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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2012. 1. 13. 17:06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                 

                            

 

 

 

   1) 아뢰야식(阿賴耶識, 산스크리트어 alaya-vijnana)이란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이 인식하는 ‘전5식(前五識)’과 정신부분인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vijnana)이다.

    말나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이다. 그리고 제7식 말나식보다 더 깊은 심층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 제8식 아뢰야식이 제7식 말나식의 뿌리(의지처)이다. 즉,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말나식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말나식이 작용하는 그 배경엔 아뢰야식이 버티고 있다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으나 대승불교(유식학)에서 8식까지를 발견해냈다.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한다. 이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생각 혹은 마음이라 한다.

    제8식 아뢰야식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정(淨)과 염(染), 선과 악 모두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이 정이나 염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뢰야식 자체가 오염(汚染)의 근원일 수도 있고, 청정(淸淨)의 근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뢰야식을 여래장식(如來藏識)이라고도 한다. 여래장식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부처님과 같은 여래의 심성을 부장(覆藏)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심성설이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에서 부처님은, “나는 불안(佛眼)으로 일체중생을 관찰해보니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우치(愚癡)한 마음 가운데에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눈과 여래의 몸이 있더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성은 본래 여래장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 인성에는 부처님과 다름없는 지혜로움과 지혜로운 눈과 몸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뢰야식엔 선악이 다 저장돼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다만 무량한 번뇌에 의해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우리의 심성에 여래장과 불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즉, 우리 심성 안에 여래장과 불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상이 여래장식이다. 다만 그 여래장과 불성이 무량한 번뇌에 덮여 있어서 감추어진 것을 수행을 통해 해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8식 아뢰야식이 자아의식(제7식)과 대상의식(6識)을 총괄해서 마음의 흐름에서 주체가 되는 잠재의식이다. 6식의 활동은 인식된 것을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보존성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 존재가 이어져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를 따로 상정하고 있다. 즉 업의 저장소이자 윤회의 주체가 되는 그것이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이다.

    산스크리트어 아뢰야(alaya)는 ‘저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저장한다는 말인가?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를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변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종자를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돼 있는 곳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모든 일어난 일이나 생각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이 아뢰야식이다. 여러 행위가 필름에 찍히듯이 업이 돼 아뢰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업장(業藏=업의 창고) 혹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즉 6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모든 작용이 제7식 말나식을 통해 아뢰야식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바로 말나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개념과 아뢰야식은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구성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은 감당하기 힘들어서 억압한 것들, 외면한 것들, 트라우마 등 주로 병리적인 것들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지만 아뢰야식은 병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생산적인 것, 종교적인 것 등 훨씬 다양한 것들의 저장소이다.

    무시이래 각자가 해온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種子)가 돼 제8식 아뢰야식에 차곡차곡 저장된다(마치 CCTV에 녹화 저장되듯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훈습(薰習) 혹은 습기(習氣)라고 하는데, 종자에는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가 있고,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 모든 종자를 훈습시켜 담아둔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즉, 아뢰야식은 마음의 근본이며 보관 창고와 같다고 해서 장식(藏識), 또는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본유종자(本有種子)와 후천적으로 생성되는 신훈종자(新薰種子)로 구분하며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지 발현하게 되는 씨앗과 같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과거 행위의 온갖 잔상(殘像)들을 저장하는 훈습작용을 한다. 우리가 잠자다가 꾸는 꿈은 제6의식의 영역인데, 전생 또는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업)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잔상들이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종자)을 형성하기도 한다.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 결과(업)를 일으키는 특수한 에너지(氣)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신체를 유지시켜 나가는 업력(業力)과 윤회의 심종자(心種子)가 저장돼 있는 곳으로 일생동안 끊어지지 않고 존재의 밑바탕에 붙어 있다가 알맞은 환경과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업력이 원동력이 돼 다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저장된 종자가 다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현행은 종자를 낳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행한 나쁜 생각과 행동은 나쁜 종자를 낳고, 선한 생각과 행동은 선한 종자를 낳는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 종자가 현행으로 나타날 때도 악한 종자는 반드시 악한 행동과 생각을 낳고, 선한 종자는 선한 행동과 생각을 낳는다. 수행이란 될수 있으면 악한 종자를 배제하고 선한 종자를 많이 심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사상이 나온다. 자기가 한 행동과 생각이 빠짐없이 아뢰야식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하면 의식으로 살아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저장된 종자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세로 계속 이어지면서 세세생생(世世生生)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우리는 죽게 된다. 일단 몸이 소멸하면 몸에 붙어 있던 6개의 감각기관이 사라지고 6식도 사라진다. 6식이 사라지면 당연히 6식을 근거로 활동하던 제7식인 말나식도 사라지게 된다. 7식까지 사라지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제8식인 아뢰야식이 나타난다. 그런데 유식학파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면서도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처럼 고정적 실체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뢰야식을 불변하는 아트만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된다.

