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구름 나그네 2010. 10. 18. 21:16

율법과 저주 그리고, 복

 

학개2장10-23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만든

 법을 어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운전하시는 분들은 더 많을 것입니다.

물론 차 없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고요.

 

교통법을 어길 경우 어떻게 됩니까?

처벌을 받습니까 받지 않습니까?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통경찰이나 카메라 단속에 걸릴

경우엔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교통경찰이나 카메라 단속에

 걸리지 않으면 처벌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먹고 운전해도

잡히지만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술을 엄청 먹고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답니다.

 

물론 술에 취해 있으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사태 파악이 잘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찌되었던 빨리 차를 버려두고 집으로 갔답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을 보냈답니다.

 

다른 사람이 운전한 것으로 한 것이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차량이

 그렇게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물론 처벌도 받지 않았지요.

 

남을 죽일지 모르는 살인 운전인 음주

 운전을 해도 잡히지만 않으면 처벌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 그렇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잡히지만

않으면 그 사람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건을 훔쳐도 잡히지만

 않으면 처벌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법이지요.

 

이 땅에서 위법을 하더라도 잡히지만

않으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땅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드라마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것은 분명 땅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땅의 법칙과 다르게 작용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에게 물으신

 것은 율법에 대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에게 율법에 대해 묻습니다.

 

제사장들은 율법에 있어서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묻는 것이지요.

 

율법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제사장 직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이들의 대답을 보면 언제든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자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한 질문과 제사장

들의 답변을

봅시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것이 율법입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 율법을 이용하여 무엇을 고발하려고 합니까?

 

14절 말씀입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백성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제사장들은 율법을 너무나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율법을 어기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을 지켰습니다.

 

학개 선지지가 언급한 그러한 율법은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율법 아닙니까?

아주 쉽지요.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을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지 않으면 되잖아요.

 

시체를 만진 자가 다른 것을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부정하다는 말은 깨끗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일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지킬 수 있는 율법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여호와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을 어겼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부정하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14절에 나오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이는 곳,

손닿는 곳 모든 것이 부정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 상태가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대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봅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자신들 나름대로 율법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율법을 지키는 당사자가

부정한데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로마서 5장12-14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이 왕노릇 했습니다.

 

사망이 왕노릇했다는 말은 아담과 같은 부류의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있으나 없으나 사망은 늘상 왕노릇했습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사람이 죄 안에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거야 율법을 안 지켰을 때의 문제지.

율법을 지키면 죄에 대해서 달리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로마서 5장에서 이런 식으로 말했을까요?

 

로마서5장20절에서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이 가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학개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율법을 근거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죄인임을 선언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학개서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죠.

이렇게 말해도 어떤 인간들은 율법을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다시 물으면

 

이렇게 물으면 그야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이지요.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

그러면 성령은 왜 보내 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야 방금 이야기 했듯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기 위해서죠라고 할 것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

 말고 그냥 성령 보내 주면 되잖아요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그러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안되잖아요할 것입니다.

 

그러면 죄문제를 죄 용서했다라고 선언해 버리면 되잖아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을 자가

 필요하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계시는 분이시네요. 라고 하면.

 

그렇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계시는 분이시죠. 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너무 유치하게 대화의 내용을 끌어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 말씀은 구약전체를 총 정리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보면 소위 산상설교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도무지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말씀만 하십니다.

 

예를 한 가지만 들어 봅시다.

 

마태복음 6장31-34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말씀이야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기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이 얼마나 오래 머뭅니까?

 

이 말씀이 우리 중에 역사하셔서 얼마 동안 기쁨을 줍니까?

왕비호처럼 포에버 합니까?.

 

구약의 말씀이든 신약의 말씀이든 말씀과

 나 자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들이 나 자신과 상관이 없습니까?

 

당연합니다. 나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과 상관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신 거라 말입니다.

 

그러면 말씀은 누구와 상관이 있습니까?

다시 로마서5장으로 가 봅시다.

 

21절입니다.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있습니다.

말씀 자체는 처음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말씀입니다.

