 합니다 마는 사도들의 말엔 동조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일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받아 들이기에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들이 자기 말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주님이 되신 예수님의 영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성령을 힘입어 전하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 들이기 힘듭니다.

받아 들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말을 들어 보니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가말리엘과 비교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과 몇 몇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


그러니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즉 권력자들입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가말리엘의 말은 순종할 만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죽이지는 않고 채찍질 하고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한 후에  놓아 줍니다.


앞서서 사도들이 말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죽이지는 않고 채찍질하고 경고하여 놓아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혹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일 까 하여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럴것 같으면 채찍질 하지도 말고 놓아 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하나님도 자신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혹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 해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을 순종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의 다른 말은 갈라디아서 1장10절에 나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에게 좋게 한다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는 다름 아닌 율법, 즉 행함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행함. 살 이유가 있네, 사는 보람이 있네. 나도 신이 될 자격이 되네.

노력하면 할 수 있네. 구원이든 뭐든지 다 내 땀의 열매에 불과하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했다. 죽었다. 아프다. 좌절했다. 고난당했다. 절망했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정적인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 많이 있죠.

왜 그럴까요?

그저께 어떤 사람이 이야기 했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다 부정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만하면 다 부정적이랍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

자기 몸 편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겐 부정적이라는 단어는 더욱더 강력한 자기 존재의 긍정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부정되어 져야 하는 삶이라는 것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왜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까?


자신들이 죽어야 할 자들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사도들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이 주님을 죽인 장본인이 됩니다.

그러니 저놈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사는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채찍질하고 놓아줍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입니다.


물론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우상하나님입니다. 거짓 하나님이죠.

철저하게 자기편, 즉 사람을 좋게 하는 하나님, 사람께 순종케 하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라 하면서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집어 넣어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전 인생은 부정해 버립니다.

그러니 복음은 절대로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좋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인생이 주님께 온전히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의 인생이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생존으로 발두둥 치는 인생이 부정되는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좋게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딱 반대로 하죠.

사람에게 순종하는 복음, 사람을 좋게하는 복음.


만일 사람에게 순종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복음, 사람을 좋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하는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 이단 취급 받습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자들이 있죠.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다리 걸쳐야요.

사람에게도 순종하고 하나님께도 순종하고.

사람을 기쁘게도 하도 하나님을 기쁘게도 하고.


얼마나 멋집니까?

이렇게 되면 핍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존경이 따라 올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한번 가 봅시다.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행한 일로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없었던 것 처럼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비참한 사실을 성도는 이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좋게 하는 말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교법사 가말리엘을 꿈꿉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


그래서 복음을 알더라도 가족에게 칭찬받으려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면 입을 꾹 다물고 지냅니다.

그러면 칭찬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오바댜처럼 비참함을 전해야 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자는 다 찍어 불에 던지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바댜가 그 시대에 인기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어겠습니까?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에돔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때려 죽일놈 아닙니까?


감히 우리나라에 부정적인 말을 하다니. 우리 나라가 망한다고,

당장 잡아 죽여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교법사 가말리엘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믿고 사람들로부터도 순종을 끌어 내고, 칭찬도 받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상 우리 마음엔 이것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오바댜는 어떠했습니까?


관심 없습니다.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만 관심있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주님되신 예수님께만 관심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말을 듣게 됩니다.

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살았다. 그런데 내가 왜 싫은 소릴 들어야 돼.


이게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고 있는 마음, 본성이죠.

그런데 성도는 늘상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없이 여김당하고 욕얻어 먹는 일을 밥먹듯이 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 사도바울의 고백이 단 한사람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사람들을 좋게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하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전인생을 부정하면서 십자가 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자로 사는 자입니다.

늘 사람들이 싫은 소리를 내 뱉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바댜강해

구름 나그네 2009. 12. 6. 20:13

오바댜의 묵시

오바댜1장1-9

요즘 세상에 예수님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짓 같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돈 버는 곳, 자식 키우는 곳 어디를 가도 예수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돈버는 곳의 중심은 돈이 되고, 자식 키우는 곳은 자식이 중심이 됩니다.


