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3
지혜와 악
고린도전서14장20-25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소피아(sofiva)라는 단어가 아니라 프헤렌( frhvn )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합니다. 이 단어는 마음으로 지각하고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왜 이런 곳에 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는 말입니다. 악이라고 하면 지옥과 관련되어 있는 단어잖아요.

이미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고린도 교회인데, 그 뿐만 아니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이런 기분 나쁜 용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닙니까?

방언에 대한 용도를 잘 모르는 것을 두고 악이라고 한다면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뭐 좀 모를 수 있지 모르는 게 죄냐라고 따질 수 있잖아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는 방식은 다 이런 식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죄인인 주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멘하면 되는데 이런 말씀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다는 입장이지요. 잘못 알았으면 교정해 나가면 되지 좀 모른다고 악이라고 해 버리면 어느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이슬람교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들은 코란 즉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을 알라신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코란에 대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답니다.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인간이 어떤 말을 듣는 순간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 네 명까지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종류의 아내인지는 자기가 해석해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키는 몇 센티미터, 몸무게는 얼마, 당은 얼마, 혈압은 얼마, 머리카락 수는 몇 개, 점은 몇 개 있는지, 발의 크기는 몇 인치 인지 이런 것들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해석해서 적용합니다.

앞서 제가 말씀에 아멘하면 된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에 아멘하면 된다는 말은 말씀은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본성은 십자가 증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나름 주인행세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는 것이지요.

특히 이미 세례 받았고 예수님을 믿는 본인, 헌금도 할 만큼 했고, 봉사도 할 만큼 했고, 기도도 할 만큼 했는데 이런 나에게 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에게 당신 지옥갈 죄인이야라고 해 보세요.
아마 펄쩍 뛸 겁니다.

그저께 대학원 동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주 훌륭한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좀 별났습니다.
삼년 내내 논쟁하다 시간을 다 보냈거든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늘 상대를 공격했으니 동기들을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 동기들이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 포인터가 아닙니다.

동기들 나이가 벌써 오십 넘은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 오십이 다 되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오랫동안 지나 와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동기 모임에 저를 한번 오라는 겁니다.

벌써 목회를 이십년 가까이 한 사람들이잖아요.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을 만났을까요?
그러다 보니 성불이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불된 이들에게도 복음을 이야기 하면 안색이 바뀝니다.
아무리 십자가 이야기해도 그 십자가는 성경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 속에 들어 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이제 구원 이야기를 그만 하고, 달리 말하면 복음,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말고 같은 학교 졸업했으니 좋은 일 있으면 함께 좋아해 주고, 슬픈 일 당하면 함께 위로해 주면 얼마나 좋은가라는 것이지요.

이들에겐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나에게 네가 싸우는 싸움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갈라디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입니다.

지금 교회에 이런 이야기가 통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도 믿고 십일조도 말라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금공제 없이 십분의 일을 드리고, 주일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씀 읽고, 예배 참석하고, 성도들을 돌아보고, 교회 봉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자들을 칭찬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목사들은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입니다.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사람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피가 전파되는 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영적 싸움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안식일 지키고, 할례 행한 자들에겐 사도 바울의 영적 싸움은 말 뿐이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살인하고 강도질 하는 그런 것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

마가복음2장16절을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라고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들 눈에는 세금을 왕창 때려 자기 입에 넣고 또 다른 사람 입에도 넣어주는 세리들은 악한 자들 중 악한 자들이지요. 15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죄인들이라고 했을 때 누가 볼 때 죄인들 이라는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는 이들은 모두 악한 자들, 곧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눈에는 어떻습니까?

모든 자들이 죄인입니다. 문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절대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15장11절 이하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 데 그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아들 중 문제를 누가 일으킵니까?
둘째 아들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자신에게 미리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큰 아들 작은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몽땅 들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 마음이 완악해 지잖아요. 비로소 궁핍했습니다.

