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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2017. 12. 31. 09:54

                                          <불교 용어 해설, ㅇ-2>

 

 

   이 자료는 정리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가, 나, 다 별로 나누는 등 편집은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불편하고 부족한 점은 완결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7년 1월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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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Upanishad)---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고대 인도의 철학서로 <바가바드기타(Bhagavad Gītā)>, <베다(Veda)>와 함께 힌두교 3대 경전의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문헌이 성립됨으로써 인도의 고전종교가 확립됐다.

    <베다>는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삼히타(Samhita-本集), 브라흐마나(Brahmana-祭義書), 아라냐카(Aranyaka-森林書), 우파니샤드(Upanishad-秘義書)가 대표적인 베다 분류법으로서, 베다는 고대로부터 이러한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그리하여 이들에 의해 인도의 고대문명을 ①베다시대, ②브라흐만시대, ③우파니샤드시대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힌두경전인 <베다(véda)>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이 우파니샤드이다.

    우파니샤드(Upanishad)라는 말은 upa(옆에ㆍ가까이)와 nisad(앉는다)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서로 대좌해 스승이 제자에게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수하는 것을 의미해서 <오의서(奧義書)>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우파니샤드도 넓게는 힌두교 경전 <베다(Veda)>에 속하며, 시기적으로 베다의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베다의 말미)라 불리기도 하고,

    우파니샤드는 단일한 책이 아니라 '우파니샤드'라는 명칭이 붙은 200여 종 이상의 성전에 대한 총칭이다. 우파니샤드의 글들은 한 사람의 작가가 일정한 형식을 갖고 서술한 것이 아니라 BC 1000~BC 600년경에 리시(rishi,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조성됐다고 하는 것들이 전해지는 내용들이다.

    이 가운데 붓다 이전(BC 6세기 이전)에 쓰인 우파니샤드만을 따로 초기 정통 우파니샤드 혹은 베다 전통의 우파니샤드로 분류, 그 권위를 인정한다. 고행ㆍ업ㆍ윤회ㆍ해탈 등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우파니샤드는 석가모니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인들의 가정마다 가훈에도 즐겨 인용되는 경전이기도 하다. 전체를 꿰뚫는 근본사상은 객관 세계로서의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내적인 본질인 아트만(Atman)은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우파니샤드(Upanishads, 奧義書)는 베다 문헌 중에 가장 나중에 조성돼 베다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베단타(Vedānta, Veda-end)라고도 한다.  

 

*우파라반나(Uppalavanna; 蓮華色)---신통력이 뛰어난 부처님 제자 비구니이다. 붓다 생존 시 케마(Khemā, 差摩)와 더불어 으뜸 제자 비구니 두 명 가운데 한 분이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이라 불렸다고 한다. ‘웁빨라’는 청련화(靑蓮華)를, ‘완나’는 빛깔을 가리키는 말로서, 어릴 때부터 피부색이 아름다운 연꽃처럼 푸른빛 윤기가 났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마가다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왕사성)에서 장자의 딸로 태어났다. 결혼했으나 남편이 어머니와 통정한 것을 알고 딸과 함께 집을 나와 재혼했는데, 남편이 다시 자기의 딸을 첩으로 삼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다. 출가해서 슈라바스티의 남쪽 안다바나 숲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중, 진작부터 그녀를 사랑하던 사촌 오빠가 숲으로 찾아와 그녀를 겁탈했다. 오빠의 완력에 눌려 꼼짝없이 겁탈을 당한 그녀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다른 수행자들에게 고백했다.

    이 일 때문에 수행자들 사이에서 번뇌를 제거한 사람도 정욕에 대한 만족감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붓다는 번뇌를 제거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애욕에 빠지는 일도 없고 정욕에 만족하는 일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삼중의 희생을 겪어야 하는 전형적인 성법죄 피해자였다.  

    붓다는 이 일이 있은 후 비구니가 숲속에 머무는 것을 금하고,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에게 청해 왕성 안의 원림(圓林)을 개방해 비구니들이 그곳에 머물며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비구니 교단과 재가 신자들로부터도 큰 신망을 얻었다.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끝없이 애욕의 희생물이 되었던 웁빨라완나, 그녀는 순탄치 못한 어두운 인생을 살며 처절하게 고통 받은 여자였지만, 붓다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의 삶은 새로운 빛깔로 되살아났다. 기구한 삶을 살았기에 오히려 인간 고통의 실체를 여실하게 직시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은 웁빨라완나, 그녀에게 있어 삶은 곧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케마(Khemā, 差摩) 참조.

 

 

   

*우팔리(Upali, 優婆離)---붓다 10대 제자 중 한 사람. 불교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우팔리는 계율에 통달해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불렸다. 붓다 입멸 직후 제1차 불전결집에서 ‘계율’ 부분은 대부분 우팔리 존자에 의해 송출(誦出) 됐다. 우팔리는 석가족 궁정 이발사로 최하층인 수드라(sudra)계급 출신의 아라한이었다.

   천민출신으로 가난해 교육도 받은바 없는 그가 계율을 만들어 실천하고 중생들의 희로애락을 눈여겨 살핀 총명한 제자였다고 한다. 비구(남승)에게는 150계, 비구니(여승)에게는 348계(戒)의 계율을 가르쳤다고 하니 학교 공부가 다가 아닌 듯도 싶다. 그 많은 계를 가르친 것은 단순히 그들 수행자들만의 계율이 아니라 이 계율을 널리 전파해 부처님 법이 펴지는데 도움을 주고, 나아가서 모든 중생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에 처한 이웃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생활 지침서이기도 했다.

   

*우화서(雨華瑞)---‘꽃비가 상스럽게 내리다’는 말이다. 붓다께서 <법화경>을 설하려고 삼매에 드셨는데, 하늘에서 꽃이 비 오듯이 쏟아져 상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그래서 법당에는 꽃 장식이 많다.

   

*운강석굴(雲岡石窟)---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서쪽 15㎞ 지역인 운강진(雲岡鎭)에 있는 석굴사원. 무주천(武州川) 남서쪽 벼랑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전체 길이 약 1km이며, 대굴 21개 중굴 20개와 무수한 소굴, 불감(佛龕)이 조성돼 있다. 석질은 밝은 색 사암(砂岩)으로 거의 전부가 북위(北魏) 시대에 조성된 것이며, 벽에 직접 조각해 색을 칠했다.

        ※중국 3대 석굴---운강석굴, 둔황의 막고굴, 낙양의 용문석굴

     

*운력(運力)---→울력 참조.

   

*운명의 부정---인간은 자기선택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또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생의 양 끝은 다 자유선택과 무관하게 처리된다. 이래서 사람들은 운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운명이 나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운명의 장난으로 살지 않고, 삶을 자유스럽게 영위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운명을 부정하는 극단적 자유행동론자는 동서고금의 철학사에서 중국 전국시대의 묵자(墨子)와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샤르트르(Chartres)가 대표적이다. 묵자는 철저한 비명론(非命論)을 펼쳤다. 비명은 운명이나 숙명을 부정한다는 의미로서, 운명은 실천적인 노동 분업의 가치를 말살시키고, 팔다리의 힘을 다하고, 생각하는 지혜를 다하는데, 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묵자는 인간 근육의 힘과 생산의지와 그 의식의 생각을 아주 강조했으며, 의식과 의지의 사상가로서 운명을 인간의 삶에서 온전히 배제시켰다. 묵자는 사르트르처럼 철저한 실천의식의 사상가였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이 흔히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행동에 다름 아니라고 그의 저서 <시인 보들레르론(Baudelaire論)>에서 밝혔다. 이런 초기의 자유행동론은 후기의 사회역사철학에서도 적용된다. 그의 행동철학은 철저히 인간주의적인데, 그 말은 자연적 필연의 요소를 완전히 지우려는 사유와 통한다. 그래서 초기의 실존철학에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고, 후기에는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계급투쟁의 의식철학으로서 마르크시즘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한분 순일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자.

   “여기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남자는 처와 자식이 있으며 다른 한 남자도 처와 자식이 있다. 그 둘은 전부 가난하다. 즉 현실에서 갖추고 있는 조건이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 둘은 현실에서는 운명이 같고, 둘 다 똑 같이 노동을 한다고 하자.

   헌데 전자는 어쩔 수 없이 의무감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을 한다. 하고 싶지 않은데 왜 내가 이들 때문에 이렇게 힘든 고생을 해야 하는가 여기며 죽지 못해서 하고 있다. 후자는 처와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자기 한 몸뚱어리 정도는 내다 버려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기에 그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즐겁게 힘든 일을 한다.

   그런데 둘의 주어진 운명은 같다. 허나 둘은 다르다. 하나는 지옥에 살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천국에 살고 있다. 그러니 운명이 같다 할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운명을 외부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두고 있다. 허나 진실한 운명이란 외부적으로 주어지고 벌어지는 것에 있지 않다.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란 주어지고 벌어지는 것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

   운명은 현상에 있지 않다. 마음 한자리 바뀌면 바뀐다. 이 말은 운명이란 본래 없다는 뜻이다. 허나 사람들이 운명을 이 삶에서 주어지는 어떠한 조건으로 아는 한, 즉 현상에 집착하는 한 그들에겐 그 운명이 늘 있다. 허나 이러한 것은 가짜 운명이다. 그들이 내면에서 즉, 참나에 앉는다면 이러한 운명이란 허깨비임을 알 것이다.- 순일스님 ---→‘불교와 운명’ 참조.

 

 

*운명(運命)과 숙명(宿命)---운명(運命)의 운(運)은 정지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인다는 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속성이 운명이다. 따라서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숙명(宿命)은 잘 숙(宿)자에 목숨 명(命)자를 쓴다. 해석하자면 잠든 목숨이니 움직이지도 않는 목숨을 의미한다. 따라서 숙명(宿命)은 어떠한 의지나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미 결정돼있는 삶을 말한다.

    숙명이란 아마존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한국에서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날 수도 있고, 가난하고 좋지 않은 농촌의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숙명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어쩔 수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 반면에 운명(運命)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는 환경이 있고, 부모님을 시작으로 일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도 접하게 되는 인간환경도 있다. 아무렇게나 내버려지기도 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기도 하며, 훌륭하고 스승을 만나 보람된 삶을 사는 경우도 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비관하며 사는 일생도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아의 형성에 따라 시시각각 자기가 쌓은 업(業)에 따라 나의 운명도 달라지는 것이다.

 

 

*운문광록(雲門廣錄)---중국 운문종(雲門宗)의 개조로서, 중국 당(唐) 말~오대(五代)시대에 활약한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의 어록으로, 본명은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 3권. 문언의 언행 및 제자들과의 문답을 문인이었던 수견(守堅)이 집록하고, 종연(宗演)이 감수를 해 송(宋)대인 1076년에 출간했다.

   

 

 

*운문끽구자(雲門喫狗子)---<선문염송(禪門拈頌)>에 나오는 말이다. 석가여래께서 탄생하자마자「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여러 조사들이 해석도 하고 칭송도 한 것이 많으나 운문(雲門文偃, 864~949)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몽둥이로 때려잡아서 주린 개에게나 주어 뜯어먹게 했겠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선지식들은 “아 ! 운문 선사야말로 참으로 ‘유아독존’의 뜻을 잘 설명했구나, 과연 부처님의 제자답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선문염송(禪門拈頌)---고려시대 고승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선사가 1226년(고종 13년)에 편찬 간행한 선문공안집(禪門公案集)이다.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중국 당 말에서 오대를 거쳐 북송 초까지 활약한 선승. 광진 대사(匡眞大師)라고도 한다. 법명은 문언(文偃)이고, 운문종(雲門宗) 창시자이다.

   그는 뛰어난 화두로 유명한데, 특히 ‘간시궐(乾屍厥) - 마른 똥 막대기’라는 화두가 유명하다. 이처럼 운문 선사 어록의 특색은 상대방 질문의 포인트를 잡은 간단명료한 어구에 있다. 운문 선사는 어록을 남기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스님이어서 그의 설법은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막힘이 없었지만 누가 그것을 기록이라도 하면 반드시 야단을 쳤다. 헌데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종이로 만든 옷을 입고 그 옷에 몰래 받아 적었기에 오늘에 전한다고 한다. 그래서 저서는 따로 없고 그의 말을 기록한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이 전한다.---→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참조.

   

 

*운문호병(雲門餬餠-운문의 호떡)---어떤 스님이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의 말도 조사의 말도 하도 들어서 싫은데, 부처와 조사의 말씀을 초월하는 말은 무엇입니까[如何是超佛越祖之談]? 그들을 뛰어넘는 말 한 마디를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운문 선사가 답하기를,

   “호떡!”이라 했다.

   자기 자신은 너덜너덜 누더기 걸친 남루한 거지꼴인 줄도 모르고 분별심을 일으켜 감히 부처와 조사를 능가하는 말을 해 달라는 그 호언장담하는 건방진 모습, 그 얄팍한 언어에 분별심을 가진 승려, 그 입을 한방에 틀어막아버린 ‘호떡!’ 설법, 이 공안은 지극히 간단한 선문답이지만, 이에 대해 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 선사가 평하기를,

   “혀가 입천장에 딱 붙었다”라고 착어(着語)했다.

    한 입 가득히 호떡을 물고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또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막힌 공안에 기막힌 평이다.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진정한 법문이 말로써 가능할 리도 없다.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言詮不及)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이고,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부처나 조사라는 망념을 초월한 경지이다. 그런데 함부로 언설을 늘어놓다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진 옷 틈처럼 벌어진 분별심, 그 구멍[입]에다 호떡으로 틀어막았지만 호떡이 달라붙어있지 않으니 소용이 없다. 이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천하 중들은 떡 붙이기에 정신없구나. 이 말은, 분별심을 호떡으로 틀어막았으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현상에 집착해서 불법의 근본을 체득하지 못한 채 천하의 중들은 미망[착각]만 거듭하고 있구나, 이 말이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지금도 천하의 많은 수행자들이 착각하고 있다. 운문이 스님들을 위해 호떡으로 정법의 안목을 바꾼 방편법문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했다.

    헌데 부처와 조사에 분별심을 일으켜 구분 못하는 건방진 태도도 문제지만 부처와 조사에 구애 받는 것 역시 수행자로는 마땅치 않는 모습이다.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에게 얽매임이 있어서는 결코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말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어야만 읽은 경문이나 들은 법문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살불살조(殺佛殺祖)] 했거늘, 선문답에 ‘호떡’이라 답한 것은 부처나 조사의 이상적인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모습을 질타하며,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아 자유인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길이라는 말이다.

     

 

*운수(雲水) 생활---선승들이 물이나 구름이 흘러가듯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정처 없이 행각하는 것, 그러나 아무 뜻 없이 이리저리 방랑하는 생활이 아니라 선지식을 찾거나, 만행(萬行)을 통한 구도의 행각을 뜻한다.

     

*운수납자(雲水衲子)---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를 묻기 위해 돌아다니는 승려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납자(衲子)는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 즉 승려를 일컫는다.

※납의(衲衣)---세속 사람들이 버린 옷을 기운 옷, 혹은 못 쓰는 헝겊이나 버려진 헝겊으로 누더기처럼 기워서 만들어진 옷이라는 뜻이다.

            

*운자재(雲自在)---운자래란 구름이 공중에 가득 퍼져 모든 것을 다 덮는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덕(德)을 형용한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치 구름과 같이 일체를 다 덮어서 모든 것을 부처님의 영향권에 두는 힘, 곧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구원하는 힘이 자재하시다는 뜻이다.

   

*운판(雲板)---사찰에서 매달고 조석예불 때 치는 청동판에 구름무늬를 아로새긴 것, 허공에 날아다니는 중생[새]들을 제도하고, 허공세계에 사는 중생의 고통을 쉬게 하는 법구이다. 옛날 선방에서는 밥 때를 알리는 신호로도 사용했다.

    

*울력---스님들이 여럿이 어울려 힘을 합쳐 일한다는 순수 우리말이다.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로 운력(運力)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울력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울력은 노동조차도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큰 뜻이 있다. 백장(百丈懷海, 720~814) 선사의 청규(百丈淸規)에 “사문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으니 울력은 사찰에서 중요한 것이라 환자가 아니면 모두 동참하는 것을 의무로 한다. 따라서 스님들에게는 예불, 참선과 함께 수행의 한 방편으로 갖는다.---→백장청규(百丈淸規) 참조.

  

*울단월(鬱單越)---―수미산 주위 바다에 4대주가 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 큰 바다 가운데에는 4대주의 하나인 북구로주(北俱盧洲)란 곳이 있다. 이곳의 별칭이 울단월(鬱單越)이다. 이곳 인간 수명은 1000세이고 중간에 죽지 않으며, 질병도 없고, 쾌락이 끊임이 없어 4주 중에서 재물이 제일 수승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대륙 사람들은 불교에 귀의해 수행할 수 있으나 이곳은 너무 쾌락하기 때문에 불법에 관심이 없고, 따라서 오직 이곳에는 부처님이 출세하지 않으며, 불교 수행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태어남을 팔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삼재팔난(三災八難) 참조.

    

*웁빨라완나(우파라반나, 蓮華色, Uppalavanna)---→우파라반나(Uppalavanna; 蓮華色) 참조.

 

     

*웃다가 라마풋다(Uddaka Ramaputta)---부처님이 출가한 후 처음 찾아간 스승이 바이살리의 바라문 스승 알라라 칼라마였다. 그는 그 시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바라문의 요가 수행자로서 대선지식(大善知識)이었다.

   부처님은 처음 알라라 칼라마에게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익힌 후 더 나은 수행을 위해 당시 마가국에 있던 바라문의 요가 스승 웃다가 라마풋다를 찾아가서 귀의했다. 그는 알라라 칼라마와 같이 수정주의자였다. 수정주의(修定主義)란 선정(禪定) 수행을 통해 범아일여(梵我一如)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 유행했던 종교적 수행으로 수정주의(修定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가 있었다.

   수정주의는 괴로움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 어떠한 의식(意識)이나 사념(思念)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선정(禪定)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웃다가 라마풋다에게서 무색계 선정의 최고 수준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익혔다. 그러나 곧 그의 경지를 넘어서고 이들의 방법으로는 생노병사와 윤회를 해결할 수 있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없을 알고, 고행을 하러 그의 곁을 떠났다. 이미 싯다르타태자께서는 보살십지(菩薩十地) 가운데 마지막 법운지(法雲地) 경계에 도달해 계셨으므로, 두 학자와 결별하고 이번에는 고행을 하기 위해 니련선하 강가로 가셨다.---→‘부처님의 스승’ 참조.

   

*웃바까---세존의 첫 제자가 될 기회를 놓친 무지한 사람이다. 2천 6백여 년 전 석가세존께서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대우주의 진리를 체득하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깊이 명상하셨다. 그리고 한 곳에서 7일씩 머무는 식으로 일곱 번을 옮겨 앉아 49일간 법계를 두루 살피시며 깨치신 진리를 남김없이 음미하고 체율체득(體律體得)하셨다.

    그리하여 정각(正覺)의 기쁨을 만끽하신 다음에, 왕사성 수행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두 분 바라문 요가의 대가(大家)에게 필히 전교(傳敎)해주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 석가세존께서는 싯다르타태자라는 신분으로 출가하신 후에, 바라문의 대석학이라는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가 라마풋다(Uddaka Ramaputta)를 찾아가 수행을 해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익혔으나 그들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그들 곁을 떠나 혼자서 대각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이 이룬 바를 전교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 처음 만난 수행자가 웃바까였다. 웃바까는 정각을 여신 세존의 얼굴을 보니, 맑고 청정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육척(六尺) 장신의 세존의 기상이 너무도 위엄스럽고 도태(道態)가 나는 것을 보고, 잠깐 실례를 하며, 세존께 “수행자는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며 무슨 경전을 공부하십니까?”라고 인사를 청했다.

   이에 세존께서는, “나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 나는 일체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두루두루 모두 깨달았다. 세상에서 나를 가르칠 사람은 없다. 내가 계발한 수행 방법에 의해 대우주의 진리를 체득한 일체지자(一切知者)요, 일체승자(一切勝者)다.”라고 하셨다.

   그 때 웃바까가 부처님과 맞는 인연 중생이었더라면 얼른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일체지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여쭙고 최초의 제자가 됐어야 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성인(聖人)이라야 능지성인(能知聖人)이라, 성인만이 성인을 알아본다고 했다. 웃바까가 수행자라고 하지만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웃바까였을 것이다.

    

*원(願)---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불교에서 ‘욕(欲)’이란 “갖고자 하는 마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바람, 구함”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원(願)’이다. 욕(欲)과 원(願)은 그 의미는 비슷하나 전자는 버려야하는 욕심으로, 후자는 가져야 하는 것(욕구)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원을 세우다’라고 하면,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바, 즉 중생주제 혹은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세운다는 뜻으로 쓰인다. 무슨 일이나 목표가 분명해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하고자 하는 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원이다. 원(願)은 삶의 강한 용기인 동시에 새로운 의지이므로 간절할수록 원력이 커진다. 그러므로 원행(願行)이 확실하면 삶의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불교에서 원(願)은 보람이자 힘이고 희망이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다.

    사람은 원(願)이 있어야 된다. 원은 꿈이고 희망이고 기대감이며 그 사람이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된다. 식물들도 자기가 성장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기를 흡수하고 수분을 흡수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식물도 자기 발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불 ‧ 보살의 본원(本願)이란 근본서원(根本誓願)의 준말로서 모든 부처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성불하고자 뜻을 세운 여러 가지 서원을 말한다.

   즉, 서원(誓願)은 간절한 원을 말한다.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본원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하며, 별원은 부처님마다 중생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우신 아미타불의 48원, 약사여래의 12원, 법장비구의 48대원 등을 일컫는다.

   그리고 어떤 일을 바라고 원해 반드시 이를 이루려는 서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수행(修行)을 원행(願行)이라 한다. 발원과 수행을 아우르는 말이 원행이다.---→원력(願力), 원행(願行), 서원(誓願) 참조.

 

 

*원각(圓覺)---원만한 깨달음, 즉 부처님의 완전무결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다. 원각은 마치 모든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바다에 비유된다. 물은 어떤 모양의 그릇과 만나더라도 그 그릇의 모양을 싫다 좋다 하지 않고 말없이 그릇의 모양새에 따라 순응한다. 흐르는 물은 바위가 있으면 돌아서 흐르고, 웅덩이를 만나면 고였다가 넘쳐서 흐를 줄도 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릴 줄을 알고, 상대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양보할 줄도 안다.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원각(圓覺)은, 원각을 통해 물의 성질처럼 전혀 걸림이 없고, 거울의 성품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이며, 모든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바다가 될 수 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곧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을 일컬어서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 한다. 원각에는 진여, 청정, 이런 뜻도 포함돼있다.

 

     

 

*원각경(圓覺經)---<원각경>은 줄인 이름이며, 원명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고, 예로부터 우리나라 대승불교 근본경전의 하나이다.

    <원각경>은 붓다가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12 보살들과의 문답 형식으로 대원각(大圓覺)의 묘리와 그 관행을 설한 경전이다. 12 보살들과의 문답을 각각 1장으로 했기에 전체 12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이 경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고, 693년 북인도 계빈국 출신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의 한역본만 있어서 중국에서 만든 위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불타다라(佛陀多羅)도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원각경>은 실천 수행체계를 정연하게 갖추고 있는 경전으로서,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의 교판에 의하면, 돈교에 속하는 경전으로서, <유마경>, <능가경>과 함께 특히 선종 계열에서 중요시하고 있다.

    고려 말의 함허(涵虛1376∼1433) 화상께서 <원각경>은 <화엄경>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화엄경>과 다른 점은 간결하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량은 작지만 <화엄경>의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모두 다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원각경>은 부처님 공부하고 참선 명상하는 비구 비구니들의 선(禪)을 배우는 지침서라고 했다.

    <원각경>에서는 그 많은 수행법을 정리해서 3가지 수행법으로 요약했다. 사마타, 위빠사나, 선나관(禪那觀)이 바로 그 것이다.

    사마타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서 일체의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이는 다른 생각을 불필요한 죽은 생각, 즉 사념(死念)으로 본다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통찰을 의미한다. <원각경>에서는 위빠사나를 삼마발제(三摩鉢提)라는 용어로 쓰고 있는데, ‘통찰’이란 어떤 사물을 보고 듣고 느꼈을 때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선나관(禪那觀)’이라고 한다. 선나관을 적멸(寂滅)이라고도 하는데, 사마타와 위빠사나, 이 두 가지 경계를 동시에 이루면서 이 두 가지 경계를 뛰어넘어 중생의 영역을 초월하려는 부처님의 선정이다. ‘선나관 = 적멸(寂滅)’에서 '적(寂)'이란 사마타를 의미하는 '적정(寂靜)'의 '적(寂)'을 말하고, '멸(滅)'이란 삼마발제를 의미하는 '환멸(幻滅)'의 ‘멸(滅)’을 말하므로, ‘선나관’ 속에 사마타과 위빠사나가 다 녹아 있는 것이다.

    이 경을 널리 유포시킨 이는 당나라 시대 중국 화엄종의 규봉 종밀(圭峯宗密, 780~841) 스님이다. 대승의 최후 구경인 원돈(圓頓=원만하고 단번에 최후의 진리를 깨닫는 것)의 진리를 말하고, 그 깨닫는 법과 수행하는 법을 기록한 경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선사께서 깊이 신봉해 요의경(了義經)이라 한 뒤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통하게 됐으며, 조선 초기 함허(涵虛) 화상이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을 지은바 있다.

    <원각경>이 비록 위경이라 하지만 대승 교의를 워낙 정밀하게 설하고 있으며, 문헌의 체계나 조직이 빼어나서, 현재 조계종 전문 강원(講院)에서 <금강경>, <능엄경>,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고 있다.

                ※원각(圓覺)---완전 원만한 깨달음을 일컫는 말로서, 물과 같이 그 무엇과도 부딪침 없이 순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또한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을 일컬어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 한다.

 

    

*원각묘심(圓覺妙心)---원만구족하게 깨친 마음이므로 진공묘유의 무궁무진한 조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원각묘심이라 한다. 바로 부처의 원만한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을 말하기도 한다.

    원각(圓覺)은 마치 모든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바다에 비유된다. 물은 어떤 모양의 그릇과 만나더라도 그 그릇의 모양을 싫다 좋다 하지 않고 말없이 그릇의 모양새에 따라 순응한다. 흐르는 물은 바위가 있으면 돌아서 흐르고, 웅덩이를 만나면 고였다가 넘쳐서 흐를 줄도 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릴 줄을 알고, 상대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양보할 줄도 안다.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원각(圓覺)은, 원각을 통해 물의 성질처럼 전혀 걸림이 없고, 거울의 성품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이며, 모든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바다가 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곧 원각묘심(圓覺妙心)이다.

    부처님은 바로 이 원각묘심에 입각해 무명(無明)을 단절하신 분이시고, 우리 중생들도 모두가 이러한 마음을 갖추고 있다고 설한 경전이 <원각경(圓覺經)>이다. 즉, 원각묘심은 부처님들의 특수성임과 동시에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보편성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원각경>에서는 지혜뿐만 아니라 중생의 무명까지도 원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일체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나와 마치 허공 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번뇌 망상과 사심 잡념이 고요히 잠자면 곧 원각묘심이 된다고 했다.

    상반된 양극이 모두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원각은 또한 열반이다. 슬픔과 고뇌의 언덕에서 초월한 도피안(到彼岸)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바라밀이기도 하다. 보살들은 이러한 나침반이 있어서 원각을 증득한다. 중생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차별과 대립의 세계이다. 그러나 원각에서 관조된 세계는 평등부동이다. 도대체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의 상반된 가치기준의 진상을 하룻밤의 환상인 듯 여여(如如)하게 체득되는 것이 원각묘심이다. 따라서 원각묘심엔 생멸(生滅)도 거래(去來)도 없고, 증감(增減)도 미효(迷曉-미망과 깨달음)도 없다.

 

 

*원공(圓空)---공(空)하다는 것은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도 있지마는 수행을 쌓으면 결국은 다 같이 원공(圓空), 곧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되므로 평등이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도 죄를 뉘우치고 행동을 고쳐 바르게 가지면 결국 착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모두가 원만상주(圓滿常住), 곧 완전히 평등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당장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상을 가지고 수행을 쌓아 온갖 차별이 있는 가운데서도 최선의 방법을 다하면, 결국은 공(空)하여 차별이 없는 곳[원공(圓空)]에 귀착(歸着)하게 된다고 했다.

 

 

*원관(院館) 사찰---고려의 중앙집권적인 역로망은 대체로 성종(981~997)~현종대(1009~1031)에 걸쳐 정비됐는데, 당시에 정비된 역로망은 공적 역할이 중심이었으므로 모든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제시된 정책이 객관을 갖춘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이용해 객관의 운영을 담당하게 했다. 이러한 원관 사찰들은 현종대에 처음 출현해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건립ㆍ운영됐는데, 특히 수도 개경 주위 및 남부지방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에는 원관 사원이 여럿 설치됐는데, 원관 사찰은 일반 사원과는 달리 별도의 객관영역을 구성하고, 여기에는 사원 영역과는 별도로 여행자들이 머무는 개실과 마방, 그리고 그 부속시설들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원광국사(圓光國師, 555년/진흥왕16∼638/선덕여왕7)---신라고승으로 중국 남북조시대 진(陳)나라에 가서 불법을 수학했으며 화랑도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고, 불교토착화에 크게 공헌했으며, 운문사(雲門寺)를 중창했다. 원광법사의 부도탑(浮屠塔)은 현재 경북 경주시 안강읍(安康邑) 두류리에 있다(경북문화재자료 제97호). 원광이 오랜 중국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것은 진평왕 22년(600)이었다. 진흥왕 36년(575) 즈음 25세의 나이로 남조의 진나라로 유학을 떠나 금릉에서 성실학을 비롯한 다양한 조류의 불교학을 섭렵했다. 진평왕 11년(589) 진이 멸망하자, 수나라의 장안으로 옮겨 새로 유식학 계통의 섭론학을 공부하면서 수문제에 의한 불교치국정책과 남조의 교학불교와 북조의 실천불교가 종합되는 불교계 변화상황을 목격했다. 그리고 50세 전후인 진평왕 22년에 본국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25년이 넘는 장기간의 유학생활이었다.

    원광은 승려로서 중국의 새로운 불교학을 강의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종교적 임무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인으로서 유교와 한문학을 소개하고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세속의 윤리덕목을 제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치적 자문을 하는 등 정치가와 외교가로서 세속적 역할도 수행했다. 원광은 진평왕 22년(600) 귀국한 이후 30~40년 동안 활약하다가 진평왕 52년(630)에서 선덕여왕 9년(640) 사이에 입적했다.

 

 

*원교(圓敎)---당나라시대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 주도한 화엄종의 교판(敎判)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소승교(小乘敎) ․ 대승시교(大乘始敎) ․ 대승종교(大乘終敎) ․ 돈교(頓敎) ․ 원교(圓敎) 등의 5교(五敎)로 분류했다. 그리하여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을 원교(圓敎)라 했지만,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이 원교였다.

    여기서 원교의 원은 원만, 원융의 뜻이며, 원교는 부처님께서 평생 설법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법문, 원만하고 완전한 교법을 이른다. 즉, 대승불교의 최종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 최고의 진리를 원교(圓敎)라 함에는 같은데, 궁극적으로는 중도(中道)를 뜻한다. 원교란 바르게 중도를 나타낸 것이므로 원교를 알려면 중도를 알아야 되고 중도를 알려면 원교를 알아야 된다. 원교와 중도는 둘이 아니어서, 교리적으로 표현할 때는 원교이지만 그 내용은 중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이라 해서 어디 다른 곳에 관세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깨칠 때 그때 관세음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에 불과하다. 곧 중도만이 실제로 부처님의 바른 사상이며, 그 이외는 모두 다 방편적 가설(假說)이다. 따라서 원융한 중도 이외에는 다 방편설인만큼 그 방편설을 실제의 불교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원교란 중도를 바르게 나타낸 것으로 양변을 다 차단함이다. 유ㆍ무(有無)도 차단하고, 고ㆍ락(苦樂)도 차단하며, 선과 악, 생사와 열반, 마구니와 부처 등 상대적인 것은 모두 차단해버린다. 상대적인 어느 한 쪽을 집착하게 되면 변견으로서 불법이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이와 같이 원교는 중도를 표방한 것인데, 양변을 떠난 동시에 양변에 원융해 공(空)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이러한 원교의 중도관에 따르면 십법계의 중생을 보되,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아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밝은 거울 속의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분명히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며, 물속에 달이 비치어 달이 물속에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달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중도라는 것도 이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속의 달과 마찬가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거울 속의 모습과 물속의 달은 예로부터 중도를 나타내는 비유로 자주 사용돼 왔다. 또한 이 말은 천태(天台 지의(智顗, 538~597) 스님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화엄종의 청량(淸凉 澄觀, 738~839) 국사도 이 거울 속의 모습과 물속의 달로 비유해 불법이 중도라는 것을 표명했다. 

