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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2015. 2. 24. 20:36

                    

                          <즉비(卽非)의 논리>

           

 

 

 

        

   2000여 년 전 인도에는 중관학(中觀學)이라는 심오한 불교철학이 발달했다. 그리고 중관학에 이어 유식학(唯識學)이라는 불교심리학이 발달했고, 또 그에 뒤지지 않게 인명(因明)이라는 논리학이 발달했다. 지금에 와서도 그 이론체계가 정연한 철학이나 심리학의 수준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논리학도 대단히 정밀하게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불교교의도 이들의 뒷받침에 의해 과학적인 교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수준 높은 논리학의 전모가 <금강경>에 잘 나타나 있고, 특히 즉비(卽非)의 진술에 탁월한 논리전개를 보인다. ‘즉비’란 즉(卽)하되 비(非)해야 된다는 말인데, 한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지켜보는 것이 즉(卽)이고, 이때 이 현상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으니 거기에 꺼들리지 말고 바로 보라는 말이 곧 비[非]이다.

   <금강경>에서「A는 A가 아니다. 고로 (A)이다.」이런 형식의 문장에서 「A는 A가 아니다」라는 부분이 즉비(卽非)이다. 이러한 즉비(卽非)의 논리를 전개하는 까닭은, 대상에 접촉(觸)하자마자 수(受)에 이어 애(愛)―취(取)―유(有)의 과정을 밟지 말고 ― 꺼들리지 말고, 초연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 마음공부이니, ‘즉비(卽非)’가 바로 그 마음공부의 요체이다.

   즉비(卽非)란 어떤 개념이나 명제를 세웠다 하면 세운 즉시 부정 ― 지양함으로써 어떤 대상에 꺼들리지 않고 ― 집착하지 않고 초월하도록 돕는 초월의 논리학이다. 즉공(卽空)과 같은 맥락이다. 즉, 즉비는 새로운 개념이나 명제의 부정이라기보다 얼마든지 다른 측면 ― 초월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논리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컵은 컵이 아니고, 그 이름이 컵이다”라는 문장형식의 구조적 표현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떤 개념을 즉시 부정 지양(否定止揚)함으로써 어떤 대상에도 걸리지 않고 ― 꺼들리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방편을 삼는 것이다. 그 핵심은 개념의 부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상을 실체로 여겨 매몰되거나 집착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함이다. 이는 어떤 존재이든 그것을 실체로 파악하면, 그 개념에 고착, 한정돼 갖은 고통이 따르는 일을 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컵을 대하되 그것이 컵(만인 것)이 아니고 꽃을 꽂아두는 화분일 수도 있고, 담뱃재를 털어 넣으면 재떨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일방적으로 컵에 매달리는 ― 꺼들리는,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초월하는 것이 즉비(卽非)의 논리이다.

   우리의 일상은 어떤 대상을 마주치면(觸), 곧 기분이 나쁘거나(苦), 좋거나(樂), 덤덤하거나(捨) 등의 고, 락, 사(苦樂捨)의 삼수(三受)에 빠진다. 그리고 수(受)에 이어 애(愛)―취(取)―유(有)의 과정을 밟으면서 괴로운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자화상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마주치면 그 즉시 즉비를 발휘해 수―애―취―유에 떨어지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면, 상(相)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즉비(卽非)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에서 근(根)이 경(境)을 마주치면 식(識)이 일어나서 개념과 명제에 주관(主觀)인 상(相) ―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예컨대 눈(根)이 여자(境)를 보는 순간, 아! 여자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識). 그리고 이어서 그 여자에게 빠지게 ― 집착하게 된다. ‘예쁜 여자! 나에게 딱 맞는 여자!’ 이런 상(相) ― 고정관념이 형성돼, 거기에 빠져들어 ― 꺼들려서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집착을 해서 매달리는 것이다.

   흔히 영화 같은 데에서 첫눈에 반해 처음 본 여자에 집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즉 여자를 보는 순간 즉비를 발휘해서, “여자이지만 여자가 아니고 그 이름이 여자일 따름이다.”라고 마음을 돌리라는 말이다. 그 게 즉비이다. 이름만 여자이지 그 여자는 이미 임자가 있는 여자이니 그냥 평범한 여자, ―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여자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또는 예쁜 여자라고 알게 된 순간 마음에 든다는 느낌(受)을 가지고, 덤벼들어 연애하고(愛), 기어이 결혼해(取), 아내로 삼았더니(有), 마음이 헤퍼서 낭비가 심하고, 아무 남자하고나 바람을 피기가 일쑤여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짝을 잘못 만나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함부로 여자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예쁜 여자를 보면, 예쁜 여자는 얼굴값을 한다더라고 즉비를 발휘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여유를 가지고 면밀히 관찰을 해서 마음에 들면, 그때 가서 연애를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하라는 말이다.

   <금강경>에서의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현식의 문장을 처음 접하는 사람의 경우,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워한다.