그래서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는 재산 다 날린 둘째를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 가라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우고 살진 송아지도 잡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로 인해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고 돌아와서 이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여러분이 큰 아들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 지금도 밭에 나가서 종들을 관리 했던지 어떻게 했든지 일을 열심히 하고 왔습니다.

화가 날까요 화가 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벌인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가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동생이 재산 들고 멋대로 살다 재산을 다 날렸을 때 자신은 그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없이 살아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신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심정이 누구심정인고 하면 바로 바리새인들 심정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미워요.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는 살수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의 긍휼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가를 자랑하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에게 적합한 곳은 지옥입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는 곳이지 인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본문 21,22절을 봅시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아니 방언 주실 때 미리 교육해서 방언을 은사로 주시지 왜 이렇게 한 박자 뒤에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언 은사 주실 때 이것까지 완벽하게 한 세트로 넣어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따로 국밥으로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 자랑하지 말고 주님의 피 자랑하기 위해 세웠기 때문입니다.

교회 십 주년, 이십 주년, 백 주년 행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랑할게 있다는 겁니다. 그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 입니까? 아닙니다. 년수를 자랑하지요. 수에 칠 가치도 없는 년수를 자랑질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귀적입니까?

목회 오십년 한게 뭔 자랑입니까?

살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먼지가 가득 쌓여 있듯이 죄만 가득 쌓여 있을 뿐입니다.

심판의 기능을 하는 방언의 기능은 방언하는 자에게도 예외 없이 심판의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하게 해서 얼마든지 지옥 보낼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반드시 지옥 갑니다.

그러나 지혜에 있어서 완성된 자들은 이들과 다릅니다.

어떤 자들이 완성된 지혜를 받은 자들일까요?
23을 봅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3절에 보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니 조롱하여 말합니다. 새 술에 취한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미쳤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이들이 방언을 무슨 용도로 사용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랑 용도로 사용하니 오히려 방언하는 교회가 미친 자들이라고 조롱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방언 하는 자들은 책망 받을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예언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책망, 판단,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언의 기능이지요.
바로 복음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책망 듣는 것, 판단 받는 것, 마음속에 숨긴 것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거부합니까?
방언은 좋아하지만 통역을 거부합니다.

예언을 싫어합니다. 복음을 싫어합니다. 자신은 책망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시커멓게 쌓인 죄들이 바람을 타고 펄펄 날아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한 일이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일입니다.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발작합니다.

사무엘상18장6-9절을 봅시다.
“무리가 돌아 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 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렇게 주님께서 사울왕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셨으면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죄 중에 태어난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될 터인데 인간은 결코 자신 스스로 그런 결심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혜를 이야기하고 악을 이야기해도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지혜로워질 인간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여전히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친히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 방식은 오늘 본문처럼 부수시면서 만드시는 방식입니다.
그 부수시는 작업 속에 들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3

방언
고린도 전서 14장1-19
방언은 외국말이며 알아듣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모임에서 방언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합니다. 만일 통역이 없다면 교회에선 잠잠하라고 합니다.

우린 이미 세뇌를 받아서 방언이라고 말하면 뭔가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단에서는 방언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아마 12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는 말씀에 근거하여서 방언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그것의 풍성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까?

방언 자체로는 절대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죽어도 안 들어요. 물론 그 방언도 가짜입니다. 진짜 흉내를 내려면 말씀대로 순종하든지 하면 되는데 말씀대로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예언의 은사는 이미 우리의 인식으로는 좀 부담스럽잖아요. 그리고 복음 이야기 하는 것이 무슨 대수 입니까? 누구나 다 할 수 있잖아요. 이와 달리 방언은 뭔가 특별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사기꾼 목사들이 방언을 마치 대단한 은사를 받은 것 인양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확신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구원파가 묻는 것이 ‘너 구원 받았어?’ 아닙니까?
아마 이런 질문 받으면 나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당황해 합니다.
확신은 있는데 대답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하면 언제 받았느냐고 물어요. 왜 이렇게 묻겠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문제잖아요. 이런 큰 사건의 경험을 사도 바울처럼 기억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아주 명확히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자신이 예수 믿는 증거물로 방언을 내세웁니다. 나에게도 그런 증거물이 있어. 그러니 나 천국 가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예수님 만난 날을 정확히 기억하면 천국 가는 줄 알아요. 자신이 믿으면 천국 가는 줄 알아요.