    이는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속의 달이 결국 실제가 아니면서도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듯이 삼제(三諦)의 이치가 완연히 드러난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有)가 아니면서 유고, 무(無)가 아니면서 무이므로 묘법(妙法)이라 한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공 · 가 · 중이 원융함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천태스님 이전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원교라 했으나 천태 스님에 이르러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한 교학을 원교라 했다.

              ※일승원교(一乘圓敎)---전체 중생을 다 열반으로 실어 가는 가장 원만한 수레라는 뜻으로, 천태종에서 자체의 종파를 이르는 말.---→화법사교(化法四敎) 참조.

 

 

*원돈(圓頓)---원돈이란 원만돈족(圓滿頓足)의 줄인 말인데, 즉신성불(卽身成佛)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원돈(圓頓)에서 원(圓)은 원만함이고 돈(頓)은 단번에 완전히 깨달음을 뜻한다. 원돈이란 원만한 일체의 법을 일념으로 깨달아 곧 바로 불과를 충족시킴을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물을 빠진 것 없이 원만하게 갖추고 즉시에 깨달아 성불한다고 하는 뜻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단계적인 수행 과정 없이 한 순간에 완전하게[頓] 성취된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수행법으로서 성립하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의 의미이다. 이러한 원돈(圓頓)은 천태종의 교법으로 원교와 돈교를 아우르는 말이며, 화엄의 도리를 뜻한다. <능엄경>은 원돈의 가르침을 가장 잘 나타내준 경전의 하나이다.

     원돈(圓頓)이란 일체만법이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하고, 거기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으므로 돈(頓)이라 한다. 하나의 도가 일체의 도로서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원융하고 자재함을 원돈이라 표현한다. 이 원돈문(圓頓門)으로 들어가면 바로 실상을 알아 일체 경계가 모두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다. 그리하여 인연을 법계에 매어, 즉 법계에 통하게 돼 일념 이대로가 법계로서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

     원돈(圓頓)은 대승의 최후 구경으로서 화엄(華嚴)의 도리를 뜻한다. 즉 원만하고 단번에 최후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이 원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까닭에 한 법이 모든 법을 원만하게 하고, 한 생각에 크게 깨달아 완전한 불과(佛果)를 얻게 되는 것을 원돈이라 한다.』-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

 

*원돈교(圓頓敎)---대승원돈교(大乘圓頓敎)란 말이고, 원돈교의 준말이 원돈(圓頓)이며, 천태종의 교법으로 원교와 돈교를 아우르는 말인데, 화엄의 도리를 뜻한다. 화엄의 교학은 원만무애(圓滿無碍)한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원돈교라고도 하고, 법계원융(法界圓融)의 진리라고 하여 원융종(圓融宗)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천태종에서는 원교가 곧 돈교라는 뜻에서 <화엄경>을 말하며, 이는 천태종에서 화엄(華嚴)의 교법이라고 하는 화법사교(化法四敎) 가운데 하나인 원교(圓敎)와 화의사교(化儀四敎) 가운데 하나인 돈교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원돈문(圓頓門)---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이후 불교의 가르침을 경절문(徑截門)ㆍ원돈문(圓頓門)ㆍ염불문(念佛門)으로 나눈 뒤 경절문을 최상의 법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것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여기에는 오직 조사선(祖師禪)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말했다. 활구(活句)에서 얻어내면 부처나 조사로 더불어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어내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화두(話頭)에는 말과 뜻의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말을 참구한다는 것은 지름길 문을 가르치는 활구니 마음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뜻을 참구 한다는 것은 원돈문의 사구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어서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서산대사는 또 말했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의 사람은 많으나 이들은 교외별전의 근기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의 이치의 길(理路), 마음의 길(心路), 말의 길(語路)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자미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漆桶)을 두드려 부수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화두참구에서 경절문(徑截門)은 활구이니, 마음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 없는 것이고, 원돈문(圓頓門)은 사구이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돈문보다는 경절문을 채택할 일이다.    

          ※칠통배(漆桶輩)---좌선을 하다가 칠통에 빠진 것은 혼침이요, 참선에서 혼침에 빠진 무리를 칠통배라 한다. ---→경절문(徑截門) 참조.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고려시대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중국 당나라시대 이통현(李通玄, 635~730)이 지은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 입각해 성불(成佛)의 도리를 밝힌 책이다. 원돈(圓頓)이란, 원돈교의 준말로 화엄의 도리를 뜻한다. 그리고 원(圓)이 곧 돈(頓)이라는 <화엄경(華嚴經)> 교리에 의거, 해설한 성불론이다. 이 책이 지눌이 지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함께 출간되지 못하고 묻혀 있던 것을 1215년(고종 2)에 그의 제자 혜심(慧諶)이 간행한 것으로, 화엄의 도리에 의한 성불론이다.

   당시 불교계가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서로 반목함을 개탄하고 선종에 대한 교종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에 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상반된 견해가 양립했다. 선종은 참선을 통한 순간의 깨달음(돈오)을 중시한 반면, 경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시한 교종은 점수, 즉 꾸준한 실천을 강조했다.

   선종에서는 인간은 원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며, 교종은 인간과 자연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서로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깨닫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치열했던 교종과 선종의 대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고려 후기 출현했다. 바로 보조 국사 지눌이 <화엄경>의 교리에 의거해 지은 <원돈성불론'>다. 지눌은 <원돈성불론>을 통해 “돈오지만 점수해야 하며, 점수지만 돈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깨달음을 얻어도 계속 닦지 않으면 안 되며, 서서히 수행을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순간이라는 설명이다.

   지금 돌아보면 간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원돈성불론>을 간행한 지눌의 제자 혜심이 발문을 통해, “근고 이래 불법의 쇠폐가 심한데, 어떤 이는 선을 종으로 여겨 교를 배척하고, 어떤 이는 교를 숭상해 선을 훼방한다. 특히 선은 불심이요 교는 불어이며, 교는 선의 그물이 되고 선은 교의 밧줄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선 ‧ 교 양가가 마치 영원한 원수인 양 보고 있다.”고 적은 것을 보면 지눌의 사상은 세계 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정병조

 

 

*원돈지관(圓頓止觀)---지(止)는 선정이고, 관(觀)은 진리의 실상을 제대로 보는 지혜를 뜻한다. 지와 관을 함께 닦는 것이 천태의 행법인데, 이를 원돈지관 (圓頓止觀)이라 부르고 마하지관(摩訶止觀)이라고도 한다.

    지(止)는 정(定), 사마타(samatha)이고, 관은 혜(慧), 위빠사나(vipasyna)에 해당한다. 이 둘을 함께 닦는 것이 원돈지관(圓頓止觀), 곧 마하지관이다.

 

 

*원력(願力)---원력 혹은 원(願)이라는 말은 중생구제의 서원을 말한다. 보살은 자기 한 몸 해탈하는데 머물지 않고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는다. 그 것을 원이라고 하고, 힘력 자를 붙여서 원력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불교를 신행(信行)하는 사람이 목적을 성취하고자 내적으로 수립하는 기본적인 결심과 그에 따르는 신앙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신행을 수행으로 바꿔야 한다. 수행의 결과로서 원력을 세우는 것이지 수행 없는 원력은 모순이다.”라고 했다 - 수불스님

   이것을 원(願) ․ 서원(誓願) ․ 행원(行願) 등으로도 표현하지만, 내면적인 원은 결코 원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처럼 원과 힘은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력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원(願)은 보람이자 힘이고 희망이다.

   그리고 보살의 기본적인 원은 부처가 되고자 맹세하는 원작불심(願作佛心)과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도중생원(度衆生願)으로 대별되며, 이를 합쳐 상구보리 하화중생원(上求菩提下化衆生願)이라고 한다.---→원(願), 원행(願行), 역바라밀(力波羅蜜) 참조.

 

 

*원력수행(願力修行)---대개 큰 사찰의 대웅보전 전각 안에는 법신ㆍ보신ㆍ화신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이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眞身)이며 자성(自性)으로 청정법계(淸淨法界)의 진여(眞如)인 실상(實象)의 법(法)을 시현(示現)한 자성불(自性佛)이다.

    오른편 부처님은 보신불(報身佛)로 과거 원력수행(願力修行)의 한량없는 과보로 나타난 만덕(萬德)이 원만한 불신(佛身)이며, 화신불(化身佛) 또는 웅화신이라고도 하는 왼편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구제하는 불신(佛身)이다. 그리고 수행은 적당히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남들은 수행이라는 것도 모르는데 나는 그래도 가끔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고, 책도 읽고, 절도 가는데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나태한 수행심에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원이 필요한 것이다. 굳고도 밝은 원을 세워 수행의 나침반을 삼을 일이다.

    스스로의 원을 세워 발하겠다는 발원(發願)을,

    세운 원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맹세를 다짐하는 서원(誓願)을,

    세운 원을 반드시 실천하고야 말겠다는 행원(行願)을 가지고,

    강하게 밀고 나갔을 때 원에 큰 힘이 붙어 원력(願力)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수행이 원력수행이다.

    그리하여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을 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정토(淨土)를 이상적 미래 세계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눈앞의 현실로 규정하는 한편, 이 정토(淨土)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면 내 스스로의 자각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염불은 아미타불을 구하는 외부적 기도가 아니라 현실을 정토로 가꾸려는 원력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력(願力)의 전도(傳道)는 수행 중의 수행이다.

       

*원력소생(願力所生)---인간이 태어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원력소생과 업보소생(業報所生)이다. 업보소생을 인연소생(因緣所生)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은 모두 업보소생이다. 중생은 업의 작용이 바로 중생의 업보라서 업보가 인연을 초래해서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중생의 업보에 의해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인연으로 해서 태어난다고 하겠다.

     그리고 간절히 원한 바의 힘으로 태어나는 것, 즉 원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원력소생이라 하는데, 위인들에는 원력소생이 있으니 그 대표적인 분이 석가모니이다. 석사모니는 자기 원력에 의해 500생을 살아남는다고 한다.

      또한 남의 원력으로 태어나는 경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원력으로 소생한 분이 자장(慈藏) 스님이다. 1600년 전에 자장 스님의 아버지는 나이 40이 지나서도 슬하에 혈육이 없기에 천수대비에게 나아가 기도를 했다. 원을 세우길 “만약 자비하신 천수대비님이 나에게 일점 혈육을 점지해 주신다면 나는 그 아이를 내 자식으로 생각지 않고 불법의 동량(대들보)으로 삼겠습니다.” 그런 원을 세우고 7일간 기도를 하고 아이가 들어섰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자장스님이다. 또 비슷한 경우로서 원력기도로 태어난 분이 무학(無學)대사이다.

 

       

*원명상적조(園明常寂照)---명상적조(圓明常寂照)란 둥글 원자, 밝은 명자, 원명(園明) 두 글자는 끝이 없다는 말이다. 명(明) 자는 항상 밝은 것이고, 항상 밝아서 상적조라, 찾아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늘 비추고 있다. 이게 적조(寂照)고, 이것이 마음이란 것이다.

   『육도윤회(六度輪廻)의 고된 수레바퀴에 시달리는 게 아니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마음대로 운용할 줄 아는 것이 해탈(解脫)이요 열반(涅槃)이다. 이것이 곧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무한한 능력이요. 대생명의 자유이다. 한 방울의 물에 구억충(九億蟲)이 있다는 불설(佛說)은 이제 과학에서도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백억세계(百億世界)의 일월(日月)도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생각되지 않나? 백억세계의 백억 일월을 볼 수 있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을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더 할 수 없는 인간선언이 아닐 수 없다. 일체가 적멸(寂滅)해 단경(斷境)의 상태가 열반이 아니라 일체의 속발을 벗어난 대자유를 얻는 게 열반임을 알아야한다. 무상대열반(無上大涅槃)이여 원명상적조(園明常寂照)로다. 알겠나? 이 멍충이 똥덩이 같은 놈아!”』이는 성철(性徹) 스님의 법문이다. 여기서 무상대열반이란 더 없이 완벽한 열반이란 없다, 즉 완벽한 열반이란 말이다.

          적조(寂照)---모든 번뇌가 소멸돼 청정한 지혜가 밝게 드러난 상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바르게 관찰함을 말한다.

 

*원바라밀(願波羅蜜)---여기서 원(願)이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공에 바탕 한 이타적 중생구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이요 순수의지로서, 중생구제를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서원(誓願)이다. 따라서 원바라밀이란 이러한 서원의 완성이라는 뜻으로 십바라밀(十波羅蜜) 중에 제8바라밀이다. 개인적인 욕망은 업(業)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거기엔 반드시 과보가 동반되기 마련이지만 원은 공(空)에 바탕 하기 때문에 업의 굴레에 저촉되지 않는다.

 

 

*원불교(圓佛敎)---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 불교를 바탕으로 하여 세운 신흥종교이다. 전라북도 익산시에 총부를 세우고, 1947년에 교명을 원불교(圓佛敎)라고 정했다. 원불교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 정각 정행(正覺正行), 지은보은(知恩報恩), 불법 활용(佛法活用), 무아 봉공(無我奉公)을 강령으로 한다. 불교의 현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주창하고, 각자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 사업을 한다. 원불교에서는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과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좌선법을 강조한다.  

 

 

*원상(圓相)---→구족원상(具足圓相) 참조.

 

 

*원상(圓像)---사찰의 수선당, 심검당, 선불장 등의 편액이 붙어있는 선방(禪房)에 들어가 보면 커다란 원이 그려진 족자나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는 마음의 본성을 찾아가는 선(禪)의 상징이다. 이 원상(圓像)은 주객 분리의 이전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니 전부가 오직 공(空)이라는 상징이다.

    이와 같이 원상은 오묘한 불법 진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징표이기 때문에 원상이 갖는 의의는 원의 형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있다. 원은 끝없는 점의 연속… 영원성과 상통하고 있어, 설할 수도 논할 수도 없는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원상의 배후에 함축된 불법의 진리 또한 몇 마디의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옛날 한 큰스님이 원상이 함축하고 있는 불법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송구(頌句)를 읊었다.

   

       옛적에 부처님이 탄생하기 전(古佛未生前)

       서려있는 한 모양 둥그렇구나(凝然一相圓)

       석가도 오히려 이 도리를 몰랐거늘(釋迦猶未會)

       가섭인들 어떻게 이것을 전했을 소냐(迦葉豈能傳)

   

    큰스님이 이렇게 게송으로 답을 대신한 것은 진리는 설할 수 없고 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스스로의 관법(觀法)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실로 부처님이 탄생하기 전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존재하고 있던 불법(佛法)의 진리를 몇 마디의 말로써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가깝게 접근하려면 언어가 아니라 관법을 통해서 직접 부딪혀 깨닫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이다.

 

 

*원생(願生)---원(願)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생이라 한다. 사람이 죽으면 몸뚱이는 불로 태우거나 흙에 묻혀 사라지지만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은 타지도 썩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후에 살아생전 연습하던 마음에 맞는 코드의 몸뚱이를 새로 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그 차원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마음공부가 필수다.

    마음공부에는 세단계가 있다. 첫째는 일심(一心)공부, 둘째는 무심(無心)공부, 셋째는 발심(發心)공부이다. 일심공부는 기도요, 무심공부는 참선이요, 발심공부는 행불(行佛)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에도 단계가 있다. 입류(入流)라 해서 수다원(須陀洹)이라는 성현의 첫 경지가 있다. 다음이 사다함(斯多含), 그 다음이 아나함(阿那含), 마지막이 아라한(阿羅漢)이다.

    아나함이 되면 불환과(不還果)라 해서 윤회하지 않고 정거천(淨居天)이라는 천당에 머물다가 사라진다. 아라한이 되면 불생(不生)이고 무학(無學)이라 해서 더 이상 태어나지도 않고(윤회하지도 않고)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는 경지이다.

    다만 아나함이나 아라한은 중생구제를 위해 원을 세워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원생(願生)을 한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보살(菩薩)로 태어나는 것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산스크리트어 pariniṣpanna-svabhāva)---제일의상(第一義相), 진실상(眞實相), 진실성(眞實性), 진실성상(眞實性相)과 같은 의미이다. 원성실성은 반야바라밀의 경지를 말한다 하겠다.

   그리고 유식에서 말하는 육식 삼성설(三性說),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의 하나이다.

   원성실성은 원만히 성취된 참답고 실다운 성품이라는 말이다. 이 원성실성이 실상(實相)이고, 본성(本性)이고, 불성(佛性)이다. 그런데 불성이 지금 보이느냐 하면,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 진여, 여래, 부처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을 한다.

하지만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원성실성이 우리들의 망정으로는 보이지 않고 없다고 하지만 참다운 진리에서는 있다. 즉, 우리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진여불성이 영원한 우주의 도리에는 있다는 말이다.

   수행을 해서 전식득지(轉識得智)의 단계에 이르면 제8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청정하고 완전한 지혜로 변한다. 즉, 수행을 통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갖가지 망념과 망식들을 정화해서 번뇌가 없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얻는 것이 전식득지이고, 이것이 유식학의 목적이다. 그리고 전식득지를 할 때, 아집의 때로 물든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것이 원만하게 성취된 모습으로서의 원성실성의 세계다.

         ※정무리유(情無理有)---범부의 망정(妄情)에는 있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말. 

   원성실성은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난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하며, 이는 원만성취가 이루어진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모든 것이 평등한 진여 그 자체가 원성실성이다. 말 그대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실다운 성품이라는 뜻으로,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참다운 성품을 이르는 말이다.

   유식삼성(唯識三性) 중에서 의타기성이 삶의 본래모습이다. 의타기성에서 분별심을 일으키면 변계소집성이고, 변계소집성에 상대해서 본(本) 모습대로 보면 원성실성이고, 본 모습을 왜곡해서 보면 변계소집성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원성실성이다. 분별을 하지 않고 명확하게 보면 몸도 건강해지고 원성실성으로 들어간다.

   존재의 삼성(三性)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있다. 밤에 길을 가다가 삼으로 만든 새끼줄처럼 꼰 삼 줄을 보고는 뱀인 줄 알고 깜짝 놀라 기겁하는 경우를 상정해, 이를 사승마(蛇繩麻)라 한다. 뱀 사(蛇)자, 노끈 승(繩)자, 삼 마(麻)자, 사승마란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삼 줄을 뱀이라고 고집하는 견해를 말한다.

   먼저 뱀이라고 본 경우, 실제로 뱀은 없는데, 착각해서 뱀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 경우 뱀은 변계소집성의 존재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삼을 꼬아 만든 삼 줄이다. 이 삼으로 만든 삼 줄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잘 살펴보면, 삼 줄이라는 별도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삼을 꼬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삼 줄은 풀어버리면 삼만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삼 줄은 별도의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삼을 특정한 형태로 꼬아 놓은 것에 삼 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경우, 삼 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삼이 원성실성에 해당한다. 즉, 삼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다. 그것으로 삼 줄을 만들든 다른 무엇을 만들든 간에 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이 원성실성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성실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서 그 자성이 공하면서 또한 묘유이기도 하다. 삼을 진공으로 비유하면 그 삼으로 삼 줄이나 베를 짜는 용(用)은 곧 묘유로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의식인 육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 이렇게 8가지 식(識)인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다. 조건이 갖추어 질 때 존재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서 결국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이식(耳識), 즉 듣는 작용을 보면,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에 대해 듣는 인식이 생겼다가, 소리가 다함과 동시에 듣는 인식도 사라진다. 소리에 의지해서 나타났다가 소리가 다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의타기성의 존재는 개체적인 실체가 없고, 항상 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이 8가지 식(識),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고, 이 의타기성의 근저에 원성실성의 존재인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 이 근본 마음자리를 성품(性品),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自性)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自性)은 어떤 모습과 형태가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자성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자성(自性)은 정신의 근원인 것이다.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온갖 그림자는 인식작용(정신작용)이고, 거울은 그림자를 비추면서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을 정신이라 하고, 이 정신의 바탕자리인 자성이 원성실성이다.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원성실성은 현장(玄奘) 스님의 번역이며, 진제(眞諦) 스님은 '진실성'이라고 번역했다. 이 원성실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변하지 않는다는 뜻인 불변의(不變義)와 연에 따라 변한다는 뜻인 수연의(隨緣義)가 그것이다. 또 원성실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표현하는데, 진공은 불변의에 해당하고 묘유는 수연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나 진공묘유는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가 된다.

   공성(空性)이란 분별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변계소집성을 떨쳐버렸을 때 만나는 우리 삶의 본디 모습인 원성실성을 말한다. 때문에 공성이란 삶의 밑바탕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드러난 삶 그대로 공(空)인 연기관계를 말한다.---→유식삼성(唯識三性) 참조.

      

*원시반본(原始反本)---‘시원(始原)을 살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처음 출발한 근본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도 한다. 우주의 진리가 무시무종, 불생불멸로 무한히 돌고 도는 것을 표현하는 말, 또는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가 무한히 순환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역사는 원시반본 하는 것이다. 종교도 나라도 수행도 본원(本願)을 망각하면 안 된다. 치욕의 역사, 종교의 종말, 내 인격의 무너짐, 이러한 비극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시원을 잘 살펴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

 

      

*원시불교(原始佛敎)---초기불교(근본불교)를 이르는 다른 말이다. 불교를 시대 구분을 해서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눈다.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자제들이 있었던 불멸 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라 하고, 그 후부터 불멸 후 백 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말하고, 부파불교는 소승불교로서 불멸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까지 사오백년 사이를 말하고, 대승불교는 BC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한다.

    지금은 원시불교란 말을 잘 쓰지 않고 초기불교라 한다. 영어로는 Primitive Buddhism이다. 초기불교란 붓다 생존 시에 직접 설법을 하신 가르침, 즉 붓다 원음을 의미한다. 헌데 일부 한문불교와 대승불교의 우월성에 물들어있던 일본학자들은 초기불교를 애써 원시불교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원시모습, 미개상태의 불교라고 폄하하는 뜻이 은연중에 함축돼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지금은 잘 쓰지 않는다.

    불타의 사후로부터 근본분열을 거쳐 부파불교가 성립하기까지의 시기를 보통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부파불교의 성립시기를 보통 아소카왕시대 전후, 그러니까 제3차 파탈리푸트라 불전결집 시점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원시불교는 아소카왕 이전까지의 불교를 지칭한다.

    불교학에서 원시불교라는 영역이 독립한 것은 현대 불교학의 공로라고 할 만하다. 특히 Pali성전협회의 발족과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서구의 불교학은 원시불교의 주 자료인 Nikaya의 편찬을 진행하면서 가능한 한 니까야의 경설만을 중심으로 불교 이해의 한 분야를 정립해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의 경향은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서구나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학자들은 대개 니까야 안에서 원시불교를 이해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초기불교, 근본불교 참조.

    

*원시일시(元是一時)---<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이다. 삼라만상의 천차만별도 근원적으로는 하나

이며 한때란 말이다. 원래 「元是一時이므로 離卽離非하고 是卽非卽이니라」는 문장이다.

    부처님은 많은 중생을 상대로 말씀하셔서 낮고 옅은 곳으로부터 높고 깊은 데로 인도하기 위해, 처음에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앞과 뒤나 시작과 끝의 차별이 있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참선문 중에서는 오묘한 이치를 바로 가르치므로,「성(性), 상(相), 체(體), 용(用)」이 모두 한 생각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본래 한때인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곧 성(性)이며, 체(體)이고, 인연 따라 변하는 것이 곧 상(相)이며, 용(用)이기에 모두 한 마음 위의 작용임을 말한다.

   「이즉이비 시즉비즉(離卽離非 是卽非卽)」이라, 진여문에서 본다면 만법은 다 똑같다. 이것을「卽=곧 그것」이라 한다. 그러나 차별문에서 보게 되면 삼라만상이 완연히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을「非=아니다」또는「다르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본래 하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문과 차별문이 둘 아닌 동시에 하나도 아니며 다른 동시에 곧 같은 것이다. 차별 즉 평등이요, 모순 즉 조화다.「卽도 여의고 非도 여의고 是에도 卽하고 非에도 卽한다」라고 해서, 이것을「쌍차쌍조(雙遮雙照)」라 한다.

 

   

*원심(遠心)과 구심(球心)---마음은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대해서는 갖가지 사상, 갖가지 견해가 난무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 하나가 원심과 구심에 관한 것이다. 구심은 지금ㆍ여기에 작용하는 마음이고, 원심은 저기ㆍ거기, 즉 과거와 미래로 달아나려는 마음이다.

     예컨대, 추를 매단 끈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끈의 추를 바깥쪽으로 한 상태에서 끈의 안쪽 끝을 잡고 빙빙 돌리면 원심력과 구심력의 힘이 동시에 작용하게 된다. 회전하는 힘에 의해 추는 밖을 향해 달려 나가려 하는데 이는 ‘원심력’이고, 그 추를 붙들어 손 쪽으로 끌어당기는 끈의 힘은 ‘구심력’이다. 

    이와 같이 마음도 원심과 구심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마음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 즉 ‘여기’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비유에서 끈의 힘, 즉 마음의 구심력이 강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다른 때, 우리의 마음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인 ‘여기’를 떠나 ‘저기’와 ‘거기’에서 헤매기도 한다. 이것은 비유에서 추의 힘, 즉 마음의 원심력이 강한 경우에 해당된다. 

    구심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즉 우리 마음이 저기와 거기에서 돌아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인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나의 능력을 보다 더 잘 발휘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마음의 원심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즉 마음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인 여기를 떠나 저기와 거기에서 떠돌면 떠돌수록 나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우리 삶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능력이다. 그래서 능력을 키우기 위해 저마다 자기계발에 몰두하게 되는데, 마음이 구심력을 잃거나 원심력이 강할 경우 자기계발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공부에서도 성적을 낼 수 없다.

    세속적인 마음은 공간적으로 타인ㆍ타물을 지향한다는 점과 시간적으로 과거ㆍ미래에 떠돈다는 점에서 원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참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구심, 즉 공간적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當處]으로 되돌려오고, 시간적으로는 그 상황이 벌어지는 현재[今時]로 되돌려 와야 한다.

    그런데 마음을 지금ㆍ여기로 되돌려오는 일이 어렵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을 지금ㆍ여기로 되돌려오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기가 어렵다. 마음은 지금ㆍ여기로 되돌아왔다가도 금방 원심 쪽으로 달려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헌데 우리에겐 마음의 원심력이 꼭 필요할 때도 있다.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의 어느 곳, 어느 일에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원심력이 필요하다. 출가 수행자에게 지금ㆍ여기가 아닌 미래의 해탈이라는 최종목표(원심)가 있다. 하지만 이렇듯 모든 사람에게 목표가 있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운용하는 면에서 원심력이 필요하지만, 이러할 때에도 지금ㆍ여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은 다르다. 아무리 해탈이라는 원대한 목표(원심)가 있어도 우선 지금ㆍ여기에서 진지한 수행정진이 있어야 한다. - 김정빈 <경>에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맛지마 니까야(M143)> 등에서,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시대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는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이라 했다.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직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자신답게 주인답게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도 했다.---→현금(現今, 빠알리어 diṭṭha-dhamma), 즉시현금(卽時現今) 참조.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중국 송나라 때 선승. 간화선을 대성시킨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스승이다. 자는 무착(無着)이고, 원오는 호이다. 원오 선사 어록 <원오심요(圓悟心要)>와 <벽암록(碧巖錄)> 등이 전한다. 그 중 <원오심요>는 선승들과 사대부들이 질문해 온 것에 대해 답한 편지 글을 모아놓은 서간집이고, 대혜(大慧) 스님의 편지글 모음집인 <서장(書狀)>도 형식상 <원요심요>를 닮은 것으로 봐 이 책을 답습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설두(雪竇) 선사의 송고백칙(頌古百勅)에 수시(垂示), 단평(短評), 평창(評唱)을 붙여서 엮은 것이 지금의 <벽암록>이다. <벽암록>은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안집(公安集)이다.

    

*원융무애(圓融無礙)---<화엄경>의 대표적 사상이다. 원만하고 융통해 걸림이 없으며, 방해됨이 없이 융합한다는 의미이다. ‘원융’은 원만하게 두루 융섭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기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애’는 치우침이나 편견 없이 서로 통해 완전한 일치 내지 조화를 뜻하고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융무애는 연기와 중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또한 원융무애는 대립이 없는 초월의 경지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바로 화엄사상을 말한다.

    이 우주가 충동하지 않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바로 원융무애하기 때문이다. 지구 하나만 보더라고 일 년, 사계절, 한 달, 하루 24시간이 정밀하게 움직여나가는 이것을 원융무애하다고 하는 것이다. 원융(圓融), 원융무애(圓融無礙), 원융회통(圓融會通), 원통무애(圓通無礙)가 다 비슷한 말이다.

   

*원융문(圓融門)과 항포문(行布門)---→육상원융(六相圓融) 참조.

   

*원융불교(圓融佛敎)---회통불교(會通佛敎), 통불교(通佛敎)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불교 특유의 사상 가운데 하나인 원융사상을 말한다. 모든 사상을 분리시켜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엮는 교리통합론으로서, 이를 주창한 대표적인 고승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융불교는 초기경전인 <아함경>을 비롯해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정토경> 등 시대 변천에 따라 등장한 여러 경과 논장들을 모두 포용하고, 대승과 소승을 아우르며, 작금에 이르는 각종 종단의 소의경전과 수행법들까지 망라해서 붓다 당시의 불교교설에 근접하고자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녹여서 하나 된 불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원융사상(圓融思想)---우리나라 불교 특유의 사상 가운데 하나. 모든 사상을 분리시켜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엮는 일종의 교리통합론이다. 인도의 불교를 시대적으로 분류하면,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불교는 하나의 교리를 두고 시대별 혹은 종파별로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쳐서 불교를 공부하는 후대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또한 중국의 불교를 종파불교라고 규정짓듯이, 중국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교리에 대해 각 종파별로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쳐 종파 사이의 이론과 실천수행에 차이가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종파불교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래됐으나, 삼국 통일기를 전후해 우리나라 고승들은 보다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통해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상을 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고승들에 의해 전개된 새로운 교리통합론을 원융사상이라 하며, 이 원융사상은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원융사상의 대표적 고승은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는 인도 및 중국불교에서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공(空)과 유(有), 진(眞)과 속(俗), 이(理)와 사(事), 소승과 대승, 아(我)와 법(法) 등에 관해 여러 저술에서 이와 같은 상대적인 것들이 어느 하나 독립돼 존재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일(一)이면서 다(多)요, 다면서 일의 관계를 취하고 있다는 원융사상을 천명했다.

    원효 대사는 그의 저서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에서 부처의 일언일구가 모두 일불승(一佛乘)이며, 모든 중생이 마침내 일불승의 수레를 타고 불도를 성취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열반종요(涅槃宗要)>에서는 일체 중생에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마침내 모두 성불한다는 것을 주장해 일부 중생의 성불을 거부한 중국불교의 모순을 지적했다. 또한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에서는 상(相)과 상 아닌 것이 원융해 둘이 없다는 절대 원융의 사상을 전개했다.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에서는 정토와 예토가 본래 한 마음이요, 생사와 열반이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와 같이 원효 대사는 모든 저술에서 원융사상을 기초로 서술하고 있으며,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하여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당시의 중국 및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열 가지 논쟁을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으로 종식시킨 뜻 깊은 저술이다.

    그리고 의상(義湘) 대사도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해 원융사상을 천명했다. 그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해 화엄사상은 총체적으로 볼 때 원융해 두 가지 모습이 없음을 밝혔고, 이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며, 한 티끌과 시방세계, 한 생각과 무량한 세월, 초발심(初發心)과 정각(正覺),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원융사상을 철저히 규명했다.

    이후에도 원융사상은 면면히 이어져 고려시대 균여(均如)의 <화엄원통기(華嚴圓通記)>와 지눌(知訥)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보우(普愚)의 <화엄삼매가(華嚴三昧歌)> 등에는 원융사상이 깊이 반영돼 있다. 지눌의 경우에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주창하던 당시 선(禪) 사상계를 원융 시키려 했고, 조선 중기엔 서산 대사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선과 교를 하나의 이치로 보는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을 주창했다. 따라서 원융사상은 한국불교 1,600여 년을 관통해 온 중심사상이라 하겠다.

