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황애덕

LA 3.1여성동지회 2015. 12. 3. 03:33


3.1여성 동지회를 창설하신 황 애덕여사님

독립유공자황 애덕 여사님



황 애덕 여사님(黃愛德, 1892년 4월 19일 ~ 1971년 8월 24일)

독립유공자 황시덕(사진·본명 황애덕)여사님께서는 1971년 8월 24일 상오9시 인천시 부평동 276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셨읍니다. 올해 79세의 황 여사님께서는 그 동안 노환으로 병석에 있었읍니다. 3·1 운동당시 애국부인회를 조직, 독립운동에 참가하시여, 日帝(일제)에 의해 4년간의 옥고를 치른 황 여사님은 해방 후 중앙여중-고를 운영하는 송죽학원의 이사장직에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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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황애덕 여사 별세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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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황 애덕 여사님과 동생 황 신덕 여사님  

황애덕(黃愛德, 1892년 4월 19일 ~ 1971년 8월 24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제안(齊安).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이름은 '에스터(Esther)'를 음차한 것이라 황애시덕(黃愛施德), 황에스터로도 불린다. 여성운동가 황신덕은 그의 여동생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 비밀결사 송죽회를 구성해 운영했다. 도쿄에 유학 중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고,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3·1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김마리아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 전국에 지부를 확장하여 독립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해 12월 조직이 적발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2년만에 가석방되었다.


이후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김마리아, 박인덕 등과 함께 근화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귀국한 뒤로는 경성여자소비조합을 결성했다.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는 6.25 전쟁의 구호 물품을 조달하여 대한민국으로 보내주었다. 휴전 후 귀국하여 전쟁 고아와 부상자, 장애인, 과부 등을 구호하는 사업을 했다. 3·1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황애덕은 평안남도 평양 태생이며 유학자인 아버지 황석청(黃錫淸)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인 애덕(愛德), 애시덕(愛施德)으로 에스터를 한글로 음차한 것이다. 황신덕1898년생으로 그의 여동생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3세 때 평양 정진여학교(正進女學校)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1905년 정진여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부로 올라와 이화학당(梨花學堂) 중등부에 입학하여 1910년(융희 4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그해 한일 합방이 터지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고, 1913년 비밀결사 송죽회를 구성해 운영했다.


1913년 동료 교사 김경희(金敬喜), 교회 친구 안정석(安貞錫)과 더불어 비밀 여성학생 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고, 애국사상이 깊던 학생들을 엄선하여 한글 교육과 국사 교육 등의 정신교육을 행하고 송죽회의 지부 설립과 연락망을 지도하면서 동시에 군자금과 물자를 마련하여 중국만주의 조선인 항일 독립 단체에 송금하였다.


1918년 선교사 홀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로 건너가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김마리아, 나혜석(羅蕙錫), 현덕신(玄德信), 송복신(宋福信), 이은혜(異恩惠), 정자영(鄭子暎) 등과 함께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일본 유학중인 조선인 여자 유학생간의 친목과 더불어 기독교 종교 활동,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그해 2월 8일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1월부터 그는 조선인 여학생들을 찾아다니며 독립 선언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고, 1919년 2월 6일동경유학생회 총회 때까지 남녀는 만물의 두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독립운동에 여자들도 당연히 참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과 여자도 국민이고 백성이라는 점을 들어 구국의 운동에 동참해야 함을 적극 역설하였다.


2월 8일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가 풀려났으며, 파리 강화회의한국인여성 대표의 참석을 보조하기 위해 몇명의 남녀 결사대원들을 데리고 국내에 잠입하여 활약했으나 실패하였다.


여성대표로는 신마실라(申麻實羅)가 선정되었는데, 황애덕과 단원들은 그의 여비 마련을 위하여 노파, 부랑자, 여성 잡부, 노숙자, 일본 여인 등으로 변장하여 각자 고향과 지역 연고지를 찾아 모금을 하였다. 그해 3월부터 전국적으로 3·1 만세 운동이 확산되자 국내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3월 19일 3·1 만세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5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19년 9월에 가석방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외에도 많은 기독교인이 투옥되자, 그는 풀려난 뒤 김마리아, 오현관(吳玄觀), 오현주(吳玄洲), 김순애(金順愛), 이정숙(李貞淑) 등과 함께 이들 투옥, 재판중인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을 도울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에 참여, 애국부인회 총무직을 맡아 조직을 전국 규모로 확대하였다. 그 후 대한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와 통합 발족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가 출범하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무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밀정의 제보로 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상해 임시정부로의 독립자금 모금과 송달을 하다 발각당하였다.