인간들은 불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뭔가 자신의 몸이 체험한 것을 갖고 그 불안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방언은 분명 어떤 내용을 담게 됩니까? 기도의 내용이나 축복이나 감사 등 반드시 복음의 내용을 담습니다. 복음 외엔 없어요. 마치 방언이 사적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말씀을 하잖아요.

자기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방언기도라고 하니까 마치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한 용도의 방언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세요. 어느 누구의 기도가 개인적인, 사적인 기도가 나옵니까?

에베소서3장14절 이하를 보면 기도가 나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방언기도의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동의할 수 없다고요.

마태복음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기도 태도입니다.

이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합니다.
마치 오늘날 방언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왜 남들 앞에서 기도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고 있어요. 나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사를 받았어요. 그러니 여러분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시오.’ 이런 태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면 기도 들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공격하시는 내용은 기도라는 것은 남에게 내세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 특징이 있습니다. 새벽기도 빠지지 않았다는 자랑을 꼭 하잖아요. 은밀한 중에 계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기도를 해도 꼭 남들 앞에서 자랑질 해야 속이 후련한 자들입니다.

또 한 가지는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40일 금식기도, 일천 번제 기도 이런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간절하게 기도하면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들도 재물로 바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자신의 정성이 이 정도이면 신도 응답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3장10절을 보면 요시아 왕의 행적이 나옵니다.
“왕이 또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솔로몬 왕이 몰록을 위해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는데 그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도벳사당에서 아들을 불에 살랐습니다(렘7:31).
이 정도의 신앙심을 갖고 신에게 기도 했습니다. 말을 많이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자신의 정성을 투자한 만큼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이라는 것이 이방인들의 기도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오래 기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참 희한하지요.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니 말입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니 말입니다. 물론 자신이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면서 오래 기도한 자신이 대견스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기도입니다.
독특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안에 나 개인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나 개인을 위한 기도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의 내용이 너무 짧아요.

마태복음6장25절 이하를 보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노리고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피로 사신 자들이 구하는 것은 늘 우선되고 가장 시급한 것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아는 것이 돈이 됩니까 밥이 됩니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간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시면 그의 인생이 어떠했습니까?

그야 말로 거지처럼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과학이 발달하게 되니 사람들이 따지는 것은 효용성, 효율성 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따지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얼마나 나에게 이익이 될까 계산해서 믿습니다.
물론 이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요. 문제는 늘 이 계산에 몰두해서 인생 끝낸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돈의 가치를 계산해 봅니다. 오늘 차비를 들여서 모임에 갔을 때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차라리 말씀 듣는 것 보다 집에서 자는 게 더 효율적이야. 꼴랑 한 시간 말씀 들으려고 내가 먼 곳까지 가야해?

시간 낭비 할 필요 없어.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했으니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지요. 예수님만 따라 간다면 나의 인생은 활짝 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초대하셨지요.

죽음 속에서 그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진짜 생명인 분은 예수님이심을 증거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화끈한 체험을 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킵니까? 자랑할 것은 받은 재산도 있고, 건강도 있고, 자식도 있고, 사업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 자랑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방언을 주신 이유는 자기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방언을 주신 이유가 아주 독특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방언을 주셔서 하나님의 큰일, 즉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게 하셔서 알아들을 자들만 알아듣게 하셨지요. 물론 각국 언어로 말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는 누구나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못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좀 다릅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가 마치 테스트 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방언을 하는지 아니면 교회에 나와서 하는지, 만일 교회에 나와서 한다면 통역을 반드시 동반하고 하는지 한번 보겠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린 방언 은사를 주님이 주셨으니 무조건 좋은 것이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방언의 내용도 문제가 되지만 방언 하는 자체도 방언의 내용에 부합되지 않으면 여전히 문제라는 것입니다.