        

*원융상섭문(圓融相攝門)---원융문(圓融門)과 같은 말.---→육상원융(六相圓融) 참조.

 

 

*원융회통(圓融會通)---‘원융’이란 원만해서 막힘이 없는 것이며, ‘회통’이란 대립과 갈등이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 ‘하나(通)로의 만남(會)’을 말한다. 따라서 원융회통사상은 대립과 갈등 관계에 있는 사상과 논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롭게 수용하고 무리 없이 통합하면, 그들 사상과 논리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조화적인 통일논리를 가리키는데, 원효 대사의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과 맥을 같이 하며, 원융불교(圓融佛敎)의 바탕이다.---원효(元曉), 원융사상(圓融思想) 참조.

 

*원응국사(圓應國師, 1052~1144년)---고려 중기의 승려. 경북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중흥지조(中興之祖)이다. 선과 교를 섞을 수 없다고 해서 천태종에 들어오라는 의천(義天)의 권유를 거절했다. 1099년(숙종 4년)에 왕명으로 법주사(法住寺) 주지가 됐고, 1122년(예종 17년)에 왕사가 됐으며, 1129년(인종 7년)에 운문사의 주지가 돼 허물어진 운문사를 중창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인종에 의해 입적 후 국사로 임명됐고, 현재 운문사에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가 전한다.

 

 

*원이삼점(圓伊三點)---원이삼점은 보통 사찰의 지붕 합각에 그려진 것으로 큰 원 안에 점 세 개를 그린 것을 말한다. 큰 원은 우주법계를 의미하고, 또 '원융(圓融)'을 상징하기도 한다.

   점 세 개는 불 ‧ 법 ‧ 승 삼보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불의 삼위일체를 상징하기도 해서 이를 삼보륜(三寶輪)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을 상징하기도 하고, 열반 3덕인 법신, 해탈, 반야가 서로 상즉하고 있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 점은 가로나 세로가 일치하지 않고 삼각의 관계에서 물(物)의 불일불이(不一不異) 또는 비전비후(非前非後), 삼법(三法)이 삼즉일(三卽一), 일즉삼(一卽三)를 나타낸다고도 한다.

 

*원인론(原人論)---이 책은 중국 당나라시대 화엄종의 제5조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의 저술로서, 선교일치(禪敎一致)의 대표적 논서로 꼽힌다.

    <원인론>이라는 제목의 뜻은 ‘인간세계의 근본을 밝힌 논서’라는 의미로서, <화엄경>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어, 일명 <화엄경 원인론>이라고도 한다.

    <원인론>은 불교를 유교와 도교 및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서, 교법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접근하고 있어, 현대의 비교종교학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문학적 요소들도 풍부해 인간세계의 역사를 통찰하는 맛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교법을 인천교, 소승교, 대승법상교, 대승파상교, 일승현성교로 분류하고, 그 교법의 내용과 근본을 밝힌 뒤에, 치우침과 얕음과 깊음을 분별했다. 또한 선문과 교문이 지향하는 정점은 동일함을 밝혔다.

    또한 인간세계의 근본인 일심(一心)을 밝혀서, 모든 교법을 모아 일심으로 통하게 했다. 만법의 근본을 궁구하며, 도를 배우는 모든 부류들은 얕은 것을 버리고 깊은 곳으로 향해 다 함께 일심을 알고, 일심의 근원(眞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논(論)은 일체중생을 포섭해 다 함께 일심의 바다로 들어가 삼신(三身)의 지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인도한 회통불교(會通佛敎)의 모범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배우고 익히면 모든 교법이 일심의 바다로 통하는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모든 수행문이 지향해야할 바를 바르고 선명하게 가리킨 이정표라 하겠다.

    이 <원인론>은 난해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자 200여년이 지나 뒤 후학인 북송의 정원(淨源) 법사가 대승경론에 의거해 해설을 붙여 보급판으로 낸 것이〈발미록(發微錄)>이다.

    최근 이들을 편역한 정목(正牧) 스님은 〈원인론>에 대해, “회통불교의 교범이면서 모든 교법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옛것의 단점을 보완해, 어느 교법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논설한 것으로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며, “문ㆍ사ㆍ철(文ㆍ史ㆍ哲)의 모범이자 비교종교학의 효시이고, 불교의 개론서이자 종파를 초월한 수행지침서”라고 평가했다. 

   

 

 

*원적(圓寂)---열반과 같은 말로서 번뇌와 잡념을 여의고 생사를 뛰어넘는 절대 청정한 경계를 뜻한다. ‘원(圓)’은 모든 공덕이 원만하다는 뜻이고, ‘적寂)’은 적정해서 고요하다는 뜻이다. 원적은 입적(入寂), 즉 승려의 죽음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원적무별(圓寂無別)---열반을 얻으면 모든 차별이 없어진다는 말. 마음속에 번뇌 망상을 다 끊어

버리고 청정무구한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서 일체의 사량 분별이 사라진 상태. 선정(禪定)을 닦아 삼매에 들면 원적무별한 자성을 찾아서 진리와 합일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원불교에서는 살아생전에 원적무별한 청정자성심의 회복을 강조한다.

 

 

 

*원주(院主)---주지를 보좌하면서 절의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승려. 선원(禪院)의 사무를 감독하는 승려, 혹은 작은 절의 주지를 일컫기도 한다.

 

 

*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8고(苦)가 있다고 했다. 즉, 생ㆍ로ㆍ병ㆍ사의 4고와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오취온고(五取蘊苦-괴로움의 근본인 오온에 집착하는 괴로움)를 더한 것이다. 이 8고에 원증회고가 들어간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 가해자, 원수, 그래서 내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 싫어서 피하고 싶은 사람, 이런 미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는데 만나야 하는 고통, 그리고 피하고 싶은 것들 ―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과도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문득 찾아와서 만나야 하는 고통이 원증회고이다.

   이런 밉고, 싫은 사람, 내가 바라지 않은 일들이 종종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주기적 사이클 ―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은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쉽게 헤쳐 나가지만 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이런 파도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해서, 때로는 절교도 미덕이라고 했지만 절교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 허다하다. 안 보면 그만, 내가 떠나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악연.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처지.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의 종교인 불교에서 답을 찾아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세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종교이다. 불교는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고 짚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요한 물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힘든 원증회고의 고통을 불교를 통해 해결해보자.---→팔고(八苦) 참조,

 

 

*원찰(願刹)---원찰이란 특정 사찰로 하여금 개인이나 왕실의 기복을 빌어주는 사찰을 말한다. 고려시대 왕이 건립한 사원 대부분이 원찰이었으며, 여기에 왕이나 왕비의 진영(眞影)을 모신 진전(眞殿-원당/願堂)이 세워졌다. 왕실원찰은 도성 내에 주로 분포하며, 도성 외곽의 경우 능 주변에 건립됐다. 많은 사찰들이 왕실이나 개인의 기복을 비는 원찰로 화함에 따라 팔관회나 연등회 외에도 무차대회, 인왕도장, 나한재 등 대규모 불교법회나 행사가 사찰 내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이루어졌다.

    원당(願堂)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원에 대해 창건ㆍ중수ㆍ시납 등으로 관련을 맺게 된 개인이나 친족 혹은 집단이 그 사원에서 발원을 위한 불사를 열 뿐만 아니라, 그 운영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왕실원당은 부왕과 모후의 원당을 중심으로 경영됐으며, 광종대에 원당(奉恩寺ㆍ佛日寺ㆍ崇善寺)이 창건되기 시작했고, 현종대부터 인종대까지는 부왕과 모후를 위한 원당을 새로이 창건하여 지정했다. 고려후기에는 새로운 사원이 창건된 적 없이 기존사원이 원당으로 지정됐다. 이러한 원당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

 

   

 

*원측(圓測, 613∼696)----속명 문아(文雅). 신라 진평왕 때의 왕손 출신으로 일찍 출가해 경론을 학습한 뒤 15세 때(627) 중국에 유학해 현장(玄奘)의 제자가 됐다.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한 법상종(法相宗)의 가장 대표적 승려로서 생애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법상종은 유식사상(唯識思想)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형성된 종파이다. 원측의 저서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돼 티베트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여러 유명한 불교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산스크리트어와 서역 여러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등 불교학을 연구할 수 있는 소양을 쌓아 젊은 시절에 이미 불교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645년 현장(玄奘, 600~664년)이 인도에서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해 유식학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했다.

   특히 658년에 황실에 의해 서명사(西明寺)가 개창된 후에는 그 곳에 머무르면서 유식학의 강의와 주석서 집필에 몰두했기 때문에 원측의 호를 서명(西明)이라 했으며, 서명을 추종한 학자들을 서명학파라고 칭했다. 노년에는 측천무후의 발원에 의해 추진된 불경 번역 사업에 초청돼 증의(證義)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저술로는 <해심밀경소>, <성유식론소>, <유가론소> 등을 비롯한 10여 종이 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반야심경찬> 등이 있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을 모은 <성유식론소>의 복원본이 근래에 편집됐다. 원측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대한 비판이 유명하다.

   원측의 저술 중 대부분은 현장이 번역한 신유식(新唯識)의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로서 신유식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장에 의해 소개된 신유식의 이론은 원측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장은 경론의 번역에 집중하느라 유식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신유식의 이론적 체계화는 원측에 의해 처음 시도됐다고 할 수 있다.

   원측은 저술에서 자신이 이전에 수학했던 진제(眞諦), 파라마르타(Paramartha, 499~569)의 구유식(舊唯識)인 섭론학(攝論學)과 현장이 소개한 신유식의 이론적 차이를 자세히 분석한 뒤, 원측의 저술에는 신유식의 비판의 대상이 된 구유식의 이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구유식의 소양을 가지고 있던 원측이 구유식과 신유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원측의 구유식을 포섭하는 태도에 대해 중국 측의 규기(窺基, 632~682)를 중심으로 한 자은파(慈恩派)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원측의 제8 아뢰야식에 대한 이해는 현장을 능가할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원측의 제자로는 신라 출신인 승장(勝莊)과 도증(道證)이 알려져 있는데, 승장은 원측 사후 그의 부도를 건립했으며,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불경의 번역작업 등에 참여했다. 도증은 원측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을 저술해 중국계 학자들의 원측에 대한 비판을 타파했다. 그리고 원측이 입적하기 전인 692년에 신라에 귀국했으며, 그를 통해 원측의 사상이 신라에 전해지게 됐다.---→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 ‘경전(經典) 번역’ 참조.

     

*원통(圓通)---걸림이 없이 두루 널리 통달함. 우주만물의 존재는 두루두루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뜻으로 어느 것 하나 단절돼 있지 않다는 말이다. 원통에 대해서는 <능엄경>에서 깊이 다루고 있는데, 원통(圓通)이란 ‘절대의 진리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한다’는 뜻으로, 관음보살의 덕을 칭송해 일컫는 말이기도 하며, 불ㆍ보살(佛菩薩)의 묘오(妙悟, 미묘한 깨달음)을 일컫는다.

    <능엄경>에는 이근(耳根) 하나가 원통해지면 나머지 5근도 모두 원통해져서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원통(圓通)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이근원통(耳根圓通) 참조.

 

 

 

*원통무애(圓通無礙)---무애(無礙)란 막히거나 걸림이 없다는 뜻이어서, 원통무애는 원융회통(圓融會通)과 같은 말이다. 신라나 고려불교는 지금처럼 종파가 여럿으로 갈리지 않은 통불교(通佛敎)였다. 종파성(宗派性)을 지양한 원융(圓融)한 원통불교(圓通佛敎)는 우리불교가 앞으로 지향해 가야할 방향이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래 원통무애(圓通無碍)한 것이기 때문이고,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원통무애한 모든 것을 종합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원효(元曉)대사 의상(義湘)대사,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나옹화상(懶翁和尙), 태고선사(太古禪師), 조선의 무학대사(無學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조선 후기의 초의선사(草衣禪師) 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다 원통불교(圓通佛敎)를 부르짖었다. 즉, 당대를 주름잡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원통무애(圓通無碍)한 법을 지향했다. 불법 자체가 본래로 일미평등 해 둘이 아니다.---→십무애(十無礙), 원융회통(圓融會通), 통불교(通佛敎) 참조.

    

*원통문(圓通門)---진여의 이치를 깨달음을 말한다. 사찰에 따라 일주문 (一柱門) 자리에 원통문( 圓通門)을 세운 사찰도 있다. 일주문( 一柱門)과 같은 뜻으로, 두루 걸림이 없으며, 따라서 우주와 우리의 마음이 하나라는 뜻이다.

    

*원통불교(圓通佛敎)---종파에 치우치거나 교학에 치우치거나 또는 참선에만 치우치지 않는 불교를 말한다. 특별히 원통불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 자체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원통불교이다. 회통불교(會通佛敎)와 같은 말이다.

     

*원통전(圓通殿)---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전각. 단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副佛殿)일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한다.

     

*원품무명(元品無明)---근본무명(根本無明),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해 차별을 일으키는 원초적 번뇌. 인간존재의 진상에 대한 바른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한다.

 

*원해여래 진실의(願解如來 眞實義)---<천수경> 개경게(開經偈)에 나오는 말이다. ‘원하옵건대 여래의 진실 된 뜻을 해득(解得)하게 하옵소서’ 혹은 ‘원하옵건대 여래의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말이다.

    진(眞)은 ‘참’을 뜻한다. ‘참’이라야 열매[實]가 열린다. 참된 말, 참된 행동, 참된 마음만이 공덕을 가져온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진실(眞實)의 말이고, 참된 말이며, 부처님을 올바르게 찬양하는 말이다. 믿고 찬양하는 참말은 위대한 성취력을 지니며 위대한 열매를 거두게 할 것이다. 참된 말, 진리의 말만이 위대한 창조의 힘을 지닌다. 참된 말은 참된 열매를 가져오고, 위대한 성취를 가져오고, 위대한 창조를 가져온다. 거짓말, 삿된 말에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오로지 고통만 따를 뿐이다.

   

*원행(願行)---발원과 수행을 아우르는 말이다, 어떤 일을 바라고 원해 반드시 이를 이루려는 서원(맹세)과 그 서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수행(修行)을 말한다. 원(願)은 삶의 강한 용기인 동시에 새로운 의지이므로 간절할수록 원력이 커진다. 그러므로 원행이 확실하면 삶의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소승불교는 3계 6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여의고자 하는 업보사상이고, 대승불교는 이타주의의 원행사상(願行思想)이다.---→원(願), 원력(願力), ‘업보사상(業報思想)과 원행사상(願行思想)’ 참조.

     

*원행심(圓行心)---원만한 행동을 하는 마음. 매사에 온전한 행 또는 매사에 모나지 않은 행을 뜻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남을 이해하는 마음가짐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가 아니면 되지 못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중생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드는 사람으로 항순중생(恒順衆生)에 해당한다. 항순중생은 보현행으로 보현보살의 마음가짐으로 살라는 뜻이다.---→항순중생(恒順衆生) 참조.

 

*원행억념은(遠行億念恩)---멀리 길을 떠난 자식을 걱정해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원행지(遠行地,duraagama)---십지(十地, daśa-bhūmi)에는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위까지의 10지가 있다. 화엄종 10지는 보살의 완숙한 경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 십지 중 제7지가 원행지이다.

    원행지(遠行地)란 십바라밀을 닦아 자타일체가 된 경지를 원행지라 한다. 남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알게 모르게 구제의 손길을 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나와 남이라 하는 차별감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대비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감기가 들어 코가 막힌 어린 아이를 그 엄마가 코를 빨아내준다든가 아픈 아이에 대변을 찍어 맛을 보아 건강상태를 알아보는데, 더럽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이가 혼연일체가 돼 아이를 남이라고 생각지 않는 차별감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도 이와 같은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을 원행지라 한다.

 

 

*원효(元曉, 617~686)---원효(元曉)라는 이름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첫새벽이 열렸다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름처럼 원효는 불교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수행계위는 제8지 보살에 해당됐다고 한다.

    속성은 설(薛), 법명은 원효, 아명은 서당(誓幢)이다. 압량(押梁: 현 경산시)에서 태어났다. 15세 무렵에 출가해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됐다. 자기 집안의 재산을 불문에 희사해, 초개사(初開寺)를 짓고, 자기 생가 터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원효 대사는 8세 아래인 의상 대사와 더불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첫 번째는 34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년)에 요동 근처까지 갔다가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아 좌절되고, 두 번째는 문무왕 1년(661년)에 다시 의상과 당나라로 가던 중 당항성(지금의 화성)에 이른 후 한 비를 만나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토악질을 했다. 그리고 깨친 것이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한 후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특정한 스승 없이 여러 교학을 편력해 혼자 수학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과제로 느낀 것은 불교가 공인된 지 백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일견 서로 모순된 듯이 보이는 불교이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체계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모순, 대립하는 이론들을 극복하는 데에 ‘화쟁(和諍)’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했다.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고,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세계적 수준에 이른 유일한 사람이 원효였다. 원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불교경전 대부분의 주석서를 썼고, 이는 중국과 일본에 전해져 읽혔다. “원효는 동아시아 불교의 대표적인 주석가였고, 한문 불교 전통에서 최고 성과를 낸 인물로서, 체계적이지 못한 대승불교 경전을 주석을 통해 논리정연하게 이해시킬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전체와도 연결하는 것이 그의 뛰어난 점이다.” - 로버트 바스웰

   다음은 원효대사의 중요사상이다.

    • 일심사상(一心思想) - 원효는 불교 안의 여러 사상과 주장들을 모두 ‘한마음(一心)’의 발현으로 보고, 그 발현의 여러 양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통합하려 했다. 그것이 화쟁사상이다. 인간 각자의 일심은 계기에 따라 여러 심리적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인간본성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단지 계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심리적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본래의 일심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일심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일심의 회복에 목적이 있었다. 도(道)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근원(一心之原)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인간이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하나인 마음(一心)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명에 이로움을 주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일심사상이다.---→일심사상(一心思想) 참조.

    • 화쟁사상(和諍思想) - 모든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으로 신라시대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에 의해 비롯된 후 원효(元曉)에 의해 집대성됐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론상의 집착에서 벗어나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리고 논쟁(諍)과 조화(和) 양면성을 인정하면 경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상호대립적인 쟁론을 지양할 수 있다고 봤다.---→화쟁사상(和諍思想) 참조.

    • 원융회통(圓融會通) - ‘원융’이란 원만해서 막힘이 없는 것이며, ‘회통’이란 대립과 갈등이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 ‘하나(通)로의 만남(會)’을 말한다. 따라서 원융회통사상은 대립과 갈등관계에 있는 사상과 논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롭게 수용하고 무리 없이 통합하면, 그들 사상과 논리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조화적인 통일논리를 가리킨다.

    • 민중불교(民衆佛敎) - 신라불교가 호국불교라는 미명 하에 이론적 관념적인 왕실불교, 귀족불교가 돼 지배층에 이용되고 민중을 도외시하는 병폐를 낳는데 아픔을 느껴 이에 반발해서 민중을 위한 대중불교화에 앞장섰고,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정토사상을 보급하기도 했다.

저서에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다수가 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해,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3권은 원래 소(疏)였지만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논(論)으로 고쳐졌다고 한다. 인도의 마명(馬鳴)ㆍ용수(龍樹)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았을 만큼 대저작으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저술이다. 이것은 원효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불교 유식학이나 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원효의 불교는 중국 종파불교와는 달리 통합불교적인 경향을 보였다. 중관학(中觀學)과 유식학(唯識學)의 대결, 그에 따른 각 종파의 대립을 회통해 붓다 본래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일미(一味)ㆍ화쟁(和諍)사상은 이러한 견해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원효는 불교교리의 화해뿐만 아니라 삼국이 갈라져 분열됐던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것은 전국 곳곳에 남겨진 그의 발자취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원효 대사가 지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해석한 여러 논문 중에서 최고라고 한다. 그는 만년에 참선과 저술로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환속한 원효는 저자거리에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췄다. 일체의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이었다. 이런 원효 대사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스님은 ‘불기(不羈)의 자유인’이라고 표현했다. 굴레가 없고 매인 곳이 없다는 뜻이다. 조롱박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돌아다녔으며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입으로 부처를 부르고 귀로 부처를 듣는 것. 그것이 염불이다. 염불은 사람들이 부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비법이었다. 원효는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했다. 아니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정토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소망했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의 차원을 삶 속에서 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원효 대사가 살았던 시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마무리하는 단계였다. 어느 누구도 전쟁의 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힘든 사람들은 버림받은 빈민계층이었다. 시시때때로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하는 그들에게 원효 대사가 매달고 다니는 조롱박은 원효 대사가 민중속의 부처를 만나는 매개체였다. 이를 본받아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때 활동한 구야(空也, 903~972)와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잇펜(一遍, 1239~1289)도 춤 염불로 불법을 전파했다고 한다.

    염불에 가락을 붙여 징이나 호리병박을 두드리며 추는 춤 염불은 기아나 질병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어려운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염불을 통해 불법을 전하기 위한 최고의 포교방법이었다. 춤 염불의 출발선에 원효 대사가 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벗어버리면서까지 대중교화에 나선 원효 대사야말로 진정한 보살정신의 실천자였다. 이런 원효 대사의 행동은 당시 신라 불교계에서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승려사회에서 ‘만인의 적’으로 매도당하며 국왕이 개최한 백고좌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삶 자체를 불꽃처럼 뜨겁게 산 원효 대사는 환속했기에 문도를 이루지 못해 그의 죽음은 쓸쓸했다. 그는 입적 이후 통일신라불교계에서 차츰 잊혀갔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해 재평가가 이루어져 화쟁국사로 추봉됐다. 고려시대에 되살아난 원효 대사는 지금까지도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수행자로 평가받는다.” - 조정육  

    훗날 사람들은 원효를 구룡대사(丘龍大師), 진나후신(陳那後身), 만인지적(萬人之敵-만인을 대적할 만한 사람) 등으로 존칭하기도 했으며, 원효를 대성(大聖), 성사(聖師), 효성(曉聖) 등으로 존칭했다. 그리고 의천(義天)은 “원효성사 오른쪽에 가는 선철(先哲)은 없다”고 하면서, “오직 용수(龍樹)와 마명(馬鳴)만이 원효에 짝할 수 있다”고 했다. 원효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수준의 저술가였다.---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참조.

 

 

*원효(元曉)의 일심사상(一心思想)---원효 대사는 <기신론소>에서 성취해야 할 법이 왜 일심(一心)인가를 이렇게 밝혔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승의 법에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만 무명(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게 해 모든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에 유전한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제도하려는 원을 일으킬 수 있다.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큰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했다.

   일심이라고 이름 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거짓과 참됨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의 실체이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본성이 스스로 신령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일체 경계가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일심을 깨달아야, 주객이 한 몸인 줄 알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일심을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세웠다는 말이다. 일심이라고 이름 한 뜻은 진여가 일체법의 본질이지만, 분별심이 없고 신령한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에 일심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일심(一心)은 번뇌에 물든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본체임을 이해하도록 중생심의 본성(衆生心性)이라고 했다. <아미타경소>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중생심의 바탕 됨(衆生心之爲心地)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라고 했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해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함으로써, 일체 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이다. 일심(一心)은 대승의 유일한 법(法)이며, 여래의 마음이고, 중생심의 본성이다. 무아(無我)의 생명이며, 나의 생명이고, 우주적 생명이다. 일심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일체의 경계를 포함한다. 자신의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일체경계는 보이는 마음이다. 곧 일체 경계는 자신의 마음이 나타낸 모습이다. 일심의 경지에서는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고, 예토(穢土-더러운 땅)와 정토(淨土-깨끗한 땅), 생사와 열반이라는 상대적 개념도 사라져버린다.

    원효 대사는 ‘일체 경계는 일심’이라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고 했다. ‘우러러 믿어야 한다’는 것은 곧 종교적 신념이다. 원효 대사에게는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 해도 그것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며, 정토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염원해야 할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깨달아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는 한 문이었다. 이치가 이러한 때문에 허망한 번뇌를 여의고 꿈에서 깨어나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 경계는 일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일심의 근원에 있는 사람이 불보(佛寶)이고,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法寶)이며, 일심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승보(僧寶)이다. 따라서 일심은 곧 삼보이다. - 양산/정토원 원장.

 

 

*원효(元曉)의 화쟁사상(和諍思想)---원효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12세기에 들어와서 고려 숙종은 원효 대사를 기려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우도록 왕명을 내렸다고 한다. 원효의 사상을 이미 고려시대부터 화쟁으로 대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화쟁사상은 많은 이들이 말하는 만큼 그 사상의 진수가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원효의 사유에는 대중적으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원효의 화쟁은 불법을 설명하는 기본 사유방식이지만, 이 사유가 우주의 필연적 법칙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므로, 결국 화쟁적 사유는 우주의 필연적 법칙을 말하는 방식을 뜻한다.

    <금강경>에 불법이 우주의 사실적 법칙이라고 암시돼 있다. 단적으로 우주의 필연성은 공(空)과 색(色)의 두 가지 계기의 실이 서로 새끼 꼬기나 천 짜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화쟁사상의 기본이다. 불교를 상징하는 卍(만)자가 바로 저 새끼 꼬기나 천 짜기의 법칙을 형상화한 것이다.

공(空)은 눈에 안 보이는 진여(眞如)의 진리요, 색(色)은 눈에 보이는 세속의 진리다.

안 보이는 진리와 보이는 진리가 서로 다르지만 또한 연계돼 있다. 눈에 보이는 색의 존재는 눈에 안 보이는 공의 바탕에 의지해 생긴 무늬에 불과하다. 공이 바탕이요, 물질은 무늬에 비유되므로 공은 물질을 물질로 존재하게끔 해주는 근거이고, 물질은 그 공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공과 물질의 색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의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공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은 생사(生死)와 유무(有無)의 모든 변화무쌍한 순환을 다 초탈하고 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죽게 되므로 오직 영원한 것은 불생불멸한 공밖에 없다. 바다를 공에 비유한다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파도의 부침은 곧 생멸의 현상과 같다. 따라서 공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이중부정과 같다. 불생불멸은 또 비유비무(非有非無 =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의 이중부정과 같다고 하겠다.

    <금강삼매경론>에서 원효는 이 이중부정(二重否定)의 공 세계를 홀로 해맑은 초탈의 의미를 지닌 ‘독정(獨淨)’이라고 명명했다. 현상적 존재의 생멸과 유무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허공이나 바다가 만물의 부침에 의해 조금도 영향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만물의 부침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다. 그래서 공은 불교에서 허무의 상징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무한기(無限氣)의 상징이 된다.

    공이 이중부정이라면, 색은 어떠한가? 색은 물질인데, 그 물질은 독존하지 않고 연기(緣起)의 법으로 존재한다. 연기의 법은 서로 다른 만물과의 상호 얽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물과 햇볕과 땅과 바람과의 상호 연관성에 의거해서 존재한다. 이 연관성의 관계가 다르면, 다른 나무가 생긴다. 이것을 연생(緣生)이라 부른다. 이 연생의 관계를 최소한도로 생략하면, 이중긍정이 된다. 나무는 물과 햇볕, 또는 땅의 흙과 하늘의 바람과 각각 이중긍정의 존재양식을 얽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무는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인 물과 햇볕과 흙과 바람의 흔적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색의 물질은 고착된 하나의 독립개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인연으로 다양하게 얽힌 타자들과의 관련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색의 물질을 차이의 상관성으로 읽는다. 나무는 물과 불(햇볕)과 흙과 바람이라는 차이의 상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의 존재방식을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에서는 차연(差延, 영어 difference)이라 부른다. 차연은 차이(差-異)와 연기(延-期) 또는 연장(延-長)의 두 뜻을 합쳐서 줄인 말인데, 예컨대 나무는 물과 다르면서(차이) 물의 힘이 거기에 시간적으로 약간 연기돼 작용하거나 공간적으로 연장돼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상징한다.

    철학적 차연(差延)과 불교적 연기(緣起)는 같은 뜻이다. 연기법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존재방식이 서로 다양하게 차이 속에서 연계돼 있음을 가리킨다. 차이 속의 연계와 같은 존재방식은 허공처럼, 바다처럼 넓고 깊어야 가능하다. 한국의 식자들은 흔히 다양성의 문화를 당위로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성의 문화가 연기법처럼 가능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문화가 깊어져야 한다. 깊지 않은 마음과 문화는 결코 다양한 존재방식을 사실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화쟁사상도 깊어진 사유에서 가능하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이중긍정의 연기법을 담연(湛然 = 깊고 넉넉함)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다 아는 얄팍한 당위만 역설하지 말고, 깊고 넉넉한 문화를 일구기 위해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중부정인 공의 해탈이나 이중긍정인 색의 존재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상관적으로 얽혀 있어서 새끼 꼬기나 천 짜기의 상관성을 맺고 있다. 공이 없으면 색의 존재도 성립되지 않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또 색이 없다면 공도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구름과 새들의 비상과 해와 달의 색으로 인해 우리가 허공을 문득 지각하기 때문이다. 만물도 서로 다른 것과의 차연적(연기적) 관계로서 존재한다. 공사상은 2∼3세기경 인도의 나가르주나(龍樹)의 중관사상으로 대변되고, 색사상은 역시 3∼4세기경 인도의 마이트리야(彌勒)의 유식사상에서 개화됐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불교적 쟁론을 통합시킨 사유라고 보겠다. 그러나 원효의 화쟁사상은 그 이상의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 김형효

 

 

*월광보살(月光菩薩, 산스크리트어 찬드라 프라바/Candra prabha)---찬드라란 달을 말한다. 프라바는 빛을 내는 물체, 또는 광명, 광휘 등을 뜻한다. 그래서 월광변조보살(月光遍照菩薩), 내지는 월정(月淨)이라 불리기도 한다.---→일광보살(日光菩薩) 참조.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AD 557년 북제(北齊, 550년~577년)에서 인도승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가 한역했다. <대방등대집월등경(大方等大集月燈經)>, <입어대비대방등대집설경(入於大悲大方等大集說經)>이라고도 한다. 이본으로 <불설월등삼매경(佛說月燈三昧經)>이 있다.

   이 경에는 삼매에 대한 수식어로서 월등(月燈)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 그 까닭은 삼매를 닦으면 마치 달빛이 길을 훤히 비추는 것처럼 쉽게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월등삼매경>이 다른 경전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점은, 경문 곳곳에 여러 행으로 이루어진 게송이 나오는데, 모두 60여 수에 이른다. 경의 주요 내용은 부처님이 월광동자보살(月光童子菩薩)에게 삼매를 설명하고 그 공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 돼 있다.

          ※북제(北齊, 550년~577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439년~589년) 북조에 속한 선비족 고씨(高氏)에 의해 건국한 왕조이다. 그래서 고제(高齊)라고도 한다.

       

*월륜삼매(月輪三昧)---용수 존자가 법좌 위에서 보름달과 같은 자재로운 몸을 나타내자, 그때 대중들은 용수 존자의 설법하는 음성만 들을 수 있었을 뿐, 존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당시 용수 존자의 모습은 일원상(一圓相)의 달 모양으로 광명체가 났는데 이 경지를 월륜삼매(月輪三昧)라고 한다. 대중 가운데 가나제바(迦那提婆)라는 어떤 장자의 아들이 용수의 모습에 대해 대중들에게 설명했다.

    “이것은 바로 존자께서 불성의 본체를 형상으로 나타내셔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요, 불성의 본체를 일원상(一圓相)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중생들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해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부득이 일원상(一圓相)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월상녀(月上女)---월상녀(月上女)는 대표적 재가불자로 알려진 유마힐(維摩詰) 거사의 딸이다. <월상녀경>에 이르기를, 월상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홀연히 신체의 크기가 여덟 살짜리 아이만큼 커졌고, 다니고 머무르는 곳마다 광명이 비추었으며, 발로 허공을 걸어 경행하고 왕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장차 월상녀가 부처가 될 것임을 수기(授記)하셨을 정도로 뛰어난 불자였다. 이러한 월상녀의 이야기는 여자도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월인만천(月印萬川)---<원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월인천강(月印千江)’과 같은 말이다. 천강(千江)과 만천(萬川)은 둘 다 같이 강이 많다는 말이다. 뜻은 하나의 달[月]이 모든 강물[千江=萬川]에 찍혀 있다[印] - 비친다는 말이다.

   여기서 달(月)은 부처님일 수도 있고, 부처님 덕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덕 하나의 부처가 모든 사람에게 온 천지에 가득하다는 등의 비유가 되겠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주제는 부처님의 공덕이 온 누리에 비친다는 뜻이다.