    아뢰야식은 육신이 소멸돼도 우리가 생전에 지은 행위의 결과인 업(業)을 씨앗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식은 49일 동안 중음(中陰)을 헤매다가 자신의 업에 따라 다시 새로운 모태(母胎)를 찾아가게 된다. 수정란에 아뢰야식이 들어가면 태아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역으로 제7식이 생기고 차츰 몸이 갖추어지면서 나머지 6개의 식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다시 아뢰야식은 깊이 숨어버린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아뢰야식에는 모든 행위(업)가 발생 즉시 자동적으로 저장 입력된다. 행동하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저장되는 의식의 저장 탱크, 선악의 저축 뱅크다. 그리하여 6식(六識)의 심층에 아뢰야식이 있는 것이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우리 몸속(아뢰야식)에 입력된 의식을 말하는데,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이 어떤 계기로 움직여 일어나는 생각을 업식(業識)이라 한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불변의 요소가 아니고 우리 마음 작용에 의해 변하며, 수행 정진에 의해 소멸도 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고정된 실체의 개념이 아니라서 업이 소멸되면 아뢰야식 또한 없어지는 것으로 수행을 통해 자기 업장을 다 소멸시키면 아뢰야식 또한 소멸되는 것이니, 고정된 실체 혹은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이 알콜중독, 마약중독, 흡연중독에 걸리는 것도 그러한 경험이 훈습돼 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업식을 통해 그러함을 자꾸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독을 끊었다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장을 씻어냈다, 녹여냈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의 심신을 오염된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질적 변화를 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해서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한 종자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완성된 인간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계속 반복해서 선정 수행을 함으로써 아뢰야식 속의 악한 종자를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만 원권 돈다발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사람은 남이 볼가 봐 빠른 동작으로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남이 보든 말든 돈을 주워서 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관서로 가지고 가서 신고를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그 차이는 그들이 과거에 정신적 육체적 경험에 의해 축적돼온 종자의 차이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도 어려서 어른들이 하는 짓을 봤기 때문에 그 본 것이 종자로 저장돼 있다가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자기네 부모가 했던 짓을 자식도 따라서 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선종(善種)을 낳고 다시 선행을 가져오며, 악행은 악의 종자를 낳고 다시 악한 행동을 생산한다. 한번 훈습된 종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현행되는데 선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을 쌓으면 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악의 종자는 업장소멸을 위한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악의 종자를 소멸해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을 완전히 정화하는 것이 곧 해탈이다.

 

   ※아뢰야식연기(阿賴耶緣起)

    아뢰야식은 육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생으로 이관된다고 한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바로 업(業)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이란 전생의 아뢰야식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죽으면 종자(아뢰야식)는 다른 모태를 만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바로 윤회이다.

