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4
지층
고린도전서14장39-40
지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여러분들이 다 배웠을 것입니다.
지층이 만들어지려면 그 층을 구성하는 내용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지층이 만들어집니다. 쌓이는 퇴적물이 많을수록 지층은 두꺼운 지층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우기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나름 지층을 만들고 있습니다. 흘러온 세월만큼의 두꺼운 지층을 만들고 있지요. 그 속에는 자신들이 벌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지층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 여러 지층이라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세계사를 읽어보면 그 특징이 뚜렷이 나옵니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전쟁의 역사로 보입니다. 영토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는지 힘의 논리에 따라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속에 쌓인 퇴적물은 뻔합니다.

어떤 퇴적물이 쌓였을까요?
유명한 사람이든, 훌륭한 사람이든, 뛰어난 장군이든, 임금이든, 왕이든, 과학자든, 철학자든, 신학자든 힘이 없으면 망하든지 죽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연역법으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주님은 연역법이 아닙니다.
귀납법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간접경험이든 직접경험 이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자체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데아를 이야기 한다 해도 그 이데아에 대한 설명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서 할 뿐입니다.
신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여행을 해 보면 성당마다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근거해서 그린 그림입니다마는 누구나 다 이해되는 그림들이잖아요. 그런 그림은 오래된 절간에 가도 다 있습니다.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저 세상은 없습니다. 죽음 후의 세상은 항상 지금 현 세상과의 연속성을 갖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힘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어 보고 그 다음 죽으면 천국 가겠다는 것이지요.

세계사나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아주 단단한 지층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고 그런 시대에 살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역사라는 지층을 연구하고 보면서 자신은 지금의 지층위에 새로운 지층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저께 텔레비전을 보는데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지방대학 출신인데 한국에서는 갈 만한 직정을 잘 찾지 못하니 일본에 가서 취직을 했다는 것입니다.

낯선 땅에 가서 직업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단순히 생존 때문이 아니잖아요. 자신만의 단단한 지층을 만들기 위해서잖아요. 만들어서 뭐하려고요. 그건 잘 몰라요. 그 지층이 만들어지면 새로운 지층을 또 만들기 위해 그 지층에서 탈출하겠지요. 이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지층,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영토 만들기입니다.
자기 영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탈주하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름 자신이 자신의 자리, 영토를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낯선 것이 덮칩니다. 바로 죽음이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비로소 알게 되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자신이 만든 지층, 자신이 만든 영토가 아니라 외부적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이렇게 내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기를 무서워 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걷어 내기 위해 자신만의 영토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겁니다.
오늘은 이쪽 놀이동산에서 놀다가 내일은 저쪽 놀이동산에서 놉니다. 그러다 심심하면 다시 다른 놀이동산으로 옮깁니다.

자신이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제가 앞서 인간들은 연역법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했잖아요. 물론 귀납법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 귀납법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의 귀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주님이 누구시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나름 만들어내는 영토들, 나름 자리 잡아 그곳에서 말 타고 즐겁게 뛰어노는 고원조차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왜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는 인생,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는가에 대한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왜 아담과 여자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만들었습니까?
왜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구원했습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정말 배에 탄 짐승들보다 못한 사람들입니까?
왜 아브라함만 선택했습니까?
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왜 이방인들은 지옥가야 마땅합니까?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입니까?
왜 모든 것이 예수님 마음대로입니까?
왜 우리에겐 어떠한 자주권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지층을 보게 되면 화석들이 나오는데 그 화석들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지요. 확정된 자리입니다.

성도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성도 아닌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가 확정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자리인지 긍휼의 자리인지 그 자리는 내가 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화석처럼 고정되었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정되면 좋은데 우리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고정된 것이 아니지요.

어저께 바닷가에 가보니 녹조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듯이 우리의 삶이 그렇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놀이공원, 안전하고 더 이상 불안감이 없는 놀이동산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물론 이것도 얼마 갈지 모릅니다.

사사기 2장21-23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이 말씀만 들으면 우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개고생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 왔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곳에 있는 자들을 싹 쓸어버리시고 지상낙원을 건설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주 의도적으로 열국들을 속히 쫓아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들 시각에는 분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열국들을 진멸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해석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들과 안 맞아요.

