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2
영원한 것과 폐하는 것
고린도전서 13장8절
사랑은 영원하지만 예언과 방언, 그리고 지식은 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랑이 좋습니까 아니면 예언이나 방언, 지식이 좋습니까?

사실 사랑이나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은 뽐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을 뽐낸다는 것은 십자가 피만 자랑한다는 말인데 십자가 피만을 뽐내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하나님 자리에 앉아야 속이 시원한 자들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안색이 변합니다. 가인만 안색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에서를 보더라도 장난처럼 여겼던 장자의 명분을 잃고 실제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되니 야곱을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야곱도 이와 다르지 않지요. 물론 말씀에 근거한 장자권 쟁취였지만 그의 본성 자체가 빻았는데 선수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 합니다.

한쪽은 육신적으로 장자이니 당연히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야곱은 비록 장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반드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야 말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내세운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요.

흔히 우리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을 뽐내면 사람들이 높여 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지신 그 사랑을 뽐낸다면 절대로 그 사람을 높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뽐내게 된다면 자신은 만물의 찌기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3장22절 이하를 보면 세례요한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 보이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살짝 시기를 하지요. 제가 살짝이라고 표현했지만 엄청 시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한 자는 너희니라(요3:28).”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주목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질투할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사람이 바로 우리의 스승인 세례요한이라고 증거해야 하는 자들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야 이게 뭐가 어렵느냐고 하시겠지만 우리 몸이 여기에 개입하고 자리 잡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겐 불가능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그 다음 뭐라고 합니까?
“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로서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우리도 충분이 세례요한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정도면 자신도 친구로서 윈윈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이 왜 굳이 이런 말을 합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증인들의 특징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망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망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이 흥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돋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린 항상 나도 망하지 않고 예수님도 증거되는 그런 삶을 원하잖아요. 그래서 언제나 내 자손심도 챙기고 예수님도 전하는 삶을 살길 원하잖아요.

선교사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피를 전하지 않잖아요. 후원하는 교회에 가서 피를 자랑해 보세요.
그다음 후원금 사라집니다.

자신이 만든 자그마한 역사를 자랑해야 사람들이 눈물도 흘리고 기도도 해 주고 마지막이 한 뭉치 돈을 쥐어 줍니다. 이런 것을 보면 결국 나는 망하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베드로 후서3장3절을 보면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무엇을 조롱하는 고 하면 주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조롱합니다.

이들이 주님의 심판을 왜 조롱할까요?

주님의 심판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이룬 것, 노력하는 것, 만들어 놓은 것들이 헛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릴 때 봄이 되면 대청소를 한 번씩 합니다.
그럴 때 필요 없는 것들은 다 아궁이에 집어넣어 불에 태워버립니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태우지 않지요.

그런데 주님의 심판이 이렇다는 겁니다. 다 탄다는 겁니다.

내가 피 땀 흘려 만든 나의 자리를 싹 다 태워버린답니다. 그리니 주님의 심판을 조롱하지 않을 수 없지요.
지금 먹기 싫은 술까지 퍼 마셔 가면서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고 쌓았는데 주님이 그것을 헛것으로 만드신다고 하니 웃기지 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불로써 심판당하는 일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 몸이 원하는 것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것이 모두라고 몸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보여 주잖아요.

몸은 이것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생각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바로 주님이 주신 은사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 지식 이것들은 무엇은 담고 있습니까?
사랑을 담고 있지요.
십자가의 피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사랑과 달리 사람의 소유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언을 하잖아요. 십자가의 피를 증명하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디에 관심을 가질까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예언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세례요한 말씀드렸지요. 그 제자들을 보세요. 이들의 안목이 우리의 안목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이지요. 방언의 내용을 보면 역시나 십자가의 피, 주님의 사랑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특수한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인데 그 해석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큰일, 즉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의 큰일에 있지 않습니다. 그 나타난 현상에 있지요.

사도행전8장9절 이하를 보면 사마리아 성에 빌립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표적과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하신 일들이 그대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린 어디에 관심을 둬야 할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살아 계시는데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시몬이라는 마술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술은 이전부터 사마리아 성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했으며 아주 큰 사람이라 하면서 신분이 낮은 사람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까지 다 따랐습니다. 심지어 그가 행하는 일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곳에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해서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세례 받는 모습을 본 시몬이 이런 요청을 합니다.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8:19).”

