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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2021. 2. 25. 17:22

<삼처전심(三處傳心)>

  

     삼처전심(三處傳心)이란 부처님께서 법을 이을 후계자로서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을 말한다. 선종에서 말하는 세 곳에서의 전심이란,

     ➀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듦에 가섭만이 홀로 미소를 지은 것.

     ➁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 - 다자탑 앞에서 부처님께서 자리를 반 나누어 가섭과 같이 앉게 한 것.

     ➂ 니련하반 시쌍부(尼蓮河畔示雙趺) - 부처님이 니련강 변의 쌍림(雙林)에서 열반하심에 가섭이 늦게 도착해서 슬피 울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민 것을 말한다.

     즉, 위 세 가지 사건은 부처가 꽃을 들고(擧拈花), 자리를 나누어 앉고(分半坐), 관 밖으로 양 발을 내밀었던(示雙趺) 일화를 지칭한다. 이것을 선종(禪宗)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에게 세 곳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한 것이라 해서 삼처전심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교(敎)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교에 대한 우월을 주장하는 선(禪)의 정체성과 연결돼있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의 특별한 정체성과도 연관이 있다. 또한 불교의 조사선(祖師禪)이 교외별전이 됐다는 근거가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가섭 존자가 선(禪)의 등불을 별도로 받았다는 세 개의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용어 자체가 보여주듯이, 이것은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의 전심(傳心)이라는 개념과 연관돼 있다. 중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선종은 다른 불교종파들, 특히 교종과 그 자신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중국 선종은 이 ‘전심(傳心)’이라는 개념을 적용해서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시켰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초기 중국의 선승들은 부처 심법(心法)의 전승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발전시켰다. 불법이 경전을 통해서 보존되고 전승된다는 기존의 인식에 도전하면서, 그들은 부처의 가장 뛰어난 법은 심법(心法)이라며, 이 법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에 의해서만 전승된다고 주장했다.

     삼처전심이라는 일화들 각각이 특별한 선의 일화로서 발전한 것은 중국 송(宋)대이지만,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용어 자체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선사들이 이 개념을 통해서 한국 선의 종파적 우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했던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①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부처님께서 가시굴산(耆闍崛山)이라고도 하는 영축산((靈鷲山, Gṛdhrakūţa)에서 <법화경>을 시설하는 법회를 열었을 때, 이를 축하해서 대범천왕(大梵天王)이 꽃비를 내리어 공양을 했다. 이에 부처님은 그 중에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니[염화시중(拈華示衆)], 거기 모인 수많은 대중들은 그 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 하는데, 오로지 가섭(迦葉) 존자만이 그 참뜻을 이해하고 빙그레 웃었다[염화미소(拈華微笑)]. 이에 부처님은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등 불교진리를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영산회상 거염화’의 이야기는 중국 송(宋)나라 오명(悟明)이 편찬한 <전등회요(傳燈會要)>에 근거를 둔 것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함을 말한다. 이것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진리를 전한다는 뜻으로, 선 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따라서 염화미소(拈華微笑)는 염화시중(拈華示衆)과 같은 맥락의 말로서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선(禪)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하는 이야기로 기록돼 있다. 여기서 염(拈) 자는 집다, 집어 들다는 말이다. 이로써 선종(禪宗)이 시작됐고, 이 말이 선종의 종지(宗旨)가 됐다.

     • 정법안장(正法眼藏) -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간직하는, 깨달음을 뜻함.

     • 열반묘심(涅槃妙心) -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 실상무상(實相無相) -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 미묘법문(微妙法門) - 진리를 깨닫는 마음을 말한다.

