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34

부흥

하박국3장1-19

여러분, 성도답다라고 할 때 무슨 생각이 떠 오릅니까?

어떤 모습이 성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가 항상 직면하는 문제가 이것 아닙니까?

너 성도답니?


너 성도라면서 왜 그렇게 사니?


이런 정죄를 끊임없이 듣고 살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정죄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은 그런데로 이해가 되지만, 내 속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는 사실에 우리는 힘이 빠집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벌써 수년이 흘렀지만 내 자신을 볼때 변화 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끊임없는 정죄가 나옵니다.


사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8장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왜 자꾸 우린 정죄속에 빠져 듭니까?


그야 당연합니다.

로마서 8장1-2절이 예수님 믿을 때 한번만 보고 찢어 버리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한 이 말씀은 계속에서 성도에게 해당사항 있음이 됩니다.

그래서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정죄가 자꾸 흘러나오나 생각하시지 마시고,

정죄가 자꾸 흘러 나옴으로 말이맘아 로마서 8장1,2절 말씀이 생명이 말씀이 됨을 감사하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는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행하고 하지 않고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육을 입고 살아가는 한 이것은 반복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이 여전히 우리가 읽지 않아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소위 수많은 말씀 하나 하나가 쉽게 보아 넘겨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엄중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제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린 또 뒷걸음 치려고 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있지 마옵소서”


지금 선지자 하박국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보통 기도라고하면 우린 어떻게 기도합니까?


내 바램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선지자처럼 구하는 기도 보셨습니까?


무슨 내용이냐고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해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진노입니다.


심판입니다.


이 수년내에 심판해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심판의 대상이 남 유다와 바벨론 모두를 포함합니다.


자신이 속한 유다나라와 바벨론 모두를 하루빨리 심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지 말아라.

바벨론만 심판해 달라고 기도해야지 자신이 속한 남유다는 아니지 않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꺼내듭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여기 말씀에 의하면 남유다는 제외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도 다 말씀에 합당하게 되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주님 우리 집안 식구들 빨리 심판해 주세요.


저들 빨리 지옥보내 주세요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하겠습니까?

저 미친놈.


자기 식구도 모르는 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야하는 자들의 주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결코 자기 자신이 속한 남유다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을 규정할 때 남유다라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가난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14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가난한 자가 곧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명목상 남유다나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가난한 자들이 곧 주님의 백성이요 이들이 유다, 참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선지자 하박국이 남유다를 위한 것 같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언약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나라고 자신의 가족이고 없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에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고 없습니다.


오직 무엇만 있습니까?


자신의 몸,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직장, 자신의 기업, 자신의 국가만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주여 수년내에 부흥케 해 주옵소서라고 하겠죠.


그런데 선지자 하박국처럼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부흥케 해달라고 하겠죠.

잘 살게, 건강하게, 부유하게, 세계 만방에 뛰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자 하박국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가면 이 구절 많이 써 놓았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알아도 그 뜻을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교회 부흥케 해 달라고, 사람 많게 해 달라고 이 말씀을 인용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말씀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자 그러면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하는 선지자 하박국은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요?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악인들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는 선지자 하박국은 군림하는 자로 살까요 아니면 어떻게 살까요?


사람들은 또 착각을 합니다.

선지가 하박국이 얼마나 당당하게 기도합니까?

그런게 그렇게 기도하는 자는 어떻게 삽니까?


가난합니다. 

17-19절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자신의 기도로 바벨론이 쳐들어와 자신이 사는 곳을 황폐케 해 버립니다.

그러니 선지가 하박국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이 기도했으니 그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이 심판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자신이 기도했으니 자신은 그 심판의 자리에게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만은 심판을 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그 소용돌이치는 전쟁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습니다.

우리에 양도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도 없습니다.


정말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16절을 한번 볼까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엄청난 고통속으로 빨려 들러 갑니다.

뼈가 썩는 고통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죠?


주님께 기도하여 심판해 달라고 했던 그 당사자도 이런 고난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무엇을 보여 줍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냥 나 믿어요. 예수님 믿어요. 이렇게 사는 자가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몰려 지게 되는고 하면 가난속으로 내 몰려 집니다.