 

범죄한 첫 아담조차도 그 자신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어집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율법 없을 때에도 사망이 왕 노릇했고,

율법이 옴으로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생이 어떤 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법을 어겼을 때 걸리면

범죄가 되고 안 걸리면 범죄가 성립 안 되는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이 있다는 자체가 너희들은 다 죄인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지옥가야 마땅해 라는 선언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니 마니 할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니 학개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부정은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도, 무슨 짓을 해도 부정합니다. 죄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예수님을 믿으니 내가 하는 설교, 전도는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죄가 아니라면 말씀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가 설교를 해도 죄로 드러나고, 기도해도,

전도해도 다 죄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죄가 아닌 것은 주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3장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증거한 것은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4-2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학개 선지자가 언급한 율법도 주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학개 선지가가 언급한 모든

 내용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린 복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부정하기에 저주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저주받는 것을 별로

새삼스럽게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부정하기에 레위기에 의한 저주는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저주가 없었다면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셔서 복을 주신 것이지

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복을 준 것이 아닙니다.

 

19절을 보게 되면 그러나 오늘 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다시 마태복음 5장으로 가서 보면 누가 복을 받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이런 자가 복을 받는다가 아니라 이런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복 받은 자는 결국 11,12절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것과 예수님 때문에

욕얻어 먹는 것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애통하는 것과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3-10절을 보면 마치 도 닦는 사람 되어라는 느낌 안 듭니까?

 

그런 생각 들어야죠. 그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죄인들이 가지는 마음이니까요.

 

그러나 11절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한 것,

온유한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다 엉터리다.

 

 다 죄다라는 것은 확실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서를 통해 기대한 복, 소위 부자 되는 것, 부농 되는 것,

그런 것 아닙니다.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참 복음 예수님 때문에 욕 얻어먹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한 것, 예수님 때문에

 애통하는 것, 예수님 때문에 온유한 것,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것, 이런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학개시대에야 물론 물질의 복을 주셨겠죠.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갔겠습니까?

그러니 복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체는 다 거짓입니다.

그 예수는 우상예수입니다.

 

지옥 갑니다.

 

성도는 이미 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 받았음을 온 몸으로 전하며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23절을 봅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를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도란 스룹바벨과 같은 자입니다.

여호와의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로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이런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심령이 가난한 복이, 애통하는 복이,

온유한 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이, 긍휼히 여기는 복이,

마음이 청결한 복이, 화평케 하는 복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복이 철철 넘쳐 흐를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얻어 먹는 복, 핍박 받는 복,

 거짓으로 우리를 거스르며 악한 말 듣는 복이 넘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개

구름 나그네 2010. 10. 10. 17:16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학개2장1-9

낯선 도시 한가운데 번잡한 거리에 서 있어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말씀을 떠나 버리니 그렇습니다.

말씀을 떠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게 되면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인간들은 늘상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감탄하고 즐거워합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다닙니다.

 

여행을 가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을 ,

그리고 몸으로 느끼는 것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놀라워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아니면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이러한 것을 경험합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생존해야하는 현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돈이 오가는 곳, 내 몸의 불편을 느끼는 현장에서는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가 부끄럽습니다.

 

거대한 돈의 흐름 속에 나는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 죽음 속에 나도 그 행렬에 끼여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죽는 사람들, 아직 내 차례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 나의 차례가 올지 모릅니다.

 

거대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 미약합니다.

왜 자꾸 이런 생각을 들게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돈입니까?

힘입니까?

능력입니까?

사람은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삽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으로 삽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저버립니다.

 

말씀을 내팽개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거대한 현실 속에서 말씀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정말 하찮은 것입니다.

 

천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집니까?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 자신이 말입니다

.

이번에 여행을 가보니 나무도 잘 자라지 않는, 사람이

 살수 없는 곳에 바람을 이용하는 풍력발전소를 보았습니다.

차를 타고 30분을 달려도 여전히 풍력발전소 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위대하다라고 말입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이 필요 없다.

 

십자가의 피복음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합니다.

 

얼마 전에는 지구 같은 행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생명체가 살 확률이 100%라고 하나요.

 

물론 거리가 수십조광년인가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엉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사람이 위대할 뿐입니다.