     영축산(靈鷲山)은 그리 높지 않는 산이다. 지금도 산 정상엔 옛날 부처님이 머물던 정사 터가 있다. 2500년 전, 부처님은 여기서 꽃을 집어 들었다[거염화(擧拈華)].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어떤 이는 “부처님이 들었던 꽃은 연꽃”이라고 강조한다. 진흙을 뚫고서 올라오는 연꽃’의 메시지를 가섭이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웃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집어 들었다는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꽃의 모양이 아니라 이 꽃의 바탕(본질)을 보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꽃의 모양이 아니었으니 연꽃이든 국화꽃이든 상관이 없다. 다만 그 꽃의 본질, 꽃이 몸을 비운 공(空)의 자리, 그걸 말하는 것이고, 그걸 보라고 한 것이며, 가섭은 그걸 꿰뚫어봤고, 그래서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는, 부처님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을 때, 마하가섭이 홀로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일에 대해 경에 적혀있기를, 마하가섭을 대견해하신 부처님께서 “나에게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는 비법이 있다. 이 비법은 형상이 없어 나타낼 수 없으나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문자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전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비법의 열쇠를 마하가섭에게 전한다.”리고 하셨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법화경> 시설 당시 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인가 받는 장면이다. 부처님께서 무언(無言)으로 연꽃을 들어 보임은 모든 가식을 떨어내고 물아(物我)가 하나인 본원(本源)의 모습을 보인 것이며, 가섭이 미소 지은 것은 진공(眞空)에서 벌어진 묘유(妙有)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 장면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서 선 법문(禪法門)의 기원이 됐다. 중국 선문의 초조 달마(達磨) 대사는 이 일에 대해, 불교의 진수는 문자나 말이 아닌 내밀한 비법으로서 별도로 전해졌다고 한 것이다[교외별전(敎外別傳)].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기록은 의심스럽다. 평소의 부처님답지 않은 말씀이다. 평소 부처님은 대기설법을 하시므로 대중 앞에서 이런 알쏭달쏭한 법문을 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이 일이 기록된 유일한 경전인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한다. 달마 대사가 이 위경의 구절을 들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했을 리도 없다. 인도 불교가 중국 불교화 하는 과정에 창작된 이야기 같다.

 

     ②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坐)---다자탑 앞에서 붓다께서 설법을 하시는데, 가섭 존자가 늦게 오자 자리를 반 나누어 가섭에게 같이 앉게 한 것을 말한다. 다자탑전 분반좌는 <아함경>과 <중본경(中本經)>의 ‘대가섭품(大迦葉品)’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다자탑(多子塔)’은 중인도 바이살리(Vaishali, 毘舍離) 서북쪽에 있던 탑 이름이다. 바이살리는 빠알리어로 웨살리(Vesali)라는 곳으로 뒷날 제2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왕사성(라자그리하)에 한 장자가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한량없이 많고 아들과 딸이 각각 30명이 있었다. 장자가 멀리 나갔다가 어느 숲에 이르러 때마침 누군가가 큰 나무를 베는 것을 봤다. 그 나무는 가지가 너무도 무성해 여러 사람이 끌어도 잘 끌어내지 못했다. 그 다음에 작은 나무를 베는 것을 봤다. 작은 나무는 가지가 없어서 한 사람이 끌어도 걸림이 없었다. 이 일을 보고 장자는 깨달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내가 큰 나무를 베는 것을 보니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해

       빽빽한 숲에서 서로 얽혀 있어 벗어날 수가 없네.

       세상일도 그러하여 남녀와 모든 권속들이

       미움과 사랑으로 얽혀 있으면 생사의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작은 나무는 가지가 없어서 빽빽한 숲에 걸리지 않나니

       저 일을 보고 이 몸을 살피건대

       미움과 사랑의 속박을 끊으면 생사의 숲에서 저절로 해탈하리라.

     그리하여 장자는 이 일로 벽지불의 과위(果位)를 얻었다고 한다. 그가 열반에 들자 아들 딸 60명이 그를 위해 탑묘(塔廟)를 세웠다. 여러 아들과 딸들이 탑을 세웠다 해서 그 탑을 다자탑(多子塔)이라 부르게 됐다.

뒷날 부처님께서 이 다자탑 앞에서 인간과 하늘의 무리들에게 설법을 하시는데 가섭(迦葉) 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수행승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때 부처님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 반을 나누어 그를 앉게 하며 널리 가섭의 덕을 찬양하시니 대중들이 모두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이것이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이다.

 

     ③ 니련하반 시쌍부(尼蓮河畔 示雙趺)---니련하 강변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부처님이 열반하심에 가섭 존자가 늦게 도착해 슬피 울자 부처님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온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일을 곽시쌍부(槨示雙趺)라고도 한다.

     니련하(尼連河)는 니련선하(尼連禪河)라고도 하는데, 나이란자나(Nairañjanā)강을 음역해 니련선하라 한다.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 동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으로, 항하(恒河, 간지스강)의 한 지류이다. 현재 파트나(Patna) 지역의 팔구(Phalgu)강을 말한다. 부처님이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한 뒤, 니련선하 강물에서 목욕을 하시고 우루벨라 촌장 딸 수자타(Sujata)가 바친 영양이 풍부한 유미죽(乳米粥) 한 그릇을 공양 받고 기운을 차려서 보리수 아래 앉아서 정각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니련하 부근에서 열반에 드셨다. 니련하(尼連河)를 발제하(跋提河, Ajitavatī)라고도 한다.

