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0. 2. 24. 20:55

요나서4장1-11

요나의 초막

인간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행동을 이끌어 갑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 행동에 나서는 인간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둔 상황에서는 더욱더 치밀해지고 분명합니다.


왜 사람들이 로또를 구입합니까?


미래에 대한 기대입니다.


로또 1등당첨에 대한 기대.


아담이 왜 선악과를 따먹습니까?

기대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기대.


이런 큰 기대가  있었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첫째 아담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무엇을 기대하는 가운데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물론 그 궁극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꿈이 있기에 인간들은 쉴새 없이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말씀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곧장 행동에 나섭니다.

행동에 나서는 이유를 보게 되면 역시나 자신이 하나님처럼되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태어납니다.

가인은 농사꾼이요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7절


이 말씀으로 인해 결국 가인은 아벨을 쳐 죽여버립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대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아벨없으면 비교대상이 없어지잖아요.

너무 싱겁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싱겁게 보이지만 아벨의 제거야 말로 자신의 분함을 제거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촉매가 되어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어 자신이 하나님행세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 선지자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심히 싫어하고 노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망하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런 중 박넝쿨이 자라 요나의 더위를 가시게 합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박넝쿨이 죽어버리자 또 성이 났습니다.

죽기를 구합니다.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다고 합니다.


아마 목사중에 이런 목사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야. 완전히 지멋대로네.

선지자. 선지자 좋아하네.


네가 선지자면 나는 선지지 할아버지다라고 하지않겠습니까?


아니 여호와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선지자된 입장에서 박수를 쳐야 하지 않을까요?

선지자의 외침으로 회개가 일어났으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끝까지 그 멸망을 지켜 보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박넝쿨로 인해 짜증내는 것 한번 보세요.


이게 선지자의 모습입니까?

지 몸 괴로운 것은 참지 못합니다.

박넝쿨 하나로 인해 죽고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니느웨성의 십이만명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이게 선지자의 모습입니까?


오늘날 이런 목사가 있으면 사람들이 이런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마 백이면 백명이 다 안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기본도 없지 않습니까?

요나선지자의 모습을 보면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극치같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무슨 선지자냐. 무슨 목사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요나가 이렇게 당당하게 여호와하나님께 성을 내고 짜증을 내고 죽고 싶다고 말을 할까요?


요나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들으셨듯이 니느웨성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습니다. 멸망의 대상인 니느웨성도 기도를 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실 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왕기상8장에 보면 이방인의 기도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붙들고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의 기대와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의 입장을 절대 꺾지 않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아도 옳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말씀이란 자신의 간절한 바램과 일치하는 말씀이죠.


요나는 자신의 간절함 바램과 일치하는 말씀을 붙들고 니느웨의 멸망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위해 초막을 지었습니다.


요나 자신을 위해 지은 초막에 여호와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박넝쿨로 인해 시원해지니 기분이 째집니다. 이젠 니느웨성이 멸망당하는 꼴만 보면 되겠구나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박넝쿨이 말라 죽었습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젠 박넝쿨 때문에 죽겠다고 합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니느웨성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고싶다더니 이젠 아주 하찮은 박넝쿨로 인해 죽겠다고 합니다.


자기 원대로 안되니 꺼집어 내는 것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참 희한하죠. 배에서는 아주 의연한 모습을 보이더니 왜 이렇게 사람이 바뀌었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니느웨성이 멸망당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짜증나는 것입니다.


요나서 결론이 없습니다.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에 동의했다. 아니면 동의하지 않았다. 뭐 이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밝히시고 끝을 맺어버립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위주로 해석했다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정도 일까요?


하나님도 요나의 기대에 동조해야하는 하나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입니다.

마태복음16장21-23절을 봅시다.

“이 때로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거부합니까?

그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기대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고 하니 붙들고 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부활이 뭔지도 모르니 당연히 그렇겠죠.

죽음을 모르는데 부활을 알 리가 없죠.


베드로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살기위해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도 오직 마음의 중심엔 자기 자신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대, 희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기대와 희망을 위해 행동 하나하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뭐라고 하십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합니다.


사단입니다.


사단의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기대와 희망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왜 일어납니까. 왜 자꾸 십자가가 발생합니까?

자신이 미리 만들어 놓은 기대와 희망으로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몇 일 전에 제 친구랑 통화를 하는데 그 친구가 저에게 마귀가 뭔지는 아냐고 물었습니다.


마귀가 뭔지는 알고 마귀의 앞잡이라는 글을 썼냐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십자가는 안된다고 행동에 나서는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


요나선지자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 편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자신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바램을 충족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누가 누구를 핍박하는 꼴이 됩니까?

니느웨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나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우린 어떤 일이 발생할 때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습니다.