이런 것들 앞에서 성도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기껏 해봐야 말로서 믿는다고 할 뿐이지 않습니까?

 

무당처럼, 아니면 거짓 선지자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고.

 

그냥 믿습니다. 말씀이 이렇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학개 선지자가 뭐라고 말합니까?3절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 것인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성전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눈에는 지금의 성전이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비교 대상이 없었다면 , 그냥 지금 지어진

 성전만 보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본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현재의 성전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게 됩니다.

이게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인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4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굳세지

않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손발의 힘이 다 풀릴 정도로 힘이 쫙 빠진 상태,

맥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5절을 봅시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참으로 희한한 말씀 아닙니까?

 

출애굽이야기를 끄집어내십니다.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너희 중에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거꾸로 생각하죠.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우리 중에

 머물러 있는데 뭐가 두려운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두려움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과 여호와의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지어진 성전을 보면서 두려움 속에 빠져들어 갑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또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6-9절을 읽어 봅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이니라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금 현실은 장차 이루실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이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임을 보여줄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솔로만 성전이 초라했고 둘째 성전이

 더 화려 하고 웅장했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초라한 성전과 여호와의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이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초막절이 무엇입니까?

 

무사히 추수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모여 감사하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선포라고 생각해 봅시다.

듣는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꼴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감사하기 위해 모인 초막절 마지막 날

 축제인데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우울하고, 슬프고, 초라한 축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학개 선지자는 입만 살아 있습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라.

지금 스스로 굳세게 할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누가 열 받게 할 일이 있습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으면

제대로 약속을 이루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초라한 성전.

6,7절에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그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런 말씀이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거대한 나라가 여전히 떡 버티고 있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데 이런 말씀이 들릴까요?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신다.

지금도 우리는 자주 듣잖아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세상을 불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 보냅니다. 믿는 자만 천국 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집니까?

 

거대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생존세계에 살면서 이런 말씀이 믿어집니까?

 

이런 말씀이 가끔씩 여러분에게 들려집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볼수록 우리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는 하나님임을 알아가게 됩니다.

 

무엇인가 믿을 만한 것들을 주시면서 믿게 하시면

될 터인데 자꾸 믿지 못할 상황만 만들어 내시니 말입니다.

 

요한복음7장37-38절을 봅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보세요. 학개서의 예언의 말씀이 요한복음7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의해 이루어짐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21절에서는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나중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됩니까?

맞습니까 틀립니까?

 

안 맞잖아요.

분명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헤롯성전을 말합니까?

 

헤롯성전은 아니지요.

말씀에 따라 지어진 성전이 아니잖아요.

 

참성전이신 예수님의 영광이 스룹바벨성전의 영광보다 더 큽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이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커 보입니까?

 

차라니 스룹바벨성전이 더 커 보이지 않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이 뿐만 아닙니다.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죽음의 길로 갑니다.

 

주님되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 그대로 걸어갑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라해 보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조롱거리입니다.

정말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하루살이 같은 자들입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살았던 삶입니다.

 

그러니 학개 선지자의 선포는 우리에게 도대체 어떻게 들려집니까?

희망, 희망, 희망의 메시지로 들려집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희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힘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 성전, 분명 학개 선지자 말에 의하면

이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성전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심지어 성도가 보기에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참성전이 오심으로

이 땅에서는 완전히 왕따 당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정말 초라한 삶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전이 되는데

 그 꼴을 보면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영광스럽다고 하겠습니까?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이 성전입니까?

영광스럽습니까?

 

오히려 초라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말씀 속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도를 보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학개서를 보게 되면 이 말씀이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참성전이신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의 영광스러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스러움과 정 반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 오히려 영광입니다.

 

그러니 죄인들이 생각하는 영광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립니다.

 

여러분 제발 세상을 보실 때 십자가 피 안에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생존 경쟁가운데서,

 

 인간들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도 여러분은 결코

초라하거나, 미미한 존재가 아님을 알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의 외침은 그 외침을 듣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외침은 여호와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여호와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방금 제발 세상을 보실 때

십자가 피안에서 보라고 부탁드린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친히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자는 세상을 볼 때 오히려 세상을 만만하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