     니련하(尼連河) 곁에는 사라(沙羅, sala)나무 네 쌍이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그 밑으로 가셔서 오른 겨드랑이를 대고 옆으로 누워 발을 포개고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사라수가 둘씩 쌍으로 네 쌍이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娑羅雙樹)라 한다.

     이 무렵 부처님 수제자인 가섭(迦葉) 존자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의 동북쪽에 있던 기사굴산(耆闍崛多山-영축산)에서 선정을 닦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와 달빛이 없어졌으며 동시에 새와 짐승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가섭 존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것은 부처님께서 몸이 쇠약해서 입적을 알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섭은 바로 신통력으로 곧 달려가고 싶었으나 경망스럽게 행동을 할 수가 없어 7일간을 걸어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칠 일이 지난 뒤라서 이미 입관이 이루어진 후였는데, 부처님의 몸을 관에 모셔두고 다비(茶毘)를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이 붙지 않았는데, 뒤늦게 먼 곳에서 부처님의 열반(涅槃) 소식을 들은 마하가섭은 급히 달려와서, 다비를 하기 위해 소대 위에 놓은 향으로 쌓은 부처님의 관 앞에 이르러, 오른 쪽으로 3번 돌고 난 뒤 부처님의 발 앞에 3번 절하고 엎드려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빨리 열반에 드셨나이까?” 하고 슬피 울며, “이제 부처님을 대하니 어떤 면으로 봐도 열반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제가 경례를 드린 것에 대한 표시를 해주소서.”라고 발원을 했다.

     이때 관(棺) 밖으로 부처님의 두 발이 뻗어 나오니, 그 발에서는 천개의 해가 환하게 조명한 것과 같이 밝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두 발이 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는 무상(無常)한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법신(法身)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다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다. 가섭 존자가 이것을 깨닫고 불을 붙이니, 비로소 다비(茶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두 발을 관(棺) 밖으로 내보인 것’은 부처님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부사의한 경지를 곽시쌍부(槨示雙趺)라고도 하는데, ‘니련하반 시쌍부’는 <대열반경> ‘다비품(茶毘品)’과 <불반니원경>, 유행경(장아함경 제4:1-28하)> 등에 근거한 이야기 이다. 이에 대해 <선문염송(禪門念誦)>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영혼의 근원은 본래 담적(湛寂)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고 현재도 없다. 마음의 묘체(妙諦)는 신령스럽고 밝은 것인데, 어찌 생(生)과 사(死)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널 밖으로 두발을 보이실 수 있었느니라.”라고 했다.

  

     위의 3가지 내용이 부처님과 가섭만의 서로 통하는 세 장소에서 전한 마음이라 해서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한다. 선종에서는 이들 삼처전심을 교외별전의 유일한 근거라 해서 매우 중요시한다. 조선시대의 서산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세존이 삼처전심한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일대소설이 교문(敎門)이 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또 ‘삼처전심’이라는 말도 인도나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한국불교에서만 나타난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은 한국 선 불교 전통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들 가운데 하나인데, 그 ‘삼처전심’이 한국선(禪)의 독특한 발전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삼처전심’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성욱 박사(UCLA대)의 주장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삼처전심’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문헌은 고려시대의 <선문염송설화>라고 했다. “이 문헌은 고려의 선승인 각운(覺雲)이 그의 스승인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의 공안집인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대해 주석한 글이고, <선문염송>은 이 세 전심 일화를 각각 4칙, 5칙, 37칙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각운이라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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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2021. 2. 25. 16:14

<일념(一念, skt. eka-citta)>

   

     불교에서 말하는 일념(一念, 산스크리트어 eka-citta, eka-smṛti)에는 대체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이는 한결같은 생각, 한 뜻을 세우고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즉, 통일된 마음. 천지만엽(天地萬葉)으로 흩어지는 생각을 하나로 묶어 오롯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흔히 미타일념(彌陀一念)을 말한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사무친 일념, 그 근원은 아미타불의 서원에서 비롯된다. 아미타불이 과거세에 법장보살(法藏菩薩)로 있을 때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서원으로 48대원을 세우게 됐다. 그리고서 그 간절한 서원으로 오직 일념으로 정진하던 중 마침내 성불하게 됐다는 데에서 시작됐다.