   즉, 세종대왕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백억의 세계에 화신하며, 중생을 교화하신 것은 마치 일천 강에 비추는 달과 같다 해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 이름 지으셨다. 높고 크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은 여러 겁이 지나도 어찌 다 찬탄하리요 하는 뜻으로 화엄세계를 나타낸 말이다.

   그런데 유학에서는 이 말을 빌어다가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즉, 이(理)는 하나[理一]인데, 현상은 왜 천만 가지로 갈리어 다른가[分殊]라고 하는 - 의문을 풀이하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월장경(月藏經)---원명은 <대방등대집월장경(大方等大集月臟經)>이고, <대집월장경(大集月藏經)>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경전 가운데 부처님의 예언 말씀이 기록돼 있는 대표적 경전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월장경>에서 말세를 예견하셨다. 즉, 5백 년 단위로 불법이 점차 쇠퇴하는 과정을 예언하셨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후 1500년이 지나면 법란法亂)을 겪게 되고 파계 승가(僧伽)가 많이 출현해, 정법이 음몰(陰沒)되고 말법(末法)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셨다.

    대승불교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이라는 경전이 있는데, 여기에 6세기 북제(北齊) 때 인도 사람 나련제야사(那蓮提耶捨-나랜드라야사)가 한역한 <대방등대집월장경-월장경>이 포함돼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설법한 마지막 법문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 구라제산(羚羅帝山) 산중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지장경>을 설하시기 전에 미래를 예언하신 경전이 <월장경>이다.

    <월장경>의 ‘분포염부제품’을 보면, 부처님이 월장보살마하살에게 정법음몰(正法陰沒)의 예언을 전해주는 대목이 있다.

    “분명히 알아라. 청정한 사나이여, 내가 사라진 뒤 5백 년까지는 그래도 모든 비구들이 나의 법에 있어서 해탈이 견고하려니와 다음 5백 년 동안은 나의 바른 법에 선정삼매만이 견고하게 머물 것이며, 그 다음 5백 년 동안은 나의 법에 있어서 탑이나 절을 많이 세우므로 견고히 머물 것이고, 또 그 다음 5백 년 동안은 나의 법에 있어서 힘 싸움과 말다툼이 일어나 깨끗한 법은 없어지고 견고한 것이 줄게 되리니, 분명히 알라 청정한 사나이여, 그 뒤로부터는 비록 수염과 머리를 깎고 몸에 가사를 입더라도 금계를 파괴하고 법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비구라는 이름을 붙일 뿐이리라.” 이때를 특히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해 경고하셨다. 불법이 무너지고 승려가 타락하리라는 것을 3천 년 전의 부처님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 이제 오래지 않아 열반에 들고, 큰 지혜의 모든 성문도 나를 따라 다 열반해 우리의 불법이 점차 무너지리라. 그 때엔 살아가기 위해 - 먹고 살기 위해 중이 되고, 삼승(三乘)을 기원하지 않고, 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탐욕에다 명리를 추구하며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타인을 질투하며, 학문 수행의 길에서 멀리 물러나고 선행도 하지 않으며, 낮에는 남의 욕을 하고 그것을 즐기며 밤에는 잘도 잔다. 경전을 읽지 않고, 그 대신 흥밋거리의 책자나 좋아하며,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부녀자와 희롱한다. 비속한 영업을 한다. 속인과 어울려 물건을 팔거나 논밭을 사유화한다. 또 남과 다투기를 잘하고 덕망이 있는 스님과 학문이 높은 스님을 질투하고 배척하며 자리를 같이하기를 싫어한다. 무례하고 몰상식한 말로 타인을 매도하고, 속인의 악덕을 찬미하며 아첨한다. 이러한 자들이 나(석가)의 교시를 지켜야 할 절로 출가를 하니 그야말로 가짜이고, 도둑놈이며, 대악인 것이다.”라고 했다. 마치 오늘날 우리 불교계를 이르는 말 같다.

    그리하여 중국 남북조시대(420~589)에 말법사상과 법멸사상이 일어났는데, 이는 말법사상을 고취한 <월장경> 등의 경전이 이 무렵에 번역됐고, 당시 불교 교단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전국적인 폐불 운동 등이 불교인들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법 도래 사상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시대에 알맞은 불교를 창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종파가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담란(曇鸞, 476~542),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도작(道綽, 562~645)과 선도(善導, 613~681) 등에 의해 성립된 정토교(淨土敎)이다.

 

*월지국(月支國)---→대월지국(大月支國) 참조.

 

*월칭(月稱, 산스크리트어 찬드라키르티/candrakīrti, 600년~650년경)---남인도 출신 승려로 용수(龍樹)의 학설을 계승하고, 나란다 사원으로 가서 좌주가 됐다. 월칭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중론송(中論頌)>의 주석서인 <명구론(明句論)>이다. 그 외에 <오온론(五蘊論)>과 <입중론(入中論)> 등이 있다. 그가 스승 불호(佛護)를 옹호하고, 청변(淸辨)을 공박함으로써 중관학파의 분열이 뚜렷해졌다. 오온론(五蘊論), 사백론(四百論),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등에 주석했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7~1997)---스리랑카 출신의 승려. 그는 남방 상좌부의 비구 신분으로서 학문과 실천을 겸비했던 이 시대 불교 지성의 대표자였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교육과 포교에 일생을 바친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또한 라훌라 스님은 그가 배워 알고 있는 붓다의 교설에 위배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승단 내부에 속한 일이든,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투쟁에 앞장섰던 행동가이기도 했다.

    라훌라 스님은 세계적인 석학 혹은 학승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활동으로 봐서 그러한 평가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들은 싱할라어와 불어로 씌어진 것도 있지만 주로 영어로 씌어졌다. 아마 그의 책이 영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전세계 독자들을 갖게 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비구의 유산(1946)>, <세일론 불교사(1956)>,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1959)> 등 다수가 있다.

    

*월하(月下, 1915~2003)---충남 공주 출신이다. 속명은 윤희중(尹喜重).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 1940년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구하(九河)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1954년 대한불교 정화운동에 앞장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데 노력했다. 통도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94년 종정을 맡았으며, 10.27 법란으로 위기에 몰린 종단을 확고히 하는데 노력했다. 종정에서 물러나 양산 통도사 방장으로 추대됐고, 2003년 12월 나이 89세, 법랍 71년으로 입적했다. 통도사 방장에 있으면서도 80대 중반까지 손수 자기 빨래를 하셨고, 식사도 혼자 독상(獨床)을 받지 않으시고 다른 스님들과 함께 대중공양을 하셨다. 방 청소도 직접 했으며, 평소 대중교통수단을 자주 이용하셨다.

 

*‘웨삭 데이(Vesak Full Moon Day)’---남방 상좌부불교 국가에서 행하는 부처님을 기리는 기념일이다.

   불자들이 성지순례를 가면 필수적으로 가봐야 할 곳이 네 곳이다. 즉,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부처님이 첫 설법을 행한 사르나트(Sarnath), 부처님이 열반에 든 쿠시나라(Kusinara) 이렇게 네 곳이 불교 4대 성지이다.

   그런데 이렇게 4대 성지에서 있었던 사건 중에 초전법륜을 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부처님의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 ‘웨삭 데이(Vesak Day)’이다. 음력으로 4월 보름날인 풀문 데이(Full Moon Day, 滿月日)로서, 테라와다불교도들에게 최대명절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처님 오신날 기념일인 4월 초파일과 일주일 정도 차이가 난다. 1999년에 유엔에서 웨삭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국제적인 명절이 돼있다.  

 

    

*웰라마 경(Velāmasutta, A9:20)---진정한 보시의 결실에 관한 내용의 경으로, 부처님이 아나타핀디카(빠알리어 Anāthapindika-給孤獨)와 함께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이야기이다. 아나타핀디카는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는 하루에 세 번 사원에 가서 부처님을 시중들었다. 그는 독실한 재가신자로서 5억 4천량의 돈으로 기원정사를 지어 승단에 기증하기도 했었다. 큰 부자이던 그가 너무 많은 보시를 승단과 이웃에게 해서 나중엔 가난하게 지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사위성(舍衛城-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핀디카 승원(給孤獨園-기원정사)에 계셨다.

    그 때 장자 아나타핀디카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장자 아나타핀디카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장자여, 그대의 가정에서 보시를 합니까?”

    “세존이시여, 저의 가정에서 보시를 합니다. 그것은 거친 쌀가루와 싼 죽입니다.”

    “장자여, 거친 것이건 세밀한 것이건 보시하는데 정중하지 않게 주고, 공손하게 주지 않고, 손수 주지 않고, 쓰레기를 주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주면, 그 보시의 결과가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마음은 뛰어난 음식을 즐길 수 없고, 뛰어난 옷도 즐길 수 없고, 뛰어난 수레도 즐길 수 없고, 뛰어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 아내, 하인, 노예, 일꾼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장자여, 그것은 정중하게 주지 않은 행위의 과보입니다.

    장자여, 거친 것이건 세밀한 것이건 보시하는데 정중하게 주고, 공손하게 주고, 손수 주고, 쓰레기를 주지 않고, 미래를 생각해 주면, 그 보시의 결과가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마음은 뛰어난 음식을 즐길 수 있고, 뛰어난 옷도 즐길 수 있고, 뛰어난 수레도 즐길 수 있고, 뛰어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 아내, 하인, 노예, 일꾼이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를 배려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장자여, 그것은 정중하게 주는 행위의 과보입니다.“

… … …

    어느 날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장자여, 그대의 집에서 계속 공양을 올릴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하지만 음식이 거친 옥수수 죽밖에 없어서 변변치 않습니다.”

    “장자여, ‘내가 거친 음식만을 부처님께 올린다.’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하지 마라. 공양 올리는 마음이 순수하면 부처님이나 벽지불이나 스님들에게 올리는 음식은 모두 훌륭한 것이다. 그대는 여덟 종류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에게 공양 올려 무한한 공덕을 짓고 있지만, 나는 과거 생에 웰라마라는 바라문으로 살았을 때 전 인도를 떠들썩하도록 풍족하게 보시를 했지만 귀의처가 될 만한 성자를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부처님은 과거 생에 웰라마라고 하는 바라문이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웰라마 경(A9.20)>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웨살리(빠알리어 Vēsalῑ)---바이샬리(산스크리트어 Vaishali), 비야리성(毘耶離城), 베살리라고도 한다. 고대인도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 북쪽 갠지스강 건너(북쪽)에 있던 도시로 상업이 발달했으며, 왓지족(Vajji, 밧지족)과 릿차위(Licchavī, 리차비)족의 연맹인 공화국체제를 갖춘 왓지(Vajji, 밧지)연맹국의 수도였다.

    현재 비하르주 북서부 파트나 북쪽 간다크강을 끼고 있는 지금의 ‘바사르’란 곳이었다. 이 도시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여러 도로를 통해 남쪽의 라자그리하(王舍城), 북쪽의 카필라바스투, 그리고 시라바스티(舍衛城)와 연결돼 있었다. 자이나교 창시자인 마하비라가 베살리에서 태어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붓다도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으며, 대림정사(大林精舍)가 있었다. 5세기에는 중국 승려 법현(法顯)이 순례해 웨살리의 주요 승원과 사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부처님 입멸 후 100여 년경(BC 4세기경) 율령 해석문제로 갈등이 일어나 제2차 불전결집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근본분열)의 계기가 된 곳이어서 사실상 부파불교가 시작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재가불교의 대명사인 유마 거사의 고향이며, 부처님께 웨살리 성 밖의 망고나무 동산을 기증한 기녀 암라팔리(Amrapali)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웨살리에 있었던 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초의 비구니 승단의 형성이다. 부처님께서 이곳의 대림정사(大林精舍)에 머무시던 때가 성도하신 후 7년째가 되는 해인데, 이때는 고향 카필라바스투에서 부왕 숫도다나왕(淨飯王)의 장례식을 마친 다음 해가 된다. 그때 부처님의 이모이며 양모인 마하 파자파티(Mahapajapati, 大愛道尼)는 석가족의 귀부인 500명을 이끌고 왕성을 나와 삭발, 탁발을 하며 대림정사를 찾아와 여인들의 출가를 청하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계모(이모)의 청을 거절했으나, 결국 아난다의 간청을 받아들여 여인들의 출가를 승낙하게 됐고, 이리하여 승가에서 최초의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게 됐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웨샬리 근교의 마을에서 최후의 안거를 마치시고, 다시 웨살리를 찾으시고, 이곳의 다자탑(多子塔, Pahuputraka)에 이르러 앞으로 석 달 후에 쿠시나가르(Kusinagar)에서 열반에 들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 쿠시나가르로 가시던 중 비마세나 카팔라 언덕에 도착했을 때, 멀리 내려다보이는 웨살리 성을 가리키고 웃으시면서 아난다에게,

    “아난다야, 이제 내가 저 아름다운 웨살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몸으로는 다시 이 성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마치신 부처님께서는 노쇠한 육신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서 쿠시나가르로 향하셨다. 부처님의 세납 80세 되시던 해였다.

     현재 이곳에 아소카 스투파와 석주를 중심으로 부처님께서 <화엄경> 입법계품을 설하셨다는 대림정사 중각강당(重閣講堂) 터가 남아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2개의 흙 둔덕이 일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도 했는데, 옛날의 웨살리는 성문과 망루들이 있는 3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왓지족(Vajji, 밧지족), 근본분열(根本分裂) 참조.

    

*위경(僞經)---불교에서 경전(經典)이라 하면 원칙적으로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문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외에도 부처님 가르침이나 그의 행적을 다룬 문헌으로서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인정받는 문헌도 한문으로 번역된 경우에는 경이라 불러왔다. 예컨대 대승경전의 경우,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지만 경이라 불러왔다.

   따라서 위경이란 중국 등지에서 새로 제작된 경문으로서, 말 그대로 명목상 붓다가 설한 것처럼 위조된 경전을 말한다. 인도나 티베트에서 전래된 것들은 모두 진경이라 간주돼 삼장 속에 편입돼 왔다.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진경과 위경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면, 산스크리트 원본 등으로부터 번역된 경전을 진경(眞經) 또는 정경(正經)이라 칭하고, 그로부터 번역된 경전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것들을 위경(僞經) 또는 의경(疑經)이라 한다.

   결국 진경과 위경을 가리는 기준은 원전이 불교의 본산지인 인도에서 제작됐느냐의 여부와, 그 원전의 언어가 산스크리트인가 아닌가의 여부에 있다. 빠알리어의 경우엔 그로부터 한역된 예가 매우 드물어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인도에서, 특히 대승불교 흥기 이후 붓다 이름으로 경전을 편찬하는 풍습이 성행함으로써 그러한 예가 중국과 티베트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붓다가 직접 설하지 않은 불교경전이지만 붓다가 직접 교설한 것처럼 ‘불설(佛說)’이라는 이름을 빌려 위조함으로써 정전(正典)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경전을 가리킨다. 한역된 경전으로 보기에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경전을 의경이라 하고, 위조된 것임이 확실한 경전을 위경이라 한다.

    “중국은 인도에 전승하는 경전을 자국으로 가져가서 자기문화와 실정에 맞게 번역해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 번역과정에서 문화적 이질감으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예컨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 합당한 한자를 선정하는 것, 인도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개념의 표현방식, 그리고 문화적 차이 등이다. 그래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경전의 정확한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무래도 원어와 비교했을 때 왜곡되거나 무리한 부분이 없을 수 없었다. 때로는 중국인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불교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유교나 도교 등에서 개념이나 용어를 차용하기도 했다. 이를 격의(格義)불교라 한다.

   그리하여 중국에는 상당한 양의 각종 위경(僞經)이 편찬됐다. 기록에 의하면 남북조시대에 46부 56권, 수나라시대에 209부 490권, 당나라시대에 406부 1074권의 위경이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 때 편찬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라는 유명한 경록(經錄)이 대장경에 편입된 것으로 수록하고 있는 문헌의 수가 1076부 5048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위경들이 유행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수 ‧ 당시대가 위경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인도에서 도입된 기존 불경엔 중국인 정서에 맞는 불경이 적어 그들 나름대로 중국인 정서에 맞는 불경을 조성한 것이 위경이 됐다. 헌데 비록 위경이라는 형식이더라도 부처님 근본교설을 훌륭히 표출하고 있다면 위경이 아니라 불지(佛智)의 확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 학륜

   특히 초기경전은 구전된 것이고, 번역된 것을 보면 지루하고 읽기에 재미가 없다. 불교경전은 원래 구전으로 전승됐기 때문에 그 형식이 매우 단조롭고 반복적이다. 이런 반복은 암기를 쉽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흥미를 잃는 중국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인도 경전들이 한역됐어도 중국인들에게 낯설고, 번역문의 질이 아무래도 중국 원어민 글보다 떨어졌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인도에서 전파된 경전을 봤을 때, 그 경전에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감을 느꼈다. 중국인들에게 정서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잘된 번역도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선 여전히 낯설었고, 중국 원어민이 쓴 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의 통찰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리고 보다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새로운 글이 쓰였을 것으로 본다.

   새로이 쓰는 경전(위경)들은 동아시아인들의 고유한 종교적 관심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 동기, 관심, 선호를 진경이란 형식으로 표현해 불교도에게 인정받고자 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구세주 신앙을 믿는 이런 종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정당화할 경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경전(위경)을 쓰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 발흥한 새로운 신앙이 사실은 정통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경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새로이 편찬된 위경들은 번역된 인도 경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동아시아인들의 마음에 와 닿았다. 많은 논서들이 위경이라고 알려진 경전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만 봐도, 이런 경전들이 오히려 번역된 인도 경전과 다른 방식으로 동아시아인들의 마음에 와 닿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모두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돼 있고, 인도의 특정 장소와 특정한 인도인들을 상대로 옛 경전의 언어와 문체로 쓰였다.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장치를 이용해 경전의 권위를 높이고 부처님께 영광을 돌렸다. 중국에서도 그런 본을 따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승경전이 인도에서 쓰였듯이 장소를 바꾸어 이번에는 중국에서 또 다른 대승경전이 쓰였다. 그리하여 위경이면서 유명한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호국불교의 법을 밝힌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보살의 계위를 논하고, 남북조시대에 있어서 통치자의 비법과 승려의 비행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제작된 <범망경(梵網經-초기경전 범망경과는 다름)>을 비롯해,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불설대목련경(佛說大目連經)> 등이 있고, 심지어 <수능엄경(首楞嚴經>도 위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장소를 바꾸어 이번엔 신라에서 쓰인 대승경전으로서, 위경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다.

   그러면 이런 위경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당한 종교 활동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속임수요 사기행각이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열린 입장의 사람들은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새로운 대승경전을 만들어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도 대승경전은 찬술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천 년 전 만들어진 대장경의 목록에 등재된 경 이외의 경은 아직까지 출현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 때문일까 미국 UCLA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교수는 말했다.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즉, 오늘날의 대승불교가 시대와 문화, 역사의 변천에 따라가고 있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대승경전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과 같다.

    그리고 최근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위경(僞經)의 역할이 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 쓴 거짓 경전이란 부정적 의미를 지닌 위경을 재평가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기운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도 위경은 이질적인 불교가 중국사회에 정착할 있도록 교리를 개발하고 전법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위경이 실천성은 물론 윤리성, 도덕성이 매우 강하며, 당시 유교, 도교, 불교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 위경을 통해 화해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위경들은 기존 불경들이 다할 수 없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맞춰 정법사상을 구현해나갔다”며, “위경은 불설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적 잣대를 가지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불교사상적 전개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위해 몸이 망가지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것까지 피하자 않는 정신을 말한다. 옛날 구법승(求法僧)들은 그야말로 위법망구의 정신이 없이는 그 험한 길을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중원을 가로지르고 난 다음에도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 그 험한 파미르고원을 넘어가야 하므로 죽을 각오 없이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구법 행각에 나선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중에 목숨을 잃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드문 실정이었다. 이와 같이 종교란 마땅히 자기생명을 걸어야 궁극의 경지에 닿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청화(淸華) 스님은 “목숨을 걸어야 무엇인가 얻는 것이다. 생명을 건다는 것은 자기 몸뚱이가 안중에 없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고 하셨다.

 

    

*위빠사나(毘婆舍那, 비빠사나, 빠알리어 vipassanā)---위빠사나 수행은 초기경전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asatipatthaana Sutta)>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법이란 결과가 있는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이치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혜를 이룰 수 있다. 사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사유하며, 또는 사유하며 관찰한다. 예를 들면 분노나 성냄 같은 것은 단순히 믿음으로써 해결되지 않는다. 그 원인을 사유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위빠사나는 빠알리어 위(Vi)와 빠사나(Passana)의 복합어다. 위(Vi)는 ‘뛰어난’ 혹은 ‘다양성’을 의미하며, 빠사나(Passana)는 알아차림, 꿰뚫어 봄, 바른 이해, 깨달음, 자세히 살펴봄, 사물의 실상에 대한 지혜, 이런 말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명상(洞察瞑想), 혹은 능견상(能見相)이라 한다. 능견상이란 보고 느끼고 아는 능력을 말한다. 비발사나(毘鉢舍那)라고도 한다.

    이를 종합하면 뛰어난 관찰, 통찰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진리를 지혜에 의해 꿰뚫어보고, 해탈에 이른다.”는 뜻이다. 선정(禪定)에 들어서 지혜로써 상대 되는 경계를 자세히 관찰해 잘못됨이 없게 하는 것, 자상하고 밝게 비추어봄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 수행을 할 때, 그 목적은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ㆍ고ㆍ무아」를 깨닫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을 온갖 욕망과 번뇌에 얽힌 존재라 본다. 그리고 이 번뇌는 성불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방해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불교수행이란 한없는 번뇌의 응시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붓다는 대기설법(對機說法), 즉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수준이나 성격, 환경 등에 맞추어서 설하셨다. 불교수행법이 여러 가지인 것은 이와 같이 대기설법이 다양한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위빠사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명상법으로서, 한역(漢譯)에서는 ‘관(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이란 지혜로써 객관의 경계를 관찰해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가령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면 인간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생각으로 관해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을 관법수행이라고 하는데, 사념처(몸, 감각, 마음, 법)를 관하는 관(觀)법의 방법이고, 사마타(śamatha)는 하나에 집중해 생각(잡념)을 끊어내는 지(止)법의 방법이다.

   또한 이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대중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서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데 집중해 이것을 세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마음을 하나로 전심(專心)해 지혜로써 불(佛)과 법(法)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생각으로 염(念)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위빠사나 수행법은 50여 년 전 미얀마에서 새롭게 변형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4념처(四念處)수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마타+위빠사나 ⇛ 사마디(samādhi)」이다.

   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깊은 마음집중(samādhi)이 전제가 돼야 한다.

   마음집중이 있어야 지혜가 생겨난다. 마음집중은 지속적이며 세심한 마음챙김(sati)이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지니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노력 즉 정진(viriya)이 있어야 한다.

   정진을 하기 위해서는 불법승 삼보와 수행법에 대한 강하고 확고한 믿음(saddha)이 있어야한다.

   이처럼 믿음을 바탕으로 노력이 있고, 노력을 바탕으로 마음챙김이 있으며,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마음집중이 있고, 마음집중이 있을 때, 위빠사나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위빠사나의 원칙을 반듯이 기억해야 한다. 위빠사나의 원칙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마음챙겨서(be mindful) 알아차리고(be aware) 관찰하는(observe)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마음챙김 수행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은 불교 수행체계의 가장 기본이다. 계(戒)는 맑고 밝은 생활을 하는 것, 그 위에 고요하고 선한 마음이 증장되는 것, 이게 정(定)이다. 거기에서 실질적인 존재에 관한 통찰적 지혜가 나오는데, 이것이 혜(慧)이다. 그래서 계 ․ 정 ․ 혜인데, 실제 수행을 해 가는데 있어서는 일단 계는 기본으로 놔두고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위빠사나는 교학(배움)과 수행(도닦음)과 통찰(꿰뚫음)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여기서 교학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三藏)을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이란 계ㆍ정ㆍ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통찰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배움은 도닦음의, 도닦음은 통찰의 토대가 된다. 교학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수행은 성위를 증득하는 돌파구가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사마타-위빠사나를 강조했다. 사마타는 그칠 지(止)자, 위빠사나는 볼 관(觀)자, 그래서 지관수행(止觀修行)이라고 한다. 사마타-위빠사나가 수행의 큰 본류이다.

    지(止)는 번뇌와 생각을 그치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며 본원적인 진리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관(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지혜의 작용이 돼 사물을 진리에 합치시키며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정(定), 관은 혜(慧)에 해당하며, 오른팔이 위빠사나(vipassanā)라면 왼팔은 사마타(奢摩他, śamatha)이다.

   본래 우리의 청정하고 맑은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계속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이걸 하나로 집중할 수 있도록 일단 멈추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 사마타(止)이다. 고요하면 거기에 모든 삼라만상이 다 비친다. 내가 했던 행위들이나 생각들이 다 여기 비친다. 이게 통찰이고 지혜이다. 이게 위빠사나(觀)이다.

   「그리고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빠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법을 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를 통해서 언로(言路)와 심로(心路)가 끊어져 주와 객, 심과 법을 초탈한 성(性)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치고, 위빠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ㆍ고ㆍ무아로 꿰뚫어 관하고, 궁극에는 공(空)해 모양을 여의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참구는 직관에 바탕하고 수관(修觀)은 분석에 바탕한다. 비록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사마타에 걸린 수행으로 간주하거나 위빠사나를 적정처를 닦는 선정 수행 정도로 치부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는 대신에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주창하는 위빠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 각묵 스님 ---→사마타(奢摩他, śamatha), 사념처(四念處) 참조.

 

 

*위빠사나 수행---우리가 소리를 듣는 이식(耳識)이 일어날 때 ‘내’가 듣는다고 여긴다면 이는 유신견(有身見)이다. 코가 냄새를 맡을 때 ‘내’가 냄새를 맡는다고 여기는 것도 바로 유신견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내’가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이 또한 유신견이다. 이렇게 의식을 자아 혹은 나 등으로 인격화해 잘못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유신견이다.

   수행자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것을 단지 오온(五蘊)의 작용으로 알고 거기에 아무런 자아, 내가 없다고 하는 지혜를 얻을 때 유신견이 뿌리 뽑히고 제거됐다고 말할 수가 있다. 범부들은 항상 몸이 있다고 하는 유신(有身)과 개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견(邪見)을 뒤섞어 버리곤 한다. 그래서 유신견을 갖게 된다.

   반면에 수행자는 몸이 있다고 하는 유신(有身)이 있을 뿐이라고 알고, 몸이 내가 아니라고 하는 정견(正見)을 가져야 한다. 유신견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생기는 것은 바로 유신과 사견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반드시 유신에 사견이 뒤섞이면서 진행돼 온 것을 볼 수가 있다.

   누구나 실재하는 몸은 있다. 누구나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몸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유신(有身)이다. 그러나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할 때는 잘못된 견해로 유신견(有身見)이 된다. 몸이 있지만 매순간 조건과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생멸하는 몸이 있을 뿐이지 변하지 않는 항상 하는 몸은 없다. 만약 ‘나의 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몸이 있다는 유신에 잘못된 사견이 섞이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냥 몸만 있다고 아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오온은 항상 함께 일어나지만 그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일어날 뿐이다. 어떤 오온이 일어나든 이를 단순한 오온의 일어남으로 알 뿐, 그것을 나, 자아 등과 섞지 말아야 한다.

   수행자는 유신(有身)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아 유신(有身)을 바른 견해와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하겠다. 유신에 정견이 뒤섞이면 다시 유신이고, 유신에 사견이 섞이면 유신견이 된다.

   자동차는 3만 가지의 부속으로 구성돼 있다. 그것을 자동차라고 이름 해서 자동차이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장기의 기능들로 인해서 몸이 만들어졌다. 그것을 단지 몸이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그것들은 각각의 부속들이 모여서 몸을 이룬 것이지 그 몸 자체가 나의 몸은 아니다. 단지 몸일 뿐이다.

  초보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두 번째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는 연기의 법칙에 대한 기본원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미얀마의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 1899∼1962)’는 앞선 두 가지 지혜의 기본원리를 숙지하지 못한 수행자들은 이 내용을 충분히 알기 전까지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것은 ‘두루 아는 지혜’를 통해 사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두루 아는 지혜 중에서 처음에 지변지(知遍知)를 얻고, 다음에 심찰변지(審察遍知)를 얻고, 마지막에는 단변지(斷遍知)를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법문을 듣는 문혜(聞慧)를 완성해야 한다. 다음에 가르침을 충분히 사유하고 대상을 겨냥하는 사혜(思慧)를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수혜(修慧)를 해야 한다. 이것이 문혜, 사혜, 수혜, 삼혜이다.

   여기서 두루 아는 지혜를 빠알리어로 ‘빠린냐(pariñña)’라고 한다. 빠린냐는 정확한 앎, 통달, 두루 앎, 완전한 이해라는 뜻이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변지(遍知)라고 번역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두루 아는 지혜는 3가지가 있다.

   첫째, 지변지(知遍知, ñāta-pariñña) - 앎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지변지는 물질은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지는 특성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두루 아는 지혜이다. 이것은 법을 들어서 얻는 완전한 지혜를 말한다.

   둘째, 심찰변지(審察遍知, tirana-pariñña) - 조사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심찰변지는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에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두루 아는 지혜이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이것은 완전한 측정을 말한다.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얻는 완전한 지혜를 말한다.

   셋째, 단변지(斷遍知, pahāna-pariñña) - 버림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단변지는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두루 아는 지혜이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이것은 번뇌를 끊음으로써 얻는 완전한 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바람직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이제 바람직한 법인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수행자가 있는 그대로 유신(有身)을 유신으로만 봐 사견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사견의 족쇄를 깨어 부수고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돼 비로소 다음 생에 지옥으로 떨어질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가 있다. 잘못된 견해인 유신견, 상견, 단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를 얻어야 한다. 불교방송 12연기와 위빠사나 법문 녹취록 중에서.

     

 

*위사카(Visākha)---위사까라 부르기도 한다. 위사카는 부처님 당시 대표적인 재가 여신도(우바이)였다. 앙가(Aṅga)국 여인으로 7살 때 그 고장을 방문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남편인 미가라(鹿子, Migāra)는 원래 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간타(Nigantha)의 열렬한 신자였는데, 나중에 위사카의 설득으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너무도 감사하다며, "당신은 오늘부터 나의 어머니요."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녀는 위사카라는 이름보다도 미가라의 어머니(鹿子母, Migāra-mātā)로 더 알려지게 됐다.

  n 위사카는 기원정사(祇園精舍) 동쪽에 동원정사(東園精舍, Pubbārāma)를 지어 승가에 헌납했다. 그녀는 10명의 아들과 10명의 딸을 두었고, 그들은 각각 같은 수의 손자를, 손자들은 같은 수의 증손자를 두었다. 그녀는 다섯 마리 코끼리의 힘을 지녔다고 하는데, 하루는 사람들이 위사카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코끼리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두 손가락만으로 코끼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녀는 사왓띠(Sāvatthi, 舍衛城)에서 행운을 불러오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항상 그녀를 자신들의 집에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위사카는 평생 16살 소녀와 같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120살까지 장수했다고 한다.---→녹자모(鹿子母) 참조.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당나라시대 선승,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의 제자로서 앙산 혜적(仰山慧寂, 807~883)과 더불어 위앙종(潙仰宗)을 열었다. 저서에 법어집 <위산경책(爲山警策)>, <위산어록(潙山語錄)> 등이 있다.

   위산 영우 스님은 자기를 찾아왔던 낭주(朗州)의 덕산 선감(德山宣鑒, 782~865) 선사가 떠난 뒤, 수좌에게 이르기를 저 덕산은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며[가불매조(呵佛罵祖)] 살아갈 자라고 했다. ‘덕산방 임제할(德山棒 臨濟喝)’의 명성에 어울리는 활구(活句)이며, 언어폭력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격외구(格外句)다. 제자에 앙산 혜적(仰山慧寂, 803∼887)이 있다.

   하루는 위산 선사가 상당(上堂)해서 도인(道人)에 대해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사람의 마음은 거짓 없이 곧고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으며, 허망한 마음씨도 없어야 한다. 듣고 보는 모든 일상에 굽음이 없어야 하며, 그렇다고 눈을 감거나 귀를 막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마음이 경계에 꺼들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은 단지 물든 세속사를 치유하는 측면에서 말씀하셨을 뿐이니, 허다한 나쁜 지견과 망상 습기가 없으면, 맑고 고요한 가을 물처럼 청정할 것이다. 맑고 잔잔해 아무 할일도 없고 막힐 것도 없으리니, 그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라고도 한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단박 깨친 사람도 더 닦을 것이 있습니까?”

