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시사

도토리 깍지 2021. 9. 24. 09:38

 

 

 

 

1934년 6월 앨커트래즈 연방교도소 모습. 앨커트래즈역사 홈페이지

 

 

 

 

 

1) 41m 절벽 '악마의 섬' 감옥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죄수들

 

 

 美 앨커트래즈 탈옥 미스터리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62년 6월 12일 오전 7시 15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프란시스코 앨커트래즈 연방교도소. 간수장 빌 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침 점호 알람이 울린 지 한참 지났는데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감방 세 곳의 수감자들을 깨우려 창살 사이에 손을 넣고 베개를 흔드는 순간, 갑자기 사람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 탓이다.

화들짝 놀란 롱이 뒤로 넘어지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죄수 세 명은 온데간데 없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머리 모형만이 텅 빈 침대에 덩그러니 놓였을 뿐이다.

사라진 사람은 마약과 무장강도 등 혐의로 1960년 이곳에 들어온 프랭크 모리스(당시 36세)와 존(당시 32세)ㆍ클라렌스(당시 31세) 앵글린 형제다.

 

미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탈옥이자 현실판 ‘쇼생크 탈출’로도 알려진 ‘앨커트래즈 탈옥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머리 모형 만들고 벽 뚫어 탈출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2.4㎞ 떨어진 작은 바위 섬, 앨커트래즈. 사람들은 이곳을 ‘악마의 섬’으로, 정상에 위치한 교도소는 ‘절대 탈옥할 수 없는 종신(終身)감옥’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앨커트래즈 교도소는 화려한 샌프란시스코 도심이 한눈에 보일 만큼 지척에 있음에도 빠져나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차갑고 거친 태평양 바다가 섬을 둘러싸고 있는 데다,

해안은 41m 높이의 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바다로 몸을 던진다 해도 암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1960년 촬영된 앨커트래즈 탈옥범들의 머그샷(왼쪽)과 2014년 연방보안국이 만든

80대 추정 모습. 위쪽부터 프랭크 모리스, 존 앵글린, 클라렌스 앵글린.

FBI·미 연방보안국

 

 

 

 

가까스로 물속에 뛰어들어도 안심할 수 없다.

영상 7~10도의 차가운 물, 빠른 해류로 수영이 힘든 것은 물론, 식인 상어 떼도 도사리고 있다.

탈옥 시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전설적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 등 악명 높은 범죄자들이 주로 수감됐던 이유다.

 

물론 탈출의 몸부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교도소가 운영된 29년(1934~1963년) 동안 총 14번(인원 수 36명)의 탈옥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붙잡히거나, 총에 맞아 숨지거나, 차디찬 바다에서 익사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은 대체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을까.

 

교도소 B블록 내 인접한 감방에 각각 배정된 모리스와 앵글린 형제, 그리고 또 다른 수감자 앨런 웨스트 등 4명이 탈옥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한 건 1960년. 그러던 중 이듬해 12월, 웨스트가 감방 바로 뒤, 설비물이 설치된 좁은 통로를 청소하다가 낡은 나사 부품을 발견하면서 막연한 아이디어가 구체화됐다.

계획은 이랬다. 90㎝ 너비의 설비 통로와 연결되는 감방 벽을 뚫어 통과한 뒤 환풍구를 이용, 교도소 옥상까지 올라가는 걸 1차 관문 통과로 삼았다.

벽을 뚫는 데에는 식당에서 훔친 포크와 숟가락을 이용하기로 했다.

 

숟가락 머리 부분을 잘라 송곳 모양으로 만들고 매일 밤 감방 벽의 환기구 주변을 파냈다.

진공청소기 모터도 몰래 빼내 만든 전동 드릴도 동원했다.

교도소에서 매일 1시간30분씩 울린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드릴 소음을 교묘히 숨겨줬다.