이때의 ‘일념’이란 천 마음 만 마음을 일으키고 내는 근원이 되는 마음을 말한다. 이 일념은 근원적인 마음으로서 경계를 초월하는 능력과 위력이 있고, 밝은 지혜와 바른 취사의 원천이며, 만사 성공의 원동력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의 의미를 일심(一心)이라 하고,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일미(一味)라 하며,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중생의 본래 마음이 진여며, 일체만법이 진여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진여연기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해심밀경>에서는 “(진여는)인간의 모든 사유와 개념을 떠나있고, 물건이나 관념이 아니므로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에 두루 평등하게 관련돼 한결같은 맛(一味)을 지닌다.”고 했다.

     <원각경>에서는 진여는, “모든 것은 원각(몸과 마음을 떠난 청정한 본래의 성품)으로부터 나오고 원각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누구라도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비추어 보는 수행을 거듭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란 결국 이러한 ‘일념’을 바로 지키고 비추어 자신의 내면속에 깃들어 있는 참 부처를 친견하는 일이다. '한 생각'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일념’은 이렇게 누구나 지니고 있고 쓰고 있는 것이지만, 향하는 바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념은 한결같은 마음, 지극한 마음, 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뜻한다. 한곳에 집중해 산란하지 않는 마음, 오로지 한 가지에 몰두하는 마음을 말한다.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인데, 무엇을 하든 자기가 정한 방향을 일념으로 하는 자가 도(道)를 이룬다고 했다. 일념정진(一念精進)과 같은 뜻이다.

     불교에서는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집중된 고요한 의식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삼매(三昧)를 표방하는 용어가 일념이다. 선정에서 이루어진 대상과 혼연일체를 체득한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와 같이 일념은 마음의 통일을 이루는 인간 의식의 한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일을 실행하든 모든 의식이 집중된 상태를 추구해야 일의 효과를 최상으로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일념은 시공을 초월한 현재의 삶 자체에 집중된 의식 표현의 일종이다. 또한 일념은 현재 불교에서 추구하는 삼매의 다른 이름으로 모든 수행의 근간이 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그냥 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원숭이와 같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신호마다 반응을 해 온갖 잡념과 망상이 죽 끓듯 한다. 그래서 모든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방법 중 하나가 독경(讀經)이다. 따라서 독경을 하는 것은 무엇을 빌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념(一念)을 얻기 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현실의 삶에서의 고통을 뛰어넘어 크고 넓은 자유의 세계에서 노니는 사람을 가리켜 ‘한 생각’을 얻은 사람이라 해서 일념(一念)을 높은 가치에 두고 있다. 그래서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부처님 교법을 의심 없이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믿으면 그 공덕은 무량(無量)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짧은 순간의 생각이라는 말로 쓰인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마음,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이럴 때의 일념은 짧은 순간의 ‘한 생각’을 이르는 말이다. 아주 짧은 순간에도 중생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고통을 얻고 즐거움을 얻기도 해서, 지옥과 극락을 오고가는 것이다. 따라서 짧은 순간의 생각도 매우 귀중하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삶을 이루고, 다음 생을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안에 수많은 세월이 낱낱이 포함돼 있는 것이 마치 잠깐 꿈을 꾸는데 수십 년의 일생이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일념간의몽(一念間疑夢)이라, 한 생각 사이의 꿈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 꿈속에는 수십 년의 세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겪은 삶의 시간과 무수한 공간과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그 짧은 순간에 다 들어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니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 한순간이 곧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란 말이다. 한량없는 오랜 겁이 곧 한순간이기 때문에 한순간이 곧 한량없는 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다시 말하면, 한순간과 한량없는 겁은 곧 하나이며 같은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의상(義湘) 대사는 <법성게(法性偈)>에서 즉금(卽今)에 일념(一念)이 긍철십세(亘徹十世)라 했다. 지금의 한 생각이 십세(十世)에 걸쳐 사무진다는 말이다.

     꿈이 그렇듯이 현실의 우리들 한 생각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즉 중생들을 제도하는 온갖 일과 중생들이 한 순간에 다 같이 열반에 드는 일들까지도 지금의 한 순간에 다 포함돼있다. 마치 곡식의 씨앗이나 사람의 세포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 없이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의상 대사는 또 <법성게> 제12구에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이라 했다.