   “참으로 근본을 체득한 이라면 닦는다느니 닦을 것이 없다느니 하는 것이 관점을 달리하는 말[兩頭語]임을 깨닫는 그 순간 스스로 안다. 지금 처음 발심한 사람이 인연 따라 한 생각에 본래 이치를 깨달았으나 비롯함이 없는 여러 겁의 습기를 당장 없애지는 못하므로 그것을 깨끗이 없애기 위해서는 현재의 업과 의식의 흐름을 다 없애야 하는데, 이것을 닦는다 하는 것이지 따로 닦게 하는 이치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법을 듣고 진리를 깨치는데 깊고 묘한 진리를 들으면 마음이 저절로 밝아져서 미혹한 경계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그렇긴 하나 백천 가지의 묘한 이치로 세상을 휩쓴다 할지라도 나아가 자리 잡고 옷을 풀고 앉아서 스스로 살 꾀를 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실제 진리의 경지에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행을 닦는 가운데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만일 단도직입으로 깨달아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허망한 생각이 모두 녹아지면 참되고 항상 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진리와 현실이 둘이 아닌 여여한 부처이다.“라고 했다.-<위산록(潙山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가불매조(呵佛罵祖) 참조.

    

 

*위앙종(潙仰宗)---중국 선종 오가칠종(五家七宗) 가운데 가장 먼저 당나라시대 성립된 불교종파이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의 제자 남악 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법손인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와 그 제자 앙산 혜적(仰山慧寂:803~887) 선사가 창시한 종파이다. 송나라 때 쇠퇴해서 임제종에 합쳐졌다.

    당나라 때 영우 선사가 위산에 주석해 종풍을 떨치다가 그의 제자 혜적 스님이 계승해 종파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이 종파는 당말 오대(唐末五代) 시기에 가장 번창했다가 송나라 때 이르러 점차 쇠퇴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마침내 임제종(臨濟宗)에 흡수됐다. 위앙종은 대략 150년 정도 명맥을 유지했다.

    영우 선사는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법을 이은 후 7년 동안 위산에 홀로 살다가 대안(大安) 스님이 백장 선사의 회상에서부터 찾아온 이래 학인들이 점차로 몰려들었다. 항상 천오백 명이 넘는 대중이 모여 황벽(黃檗希運) 선사의 문하보다 더 번성했다.

    상국(相國) 배휴(裴休)가 찾아와 법을 묻기도 했고, 인근 백성들이 그의 덕화에 감복했다. 회창법란(會昌法難) 때는 몸을 숨겨 저자에 피신해 속복을 입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법을 펴고 대중을 지도했다. 영우 선사를 위산으로 돌아오게 한 데에는 배휴의 간청이 있었다.

    영우 선사의 뒤를 이어 혜적 선사가 종지를 승계해 원주앙산(袁州仰山)에 주석하면서 종풍을 크게 드날렸다.

    앙산 선사가 법을 펼 때는 남양혜충(南陽慧忠) 문하의 탐원(耽源) 스님에게 전해 받은 원상(圓相)을 쓰기도 했다. 그리하여 앙산은 원상(圓相)을 써서 종지를 쉽게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따라서 위앙종의 가풍은 원상이라 하겠는데, 여기서 원상(圓相)은 완전무결한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ㆍ불성(佛性)ㆍ실상(實相)의 상징이다. 훗날 위앙종 가풍에 대해 평한 말에 “위앙의 종풍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가정을 이루듯이 스승이 부르면 제자가 화답하는 방식이다. 말로도 침묵으로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밝음과 어둠이 뒤섞여 오가고 체용(體用)이 한 쌍이 돼 드러난다. 혀 없는 사람이 종지를 드러내려 하니 원상을 그려 밝히는구나.”라고 했다. 

 

 

      

*위음왕불(威音王佛, 산스크리트어 아디붓다/Adi Buddha)---<법화경>에서 일컫는 최초의 부처님. ‘위음(威音)’이란 법화(法華)를 직접 설하는 음성을 표현한 것이며, 왕이란 이 부처님의 위풍과 음성에서 위대한 국가를 통솔하는 왕의 위력이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즉, 위음왕(威音王)의 ‘위(威)’는 감화를 미치게 한다는 뜻이다. 자기의 행동이 올바르면 자연 주위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이 ‘위’이다. ‘왕(王)’은 보편적인 임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왕성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위음왕(威音王)이란 부처님 가르침을 설해 그 가르침이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그러한 위력을 가진 위음왕불이 출현했을 당시 겁명은 이쇠(離衰), 국명은 대성(大成)이었다. 이쇠(離衰)란 쇠약함을 떠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덕(德)이 왕성하므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청정해 모두가 유쾌한 마음으로 나날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시대를 뜻한다. 대성(大成)은 모든 사람이 그 덕(德)을 완성한다는 뜻의 나라 이름이다.

   그리고 고대(古代)를 표시하는 비유로 ‘위음왕불 이전’이라 하기도 하고,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이니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음왕불을 경계로 해 그 이전을 실제이지(實際理地)라 하고, 이후를 불사문중(佛事門中)이라 한다. 밀교에서는 위음왕불을 본초불(本初佛) 혹은 자성불(自性佛)이라 한다.

        ※실제이지(實際理地)---<능엄경>에 나오는 말로서, 진리의 세계ㆍ진리의 땅을 일컫는데, 실제이지에는 불수일진(不受一塵)라는 말이 함께 이어진다. 실제이지의 진리 자리엔 먼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불사문중(佛事門中)---불사문중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는 말이 함께 이어진다. 즉,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집안에서는 세상 어느 것 하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면서 방편(方便)을 수용한다는 말이다.

     

 

*위음이전(威音已前=威王以前)----<법화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처님이 위음왕불(威音王佛, 산스크리트어 아디붓다, Adi Buddha)이다. ‘위음(威音)’이란 법화(法華)를 직접 설하는 음성을 표현한 것이며, 왕이란 이 부처님의 위풍과 음성에서 위대한 국가를 통솔하는 왕의 위력이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위음왕불이 출현했을 당시 겁명은 이쇠(離衰), 국명은 대성(大成)이었는데, 고대(古代)를 나타내는 비유로 ‘위음이전(威音已前=威王以前)‘ 혹은 ’위음왕불 이전’이라 하기도 하고,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 혹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음 이전’은 태초, 천지개벽 이전, 우주생성 이전이란 말로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전, 분별심이 생기기 이전을 뜻하며, 무분별의 세계, 본래면목을 뜻한다.---→실제이지(實際理地) 참조.

    ※비슷한 말 ‧ 성주괴공(成住壞空) 이전 - 우주의 생성과 소멸 이전.

      ‧ 공겁(空劫) 이전 - 천지창조 이전.

      ‧ 부모미생전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이전.

    

*위인도생(爲人度生)---중생을 제도함을 의미한다.

 

*위제희부인(韋提希夫人)---바이데히(Vaidehi)의 소리번역한 말이다. 붓다와 같은 시대의 마가다(Magadha)국 빈비사라(Bimbisara)왕의 왕비이다. 왕자 아사세(阿闍世, 아자타샤트루이)가 빈비사라왕을 유폐시켜 아사시키려고 했을 때, 몰래 살갗에 음식진액을 바르고 장신구에 물을 채워서 감옥을 방문해 왕으로 하여금 핥아먹게 해 살렸는데, 이것이 발각 돼 자신도 유폐됐지만 감옥 안에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붓다가 나타나서 이 세상에서 절망을 해 아미타불정토를 기원하는 왕비에게 아미타불정토를 관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때의 가르침 이야기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기록돼 있다.

    

*유(有, 산스크리트어 bhava)---‘유(有)’는 유정(有情)으로서의 존재 또는 생존의 뜻을 지닌 불교 용어이다. 유(有:bhava)라는 말은 영어의 Be동사, 혹은 된다(become)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동사어 ‘bhu’라는 말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따라서 바와(bhava)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와 집착을 통해서 끊임없이 돼가는 과정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五蘊)이 흐르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암시한다. 즉, 12연기에서 갈애(渴愛)를 원인으로 취(取)가 일어나고, 취(取)를 원인으로 유(有)가 일어나고, 유(有)를 원인으로 생(生)이 일어난다고 할 때, 유(有. bhava)는 존재, 습관적 존재를 말하며, 존재의 상태, 생성, 윤회, 다시 태어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존재)는 존재의 의미와 생성의 의미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업의 생성(有. 業有. kamma-bhava)으로서의 유(존재).

   12연기에 있어서 취(取)를 연해 유(有)가 발생한다. 취에 의해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다음엔, 모든 중생은 그 취한 것(대상)을 자신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을 유(有)라고 한다. 한번 취하면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하려는 소유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집착에 따라 업(業)이 형성된다.

 

    2) 재탄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apatti-bhava)

 

    업설에 의하면 집착 때문에 업(業)이 만들어지고, 그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즉, 취(取)를 조건[집착]으로 해서 유라는 업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12연기 두 번째 항목인 행(行)이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유(有)는 불교에서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상태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유(有)는 '윤회의 삶' 또는 '윤회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각각의 세계에 생을 받은 순간을 뜻하는 생유(生有),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인 본유(本有), 죽는 순간을 뜻하는 사유(死有),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기간인 중유(中有-중음/中陰)의 사유(四有, catvāro bhavāh)로 나누어 설명한다.---→사유(四有) 참조.

   

*유가(瑜伽, 산스크리트어 yoga)---→요가(yoga, 瑜伽) 참조.

   

*유가록(瑜伽錄)---불공 삼장(不空三藏, 705~774)이 지은 밀교에 관한 저서. 인도 출신의 밀교계 승려인 불공은 <유가록>에 “이 경전은 금강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연마하는 총체적 비결이니 금강은 법의 이치(理)요, 반야는 법의 실체(體)요, 바라밀은 법의 작용(用)이니, 유위법과 무위법 그리고 처음도 되고 끝도 되는 현묘한 공(空)이 비록 다 갖추어졌으나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실제로 깨닫기 어렵다”라고 했다.---→불공(不空: 705~774) 참조.

   

*유가사(瑜伽師, 산스크리트어 yogācāra)---요가 수행자들을 말한다. 즉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을 유가사(瑜伽師)라고 불렀다. 그런데 명상 수행자 일반을 가리키지만 특별히 유식학파 사람들을 유가사라 하기도 하고, 밀교의 수행자를 지칭할 때도 있다. 불교에서는 보통 유식유가행파(唯識瑜伽行派) 혹은 유가행유식학파 (瑜伽行唯識學派)라고 해서 유식설(唯識說)을 받드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즉, 불교 내에서 요가 체험과 불교의 교의를 결합해 체계적 학설을 완성시킨 학파가 바로 유식학파인데, 그 구성원들이 요가수행자[瑜伽師, yogācāra]들이었기 때문에 유식유가행파라고 불린다.

   <대비바사론>이나 <구사론>에서 유가사(yogacara, yogin)라 칭해진 사람들은 불교 아비달마에 관계했던 학자들과는 별도로 한적한 곳에서 명상을 일과로 했던 비구들이었다. <구사론>에 따르면 유가사가 골쇄관(骨鎖觀)을 3단계로 나누었다고 한다. 골쇄관이란 애욕을 벗어나기 위해 실수(實修)하는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 미녀도 젊음도 단지 백골의 연쇄(連鎖)에 지나지 않음을 관(觀)하는 수행법이다. 유가사는 먼저 발가락이나 이마 등 자신의 몸 일부분에 마음을 집중해 그 부분의 피부나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모습을 마음에 그려서 단지 백골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관한다. 이러한 관법을 차례로 자신의 전신에 걸쳐서 하고, 타인의 몸도 마찬가지로 백골에 지나지 않는다고 관한다. 나아가서는 부근 일대를, 마침내는 전 대지가 골쇄로 가득 찼다고 관한 뒤 다시 관상(觀相)의 범위를 축소해 자신의 몸을 백골의 연쇄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의 초기단계이다. 제2, 제3의 단계에 이르면 의지적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도, 즉 단지 미간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골쇄관을 행함이 가능케 된다는 것이다. 유가사는 이론적인 관심보다도 실천적인 수행을 강하게 하려고 수행의 도를 밝히는 것에 전력한 사람들이므로 그 점에서 아비달마 논사(論師)와 구별해 유가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참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유가사지론> 저자는 유식학파(唯識學派)를 연 남인도 파라나국 출신인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 270 ?~350 ?)이다.

   여기 미륵은 미륵불의 미륵과 달리 실존인물이다. 그는 바라문 출신으로서 불교에 귀의해 <유가사지론> 외에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유식학파이론을 발전시켰고, 무착(無著, 300?~390?, 世親의 형)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유가사지론은 유가사(요가수행자)의 실천단계를 의미하는데, 유가는 명상 ‧ 정신통일의 수행으로, 일반적으로 선 ‧ 삼매 등으로 불리는 것과 동일하다. 유가사(瑜伽師)는 이 명상수행에 진력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유가행파(Yogacara)라는 학파의 명칭은 이 유가사에서 유래한다.

   이 논서는 성문과 보살의 수행을 총정리한 초기 대승경전이기 때문에 이설(異說)이 끼어들기 전의 순수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유가사지론>의 내용은 순수 대승불교로 보면 된다.

   현장(玄奘) 법사가 서역에 간 것은 바로 이 <유가사지론>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생 끝에 인도에 도착해 계현(戒賢, 실라바드라) 스님을 뵙게 된다. 현장은 계현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말씀을 드렸다.

    “저는 오로지 스승이신 당신께 <유가사지론>을 배우고자 왔습니다.”

   계현 스님은 당시 나이는 106세의 고령이었는데, 불교의 모든 영역에서 인도 최고의 불교 석학이었다. 그는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의 직계 제자인 호법(護法) 스님의 제자였다.

    그런데 계현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유인즉 3년 전 몸이 너무 아파 열반에 들고 싶었으나, 꿈에서 관자재보살과 미륵보살과 문수보살 3분이 나타나 <유가사지론>을 널리 선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중원의 땅에서 불법을 배우기를 바라는 승려가 올 것이니 미륵보살이 구전한 <유가사지론>을 그에게 전하라. 그리고 그 때까지 육신을 지켜라.”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제야 그 승려인 현장을 만나 만감이 교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날란다사원에서 현장은 계현으로부터 친히 <유가사지론>에 대한 가르침 받는 등 여러 가지로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5년간의 본격적인 유학생활을 했다.

    <유가사지론>은 미륵이 설파한 것 중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경전인데, 유가[요가]행파에서는 <유가사지론>을 대승불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체계가 완비된, 그리고 가장 엄밀한 조직으로 구성돼 있고, 이론이 투철한 가장 권위 있는 저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장은 중국으로 귀국한 뒤에 당 태종의 명으로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뒤에, 2년간에 걸쳐 <유가사지론>을 한역했다.

    <유가사지론>의 분량은 산스크리트어로 4만송인데 한역본에서는 1송이 4구절로 번역되니 곧 16만 구절로 구성됐다. 현장이 한역한 <유가사지론>은 100권의 분량이다. 우리나라엔 고려시대의 <초조대장경>에 실려 있어서 그 판본이 남아있어 국보 제244호로 지정돼 있다.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당(唐)나라 때 현장(玄奘)이 650년에 한역했다. 줄여서 <유가론석>이라고 한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 설해진 목적, 제작 경위, 이름의 의미 등과 본지분(本地分)에 나오는 17지(地)의 의의를 6문(門)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주석한 것이다. 최승자(最勝子)와 그 외 여러 논사들이 6세기 말엽에 북인도의 발벌국(鉢伐國)에서 저술했으며, <유가사지론>의 주석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주필인 최승자는 승자(勝子)라고도 하며, 본명은 지나푸트라(Gina putra - 신나불다라/愼那弗多羅)이며, 유식 10대 논사의 한 사람이고, 호법(護法, 다르마팔라/Dharmapala, 530~561)의 문하였다.

 

     

*유가안온(瑜伽安穩, 빠알리어 요가케마/yogakkhema)---아라한됨이나 열반과 동의어로 쓰이는데, 한결같이 이 단어를 속박(yoga)으로부터 안은함(khema)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속박으로부터 안은하기 때문에 열반을 유가안은이라 한다고 했다. 네 가지 속박들로부터 안은하고 속박되지 않은 것이 유가안은이다. 네 가지 속박이란 감각적 욕망(kāma), 존재(bhava), 사견(diṭṭhi), 무명(avijjā)을 말한다.

 

*유가(Yoga, 瑜跏) 학파---유가(瑜伽)나 요가(yoga)나 같은 말이다. 요가(yoga)를 한역한 것이 유가(瑜伽)이다. 그래서 요가(yoga; 瑜伽)’라고도 하는데, 광의로는 명상을 뜻하지만, 협의로는 고행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인 심신통일의 기술을 총칭한다. 그리고 더 협의로는 고대 인도의 육파철학 가운데 하나인 유가학파(Yoga學派)에서 시작하는,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철학 체계를 요가(유가)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가(Yoga, 瑜跏) 학파는 고대인도 육파철학의 하나로서, 개조는 파탄잘리(Pata¯njali)이고, BC 4~3세기에 성립했다. 요가 수행으로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의경전은 파탄잘리(patañjala)가 지은 <유가경(瑜跏經, 요가수트라/yaga-sūtra)>이다. 이에 의하면, 요가를 마음작용의 소멸이라 정의하고, 마음작용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흡을 조절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수행을 거듭 되풀이하고, 대상에 대한 탐욕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괴로움의 원인은 주관과 객관의 결합에 있고, 삼매(三昧)에 의해 주관이 객관을 떠나 독존하게 된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요가를 몸을 비비꼬는 묘한 자세를 취하는 인도에서 전해진 체육운동으로 알고 있다. 요즘 요가 운동이 유행하고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요가의 개념과 여기 유가학파에서 말하는 요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요가라는 말에 ‘운동’이라는 일면이 없지 않으나 요가는 근본적으로 고도의 정신집중 수행법이다. 요가는 육체적 수행뿐만 아니라, 정신적 그리고 초자연적 수행이요, 훈련이다. 요가는 명상과 호흡, 스트레칭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신수련방법인데, 그 중의 일부인 스트레칭 부분을 확대시켜 일반사회에서는 체육활동의 한 종류로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요가의 종류는 다양하며, 특히 철학 혹은 종교와 결합한 요가는 체육과는 거리가 먼 정신수양의 영역으로서, 고대인도의 전통적인 심신통일의 기술을 총칭한다. 바로 유가학파(Yoga學派)에서 행했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철학 체계를 가리킨다.---→요가(yoga, 瑜伽) 참조.

   

 

*유가행(瑜伽行)---요가수행을 유가행이라 한다.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관상(觀想) 등에 의한 수행(修行)이다.

 

 

*유가행파(瑜伽行派)---불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은 그 자체가 요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마음의 동요를 제거하고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요가의 기본 이념을 따르는 방편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 내에서 요가 체험과 불교의 교의를 결합해 체계적 학설을 완성시킨 학파가 바로 유식학파인데, 그 구성원들이 요가수행자[瑜伽師, yogācāra]들이었기 때문에 요가행파라고도 불린다.---→유식사상(唯識思想) 참조

    

*유견(有見)---‘나’라는 존재가 있다, ‘나’란 존재는 영원하다, 이와 같이 ‘나’라는 존재에 집착해서 내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그대로 지속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이다.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변견(邊見)이라고도 하며, 이런 유견(有見)에 사로잡힌 견해가 변견이기도 하고, 사견(邪見)이기도 하다.---→무견(無見), 오견(五見) 참조.

 

 

*유공용(有功用)---누가 조작해서 하는 것이 유공용(有功用)이다.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유공용이다. 유공용(有功用은 수행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공용(無功用은 수행의 흔적조차 없다. 공용은 뭘 하면 흔적이 있어. 또 했으면 또 좋다고 하고 또 잃어버리면 또 아주 그 마음이 섭섭해가지고도 하고, 그래 한 일이 전부 흔적이 있고 뭔가 마음에 한 그런 그 상태가 남아있어. 그걸 유공용(有功用)이라 한다. 그런데 <화엄경>은 유공용 이야기가 아니다. 무공용(無功用)이야기다.---→공용(功用), 무공용(無功用) 참조.

 

 

*유공중도론(有空中道論)---유식학의 세친(世親, 바수반두)이 주장한 이론이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공사상(空思想)은 설일체유부의 법체설-유소득(有所得)의 그릇된 망집을 타파하는 것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용수가 비었다(空)는 말로 있다(有)는 것을 부정한 의도는 그 있다는 그릇된 망집을 깨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취해진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무한히 부정하는 방법 때문에 그는 마침내 무상개공(無相皆空)을 주장하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무상개공론(無相皆空論)---설일체유부의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을 무한히 부정하는 방법 때문에 마침내 이르게 된 것이 무상개공론이다. <성실론(成實論, Satyasiddhi-sastra)>에 의지해 나온 설로 주관적인 나의 존재도 실제로 있지 않고 객관적인 일체 사물로 모두 공하다고 보는 견해이지만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 부정의 차원에서 공을 내세운 편공(偏空)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후대에 평가 받은 설이다.

          ※편공(偏空)---공(空)에 집착하다가 허무에 빠지거나 치우치게 되는 것.  

    현상계의 모든 만물은 비록 우리의 심식(心識)이 전변(轉變)한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또 그러한 현상을 전변시킨 우리의 심식 역시 거짓된 것일망정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부정만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거짓으로 존재하는(假有) 겉모습만을 상대로 해서 망집을 일으킨 때문이지만, 그것이 모양으로 봐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非空), 동시에 그 바탕(體性)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非有). 우리가 파도나 새끼줄을 그 겉모습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것들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바탕 측면에서 볼 때는 단지 물이나 지푸라기일 뿐, 물이 없는 파도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사물의 실체는 공한 것도 아니고(非空), 있는 것도 아닌 것(非有)이 본래의 올바른 모습이며, 이것이 곧 중도(中道)라는 것이 바수반두(世親)가 주장하는 유공중도설(有空中道說)이다.

 

          

*유교(有敎)ㆍ공교(空敎)ㆍ중도교(中道敎)---불교철학을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삼시교판설(三時敎判說)이라 한다. 이 분류는 유식학(唯識學)을 붓다 교설 중에서 최상의 법문임을 증명하기 위해 인도 유식학파 계현(戒賢, Silabhadra) 논사가 정립한 이론이다. 중국에서는 법상종의 교판(敎判)으로서 제1시 유교(有敎), 제2시 공교(空敎), 제3시 중도교(中道敎, 唯識敎) 순서로 불법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유교(有敎)란 이 중 맨 처음 초기법문을 말한다. 즉, 우리 중생 차원에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모두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두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범안(凡眼) 차원에서 알기 쉽게 하는 법문을 유교(有敎)라 한다. 유교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중생들의 견해, 따라서 중생들이 이해 할 수 있는 그러한 정도에 맞추어서 하는 법문이다. 즉, 중생들은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또 중생들의 감각에 따라서 거기에 대상(對相)적으로 비추어지는 세계를 말한다. 자연계라든가 여러 가지, 가지가지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범주에 속해있는 그런 법, 이것이 이른바 유교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맨 처음에 가장 정도가 낮은 것이 유교이다. 그런데 유교(有敎)란 상식적인 그리고 소박한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미처 깊은 심오한 가르침을 모르고서 상식적인 상대유한적인 범위에 있을 때는 해당이 되지만 좀 더 심오한 가르침을 위해서는 유교로 해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다음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체가 다 공(空)하다’라고 하는 단계인데 이를 공교(空敎)라 한다. 그런 다음 단계가 중도교(中道敎)이다. 이른바 과학적으로 깊이 탐구를 한다든가 또는 철학적이나 종교적으로 깊이 명상을 한다든가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유교는 거기에 합당한 가르침이 못된다.

   그래서 그 다음에 공교(空敎)가 있다. <반야심경>이라든가 <금강경>이나 <600권 반야경>이 그런 가르침으로서 대체로 공교의 가르침을 주로하고 있다. 그래서 제법공(諸法空)이라든가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든가 그러한 <금강경>에 나오는 공(空)의 도리가 공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공교도 우리 상식적인 견해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중생들의 소박한 생각으로는 분명히 있고, 자타(自他)의 구분이 있는 것인데, 본래 공이라 하니 이해하기가 힘들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중생들의 눈에 보이는 존재를 차근차근 분석해서 나중에 가서 다 비어버리는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석공(析空)이다. 그리고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해서, 그 자리가 바로 공이란 말인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공(色卽空), 이러한 당체가 바로 공이라는 말이다. 중생들이 느끼는 분석(分析)해서 알아차리는 석공에 대응해서 체공(體空)이라고 하는 것이 당체즉공이다. <반야심경> 공(空)이나 <금강경> 공(空)이 모두가 체공인 셈이다. 그래서 그 공을 석공보다 근원적인 공(空)의 도리, 체공과 이런 도리를 말씀한 법문이 공교(空敎)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공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란 말이 있듯이, 근원적인 부처님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 부처님께서 조금도 방편을 쓰시지 않고서 그대로 말씀하신 제법(諸法) 그대로 중도실상(中道實相) 아님이 없는 그런 도리를 말씀한 그러한 법문이 바로 중도교(中道敎)이다. 따라서 중도교가 부처님께서 하시고 싶은 본원적인 가르침이다.

     우리가 망령된 자기를 부정하고서 번뇌를 여의면, 거기에서 여여(如如)하니 분명히 영원적인 공덕이 나온다. 참다운 진아가 나온다는 말이다. 이같이 유(有)도 아니고 다만 공(空)도 아니고(非有非空), 천지우주는 오직 부처뿐이라는 가장 높은 차원, 이것이 중도교(中道敎)이다.

    이러한 세 차원으로 해서 소박한 우리 중생들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견해에서 느낄 수 있는 유교(有敎), 그런가 하면은 본래 비어있는 자리, 즉 제법의 공 도리로 말씀하신 그런 공교(空敎), 그와 동시에 이른바 대총상법문이라고 하는 조금도 방편이 없이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는 법의 실상 그대로 말씀하신 중도교,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이 있다.

    부처님 비유담으로 보면, 삼수도하(三獸渡河)라는 말이 있다. 토끼, 사슴, 코끼리, 이렇게 3가지 덩치의 짐승이 시냇물을 건너는데, 토끼란 놈은 가볍고 덩치도 작고 그러니까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그래서 법에 비기면 마치 중생들이 느끼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법문이 토끼가 물에 둥둥 떠서 물에 깊이는 헤아리지도 못하고 그냥 겉으로만 진리를 느끼는 이른바 유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사슴이란 놈은 덩치도 좀 크고 무게가 있어서 상당히 물에 잠겨서 시냇물의 바닥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운데쯤을 차지 해가지고 건너는 그런 정도란 말이다. 이것은 이른바 공교(空敎)에 해당한다.

    그리고 코끼리는 덩치가 크고 무거워 발이 강바닥에 닿아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것을 법의 깊이로 말 하면 토끼가 걷는 것은 법의 표면이니까 소승적(小乘的)인 또는 범부(凡夫)적인 그런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가운데 중간쯤에 떠서 건너는 사슴 정도는 공교(空敎)에 해당해서 모든 존재가 본래 비어있다는 그런 정도의 가르침을 말하는데, 코끼리는 강바닥을 제대로 밟고 건너는 것은 마치 법의 근원적인 것이 조금도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는 오로지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그런 이치를 깨닫는 중도교 법문이라 하겠다.---→공교(空敎) 참조.

 

      

*유교경(遺敎經)---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담고 있는 경전을 말한다. 원명은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이고, 줄여서 <불유교경(佛遺敎經)>라 한다.---→불유교경(佛遺敎經) 참조.

    

*유나(維那)---도유나(都維那)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재(齋) 의식을 지휘하는 소임. 또는 그 소임을 맡아 하는 승려를 말한다. 그리고 선원(禪院)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승려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유념(有念)---불교에서 유념은 좋은 뜻으로도 쓰이고, 좋지 않은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다. 먼저 <좋게 쓰이는 경우>를 보자.

    • 분명하고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취사선택하고, 뚜렷하고 정당한 표준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해야만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서 주의심을 가지고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 마음공부가 깊어져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 은혜를 베풀고 나서 관념과 상(相)에 사로잡힌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해서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서 베풀었다는 상(相)을 가지지 않아야 진심이라 하는데, 유념은 베풀었다는 상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 불교에서는 분별하고, 구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데, 유념은 분별심 혹은 사량계교심을 일컫는다.

   

*유루(有漏, 산스크리트 사스라바/sâsrava)---무상(無常)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의 모습을 유루(有漏)라고 한다. ‘루(漏)’라고 하는 것은 허약하게 만드는 원인이란 의미이다. 누수(漏水), 누설(漏泄), 누출(漏出), 조루증(早漏症), 이런 것들이 모두 허약함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남녀 성관계에서 상대방 여성이 만족감을 느끼기 전에 사정을 해버리는 것이 조루증이다. 남자는 이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으로 발전돼 이로 인해 친밀감이 줄어들고, 사랑이 파탄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유루의 부정적인 측면에 비해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有漏)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유루의 세계로 부터 무위 무루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성제(四聖諦)에서 볼 때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이며, 무위 ‧ 무루의 세계는 열반이요 멸제(滅諦)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道諦)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있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상주성(常住性), 무루(無漏, asâsrava) 참조.

 

*유루법(有漏法)---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누(漏)’는 누설, 즉 흘러나온다 - 샌다는 뜻이다. 무루(無漏)는 새는 것이 없는 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누(漏)’는 번뇌를 가리킨다. 번뇌가 생겨나고, 또한 번뇌에 따라 생겨나는 법을 일컬어 ​‘유루(有漏)’라고 한다.

     우리가 안이비설신의(6근)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6경)을 지각할 때 마음에 여러 가지 오염이 일어난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거울처럼 그대로 비추어 보면 아무런 분별시비가 없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일련의 지각과정을 거치는 동안 눈을 통해 들어온 형상에 대한 정보를 제 나름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이 과정에 내 생각(번뇌)이 개입한다. 그래서 유루가 된다.

     예컨대, 여기 귤 한 개가 있어, 이를 볼 때 거울은 귤 그것을 그대로 비추어 보이지만 우리는 온갖 망상을 늘어놓은 결과로 귤 하나를 보게 된다. 첫사랑의 추억이 거기 결합될 수도 있고, 외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결합될 수도 있으며, 어릴 때 몹시 먹고 싶었던 추억이 결합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마음 안에 경험을 통해서 축적돼 있는 정보들이 지금의 귤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과정에서의 오염을 누(漏)라고 한다. 이런 내 정보가 달라붙어 오염시키는 것이 곧 번뇌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번뇌에 오염 되지 않은 청정한 법을 무루법이라 한다. 무루법은 업(業)을 짓지 않으므로 인과를 짓지 않고 유루법은 업을 지으므로 인과를 낳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했을 떄, 내가 좋은(착한) 일을 했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유루법이고, 좋은 일을 해도 했다는 마음이 없으면 무루법이 된다. 좋은 일을 했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나(我)’가 없는 마음이다. 나를 비운 마음이다. 그리하여 우주와 일체가 된 마음, 우주와 나가 하나가 된 마음이다. 또 다른 내가 있지 않다는 그 마음이 돼야 한다. 그러면 남을 위한 것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 되니까. 그것이 무루법이다.

 

      

*유루복(有漏福)---→무루복(無漏福) 참조.

    

*유루행(有漏行)---세속적 지혜는 유루지(有漏智)이고,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남이 없이 선악의 세속적 덕목으로 수행하는 것이 곧 유루행(有漏行)이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어떤 행동도 때 묻은 유루행(有漏行)밖에는 못 된다.

    

*유마경(維摩經)---반야부 계통에 속하는 경으로서 본명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다. AD 1~2세기경에 성립된 초기대승경전의 하나이다. 한역경과 티베트어 역은 있으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유마경>의 한역본은 세 종류가 있다.

    • 지루가참(支累迦讖)의 수제자 지겸(支謙, 222~253)이 번역한 <유마힐경(維摩詰經)>,

    •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 당나라시대 현장(玄奘)이 번역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 그것들이다. 한역 본 중에서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이 널리 읽힌다.

   그런데 불교 경전이 대부분 부처님이나 보살이 설하는 형식인데, 이 경은 유마힐 거사, 즉 세속에 있는 분이 말한 것으로 돼 있어 특이하다.