본문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왜 시몬에게는 안수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알아요. 물론 주님이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시몬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는 성령세례를 돈으로 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마술사 시몬을 욕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지요. 어떻게 성령세례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교회에서 왜 기도합니까?
내 뜻 이뤄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자신의 눈물과 열심과 간절함을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이라 확신하며 기도하잖아요.

이것과 마술사 시몬과 뭐가 다릅니까?
돈 주고 성령세례를 사겠다는 것과 자신의 헌신으로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마술사 시몬은 성령세례를 사람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소유로 본 것이지요. 얼마든지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으로 마음껏 자신을 뽐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 받은 증거물들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들은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을 폐한다고 하면 누가 가장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방언 한다는 자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가장 기분 나쁘겠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직은 방언이나 예언이 폐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우린 가치 있어 라고 하겠지요.

지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방언과 예언을 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가장 앞서 사랑은 영원하다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몸 안에 어떤 현상만 일어나면 그것으로 자기 자랑삼기 바쁩니다.

마지막으로 지식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식이 보통 지식이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 아니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수 십 년간 주님 사랑에 대한 연구들, 경험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는 그야 말로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지식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주님은 헛되다고 하십니다. 헛되다는 말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헛됨을 보여 주기 위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은 망해야 하고 주님만 흥해야 함을 보여주는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하나님을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뭔가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도 폐한다는 말씀 앞에 그런 생각이 십자가 원수임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앞에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임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 자랑할 거리가 없어집니다.
갈라디아서 6장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자신은 항상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 났다는 말입니다.
이런 바울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만일 사도 바울을 여러분 교회 목사님으로 계시면 처음에야 그럴 수 있지라고 하겠지만 교회 오는 재미 없어서 사도바울을 쫓아 낼 겁니다.

적어도 교회 꼬박꼬박 열심히 나오는 사람들은 인정해 주고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해 줘야 교회 올 맛이 나잖아요. 그런데 바쁜 시간에 교회 왔는데, 그것도 그냥오지 않고 헌금까지 들고 왔는데 매번 목사가 하는 설교가 우린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피만 자랑합시다라고 하면 어느 누가 듣고 싶겠습니까?

여러분 사랑만 영원하고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폐합니다. 그러니 우린 늘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놓여 있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2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는 사랑
고린도전서 13장7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 10-12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어떻습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 참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레미야 18장18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좋아할 사람 있을까요? 운전할 때 옆에서 잔소리 하면 화내잖아요.

지적질 하는 소리는 무조건 기분 나빠요. 이런 우리 일상적인 일에서 조차 기분 나빠하는 인간들인데 대 놓고 너 화내는 것 보니 망해야 해. 너는 망하는 것이,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해라고 해 보세요. 그런 사람을 누가 가만히 두겠습니까?

선지자들의 외침은 자신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했고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참아도 이 정도는 참아야 참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항상 참는다는 말입니다.

운전하는데 옆에서 잔소리 해도 참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시키신 잔소리고 배드민턴 칠 때도 옆에서 싫은 소리해도 그것도 주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곳에서 주님은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늘 주님의 목적에 늘 다루어짐을 당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다루심에 어떻게 반대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라는 말씀 앞에서 우린 전혀 죽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는데 사업 잘 안 되는 것도 견디지 못해 자살하잖아요. 우린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려 주지 않으면 다 자살할 인간들입니다.

어떤 것도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어디 이 말씀이 믿어집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피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루어지고 이루어지고 사용되어진다는 사실 안 믿잖아요.

우린 오직 내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6장24절을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누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린 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잖아요.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생각이지요.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멘’하면 끝날 것을 자신이 이 말씀을 지켜보려고 발악을 하지요.

난 늘 재물만 섬기는 자입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그래 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잖아요.

물론 어떤 도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어차피 난 재물만 섬기는 자니 재물만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말씀을 이용해 먹지요. 그래서 지옥 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이용하시는데 마귀의 종들은 말씀을 자신을 위해 이용할 생각만 합니다.

욥을 보게 되면 욥의 평소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모든 우주의 중심이 자신을 위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유 없는 고난을 이해 할 수 없지요. 욥에게는 분명 어떤 이유도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재난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았기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욥기 1장5절을 보세요. 자녀들을 성결케 하고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해서 이렇게 번제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완벽한 신앙생활입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이유도 없는 고난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강도가 더 심해지고 친구들의 추궁에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항변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참았고 견뎠고 믿은 것들이 이유 없는 고난 앞에 다 무너져 내립니다.