     “저 영원한 겁이 바로 한 생각이며,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세월이네”라고 해서 인간의 한 생각 속에 삶과 죽음의 세계가 다 포함돼 있고, 번뇌와 해탈도 이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또한 끝이 없는 무량겁의 한 생각도 찰나이고, 찰나의 한 생각도 끝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평범한 것 같은 이 말을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시간이 공(空)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한 사람은 기차 시간을 한 시간 기다리는 게 엄청 지루할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면회 온 애인과 시간을 보내는 사병에겐 한나절이 잠깐이고 꿀맛 같은 시간이다. 이와 같이 시간이란 생각하기에 달렸다. 다급한 사람에겐 지옥이요, 달콤하면 극락이다. 한 생각이 지옥이고, 한 생각이 극락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극락과 지옥을 오간다.

     돈 많은 사람은 아파트 35평이 작아 60평이 넘는 공간에 살면서도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지만 셋방살이를 하다가 모처럼 24평 아파트를 장만한 사람에겐 그 게 고대광실 흡족한 공간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란 존재는 모두 내 마음의 환영일 뿐,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의상 대사가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고 한 것이다. 한 순간 속에 한량없는 시간이 그 속에 있기도 하고, 한량없는 시간이 곧 한 순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 한 순간 생각하기에 따라 공간이 넓어졌다가 좁아졌다가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함이 마음의 장난 같지만,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있음직한 일임을 납득시켜주고 있다. 오늘의 과학은 공간도 시간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만약 빛의 속도에 가까운 로켓을 타고 우주를 여행한다면, 로켓 안의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그 안의 모든 기능 - 시계와 우리의 삶 등, 전체가 느려진다. 그래서 3년 동안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실제 그 사람이 늙은 것이나 느낀 것은 3년 밖에 안 되지만 지구에서는 이미 150년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량원겁이 곧 찰나요, 찰나가 곧 무량원겁이라는 말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한 생각 속에 천당도 들어있고, 지옥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하기에 따라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된다는 말이다.

     삼천(三千)으로 표현되는 모든 세계가 우리의 일상적인 일념에 포함된다고 해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한다. 즉, 우리들의 평소의 한 생각 속에는 언제나 삼천으로 표현된 온갖 존재가 다 포함돼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차별적인 삼천제법(三千諸法)이 한 생각 속에 원융무애(圓融無礙)하게 구족돼 있으므로 일념삼천을 깨달으면 구경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록 텅 빈 마음이지만 그 속에 생각이 개입하면 일념에 3000세계를 구비한다는 것이다. 즉, 일념삼천설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 - 일체법을 3천 가지 법으로 유별하고, 그 3천의 법이 우리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섭수되고, 다시 그 3천의 법이 사람들 한 순간의 마음(一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모르되 티끌만큼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순간의 일념(一念)에도 반드시 삼천의 진리를 나타내며, 그 3천의 세계가 그대로 미혹(迷惑)한 세계도 되고 깨달음의 세계도 된다는 것이 곧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일념삼천이란 삼천대천세계가 다 마음으로 일어난 일이란 말이다. 여기서 삼천이란 일체(一切)란 뜻이다. 우리들 일상의 일념 속에는 삼천의 제법이 내포돼 있다는 명제가 천태교학(天台敎學)의 근본교의이다. 이는 현실적 인간이 일상적으로 일으키는 순간순간의 마음에 3천의 수로 표현되는 일제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천태 대사가 내세운 교리인데, 한 생각(一念) 가운데 삼천제법(三千諸法)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즉, 일념삼천이란 한 찰나의 생각, 한 생각 속에 삼천세계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한 순간의 마음에 우주만유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인데, 범부의 순간적인 한 생각에도 삼천제법을 갖추고 있다는 교리이다.

  

     천태학이나 화엄학에 의하면 중생들의 ‘일념’은 그것이 앞서의 두 측면처럼 순간적이고 지속적이고를 막론하고 일념 그 자체 속에 세상의 모든 법이 다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천태학에서 말하는 '일념삼천(一念三千)'과 화엄학에서 말하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백장청규(百丈淸規)>로 유명한 당나라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눈을 떴다. 낮이면 시자를 불러 물을 가져오라고 시켰겠지만 깊이 잠들어 있는 시자를 깨울 수 없어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자리에 누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사가 일어나 문을 여니 뜻밖에도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시자가 물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닌가. 괴이하게 여긴 선사가 물었다.