 

 

 

 

 

 

 

국 앨커트래즈 교도소 수감자들이 탈출 당시 간수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만든

현장을 복원한 모습(왼쪽 사진)과 프랭크 모리스의 감방에서 발견된 머리 모형

(오른쪽 사진). 코 부분은 당시 모리스가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간수장이 베개를

흔드는 과정에서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부러졌고, 이후 복원됐다.

앨커트래즈역사·FBI 홈페이지

 

 

 

 

 

준비 과정도 치밀했다.

구멍을 가릴 ‘가짜 벽’을 만들어 의심을 피한 게 대표적이다.

낮에는 사람들 발길이 뜸한 옥상 헬기착륙장을 청소하겠다고 간수들에게 간청해 옥상으로 올라간 뒤, 버려진 우비 50여 벌로 구명조끼와 고무보트(1.8m×4.2m 크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코디언을 개조, 고무보트에 공기를 주입할 채비까지 갖췄다.

머리 모형 제조에는 종이와 비누, 석고를 썼다. ‘디테일’을 위해 이발소에서 주운 머리카락도 붙였다.

실제 탈옥을 감행한 ‘거사’는 1962년 6월 11일 소등 직후인 오후 9시30분 이후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짜 머리를 침대에 올려두고, 이불 속에 수건과 옷가지를 넣어 잠든 것처럼 꾸며놓고 나서 당초 계획대로 옥상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배수관을 타고 41m 아래 검푸른 바다로 몸을 던졌다.

다만 한 사람, 웨스트는 자신의 감방 속 벽면 환기구를 제시간에 제거하지 못해 홀로 남겨졌다.

 

모리스와 앵글린 형제 등과 보조를 맞추고자 필사적으로 벽을 허문 웨스트가 가까스로 방을 빠져나갔을 때, 동료 3명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앨커트래즈 교도소 간수가 구멍이 뚫린 감방 벽(왼쪽 사진)과 수감자들의 탈출 통로인

옥상 환풍구(가운데 사진)를 살피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감방 뒷면에 위치한 설비 통로.

앨커트래즈역사 홈페이지

 

 

 

살았을까 죽었을까… 엇갈리는 관측

 

이튿날 아침, 앨커트래즈는 발칵 뒤집혔다.

열흘간 군경 100여 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 추적대가 하늘과 땅, 바다를 샅샅이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북쪽으로 3.2㎞ 떨어진 앤젤아일랜드 인근에서 탈출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노와 앵글린 형제 소지품이, 금문교 인근에선 보트 잔해로 보이는 우비 조각 등이 발견됐지만 거기까지였다.

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주 뒤, 죄수 복장과 비슷한 파란색 옷을 입은 한 남성의 시신을 샌프란시스코 해안 인근에서 찾아냈으나 심하게 부패된 탓에 신원 확인은 불가능했다.

1979년 12월 31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탈옥 3인조’에 대해 ‘실종 및 익사’ 처리를 하고, 17년이 넘었던 수사를 종결했다.

 

당국은 “보트가 부서져 가라앉았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세 사람의 시신은 샌프란시스코만 급류에 휩쓸렸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감옥에서는 벗어났으나, 끝내 육지를 밟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브로드웨이'로 불리는 앨커트래즈 B블록 중앙복도(왼쪽 사진)와 바다에서 발견된

탈옥범들의 '우비 구명조끼' 모습. 앨커트래즈역사·FBI 홈페이지

 

 

 

 

이 같은 FBI 결론에도 불구, 일부 음모론자들은 앨커트래즈의 ‘탈출 불가’ 신화를 유일하게 깨뜨린 세 명의 죄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다.

우선 탈옥과 비슷한 시점에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괴한들의 차량 강탈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소행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FBI가 ‘무관한 사건’이라고 못 박았지만, 그럼에도 ‘생존설’은 끊이지 않는다.

이렇다 할 구체적 근거가 없긴 해도, 간접 정황에서 기인한 심증일 뿐이라 해도, 그들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앵글린 형제의 가족도 그들의 생존을 믿는다. 형제의 모친이 수년간 카드 없이 배달된 꽃을 받았다는 게 핵심 근거다.