그러면 교회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그야 당연히 교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에 설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어떨까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목사짓이라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가는 곳 마다 사람이 주인 행세해야 합니다.

사람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 곳은 쓸데 없는 짓 하는 모임이나 쓸데없는 사람 취급 받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반짝이는 불빛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들어 있습니까?

아니죠. 


돈만 들어 있습니다.

자본만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 즐거움만 가득가득 들어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예수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오바댜의 묵시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자신들만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에겐 참으로 듣기 싫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묵시가 개입되면 묵시를 인정하든 말든 역사라는 것이 산산조각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땀과 수고의 대가가 박살 나 버립니다.


그래서 묵시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인간들은 묵시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신다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인간자체를 완전히 박살냅니다.


인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을 다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흔적이 있는 곳을 아예 불로 다 태워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흔적이 있는 땅은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새땅을 만드십니다.


인간이 보았던 하늘도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새 하늘을 만듭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인 인간에겐 묵시라는 것은 즉각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없애버리려고 해도 주 여호와의 전쟁은 에돔을 덮쳐버립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2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에돔을 열국 중에서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는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희한한 말씀이죠.

오늘날 세상을 보세요.


나라가 잘 살고 못 살고, 흥하고 망하는 것이 누구에게 달렸습니까?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엄청나게 부자이며 군사적으로 강대국인 미국을 보세요.

미국의 멸망이 여호와께 달려있는 것 같습니까?


세계 강국들을 보세요. 그들의 흥망성쇠가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가난한 국가는 왜 가난합니까?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잘 살고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랍니다.

주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다니엘2장을 보면  세상의 모든 국가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뜨인 돌에 의해 박살나야 하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국가를 누가 세웁니까?

인간이죠.

국가가 우상이요 산산조각날 대상이라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자체가 우상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짐승입니다.


국가가 짐승이요 사람도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그냥 짐승이 아닙니다.


동물의 수준이 아니라 마귀새끼입니다.

그러니 짐승취급 당하면 그래도 좋은 대접입니다마는 인간은 짐승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마귀취급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나쁩니까?


지금 에돔은 마귀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3-4절을 보세요.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니라”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반드시 멸망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끌어내려 멸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왜 에돔을 멸망시키시려고 합니까?

그 이유는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때문입니다.


에서의 후손이 에돔입니다.

그러면 야곱과 어떤 관계입니까?


형제 관계였지요.


그렇다면 형제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을  포학히 대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성경에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게 또한 사실입니다.


형제였던 자가 형제에게 포학히 행했기에 멸망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멸망의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좀 어려우니 거꾸로 봅시다.

십자가 입장에서 보면 간단합니다.


에돔이 행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십자가의 피를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람들이 별별 일을 다 행하고 살죠.

얼마나 다양하게 살아갑니까?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을 열심히 버는 사람도 있고,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 남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지옥가고 누가 천국갑니까?

그 기준은 하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피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 능력 안에 있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천국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피 능력 밖에 있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지옥 가야 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에돔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없었을까요?

가난한 자를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기부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모습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피 능력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부 천사라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피 밖에 있는 자는 기부천사는 천사인데 기부마귀천사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5장24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무슨 심판의 기준이 이런 것이 다 있습니까?


차라리 형제 나라에 대해 선하게 대하면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하면 납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야 생명이 있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 들이라 말입니까?


그러니 오바댜를 엉터리로 읽는 것입니다.

오바댜를 읽으면서 형제나라에 대해 선하게 하자, 착하게 살자라고 하면 멸망의 대상에 불고합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젠 어떻게 예수님을 믿느냐는 것이지요.


요한복음6장65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피 능력만이 예수님을 믿는 자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자만이 주님의 심판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 능력에서 제외된 자들은 무슨 일을 해서 심판의 이유가 되며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