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닮고 싶은 사람들

생선주세요 2005. 2. 21. 13:54
해피오픈
얼굴없는 ‘귀족들’
방송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 봄직한 라디오 작가. 그만큼 한 프로그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전체 분위기를 이끈다. 자신들의 '멘트'가 청취자들의 생각과 감정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커다란 매력이다.
청소년 시절, 라디오 FM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감상에 빠졌다. 무더운 더위와 교통 체증의 택시 안,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흘러나오는 편지 사연에 혼자 웃음을 지었다.
청취자를 감상에 빠뜨리고, 웃음을 짓게 하고, 흥겹게 만드는 이들이 라디오 작가다. MC의 구수하고 톡톡 튀는, 삶의 정곡을 찔러대다가도 가끔씩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멘트’는 대부분 이들의 작품이다. 애드리브와 사고의 폭이 넓어 청취자를 끌어들이는 MC의 역량을 간과할 순 없지만 여전히 줄거리는 작가의 몫이다.

라디오 작가. 프로듀서가 아니어서 명예도 없고 MC도 아니어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도 작가들 사이에서 라디오 작가는 ‘귀족’으로 불린다.

방송 작가들로부터 “어디 빈자리 없냐”는 문의도 자주 듣는다.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다는 의미. 그만큼 매력이 있다.
그림이 되어야 하는 텔레비전과는 달리 자신의 글로 프로그램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갈 수 있고, 한 번 틀이 잡히면 상대적으로 시간 활용이 용이하다는 점이 선호 이유로 꼽힌다.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프로그램당 메인 작가 1명에 보조 작가 1명 정도가 있다. 음악 전문 프로그램인 경우, 선곡을 담당하는 음악 작가가 1명 추가된다. 프로듀서와 MC까지 합쳐 5∼7명이 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작가만 해도 6∼7명씩 있는 텔레비전과 비교하면 소수 정예인 셈이다.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기획과 방향은 프로듀서가 결정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작가가 해야할 일. 오프닝 멘트와 각 코너의 구성과 리드 멘트를 쓰고, 퀴즈 코너가 있으면 문제도 뽑는다. 넘쳐나도록 쏟아져 들어오는 청취자의 편지를 선별하고, 방송중 걸려오는 전화를 미리 받아 ‘얘기되는 전화’를 연결하는 일도 담당한다. 여기에 초대 손님을 섭외하기도 하며 클로징 멘트를 쓰기도 한다.
MC가 노련한 사람일 경우는 모르지만 초보일 때는 방송되는 청취자 엽서 빈칸에다 엽서에 대한 느낌까지 적어준다. 물론 작가의 글을 MC가 얼마만큼 소화해주느냐도 중요하다. 순발력도 필수적이다. 진행하는 스튜디오가 청취자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갑작스레 진행 방향을 틀거나 대본을 수정하면 1∼2분 만에 대본 전체를 바꾸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할 때도 종종 있다.
때문에 라디오는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
적은 인원이다보니, 호흡이 맞지 않으면 일하기가 어렵다. 의외로 일선 라디오 작가들의 고민은 인간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 한 작가는 “어차피 프로듀서가 프로그램의 중심이고 작가는 프로듀서의 생각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면서 “그 게 안 될 때는 프로그램 전체가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라디오가 AM과 FM으로 나뉘는 것은 주지의 사실. 작가가 방송 대본을 쓴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라디오 작가는 둘의 차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아무래도 FM은 음악 중심이고, AM은 말과 사연이 중심이다. 또 FM은 10대, 30대 등 대상층이 정해져 있지만 AM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 사이에서는 ‘AM은 중졸, 고졸이고 FM은 대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만큼 AM은 재미있고 때로는 ‘유치’하게 써야 하고 FM은 세련되게 써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작가들은 AM과 FM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라디오를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라디오 작가가 지녀야 될 가장 큰 자질로는 우선 ‘말글’을 꼽는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를 십수 년 동안 써온 작가 박경덕은 “라디오는 상상의 매체”라면서 “MC의 말을 들으면 그 내용이 상상될 수 있는 그림 같은 글을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력. 프로그램마다 시간대별로 독특한 차별성이 있고, 담당 프로듀서가 프로그램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를 이해하고 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같은 사안이라도 다루는 프로그램에 따라 안목이 달라진다. 우스개로 비꼬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해 들어가는 프로그램도 있다. 그와 더불어 아침과 저녁, 오후의 시간대별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작가의 노력에는 특별한 공식이 없다. 맡은 프로그램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기본적인 것은 라디오라는 매체가 어차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늘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 작가 박경덕은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귀를 열어두고 산다는 게 힘들었지만 이제는 자동적으로 귀가 열린다”며 “라디오라는 매체가 주는 보람도 상당히 크다. 라디오의 특성상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텔레비전 등에서 활용되는 코너들이 사실은 라디오에서 출발했던 형식인 경우가 많다”고도 소개했다.

작가에 따라 다르지만 매일 1∼2시간씩 신문과 잡지, 뉴스를 보는 것은 기본적인 일과에 속한다. 또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작은 에피소드를 모으려 서점도 자주 들락거린다. 음악 작가 역시 비슷하다. 외국 방송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최신 음악을 섭렵하고 레코드 회사를 훑기도 한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가장 최근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방송 시작 1∼2분 전에 대본이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라디오 작가가 되는 길은 따로 없다.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알음알음으로 발탁된다. 잡지사 등에서 경력을 쌓다가 입문하는 케이스도 있으나 주로 각 방송사의 방송 아카데미 등을 통해 초보 시절을 거친 뒤 능력을 인정받고 아는 사람의 소개로 들어간다. 그러나 계속 버티기는 상당히 어렵다는 게 중평.

프로그램이 뜨면 다행이지만 ‘죽는’ 경우 작가가 모든 책임을 질 때도 생긴다. 매일 시청률로 승부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그날그날 평가되지만 보통 1년에 2번 개편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경우 호흡이 길다는 장점은 있지만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재기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실력이 있다면 어디서나 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애써 믿는다고 한다. 음악 작가 7년차인 신윤호(33)는 “음악이 좋아서 음악 작가가 됐고,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만족한다”면서 “그 외의 프로듀서와의 마찰이나 방송 과정에서의 스트레스 등은 자신이 풀어나갈 문제”라고 말했다.

글 : 남도영 국민일보 문화부 기자
사진 : 박성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