두 형제가 1973년 여성으로 변장해 모친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형제한테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인이 찍힌 엽서를 받았다”고 말한 친척도 나타났다.

 

2008년 디스커버리채널의 ‘실험’도 이들의 생존설에 힘을 보탰다.

1960년대 당시 교도소 안에서 구할 수 있었던 비옷으로 만든 보트 등을 준비해 똑 같은 탈옥 시도를 해 봤더니, ‘바다가 잠잠하고 근처 조류를 잘 안다면 탈옥 후 육지에 도착했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다만 미 연방교도소관리국(FBP)은 “식단 조절이 어렵고,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외엔 별다른 체력 단련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밀물과 썰물에 대한 지식마저 없는 죄수들의 탈옥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선을 그었다.

 

 

 

 

 

 

 

자신을 1962년 앨커트래즈 탈옥범 존 앵글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2013년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에 보낸 편지. 지역방송국 KPIX5가 2018년 입수해 보도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KPIX5 홈페이지 캡처

 

 

 

 

 

반세기가 훌쩍 지난 2018년, 의문 해소를 위한 ‘합리적 실마리’가 드디어 나타나는 듯 보였다.

자신을 ‘존 앵글린’이라고 밝힌 인물의 편지가 공개됐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 리치먼드 경찰국에 보내진 이 서한은 5년간 꽁꽁 숨겨져 있다가 지역방송국 취재로 그 존재가 드러났다.

 

편지에는 △세 사람이 육지에 무사히 도착했고 △시애틀과 노스다코타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살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또 “모리스와 (내 동생) 클라렌스는 각각 2008년, 2011년에 숨졌다.

나도 암에 걸렸다”고도 적혀 있었다.

 

아울러 “당국이 1년 이하의 징역과 치료를 방송을 통해 약속한다면 정확한 내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제안도 포함됐다.

발송인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FBI는 지문과 필체, 유전자(DNA)까지 조사했지만 “(발송인이 누구인지) 불확실하다”고 판단했다.

편지의 진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서 60년 가까이 해결되지 못한 사건은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존 베넷 미국 연방수사국(FBI) 샌프란시스코 지부 책임자가 2018년 11월 앨커트래즈

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1962년 수감자들의 탈옥 당시 사용됐던 머리 모형의 3D 복제품

을 설명하고 있다. FBI는 당초 만들어진 원본 모형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복제품을

공개하기로 했다. FBI 홈페이지

 

 

 

 

 

그러나 사건은 아직도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국은 탈옥범 추적을 접지 않고 있다.

2003년 FBI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마이클 다이크 보안관은 4년 후 미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그들이 숨졌다는 증거가 없다.

 

사망을 공식 확인할 때까지는 그들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이크는 2019년 은퇴했지만, 당국은 여전히 사건을 그에게 일임하고 있다.

현재 FBI 홈페이지에는 “공유할 단서나 정보가 있으면 다이크에게 연락해 달라. 앨커트래즈 사건은 우리 모두가 풀고 싶은 미스터리”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연락처가 올라와 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한국일보 www.hankookilbo.com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1633).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2)  마피아 손에 들어간 ‘렘브란트’ 그림은 어디에 있나

 

 

 

 

1990년 3월 18일 새벽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보스턴은 아일랜드계 최대 축제 ‘성 패트릭의 날’(17일)을 맞아 흥과 취기로 얼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시 한편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도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보스턴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1840~1924)가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으로 꾸민 이 박물관은 베네치아풍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했다.

야간 경비원 릭 애버스는 여느 때처럼 순찰을 마치고 보안 데스크에서 한숨 돌리고 있었다.

오전 1시 24분, 어둠을 뚫고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경찰 2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소란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했다.

애버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땐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 초인종 소리가 ‘역사상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을 예고하는 ‘경고음’이었다는 것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가 남긴 그림 36점 중

하나인 '연주회'(1663-1666).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렘브란트가 사라졌다’… 81분간 13점 강탈

 

경찰들은 교대 순찰 중이던 동료 경비원 랜디 헤스탠드를 데려오라고 하더니, 이윽고 두 사람 앞에 ‘체포영장’을 내밀며 보안 데스크 밖으로 나오라고 요구했다.