이 버릇은 죽을 때 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요나가 우리들이 보기에 별종인 선지자 같지만 절대 별종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별종과 주님의 희생이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 입장이었다면 요나 선지자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박넝쿨까지 준비해 주겠습니까?


끝까지 못 알아 차리는 요나에게 박넝쿨을 말라 죽게까지 하여 요나선지자를 찾아오신 주님의 희생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아버지의 일을 하실 뿐입니다.

우린 나름대로 무언가 기대하는 바대로 행동에 나섭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희생이 발생합니다.

십자가가 일어납니다.


성도는 이런 만남을 가지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이런 만남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는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0. 1. 17. 13:57

뜻을 돌이키사

요나3장1-10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 나셨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냐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이 못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신성화해야 좀 속이 시원해집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그냥 한 여자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누가복음5장27-3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정말 못 마땅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신이 이 땅에 내려 와서 구원을 해 준다면 누구를 구원해야 합니까?

의인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죄가 그래도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구원해야 신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와 놀고 계십니까?


세리와 죄인.


바리새인이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겠습니까?


예를 한번 들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도 잘하고, 주일예배, 수요 예배,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이죠.

장로도 그럴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남을 위해 구제도 잘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구제를 합니다.


어려운 이를 만나면 도와줍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어려운 사람을, 그것도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을 도와 주는 사람들이 나옵디다.


자기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의 자식을 자신의 자녀와 똑 같이 키웁니다.

교회 생활도 잘하고, 직장 생활도 모범을 보입니다. 정직하게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누가 봐도 천국 가는 것에 동의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과 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기 치는놈, 살인한 놈, 강도짓 한 놈, 강간한 놈, 몸 파는 여자, 남을 도와 주기는 커녕 자기것만 챙기는 사람, 십일조는 커녕 땡전 한닢 헌금 하지 않는 사람, 주일날 만 되면 자기 일이 바빠 예배에 빠지는 사람과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이해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이럴 때 화를 내죠.

자신은 다른 친구들 보다 잘 했는데 왜 자신은 칭찬하지 않고 다른 친구를 선생님이 칭찬하느냐는 것이죠.


자신이 다른 친구보다 보족하면 문제가 없는데 잘하고 있다 생각할 때 칭찬이 다른 친구에게 가 보세요.


아마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들이 이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성실히 살았고, 남에게 나쁜지 하지 않았고, 십일조 하고, 봉사하고, 가난한 자 도와 준 나는 무시하고 나보다 찌찔이도 못난 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느끼는 느낌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제자들을 비방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이 개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도 저 모양 저꼬라지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저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그래, 그래도 저 예수가 우릴 건강한 자로 인정은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당신의 제자들도 우리 편에 들어오게 하시오라는 뜻이지요.


당신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쓸데 없다는 말을 듣고나서 말입니다.


이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에 어느 누구도 건강한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듣는 자신들은 아주 건강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헌금 잘하죠 십일조 잘하죠 교회 봉사, 사회 봉사, 구제 잘하죠 뭐 험잡을 때 없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건강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저들의 함정에 빠져 버리도록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너거들은 건강한 자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너거들 건강하게 살아라는 말씀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원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칭 타칭 의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런 자들은 버려 두시고 오히려 죄인을 불러 회개 시켜 구원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그야 당신 설교가 맞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질 않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구제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 말이요.


그러니 당신의 설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설교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 보지 않아서 아마 이런 생각이 안 들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낸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저에게 이런 식으로 반박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인데 그게 뭐 나쁜 것이요.

수 천 억원 어치의 예배당 짓는 것도 다 주님을 위한 것이요. 여기서도 잘아는 사랑의 교회가 수천 몇백 억원의 예배당 짓는다고 하는데.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뭐가 문제가 되겠소.


그것도 죄란 말이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바리새인과 똑같이 듣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이제 건강한 자들이다. 의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일은 다 의롭다.

그러니 예수 당신도 우리의 하는 일에 지지하시고 우리가 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시오.


내가 헌금하면 옳다 하시고 내가 수천억 예배당 지으면 지지 하시고,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예수님을 믿고 하니 다 지지해 주시오.

이것은 죄짓는 일이 아니라 의로운 일이요.


이게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충성봉사한 사람들은 자신을 절대로 죄인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일 뿐입니다.

이젠 의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누가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저와 상관이 없는 말씀아닙니까?

바리새인같은 자들이 들어야 되는 말씀 맞죠?


저희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자하신 일, 즉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들은 회개한 의인이 아닙니까?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죠.

회개한 의인.


그러니 우린 늘상 예수님 편에 서 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생각입니까?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믿었습니다. 

세례요한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뭘 인정못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와 놀지 않는 예수는 인정치 않겠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놀이 문화에 함께 동참하지 않는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요 목사들, 장로들, 교인들의 모습아닙니까?