우리를 이 더운 여름을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직장을, 왜 이런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우린 나름대로 할 말이 많지요. 제가 대학전공이 이러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전공이 그러한데 그 전공한 친구들이 다 나와 동일한 직장에 다닙니까?
그것은 아니잖아요. 내 나름대로 나만의 층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피 땀 흘려 노력했습니까?

지금의 나의 사업이 누구 때문에 여기 이 자리까지 왔습니까? 지금 장사가 안 되는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압니까?
정치가들이 잘못 정치해서 그런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름대로 나만의 지혜를 발휘해서 이 어려운 시기에도 돈을 벌고 있다는 겁니다.

우린 우리의 수고밖에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께서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진 이유를 몰라요.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하셨는데 우린 평평한 고원을 원합니다. 말을 타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초장을 원하지요.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내가 만든 자리고 이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은 자신들의 힘에 의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곳에 힘 있는 자들을 진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십년 동안 뺑뺑이 돌았으면 철이 들어도 한참 들어야 하는데 인간은 안 됩니다.
사십년이 아니라 사백년 아니 육천년 동안 뺑뺑이 돌아도 여전히 처음 그 자리입니다.

첫째 아담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나름의 영토 만들기에 급급합니다.

방언과 예언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차라리 방언과 예언을 안 주시면 좋잖아요.
그런데 또 하는 말이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느 인간이 적당히, 질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해야 적당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질서대로 하는 겁니까?

그러니 차라리 방언 예언 없애버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번거로운 것이 싫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주가 되는 꿈이라고 부모들이나 형제들이 해석해 주었잖아요.

우리가 만일 요셉이라면 주가 되는 과정이 어떠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요셉도 그런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천국 간다면 이 세상에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싹 걷어 내 버리고 보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녹조를 청소하는 배가 싹 걷어 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은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고, 노예로 팔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다 하더라고 그의 신분은 여전히 노예일 뿐이지요.
뿐만 아니라 주인마님의 계략으로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야 이미 요셉이 그 다음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요셉의 삶을 찰나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것도 찰나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린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수에 칠 가치도 없습니다. 999년을 살아도 수에 칠 가치가 없고,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린 이 거추장스러운 인생을 살기 싫잖아요. 바로 이겁니다. ‘살기 싫어’ 하라고 이 삶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살기 싫어라고 준 삶을 살기 좋은 나만의 저 푸른 초원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 우깁니다. 물론 잠시 뿐입니다. 롯데가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이 헛됨을 알라고 많은 돈을, 대기업을 주셨음을 알아야 하는데 어디 죄인들이 그렇습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다른 ‘말을 마음껏 달릴 초원’을 꿈꾸겠지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날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우린 이 사건을 보면서 사복음서를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지 말고, 십자가지지 말고 성령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이런 신앙생활을 꿈꿉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는 거추장스럽습니다. 그야말로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얼른 걸림돌인 십자가를 저 멀찍이 치워버립니다. 그리고 나만의 푸른 초원을 만들기 바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여준 죄인의 모습은, 예수님 십자가 지신 모습은 모두 다 과거로 돌려 버립니다. 오직 나에겐 미래만 있다. 과거는 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식입니까? 나를 죄인으로 가두어두기엔 기분이 안 좋아요.

나름대로 말을 타고 이 고원 저 고원을 뛰어 다녀야 살맛이 나는데 한 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너무나 지루하고 자기 본성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이용해 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증인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다 받은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 받은 인생이 꼬락서니가 영 말이 아닙니다. 꼬라지가 영 말이 아닐 때 주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만든 초원이 무너질 때 진정 구원이 임합니다. 제자들의 꿈이 좌절되는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작렬합니다.

