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구름 나그네 2007. 7. 16. 12:22
 

속이는 자

창세기27:15-29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성경에 과연 이런것도 기록되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 리비가와 야곱은 철저히 준비합니다.

15절에서 리브가가 맏아들 에서의 가장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힙니다.

또한 염소 새끼의 가족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밉니다.


희한하게도 염소새끼 가죽이면 에서의 손과 목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떡과 별미를 야곱에게 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삭 아버지께 나아가 내 아버지여 라고 부릅니다.

이삭이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면서 내 아들의 네가 누구냐를 묻습니다.


목소리는 에서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이삭이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지. 어찌 되었든 아버지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몸상태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은 맏아들 에서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명하신대로 내가 했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합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속히 잡았느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이삭이 속아 넘어가야 하는데, 한번더 확인합니다.

가까이 오게 해서 만져보고 확인을 합니다.

이삭이 만저보고 하는 말이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얼마나 완벽하게 변장을 했는지 만져보고도 알수 없을 정도로 야곱이 에서처럼 변장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더 묻습니다. 네가 참 내아들 에서냐?

야곱은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그러하니이다.


그러자 이삭이 야곱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난후 그에게 축복합니다.

그러나 축복하기 전 다시 야곱을 가짜이 오게 하여 그에게서 냄새를 맡은 후 최종 확인 후 축복을 합니다.


27절 하반절부터 29절입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발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에서가 평소에 얼마나 사냥을 하러 이곳 저곳을 다녔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발이 밟는 곳이 다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라는 것은 곳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해 많은 양의 이슬이 내려 가뭄에도 식물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식물의 생존에 절대 필요한 이러한 이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됩니다(신 33:28;잠 3:20),

그리고 하나님과 왕의 총애(잠 19:12)를 이슬이 내리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시 133편).


이 말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복은 이런 식으로 실질적으로 풍년 농사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 그 복이 하늘의 복으로 대체됩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의 복이 됩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니리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의 주가 될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그대로 야곱 즉 에서로 변장한 야곱에게 이런 축복을 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보겠습니다.


리브가와 에서는 완벽한 범죄를 저지럽니다.

그 범죄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도 사용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아야 하는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도 쉽게 이용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리브가와 야곱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표가 있다면 모든 성경 말씀을 우리 자신이 유리한대로, 목적 하는대로 끌어당겨 해석해 버립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리브가와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에서를 속이는 것일까요?

물론 그 배경도 깔여 있는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속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살펴 보게 되면 결코 이런 목적이 아닙니다.

야곱은 본성적으로 약탈자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지고는 못사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특히 이런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둘이 마음을 합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실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물론 야곱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보면 야곱도 부정됩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했으니 당연히 야곱이 큰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야곱과 에서를 보는 전제입니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성경을 보게 되지만 결코 야곱이 에서보다 강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더 멀리 보라고 하시지만 더 멀리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말씀을 그냥 인간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성경말씀의 성취는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곱이 에서를 주라고까지 표현하며,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의 본 의미가 역전되어 버립니다.

장자권을 누가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장자권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섬기는 자가 되며, 이 섬기는 자야 말로 참으로 큰 자가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이나, 에서, 야곱이나 리브가 모두가 말씀을 자신들의 욕심대로 이용해서  그 말씀을 성취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목적,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말씀을 통해 인간들의 본질을 들추어 내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근본 사고방식은 큰 자가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복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이야 말로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이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보게 되면 알겠지만 주라는 것은 섬기는 자가 주가 됩니다.

자신을 죽인 자를 위해 대신 죽임 당함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는 분이 주가 됩니다.


우리들 생각에도 주라고 하니 왕 노릇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이 왕 노릇이라는 것은 분명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거할 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의 주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는 자, 괴롭힌 자들을 위해 희생당하고, 오히려 그 희생이 그들을 살리는 것이 주님이 하실 일이지요.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하면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요. 그런데 섬기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20장25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지금 이삭, 에서, 야곱, 리브가는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자체가, 즉 속이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축복받겠다는 자체가 이 생각 외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축복받는 것을 마치 권세를 가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27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주에 누구든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자리 달라는 제자들, 이것에 대해 분을 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 모두가 착각을 해도 이만 저만 착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이 탐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성도란 성경말씀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것으로 이용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써먹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이런 모습이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 인간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사용하시어 우리 자신 속에서 십자가지신 주님의 능력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며,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방식으로 그 말씀을 자꾸 끌어 당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들 속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꽃피워 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강해

구름 나그네 2007. 7. 16. 12:21
 

죄인을 사용하시는 주님

창세기27:1-14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들이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좋아 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까라는 생각을 우리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어떤 사람입니까? 약속의 씨,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복중에 말씀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축복을 에서에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취향대로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어떻습니까?

