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구름 나그네 2007. 7. 16. 12:47
 

고센정착과 나그네 세월

창세기46장28-47장12

야곱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잃어 버렸던 요셉을 다시 만남으로 그가 요셉을 잃어 버렸고 지금까지 살아온 심정이 밝혀 집니다.


30절을 보면“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제 밀양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신애라는 여인이 아들 준과 함께 교통사고를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에 정착해 피아노 학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던중 그는 자신이 돈이 많은 사람인냥 흉내내기 위해 땅을 사겠다고 합니다.


땅을 산다는 말에 돈이 많은 줄 안 아들 준의 웅변학원 원장이 준을 납치해 죽여버립니다.


이 일로 상처받은 준의 엄마는 가슴이 엄청난 엉어리를 품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던 중 약국 집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그녀의 엉어리는 풀리는 듯 합니다. 밀양역에 나가서 찬양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자신이 이제야 자신에게 이런 일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뜻을 알겠고 기쁘고 평안하다라고 간증까지 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교도소에 있는 자신의 아들 준의 유괴범이자 살인범을 찾아가 자신이 직접 용서해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도소에 있던 그 살인범이 뭐라고 하는고 하면 자신도 이미 하나님의 용서함을 참으로 감사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준 엄마는 안색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이 피해자인데 자신도 용서하지 않는 살인자를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회중 기도하는 시간에 그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요를 틀어 버리고, 자신을 전도한 집사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해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내용이 더 있지만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아들을 잃은 슬픔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와 엉어리.


이 여인은 하나님의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그 아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일체 고려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물론 영화에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빼버리고, 마지막 장면 가까운데서 차량앞에 둔 십자가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이 죽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펄펄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을 나그네로서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하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 낮아지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속에 들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그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셨고, 요셉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서 험악한 세월을 살면서 자신이 가진 중요한 것들을 잃어 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태복음10장37절을 보면 “아버니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극단적인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입장만 말합니다. 내 아들 죽었는데, 내 딸 죽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언급하고 부모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예수님 위에 이들이 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 잃어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너무 심한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낮아지심, 독생자의 죽으심을 인간들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은 가볍고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야곱의 마음이었고, 이 마음을 바꾸는 작업이 요셉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을 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상은 없습니다.


또한 성도는 나그네로서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장18,19절을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할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어떠 하길레 성도들을 미워합니까?


갈라디아서 6장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성격이 어떻습니까?

13절에 나옵니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세상은 육체로 자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울의 자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만, 세상은 육체로 자랑하는 것, 즉 자기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두고 자랑하는 자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고 자랑하는 자들로 인해 누가 미움을 당하는고 하면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들이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잃어버리는 자로 나그네로서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16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센 땅에 정착하는 이유도 더 나은 본향, 즉 약속의 땅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향이 하늘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고센 땅에 정착했습니다.


성도가 동일한 믿음이 있습니다.

성도는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려도 결코 주님이 주신 믿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움당하면 당할수록 본향이 더욱더 뚜렷히 보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이후 우리의 삶은 다 나그네의 삶이요 험악한 세월을 사는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삶속에서 나의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생명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빼앗아 가십니다.














일아 보고 들을 귀가 있슴을 감사합니다. 아멘.
신애라 딸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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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강해

구름 나그네 2007. 7. 16. 12:46
 

70명

창세기46장8-27

요셉의 희생으로 야곱과 그 자손들은 생명이 보존됩니다.

창세기45장7절을 보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애굽에 팔려가 그곳에서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고 애굽의 주로 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5장11절을 보면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요셉으로 인해 이스라엘 가족은 애굽으로 내려가 생명이 보존됩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으로 내려간 생명이 보존되는 자들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생명이 보존된다고 했을 때 우리들 생각에는 그럴 가치가 있어서 생명이 보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70명의 이름을 살펴 보면 결코 이들이 생명이 보존될 가치가 있어서 생명이 보존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어떻습니까?

속이는 자의 삶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 저 주시기까지 낮아 지심으로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르우벤은 창세기35장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시므온과 레위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이 있습니다.

디나 사건입니다.

할례를 이용하여 하몰과 그 아들 세겜, 그리고 그 족속들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모든 재물을  뺏앗고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습니다(창34:25-27).

시므온에겐 가나안 여인의 소생 사울도 있습니다.


과거 에서가 가나안 여인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창26:34,35).


창세기24장3,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스마엘은 애굽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아니면 애굽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이탈한 현상입니다.


유다는 어떻습니까? 며느리 다말도 역시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의 아들 엘, 오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셀라를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의 약속은 뒷전으로 밀어내 버리고 다말을 내 �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 다말의 믿음으로 인해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 납니다.


이것은 유다에 대한 고발입니다. 아니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고발이라고 볼 수 있지요.

너희는 진멸대상인 가나안 여인보다 더 악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은 말 안 해도 알수 있지요.

성경에 세세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표적인 형제들이 이러한 짓을 했다면 나머지 형제들은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 각각의 소상한 이야기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가롯유다를 대표로 해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베드로를 대표로 해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이스마엘과 같이 애굽 여인, 그것도 우상숭배 최전선에 서 있는 제사장 딸과 결혼합니다.


물론 이것은 바로 왕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경우에도 그 어미가 애굽여인을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창21:21).