12월 애국부인회 조직이 적발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애국부인회 임원이 일제히 검거될 때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넘어갔다. 이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로써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는 복학하지 못하고 중퇴해야 했다.

재판 결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던 중 옥중 수감된 여성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고 기독교 신앙인으로 입교시켰다. 1920년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하였다.



가석방 후 이화학당 대학부에 3학년으로 다시 들어갔고, 농민·근로자 계몽 사업에 참여하였다. 1920년 이화학당 대학부(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이화여전 기숙사 사감을 겸임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김마리아, 박인덕 등과 함께 근화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귀국한 뒤로는 경성여자소비조합을 결성했다.


192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8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간 후, 시카고에서 가정부 일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 등을 벌다가 너무 힘들어 친구 신마실라의 도움을 받고자 뉴욕으로 갔다가 한때 향수 장사 등을 하였다.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윤원길, 박인덕 등의 미국 동부지역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였다. 임원진은 회장 김마리아, 총무 황에스터, 서기 이선행, 재무 남궁쪼애안, 실업부 황에스터, 안헬린, 윤원길, 교육부 김마리아, 김애회, 주영순, 사교부 김인덕, 림메리, 류동지 등으로 피선 구성되었다.


이 중 이선행은 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 후배 동창으로 곽대학에도 함께 다닌 바 있으며, 김인덕은 박인덕인 것이다.


1927년 근우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8년 귀국 후 농촌계몽사업과 여성계몽사업, 기독교 신앙전도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9년 무렵 김활란, 최활란(崔活蘭), 황에스더 등 일부 기독교 여성운동가들은 근우회에 '발을 끊은 상태'였다. 나중에 김활란은 '조직과 기관에 얽매지이 않고 개인적으로 교양사업에 주력'하자면서 '사상을 통일시키려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반'이라고 자기 행동을 해명했다.


1930년 혼인 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열차편으로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남편과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인 농장에 취직, 농장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포들에게 야학과 계몽 운동을 하였다.


8·15 광복 후 이은혜, 김활란, 동생 황신덕기독교계열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여성단체총연맹의 회장을 맡는 등 우익 여성단체에서 활동했다.

1945년 12월부터는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섰고 1946년에는 여성단체협의회에 참여하여 여성 교육 문제, 여성의 참정권 문제 타결에 힘썼다. 제헌국회 총선에도 여성단체총연맹 소속으로 서울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50년 미국에 체류 중 6.25 전쟁 소식을 접하였다. 6·25중 미국에 있었으므로 그는 미국내의 한인 교민사회를 찾아가 고국에 구호물품과 모금 활동을 하였고, 이후 미국내 12개주를 순방하여 구호품을 수합하여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 이후 전쟁 부상자와 장애인, 미망인과 고아들, 이재민 등에 대한 기술 지도를 위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했고, 전쟁 부상자와 장애인, 과부와 고아들, 이재민에 대한 구호, 지원 사업, 직업훈련 지원과 알선 활동을 추진했다. 1960년 3월 1일 중앙여자고등학교 주최 3·1운동선도자 제1회 찬하회를 주관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그 뒤 1967년에는 3.1 운동과 2.8 독립 선언등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 여성운동 동지들을 규합하여 3·1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내셨다.


1971년 8월 24일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賞勳(상훈)

  • 1963년 대통령 표창
  • 1977년 건국포장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 아버님 : 황석청
  • 어머님 :
  • 자  매  : 황신덕
  • 이  질  : 임형빈