   <금강경> 제13분 여법수지분에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A는 A가 아니다. 다만 이름만 A일 뿐이다.」라는 구조이다. 이 문장은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에 얽매이거나 꺼들리면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집착하거나 고정관념을 가진 반야바라밀은 진짜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다만 이름뿐인 반야바라밀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 이름이나 그 말 속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즉, <금강경> 속이나, 부처님 말씀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세간 일체를 벗어나 있지 않다. 세상사 모두가 진리이고 불법이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에만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매달리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몸으로는 불교신자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 입으로만 반야바라밀을 아무리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자가 반야바라밀을 외운다고 해서 좋은 과보를 받을 수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가 생각하는 반야바라밀은 허울만 있는, 다만 이름만 반야바라밀일 뿐이다. 그것은 부처님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설한 반야바라밀은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므로 특별한 진리나 기운이 있으리라 믿어 거기에 매달리면 무조건 좋은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기대를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착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진정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 지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자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곳에 있다. 즉, 설법을 하는 방장(方丈) 스님의 법문 속에 반야바라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불자답게 생각하고 불자답게 행동하는 그곳, 자기 자신에 진정한 반야바라밀이 있다는 말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반야바라밀’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라고 부정을 하는 이런 형식이 즉비(卽非)이다. 특히 불교와 같은 마음공부에 있어서는 쉽게 꺼들리지 않는 충분한 지관(止觀)이 형성돼야 한다. 쉽게 꺼들리는 것은 대개 번뇌에 속하는 것이거나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즉비를 행해야 한다. 그래야 쉽게 꺼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관(止觀)을 하라는 말이고,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사람의 불행은 한결같이 '그 무엇'에 고착함으로써, 집착함으로써 빚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그 상황이 설령 긍정적인 낙수(樂受)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즉비를 통해 마음을 열어 여유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곧 즉비는 현실의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락(苦樂)의 양변을 모두 지양하고 ― 초월하고, 중도(中道)의 진리를 지향하는 비장이요, 지혜인 것이다.

   <금강경>에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말이 참으로 묘하다. 그런데 이것을 반의적으로 중생이, 중생이 아니란 말을 뒤집어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다.’ 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이때 “~아닌 것이 ~인 것이고 ~인 것이 ~아닌 것이다.” 라는 표현이 한 차원 더 올라가면 도리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돼버린다.

   이러한 ‘즉비(卽非)의 논리’은 일본의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가 <금강경>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해낸 선(禪)의 논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즈키는 <금강경>에 특이하게 전개되는 구절들, 즉, 「A는 A가 아니다. 고로 (A)이다.」와 같은 문장 구조에 대해, 이런 문장구조를 ‘즉비(卽非)’라 하면서 이런 표현 속에 선불교(禪佛敎)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했다.

   일체사물의 대긍정-즉(卽)의 세계인 선(禪)은 부정과 차별로서의 ‘비(非)’를 전적으로 포함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포함이 아니라, ‘아님(非)’인 그대로 ‘긍정(卽)’이라는 말이다. 긍정을 뜻하는 ‘즉’과 부정을 뜻하는 ‘비’는 단순한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대립하기에(非) 도리어 대립하는 그대로 동일하다고(卽)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선불교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조주(趙州, 778-897)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에서 그 실상을 볼 수 있다.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던 한 수행승이 비루먹은 개를 보고 저렇게 천한 것에도 과연 불성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가 조주스님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조주 스님의 답변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수행승에게는 의문이 더욱 증폭됐다. 부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 큰스님은 없다고 하시니, 부처님의 ‘있다’는 말과 조주 스님의 ‘없다’는 이 말 - 긍정을 뜻하는 ‘즉’과 부정을 뜻하는 ‘비’는 단순한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대립하는 거기에 열쇠[화두]가 있는 것이다. 대립하기에 도리어 해답을 찾을 실마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에서 화두의 역할이다.

   즉(卽)은 긍정을 비(非)는 부정을 나타내지만, 양자 간에 어떠한 관련성도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의 논리상 그 특징은 긍정 즉 부정, 부정 즉 긍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함의 또 다른 사례는 중국 송 대의 청원유신(靑原惟信, ?~1117) 스님의 게송 속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청원 스님 말씀은.

   “30년 전 참선 공부를 하기 전(老僧三十年前 未參禪時)에는 산을 보면 산, 물을 보면 물이더니(見山是山 見水是水),

   여러 선지식을 참견하고 조금 깨친 뒤에 보니(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그러나 이제 깨치고 보니(而今得個休歇處), 예전과 다름없이 산을 보면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이다(依前 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라고 했다.

   위의 게송을 보면, 범부와 깨달으신 분이 보는 세상이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다. 범부는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인데, 깨달으신 분은 ‘산을 보면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이다. 다른 것은 ‘단지’라는 글자뿐이다.

   이 ‘단지’라는 글자가 주요 실마리이다. 어리석은 이는 분별 망상으로 지금 보는 산이 실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온갖 마음 작용을 연이어 일으킨다. ‘저 산이 참 잘 생겼네…’, ‘저 산에 누구랑 가면 좋겠는데…’, ‘저 산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 ‘저 산에 가면 산나물이 많겠는데…’, ‘저 산에 뱀이 없을까?…’ 등 등, 이렇게 저렇게 가만히 있는 산을 가지고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켜 울고 웃고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한다.

   그런데 깨달으신 분은 산을 보면 단지 ‘산’일 뿐이다. 여기서 분별 망상을 일으키는 범부 중생의 사고방식이 유루법(有漏法)이고, 깨달으신 분의 사고방식이 번뇌 망상이 없는 무루법(無漏法)이다.

   위의 게송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즉, ‘산은 산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은 역시 산이다’의 세 가지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일상생활 속에서 범부중생이 모든 것을 소박하게 긍정하는 태도를 말함이며, - A

   두 번째 단계는 그런 긍정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말이며, - 非A

   세 번째 단계는 그러한 부정을 통해 일체의 것이 있는 그대로 다시 ‘대긍정-참’을 찾는 태도를 뜻다. - A

   이렇게 ‘긍정-부정-대긍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무루의 법(참-진리)을 찾아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세 선법(禪法)에서의 즉비의 논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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