   풍요롭고 활기찬 상업도시 베살리(Vēsalῑ=바이샬리/Vaisali, 毘舍利)를 무대로 유마힐 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곡적 형식의 대승경전이다. <반야경>에 이어 나타난 <유마경>은 <미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과 더불어 희곡적(戱曲的)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어느 경전보다도 문학적인 소재가 많은 경전이다. 따라서 유마경은 대승불교경전으로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지만 서술되고 전개되는 내용을 하나의 불교문학작품으로 봐도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유마힐(維摩詰, 산스크리트어 비말라키르티/Vimalakirti)은 이 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재가불자로서 불교의 진수를 체득하고, 청정한 행위를 실천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려는 재가불자의 이상형으로 묘사돼 있다. 그리하여 유마힐을 모델로 해서 대승보살의 실천도(實踐道)를 강조하고, 세속에 있어서 불도(佛道)를 실천하고 완성하게 됨을 설시(說示)하려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이런 <유마경>은 <승만경>과 함께 대승불교의 재가주의를 천명해 예로부터 널리 보급돼왔다.

    <유마경>은 <반야경>에서 말하는 공(空)사상에 기초해서 윤회와 열반, 번뇌와 보리, 예토(穢土)와 정토(淨土) 따위의 구별을 떠나, 재가신자인 유마를 주인공으로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의 경지를 체득해야 함과 공(空)의 실천을 역설했다. 즉, <유마경>은 불이법(不二法)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마경>은 지혜로서 어머니를 삼고, 방편으로 아버지를 삼고, 법희로서 아내를 삼고, 자비로서 딸을 삼고, 착한 마음으로 아들을 삼아, 공적한 집에서 깨달음의 법륜을 굴려가는 유마거사 생활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유마경>에는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앓는다.”고 함으로써 중생이 병들어 있는 까닭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보살도 앓는 몸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러한 <유마경>의 등장은 불교사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초기불교 이후 이상상(理想像)이며 염원이고 목표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던 아라한(阿羅漢)의 모습이 제2차 불전결집을 전후한 시기에 ‘오사(五事) 문제’로 치명적으로 훼손됐다. 그리고 그 이후 새로운 대승 보살사상이 등장하면서 아라한은 보살의 아래 단계로 격하됐다. 그리고 <유마경>이 나오면서 재가불자의 깨달음이 아라한을 넘어선다. 아라한은 한참 지혜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 그리하여 재가불자로 살면서도 얼마든지 아라한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유마거사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유마경>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다. 초기경전에 보면 부처님 제자로 재가자 중에서 아나함과를 얻은 가장 뛰어난 거사로 찟다 장자(Citta gahapati)가 있었다. 경전에도 등장하는 인물인데, 아마도 유마경을 찬술했던 대승인들이 이러한 실존인물이었던 찟다 장자에게서 힌트를 얻어서 유마거사를 등장시키지 않았을까 한다.

    대승불교가 반야경전군에서 공사상(空思想)을 주장한 뒤,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전으로 옮겨놓은 것이 <유마경>이고, 재가불교에서도 얼마든지 최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당시 출가승위주의 불교였던 부파불교를 비난하고 있다고 보인다. 더욱이 <유마경>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10대 제자들조차도 일개 재가자인 유마에게 문병을 가지 못할 정도로 쩔쩔매는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대승인들이 부파불교인들을 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반목은 당시 부파불교인들은 대승경전을 악마의 책이라고까지 비난을 했고,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수행인들은 같은 우물에서 물을 마시지 않고 같은 냇가에서 목욕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 반목이 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니 대승불교 측에서 <유마경>을 통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10대 제자들을 일개 허구의 인물인 유마거사보다 못한 존재로 폄훼한 것이라 보인다.”- 실론섬  ---→유마힐(維摩詰, 산스크리트어 Vimalakīrti),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앓는다’ 참조.

 

 

*유마힐(維摩詰, 산스크리트어 Vimalakīrti)---유명한 재가신자인 유마힐 거사(維摩詰居士)를 말한다. 바이샬리(비야리성/毗耶離城, Vaisali/毘舍利)의 부호(장자)로서,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비말라키르티(Vimalakīrti)인데, 비말라힐(毗沫羅詰) 또는 유마(維摩)ㆍ유마힐(維摩詰)ㆍ유마라힐(維摩羅詰)ㆍ비마라난리제(鼻磨羅難利帝)이라 음역하며, 정명(淨名), 무구칭(無垢稱)이라 의역한다. 석가모니와 같은 때 사람이며, 부처님 세속제자이고, 부처님 십대 제자라고 하지만 실존 인물은 아니며, 가상의 인물로서 재가신자인 거사(居士)의 이상형으로 묘사돼 있다.

    비록 처자를 거느리고 있는 수행자로서 보살의 행을 닦는 거사이며, 학덕이 높아 사리불ㆍ가섭 등 석가모니의 큰 제자들도 그의 학해(學解)를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유마힐은 특히 대부호로서 세속적 복락에 탐닉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어떤 제자들보다도 수행력이 수승한 인물이다. 그의 법력은 사리불, 목건련, 가섭, 수보리, 부루나, 아나율 같은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문병(問病)마저 꺼려할 정도로 높았다. 그는 비록 재가자이지만 사문의 청정한 율행(律行)을 지키고, 가정을 갖고 살고 있으나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고, 처자(妻子)가 있지만 항상 범행(梵行)을 닦고, 먹고 마시지만 그러한 즐거움보다는 선(禪)의 기쁨을 더 좋아하고, 노름판 같은 데를 가더라도 그곳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과거세의 부처 곧 금속여래(金粟如來)로 비야리성(毗耶離城, 베살리/Vēsalῑ=바이샬리/Vaisali)에서 늘 칭병(稱病)하고 누워서 문병 오는 불제자들에게 병을 가지고 설법했다. 금속여래는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불명(佛名)이다.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서양 중세 말에 활발히 일어난 보편자(공통적인 무엇을 갖는 개별 사물들에 붙일 수 있는 단어)를 둘러싼 철학논쟁에서 나타난 한 견해이다.

    특수성을 가진 여러 개체들이 공유(共有)하고 있는 특성. 그 특성에 의해서 여러 개체들이 하나의 집합을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보편성은 한 집합을 성립시키는 원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집합의 개념을 우주(宇宙)에 적용할 때, 모든 존재하는 사물이 공유하고 있는 궁극적 특성을 일컫는 것이 된다. 플라톤(Platon)에 있어서 보편성은 이데아이며 그것은 존재하는 실체라고 생각했으나, 유명론자(唯名論者)들은 보편성이란 일반성을 나타내는 개념에 불과할 뿐 결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보편주의는, 보편자(普遍者)를 개별자(個別者)의 상위에 두고, 후자는 전자에 참여함으로써만 존재성과 의의를 갖게 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유명론이란 실재론(實在論, realism)을 부정한 대립이론으로서, 개체적 존재(物)만이 참된 실재이며, 추상적 개념이나 보편적 존재는 '물(物) 뒤에 있는 이름'(nomina post res)에 불과한 단지 개념일 뿐이라는 이론이다. 12세기 로스켈리우스(Roscellinus)에 의해 처음 제창됐다.

   불교 유명론은 6세기 인도에서 발달한 아포하론(Apoha theory)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아포하(aphoa)’란 ‘타자의 배제(the exclusion of the other)’를 뜻한다. 불교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들은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불교유명론의 답은 타자의 배제(the exclusion of the other, 아포하)이다.

   불교 유명론자들은 보편자를 상정하지 않고도 아포하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사물들을 인지하고 같은 술어(이름)를 갖는 사물들로 분류하는지 설명했다. 속성개별자들인 다르마를 포함해 여느 존재자들의 내재적 본성을 부정하고 모든 사물들이 공(空)하다고 주장하는 대승불자들은 당연히 모든 사물에 들어있다는 보편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부 불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궁극의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유용성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 유명론이 주는 통찰을 이용하면 열반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열반을 추구한다. 열반은 불자들의 모든 연구, 도덕행위, 그리고 선정수행의 궁극적 목표다.

    그런데 열반이란 무엇인가? 널리 받아들여진 정의(定義)에 따르자면, 열반은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이다. 이 열반의 개념은 바로 불교 유명론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열반은 모든 고뇌가 제거된 상태이다. 그것은 부정적(否定的 negative) 속성을 가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열반은 열락(悅樂 blissful joy)과 같은 긍정적(肯定的 positive) 속성이 우세하게 존재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혹자들이 열반을 성취함으로써 열락을 경험하고 또 그 열락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에 유혹돼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 획득을 위해 가지기도 하는 잘못된 동기이다. 경전들은 이렇게 심리적인 열락의 상태에 대한 오도된 욕구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욕구가 열반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열락의 상태들에 대한) 집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그 안에 존재한다는 어떤 긍정적인 속성으로도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열반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포하론(Apoha theory) 참조. 

 

 

*유(有)ㆍ무(無), 단(斷)ㆍ상(常)---중생의 사대미혹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하고 있는 존재이며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하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므로 유(有)ㆍ무(無)로도 표현 할 수 없고, 상(常)ㆍ단(斷)으로도 표현 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이라는 대립된 두 견해를 완전히 극복할 원리를 제시했다. 그것이 중도(中道)다. 모든 존재는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된 것이기에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非有)와 비상(非常)이다. 불무(不無)요 부단(不斷)이오,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이라는 대립된 개념의 극복과 나아가 그 원인까지도 해결해버리는 뜻으로서의 극복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중도원리(中道原理)는 인생과 우주의 보편적 원리로서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운 등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원천적으로 해결해 준다. 그리하여 악을 선으로, 모순을 조화로 대립을 협동으로 무지를 지혜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상호협조와 평화적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실천 원리인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극단을 버린 중도(中道)의 연기(緣起)정신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유무중도(有無中道)---유무중도는 발생적 측면에서, “모든 것은 존재한다”라거나, 소멸적 측면만으로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려는 사고방식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즉, 유 아니면 무라는 극단을 벗어나는 길을 말한다. 존재와 비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는 모두 극단적이고 절대적인 생각이다. 봄에 새싹이 나오면 없던 것도 있게 되고 가을에 낙엽이 지면 있던 것도 없게 된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유일 수가 없고, 무조건적인 무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이 전도돼 있는 것은 유무 이변(有無二邊)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중도는 있는 사실대로 보고 아는 것이며 어느 고정적인 견해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중도는 근본적으로 이와 같이 어떤 존재를 상정해 그 존재를 문제 삼음으로써 나타난 모순 대립하는 모든 사견의 파기를 의미함과 동시에 연기설이라는 정견의 현시를 의미한다.

    부처님은 외도들의 사상은 유무이견(有無二見)으로 분류하고 있어서, 이 같은 사상은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결국 그 법을 따를 수가 없으므로 이런 사견(邪見)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유부(有部)---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줄인 말임.---→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참조.

      

 

*유부무기섭 수소생소계(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아라한멸정 출세도무유(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유식 30송>의 제7송이다.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생(生)하는 곳에 따라 얽매인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아라한(阿羅漢)과 멸진정(滅盡定)에 든 자와 출세도(出世道)를 성취한 자에게서는 없어진다.

   이 뜻은 금생에 지은 말나식의 업이 내생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육도, 즉 지옥, 아귀, 축생, 사람, 아수라, 하늘에 연을 만나 몸을 받아 태어나고, 그 몸을 받아 태어남에 따라 다시 제7식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닦아서 아라한의 위(位)에 이르거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거나 닦아서 출세도(出世道)를 얻을 때에는 비로소 물들고 얽매임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유부(有覆)는 업에 의해서 덥힌다 - 물든다는 뜻으로 유염(有染)이라고도 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의미로 유장부(有障覆)라고도 한다. 제7말나식 그 자체는 업을 짓지 않으므로 악성에 속하지 않아 무기에 해당된다고 했다. 말나식을 무기(無記)라 하는 것은 이 식(識)이 비록 때 묻고 더럽혀져(染汚) 있어서 번뇌를 일으키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성질만 가지고 있을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스스로 번뇌를 일으켜서 악념(惡念)을 행하거나 선악의 마음을 기억해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때 묻고 더러워진 장애로 인해 아(我)를 집착하게 됨으로써 탐ㆍ진ㆍ치의 근본이 되는 4근본번뇌와 8대수번뇌와 상응해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상(我相)을 비롯한 사상(四相)이 있어 망령되게 집착을 일으키고 6식에 영향을 끼쳐서 업을 짓게 하며, 8식에 영향을 끼쳐 무명의 종자로 생사를 반복하게 한다. 따라서 말나식의 심소인 4번뇌와 8대수번뇌를 극복해 제지(除止)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큰 과제라 하겠다.

       ※4근본번뇌---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

       ※8대수번뇌(八大隨煩惱)---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혼침(昏沈)ㆍ도거(悼擧)ㆍ실념(失念)ㆍ부정지(不正知)ㆍ산란(散亂)

       ※사상(四相)---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

    

 

*유분식(有分識, 산스크리트어 bhavanga)---부파불교시대 근본상좌부(上座部)의 심식론(心識論)에 나오는 말인데, 유(有)는 미혹한 생존을 뜻하고, 분(分)은 원인을 뜻한다. 끝없이 되풀이하는 미혹한 생존의 원인이 되는 미세한 의식[존재의 근거가 되는 근본식]이란 말이다. 즉, 과거와 현재 및 미래 등의 삼세에 걸쳐서 생존의 원인이 되는 식(윤회의 주체)을 유분식이라 했다.

    바왕가는 일반적으로 ‘잠재의식’으로 불리는 ‘최소 단위’의 마음으로,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마음으로 주로 잠잘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잠재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연속체, 존재지속식 등으로 삶의 동일성을 유지해 주는 미세한 마음을 뜻한다.

    <아함경>에 의하면, 유정(有情)은 업을 소유하고, 업을 상속하고, 업을 태(胎)로 하고, … 선악의 업을 지어서 그것을 상속한다고 하고 해서 12연기의 윤회유전(輪回流轉)을 말했다. 이 윤회 유전의 주체에 대해 부파불교에서는 각각 명칭이 다르다. 유분식(有分識, 잠재적―근본상좌부, 남방상좌부), 근본식(根本識―대중부), 종자식(種子識) 등 여러 가지로 불렀다.

    남방 상좌부의 붓다고사(불음)는 “붓다는 유분식에 들어감으로써 반열반에 들어갔다”고 했다. 즉, 붓다는 중생이나 개미, 벌레까지 포함하는 보통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유분식을 통해 수명을 마쳤다고 설명함으로써 붓다고사는 붓다의 마지막 순간을 신비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근본상좌부에서는 유분식(有分識), 곧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끊임없이 상속된다는 오온상속설을 주장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간존재는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구성요소는 실재한다고 본 것인데, 이 역시 궁극적인 실체(實體)가 있다는 말이어서, 결국 무아론[오온개공]에 반대되는 말이라 하겠다.---→오온상속설(五蘊相續說) 참조.

 

   

*유분심(有分心=有分識, 빠알리어 바왕가찌타(bhavanga-citta)---주로 남방 상좌부불교의 심식론(心識論)에 나오는 말이다.

    유분(有分, bhava-anga)이란 ‘유(有-존재)의 작용을 하는 부분’이라는 의미이다. 유분(有分, bhava-anga)을 분해하면 bhava는 살아 있는 것이고, anga는 연결해 주는 부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양한 인식들의 사이에 일어나는 연결이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 이 유분심이 생각하는 문(門)이 된다. 유분심이 변화해서 생각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한문의 '유분(有分)'은 직역이지만 적절한 번역이다.

    유(有)는 미혹한 생존을 뜻하고, 분(分)은 원인을 뜻한다. 끝없이 되풀이하는 미혹한 생존의 원인이 되는 미세한 의식[존재의 근거가 되는 근본식]이란 말이다. 즉, 과거와 현재 및 미래 등의 삼세에 걸쳐서 생존의 원인이 되는 식(윤회의 주체)을 유분식 혹은 유분심이라 했다.

    유분(有分)이란 사람이 보거나 듣는 등의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 순간, 소위 생명으로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그렇지만 생명으로서 연결해 가는 마음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등의 모든 작용을 하지 않는 순간이더라도 그 사람은 죽지는 않는다. 그것이 죽었다고 한다면 마취한 것만으로 사람이 죽은 것이 된다. 전신이 마취돼 있는 때는 꿈도 꾸지 않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그 때에도 마음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유지심(存在維持心) 혹은 존재지속식(存在持續識)이라고도 한다.

    그 때에도 어디서 정보를 받아들일 때까지 생멸을 되풀이하면서 마음은 연결되어 간다. 그 마음을 유분심(有分心)이라 한다.

    유분이란 이와 같이 사람이 보거나 듣는 등의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 순간을 말하고, 소위 생명으로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를 말한다. 그렇지만 생명으로서 연결해 가는 마음을 유분심(有分心)이라 한다.

    죽는 생명이 다음의 순간에 새롭게 태어난다. 사(死)와 다음의 결생(結生)은 빈틈없이 연속하고 있다. 앞의 찰나는 사(死)이고 다음의 찰나는 결생(結生)이다. 결생심(結生心)이 생겨나면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으로서 성장해 간다. 그 생명이 결생한 마음은 일생동안 유분(有分)이라는 작용을 한다. 유분심(有分心)이란 특별히 무엇을 인식하지 않는 때에 일어나는 마음이다. 요컨대 하나의 인식과 또 하나의 인식의 사이를 유분심(有分心)이 찰나마다 생멸하면서 연결해 주는 것이다. 마음이 기능하지 않는 순간은 없는 것이다. 일단 태어나면 그때부터 무엇을 인식하든 인식을 이루는 기본적인 마음은 유분심이 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과학적 근거는 확인할 수 없다. 더구나 붓다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며, 이런 존재를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부파불교시대 아비담마에서 생겨난 이론인데, 오늘날에 있어서 현대과학은 기억의 저장소는 뇌라고 보고 있다.

   또한 「재생(再生), 업(業) 혹은 전생(前生)의 기억」 등과 같은 다양한 불교교리를 설명하는데 전제가 되는 바왕가가 지니는 잠재의식적 생명 흐름의 근본적 의미를 서구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충분히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바왕가의 마음(bhavanga citta), 결생심(結生心), 사몰심(死沒心),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자와나(빠알리어 javana, 速行), 의문(意門, 빠알리어 manodvara) 참조.

     

*유상(有想)---상념ㆍ생각ㆍ관념을 갖고 있는 것, 혹은 감각ㆍ감상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는 번뇌와 망상이 있는 상념(想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상이고, 일체의 상념이 없는 것이 무상(無想)이다. 하늘 가운데 무상천(無想天)과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을 제외한 그 나머지를 모두 유상천(有想天)이라 한다.

    

*유상교(有相敎)와 무상교(無相敎)---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삼법인(三法印)에 대해 이견이 생기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가 유위법인 오온(五蘊)을 중심으로 교설을 펼치는데 반해 대승불교는 유위법인 오온뿐만 아니라 무위법인 열반까지를 포함시켜 교설을 펼치고 있다. 즉, 대승불교는 유위와 무위를 통틀어 광범위한 개념으로 법인(法印)을 삼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삼특상(삼법인)은 중생을 지배하는 결정적 법칙이다. 무명(無明)에 휩싸인 중생의 오온은 무상과 무아, 고를 수반한 채 생로병사를 겪는다. 오온은 존재하지만 무상이고 무아이고 고이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유위법인 오온을 통찰해 무상(無常)을 깨달으면 위없이 자유로운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이루고, 무아(無我)를 깨달으면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공해탈(空解脫)을 이루며, 고(苦)를 깨달으면 더 이상 구할게 없는 무원해탈(無願解脫)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삼법인을 오온에 속하는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승은 무상ㆍ무아ㆍ고 거기에 더해서 열반까지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삼법인이든 삼특상이든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의 법을 공(空)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교리에서는 오온 그 자체가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어떠한 법칙도 진실할 수 없다. 눈병으로 인해 일어난 허공의 무늬들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인다 해도 실제에 있어서 허공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온 자체가 실제가 아닌 공이므로 당연히 오온에 따른 어떠한 법칙도 실제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공하므로 무상도 공하고 무아도 공하며 고도 공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열반마저도 공하다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 일체의 모습은 전부 허깨비 같은 존재들이어서 무상하지도 항상 하지도 않으며, 실체가 있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또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

    대승불교의 이 같은 논리는 비단 삼법인에 관한 내용뿐만이 아닌 초기불교의 모든 교법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한다. 대승에서는 제법의 공성을 파악하면 삼법인만이 아닌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 업(業), 사과(四果) 등의 제반 진리들도 실체로써 존재 할 수 없게 된다고 설한다. <금강경>에 어떤 법도 얻은바 없는 것을 이름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한다는 구절이 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이 확고부동한 진리는 아니며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은 얻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기불교는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삼법인을 비롯한 12연기와 사성제 등의 모든 이법을 확인하고 이를 진리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공이라는 명제 하나를 깨달으면 삼법인ㆍ12연기 등의 법칙도 실제의 모습이 아니어서 얻었다라고 할 만한 내용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꿈속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여인은 본래 허구이므로 만난 적도 헤어진 것도 없는 것처럼 일체의 존재들이 공하다면 비록 수행을 통해 법칙을 발견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공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만 중생들이 오온을 비롯한 일체의 법이 공하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무상하다느니 항상 한다느니 괴롭다느니 즐겁다느니 하는 분별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오온을 관찰할 때 초기불교처럼 무상과 무아와 고를 관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오온이 실재하지 않는 공임을 관찰해 무명을 타파하고 삼법인마저 뛰어넘을 것을 강조한다. 오온이 연기된 존재라면 오온은 실재가 아니며 오온이 실재가 아니라면 무상ㆍ무아ㆍ고ㆍ열반 등의 법인과 특상도 실재가 될 수 없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가 삼법인을 무시하거나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이와 같은 교설을 수용은 하되 대승불교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과정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불도를 닦는 보살은 삼법인(삼특상)을 진리로 삼되 종국에 가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진리를 유상교(有相敎)라 하고 대승불교의 진리를 무상교(無相敎)라 한다. 유상교란 확인하고 얻을 만한 법칙이 있다고 보는 가르침이고, 무상교란 확인하고 얻을 만한 법칙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의 삼법인(삼특상)은 범부들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진리였다. 범부들의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세간은 무상이며 무아이며 고라고 설하는 초기불교의 교설이 훨씬 합리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자칫 관념론에 빠지기 쉬운 약점을 지닌다. 오온을 관찰 할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무상과 무아와 괴로움이지 공은 아니다. 오온을 관찰 할 때에 삼법인은 확인하기 용이해도 공은 확인하기 어렵다. 공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깨달음의 영역이지만 과연 공을 어떻게 체득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초기불교만큼 그 방법을 흔쾌히 답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오온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수행보다는 철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분별로 인해 나타나는 허망한 것이므로 분별을 타파하면 일체가 공해져 존재의 그물에 걸려 장애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한쪽에서는 삼법인을 궁극적 진리로 가르치고 한쪽에서는 공을 궁극적 진리로 가르친다. 똑같은 좌선이지만 한편에서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라 하고, 한편에서는 분별심을 타파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라고 한다. 또한 초기불교를 가르치는 도량에서는 제법의 생멸을 강조하고 대승불교를 가르치는 쪽에서는 제법의 불생불멸을 가르친다. 삼법인을 결정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공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불자들은 혼란해 한다. 그 접합 점을 찾아야 할 때다. - 이제열

    

*유순(由旬, 빠알리어 요자나/yojana)---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서 확실한 거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60~70km), 대유순 80리, 중유순 60리, 소유순 40리의 세 가지가 있다.

고대 인도에서 시간의 최대단위는 겁(劫)이고, 거리의 최대 단위가 유순이었다.

   

*유식(唯識, 산스크리트어 비지냐프티 마트라타<vijnapti-matrata)---비지냐프티(vijnapti)는 우리들의 인식되어지는 상(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표상(表象)을 말한다. 마트라(matrata)는 다만ㆍ뿐을 나타내며 -ta는 추상명사 적인 접미사이다.

     유식(唯識)이란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는 사상이다. 유식이란 단지 표상(表象)이 있을 뿐이고 외계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단지 표상만을 안다는 것은 동시에 표상을 초월한 입장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꿈속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것이 모두 꿈에 관한 의식의 소산으로서 꿈에서 깨었을 때 그런 것들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유식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먼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심식(心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두 단계가 많은 논서에 서술돼 있다.

   유식(唯識)이란 말은 오직 식(識), 알 뿐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차별 현상 일체는 오직 인식하는 마음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제각각 알고 다르게 경험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동일한 사건이나 대상조차 서로 다르게 알고 다르게 경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아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내면으로는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견(我見), 아치(我癡), 네 가지 자아의식을 자각하고, 밖으로는 연기적 관계성을 자각해야 한다. 자아의식이라는 색(色) 안경을 연기성이라는 공(空) 안경으로 바꾸어 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유식이 현대적 해석으로는 일종의 심리학이자 뇌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식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의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인데,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미륵(마이틀레야)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위빠사나 삼마지(毘鉢舍那三摩地) 중에서 영상(影像)은 이 마음(心)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둘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식의 대상[소연(所緣)]은 오직 식(識)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위빠사나(毘鉢舍那, vipasyana, 觀)는 요가(yoga) 실천법의 한 종류이다. 이처럼 요가 실천의 체험을 묘사하는 가운데 유식(唯識)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요가를 닦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자각적(自覺的)인 체험이야말로 유식설을 형성한 내면적인 원동력이었다. 그리하여 유식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본래 공적함을 얘기 하는 것, 즉 마음이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하고 일체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다고 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들이 유식설을 상징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그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덤덤하게 보던 사물도 이제 심미안을 갖추고 바라보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국보 몇 호라고 하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떠들어도, 보는 사람이 그걸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불교사상이 ‘모든 건 마음이 만들었다’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따라서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주관(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환경인데도 어떤 사람은 좌절해서 빗나간 인생을 사는 데 비해, 다른 어떤 사람은 역경을 헤치고 더욱 늠름하게 살아나가기도 한다. 이 때 하는 얘기가 바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모든 것에 다 비관적인 느낌밖에 일어나는 게 없지만,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모든 역경이 자신을 단련시키는 훌륭한 교육의 현장이 된다. 이러한 유식학은, 마음의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하려는 데에서 시작했다.

    제8식 아뢰야식은 잠재의식의 자리, 모든 업(業)을 종자 형태로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수행할 때 제6식이 아닌 제8식에 정면승부 걸어 이러한 생각을 불교철학으로 더욱 승화시킨 것이 유식사상이다. 유식학파에서는 제8식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식(識)은 제6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고, 몸 전체로 촉감을 느낀다. 이러한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5가지 인식기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두뇌이고, 이것이 제6식이다. 이 6식 뒤에 제8식(아뢰야식)인 잠재의식이 놓여 있다. 이 제8식은 모든 업(業)을 ‘종자’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인식은 사실상 이 제8식을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은 객관적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의 제8식이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마음, 곧 제8식이 만들었다는 주장이고, 서양철학으로 말하자면, 불교의 인식론이고, 일종의 ‘관념론’이다. 이 주장에는 찬반의 논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식학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정면으로 승부해야 할 대상은 우리의 잠재의식인 제8식이라는 것이다. 오늘 기필코 공부하겠다는 서원이 내일의 물거품이 되는 이유는 제6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잠재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있는 먼지를 털어 내야 비로소 지혜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유식학파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다.

    그리고 유식설을 받드는 사람들을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yogacar-a)’ 즉 유가사(瑜伽師)라고 불렀다. 따라서 그들 학파를 보통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한다.---→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식사상(唯識思想) 참조.

    

*‘유식(唯識)’ 그 적절한 예---제목 <마음으로 보는 아름다움>

   어느 현명한 왕이 여러 철학자들과 왕궁의 테라스에 앉아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뜰에서는 왕자와 고관의 아들들이 놀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충직한 하인을 불러 보석이 촘촘히 박힌 모자를 주며 말했다.

    "이 모자를 저기 뛰어 노는 아이들 가운데 네가 보기에 가장 잘 생기고 아름답게 보이는 아이에게 씌워 주거라"

    모자를 받아든 하인은 가장 먼저 왕자에게 씌워 보더니 다시 벗겨 말쑥하게 생긴 고관의 아이에게도 씌워 보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는 계속 값진 옷을 입고 있는 여러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모자를 씌워 보았지만 그곳에 있는 어느 아이 하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

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모자를 씌웠다. 그가 보기에 옷은 누추하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에게 그 모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자를 씌운 채 아들을 왕에게로 데려갔다.

    "폐하 모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는 송구하게도 소인의 자식인 듯하옵니다."

     그러자 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철학자들에게 말했다.

    "여보게들, 잘 보았는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눈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라네."- 이 마음이 바로 유식(唯識)이다.

            

 

*유식론(唯識論-책 이름)---인도 유식론 논사 세친(世親=천친/天親)이 지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의 별칭이다. 6세기 중엽 동위(東魏, 534년 ~ 550년)에서 인도 출신 학승 반야유지(般若流支)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번역해 책 이름을 이렇게 붙였다. 1권으로 된 이 논은 의식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교리를 논쟁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식론(唯識論)과 심리학(心理學)---→‘심리학과 유식학’ 참조.

 

*유식무경(唯識無境, 산스크리트어 vijñapti-mtrat)---존재하는 것은 단지 정신활동 뿐이고, 나무나 돌 등과 같은 외적(外的)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이다. 유식무경에서의 유식이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유심(唯心)과 같은 말로서 인간의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유식무경의 경(境)은 일체유심조에서 일체(一切)와 같은 말로서 의식외부의 사물을 말한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와 유식무경은 같은 맥락의 말이 된다. 다만 유심무경을 해석함에 유의할 점이 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 “오로지 식만 있고 경은 없다”고 하는 말이지만 결코 외부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인 사물들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주변에는 비슷하게 많은 대상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일까?

   주변에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특정한 대상만 마음에 끌리는 경우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대상일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인식의 결과를 가질 수 있다. A는 좋아하는데, B는 그걸 싫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같은 대상일지라도 인식주관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이 그렇게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그렇게 결정돼 있지 않다,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말이다.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돼있다면 누구나 동등하게 인식해야 하며, 항상 같은 인식의 결과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상이 실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서, 우리들의 인식주체인 심식의 상태에 따라서 그 대상의 모습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갑순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A는 그녀를 좋아하지만 B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식작용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대상보다 심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직 심식만이 있고,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 유식무경이다.

   대상이 없다는 것은 실지로 눈앞에 보이고 있는 사물이나 인식되고 있는 정신작용의 대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하지 않다,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무경(無境)’이다.

   대상이 없다는 것은 대상의 실질적인 존재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하는 그대로 현존(現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식(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대상은 그 자체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심식의 인식작용에 의해서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정해진 대상은 없고, 인식되어지는 것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심외무법(心外無法),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참조.

 

 

*유식(唯識) 4분설(四分說)---4분이란 유식학에서 인식의 성립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다. 즉, 심(心)과 심소(心所)의 작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우리가 사과를 본다고 가정할 경우, 안근(眼根), 즉 눈의 망막에 사과의 상(像)이 비쳐지게 되는데, 이것을 상분(相分)이라 한다. 이 상분은 다시 뇌의 시각중추에 가서 비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인식주체인 견분(見分)이다. 그리고 마음속 기억창고[아뢰야식] 속에는 과거에 저장해 둔 사과의 상(像)이 있는데, 이것을 자증분(自證分)이라 한다. 이 자증분을 끄집어내서 견분과 비교함으로써 견분과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한다. 이때 확인 작업을 하는 주체를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 한다. 여기서 증자증분은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인식주체를 마음이라고 한다. 이처럼 유식4분설은 마음을 네 가지 존재 영역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참조.

    

 

*유식사상(唯識思想, 산스크리트어 Vijnapti-matrata)---유식(唯識)의 산스크리트어 표현은 vijnapti matrata이다. matrata 는 only 라는 뜻이고. vijnapti는 vijnana에서 온 말이다. vijnana는 식(識)이다.

   불교는 모든 중생을 위한 종교이고, 인간중심 종교이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리내용도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간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진여성(眞如性) 등 깊은 성품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유식사상은 외계(外界-外境)에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만 심식(心識)의 투영이며, 심식만이 실재한고 봤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이 바로 유식의 근본 대의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유식학이란 불교에서 마음의 역할과 구조기능, 마음현상을 밝히는, 불교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심리학일 것이다.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선구적인 유가사(瑜伽師, 요가수행자)들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자각한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 vijñãna)일 뿐이라는 지각이 ‘유식(唯識)’이고, 이 유식에 바탕 해 현상계의 모든 것은 마음을 반영하는 표상(Vijñapti)에 불과하므로, 오직 표상식(表象識) 뿐이라는 명제가 이 학설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즉, 외계의 존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론사상이다. 이러한 유식학은, 마음의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하려는 데에서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유식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식학의 목적은 제8 아뢰야식을 정화해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중관파(中觀派)에 의해 주장된 공사상(空思想)의 불충분한 점을 보충하는 한편 중관파와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그리고 유식은 유가행(瑜伽行)이라는 수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유식유가행파라 불린다. 즉 요가의 실천(瑜伽行)이 이 학파의 성격을 특징짓는 명칭이 된 것이다.