제가 지금 욥을 까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허다한 주님의 증인 중 한 사람입니다.
욥을 보게 되면 우린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견디는 것이 이유 없는 견딤이 되어 버리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이유는 자신이 바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참지 않겠다. 믿지 않겠다. 견디지 않겠다.’ 고 합니다.

우린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아내 남편 만나는 바램으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견디고 있잖아요. 자식만은 나 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잖아요. 그 믿음 하나로 힘든 세상을 살잖아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 참고 믿고 견디는 사람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빌립보서3장6절에서 사도바울이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 줍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으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예수님 앞에 그 죄가 드러나기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삶은 그 당시 예수님 외에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같은 사람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면 이들이 이런 사랑 실천하려고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물어보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지요. 당연히 사랑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으니 이 사랑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도 이렇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 많습니다. 물론 양심은 있어서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성화라는 것이 그런 것이잖아요. 완전한 데까지 나아가는 것. 예수 믿고 막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절제하고, 기도하고, 봉사 하고, 헌신 하고, 사회봉사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 믿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돋보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늘 자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배후 조종하는 줄도 모르지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에 있었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었지만 하나님 눈에 보이는 마귀는 인간들 눈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뱀과 대화를 나누잖아요. 뱀을 알아봅니다. 마귀를 알아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더 이상 뱀을 알아보지 못해요. 동물원에 있는 뱀 아닙니다.

마귀를 알아보지 못해요. 이건 마귀와 일심동체가 되어 자신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마귀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도 거울이 없다면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요.

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습니다. 귀신 영화에나 나오지만 마귀는 어디에 비칠 때 그 모습을 드러냅니까?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전하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예수님의 피를 좋아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좋아합니다.
복음 복음 하지만 결국 행위로 보여주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다 맞고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에 딱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산다는 말은 곧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귀의 말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삶이야말로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 있으면 누구나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왜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까? 말씀대로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디 그 사람이 십자가 피를 전합니까? 예수님을 닮는 삶을 전한 거잖아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잖아요.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남을 살린 예수님처럼 살았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열광하고 박수 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마귀가 바라던 바 이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견디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분명 의미가 다르지요.
지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사랑 예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지요.
주의 자리에 앉기 위한 사랑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제대로 증거하는 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껏 치켜세우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마귀가 좋아하지요.

주님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니 얼마나 마귀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습니까?
십자가 사랑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강해

구름 나그네 2016. 8. 2. 16:21
기뻐하는 이유
고린도전서 13장 6절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떨 때 즐겁고 어떨 때 기쁩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때 기쁘고 즐겁지요. 만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즐겁지 않습니다.

축구경기를 보아도 야구 경기를 보아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거나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잘하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내 뜻이 관철될 때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6일 동안 매일 매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 좋으심의 결정판이 7일째 되는 안식일입니다.

토브(b/f)라는 단어는 ‘좋다’라는 의미도 있고 ‘선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기쁘다’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선하게 보이니 좋고, 좋으니 당연히 기쁘겠지요.

우린 기쁨을 우리 인간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내가 기쁘면 모든 것이 다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기쁘지 않으면 다 기분 나쁩니다. 내가 안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안 좋습니다.

남의 자식이 상을 타면 기분 나빠요. 내 자식이 상 타면 기분 좋아요. 남이 사업이 잘 되면 기분 안 좋아요. 그런데 내가 사업이 잘 되면 기분이 유쾌해 집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기쁨을 이야기할 때 불의나 진리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1509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로부터 엄청나게 강화된 왕권을 물려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열렬한 카톨릭 신봉자였습니다. 즉 교황 말에 순종 잘하고 교황청에 납부할 돈도 열심히 모았습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니 얼마나 즐거운 열심을 냈겠습니까?

그런데 캐스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교황청에서 캐스린 왕비와의 이혼을 허락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를 세우고 교황과 결별했습니다. 당시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차이는 교황의 자리에 국왕이 대신한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나의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등 돌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그것이 의가 되고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획 돌아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좋으심은 반드시 불의와 진리가 고려대상입니다.

마가복음1장11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물세례 받으신 예수님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냥 예수님을 기뻐한다고 하시면 안 되고 물세례 받으신 예수님을 기뻐하십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쁨이 되지 못하고 물세례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은 불의나 진리가 자신의 기쁨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창세기 6장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렇게 나옵니다.
자신들이 좋으면 그만이지 여기에 불의와 진리를 고려할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없는 전형적인 모습이 육체의 모습인데, 이 육체(rc;B;)라는 의미는 오직 자기의 좋음만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찜으로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심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살찜만 있는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4장38,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 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장가들지 않겠다. 시집가지 않겠다 하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래봐야 그들이 먹고 마시지 않습니까? 노아 시대 때에 시집가지 않은 사람들, 장가들지 않은 사람들 많았습니다.
갓난아기들이 장가가고 시집갔겠습니까?