이들에게 당신이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이요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예수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는 그런 악한 죄인이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절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전 주님편인데요. 전 예수님 편인데요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의인들이죠.

지옥 갈 의인들.


놀랍지 않습니까?

지옥 갈 의인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요나서 3장을 보게 되면 너무 이상한 일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백성부터 왕까지, 그리고 모든 짐승까지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요나가 상상했던 일일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과 그 왕을 회개케 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시느냔 말입니다.


그들을 그냥 강퍅케 두어 본보기로 삼아야 할 터인데 왜 뜻을 돌이키시느냐 말입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마음 아닙니까?

세리와 죄인들과 놀면 안되요. 우린 그들과 안 놀아요. 우린 고귀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예수 당신도 우리편에 와서 놀아요. 어떻게 지옥갈 자들과 함께 놀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좀 심판 표현을 했죠.


그런데 지금 요나가 보기엔 그런 것이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늘상 이런 식입니다.

즉 인간들을 아주 기분나쁘게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상식, 기대, 지혜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시면서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어서 자신들의 놀이문화 안에 놀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죄를 십자가로 고발해 버립니다.

너희들의 그런 놀아 문화 때문에 내가 죽었다.


마치 요나가 멸망을 니느웨성에 고하듯이.


이런 상황에서 회개하는 자들과 강퍅한 자들이 갈라서는 것입니다.





 
 
 

요나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0. 1. 10. 16:31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요나서1장17-2장10 

요나는 지금 죽음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곧 숨이 끊어질 듯한 상황에서 성전을 바라봅니다.

그냥 읽어 보면 요나가 뱃속에서 아주 여유를 부린 것 같이 보입니다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숨이 넘어갈 듯한 상황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 가끔 영화를 보며 이런 장면이 나오잖아야.  폐쇄된 공간에 물이 차오르는데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합니다.

살려달라고 발부둥 치지 않습니까?


요나가 지금 그런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는 금방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났다는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적이 있어야 이런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 알겠지요.


이런 상황, 최악의 상황에서 나온 기도가 이 기도입니다.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가 나옵니다.

30절에 보면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41절에서는 이방인이라도 이 전을 향해 기도하면 주를 경외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국의 땅에 끌려 가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요나는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나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영원히 가두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린 요나가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 여호와께 기도드린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만일 요나가 두려워한 것이 그런 죽음이었다면 요나나 뱃 사람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로부터 버려짐이 어떤 것인가를 경험케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전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떤 능력을 발휘합니까?


죄용서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마태복음12장38-45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 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 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표적을 구하는 악한세대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도 삼일을 땅속에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6장38-39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27장46절을 봅시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는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요나를 통해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요나가 말 안 듣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 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차원에서 요나를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나가 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만 했습니까?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까?


그 이유는 니느웨라는 성이요 또한 뱃사람들 때문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요나는 굳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괜히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냥 죽음을 경험하는 죽으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무슨 일을 발생시킵니까?

죄 용서함을 일으킵니다.


과거엔 예루살렘 성전이 그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동안 땅 속에 계셨던 분에 의해 죄가 용서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던 그 분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라는 함정에 빠뜨리시고 우상 숭배하는 뱃사람들 가운데 집어넣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라고 요나 선지자를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들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어찌 그리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과 다를까요?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억울해서 이를 팍팍 갈지 않겠습니까?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왜 내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여 주는 삶을 살아야 해.

이런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놀랍게도 성도의 삶이 요나의 삶과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몰려 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께서 미리 다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이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리라”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누가 알아서 다 합니까?

성령께서 알아서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5장19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는 이렇게 내 몰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분명 세상과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구별된 자입니다.

성령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성도를 싫어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세상이 성도를 싫어합니까?


예수님이 싫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수님이 싫습니까?

버림받은 예수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한  예수님이 싫은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 남을 살리는 예수님은 마음에 쏙 듭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있다가 다시 살아 나온 예수님은 좋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3일은 죽어도 싫습니다.


누가 요나의 경험을 하고 싶겠습니까?


왜 내가 남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내가 남 때문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합니까?


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껴질 정도의 경험까지 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듣기 싫은 말 아닙니까?


듣기 싫으면 안 들어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백성을 그렇게 몰아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기 싫어도, 도망 가도 도망가도 주님께서는 도망가는 중에 십자가에 속 집어 넣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성령을 주신분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오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말입니까?

십자가로  인하여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내가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 선지자가 무엇으로 인해 감사합니까?  성전. 죄 용서함이 이루어지는 성전으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성도는 오직 한가지만으로 감사하는 자입니다.

바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누가복음10장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인간들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 용서함을 받아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일까요? 인간들의 본성은 이런 것에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는 이것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미움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