   요가(yoga)라는 것은 인도에서 옛날부터 행해진 정신통일의 실수법(實修法)이었다. 요가라는 말이 특정한 실수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기원전 3∼4세기경에 성립된 우파니샤드 때부터라고 한다. 요가의 실수법에는 다양한 방법이 보이지만 대체로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조절해 명상에 이르는 것이다.

    유식사상을 추구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의 소의(所衣)한 경전은 <화엄경> ‘십지품’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가르침이었다. 유식학파는 <화엄경> 유심설의 직접적인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의경전이 <해심밀경(解深密經)>이다. 깊고 비밀스러운 법의 이치를 풀어낸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해심밀경>에서는 이러한 법의 이치, 곧 존재원리와 수행방법을 설하고 있다. 즉, 이 경의 ‘분별유가품’에서는 유가행(瑜伽行)의 실천방법을 설하면서 사마타(奢摩他, ś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a-비발사나/毘鉢舍那)의 지관(止觀)을 닦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다. 또 ‘지바라밀다품’에서는 보살이 닦아야 하는 10가지 수행단계를 설하면서 이 과정을 모두 이수해야 보살도가 성취된다고 했다. 그리고 10바라밀에 대해 설하면서 보살이 10바라밀을 실천해 큰 원력으로 중생들을 모두 지혜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했다.

   유가행(瑜伽行)이란 호흡을 조절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등의 지관(止觀;선정과 지혜) 수행과 관상(觀想) 등을 통해 바른 이치[正理]와 상응(相應)하려고 하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유가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아뢰야식이라는 새로운 심식(心識)과 이에 따른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일체의 존재는 심식의 변전이며, 오로지 심식만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 유식사상이다. 유식학은 수행방법으로서 유가(瑜伽-yoga)를 중요시하므로 유가행파(瑜伽行派) 또는 유가파라고도 한다.

   이러한 사상의 맹아는 이미 초기불교에도 있었지만, 부파불교시대에 더욱 논리화됐다. 붓다 교의를 보다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소승교리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해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기 위해 인간의 심성론이 대두하게 됐다. 이것이 AD 4세기경에 나타난 유식학(唯識學)이다. 이 유식학의 이론적인 체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중관파(中觀派)와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학파를 형성한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논사들이었다. 미륵(彌勒, Maitreyanatha, A.D 270~350)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등을 지어 그 학설을 발전시켜 사실상 유식학파 시조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유식종 불교의 주불은 미륵불이다.

    미륵의 제자 무착(無著, Assanga, AD 310~390)은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저술해,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 의식구조에 대한 조직적인 학설을 정립했다. 특히 무착(아상가)의 동생인 세친(世親, Vasubandha, 320~400)은 미륵과 무착의 논서들을 주석하면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등의 많은 저작을 통해서 유식학을 집대성함으로써 마음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불교적 언어로 표현했다. 이후 유식학은 인도는 물론 중국을 거쳐 한국에도 도입됐으며,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연구됐다.

   그 후 유식학파는 세친(世親)을 계승한 진나(陳那, 480~540) 계통과 덕혜(德慧, Gunamati,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와 안혜(安慧, Sthiramati, 6세기)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 530~561, 다르마팔라/Dharmapāla), 법칭(法稱, 7세기)이 계승했다. 특히 6세기 호법(護法, 530~600)은 이론과 실천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담은 논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저술해 아뢰야식의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이 유파의 학설은 진제(眞諦, 499~569)에 의해 중국에 전파돼 섭론종(攝論宗)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호법의 제자 계현(戒賢, śīlabhadra)은 호법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뒤를 이어 나란타사를 총괄했으며, 현장(玄奘, 602-664)의 스승이었다. 630년 당 현장이 그곳에 이르러서 계현에게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비롯해 여러 논서를 배웠다고 한다.

   유식학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뉘는데, 제1기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의 유식학이고, 제2기는 세친(世親)의 유식학이며, 제3기는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의 10대 논사의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이 주체가 돼 삶의 현상을 창조한다는 대승적인 학문이며, 동시에 인간의 심성을 가장 세분화해 설명해 주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 사상의 핵심을 보면,

    • 번뇌로운 마음을 중심으로 한 선악의 개념과 윤회하는 중생의 심성을 설명하는 학설,

    • 청정무구한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 진여심(眞如心)을 설명하는 학설,

    • 선악의 범부심을 정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추구하는 보살도 수행을 설명하는 학설이다.

    • 용수(龍樹)의 중관사상 또는 공(空)사상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유식학파는 종파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됐다. 비록 종파로서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됐지만 그 사상은 불교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유식학을 몰라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유식학은 상당히 어려운 교의이다. 교학과 함께 실참 수행도 함께 해야만 접근 가능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경전에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고 마음이 고뇌하면 중생도 고뇌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마음이 생기면 여러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여러 법이 멸한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유식사상과 상통한다.

   그런데 보다 대승적인 유심사상이면서 유식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화엄경>의 유심사상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마음은 화가나 공예사와 같이 갖가지 오온(五蘊)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오온은 몸과 마음의 체성과 작용이 집합해 이루어진 인격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인격체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심위법본(心爲法本)]. 이와 같이 유식학은 <해심밀경>ㆍ<유가사지론> 등의 만법유식(萬法唯識) 사상과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유식사상의 중요한 세 가지 개념은 종자, 훈습, 유가행이다.

유식학의 소의경론(所依經論)으로는 6경 11논을 든다. 그러나 다 번역된 것이 아니고, 이 중에서 유식학의 근본경전(所依經典)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 <밀엄경密嚴經>, <보살장경菩薩藏經> 등이 유식에 관한 경전이다. 그리고 인도에서 찬술된 주요 유식 논서로는 미륵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무착의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세친의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십지경론(十地經論)〉, 호법 등의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이 있다.---→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 훈습(熏習, 산스크리트어 vāsanā) 참조.

 

 

*유식사지(唯識四智)---불과사지(佛果四智)라고도 한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목적은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려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대장경을 손에 넣고 쥐어짜면 남는 것은 마음 심(心)자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잡아함경>엔 “마음은 일체법의 근본이 된다.”라고 했으며, <증일아함경>엔 “마음이 번거로우면 중생이 번거롭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인간의 마음 현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깊이 분석한 부파가 유식불교이다.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는 인간에게 영원불멸하고 절대적인 것이란 다만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유식학은 진실 된 마음의 구조를 상세히 밝혔다.

    유식학은 불교사상 중에서 특히 이론적인 학문의 성질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데, 유식학파의 교리에 의하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수행단계가 수행5위(수도5위)이다.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도위(修道位). 구경위(究竟位)라고 하는 다섯 단계를 거침으로써 중생의 마음은 차츰 부처의 마음으로 변하게 돼 마침내 구경위에 이르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수행의 과정을 거친 결과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란 중생의 업식(의식)이 맑아지면 지혜로 바뀐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서로 관계해 연기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범부의 8가지 의식이 변해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의 4지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지(四智)는 부처님이 가지고 계신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즉, 번뇌에 오염된 8식(八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네 가지 청정한 지혜이다. 유루(有漏)의 8식(識)을 통해서 얻는 무루(無漏)의 4종 지혜라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 가장 심층의식으로 불리는 제8식 아뢰야식이 정화돼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심층의식이 지혜로 바뀜으로써 나머지 의식도 지혜로 바뀌게 되는데, 제7식 말나식이 정화돼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뀐다. 편등성지란 자아의식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대아적(大我的) 지혜이다.

     그리고 제6 의식이 정화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고, 이어서 안 ․ 이 ․ 비 ․ 설 ․ 신 등 전5식(前五識)이 정화돼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뀌는데, 이는 실제 행동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모두 지혜롭다는 이성적 지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의 8식은 현상일 뿐 그 본성은 결코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인데, 이것이 전의(轉義)에 의해 번뇌로 오염된 식(識)이 청정하고 분별이 없는 지혜로 전환된다고 하며,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가 곧 유식교학의 근본취지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해서 번뇌로 오염된 의식이 정화돼 부처님의 지혜로 전환한 네 가지 지혜를 유식사지(唯識四智) 혹은 불과사지(佛果四智), 또는 사지보리(四智菩提)라고 한다.

    이렇게 번뇌에 오염된 8식이 정화돼 4지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유식실성(唯識實性)이라고 하는 마음의 본체인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실성이란 유식학에서 마음의 체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유식의 실성은 진실하고 변화가 없는 진여성(眞如性)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와 깨달음을 유지하는 불성(佛性)에서 발생하는 지혜가 사지(四智)로서, 곧 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이다.

 

 

    1)대원경지(大圓鏡智)---대원경지는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무명(無明)을 모두 제거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지혜이다. 즉, 오염된 유루(有漏)의 제8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진여본성이 드러난 청정한 지혜란 말이다. 비추어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아뢰야식에서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이 소멸돼, 한 점의 티끌도 없는 대원경(大圓鏡)처럼 된 상태로서, 여기서 ‘대(大)’라 함은 시간 ․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원(圓)’은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비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우주 전체가 대원경처럼 변화돼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듯이,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것을 아는 원만한 지혜이다.

    이것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거울에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쳐 모자람 없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며, 자신과 진여법계가 하나가 됨으로써, 이 지혜는 마치 크고 둥근 거울에 모든 사물의 영상이 있는 그대로 환하게 비치듯이 모든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이타적인 지혜[보리(菩提)]로서 그 모습[경상(境相)]이 우매하지 않고, 체성과 형상이 모두 청정하고 원만한 덕성을 지니게 되며, 이러한 공덕을 중생과 보살들에게 베풀어주는 지혜이다. 즉, 만덕(萬德)을 원만하게 구족해 모든 법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을 말하는데, 불과(佛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지혜이다.

         ※잡염법(雜染法)---아뢰야식은 모든 잡염법의 저장소 역할을 하며, 윤회의 주체이다. 잡염법은 허망 된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그 반대의 청정법(淸淨法)은 진실 된 원성실성을 말한다.

  

    2)평등성지(平等性智)---오염된 제7 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이다. 즉, 유루의 제7식을 전환해 얻는 무루(無漏)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여기서 평등한 성품이란 진여(眞如)를 말하며, 진여는 체성이 평등해 일체법에 두루 하므로 평등성이라 한다. 또한 지혜가 그것을 반연(攀緣)하므로 평등성지라고 한다. 말나식에서 자아집착 작용에 의한 모든 차별심이 소멸돼 일체를 평등하게 보며,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제도 활동을 하게 된다.

    제7 말나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해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등성지는 일체의 법과 자타의 유정(有情)들을 모두 평등하게 이익을 주는 대자대비의 지혜이다.

  

    3)묘관찰지(妙觀察智)---오염된 유루의 표면의식인 제6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무루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실상을 잘 관찰해 자유자재로 설법을 베풀어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는데 사용하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즉, 묘관찰지는 중생의 근기(根機)를 알아서 불가사의한 힘을 나타내고 훌륭하게 법을 설해 모든 의심을 끊게 한다.

    통달위(通達位)에서 그 일부분을 얻고 불과(佛果)에서 전체를 성취한다. 묘(妙)는 불가사의한 힘의 자재(自在)를 말하고, 관찰은 모든 법을 관찰해 정통하는 것이다. 의식에서 개별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상태가 변화돼, 모든 사물의 자체상[自相]과 보편적인 특질[共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즉, 묘관찰지는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의 자체에서 나타내는 자상(自相)과 서로 의존하고 상부상조하며 공동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공상(共相)을 무애자재하게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가 있는 수행인은 공덕과 보배를 대중들에게 베풀며 큰 진리를 가르쳐서 모든 의심을 없애주고 큰 이익과 즐거움을 베풀어주게 된다.

            ※통달위(通達位)---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수행 5위(修行五位)에서 제3위를 일컫는다.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되며,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하며, 이는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로서 성인의 지위에 든 것이다.

 

     4)성소작지(成所作智)---불과(佛果)에 이르러 오염된 유루의 전5식(前五識)이 변혁해 이루는 무루의 지혜이다. 즉,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등의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는 지혜이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하므로 성소작지라고 한 것이다. 이 지혜는 모든 중생을 관찰하며 근기에 따라 이익을 주는 지혜로서, 이 지혜는 본심에서 발생하는 원력(願力)에 따라 이타적인 자비의 사업을 성취한다. 즉, 본원(本願)의 해야 할 일을 해 마치는 지혜이다.

 

     그런데 위의 네 가지 지혜는 수행에 의해 점진적으로 성취되느냐, 아니면 단박에 증득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설 가운데 어떤 입장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능변계성(能遍計性)인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통달위(通達位)에서 일부[一分]를 증득하고, 이후의 십지 중에서 점차 닦아서 불과(佛果)에 이르러 그 전체[全分]를 증득한다. 그리고 현량성(現量性)인 아뢰야식과 전5식이 각각 대원경지와 성소작지로 전환되는 것은 성불할 무렵에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구경의 부처님 지혜는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마치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확실히 보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성불이란 이렇게 닦아서 사지(四智)를 구족하게 되고 법신, 보신, 화신의 모습으로 자재해 육도의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를 드리우는 것이다.

        ※능변계성(能遍計性)---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라고 잘 못 보는 것.

        ※현량(現量)---불교의 인식논리학에서는 우리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요새말로 바꾸면 현량은 ‘직관(直觀)’이고 비량은 ‘추리(推理)’이다. 예를 들어 내 앞에서 불이 타오를 때 눈으로 이를 보거나 몸으로 온기를 느끼는 것은 현량으로 통한 것이고, 먼 산에서 연기가 날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불이 났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비량으로 통한 것이다. 현량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고 비량은 ‘생각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다.

 

 

       

*유식삼무성(唯識三無性)---→삼무성(三無性) 참조.

     

*유식삼성(唯識三性)---삼종자성(三種自性)이라고도 한다. 유식학에서는 삼종자성(三種自性)과 삼무성(三無性)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들 학설은 유식학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그리고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에 설명돼 있다. 이러한 원전의 학설을 요약한 것이 세친의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삼십송(三十頌)>이다. <유식삼십론>의 게송(偈頌)을 주석한 것이 <성유식론(成唯識論)>이다. 이와 같이 삼종자성과 삼무성에 대한 학설이 여러 곳에 설명돼 있다. 

   삼종자성의 내용에 의하면, 우리 마음인 식(識)을 떠나서는 외부세계에 따로 진실한 경계(實境)가 없다는 사상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망상된 것, 妄有), 의타기성(依他起性-인연이 만나 일어나는 것, 假有), 원성실성(圓成實性-완성된 것, 實有)이다. 즉, 유식학에서 모든 존재를 존재의 양태에 따라 3가지로 나눈 것이 유식삼성이다. 식(6識)의 상태를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 등 삼성(三性)으로 설명한 것이다.

   모든 법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삼성(三性)은 인식의 범주를 세 가지로 분류했음을 말하는데, 이를 인간에 적용할 경우, 중생의 세 가지 마음의 성품(性品) - 인간성을 말한다.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인간은 아집과 법집 등의 번뇌를 야기하며 생활하는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즉,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 사실은 없는 것인데 착각해서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정유리무(情有理無)를 의미한다. 정유리무란 범부의 망정(妄情)에만 있고 원래 본바탕인 법성(法性) 자리인 리(理)에는 없다는 말이다.

    2) 의타기성(依他起性) - 인간의 정신생활과 그 밖에 있는 외부의 물질계를 포함한 모든 자연계는 유일한 원인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다인(多因)과 다연(多緣)이 집합해 성립했음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즉, 의타기성은 말 그대로 다른 것에 의지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이 이런 것이고, 우리가 보통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다. 다른 말로는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나’라는 존재나 ‘너’라는 존재, 삼라만상이 다 인연 따라서 잠시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존재로 잠깐 가짜로 나툰 것이다[여환가유(如幻假有)]. 이것이 우리 삶의 본래 모습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한 연기법을 유식(唯識)에서는 바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이는 만물이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뜻으로, 사물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성소멸(生成消滅)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의타기성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소리이고, 인연이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 즉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나타내는 유식의 철학관이다.

    3) 원성실성(圓成實性) - 변계(遍計)의 번뇌는 허구성이며, 의타(依他)의 인연이 집합해 성립된 삼라만상도 일시적 존재(假有)이며, 오직 진여성(眞如性)만이 영원한 존재이며, 진실 되고 또 만물의 체성(性)을 설명한 것이라는 말이다.

   원성실성은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난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한다. 즉, 원만성취가 이루어진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모든 것이 평등한 진여 그 자체가 원성실성이다. 말 그대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실다운 성품이라는 뜻으로,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참다운 성품(性品)을 이르는 말이다.

    위의 삼성(三性) 중에서 의타기성이 삶의 본래모습이다. 이 법계가 의타기성으로 보면 생멸변화하는 세계요, 원성실성으로 보면 불생불멸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본 모습대로 보면(변계소집성에 상대해서) 원성실성이고, 본 모습을 왜곡해서 보면 변계소집성이다. 의타기성에서 분별심을 일으키면 변계소집성이 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원성실성이다. 그러니 의타기성이라고 하는 한 가지 삶의 구조를 세 가지로 이름 붙여놓은 형국이다. 그래서 분별을 하지 않고 명확하게 보면 몸도 건강해지고 원성실성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유식학은, 마음의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하려는 데에서 시작했다.

   존재의 삼성(三性)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있다. 밤에 길을 가다가 삼으로 만든 새끼줄을 보고는 뱀인 줄 알고 깜짝 놀라 기겁하는 경우를 상정해 이를 사승마(蛇繩麻)라 한다. 뱀 사(蛇)자, 새끼나 노끈 승(繩)자, 삼 마(麻)자, 사승마란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고집하는 견해를 말한다.

   먼저 뱀이라고 본 경우, 실제로 뱀은 없는데, 착각해서 뱀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 경우 뱀은 변계소집성의 존재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삼을 꼬아 만든 새끼줄이다. 이 삼으로 만든 새끼줄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잘 살펴보면, 새끼줄이라는 별도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삼을 꼬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삼줄은 풀어버리면 삼만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삼줄은 별도의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환(幻)처럼 거짓으로 있는 것이다. 즉, 환각상태에서 보는 꽃[환화(幻化)]과 같이 거짓으로 있다고 말한다. 삼을 특정한 형태로 꼬아 놓은 것에 삼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경우, 삼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삼이 원성실성에 해당한다. 즉, 삼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다. 그것으로 새끼줄을 만들든 다른 무엇을 만들든 간에 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이 원성실성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성실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서 그 자성이 공하면서 또한 묘유이기도 하다. 삼을 진공으로 비유하면 그 삼으로 새끼줄이나 베를 짜는 용(用)은 곧 묘유로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의식인 육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 이렇게 8가지 식(識)인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다. 조건이 갖추어 질 때 존재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서 결국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이식(耳識), 즉 듣는 작용을 보면,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에 대해 듣는 인식이 생겼다가, 소리가 다함과 동시에 듣는 인식도 사라진다. 소리에 의지해서 나타났다가 소리가 다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의타기성의 존재는 개체적인 실체가 없고, 항상 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이 8가지 식(識),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고, 이 의타기성의 근저에 원성실성의 존재인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 이 근본 마음자리를 성품(性品),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自性)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自性)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자성(自性)은 정신의 근원인 것이다.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온갖 그림자는 인식작용(정신작용)이고, 거울은 그림자를 비추면서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을 정신이라 하고, 이 정신의 바탕자리가 자성(自性) - 원성실성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달은 구경의 진리는, 만법은 오직 마음의 지음인 중도라고 했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도 그 교의가 불교의 근본원리인 중도사상에 계합됨을 주장했다. <성유식론>에서는 “아(我)와 법(法)은 있는 것이 아니며, 공(空)과 식(識)은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해서 유식설은 중도교이지 공견(空見)이나 유견(有見)에 집착한 변견이 아님을 밝혔다. 즉, 유식학에서도 중도설을 선양했다. 그 중도사상에 부합하는 이론이 삼성설(三性說)이다.

   이 삼성설은 원래 <해심밀경>이나 <섭대승론> 등 유식계통의 경론에서 설해진 것인데, 화엄종에서는 이를 수용한 뒤 약간 보완해서 화엄일승(華嚴一乘) 교리의 기본이론으로 수립했다. 그런데 삼성의 각각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 원성실성(圓成實性)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원성실성은 현장 스님의 번역이며, 진제 스님은 '진실성'이라고 번역했다. 이 원성실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변하지 않는다는 뜻인 불변의(不變義)와 연에 따라 변한다는 뜻인 수연의(隨緣義)가 그것이다. 또 원성실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표현하는데, 진공은 불변의에 해당하고 묘유는 수연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불변수연이나 진공묘유는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가 된다.

    •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만법이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임시로 존재한다는 뜻인 사유의(似有義)와 실성이 없다는 뜻인 무성의(無性義)가 그것이다. 일체만법은 연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망정이 있다는 뜻인 정유의(情有義)와 참된 도리가 없다는 뜻인 이무의(理無義)가 그것이다. 미혹의 망정은 있지만 진실한 이치는 없다는 말이다.---→삼무성(三無性), 유식삼무성(唯識三無性) 참조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세친(世親, 320∼400)이 4세기경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함께 자신의 유식설(唯識說)을 완성한 저서이다. 유식설이 <해심밀경>과 <대승아비달마경>에서 출발해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을 거치면서 틀을 갖추게 되는데,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여러 서적에 나온 유식설을 30개의 게송(偈頌)으로 표현했다. 563년에 진제(眞諦)가 번역했고, 그 후 현장(玄奘)도 번역했다. 30송 중 앞의 24송에서는 유식의 상태를 밝히고, 제25송에서는 유식의 본성을, 마지막 5송에서는 수행의 단계를 설했다. 다음은 유식 30송 중 제1송이다.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유식은) 아(我)와 법(法)을 가설함으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현상계가 변화하는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저 (가지가지 현상계)는 의식에 의해 변하고, 이 변화의 주체(能變)는 오직 셋[심(心), 의(意), 식(識)]이 있을 뿐이다.」

    아(我)와 법(法)은 원래가 없는 것인데, 이것이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은, 이것을 가정해 설정해 놓았으니까 그러한 것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의 모양(相)과 변화(轉)가 있게 된다. 그러한 것(彼)은 식(識 = 마음)에 의존해 변하는 것[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바, 이 변화하는 주체(能變)는 마음인데, 이것에는 오로지 3가지가 있을 뿐이다. 유식은 원래 부처님께서 오직 마음이 있을 뿐 무아(無我) 무법(無法)임을 설해 주신 이치를 요약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또 현상계의 모든 모습이 변화하는 이치를 아(我)와 법(法)을 가설해 설명하고, 변하는 바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의식(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고, 의식은 심·의·식 삼식(三識)뿐임을 밝혔다. 삼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말나식(末那識), 의식(意識)을 말한다.

    즉, “마음은 마음의 주체와 대상, 즉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마음은 경험을 의미한다. 경험은 또한 다른 말로 앎을 뜻한다. 경험은 경험하는 자와 경험되어지는 대상으로 구성돼 있다. 경험하는 내용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붙이지만 그 근본작용은 항상 경험하고 인식하고 알아가는 주체와 경험되고 인식되고 알려지는 대상의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마음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은 경험이라고 했다. 경험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앎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경험의 시작, 앎의 시작, 근원이 바로 앎의 주체와 앎의 객체로서의 2원화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사윤회 하는 삶을 사는 근본원인이 세상과 우리자신을 알아가고 경험해 가는 우리의 ‘방식’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항상 뭔가를 이해할 때, 나와 너, 또는 나와 나 아닌 것들로 구분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내가 주체가 되고, 나 아닌 것들은 항상 나의 상대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주체적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상대적인 존재, 주인공이 아닌 대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한 마음의 분리작용, '나'와 '너'라고 하는 2원화, 주객의 대립은 모든 인간문제를 만들고 갈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우리들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결국 나를 알아주지 않는 데서 비롯되고,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1송은 '나'는 반드시 '너'와 함께 할 때만이 그 존재가 가능하고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분리가 불가능한 쌍으로 존재함을 설명하고 있다.” - 서광 스님

    

*유식수행 5위(修行五位)---→수도 5위(修道五位) 참조.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세친(世親:320∼400)은 미륵(彌勒)이나 무착(無着)의 저서를 많이 주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의 여러 저서 중 하나이다. 유식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함께 한 짝을 이룬다. 따라서 유식설(唯識說)에 대한 여러 학파의 비평이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해 유식설을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보리유지(菩提流支)가 6세기 초에 번역했으며, 7세기에 현장(玄奘)도 번역했다. <유식론(唯識論)>, <대승유식론(大乘唯識論)>이라 하기도 한다.

 

 

 

*유식학(唯識學)의 개요---불교는 모든 중생을 위한 종교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중심의 종교이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리의 내용도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간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진여성(眞如性) 등 인간의 깊은 성품까지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비롯하며,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에서는 더욱 논리화됐다. 그러나 붓다가 말씀해 놓으신 교리를 보다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아비달마교리만으로는 부족해 더 깊은 인간 심성론이 대두하게 됐다. 이것이 AD 4세기경에 나타난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AD 4세기경 미륵(彌勒, Maitreyanatha, AD 270~350)과 무착(無着, Assanga, AD 310~390) 등에 의해 성립돼 세친(世親)에서 정립됐다. 이 학문은 인도는 물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도입됐으며,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연구됐다.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이 주체가 돼 삶의 현상을 창조한다는 대승적인 학문이며, 동시에 인간의 심성을 가장 세분화해 설명해 주는 불교심리학이다.  

    그 사상의 핵심을 보면,

    • 번뇌로운 마음을 중심으로 선ㆍ악을 포함한 인간 심성을 설명한다.

    • 청정무구한 불성과 진여심을 설명하는 학설이다.

    • 선ㆍ악의 범부심을 정화하는 보살도적 수행을 설명하는 학설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안식(眼識) 등 8종[8식]의 마음으로 분류해 선과 악의 정신계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8종의 마음 가운데, 아뢰야식이 중심이 돼 선ㆍ악의 행동이 나타나며, 그 마음의 종류와 명칭을 보면,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 8식으로 구성돼 있다고 본다. 이 중 8식은 번뇌를 가진 범부심이다. 선행과 악행을 야기하며 동시에 선인(善因)을 조성해 선과(善果)를 받고 악인(惡因)을 조성해 악과(惡果)를 받으면서 인고에 얽매여 윤회하는 마음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유식학은, 마음의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하려는 데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8식설만으로 설명하는 학자도 있고, 9식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 양나라 때 인도에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攝論宗)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9식설을 주장할 경우, 제9식이 아말라식(阿末羅識)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실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진여성과 불성과도 통하며 이를 제9식 아말라식(阿末羅識, 산스크리트어 Amala-vijnana)이라 한다. 아말라식은 무구식(無垢識)이라고 번역하며, 인간의 청정한 마음을 의미한다. 이 청정한 마음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구족돼 있는 마음이며, 모든 진리를 한눈으로 다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대지혜(大智慧)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착한 본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존하고 있으며, 모든 진리와 통할 수 있고, 열반과 해탈을 실현할 수 있는 본성을 항상 보존하고 있다.

    8식설을 주장할 경우에도, 번뇌로운 8식을 정화해 지혜와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고통이 없고 항상 안락한 대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정화는 물론 중생과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도를 수행해 많은 공덕을 쌓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은 번뇌로운 심성을 정화해 본래의 불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대승적인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8식의 성품을 분류하면 선성과 악성, 그리고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으로 분류한다. 이는 선ㆍ악의 상대적인 심성이며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 아집에 사로잡힐 수 있는 번뇌의 심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심성은 영원하고 불변한 번뇌심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시적인 번뇌심으로 본다. 이러한 범부심이 정화되면 이들 마음의 본바탕이며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의 지혜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과 악이 대립되는 마음의 소유자로서 온갖 번뇌를 야기하면서 본래 소유한 참다운 마음을 덮어버린 상태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 논술하고 있는 인간성의 구체적인 것에는 유식학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준유식사상이라 할 수 있는 여래장식(如來藏識)과 불성(佛性)이 있다. 여래장식은 아뢰야식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심성설로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부처님과 같은 여래의 심성을 부장(覆藏)하고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그리고 불성 및 진여에서 나타나는 지혜를 유식학에서는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 4지(四智)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불성론(佛性論)에서 중생들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생들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준다는 것은,

     첫째, 중생들에게 ‘무명의 존재’라는 열등의식을 없애주기 위해,

     둘째, 무지한 사람의 아만심(我慢心)을 없애주기 위해,

     셋째, 허망한 집착을 없애주기 위해,

     넷째, 진실 된 진리에 비방하는 것을 없애주기 위해,

     다섯째, 거짓된 자기에 대한 아집을 없애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주기 위해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는 교설을 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모든 경전이 중생의 무지를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지만, 이들 다섯 가지 법문 중 중생들의 열등의식인 하열심(下劣心)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매우 큰 자각을 불러 일으켜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과 지혜로움을 망각하고 스스로 열등의식을 갖고 남(부처ㆍ보살ㆍ스님)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감히 스스로를 멸시하고 또 나약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항상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의 불성을 계발하는데 정진해야 하겠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성에는 8식과, 8식의 본성이며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 그리고 여래장식과 불성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 설명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표현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논하던 인간 심성론을 이비달마불교에서 부단히 연구하고 탐구해 합리적인 인과사상과 윤회사상 등의 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인간의 심성은 한없이 넓고 깊어서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 과제를 대승불교로 넘기게 됐다.

    그리하여 AD 4세기경 미륵과 무착이 출세해 대승적인 심식설로 개혁하기에 이른 것이 유식학이다.

    무착(無着)은 <해심밀경>의 심의식(心意識)설 등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초기불교에서 주장해 온 6식설에다 제7말나식(末那識)과 제8아뢰야식을 더해 8식설로 논리화했다. 그 이유를 보면, 초기불교의 6식설과 이에 의해 나타나는 심소(心所)로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번뇌의 발생과정과 의근(意根)을 새롭게 설명하기 위해 제7말나식이라는 심성을 시설했다. 그리하여 말나식을 우리 인간의 죄악의식(罪惡意識)의 발생처로 하고, 또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 다음 무착은 제8아뢰야식을 정해 이 심식이 있음으로 인해 모든 심식을 유지시켜주고 생명과 수명도 유지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업력이 아뢰야식에 보존돼 있어 현재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또 미래의 윤회도 가능케 하는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을 8종으로 분류해 모든 정신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와 같이 초기불교의 심식설과 아비달마불교의 심식설에서 진일보한 것이 유식학에서 말하는 8식설(八識說)이다. 그런데 이들 8식설을 설명하기 전에 또 하나의 중요한 학설을 소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심성을, 이른바 심ㆍ의ㆍ식(心意識)이라고 표현하는 학설이다. 이 심의식 사상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심성을 잘 표현해 준 심성설이다. 이 이론도 초기불교에서 비롯되며 아비달마불교에 이어서 유식학 조직에 크게 기여했다.

    대승불교에서는 심ㆍ의ㆍ식을 각각 분리시켜 오늘날의 8식사상으로 조직화했다. 유식학에서 심ㆍ의ㆍ식 사상을 가장 중요시한 경전과 논서는, <해심밀경>을 비롯해 <유가사지론>, <현양성교론>, <아비달마론> 등이다.

     이들 경론에 의하면, 심(心)과 의(意)와 식(識) 등은 그 활동과 역할, 작용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체성도 각기 다르다고 했다. 소승불교에서 대체로 심의식의 체성을 동일하다고 본 것에 대해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 심(心)은 곧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며, 아뢰야식은 정신과 육체활동 등으로 조성된 업력과 일체의 종자(種子)를 능히 집취(集聚)해 보존한다. 그리고 이 식은 일체시(一切時)에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인간이 사는 객관세계도 반연해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 의(意)는 말나식에 해당하며 항상 사량(思量)의 작용을 한다. 사량이린 무아(無我)의 진여성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의 망심을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의(意)는 염오(染汚)의 번뇌를 야기한다고 해서 염오의(染汚意)라 별칭한다. 이 말나식은 심층심리에 속하는 심체로서 내면세계의 진실성을 망각하고 차별심을 나타내며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번뇌를 야기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진리에서 이탈하고 죄와 악을 범하게 된다고 헸다.