뼈가 썩는 고통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무엇을 드러냅니까?

바로 17-19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런 미친자의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모두가 다 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죄함이 없던 바울이나 베드로, 스데반집사님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했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늘상 죽음에 넘기우는 삶을 살면서도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처럼 주님은 자신들의 힘이시며, 자신들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자신들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믿음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 삶은 마치 선지자 하박국이 살았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 빨리 오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하게 됨으로 우린 가난으로 내 몰립니다.


제가 가난이라는 표현을 써니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 사람들은 무화가 나무의 열매가 없으면 못삽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삽니다.


죽는다고 덤빌 것입니다.

백수로 살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벌이가 시원찮으면 난리가 납니다.


이런 것을 염려하면서 주님은 전혀 저들에게 힘이 안됩니다.

이들에게 부흥은 무화과 나무 열매가 가득가들 달여 있고, 외양간에 소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통장 잔고가 가득가득하고, 아파트도 몇 채 있고, 자식공부 잘하고, 건강한 것이 부흥입니다.


이들에겐 교인 수 많은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분은 동화속 주인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떨까요?

정말 선지가 하박국이 기도한 것 처럼 이런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이야 말로 믿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판 받아야 할 자와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기도 해 봅시다.
주여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는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며, 돈이 없고, 건강 없고, 백수로 놀아도 여호와로 인해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박국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30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2장1-20

그저께 예빈이랑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예빈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세다 말세.

우리는 깜짝 놀랐지요.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말을 배웠지.

 

내가 설교할 때 한 말은 아닌것 같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어디에 그 말이 나오니?

자신이 읽은 명성황후 책에 나온데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구박하니 말세다 말세라고 말했다나요.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불화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세를 가져오신 예수님이신가요?

 

사람들은 말세를, 즉 세상 끝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자신들이 생각할 때 이상하다 싶은 일들이

일어나면 말세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하더라도 그냥 말세,

세상의 끝이라고 말할 뿐 세상은 계속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종말이 속히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결코 거짓되지 않고,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묵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묵시는 정한 때가 있는 묵시입니다.

 

종말에 관한 묵시입니다.

묵시라는 말이 어려우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늘의 세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세계.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가 임하는데

그 맛보기로 바벨론의 멸망을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곧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심판을 앞당겨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왜 멸망을 당하는 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심판의 이유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바벨론의 종말이 발생합니까?

 

4절을 보게 되면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이유는 마음의 교만과 정직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교만이나 부정직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5절을 보면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민을 모으나니.

술을 즐기는 것이 종말을 맞는 이유가 됩니까?

 

궤휼한 것 즉 간사하고 교묘한 짓을 하는 것이

종말을 맞는 이유가 됩니까?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탐욕대로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아니면 만민을 자기에게로 모으는 것이 뭐가 문

제가 됩니까?

 

모든 것이 이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이 모습 아닙니까?

 

우악스럽고 사나운 모습, 자기 소유아닌 것을

모으는 것, 여러나라를 노략하는 일.

 

힘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이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냐는 말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세상이 끝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해 높은데 깃들이려 하는 것(9), 아니면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것(9)은 어떻습니까?

 

여러 민족을 멸하는 것, 피로 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것, 이렇게 하지 않는 인간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다 다 이런 역사 아닙니까?

15절을 보게 되면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 내려하는 자,

주변에 얼마든지 볼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상 만들어 섬기는 것(18)은 어떻습니까?

식당에 가나 어디 가나 우상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상을 의지하는 것, 나무나 돌에게 비는 자들, 이런 것

 때문에 세상을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인간들이 이짓거리를 하면서 살아 왔습니까?

 

그런데 종말은 커녕 더욱더 세상은 이런 모습이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나며 확산되고 있죠.

 

물론 바벨론은 멸망당했습니다마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합니다.

 

묵시라 해봤자 그냥 묵시일 뿐이야.

 

바벨론의 멸망이야 옛날이야기지.