그리고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몇날 며칠을 먹고 마시지 않는 미친 사람들이 있지요.
그 당시에도 그런 사람 있었습니다.
아파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일상사 자체가 자기 기쁨을 위한 일이기에 멸망당했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의나 진리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노아시대 때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자신의 삶이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멸망당한 자들은 노아의 삶이 자신들의 삶의 다른 모습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 배 만드는 사람 없었겠습니까? 노아도 결혼했고 역시 자식들 낳았고 먹고 마시고 했습니다.

홍수 심판 후 얼마나 평소에 포도주를 많이 마셨으면 그렇게 취했겠습니까?
노아의 평소 모습입니다.

그러니 노아 주변 사람들은 방주 만드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자신들과 다른 노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 심판 온다는 사실 누가 믿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불로써 심판하신다는 사실 어느 누가 믿습니까? 지금 내 기쁨, 내 즐거움이 최우선인데.
그 심판도 내 기쁨 내 즐거움이 된다면야 내가 믿어 주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강림은 어느 누구도 믿지도 않지만 바라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 묻겠습니다. 지금 죽어도 좋습니까?
시집갈 딸을 두고 죽어도 좋습니까? 이제 막 사업 성공해서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샀는데 죽어도 좋습니까?
이제 얘가 열 살, 열한 살, 열 두 살인데 죽어도 좋습니까?

아무도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두고 살 이라고 합니다. 살찜뿐인, 흙으로 돌아가야 할 육체일 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뿐인 육이 하는 일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나만 기쁘면 되고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노아가 정말 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술 취해 자식 저주하는 노아의 모습에 실망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평가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동행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품고 있는 동행입니다.

노아는 나중에 이것을 알게 되었지요. 물론 알아도 그 앎이 노아의 행위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행위, 삶을 살 뿐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지요. 그러니 노아는 여전히 자신의 즐거움, 기쁨을 위해 살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만나기 위해 내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줄이겠다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의 즐거움 기쁨을 찾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밤새도록 곡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 드디어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었는데 그 곳은 민주주의 투표로 인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땅임을 스스로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로 자신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정해 놓고 원망은 하나님께 합니다.

이들이 기대하고 소망한 것이 현실과 차이가 나니 정말 기뻐해야 하고 즐거워야 할 시간이 곡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살찜은 일하지 않고 먹고 살고 싶잖아요. 돈 버는데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가족과 떨어져 살지 않고, 남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고 큰 소리 치며 살고 싶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늘 근심이요 걱정이요 눈물이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불의나 진리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불의를 기뻐하는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즉 육에 속한 자는 항상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가 없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을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눈만 뜨면 우리는 나를 위해 살기 바빠요.

우리의 환경자체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 몸 자체가 주변 환경과 만나면서 내 몸의 기쁨을 위해 살아라고 부추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만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이야기 끄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끄집어내면 분위기가 싸해 집니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하면, 자신은 죄만 짓고 불의하며 오직 주님의 피만이 의롭다고 이야기 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당합니다. 미움 당하기 전에 정신 나간 사람 취급받습니다.

세상에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 돈이지 무슨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복음이냐고 비아냥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10절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날과 달과 절기를 아주 주의 깊게 지킨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피도 믿고 날과 달과 절기도 바리새인들처럼 지킵니다.

우리가 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기 종 삼기 위한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왜 말씀대로 십일조 하세요. 주일 성수 하세요. 기도 하세요. 성경 읽으세요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를 갈라디아서 4장17절에 보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게서 떠나 자기들에게 열심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왜 자기 교회를 만들 수 없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오늘날 목사들과는 너무나 대조되지요.
왜 목회 일에 열심을 냅니까?
왜 교회 일에 열심을 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종 삼으려고 열심냅니다. 자기 즐거움을 위해 열심내는 것입니다.

교회일 열심히 하는 사람치고 기쁘지 않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맨날 싸우고 미움 받아도 자신은 기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다 자기 기쁨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 입에서 십자가 이야기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피만이 의롭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미움 받는 것을 의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뻐하지요. 십자가의 피를 전해서 미움 받는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것 없습니다. 오직 자기 즐거움을 위해 열심을 내다가 시기 질투 받아 미움당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와 달리 영에 속한 자들은 십자가의 피만을 기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