애버스는 당황해 비상 단추를 누를 생각도 못 했다. 헤스탠드는 턱을 늘어뜨린 채 얼어붙어 버렸다. 경찰들은 두 사람에게 수갑을 채운 뒤 마침내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강도다!”

애버스와 헤스탠드는 머리에 접착 테이프가 둘둘 감겨진 채로 박물관 지하실에 갇혔다.

 

박물관 동작 감지기에 기록된 도둑들의 행각은 대범했다.

먼저 박물관의 중요 전시실인 2층 ‘네덜란드 룸’으로 향했다.

범인들은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1633)과 ‘검은 옷을 입은 숙녀와 신사’(1633), ‘자화상’ 동판화(1634)를 벽에서 내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페르메이르의 작품 ‘연주회’(1663-1666)에도 손을 댔다.

전 세계를 통틀어 고작 36점에 불과한 그의 그림들 중 하나가 영영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들고 나가기도 조심스러운 중국 은나라 시대 화병까지 챙겼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의 야간 경비원들은 두 팔에 수갑이 채워지고 얼굴엔

접착 테이프가 감긴 채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서 81분이나 머물며 미술품을 훔친 도둑들의

대담한 행각은 동작 감지기에 기록돼 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맞은편 ‘쇼트 갤러리’에선 프랑스 화가 드가의 스케치와 수채화 5점을 훔쳤다.

벽에 박힌 나폴레옹 근위병 깃발도 가져가려고 나사를 풀다가 포기하고, 그 대신 깃대 끝 청동 독수리 장식품을 떼어냈다.

 

다른 명작들도 널려 있는데 굳이 부수적인 장식품을 욕심낸 건 어딘가 의아했다.

1층 ‘블루 룸’에서는 프랑스 화가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5)가 사라졌다.

 

도둑들이 박물관에 머문 시간은 무려 81분. 그들은 보안카메라 녹화테이프까지 잊지 않고 챙겨서 유유히 떠났다.

그 뒤로는 도둑들도, 그림들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감금된 경비원들은 아침에 출근한 주간 경비원들이 경찰에 신고한 뒤에야 발견됐다.

 

도난당한 그림은 총 13점으로 확인됐다.

값어치는 현재 통화가치로 무려 5억 달러(약 5,820억 원)에 이른다.

 

 

 

 

 

 

 

 

프랑스 세공사 피에르 필립 토미르가 제작한, 나폴레옹 근위대 깃발의 독수리

청동 장식(1813-1814).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미술품을 감형 위한 담보로… 과연 마피아 범행일까

 

미 연방수사국(FBI)부터 사설 탐정까지 모두 이 사건에 뛰어들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동작 감지기 기록만 남았을 뿐, 범인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초기엔 경비원 애버스가 의심받았다.

 

도둑들이 들른 전시실 3곳 중 오직 ‘블루 룸’에서만 동작 감지기에 흔적이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발자취는 애버스의 것이었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고, FBI 수사관들도 정황상 혐의점이 거의 없다고 봤다.

곧 수사당국의 관심은 마피아 조직에 쏠렸다.

 

당시 보스턴에선 아일랜드계 마피아와 이탈리아계 마피아 간 권력 다툼으로 살인, 강도, 마약 등 온갖 흉악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마피아 우두머리들은 훔친 그림들을 ‘담보’로 FBI와 협상을 벌여 감형을 받거나 석방되곤 했다.

이번 사건도 감옥 탈출용 카드가 필요한 마피아 일당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용의 선상에 오른 인물 중엔 아일랜드계 마피아 수장 화이티 벌거도 있었다.