 
 
 

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4
잠잠하라
고린도전서 14장34-40
3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절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장16절에 보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선악과 따 먹은 후 부부사이에서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는 것, 즉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에 이것이 무슨 선악과 따먹은 것과 관련 있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여성권리가 과거와 달라진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폐기 처분해야 될 말씀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말씀은 삭제해야 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이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히 있어야 하는 말씀으로 연결하는 것은 주님께서 좀 오버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교회에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했거든요.
여기에 나온 여자들은 단순히 결혼한 여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도 포함되고 모든 여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여자들을 어떻게 보는 고 하면 남편의 아내로서 여자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난 노처녀인데요, 난 과부인데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과부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개인적인 것을 내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안목과 우리 인간들의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여자들은 모두 남편의 아내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교회에서 여자들을 잠잠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자들은 또 덤벼듭니다. 그래? 주님께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으니 나 입 다물고 있겠어. 그러면 말씀 잘 지키는 것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여자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여자들의 역할은 필히 여자의 후손과 관련된 역할입니다.
그 역할이 바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겁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남편 되신 예수님께 복종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미 주님의 몸된 교회가 있는데 아직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유효합니까라고 반문하겠지요.
이런 반문을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용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하신 말씀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사도바울의 개인적 이야기로 듣겠다는 것이 이런 태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남편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팔짱끼고 이 말씀을 구경합니까?
그것 아닙니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가 말이 많아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을 증거하는 여자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그 삶을 고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자들은 교회에서 질문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배우려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묻고 배우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짓이랍니다. 좋게 말해 부끄럽다는 말이지 나쁘게 말하면 더럽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자체가 더러운 짓이라는 말입니다.

진짜 주님이 해도 너무하시지 여자가 질문하는 것조차 금해야 하느냐 하겠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여자, 즉 아내가 있지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자기 자신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궁금하면 교회에서 질문할 수 있잖아요. 이게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우리의 몸이 누구 증인인지도 모르고 오직 자기 증거하기 바쁘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27장1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이 많겠지요. 우리 같으면 얼마나 많은 변명을 하겠습니까?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는 주도권을 빌라도가 갖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말에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 잠잠하셨겠습니까? 아니면 말할 권세가 없어서 잠잠하셨겠습니까?

이사야 53장 7절을 봅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이렇게 잠잠하신 이유는 마땅히 형벌 받을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잠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뜻 이루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지셨습니다. 잠잠하셨습니다.

여자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자의 후손, 즉 남편 즉 진짜 남편이 누군지를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은사가 남자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방언과 통역, 예언의 은사들이 여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가만있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말하고 싶겠습니까?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겠지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36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고 묻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고 합니다.

분명 사도바울이 인정합니다. 여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임하게 했으면 그 말씀을 교회에 전하라고 임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서 말하지 못하도록 해 버립니다. 말하려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하라는 겁니다.

무슨 이런 은사가 다 있습니까? 은사를 주셨으면 써 먹으라고 주신 것이지 그것 집에 가서 남편에게 이야기 할 것 같으면 왜 그런 은사를 주셨는가 말입니다.

우린 은사를 써 먹을 용도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생각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은사의 용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도 만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얼마나 더 내어 놓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그 내어 놓는 것이 주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사도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이들을 한꺼번에 콱 눌러 버립니다.
너희 여자들아 교회에서는 잠잠하라. 내 권위가 제일 크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그냥 사도바울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도 계시 받았다. 나도 방언 받았다. 나도 통역한다는 여자들이 난리를 치지 않겠습니까?

37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미 방언 한다는 사람, 예언한다는 사람,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라도 만일 방언 받았고, 예언 받았다면 이런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누구든지 사도바울의 말을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은사를 받아도 사도바울의 이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우린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나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 해 주면 그렇게 좋아합니다.
당신은 태어난 자체가 저주요 저주를 보여주는 인생을 살다가 저주의 끝인 죽음으로 끝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우린 무엇을 해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남자로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항상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왕이 된 것도, 자신이 꾼 꿈도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느부갓네살 왕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가 그 위치에 올라가면 아마 느브갓네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조차 듣지 싫은 우리들인데 이미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리에 앉았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아침 드라마에 어떤 회사의 회장이름이 나대기입니다. 작가가 누군지 이름을 참 잘 지었어요.
자기 마음대로 나댄 결과 그렇게 회사 회장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나름 나댑니다. 나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만의 세계, 자기만 높아지기 위해서 나대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 조차도 나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참 희한하지요.
주님 쪽에서 뭐든지 주시기만 하면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갖고 나댑니다.

율법을 주시면 율법으로 나대고, 성전을 주시면 성전을 갖고 나댑니다.