 

그게 오늘을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상관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선지자 하박국 시대 사람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바벨론은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당했죠.

그들이 믿었든지 믿지 않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이 멸망당했으니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심판을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멸망당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그것이 멸망당할 이유가 됩니까?

우리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는 일상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보시기엔 이 일상적인 모습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마태복음24장38-39절을 봅시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왜 멸망의 이유가 됩니까?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내 삶은 왜 이러냐고요.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데

 자신은 자꾸 술을 먹게 되고 나쁜 짓을 거부하지

않는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모르는고 하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심판의 이유임을 알지 못해요.

 

아직도 여전히 선악구조속에서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를 따지는 자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못한 자입니다.

 

40절에서는 더 이상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밭에서 뭐하겠습니까?

 

일하겠죠.

그런데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밭가는게 죄가 됩니까?

 

그래서 한 사람은 지옥갔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그러니 지금 문제점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왜 심판의 근거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한 쪽은 전혀 문제가 안되는데 한 쪽은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똑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밭가는데,

멧돌가는데 한 쪽은 심판의 이유로 작용하고 한쪽은

그와 상관없다는 것으로 작용합니다.

 

거기에 대해 오늘 본문 4절에서 대답을 해 주고 계십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13-14절을 보겠습니다.

“민족들이 불 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그리고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20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 이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 믿음이 없는

 쪽은 지옥 믿음이 있는 쪽은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일상생활로 표현합니다.

힘으로 표현합니다. 탐욕으로 표현합니다. 우상숭배로 표현합니다.

 

믿음 없는 인간들은 끊임없니 쏟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행위의 열매들입니다.

먹는 거 자랑하고 입는것 자랑하고,

마시는것 자랑하고, 시집가는 것, 장가가는 것

중요시하고, 밭가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믿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힘을 자꾸 의뢰하고 만인을 자기들에게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자는 어떨까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오직 믿음만을 내세울 뿐입니다.

 

13-14절을 한번 더 볼까요?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그득하리라”

 

결국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서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심판을 통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제가 믿음이라고 했죠.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20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

성전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전은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피로 만납니다.

 

피가 없으면 그 사람이 대제사장이 되어도 심

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라는 기준을 갖고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믿음이란 결국 피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피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러나 이 피와 상관없는 자가 악인이며

 이런 자는 자신의 행위만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믿음으로 삽니다.

 

로마서1장17절을 보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자기 것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어떻습니까?

정말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자신들의 삶의 열매를 주주룩 흘려냅니다.

 

의인은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그러니 의인의 삶은 어떤 꼴이 되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됩니다.

 

조롱거리가 됩니다.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는 미움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살 뿐이지만 십자가의 피를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자들이기에 바벨론처럼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냥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그냥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은 그냥 남들이 보기에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그들의 자랑은 십자가입니다.


 
 
 

하박국강해

구름 나그네 2010. 7. 30. 09:30

믿지 아니하리라

하박국1장5-17

하박국 선지자의 부르짖음을 주님이 듣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 하박국은 더욱더 악인들 속으로

내 몰려 집니다.

 

이런 가운데 여호와의 응답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5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듣지 아니하시는 상황에서 주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응답의 내용을 보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 믿을 수 없는 말씀이 6-11절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신을 삼는 자가 유다를 사로잡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 힘은 열국들이 힘을 합친 것처럼 강합니다.

 

이 말씀이 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씀이요

놀라고 놀라운 말씀일까요?

 

그 이유가 12-1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분명 믿음이 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사

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을 보는 관심이 이런 관점입니다.

만세전부터 계신 주님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언약에

있어서 불변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중에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을 고백합니다.

단지 악인에 대한 심판과 자기 백성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를 투입시켰다고 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것에 대해서 부르짖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참 바쁘죠.

 

유다나라의 죄악 때문에 부르짖다가 이제는 그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바벨론의 악함을

또 부르짖습니다.

 

15-17절을 봅시다.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만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는

바벨론에 대해서도 주님께 부르짖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지난 주 살펴본2-4절을 보면 유다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선지자 하박국 이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본 본문에 의하면 선지자 하박국은

주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보낸

바벨론의 악함을 보고 또 부르짖습니다.