     “네가 어찌 알고 나에게 물을 가져왔느냐.”라고 하자, 시자가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잠자고 있는 저를 흔들어 깨우더니 물을 큰스님께 갖다 바치라고 해서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시자의 말을 듣고 백장 선사는 탄식을 했다.

     “아차! 내가 그 동안 헛 수행을 했구나. 한 순간일지도 이 일념(一念)을 단속하지 못해 토지신(土地神)에게 들켜 이 지경에 이르다니…”라고 했다. 한 순간의 목마름을 참지 못해 토지신에게 들켜, 토지신이 시자에게 귀띔을 한 모양이다.

     이와 같이 일념(一念)은 불교의 교리와 수행의 중심문제이다. 범부(凡夫)란 스스로 착각에 갇혀 참된 자기를 망각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는 한 생각의 깨닫고 깨닫지 못함에 있다.

     생사(生死)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생각(一念)에서 생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며는, ‘한 생각(一念)’이다. 한 생각, 한 생각 이 찰나 속에 십세(十世) 고금(古今)과 시방(十方)의 모든 세계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속에 다 들어있고, 육도윤회(六度輪迴)도 그 속에 들어있고, 천당 지옥도 그 속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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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2021. 2. 23. 13:36

<현재의식(現在意識)과 전의식(前意識)>

   

     현재의식(現在意識)ㆍ전의식(前意識)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말이다. 정신은 크게 현재의식(現在意識, present-conscious)과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으로 구분한다. 현재의식은 표층의식, 표면의식과 같은 말이며, 전의식은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들을 불교 유식학(唯識學)에 견주어 불교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프로이드의 제자 융(Cart Gustav jung, 1875~1961)의 경우, 불교에 심취했으며, 특히 그는 유식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실제 융의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은 이 유식학(아뢰야식)에서 힌트를 얻은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하여 융은 붓다를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천재로 인정했으며, 그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붓다는 인류 전체의 영적인 개척자이자, 깨우친 자이고, 스승이며, 구원자”라고 하며 선(禪)사상을 찬양했다.

     그리고 위에서처럼 표면의식(현재의식)과 잠재의식(전의식)으로 구분할 경우, 현재의식은 유식학의 6식(六識)과 비슷한 개념이고, 잠재의식은 유식학의 제7식 말나식(末那識)과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현재의식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항상 활성화돼 있는 정신 상태이다. 신체의 자동화된 자율신경부분들과 생명유지를 위한 기관들의 자동화 부분, 나아가 생존을 위해 자동화된 기재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의 움직임이 모두 무의식이 활동하는 영역에 해당한다.

     현재의식은 평상시의 의식적인 사고를 말한다. 우리가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고 생각하는 것, 또 달다, 아프다, 가렵다, 뜨겁다, 차갑다 등을 신체 각 부위 -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를 통해 지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현재의식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부터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사기 전에 우리는 이해득실을 따진다. 또 어떤 장소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그곳을 지날 때 주의를 기울인다. 이처럼 인간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한 다음 행동한다. 심리학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현재의식 또는 표층의식이라고 한다. 이는 이성적으로 자신을 조절하는 정신영역이다. 이 부분은 유식학(唯識學)의 제6식(六識)인 의식(意識)에 해당한다.

     한편 인간에게는 잊은 듯한 추억이나 억압된 욕구, 고정관념 등이 쌓여 있는 잠재의식이라는 정신영역이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릴 때가 있다. 이것은 잠재의식 속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재의식의 존재를 알고 우리의 행동이나 사고를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불과 10%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고, 나머지 90%는 잠재의식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들의 행동 대부분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힘이 바로 잠재의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길을 걸을 때 현재의식이 오른쪽 발을 보고 앞으로 나가라. 왼쪽 발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일일이 명령하지 않아도 평소 습관대로 무의식적으로 손발이 움직이며 걸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잠재의식의 작용이다. 현재의식은 단기기억과 관련이 있으며, 잠재의식은 장기기억(영구기억)과 관련이 있다. 현재의식은 단기기억은 유식학에서는 제6식인 의식(意識)에 해당한다 할 수 있고, 장기기억 중에 고정관념 같은 것은 제7식 말나식(末那識)이라 할 수 있으며, 더 깊은 잠재의식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돼 있다고 하겠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잠재의식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잠재의식에 인상 지어진 것이 그대로 현실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현재의식으로 우리가 항상 쓰고 자각하는 마음이고,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이 주는 생각, 마음상태, 감정, 말씨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보존했다가 현실화하는 작용을 한다.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에 저장된다고 해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 한다.