민수기21장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 뱀을 보매 원망하는 백성들을 물게 하셔서 죽은 자가 백성 중에서 많았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여 죄를 범했다고 하면서 모세에게 여호와께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나름 나대다가 호대게 당했습니다.

그래서 놋뱀을 만들어 놋뱀을 장대위에 달아 놋뱀을 쳐다보는 자들은 다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땐 놋뱀이 이들을 살렸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런 것을 잊어버릴까요?
잊지 않습니다.
열왕기하18장3,4절을 봅시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명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느후사단이라는 말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의 이름입니다.

놋뱀줘서 살려 주니 놋뱀 들고 나대는 것 한 번 보세요.

남자로 여자로 만들어 주시니까 남자로 나대고 여자로 나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인 내가 중요하지, 여자인 내가 중요하지 십자가 지신 주님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우리아 장군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나대지를 않습니다.
물론 나댄다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번보세요. 다윗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암몬과의 전쟁 중인 우리아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여호와 전쟁 밖에 없습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남편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자가 우리아입니다.

왕으로서 나대다가 왕 역할을 제대로 못한 다윗과 대조되는 사람이 바로 우리아입니다. 다윗의 나댐으로 인해 죽은 자가 우리아입니다.

우리를 여자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남자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지금 받은 것들이 많습니까? 왜 그것을 주셨습니까?
나 자랑 하도록 나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주신 것들은 주님의 피를 증거하라고 주셨습니다.

에베소서1장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몸, 그리고 모든 것들은 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 여건들이 모두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아도 그렇게 야곱을 보아도 그렇게 욥을 보아도 그렇지요. 없다가 있다가 없어지는 모든 것들 조차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몸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도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사용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4
어지러움과 화평의 하나님
고린도전서14장 26-33
복음을 전하게 되면 요란해 집니다. 가족 모임이 되었든지 아니면 교회가 되었든지.
그러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꼭 한 마디 합니다.
하나님의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게 되지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말씀을 말했으니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분명 고린도 전서 14장33절을 인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말이 말씀이 될까요? 복음은 세상을 부정합니다. 세상을 부정하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꼭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그러면 이 말씀을 인용했다고 해서 이 말이 말씀이 될까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살았던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제사도 말씀대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은 여호와 하나님, 그들이 지킨 율법, 그들이 드린 제사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믿은 여호와하나님은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지켰다는 율법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율법이었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제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분명 신명기 말씀대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확실히 레위기 말씀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합니까?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속이 시원 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분명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말로 바꾸어 버립니다.

말씀이 되면 말씀은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말이 되어 버리면 말이라는 것은 항상 인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말로 바꾸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식으로 사용합니다.

고대의 천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점성술이지요. 별을 보고 이름도 짓고 별을 보고 운명도 보고 예언도 하잖아요.
요즘 우리는 별자리 점 이라는 것을 얼마나 쉽게 볼 수 있습니까?

물병자리, 물고기 자리,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 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 자리, 사수자리, 산양자리 별점이 있습니다.
매월20일에서 다음달 19일까지 속한 생일 날짜별로 운세를 보는 겁니다.
제가 9월생이니 천칭자리가 됩니다.
‘그대보다 불행한 이들이 있음을 깨달으라, 오늘 이들을 발견하게 되리니 줄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도록 하여라’
2월생이면 ‘당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 듯한 사람을 경계하라. 당신을 이용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별 점을 보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점들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인고 하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 별점 논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보면서 사람들이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저 별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까라는 겁니다.

지금은 천문학이 발달해 지구 같은 행성을 수천 개를 발견했지요. 이런 과학자들이 별점을 보겠습니까? 별점을 안보죠. 그러면 무슨 생각할 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지구 같은 행성에 가서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별들을 연구하면서 십자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지요.
도움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꼭 알고 싶어 해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간 인간들은 지식의 확보가 선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보를 많이 아는 자가 많은 돈을 벌잖아요. 결국 선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잘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말씀을 외워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시켰지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리고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서는 축복을, 죽어서는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그들이 힘이 된다고 생각한 것들을 허물어 버립니다.
마태복음 5장11절에 보면 모든 말씀을 누구에게 적용해 버립니까?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것도, 애통하는 것도, 온유한 것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도, 긍휼히 여기는 것도, 마음이 청결한 것도, 화평케 하는 것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도 다 예수님께 수렴됩니다.