리브가도 역시 자신의 취향대로 야곱이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25장28절을 보면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어찌되었는지 자식 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대로 한쪽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이미 대결구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야곱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삭은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이삭 자신이 누구에게 축복을 하느냐, 누구에게 저주를 내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축복이라는 것은 단순히 복을 받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로 서게 된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믿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복이 이삭이 누구에게 축복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복을 이어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삭과 리브가는 너무나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이삭이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과 에서가 태중에 있을 때 하신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이 에서를 축복해 줘 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역시 에서를 축복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 아닙니까?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로서 하는 축복과는 개념이 다른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리하는 축복권을 아버지 이삭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브가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니까 무조건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어떤 사람은 리브가가 믿음이 있었다고 해석을 하는데, 물론 그렇게도 볼수 있지만, 25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기 보다는 둘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 축복받기를 원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니 12,13절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 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자신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받을 저주조차 자신이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야곱을 얼마나 편애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마음 속에는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조차도 리브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이 반드시 축복받아야 한다는 이유속에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자신이 바라는 욕망을 이루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냥 에서를 축복해 버렸어도 될 터인데 왜 사냥하여 별미를 먹게하여 자신이 죽기 전에 마음껏 에서에게 축복하게 하라고 합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지요.

자신의 마음이 별미를 먹고 흡족하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기분 좋음을 마음껏 자신이 사랑하는 에서를 축복하는 것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 제목을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수 속에서도 언약의 꽃은 피고.


뭔가 알기는 좀 아는 것 같은데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 이들은 단순히 실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들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씀이 있어 보았자 이 말씀은 결국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창세기 25장23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 말씀을 이삭과 리브가는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긴다라고 하니까 우리는 곧장 형이 동생을 섬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큰 분입니까 작은 분입니까? 큰분이시지요.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작은 인생들을 섬기시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너무 많이 뛰었습니까?

그러면 이후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한 대 얻어터진 이후 형에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이전까지는 자신이 이기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을 두고 자신의 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께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만일 이것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먼저는 에서가 야곱에게 무릅을 꿇어야 하고 에서가 야곱에게 주라고 해야 하고, 에서가 야곱으로부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성경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큰자가 어린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무조건 야곱이 주가 될 것이라고 단정을 해 버립니다.


물론 맞습니다 마는 이 말씀이 그렇게 간단한 말씀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주가 되는 것은 세상적인 주는 아닙니다.


지금 이삭이나 리브가, 야곱이나 에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세상적인 주로, 막강한 권세와 권력, 재물을 누리는 인생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은, 결국 누가 큰 자인고 하면 궁극적으로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0장25-2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남을 다스리는 자리, 즉 세상적으로 한 자리 차지 할 수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이방인에게 넘기움을 받고 능욕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한자리 차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 이들이나 제자들이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심대로 끌어 당겨 이용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신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려고 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그렇습니까? 이삭은 리브가와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그 말씀을 해석했다면 이삭이 당연히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롬9:13)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조건 이삭의 믿음없음, 말씀 무시를 이야기 할지모릅니다마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의 일을 하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 이들 모두는 오늘 본문에서 불신자로 나타납니다.

죄인들로 나타납니다.

제가 왜 죄인들이라고 말씀드리는고 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어떻게 이루실지 이들은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고 이들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루시는가?

바로 오늘 본문처럼 이루십니다.


죄인을 사용하시어 그 죄인들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말씀을 지키고 성취하려고 덤벼듭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좋아하는 그런 탐욕에서부터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죄인들의 행동속에서, 결정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인간들의 흔적속에서, 즉 인간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그 속에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임을 밝히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서 하신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써지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어떤 자로 드러나는고 하면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며 예수님만이 의로운 분으로 드러나는 식으로 성령님께서는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완전히 변화하여 굉장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깝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의 생각과 같은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죄를 성령님께서는 드러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 발자국은 바로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의 삶을 되풀이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필요로 끌어당기고, 십자가도 내 필요로, 내 욕심을 채워주는 것으로 수시로 이용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안할려고 해도 말씀을 조금만 떠나 버리면 우리의 탐욕이 불꽃놀이할 때 쓩 올라가는 것처럼 쓩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을 사용하시여 주님의 언약을 이루심을 말입니다.