     그리고 전의식은 현재는 의식에 어떤 내용이 없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의식으로 떠오르는 내용들이 있는 의식의 저장소다. 즉각적으로 접근하거나 의식화하기는 어렵지만 충분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면 의식 수준으로 저장한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이란 말이다. 유식학에서 업식(業識)이 그렇다.

     또 마약에 중독된 자는 불현 듯 마약을 찾게 되는 것을 업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멀쩡하게 일하다가도 갑자기 담배를 찾게 되는 것도 업식의 작용이다. 대개 이런 중독성은 유식학에서는 제7식인 말나식의 영역으로 본다.

     전의식과 무의식은 둘 다 무의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전의식의 내용은 쉽게 의식에 접근할 수 있고, 단지 일시적으로만 무의식적이다. 즉, 전의식(前意識)은 어떤 시점에서 의식돼 있지는 않으나 비교적 쉽게 의식화되는 것, 정신분석학 용어로, 억압당하고 있는 무의식(잠재의식)의 내용이 다소라도 기억이나 의식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무의식과 구별해 전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중간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점심 식사는 무엇을 드셨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점심식사의 내용이 의식에 없었지만 곧 생각나는 것은 전의식에 있다가 곧 의식화됐기 때문이다. 담배를 잊고 있다가 마주 앉은 사람이 담배를 끄어내면 나도 덩달아 피우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의식의 내용은 무의식에 있던 본능욕구나 기억들이 1차 검열을 통과하고 전의식으로 나온 것들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실착행위(失錯行爲), 꿈 등에 보이는 사례는 이와 같은 전의식의 존재를 명시한다고 말한다.

     전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또 다른 것은 외부세계(external world)에서 들어온 지각 경험들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운전의 경우를 보면, 초보자와 노련한 운전자가 다르다. 초보자는 신호등, 브레이크 밟기 등의 조작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의식하면서 운전을 한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없고, 친구가 인사를 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노련한 운전자는 라디오를 듣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자동적으로 운전조작을 한다. 옆 차의 운전자, 신호등, 방어운전 등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운전할 수 있다. 도로 표지판을 눈여겨보지 않고도 길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전의식의 기능이다. 대부분의 습관이나 기술들이 전의식의 조절 하에 있다. 그래서 비유해서, 유식학에서의 제7식 말나식과 제8식 아뢰야식의 일부가 전의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식인 생각으로부터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아등바등하면서 생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매우 짧아 판단을 그르쳐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을 뿐더러 성급한 성격은 이기적인 경향이 강해 주변 사람들과 융화하기 힘들다. 이때 이기적인 경향을 유식힉에서는 제7식 말나식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로 4번뇌인 아치(我痴)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식학의 제7삭 말나식이 4번뇌인 아치ㆍ아견ㆍ아만ㆍ아애를 품고 있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지(智)ㆍ정(定)ㆍ혜(慧)를 수행하라는 것이며, 수행의 정도에 따라 현재의식의 수준도 달라진다. 즉, 많은 훈련을 통해 신체의 자율신경도 현재의식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식학에는 현행식(現行識, 산스크리트어 pravṛtti-vijñāna)이라는 게 있다. 즉, 6식(六識)과 자아의식인 제7 말나식을 합친 일곱 가지 식은 잠재의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해 ‘현재화된 식, 현행하는 식 또는 현세적인 식’이라는 의미에서 현행식(現行識)이라 한다. 또한 아뢰야식이 전변해 현재 나타나 있는 식이라는 의미에서 전식(轉識)이라고도 한다. 즉, 전식(轉識)이란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을 통틀어 일컬으며, 이 7가지 식은 아뢰야식에서 발생해 작용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이러한 현행식이 프로이드 심리학의 현재의식과 비슷한 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행위가 미래의 잠재의식이 된다. 육체는 단지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에 부조화가 생기면 그 반영으로서, 육체의 부조화인 “병(病)”이 발생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총체적인 의식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영원불멸(永遠不滅)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애자재(無礙自在)하며, 대자대비(大慈大悲)하다”는 등의 원천이 되는 ‘본성(本性)’이라는 마음이 있다. 불교에서는 다른 말로 본래면목(本來面目) 혹은 불성(佛性)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현재의 의식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마음이 있다. 유식학에서 제8식 아뢰야식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지금 의식하고 감지하는, 통상 인간이 “느낀다, 감지한다”는 등의 현재의식(現在意識-정신분석학)’이라는 마음이 있다. 불교의 ‘현행식(現行識-유식학)과 매우 닮았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산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모든 분별심이 현재의식이다. 한편 이 현재의식이 부조화의 씨를 가장 먼저 만든다. 이 만들어진 병적인 부조화의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잠재의식 속에 축적된다. 유식학으로는 장식(藏識-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 속에 병, 불행, 고난 등의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 씨앗을 현행식이 심어놓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씨앗이 발아해서 병, 불행, 고난 등의 열매가 맺히면, 사람의 육체에는 병이 오고, 삶에는 불행과 고난이 오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현실은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지금’이라는 현실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지금의 행위의 씨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니 업인(業因)이니 업식(業識) 등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절대권능인 본성(불교의 경우 불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인간에게 벌을 준다든가 병, 불행, 고난 등을 주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지은대로 받느니라”하셨다. 자신이 지은대로 거두는 것이지, 자신이 짓지 않은 병, 불행, 고난 등은 결코 오지 않는다. 여기서 예수의 “지은대로”라는 말씀은 자신의 잠재의식과 현재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잠재의식, 현재의식이란 인간의 참모습, 참마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인들께서는 말씀하셨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불행의 씨앗, 부정적인 악성(惡性)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그런 해탈의 경지에 이른 마음을 참마음, 불성이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참모습, 참마음, 해탈의 경지에서는 없는 그런 것들에 현혹돼 살고 있으므로 병, 불행, 고난 등을 자초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것들도 다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공(空)하다는 것이다.