  • 대일항쟁기 여성 독립운동의 불씨, 송죽회

    3·1 운동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이고 규모가 큰 독립 운동으로 일컬어지죠! 3·1 만세 운동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국민들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성들의 참여도 활발했기에 그 가치를 높이 평가 받는데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대한애국부인회 등 독립 운동 단체를 탄생하게 한 송죽회를 만나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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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죽회(松竹會)1913년에 조직된 항일 비밀여성단체로, 송죽결사대라고도 합니다.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합쳐 만든 이름이에요. 이 외에도 이문회(以文會유신회(維新會공주회(公主會) 등 다양한 별명을 가지고 활동했다고 하는데요. 비밀유지를 철저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위장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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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죽회는 망명지사의 가족을 돕고 독립군의 자금 지원과 실력함양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어요. 그래서 매 달 30전씩 회원들의 회비를 받고, 자수와 수예품 판매 사업을 해서 만주 등 국외 독립 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보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의식을 깨우기 위해 (실력함양) 비밀집회를 개최하며 매주 토론회와 역사 강좌를 가졌다고 하네요. 당시로써는 쉽지 않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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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죽회는 평양 숭의여학교의 교사 김경희·황에스터(황신덕,황애덕)와 졸업생 안정석이 재학생 중 애국심이 투철한 박현숙·채광덕·이마대·송복신·이효덕·김옥석·최자혜·서매물·최의경·이혜경 등 20명을 선발해 조직하게 되었는데요. 송죽회가 설립·유지 가능했던 첫 번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당시 평양의 숭의여학교는 장로-감리교계가 합동으로 설립했기 때문에 장로교가 우세한 남한 출신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황에스터 선생은 학생들의 지역적 분포가 전국적임을 확인하고 조직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여성 지식인들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숭의여학교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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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이유는 철저한 비밀유지입니다. 투철한 항일구국정신과 더불어 엄격한 회원가입제가 조직의 철칙이었는데요. 신규 회원은 기존회원 1명의 추천을 받아 만장일치로써만 입회가 허락되었습니다. 검증된 확실한 회원만 송죽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더불어 앞서 소개해 드렸듯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점조직 형태로 신속하게, 흔적 없이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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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송죽회의 인물과 활동에 대해 살펴볼까요?

    설립 주축인 황에스터 선생은 서울, 김경희 선생은 숭의여학교, 안정석 선생은 교회를 중심으로 주된 활동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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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에스터, (출처 :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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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에스터 선생은 송죽회 활동을 하며 1918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셨고 유학길에 김마리아 선생을 만나 평생 독립운동의 동지가 되었는데요. 두 사람은 현덕신· 송복신 ·정자영 등과 학흥회를 조직하여 유학생 사이에 배일사상을 북돋우고 애국심을 높이는 데 노력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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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감옥소에서 나온 뒤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들(1922). 뒷줄 오른쪽이 황에스터.

    (출처 : 연동교회, 수원일보)


    황에스터 선생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가는 가운데 319일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뒤 김마리아 선생과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안타깝게 여겨 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맡으셨습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로의 군자금 송달 등 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경찰에 들켜 애국부인회 임원이 모두 검거되는 사태를 맞았고 이때 대구경찰서에 다시 수감되는 등 험난한 세월을 겪으면서도 독립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 .1977년 건국포장을,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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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김경희 선생은 망명지사 가족 돕기와 독립군의 자금 지원, 실력 함양에 목적을 두고 활발한 송죽회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16년 일제에 의해 교사직에서 강제 면직된 뒤에는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민족 계몽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습니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기독교계 여성들을 이끌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시어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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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국내에 잠입해 평양에서 오신도 선생과 송죽회의 안정석 선생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병을 얻어 191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에게는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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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죽회의 활동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살펴볼 수 없지만, 3.1운동에 여성들의 거국적인 참여와 대한애국부인회로 발전한 것만큼은 가시적인 성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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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대한 애국 부인회는 어떤 단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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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애국부인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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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직후 평양에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장로교파와 감리회파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각각 조직되었습니다. 장로교파의 애국부인회는 19196월 한영신 선생의 주도로 조직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를 후원하였으며, 감리회파의 애국부인회는 6월에 박승일·이성실·최순덕 등이 역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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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국내 비밀조직을 통합하여 항일투쟁세력을 결성하고자 연합을 추진하게 되는데요. 이에 독립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다는 목적 아래 대한애국부인회로 통합하였습니다. 본부는 평양에 두고 지방에 있는 부인회를 지회로 흡수하여 임원에는 총재 오신도, 회장 안정석·최순덕, 부회장 한영신 선생 등이 선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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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은 100명이 조금 넘었으며, 회원과 동지를 통해 군자금 2,100원이 모였습니다. 일부 임원은 가지고 있던 금·은가락지를 희사하기도 했고요. 이 자금은 두 차례에 걸쳐 김정목과 김순일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19201015일 금산지회장 송성겸 선생이 군자금을 나르던 도중 붙잡혀 관련인 100여 명이 검거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 자체가 상당히 제약되어 있던 당시, 힘들고 위험한 일에 어떠한 조건도 없이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뛰어들었다는 점이 감동적이고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애국을 실천하며 최선을 다한 수많은 독립 운동 열사 분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네요.


