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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고향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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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이야기(책)/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연재)

2020. 8. 18.

정선 오지마을

 

마음의 고향 정선 

 

강원도 정선군은 북으로는 평창군 서로는 영월군 남으로는 봉화군에 싸여 있으며

동편과 남편에 동해시 삼척시 태백시가 있다.

 

여행을 즐기며 산과 바다를 넘나들던

한국에서 우연히 지나갔던 정선은 내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깊고 적막한 산 기운에 매료되었던 곳이다.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정선 산골에서

가축들을 키우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하였다.

 

누님의 알선으로 가게 된 정선 권사님의 가정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가족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집안이었다.

나의 부친께서 20년 전쯤 아침 운동 길에 폭설을 마다하지 않고

날마다 즐기던 아침 테니스 대신 두 시간가량 걷고 나서

감기가 왔는데 폐렴으로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다 회복되셨다.

80 중반에 접어든 고령이라 회복 후에도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자연을 좋아하셨고

강원도 산간 마을로 휴양차 가신다는 말을 멀리 미국에서 전하여 들었다.

강원도 정선에 가까이 지내는 제자 한분이 귀농을 하여 살고 있었는데 스승을 초청한 것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한 두 달인가 그곳에 머무르시다가

정선을 할퀴고 지나간 강한 태풍으로 물난리를 겪고 철수하셨다.

아버지는 이후 집에서 한 달간을 지내시다가 소천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머무르신 곳이 어떤 곳인가 궁금하였다.

그리고 병약 해지신 아버지를 맞아 돌보아 주신 분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그때 미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볼 수 없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들과 전화와 메시지로 연락을 하고 우선 그 집에 머물기로 하였다.

그 집은 정선읍 인근 마을 한 지역의 산허리에 집을 짓고

텃밭에서 과일과 채소들을 가꾸고 황토방을 지어 민박을 하며 지내시는 분들이었다.

 

영덕에서 청송 교회 목사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동해시로 떠났다.

동해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들이 많은 곳이었다.

늘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 함에 싸여있던 나는 서울에서 쉽지 않은 거리에 있던

동해바다를 일 년 에 한두 번씩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서울 강릉 간 고속도로가 없었던 때라 국도를 따라

때로는 이면 비포장 도로를 이용하여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동해를 달리다가

마음이 머무는 곳에 릴 낚싯대를 드리우고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낚싯대를 움켜쥔 손에 전해주는 그 맛을 기다리며 자연이 주는 쉼을 얻고 돌아오곤 하였다.

동해시를 따라 해안가를 올라가는 동안 한국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느덧 버스는 동해시 터미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해에서 정선까지 두 시간 반쯤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버스가 정선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동해에서 정선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내가 참으로 즐기고 좋아하던

강원도의 숲과 계곡이 아우러진 깊은 산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뉴스에서 들어 알고 있던 카지노 마을을 지난 얼마 후 버스는 정선읍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에, 권사님 댁으로 전화를 한 15분 후

아버지의 제자였던 권사님의 남편이 마중을 나오셨다.

그분과 함께 강을 끼고 이리저리 돌아 산 언덕을 오르니

마을이 끝나는 산 허리에 예쁜 집이 나왔다.

 

권사님이 문을 열고 나오시며 반갑게 맞아주신다.

나의 모습을 이러저리 살피시더니 아버지 목사님을 너무 많이 닮았다고,

목사님이 젊어져 다시 오신 것 같다, 하시며 반겨주셨다.

짧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권사님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었다.

나그네 길을 떠난 나에게 힘센 우군을 얻은 것 같아 마음 이 든든하였다.

 

그곳에 여장을 푼 나는 정선군 지도를 펴고

그분들의 조언을 구하며 오지를 찾아 나설 길들을 익혀 나아갔다.

정선군은 곳곳에 ‘리’단위의 마을들이 분포하고 있다.

나는 읍내의 터미널에서 마을버스들을 이용하여

지도에서 탐색한 곳을 탐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는 주로 일만오천 보에서 이만 오천 보 정도를

산길과 강둑길 그리고 들녘의 한가로운 길들을 걸어 다녔다.

낯설고 인적이 드물고 끊긴 곳들을 돌아다녔다.

 

숙소에서 터미널까지는 편도로 걸어서 40분이면 넉넉하였다.

운동 삼아 그리고 호젓한 강과 들을 통과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

낯선 사람이 마을을 지나가니 의구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어떤 이들은 반갑게 인사를 꾸벅하며 지나간다.

마을의 개들도 낯선 발걸음에 놀랜 듯 짖어 댄다.