 

여기에서 우린 왜 주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행하시는 일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될까요?

 

선지자 하박국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통과과정으로 바벨론의 개입을 보고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언약, 변하지 않은 영원 불변한

언약을 붙들고 유다의 죄악에 대해 부르짖고

바벨론의 죄악에 대해 심판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주님께서 악한자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자신들이 멸망당해 포로로 잡혀갈 것을 믿을 수 없을까요?

 

예레미아7장1-1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

는도다 너희가 도적질 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컫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히 눈에는 도적의

구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유다인들의 길과 행위가 바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립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성전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레미아선지자의 외침이아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이 이들귀에 들릴까요?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당당하게 성전에서 자신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면서 도적질하면서 살인하면서

간음하면서 거짓맹세하면서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전에 들어가 서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상상이 갑니까?

 

상상이 잘 가지 않으면 예수님 시대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마태복음21장12-17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성전에서 매매하는 것이 나쁜 일일까요?

 

신명기14장22-27절을 봅시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른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성전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었도 십일조나 우양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먼곳에 있으니 그 물건을 가져가기가 힘들죠. 그래서

 돈으로 바꾸어 성전 가까이 가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구입하여 십일조를 드리고, 우양의 처음난 것도

구입하여 여호와께 드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매매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 입장에서는요. 상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죠.

 

그래서 마태복음21장15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하시는 일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물론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것도 이상했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쫓아내신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신명기14장에 보면 분명히 말씀대로 성전에서

매매할 뿐이데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말입니다.

 

이 처럼 예레미아 시대나 하박국 시대, 물론 비슷한 시대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들은 말씀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성전이 완벽하게 있고 제사가 완벽하게

지내는 이상 무엇이 문제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버린 것도 아니고,

우리가 보기엔 악행을 행하는 것이 나쁘다고 보이죠.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악행을 행치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얻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붙들고 있었고 말씀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성전에서 매매할 뿐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외부에서 죄를 말씀하시기 전에는 죄를 모릅니다.

 

아니 외부에서 죄를 말씀해서 죄가 죄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때나 하박국 선지자때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죄가

무엇인지 지적해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상히 여길 뿐입니다

 

죄가 뭔지 모릅니다.

 

오히려 죄용서함을 받는 곳인 성전에서 빠져

나온 소경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습니다.

죄용서함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전은 더 이상 죄과 용서되는 곳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들의 집단, 강도 소굴에 불과합니다.

 

그 모습이 성전에서 말씀을 이용해 매매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에 바리새인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요. 예수님 당신말이 맞아요. 성전은 부패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무식하게, 사람들을 내쫓고,

의자를 둘러 엎으시는 것은 교양이 없잖아요.

 

누가 당신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겠어요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도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셨습니다.

 

죄도 모르는 자들이 죄를 지적하게 만들어 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감추었던 죄를 다 들추어 내십니다.

 

바벨론을 통한 유다의 심판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심판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사는 하박국만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 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

원하시는 일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신 분이 지옥에

보내는 당사자란 사실은 어느누구도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죄를

 용서하시기에 단지 구원하시는 예수님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 지옥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고통속으로 몰아넣어신다는 사실입니다.

도무지 믿어지십니까?

 

악하고 악한 바벨론, 유다나라보다 더 악한 자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심판을 받는 것은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겠죠.

특히 성전을 붙들고 있는 자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신 분이

구원하실 뿐 아니라 지옥보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누가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간다고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자들 말입니다.

이들은 철썩 같이 믿고 있죠.

 

자신들은 천국갈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레미아시대의 제사장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전아닌 것을 성전으로 붙들고 있는 저들이나,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을 붙들고 있지

않는 저들이나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기자신만을 붙들고 있습니다.

 말씀을 이용해, 성전을 이용해, 예수님을 이용해,

십자가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만일 하박국 선지자처럼 영원한 언약,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맺으신 영원한 언약을

믿는 자라면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눈에는 악한 유다나 더 악한

바벨론 모두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함으로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