     참고 자료

    http://m.paiwha.hs.kr/sub.html?submenu_id=86&cmd=read&board_id=4076&mode=list

    1928년은 그녀에게 인생의 대전환기를 가져오는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해에 1925년 미국에 건너가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서 1928년부터 협성 여자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황애덕교수를 만나게 된다. 또한 1928년 훗날 농촌여성운동에 함께 헌신하게 되는 최용신을 만나는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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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애덕 교수는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학과 과정에 농촌지도학과를 개설하여 농촌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학기 중에는 학생들에게 농촌 실정과 농촌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들 농민들을 위해 농촌으로 가야한다고 가르치고 여름방학 때는 학생들을 농촌을 파견해 실습하게 하는 등 농촌 사업에 착수 하였다.


    여성 권익과 민족정신의 교육자 황애덕 선생님.


    네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성불성은 불문이다.
    선악 간에 내가 심은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거둔다.
    이상이 위대할수록 그 실현의 때는 멀다
    밀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말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되는 말인데요. 이 말은 바로 황애덕 선생의 생활신조입니다. 흔히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독립운동가는 대부분 남자 독립운동가들인데요.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여성 독립가도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황애덕 선생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황애덕 선생에 대해 아는 분이 많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이 글을 통해 황애덕 선생에 대해 많이 알아가셨으면 합니다.


    황애덕 선생은 ‘황에스터’라고도 불렸는데요. 그 이유는 선생의 어머니가 여섯 째 딸을 낳고 사경을 헤멜 때 미국인 의사의 도움으로 순산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집안이 모두 기독교 신자가 되어 선생 또한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소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 입학하였고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민족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 황에스터선생은 여학교 동료 교사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송죽회를 조직하여 항일독립단체의 군자금 마련을 도왔습니다.


    ▲선생이 근무한 숭의여학교 (출처 : 국민일보)


    선생이 활동한 송죽회는 김경희를 주축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으로 전국 곳곳의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키우는데 노력했습니다. 비밀조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회원관리를 했고 점조직으로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일제의 의심을 피했습니다. 이러한 송죽회는 훗날 황애덕 선생이 활동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황애덕 선생은 유학길에 김마리아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의 동지로 함께하게 됩니다. 선생은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여성 대표의 여비를 구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지방을 돌며 성금을 모았습니다. 3·1운동 당시에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출옥 이후 본격적으로 김마리아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에 참여하며 활동범위를 확장해갔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 공판 기사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된 여성항일단체입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부를 조직하면서 전국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군자금 모금과 전달을 주목적으로 하였으며 황애덕 선생은 이곳에서 총무로 활동하며 모든 것을 총괄했습니다. 애국부인회는 여성들에게 국권과 인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여성 또한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회원 중에는 여교사와 간호원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활동 시작 두 달 만에 약 6000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료의 고발로 황애덕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러나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함께 있는 죄수들을 계몽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출옥 이후,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귀국 이후에는 감리교여자신학교 농촌과장으로 농촌계몽에 힘썼습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하며 꾸준히 여성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여성의 권익과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일생을 바쳤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이 수여하였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과거에 비해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여성은 보호받아야하는 존재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전 여성의 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수감과 출옥을 반복하던 황애덕 선생이 있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매우 낮았던 그 시절 자주적이고 능동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선생의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만든 대한민국이니 말입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캐스트, 두산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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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황애덕 여사 별세 - 중앙일보

    김마리아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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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독립운동의 발자취⑬] 시대의 동행자, 황에스더 - 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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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황애덕 여사 별세 

    [출처: 중앙일보] 독립유공자황애덕 여사 별세

    [중앙일보] 입력 1971.08.25 00:00 / 종합 7면 지면보기<!--[if !supportEmptyParas]--><!--[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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