뱀과 쥐와 닭은 어려서부터 기피하는 동 물들인데

인적이 없는 강을 통과하는 다리에서 날렵하게

몸을 구불거리며 지나가는 뱀을 마주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나의 걸음은 속도를 더하게 되었다.

 

며칠간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정선이 주는 마음은 평온함이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번잡한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밭에서, 산길에서, 가게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뿐

변함없는 산야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그리고 이따금씩 보이는

닭과 소와 개와 돼지들의 단조로운 모습뿐이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민박을 운영하시고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시는 권사님 부부와 함께 저녁을 나누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시는 권사님께서는

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야기들을 간증하듯 많이 하셨고

존경하는 스승이셨던 아버지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이 들려주었다.

 

가을의 문턱에 있는 9월 말경으로 기억이 되는데 정선의 밤은 제법 추웠다.

민박을 하시는데 몸도 불편하시고 해서 쉬어가며 민박을 하신다고 하였다.

방이 세 개인 가옥 외에 별채로 방과 샤워시설

그리고 음식을 지을 수 있는 작은 주방시설이 있는 황토방이 있었다.

하루에 십만 원 하는 방이 비었다고 편히 그 방을 쓰라고 내어 주셨다.

그 방은 커튼을 젖히면 멀리 강을 끼고 있는 산이 바라보이는 좋은 풍경이 있었다.

나의 정선의 생활이 속히 안정을 찾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곳은 기도와 예배를 드리기에도 너무 좋았다.

별채라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육십 후반과 칠십에 접어드신 권사님 부부께서 참으로 선하고 부지런하셨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일손을 놓을 새가 없다.

장보기 텃밭 가꾸기 과실수 가꾸고 수확하기 집안 청소와 마당 청소

그리고 겨울을 대비하여 땔감을 준비하는 일로 매우 분주하였다.

남편 집사님께서는 파트타임으로 정선의 산림을 돌보는 일을 갖고 계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들을 도와 통나무를 쪼개어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일을 도왔다.

 

나무는 산에 떨어진 나무들을 모으기도 하고

나무를 파는 곳에서 트럭 단위로 가져오기도 한다.

어릴 적에 월동 준비로 연탄을 사들여 쌓아 놓던 일이 생각이 났다.

 

숙소는 마을이 끝나는 산 중턱에 있었고

그 위로는 더 이상 가옥이 없이 나무들이 들어찬 산이었다.

숙소 뒤에는 일본산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데 그 주인은 따로 있었다.

산림법에 일 년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들을 속아내며 자를 수 있는 기준이 있나 보다.

집사님께서 산림 주인의 허가를 받아 일찍이 베어 놓은 통나무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월동준비로 땔감을 준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팔 길이만큼씩 베어진 통나무를 들어 올리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나무가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집사님께서 일러주신 요령으로 나무를 굴리어 내어 옮기기도 하고

좀 작은 것들은 몸에 바싹 붙여 들어 나르기도 하여 도끼질하기 좋은 곳으로 모아 놓는다.

몇 번의 작업으로 허리가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 일에 익숙지가 않으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허리를 잘 피지 못하는 나를 보신 권사님께서

허리 다치면 큰일이라고 허리를 바로 펴야 한다며 조언하여 주셨다.

 

이곳에서 그분들의 삶과 섞이며 그곳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또한 틈틈이 지도를 펴고 정선의 오지들을 찾아 나섰다.

그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요즈음은 토착민보다

귀농 귀촌으로 삶의 자리를 옮긴 가옥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도회지의 삶에 익숙한 사람들과 벽지 오지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사람들과는

문화와 삶의 방식이 틀릴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하여 분쟁들이 발생되고 있다고 하였다.

토박이 주민들은 담 없이 살아가고 있고,

소유한 땅의 길은 지나가는 행인들이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회지 사람들이 소유한 땅의 전부를 담으로 막고 울타리를 치고 살아감으로

통행에 불편을 끼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토박이 주민들은 도회지 사람들이 세상 지식이 많으니

그것들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귀농 귀촌의 사람들은 병약한 몸 때문에 건강의 회복을 바라며,

복잡한 도회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서, 새로운 삶의 환경을 찾아서,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또 다른 삶을 택하여 이주한 사람들이다.

토착민들과 동화하여 살아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깊은 산골짜기에도 귀농 귀촌인들이 들어와

컨테이너 하우스나 개량 농가주택 현대식의 새 가옥들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소유한 밭과 산에서 수확한 것들로

자급하고 수익을 내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지마을에서도 승용차를 소유한 가옥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강원도 오지의 마을들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젊은 시절 산길들을 지나며 바라보던 오지 마을의 모습은 보기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