 
 
 

창세기강해

구름 나그네 2007. 7. 16. 12:20
 

여호와 이름

창세기26:17-35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그랄 골짜기로  쫓겨납니다.

그곳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이전에 분명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인데 왜 다시 파는가 보니, 그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물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4장에 보면 야곱의 우물이 나옵니다.

12절을 보면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우물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특별이 우물을 누가 팠느냐, 또한 그것이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 그 곳의 주인이 누구냐를 말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이 다 메워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삭이 다시 그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처음 우물은 에섹이라는 우물입니다. 20절에 나옵니다.


왜 에섹이라고 불렀습니까?

에섹의 뜻은 다툼이라는 뜻인데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동하여, 실은 쫓겨났다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삭은 블레셋 지방이 흉년을 피해 들어와 있는 상태이고, 이 땅 주인은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싯나라는 우물입니다.

이 뜻은 적대를 의미합니다.

또 다툼이,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파는데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합니다.

르호봇이라고 한 이유는 22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그러나 이곳에서도 잠시뿐 다시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 갑니다. 브엘세바는 이전 아브라함이 자신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 블레셋 족속 그랄 왕 아비멜렉을 책망했던 곳입니다. (창21:22-34)

그리고 이곳에서 아브라함과 그랄왕 아비멜렉이 서로 언약을 세운 곳입니다.


실상 나그네 되는 아브라함에게 오히려 땅 주인격인 그랄 왕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자신들에게 후대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입니다.

창세기21장22-23절입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그래서 아브람도 맹세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22장에서는 브엘세바에 살았는데 23장으로 넘어오면 다시 가나안 땅 헤브론에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헷족속 땅입니다.

이곳에서도 물론 아직 자신들의 땅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약속만 있습니다.


이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말입니다.


그리고 26장에서는 다시 흉년 때문에 헤브론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떠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우리들이 보았듯이 본래 이삭의 계획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계획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블레셋 땅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어제 본 3-5절입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시고 블레셋 땅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복 받음에 대해 싫어 하여 이삭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떠나가도 여전히 다투고, 싸우고, 또 쫓겨 갑니다.


그러고는 이제 브엘세바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약속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절입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들 듣고 이삭은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것은 제사드리는 단을 쌓았다는 뜻인데 이렇게 한 이유는 나중에 가면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 제도가 주어지는데, 그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이유를 알며 제사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10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냥 힘이 나서 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믿음의 내용이 분명 담겨 있는 단을 쌓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냥 찬양했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의 찬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완전히 이루십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 옵니다.

아비멜렉과 그 일당들이 이삭을 미워해서 결국 브엘세바에 왔는데, 어찌하여 왔느냐고 묻습니다.

저들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니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비록 떠돌이 같이,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요원하고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이 요원하지만 이러한 아비멜렉의 행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 땅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이 될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흉년도 맞게 되고, 적들로부터 미움도 받고, 쫓겨다니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만다는 사실을 이삭은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이 보아야 할 중요한 핵심입니다.


적들이 굴복하는 것도 이것에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몸을 드리심으로 이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이전까지의 적들은 눈에 보이는 적들이었지만, 실상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배후의 세력이 분명히 밝혀 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셔서 성령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요1서3:8).


그렇다면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까?

이삭처럼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살게 되니 당연히 이삭처럼 핍박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실상 아비멜렉과 같은 자들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의 대표주자들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28,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핍박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핍박하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종이 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17절입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자신들의 종을 삼기 위해 열심을 내고, 결국 이들이 꺼집어 내 놓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행위를 믿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자 되신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 삶이란 실상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처럼 쫓겨다니기도 하고 항복받기도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쫓겨가는 곳 마다 복음을 전했고, 그런 곳에서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들을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미움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도 이삭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쫓겨다니더라도, 아니면 복음에 항복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 모든 것이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되신 예수님의 능력임을 믿으며 오늘 하루 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