이미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나름대로 질서를 제대로 잡고 있는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모든 것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해도 너무 하잖아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욕 얻어먹고 핍박 받는 일이 구약 선지자들이 당했던 바로 그 일이라고 하시잖아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선지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았습니까?
예레미아가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았습니까?
요나 선지자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했습니까?
아무리 살펴 봐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한 이야기가 없어요. 단지 여호와 하나님 말씀 때문에 고난당하고 미움 당하고 핍박당하는 것은 나오지요.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어도 그렇잖아요.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구약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 했겠습니까?
선지자들이 왜 핍박당하고 고난당했는지 얼마나 잘 알 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자신들 조상들처럼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말씀대로 살고 있잖아요.

이게 뭔고 하면 말씀을 말로 바꾼 겁니다. 이들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여요.

복음 전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의 행태도 바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행한 행태와 똑 같습니다.

어지럽다는 말은 시끄럽다는 말이지요. 싸운다는 말입니다. 싸움의 반대말이 화평이잖아요.
분명 오늘 본문에서는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함 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싸우지 말고 화평하게, 질서 있게 하라는 거지요. 그 이야기가 27절부터 나오잖아요.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더불어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서 말할 것이요”
29절 봅시다.
“예언 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교회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언의 경우도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하잖아요.

분명 교회란 질서 있는 모임이고 화평한 모임이지 시끄럽게 싸우는 모임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앞서 제가 언급한 사람들이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이 어둠임을 안 믿어요.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등장 전에는 세상이 나름 괜찮은 동네, 햇볕이 쨍쨍 내리 쬐는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등장은 세상이 개판이라는 것을 확정하는 등장입니다. 어둠이요 악한 세상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세상이 어둠임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실까요?
그냥 좋게 구원해 주시면 안됩니까?

왜 다윗에게 모태의 태중에서부터 죄인임을 까 발리셔야 속이 시원하신 겁니까?
그냥 우리야 아내를 범했다는 것이 죄라고 하시면 될 터인데 왜 그런 것을 죄라고 하지 않고 모태의 태중에서부터 죄인임을 모르는 것을 죄라고 들추어 내느냐 말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면 되지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자임을 까발려서 무엇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야만 십자가만 전파 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에 성령을 주신 이유는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폭탄을 던지는 겁니다. 마치 이스탄불 공항에 폭탄을 터뜨리듯이.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한 쪽은 말씀대로 질서 잡자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는 자들이 등장하겠지요. 주님이 이런 자들을 교회로 세우시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율법을 주셔서 유대교를 만들어 내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은 교회 속에서 참된 교회를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너무나 질서 있는 피조세계가 만들어 지잖아요.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절대 하나님 스스로 파괴하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로 심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을 노아 언약 속에 다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정결한 짐승의 피로 인해 온 세상이 덮혀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노아 홍수 심판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후서3장4-5절을 봅시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이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들은 땅의 출발점을 잊어 버렸습니다. 말씀에서는 의도적이지요. 땅이 멸망당하면 안 되잖아요.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만일 죽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이 됩니까?

그래서 늙어마게 친구들끼리 캠핑카 타고 여행도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데이트고 하는 거잖아요.

땅의 멸망은 혼돈입니다. 질서가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내가 볼 때에는 어지러움입니다. 그래서 땅은 처음부터 멸망당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흙으로 만든 이유가 흙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 싫어요. 아벨의 이름처럼 허무하게 인생이 끝나는 것은 싫습니다. 그건 질서가 아니지요. 그건 화평이 아닙니다. 그건 어지러움이요 그것이 전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왜 그러한 격랑 속에 집어넣습니까?

요한 계시록 22장 20절에 보면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실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빨리 오시라고 할까요 아니면 더 있다고 오라고 할까요?

격랑 속에 집어 넣어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나올 것 아닙니까?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잖아요.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으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되는 상태로 살도록 이 땅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교회가 질서 잘 잡히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되겠습니까?
아니지요. 주님. 우리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빨리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수십억, 수백억 들여 예배당 건물 지었는데 오시려는 예수님을 빨리 오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개판이 되어야 됩니다. 어지러워야 됩니다. 그래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튀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