과거에도 훔친 미술품을 독립투쟁 중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무기 구입 자금용으로 넘긴 혐의를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FBI는 벌거와 보스턴 경찰의 강한 유대관계를 파헤치면 경찰이 조력했거나 가담한 정황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끝내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 화가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5).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이탈리계 마피아 조직에선 ‘미국 최고의 미술품 도둑’ 마일스 코너가 의심받았다.

1975년 보스턴미술관에서 훔친 작품과 신변의 자유를 맞바꿨던 ‘전설 속 주인공’이었다.

가드너 박물관 사건 당시엔 다른 범죄로 수감 중이었는데, 그는 과거에 미술품 도둑질을 함께했던 친구 바비 도나티를 지목했다.

 

그러나 도나티는 1991년 내부 권력 다툼 도중 살해당하고 말았다.

코너는 도나티가 은닉한 미술품이 골동품 판매상인 영워스에게 맡겨졌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영워스는 자신이 도나티의 미술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7년에는 지역언론 보스턴헤럴드 기자 톰 매시버그를 깊은 밤 으슥한 창고로 불러내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이튿날 매시버그는 체험기를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우리는 봤다!” 그러나 영워스가 증거로 보낸 물감 조각을 분석한 결과, 렘브란트 시대 것이긴 하지만 그림에 사용된 종류는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수사는 그렇게 제자리를 맴돌았고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 2010년 결정적 제보가 들어온다.

제보자는 도나티와 함께 범행을 계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피아 조직원 로버트 구아렌테(2004년 사망)의 아내 엘렌이었다.

 

그는 “남편이 생전에 미술품 일부를 소유했고, 암투병을 시작한 뒤 동료 로버트 젠타일에게 보관을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FBI는 2012년 젠타일을 마약 혐의로 기소한 뒤 미술품 행방을 캐물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동원해 압박했다.

또 코네티컷주 맨체스터에 있는 자택을 급습, 바닥까지 뜯어내 수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으로 미국 보스턴에 박물관을 연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사진(1888).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빈 액자가 걸린 미술관…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

2013년 FBI는 중대 발표를 한다. 범인들은 뉴잉글랜드 지역 일대 범죄조직 소속이고, 미술품들은 코네티컷주 도시들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옮겨졌다는 내용이었다.

2015년에는 두 범인이 사망했다는 추가 정보도 공개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범인의 신원과 미술품 행방은 미궁에 빠져 있다.

사건 자체도 의문투성이다.

 

미술품 도난 사건은 대부분 3분 안에 범행이 끝난다.

하지만 이 사건 범인들은 시간 여유가 충분하다는 걸 미리 알기라도 한 듯, 무려 81분이나 제 집 안방처럼 박물관을 누볐다.

 

편하게 액자째 가져가지 않고, 굳이 그림을 틀에서 잘라내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화는 물감이 두껍게 발라진 터라, 돌돌 말아서 가져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분명 값비싼 작품들을 노렸을 텐데, 박물관에서 가장 귀한 르네상스 걸작 ‘에우로페의 납치’를 왜 그냥 놔뒀는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도난당한 그림 자리에 빈 액자가 걸려 있는 네덜란드 전시실 풍경.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박물관에는 빈 액자가 그대로 벽에 걸려 있다.

설립자 가드너가 미술품 배치를 보존하지 않으면 모든 자산을 하버드대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빈 액자는 이 박물관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다.

박물관은 보상금 1,000만 달러(117억 원)를 내걸고 지금도 제보를 받고 있다.

 

깃대 독수리 장식품에는 별도 보상금 10만 달러(1억 원)도 책정돼 있다.

2005년부터 박물관 보안 책임자로 일하는 앤서니 아모레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진정한 가치가 도난 사건의 선정성에 묻힐까 걱정된다”며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건 비극”이라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가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진 이튿날인 1986년 3월 1일,

이 사건 현장인 스웨덴 스톡홀름 스베아바겐-투넬가탄 교차로에 혈흔이 남아

있다. SIPA PRESS 자료사진

 

 

 

3 )  총리의 뒤를 노린 총탄... '스웨덴의 가장 긴 밤'이 시작됐다

 

 

 

현직 총리가 쓰러졌다. 괴한의 총탄에 맞았다. 부인과 함께 시내 극장을 찾았다가 귀가하던 길이었다. 범인은 어둠을 틈타 총리 부부에게 총을 난사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경호원도 없었다.