방언의 내용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복음입니다. 성경어디에도 십자가 복음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언 하는 자체도 십자가 내용이 부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자랑하기 위한 방언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교회라는 곳엔 반드시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주셨습니까?

십자가 복음 전하라고 방언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증거하라고 방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린 근본적으로 교회의 덕 즉, 주님의 몸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늘 우리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지요.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이익이 되지 못하면 나쁜 것이 됩니다.

교회에 와도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느냐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되는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가 소원하는 것과 다른 것들을 우리에게 배치하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그렇게 하십니다.

방언의 은사를 왜 우리가 기대하는 식으로 주시지 않은 이유는 주님의 관심은 방언 받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교회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증거 하지 않는 모임은 주님의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각양 은사를 통해 십자가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가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2
온전한 것과 부분적으로 하는 것
고린도전서13장9-13
복음을 전해 보면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 중에 꼭 들어가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성경을 다 아냐?’
사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지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주에 지구와 같은 행성이 수천 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하고 넓습니까? 얼마 전에는 우주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빨리 팽창한다고 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 과학과 지식의 발전으로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이 몸을 가진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세계사 책을 들여다 보면 처음 인류는 물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수렵 채취로, 그리고 제대로 된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굴 같은 곳에서 생활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경험이 쌓여지니 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고, 홍수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알게 되잖아요.

정글의 법칙을 보면 하는 일이 뭡니까? 사냥하고 채취하고 먹고 자고 사냥하고 열매 구하고 먹고 자고.
이것이 농사를 짓지 못할 때, 가축을 기르지 못할 때 했던 인간의 모습입니다.

병만족이야 이미 지식을 다 갖고 있잖아요. 불을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 그리고 비가 올 땐 무엇을 이용해 집을 지어야 하는지, 사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론 엄청나게 많은 도구들을 갖고 생활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냥을 했는데 라면 스프를 좀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입맛이 사냥해서 그냥 먹을 수 있는 입맛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만일 오십년 전만 해도 라면 맛을 알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라면을 맛 없어서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마는.

이처럼 우리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식도 쌓이고 입맛도 쌓입니다. 그래서 늘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 보다는 미래가 더 많을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도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내가 과거 복음을 모를 때 예수 믿으면 내가 잘 되고 내 가족이 축복 받고 내가 속한 국가가 잘 될 것이라는 믿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을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 예수 믿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한 믿음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기 위한 주님이 주신 믿음이다.’ 라고 할 때 과거와 현재의 변화가 일어 났잖아요.

그러면 좀 스마트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갖겠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만일 시간이 흘러 내 생각이 또 바뀐다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믿음도 바뀔 수 있지 않는가?’

이 쪽 동네를 돌아 다녔을 때 많은 전도사들이나 목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이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하도 많다 보니 오는 선생들마다 다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신학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단만 해도 150개가 넘어요. 중요한 것은 신학도 각자 강조하는 것이 달라요.
무슨 말인고 하면 십자가 복음으로 통일되지 않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가르칩니다. 이들은 십자가로 하나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적 욕망이든 다른 욕망을 채워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들의 설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설교합니다. 물론 어떤 인간도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설교하지 않을 인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봐도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설교하잖아요. 이것이 우리 인간이 보는 한계지요.
우린 십자가의 영 없이 성경을 인간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설교하는 것과 같이 봐 버립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인생으로 살아야 된다고 복음을 전하면 항상 하는 말이 성경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있고 헌금도 있고 방언도 있고 예언도 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두꺼운데 십자가로 통일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언약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믿어지면 되는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꼭 자기 몸에 적합하게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보이고 모든 것이 늘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 복음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인간들 입장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정말 대변해 주는 듯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는 말은 지식이라는 것, 예언이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 것 같잖아요.
이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몸이 느끼잖아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니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잖아요.
‘죽어서 보자. 예수님 앞에 서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 보자.’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온전한 것이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 어느 누구도 온전한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성경 말씀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우린 인간들은 진리를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진리라는 것이 늘 새롭게 생성된다고 하잖아요. 우리의 인식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부분적으로 안다는 말씀과 온전한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여기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등이 나옵니다.
아벨의 행적과 에녹의 행적, 그리고 노아의 행적은 아브라함에 비하면 아주 미흡합니다.
그래서 우린 이들의 믿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 고 하면 이들은 부분적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전부를 알았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전체를 그런식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는 부분을 안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다 알았다고 상상의 날개를 확 펴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도바울 조차 부분적으로 알 뿐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부분일 뿐이라면 어떻게 온전한 것을 전할 수 있습니까?