    따라서 여기에 저장돼 있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 혹은 실체라고 하며, 이것을 ‘아뢰야연기설(阿賴耶緣起說)’이라고 한다. 즉,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에 의해 일체 만법이 연기하는 것이 아뢰야연기설이다.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등의 경론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유식종, 법상종이 주장하는 연기설은 제8식인 아뢰야식을 두어 연기를 설명한 이론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자기가 지은 업의 세력에 의해서 삼계로 생사 윤회한다는 업감연기설(業減緣起說)을 주장했는데, 과연 그 업의 영향이 결과를 초래할 때까지는 대체 어디에 보존됐다가 차례로 나타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업의 영향을 저축해 윤회를 반복케 하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게 됐다. 이처럼 윤회의 주체를 추구해 간 정점에서 발견된 것이 아뢰야식이다. 본래 아뢰야라는 말은 ‘물건을 넣는 창고’ 내지 ‘곳간’을 의미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숨는 곳[능장(能藏)], 받아들이는 곳[소장(所藏)], 집착하는 것[집장(執藏)]의 의미가 있다. 즉, 선악의 행위에 의한 업력을 받아들여 보존하는 의미가 있으며, 수행에 의해 아집이 없어지면 그 명칭마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업의 종자를 보존하면서 선악 업력을 다른 식에 공급해 발동케 하며 모든 선악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과거세의 업력을 보존한 이 식이 최초로 태어난 것이며, 내생으로 떠 날 때도 금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육체로부터 최후에 떠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다른 식에 비해 그 체성이 단절되지 않고 과보를 받는다는 점에서 과보식(果報識)이라 하고, 또 전생과 금생 그리 고 내생의 삼세에 윤회하면서 다른 과보를 받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숙식(異塾識)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아뢰야식에 보존된 업력 가운데 별업(別業)은 자신만이 수용하고, 공업(共業 : 공동으로 선 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과보를 받는 업)은 다른 이와 함께 수용하면서 중생의 현실을 전개하므로 이를 아뢰야연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여러 가지 별명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뢰야식의 별명 가운데에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는 게 있다. 아뢰야식을 인간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 하기도 하며, 아다나식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아다나식을 집지식(執持識)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집지(執持)란 모든 선업과 악업을 비롯해 정신과 육체도 함께 붙들어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우리 인간을 비롯해 중생의 과보를 받는데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함으로 집지식이라고도 한다. 즉,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을 함장(含藏)하고 보존하며, 우리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상속식(相續識)이라 하기도 하고, 아다나식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선업과 악업의 힘에 따라 과보를 바꾸어 받아 출생하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한다. 또한 아뢰야식이 업력에 의해 태생(胎生)과 난생(卵生)과 화생(化生) 등의 출생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라서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헌데 구역에서는 아다나식을 제7식의 별명이라 하고, 신역에서는 제8식 아뢰야식의 별명이지만 대체로 신역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원래는 8식까지만 있다고 했으나 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후대에 제9식인 아마라식(Amala)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됐다.

 

   2)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 산스크리트어 Amala-vijnana)이란

 

    제9식 아마라식을 암마라식(菴摩羅識) 혹은 아말라식(阿末羅識)라 음역하기도 하고, 무구식(無垢識), 진여식,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가 곧 제9식 아마라식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攝論宗)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섭론종의 9식설을 구유식이라 하고, 현장의 8식설을 신유식이라 한다.

    신라 유식의 대가 문아(文雅), 즉 원측(圓測)은 구유식의 9식설을 취하지 않고 신유식의 8식설을 취함으로써 종래의 섭론종이 주장하는 제9 아마라식을 제8 아뢰야식의 정분(淨分)으로 이해했다.

제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한다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染) ‧ 정(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白淨識)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으므로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식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8식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깨끗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아마라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나’를 의미하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의 역할을 한다고 하며, 인간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다고 한다.

    제6식의 저변에는 제7식인 말나식이 있고, 그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그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아마라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아마라식이 이른바 불성(佛性)이어제9식이 곧 부처님의 경지라고 한다.

    현장(玄奘) 이후에 <해심밀경(解深密經)> 같은 경전에서 이러한 제8식에 가려 있는 무명이 없어진 깨끗한 식을 상정(想定)해서, 제8식 외에 감추어진 식을 제9식 아마라식이라고 했다. 제9식이라고 해서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반야(般若)이고, 해탈에 이른 심식으로서 8식이 성불하면 제9 백정식이 되며, 제9식 백정식에 이르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8식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제9식인 아마라식만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즉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迷妄)을 버림으로써 청정상태에 이른 것이 제9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9식 아마라식은 일반 중생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 대중이나, 아니면 이제 겨우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들일진대 감히 부처님의 경지인 제9식이야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부처님 경지가 아닌 중생들이야 8식까지만 논의해도 되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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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아미산님..총체적 識의 주위를
장님이 바위 만지듯 더듬거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상화스님께 부처님 말씀을 배움하고 있는데 제8 아뢰야식에 관하여 말씀하시기에 깊이 알고자 찾아왔습니다. 제 블로그에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공부자료로 비공개로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스크랩담아갈게요~
비밀댓글입니다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블로그로 스크랩 감사히 모셔갑니다~~
덕분에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식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거 같네요
조은글 잘보아습니다._()_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_()_
이해하기 쉽게 정리를 너무 잘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비슷한 내용을 여기저기서 읽었는데 이제야 확실히 정리가 좀 되었습니다.
어려운걸 참 쉽게 설명해 놓으셨네요
잘 배우고 갑니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늘 평온하게 머무는 불성에 머물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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