30년이 넘도록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스웨덴의 가장 긴 밤’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 보고 귀가하던 총리, 총에 맞다

1986년 2월 28일 오후 11시 21분. 올로프 팔메 당시 스웨덴 총리는 부인 리스베트 여사와 함께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시내에 위치한 ‘그랜드 시네마’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한 남성이 권총을 꺼내 총리 부부에게 수차례 총격을 가했다.

리스베트 여사는 총상을 입긴 했어도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팔메 총리였다.

등에 총을 맞은 그는 중태에 빠졌다.

 

인근을 지나던 택시기사가 먼저 신고했다.

행인들도 총리 부부에게 몰렸다

. 그사이 범인은 현장을 떠났다.

총리 부부의 경호원이 그 자리에 없었던 탓이 컸다.

 

팔메 총리는 평소에도 경호원 없는 사생활을 즐겼다.

소탈한 성격, 격식을 차리지 않았던 성향 때문이었지만, 비상사태 시에도 총리를 구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된 셈이다.

행인들마저 최초엔 피해자가 총리 부부임을 몰랐을 정도였다.

 

팔메 총리는 주변을 지나가던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됐으나, 끝내 자정을 조금 넘긴 3월 1일 오전 0시 6분, 피격 45분 만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향년 59세였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피격에서 사망까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수사에 착수한 경찰이 확보한 단서는 사건 현장 인근에서 회수한 두 발의 총탄뿐이었다.

총탄 성분은 팔메 총리와 리스베트 부인의 옷에 묻어 있던 납 조각과 일치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인 1983년 모카피아르트 우체국 강도 사건에서 발견된 총탄과도 일치했다. 스미스웨슨제 리볼버 권총용 총알이었다.

 

2년 후인 1988년, 리스베트 여사는 사건 당시 자신이 목격한 암살범으로 알코올 중독자이자 마약 중독자인 ‘크리스터 페테르손’이란 사람을 지명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마땅한 살해 동기를 찾기도 힘들었다.

 

리스베트 여사의 기억이 사실과 일치한다는 객관적 확인도 부족했다.

결국 페테르손은 무죄로 풀려났다.

경찰은 수사를 계속했으나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대신 비뚤어진 영웅 심리를 뽐내려 하는 부나비들만 속출했다.

 

“내가 팔메를 죽였다”며 범인을 자처한 사람만 100여 명에 달했지만, 경찰에 출석한 뒤엔 모두들 ‘거짓말이었다’고 말을 뒤집었다.

수사는 난항에 부딪혔고 이내 지지부진해졌다.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의 피격 사망 사실을 1면에 담은 1986년 3월 1일 자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1면. NYT 캡처

 

 

 

국외로도 뻗친 '정치적 암살' 의혹, 배후는?

 

우발적인 단순 살인이라기보단 '정치적 암살'이라는 의혹이 커졌고, 살해 배후를 둘러싼 의문은 해외로도 뻗어 나갔다.

스웨덴의 중립 성향을 공고히 한 인물이 팔메 총리였기에, 냉전의 양대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됐다.

 

먼저 팔메 총리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베트남전과 관련해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한 게 암살 원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팔메 총리는 미국의 1972년 크리스마스 베트남 폭격에 대해 ‘학살’이라는 수위 높은 표현을 써 가며 맹비난했다.

 

헨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이 “소련이나 중국보다도 (비난이) 거세다”면서 주스웨덴 미국 대사를 철수시켰을 정도다.

팔메 총리는 총리직에 오른 뒤에도 “나는 미국 유학 시절에 미국의 문제점을 보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미국이 중남미와 아시아 등에서 극우 세력 군부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는 이유였다. ‘

미국의 정보요원이 팔메 총리를 살해한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소련도 이유는 충분했다.