부분이 온전을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이야 똑똑한 사람들이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 말도 결국 시간의 흐름을 품고 하는 말이거든요. 이 말은 진리라는 것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진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조차 영원한 언약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언약은 불변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변하는 인간은 영원한 언약, 새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시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의 믿음이 부분입니까 온전한 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8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말씀을 보면 누가 봐도 아브라함은 부분적인 믿음을 가졌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도 있고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도 있고 이삭을 바치는 장면도 있잖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부분적인 것들이 더 많아지잖아요. 그런데 결국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죽었는데 그는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땅에 묻혔습니다.
이 땅은 사대만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쟁으로 차지하잖아요.

그러면 이것도 역시 미진합니다. 그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었잖아요.
성령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부분적일 뿐이요 미진하다는 느낌을 성경을 보면서 지울 수가 없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믿음을 부분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분명 부분적인 것인데 그 믿음을 온전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요한복음8장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어렵지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분명 부분적으로 알았을 뿐인데 그 부분이 진짜 예수님을 보게 된 온전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을 상상해 보면 상상이 안되잖아요. 단지 부분적으로 예수님을 알 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부분이 부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부분을 주님 쪽에서 부분으로 보게 하시기 때문에 이 부분적인 것이 온전한 것이 됩니다.

시간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부분적인 것에서 온전한 것을 상상해 봤자 여전히 그 온전한 것은 부분적인 것 뿐입니다.
그런데 시간조차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바탕으로 사용하시는 주님은 부분적인 것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충분히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적용해 버립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언급합니까?
그 앞 구절에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폐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어떤 사람들이 등장할까요?
예언, 방언, 지식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원한 사랑만 주장하는 자들이 나올 거란 말이지요.

사랑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 한 둘이 아니잖아요. 이런 자들이 나올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분이 충분히 온전한 것이라는 말귀를 못 알아 듣습니다.

아브라함을 봐도, 이삭을 봐도, 야곱을 봐도 늘 미흡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끝부분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숨어서 성전에서 도망갑니다.

유대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일부분만 보입니다. 그건 부분일 뿐이지요. 그러니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9장을 보면 날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이 소경은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부분적입니까 아니면 다 알았습니까?
부분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눈만 떴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인자를 믿게 해 주십니다.

그러자 38절에서 눈뜬 소경이 믿는다고 하지요.
눈 뜬 소경이 예수님을 다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사도바울조차 부분적으로 알았을 뿐인데 소경이 어떻게 온전하게 할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에 합류시켜버립니다. 즉 그 부분적인 것이 전혀 부족한 부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기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욥이 여호와를 제대로 몰라요.
그런데 욥기1장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미 욥에 대한 평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욥을 치게 되니 여호와의 이런 평가가 무색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욥이 여호와를 어떻게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욥의 부분적인 것들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으로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를 중보자를 증거하는 자로 사용합니다.
그가 사단의 시험을 받기 전이나 받을 때나 그 후나 여호와께서는 욥을 온전한 사람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오해 했습니까? 그 오해 투성이인 부분적인 지식조차 온전했다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여호와를 알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12절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 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주께서는 나를 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욥기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우린 언제 온전히 주님을 알지 그런 기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다는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린 부분적으로 아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분적으로 알면서 살아야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게 하신 이유를 욥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죄인중의 괴수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