     성인의 빛은 일월(日月)과 같다고 했다. 해나 달이 누구에게나, 설사 악하게 보이는 사람에조차도 차별을 두지 않고 그 빛을 골고루 비춰 준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은 결코 인간을 괴롭고 불행하게 하는 일이 없다. 이 본성을 불교에서는 본래면목 혹은 불성이라 한다. 그런데 불행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 보면 상당 부분이 잠재의식과 현재의식 속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죄의식, 혹은 업인(業因)이라는 것이 차지하고 있다.

     소위 ‘죄의식’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체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양심(良心)이라는 것이다. 이 양심의 선의(善意)의 발로가 바로 죄의식이다. 또 그것으로 선과 악을 구별 짓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양심이라고 하는 이 마음도 현재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에 불과하며, 어느 특정의 한 가지에 국한할 경우에는 옳을 수도 있지만, 전체라는 개념에서 볼 때는, 바로 이것(양심)이 위험한 함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했지만 뜻하지 않게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 많아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나름대로 규정해서 지키려고 하는 조그만 양심과 선을 위해, 그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당사자 스스로는 양심과 선이라는 미명을 내세워, 자신의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젖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미망(迷妄)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다. 약(藥)이 조금만 지나쳐도 독(毒)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치라 하겠다. 이렇듯 스스로가 만들어 심어 놓은 ‘죄의식’이라는 것도, 양심이라는 미망이 상대적으로 만들어 놓은, 큰 함정 중의 하나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의식, 양심이라는 것도 일종의 번뇌랄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지나친 후회도 번뇌로 본다. 그런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저지르진 잘못을 지금에 와서 후회만 하지 말고, 지금 이 시점에서 잘하고 앞으로 참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자신은 전혀 그러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그네들이 잠재의식을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현재 자신이 느끼는 모든 의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현재에 한 것이라는 게 이미 흘러 지나간 그림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지나가 없어져 버린 과거의 불평, 불만, 갈등 등을 붙잡고, 자신뿐만 아니라 그 일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즉, 부조화된 현재의식의 잠재화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병, 불행, 고난 등의 원인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불교로 말한다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말나식과 업식(業識)에 지배돼 스스로 갈등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부조화의 주된 행위의 제공은 잠재의식이 하며, 이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의 누적이다. 따라서 선량한 현재의식으로 선업(善業)을 저장하면 병을 비롯한 불행, 고난 등은 멀어질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육체의 병 또는 건강하지 못함 등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편 또는 구실로 삼고자 하는 잠재의식이 존재하는 한, 결코 호전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수행 정진을 통해서 업장(業障)을 소멸해야 근본적인 치유가 된다. 이와 같이 프로이드나 융에 의해 19ㆍ20세기에 개척된 정신분석학이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불교 유식학에서 세밀하게 논의됐었다는 것이 실로 놀라울 뿐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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