 

강경한 반핵주의자였던 팔메 총리는 모든 유럽 국가의 핵무기 보유 금지를 역설하면서 “소련의 존재 때문에 유럽이 비핵화를 못 한다”는 주장을 폈다.

 

게다가 암살 시기가 절묘했다.

1986년 3월, 팔메 총리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비핵화 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회담을 1개월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살해된 것이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개입했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의심을 샀다. 팔메 총리가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강도 높게 비난해 왔다는 이유였다.

사건 1주일 전인 1986년 2월 21일 연설에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인류를 좀먹는 제도로, 우리는 남아공 흑인 민중을 지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고립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남아공을 정조준했다.

 

심지어 “우리는 이 역겨운 제도를 뿌리 뽑는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개혁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라고도 했다.

당시 남아공의 백인 정권이 정보기관을 동원, 팔메 총리를 암살했을지 모른다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인되진 않았다.

 

 

 

 

 

 

 

 

스웨덴 당국이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의 진범이라고 밝힌 스티그 엥스트롬이

사건 이후 언론과 만나 현장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엥스트롬은 수사 초기 용의선상

에 올랐으나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AFP 자료사진

 

 

 

 

 

 

재수사 결론은… “유력 용의자 이미 숨져”

 

사건 발생 18년 만인 2004년, 최초 용의자로 지목됐던 페테르손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페테르손이 숨진 후 그의 친구인 게르트 필킹이 “페테르손이 ‘내가 범인’이라고 털어놨다”고 말하면서다.

 

논란은 재점화했지만,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은 하나도 없었다.

익명의 제보로 모카피아르트 우체국 강도 사건과 팔메 총리 암살 사건에서 사용된 총이 스웨덴의 한 호수에서 발견됐으나 소용 없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필킹의 주장을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스웨덴의 살인사건 공소시효는 25년이었던 터라,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의 공소시효도 2011년 2월 28일부로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이 사건 수사를 계속 수사하기 위해 만료 1년을 앞둔 2010년, ‘사안이 심각한 특정 범죄’에 한해선 공소시효 25년 규정을 없애기로 법을 개정했다.

뒤이어 2016년 스웨덴 수사당국은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팔메 총리 암살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그런데 4년간의 재수사를 거쳐 2020년 6월 내려진 결론은 당초 예상과 달랐다.

페테르손이 아니라, 암살 현장에 있었던 ‘스티그 엥스트롬’이라는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재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는 “엥스트롬이 사망한 상태라 (기소) 절차를 시작할 수 없다”며 “수사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스테판 뢰벤 당시 총리는 “검찰은 사건의 바닥까지 철저히 추적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엥스트롬은 이 사건 초기부터 용의자로 꼽혔다.

 

AP통신은 엥스트롬이 암살 현장에 처음부터 있었다며 “잠시 용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전했다.

다만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 엇갈렸고, 명백한 증거도 없어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엥스트롬은 “나는 처음부터 현장에 있었다”며 “팔메 총리를 살리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지어 스웨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건 현장을 설명하는가 하면, 경찰 수사 방향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AP통신은 덧붙였다.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수사당국이 파악한 유력 용의자가 세상을 떠난 만큼 팔메 총리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열강의 사주였는지, 팔메 총리한테 개인적 원한을 품은 사람의 단독 범행인지, 그도 아니면 뚜렷한 이유 없는 우발적 범행이었는지, 이 사건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스웨덴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지도자를 잃은 비극을 ‘미제 사건’으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올로프 팔메의 얼굴이 담긴 스웨덴 기념우표. 스웨덴 우정당국은 팔메 총리 서거 이후

고인을 기리는 의미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2016년 2월28일 올로프 팔메 전 총리 암살 30주년을 맞아 스웨덴 스톡홀름 중심가

스베아베겐 거리에서 시민들이 꽃을 놓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 사진=EPA연합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김진욱 기자 kimjinu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