어찌되었든지 요셉도 역시 아브라함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족의 대접을 받았지만 이삭과는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자신의 족속에게 가서 취하라고 한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70명을 나열 했지만 이들 면면을 살펴 보면 완전한 인간은 한명도 없고 오히려 죄악 덩어리들만 가득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생명을 보존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엘과 오난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엘 오난을 죽이셨던 하나님이시라면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도 죽이셔야 합니다.

유다도 마찬가지로 죽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죽이시지 않고 기근에서도 기여히 생명을 보존케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지만 이들을 애굽으로 피신케 해서 생명을 살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70명이라는 숫자로 기록한 이유는 이들이 살아날 자격이 있어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심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70이라는 숫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7일째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완벽하게 다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날이 7일째입니다.


그래서 7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홀로 일하셔서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어떤 인간으로 드러 납니까?

앞서 살펴 보았듯이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2장15절을 보면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호세아 11장1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2장 15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헤롯으로 인해 애굽으로 피신한 사건을 두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오신 땅 이스라엘이 애굽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곧 약속의 땅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그곳이 이스라엘이든 그 지경 밖이든 상관없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물론 이 땅은 우리가 발로 밟는 땅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70명을 애굽에서 생명을 보존케 하신 것은 곧 예수님을 통해 세상이 모두다 애굽과 같음을 고발합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애굽같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애굽 같은 곳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고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분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홀로 하셨음을 말씀하시기 위해 70명이라는 숫자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는 자들의 구원이나 수는 완벽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로마서8장30절을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왜 이렇게 하셨는고 하면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 가진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이렇게 심각하고 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피 공로로 완벽한, 부족함이 없는 구원을 받았음을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완벽한 구원은 결코 나 구원받아 천국집어 넣으시기 위해, 생명보존하기 위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을 완벽하게 이루신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완벽한 영생을 성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나온 70인처럼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의만 드러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강해

구름 나그네 2007. 7. 16. 12:46
 

죄악을 적발하시는 하나님

창세기44장14-34

요셉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자신의 형들을 위기로 몰아 넣습니다.


16절에서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였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분명 정직했는데 이상하게도 베냐민에게서 요셉의 은잔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가 하는 말은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모든 자가 다 주의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였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갑자기 왜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유다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악을 꺼집어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기꺼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자들이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입니다. “요셉이 가로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요셉은 오직 베냐민만을 잡아 두겠다고 말합니다.


18-34절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어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비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고하되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나로 그를 목도하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하기를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말째 아우가 너희와 함게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고하였나이다 그 후에 우리 아비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말째 아우가 함께하면 내려가려니와 말재 아우가  우리와 함께 함이 아니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간 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도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칵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오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유다가 물론 자신들이 요셉을 어떻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지금 말하는 것 속에 자신들이 요셉을 팔아다는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말씀드리는고 하면 이전 요셉을 팔때에는 요셉과 함께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하다가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냐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자신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베냐민만은 형제와 함께 돌려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은 베냐민과 함께 할 때에만 아비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지요.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다가 잘 알 고 있습니다.


과거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것도 알고 있었고요.

그 때에는 요셉이 그렇게 밉고, 요셉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강해서 결국 요셉을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 앞에 선 유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버지의 위로와 기쁨이 되는 베냐민만은 반드시 아버지께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종이 되어서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는 자신의 말 속에서 과거 자신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을 하나님께서 적발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죄악입니까?

형제를 미워한 죄악, 물론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형제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자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누구를 죽였는고 하면 아브라함의 씨를 죽이려고 했고, 그 씨를 팔아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창세기38장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통해 자신의 불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말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들인데 반해 자신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아들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말을 통해 유다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 유다는 요셉 앞에서, 자신들이 비록 정직하지만, 이렇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적발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죄라는 것이 다름 아닌 약속의 씨에 대한 믿음 없음에 대한 죄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가 보기에 좀 이해가 안되지요.

요셉이 꼭 속여 가면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요셉이 속인 것은 죄가 아닌가?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속였느냐 안 속였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아느냐를 따지시고 계신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속이면서까지도 형들로부터 꺼집어 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형들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의 마음이 있느냐입니다.


요셉의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유다를 통해 이들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들이 고백되어지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를 어떤 상황가운데로 이끌어 가실지 모릅니다.


성도를 어떤 꼴로 만드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 불합리하고 부조리 하고, 이건 해도 너무 심하다 하는 상황에서 조차 우리의 죄를 적발해 내시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고백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상황은 말도 안돼. 왜 이런 환경으로 나를 이끄셨지. 이런 불평 불만을 가질 이유가 성도에겐 없습니다.


시편51편을 보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함으로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알게 되고 그 죄가 오직 십자가의 피로 사해진다는 것을 믿는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왜 하필 하나님께서 저녁에 우리아의 아내가 목욕하게 하셨는가?

왜 자신이 그런 형편에 처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망은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본래 자신은 죄인이며 오직 주께서 꺾으신 뼈만이 자신을 즐겁게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 뻔뻔한 다윗이 되지만, 본래 인간들은 다 죄인입니다.

시편51편5절을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해서 죄인이 아니라 본인은 본래 이런 자였음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함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는 방법 외에는 죄가 용서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외에는 죄용서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과 형편으로 몰아가실 때 성도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환경 속에서 내 죄악을 적발해 내시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이름만을 높이려고 하시는구라라고 믿으면서 하루하루 감사하며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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