    • 식(識)은 6식(六識)을 말하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이다. 이 식들이 활동하는 내용은 항상 요별(了別)하는 작용을 한다. 요별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해 안다는 뜻으로 중생들이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물의 성(性)을 보지 못하고 겉모양(相)만을 보면서 이것저것 구별하는 차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식(識)이라고 하면 항상 대상(境界)이 있어야 하며, 그 대상을 인식하는 상대적인 작용이 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심의식 사상은 초기불교에서 시작해 아비달마불교에서 더욱 발전해서 유식학의 8식 사상 성립에 기초가 됐다. 즉, 심(心)은 아뢰야식을 말하고, 의(意)는 말나식, 식(識)은 안. 이. 비. 설. 신. 의 등 6식(六識)을 말하는 등 심ㆍ의ㆍ식을 각각 8식(八識)으로 나누어 심식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심의식 사상을 모두 번뇌가 있는 염오의 심성으로 봤다는 점이다. 마음에는 번뇌를 동반하는 유루심과 번뇌가 없고 청정무구한 무루심이 있다고 보는데, 위에서 살펴본 심ㆍ의ㆍ식은 모두 유루심에 속한다.---→사자세한 것은 유식사상(唯識思想), 사지(四智), 불성(佛性, buddha-dhatu) 참조.

 

 

*유식학과 심리학---→‘불교 심리학(佛敎心理學)’ 참조.

 

 

*유신견(有身見, 빠알리어 sakkāya diṭṭhi, 산스크리트어 satkāya-drsti)---유신견(有身見)은 오온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살가야견(薩迦耶見)이라고도 하는데, 다음의 분류, 그룹 또는 체계의 한 요소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서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견(見)ㆍ의(疑)의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 즉 6수면(六隨眠) 가운데 견에 속한다.

      ‘사까야(sakkāya)’는 존재를 이루는 몸, 존재하는 몸이나 무더기, 심리학의 전문용어로는 개인과 거의 같으며 오온(五蘊)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딧띠(diṭṭhi)’는 견해, 믿음, 사상, 교리, 주의, 추론 등의 의미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삿된 견해, 사실무근의 사론(邪論)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로는 ‘삿된 견해(邪見)’란 뜻의 밋짜딧띠(miccha-diṭṭhi)와 같은 말이다. 즉, 오견(五見-五利使)의 하나이고, 부정견(不正見)의 하나로서 잘못된 견해이다. 중생이 고정 불변하는 자아(혹은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이고,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이다.

    신견(身見)이라고도 하는데, 물심(物心)이 가화합(假和合)해 성립된 육체를 보고 참으로 나(我)라는 존재가 있다는 집착을 일으키는 잘못된 소견이다.

    무아를 설하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반드시 제거 돼야 할 삿된 견해에 해당된다. 그래서 성자 흐름에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으로서 유신견 타파가 이루어 져야 한다. 이것이 타파되지 않는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을 뿐더러 붓다의 가르침도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 가장 먼저 타파 돼야 할 것이 바로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이다.

    반면에 바르고, 참되고, 훌륭한 견해는 삼마딧띠(빠알리어 sammā-diṭṭhi)라고 하는데, 이 바른 견해(正見)는 도(道)에 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그런데 유신견은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이다. 이러한 유신견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①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② 오온 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③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④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이다. 

    그리고 빠알리어 경전에 나오는 유신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해, 물질[色]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느낌[受]을 … 인식[想]을 … 행[行]들을 … 아는 마음[識]을 자아라고 알아차린다. 아는 마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아는 마음이 자아 안에 있다고, 아는 마음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게 된다(M43).”

     이러한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도 될 수 없다.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족쇄들이 풀리지 않으면 아무리 깊고 미묘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탐ㆍ진ㆍ치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윤회의 고통에 묶어두는 족쇄(samyojana)를 10가지로 들고 있으며, 그 가운데 맨 처음 족쇄가 유신견이다.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는 자아관념이야말로 중생을 중생이게끔 하는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내 몸(색)에 대해서 강하게 ‘나’라든가 ‘내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가 내 몸을 아름답다거나 예쁘다거나 멋있다고 칭송하면 너무 우쭐해지고 내 몸에 고통이라도 생기면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굳이 위빠사나라는 테크닉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주시해서 관찰하면 알 수 있다.” - 각묵 스님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에 찬나(Channa)장로는 위빠사나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견 때문에 수행에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 후 아난다(Ānanda) 존자의 연기 법문에 따라서 명상을 했으며. 전도된 인식을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얻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비구는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면 단멸한다고 믿었다. 사라뿟따(Sāriputta)가 그를 불러 법문을 해주었다. 법문을 들으면서 야마까 장로는 명상 해 해탈을 성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낙담할 필요가 없다. 열과 성을 다해 위빠사나를 수행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유신무해무명증장(有信無解無明增長) 유해무신사견증장(有解無信邪見增長)---<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말이다. 이해하지 않고 믿으면 무명만 자라고, 알음알이를 앞세우고 믿음이 없으면 사견만 자란다는 말이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경계하라는 말이다. 덮어놓고 믿어서도 안 되고, 신심이 없이 알음알이만 내세워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유심(唯心)---유심은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며 여러 가지 불교 사상의 중심에 서 있는 말이다. 그리하여 일체를 오직 마음 하나가 만들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욕계ㆍ색계ㆍ무색계가 오직 마음뿐이라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마음이 근본이 된다는 불어심위종(佛語心爲宗)과 같은 부처님 말씀은 모두 불교의 가르침이 마음 하나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그리고 불교의 수많은 경전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 <법구경>인데, 그 첫 구절에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며 마음이 주인이 돼 마음이 시키나니, 마음으로 악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이 곧 악하게 돼 허물과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고 해서 처음부터 유심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원효 대사는 당나라 유학길 중간에 노숙을 하다가 밤에 바가지 물을 달게 마시고 난 후 깨어나서 그것이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 토악질을 하고 난 후 한 말이,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 아불입당(心外無法胡用別求 我不入唐) ― 삼계는 오직 마음뿐, 만법 역시 마음일 뿐,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고, 별도로 구해 쓸 것이 없으니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그런가 하면 대승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화엄경>에도,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 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이라 했다.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오직 내 마음 이외 어디에 진리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그리고 영명(永明) 선사의 「유심결(唯心訣)」은 유심사상을 잘 나타내는 글이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며, 일체 사물과 모든 일이 다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은 모든 경전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특히 영명 선사의 <유심결>은 유심사상이 고도로 발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변계변공(遍界遍空) 궁창불능복기체(穹蒼不能覆其體) 상조상현(常照常現) 철위불능닉기휘(鐵圍不能匿其輝) 무주무의(無住無依) 진로불능역기성(塵勞不能易其性) 비순비잡(非純非雜) 만법불능은기진(萬法不能隱其眞) ― 법계에도 두루 하고 허공에도 두루 해 드넓은 하늘도 그 당체를 능히 덮을 수 없고, 항상 비치고 항상 나타나서 철위산도 그 빛을 능히 감추지 못하며, 머물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아니해 진로(번뇌)가 그 본성을 능히 바꿀 수 없고, 순수하지도 않고 잡스럽지도 않으며, 만법이 그 참됨을 능히 감추지 못하네.」

    영명(永明) 선사는 이 <유심결>에서 사람들의 번뇌 망상과 탐ㆍ진ㆍ치의 3독도 마음의 본성을 바꿀 수 없고, 팔만사천에 이르는 종종의 많은 법 또한 마음의 본성을 능히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유식학에서는 유식(唯識)과 유심(唯心)을 같은 격으로 사용하며, 유식의 ‘식(識)’과 <화엄경>의 일체유심조의 ‘심(心)’이 같은 마음작용이라고 한다.

 

   

*유심결(唯心訣)---중국 오대(五代)~송(宋)시대의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저술인 <유심결(唯心訣)>은 일종의 가사(歌詞)문학에 속하는 문장이다. 결(訣)은 곧 비결의 뜻으로 유심(唯心) 경지에 이르는 오묘한 방술요법(方術要法)이란 말이니 역시 부(賦)나 사(辭) 등의 형식을 빌려 수행의 요체를 드러내고 아울러 격려를 겸한 의도적 계몽 가사인 것이 <유심결>의 특징이다. 이는 영명 선사의 또 다른 저술인 <심부(心賦)>와 함께 이 분의 더할 데 없이 미려하고 해박한 가사문학의 쌍벽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삼조 승찬(僧璨) 대사의 <신심명(信心銘)>, 영가(永嘉) 선사의 <증도가(證道歌)>, 부 대사(傅大士)의 <심왕명(心王銘)> 등과 함께 불가(佛家)문학의 금자탑 격인 보전(寶典)으로 예로부터 끊임없이 진중돼 내려오고 있다.

    이 <유심결>은 일반 서술문과는 그 근본 성격을 달리하는 글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표현하려는 데 있어선 직역으로는 도저히 그 경직성을 피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었다. 그래서 원전의 내용과 흐름에 손상이 없는 한 의역을 선택함과 동시에 가사가 풍기는 특유의 어감을 나타내고자 자유시율의 형식으로 번역을 시도했다.

 

    

*유심연기(唯心緣起)---흔히 화엄사상을 유심연기(唯心緣起)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법은 오직 한 마음이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다.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말이다. 그리하여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실종생 무법이부조(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畵家)와 같아,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낼 수 있다.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듯, 그 무엇도 (마음은)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마음 따라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능히 이와 같이 깨달으면 그 사람은 참다운 부처를 보리라고 했다[是人則見佛].

    그러나 <화엄경>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다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하는 이 말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세계가 마음의 소산(所産)이라고 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서 자기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변화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오직 마음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하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도중에서 되돌아 온 원효(元曉) 대사의 일화를 상기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원효 스님은 구역질을 했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단적으로 예시하는 일화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깊은 인식은 우리의 자각(自覺)으로부터 시작하고 우리의 자각은 자기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원효 스님은 굳이 중국에 가서 화엄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도중에 되돌아 온 것이다.

 

*유심정토(唯心淨土)---정토(淨土)는 일심(一心)의 현현(顯現)으로서,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존재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자성미타(自性彌陀)라고 해서 내 마음 밖에 따로 아미타불도 정토(淨土)도 없다고 하는 말과 짝을 이룬다. <유마경> ‘불국품’에서, ‘마음이 맑으면 곧 정토’라고 해서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역설했다.

 

*유아(有我)---무아(無我)의 반대말로서 아(我-나)의 실체가 있다는 말이다. 영원불멸하는 ‘나’의 실체가 있어서 죽은 후에도 영혼은 남는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나”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 그리고 비아(非我)로 구분할 수 있다.

    유아(有我)는 가아(假我) 또는 법아(法我)로 나눌 수 있고,

          ※법아(法我)-모든 현상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음을 말함. 제법무아의 반대말.

    비아(非我)는 유아ㆍ가아ㆍ법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의 무상(無常)한 “나”인 유아ㆍ가아ㆍ법아는 실체로서의 아(我)가 아니므로 비아(非我)이라 할 수 있다.

    연기(緣起) 구조로 된 현상계의 일체사물이 상호관계 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해가는데, 이와 같이 변해가는 대상 사물에 대해 그 존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유아(有我)라고 한다. 그리하여 오온(五蘊)이 가합한 것을 자아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을 유아론(有我論)이라 한다.

    한편 변화하는 가운데 그 모습이 늘 바뀌므로 고정 불변의 참 모습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아, 이를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유애(有愛, 빠알리어 bhava-taṇhā)---갈애(渴愛)의 종류를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욕애(慾愛)란 감각적 욕망을 말하고, 유애는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며, 무유애(無有愛)는 허무 혹은 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인 욕애는 감각적 대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욕계 중생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즉,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등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가지려는 욕심을 말한다.

그리고 유애(有愛)란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개체 존속의 욕망, 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이며, 내세까지 이어지는 생존에 대한 욕망을 일컫는 말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인 유애는 상견(常見)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상견이란 중생은 영원하고 육신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자아는 불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인들에게 상견은 뿌리 깊지 않지만 비불교인들은 상견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적 해방에 큰 장애가 된다.

    이에 비해 무유애는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무유애는 유애의 뒷면이다. 불교는 유애와 무유애 모두 버리고 이를 초월하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곧 해탈이다. 즉, 해탈자는 존재하고자 하는 마음도,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는다.---→상견(常見) 참조.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줄여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을 제외한 중생이 - 육신을 가진 자가 이를 수 있는 열반을 말한다. 수행을 통해 이승의 번뇌는 끊었으나, 아직도 과거업보로 받은 몸이 멸하지 못한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한다. ‘유여’란 의존해야 할 육신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 즉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있는 상태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여의(餘依)를 대승불교와 같이 번뇌로 보지 않고 육체로 봤다. 그러므로 육체가 생존해 있으면 아무리 마음이 정화돼 번뇌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 유여의열반(裕餘依涅槃)이라 한다.

   헌데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함에 있어서 소승과 대승의 주장이 다르다. 소승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다 없어진 상태라고 본다. 따라서 소승의 경우, 유여열반은 번뇌는 다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대승에서는 열반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덕을 갖추지 못한 소승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한다.

    즉,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두 가지에 있어서 전자는 생존 중에 들어가는 단계로 깨달음은 이루었지만 마음의 여러 가지 활동이 완전히 정지되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를 말하는 반면, 후자는 깨달음을 얻은 뒤 사후에 비로소 도달하는 완전한 경지를 일컫는다. 번뇌의 소멸로 아라한(阿羅漢)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를 말하는데, 이 상태는 일반적으로 살아있을 때, 체험된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상태가 유여의열반이다. 아직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가 남아있는 열반이란 뜻이다.

    따라서 유여열반은 깨달음을 성취한 때로부터 죽음을 맞을 때까지의 열반을 가리키는데, 이를 유여열반이라고 하는 이유는 비록 열반을 성취하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한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열반의 힘을 성자에게 다가오는 자극을 마치 연꽃이 빗방울을 흘려 떨어뜨리듯이 떨어뜨려 내면(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긴 해도 성자가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자극을 받는 것만은 사실인데, 이 문제는 성자가 죽음(반열반)을 맞는 순간 해결된다. 이 때문에 성자의 죽음을 무여열반이라 한다. 따라서 붓다가 가장 위대했던 때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때가 아니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반열반에 든 때임을 알 수 있다. 그 전, 살아있을 때에는 배고픔도 느꼈고, 아픔의 통증도 느꼈다. 그래서 유여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열반의 원형은 현재열반(現在涅槃)이라 할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봐야 하며, 열반을 윤회생사의 현실세계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존재영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참조.

    

 

*유(有)와 무(無)---시각적으로 보이고 존재하는 물건을 모두 유(有)라고 말하고, 무(無)는 일반적으로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고, 인식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유ㆍ무는 세간법(상대적)으로 말할 때, 유(有)로 인해 무(無)를 말하고, 무(無)로 인해 유(有)를 말하게 되는 대응관계를 이루므로 유무가 같이 공존해야만 존재할 수 있고,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무의 개념은 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써의 무(無)이며, 독립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유무를 초월한 무(無)가 존재할 수 있다. 유와 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그 본질이 유도 진공(眞空)이고 무도 진공이기 때문이다. 유(有)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지,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것이든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영원불변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無)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지,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것이든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절대 무’라든가 ‘절대 유’라는 것은 가상일뿐이다. 우리가 유나 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 즉 변견(邊見)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했는데, 이 중도라는 말은 유와 무 양변을 긍정하고, 또 그것이 원융무애하게 하나로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변견으로서의 유ㆍ무 양변이 분명하며, 이 양변이 없으면 중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면에서 유도 무도 묘유(妙有)인 진공으로서, 즉 반야인 진공으로서 같은 하나이다. 이것이 둘 아닌 법, 불이법(不二法)이다.

    따라서 있다(有)는 말과 없다(無)는 말에는 제각기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의 의미가 있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없다(無)에는 ‘본체가 없음(nisvabhva 無自性)’과 ‘존재마저 없음(虛無/全無)’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며, 유(有)에는 ‘본체가 있음(sasvabhva 有自性)’과 ‘존재가 인연에 따른 현상적 존재로서 있음(緣生有)’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같은 ‘유ㆍ무’라 하더라도 본질주의자와 공사상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곧 본체와 존재에 관해 정반대인 ‘유ㆍ무’를 뜻하고 있음이 판연하게 드러난다. 본질주의자의 ‘무(無)’는 존재마저 없다는 허무로 빠지고, ‘유(有)’는 존재에 본체가 있다는 유자성(有自性)으로 흐른다. 이에 반해 공사상의 ‘무(無)’는 존재에 본체가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을 가리키며, ‘유(有)’라 하면 존재가 인연에 따른 현상으로서 있다는 연생유(緣生有)를 가리킨다.

     따라서 존재에 본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등장할 때, 본질주의자의 입장에서 ‘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공사상가의 입장에서 ‘없다’고 말하는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어정쩡한 제3의 입장은 있을 수 없다.

    〈중론송〉에서도 여기저기서 ‘비유비무(非有非無)’에 해당하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를 문맥을 무시하고 자구에만 매달려 해석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한역만 보는 이는 한문 번역문의 모호성에 기인한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오히려 해석자의 지평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중론 청목소>에서 다음과 같은 ‘유ㆍ무’에 관한 명확한 언명을 볼 수 있다. “유(有)와 무(無)는 상호 모순개념이다. 어떻게 한 존재에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규정이 적용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열반경>에서, “불성 비유비무 역유역무 유무합고 명위중도(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라고 한 여기에서의 유(有)와 무(無)는, 중도라는 진리의 바른 견해인 근본적 문제를 심도 있게 설명하기 위해 세간의 모든 편견 가운데 대표적 견해인 유와 무를 거론한 것이다.

또한 <남전대장경, 상응부경전 가전연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없음(無)이 없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있음(有)이 없다.』

    집(集)은 12연기에서 사성제의 집제(集諦)로서 곧 있음(有)이고, 멸(滅)은 12연기에서 사성제의 멸제(滅諦)이고, 곧 없음(無)이다. 바른 지혜로 여실히 관찰한, 세간의 집은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있다는 것이며, 또한 멸이라는 것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실한 세간의 모습은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집과 멸, 곧 유와 무가 하나라는 것이다.

     

*유원무행(唯願無行)---도과(道果)를 얻으려면 원과 행이 구비돼야 함에도 불국하고 원(願)만 있고 행(行)이 없음을 말한다. 원이 크면 행도 커야하는데 과(果)를 바라는 원만 있고 그와 상응한 행이 없다면 어떻게 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천태종에서는 이런 뜻에서 정토교(淨土敎)를 비난했다.

          

 

*유위(有爲,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유위(有爲)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또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 등을 가리킨다. 즉,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 이르기를, “만약 일제존재가 생겨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으며,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면 이것을 일러 유위라 하느니라.… 또 어떤 존재가 서로 속해서 인연화합작용에 의지해서 존재한다면 이것을 일러 유위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듯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 인연을 따라 생겨난 것, 여러 인연이 화합해 생겨난 것, 공동으로 함께 만들어낸 것, 이 모두가 유위법이다. 그리고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이것이 바로 오온(五蘊)이리고 헸다. 이러한 유위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즉, 세로(世路), 언의(言依), 유리(有離), 유사(有事)이다. 이들 넷의 의미를 이해하면 더 유위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무릇 현실에 있어서 인간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연기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한 유위(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중생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 모든 일, 모든 생각, 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이것들은 모두 연기법(緣起法)에 의하면 인연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세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유위행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다 유위법이다. 유위법(有爲法)은 유위(有爲)의 세계,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 소멸하는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무상(無常)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번뇌를 여읜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모든 유위는 유루이고, 반드시 생ㆍ주ㆍ이ㆍ멸(生住離滅)하는데, 생ㆍ주ㆍ이ㆍ멸하는 모습을 유위사상(有爲四相)이라고 한다. 유위에 대립하는 개념은 무위(無爲)인데 그것은 무루이고,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존재를 가리킨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 유루의 세계로 부터 무위 ‧ 무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 유루의 세계는 사성제(四聖蹄)에서 볼 때 고제(苦蹄)와 집제(集蹄)이며, 무위 ‧ 무루의 열반은 멸제(滅蹄)에 해당한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道蹄)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아래 유위법(有爲法) 참조.

    

*유위공(有爲空)---십팔공(十八空)의 하나.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란 말이다.

   

 

*유위법(有爲法; 빠알리어 saṅkhata-dhamma)---유위법은 형성된 법을 말하며, 이에 반대되는 형성되지 않은 법을 무위법(無爲法, asaṅkhata-dhamma)이라 하는데, 곧 열반(涅槃, nibbāna)이 무위법이다. 그리고 유위법(有爲法)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의 세 가지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心, citta), 마음작용(心所, cetasika), 물질(色, rūpa) 등이 해당된다.

   유위(有爲)라 하는 것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일부러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다.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일체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에 의한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한다. 즉,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그리고 유위법[생사(生死)]이 있음으로써 무위법[열반(涅槃)]이 있다.

   유위법은 조건에 따라 생기고 멸하는 모든 법들을 뜻한다. 이에 비해 무위법은 조건이 없어서 생김도 없고 그리하여 멸함도 없는 법을 뜻한다. 부처님은 열반이 무위법이라고 하셨다. 열반이란 본래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즉,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이다. 열반으로 가는 길이 있을 뿐이지 열반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위법이다. 만약 열반이 생기는 것이라면 연기법에 따라 열반이 생기게 될 조건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열반은 유위법이게 되는 것이다.

   무위법인 열반은 이러한 유위의 제 현상이 해소된 경지이며, 그 특징을 santi(고요함, 평화로움)라고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설명하고 있고, 북방 모든 아비담마 대승경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적정(寂靜)으로 옮겼고, 그래서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유위제법은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더러움, 不淨)이지만 열반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적정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ㆍ북의 모든 논서와 주석서에서 정의한 열반의 공통된 정의이다. 그리고 santi(고요함, 평화)는 이미 초기경들에서도 열반의 동의어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언어, 교육, 창작, 학문, 정치, 경제 등 인위적인 활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4계절의 변화 등의 자연현상까지도 유위법이다. 우리가 만들고 표현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 등 사람이 하는 것이나 자연이 하는 변화는 모두 유위법이다. 결국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다.

   따라서 불교 자체도 유위법이고, 사찰의 전각, 그 안의 불상, 마당 가운데 서 있는 불탑, 종각의 범종, 스님이 치는 목탁, 불교경전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고, 심지어 스님의 법문, 부처님 설법 또한 유위법이다.

   예컨대, 나는 수건으로 사용했는데, 친구는 걸레라고 했다. 나는 찻잔 받침대라고 봤는데, 스님은 과일 담는 접시로 사용하고 있다. 원효 스님은 ‘달콤한 물’로 마셨는데, 다음날 보니 해골에 담긴 ‘구역질나는 물’이었다. 이렇듯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으로 조작해 이해한 모습일 뿐이다. 만약 그것이 바로 그것이라면, 수건은 항상 수건이어야 하고, 찻잔받침대는 항상 찻잔받침대여야 하고, 달콤한 물은 항상 달콤한 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 따라 나의 마음작용에 의해 ‘수건’으로, ‘걸레’로, ‘찻잔받침대’로, ‘접시’로, ‘달콤한 물’로, ‘구역질나는 물’로, 그렇게 드러난다.

   즉, 지금 나에게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분별작용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다. 이때 ‘마음의 분별 작용으로 드러난 현상’을 유위법이라고 한다. 분별작용으로 생겨나고 사라질 유위법이기에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서’ 그것이라고 할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이다. 단지 마음작용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해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앞에 있는 것을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분별작용에 의해 또 다시 나에게 드러나니 말이다.

   존재하는 현실은 유위법(有爲法)들로 구성된 것이며, 이러한 유위법들은 초기경에서 오온으로, 12처로, 18계로, 해로운법ㆍ유익한 법(선법/불선법) 등으로 무리지어 나타나며, 이러한 유위법들의 특징은 무상ㆍ고ㆍ무아라고 초기경들에서 거듭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상좌부 주석서에서는 이러한 유위법들을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더러움, 不淨)의 넷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은 북방 아비담마 논서들에서도 한결같고 반야와 유식, 여래장 계열 할 것 없이 모든 대승불교의 경론들에서도 꼭 같다. <구사론(俱舍論)>에는 유위법에 다음의 네 가지 명칭이 있다고 했다.

    ① 세로(世路) - 유위법이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소의처로 삼는 것을 표현한다.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는 유위법을 세로(世路, 산스크리트어 adhvan)라고도 했다. 세로는 일체의 유위법이 이미 작용했고, 지금 바로 작용하고 있으며, 응당 작용할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즉 일체의 유위법이 찰나찰나 생멸변천하면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과정 또는 경로(經路)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② 언의(言依) ― 유위법은 언어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유위법을 언의(言依, 산스크리트어 kathavastu)라고도 했다. 언의(言依)는 말[語言]의 근거[所依]라는 뜻으로, 책상 혹은 하늘과 같은 명사적 단어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를 말한다. 책상 혹은 하늘 등의 온갖 명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온갖 명사가 가리키는 존재(법)를 말한다. 따라서 언의(言依: 말의 근거)는 일체의 유위제법(有爲諸法)을 모두 포섭한다.

    ③ 유리(有離) ― 유위법을 버리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유위법을 유리(有離, 산스크리트어 saniḥsara)라고도 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떠남이 있다'는 말이다. 비바사사의 해석에 따르면, 리(離)는 일체의 유위법을 영원히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곧 열반(涅槃)을 말한다. 즉, 각각의 유위법에는 이와 같이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떠남[離]'의 의미가 들어있기[有] 때문에, 일체의 유위법을 유리(有離)라고도 이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리(有離)라는 다른 이름은 모든 유위법은 반드시 그것을 떠난 멸(또는 택멸, 열반)의 상태가 있으며, 그 상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④ 유사(有事) ― 설일체유부에서는 유위법을 또한 유사(有事, 산스크리트어 savastuka)라고도 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일[事]이 있다"는 것이다. 비바사사의 해석에 따르면, 사(事)는 원인[因]을 의미한다. 즉, 일체의 유위법은 인과의 법칙의 결과물, 즉 인연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므로 유사(有事)라 부르기도 한다. 즉, 사(事)는 원인이란 말이어서 유위법은 인(因)에서 생겼다는 뜻이다.

   유위의 법은 마음에 의해 지어진 허망한 것이다.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쓸래야 쓸 수도 없는 환(幻)이다. 다만 미혹해서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법신 도리를 모르고 중생노릇 할뿐이다. 주머니 속에 보배구슬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거지노릇을 하고 있는 격이라는 말이다. 보배구슬 지닌 줄만 깨달으면 부자이다. 부처님은 무위의 법을 쓰되 중생제도를 위해 화신(化身)을 나투시는데, 중생은 같은 무위의 법을 쓰되 업식(業識)에 끌려 업신(業身)을 제 몸 삼아 삼계육도를 헤매며 윤회 고를 받는다.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유위(有爲)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일체 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에 의한 결과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일컫는다. 즉,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언어, 교육, 창작, 학문, 정치, 경제 등 인위적인 활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4계절의 변화 등의 자연현상까지도 유위법이다. 우리가 만들고 표현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 등 사람이 하는 것이나 자연이 하는 변화는 모두 유위이다. 결국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다.

    이에 비해 무위법(無爲法)이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법의 본성으로서,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연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 생멸변화 등의 작용을 갖지 않는 상태, 생멸변천 현상을 초월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절대의 법을 말한다. 이는 탐(貪) ‧ 진(瞋) ‧ 치(癡)가 소멸돼 온갖 분별 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상태이며, 윤회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위법은 번뇌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고, 무위법은 번뇌가 하나도 없이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다.

    • 불교도 유위법이다.

   ― 불교 자체도 유위법이고, 사찰의 전각, 그 안의 불상, 심지어 부처님의 설법 또한 유위법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뗏목처럼 너희들도 내가 말한 가르침의 뜻을 안 연후에는 그 말과 문자를 버려야지 결코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남의 말이나 문자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부처님 자신의 말 또한 유위법이고, 불교도 유위법이므로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불교나 설법도 연기적 이치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에 소멸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무렵 그동안 45년간 행한 설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찍이 한 마디로 안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행하신 설법은 모두 유위법이란 말씀이다.

    • 유위법과 무위법은 상대 개념이다.

  ― 유위는 작위(作爲)가 존재한다는 뜻이며, 무위는 작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무위법은 유위법의 상대개념이다. 즉, 유위법이 조작되고 만들어진 법이라면 무위법은 유위법의 그 속에 숨겨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 무엇’을 공(空)이니, 열반(涅槃)이니, 진여(眞如)니 하는 표현을 빌리기도 하나 실은 무위법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다. 무위법이기 때문에 말로써 생각으로써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무위법은 경전의 말씀처럼 불가설 부가량(不可說不可量)이다. 어째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양(量)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인가, 무위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무위법은 깨달은 상태에서 드러낸 법을 말하고, 유위법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낸 법을 말한다. 즉, 무위법(無爲法)은 본래 성불의 깨달음에서 드러난 법이고, 유위법(有爲法)은 본래 무명(無明)에서 미혹함으로 드러난 법이라 할 것이다.

   비유컨대 무위법은 진리의 바다라고 하는 바닷물 속에서 드러난 법이고, 유위법은 진리의 바다라고 하는 바닷물 수면 위에서 드러난 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파도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는 파도 밑에 있는 깊은 바다이다.

    • 유위법은 생주괴멸(生住壞滅)한다.

   ― 유위법의 현상들은 반드시 생(生) ‧ 주(住) ‧ 괴(壞)/이(異) ‧ 멸(滅)의 단계를 거치므로 생멸하는 모든 법이 이에 포함되며, 다음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

     첫째,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연기된 것이다).

     둘째,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해 가는 것이다.

     셋째, 시간과 공간 혹은 인과법칙에 속박되는 것이다.

   유위의 세계는 생멸변화가 격심한 무상의 세계인 데 반해, 이를 초월한 무위의 세계는 인연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영구불변한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이다.

    • 유위법은 여러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연기된 것이다).

   ― 유위법(有爲法)이란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성된 존재,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일체 현상계의 사물, 이러한 것들이 여러 연(緣)에 의해 집합돼 만들어진다. 어떠한 것도 하나의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법은 결코 없다. 즉, 유위법은 열등하므로 여러 인연의 힘을 빌리지만, 무위법은 강렬한 작용이므로 인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마치 열등한 사람은 남에게 자꾸 의지하려고 하지만,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때문에 유위법이란 갖가지 인연에 얽혀 있는 것이고, 사람의 일생 또한 각가지 인연에 얽혀서 한 평생을 살아간다. 무릇 중생은 돈, 권력, 명예, 직위, 출세 따위의 탐욕과 집착에 매여 있거나 아니면 부모형제와 자식, 학연, 지연, 조직 등에 얽혀 이에 집착하거나 그에 의해 지배당하며 유위의 일생을 살다가 간다.

    • 유위법은 허망하다.

   ―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모든 조작이 있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히 이와 같이 관찰하라.”고 했다.

이처럼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허망하므로 속지 말라고 했다. 유위법에 속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고통이 따르게 된다. 반야의 안목을 가지고 존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살라는 의미다.

    우리들의 삶은 허망한 유위법이다. 그런데 흔히 무위법이라 하면 마치 아무 것도 안하는 행위의 포기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유위법은 허망하지만 또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면서 또한 허망한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가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본 중도적 삶의 모습이다.

    • 유위와 무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 무위법은 무상하지 않고 유위법은 무상하다고 해서 무위법만 옳고, 유위법은 잘못이고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무위법은 진리의 세계이고, 유위법은 현상계이지만 현상계에는 악을 일삼는 무리들도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옳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다. 수많은 의인(義人)과 의사(義士), 열사(烈士)와 같은 애국자들이 있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 등 양심적으로 사는 성직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유위법과 무위법은 결코 별개의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파도와 물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유위법과 무위법도 함께 있다. 유위법과 무위법의 분류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 세계를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해서 본 철학적 분류법일 뿐이다.

    무위법이라고 함은 생멸변화가 없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만 무위라고 해도 그것은 유위를 배제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유위라는 것과는 별도로 무위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유위법은 무위법으로 인해 세우고 무위법은 유위법으로 인해 드러난다. 본디 유위법을 세우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무위법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참 무위법을 논하는 것이라면 유위법을 취하지 않고 또한 무위법도 취하지 않는다. 즉, 유위법은 당연히 버리는 것이고, 무위법도 끝내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참 무위법이다.

   수행을 처음 발심해서 시작할 때는 상(相)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점차 수행이 깊어질수록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소멸되고, 그러면서 자연 유위법에서 무위법 들어가는 수행이 된다. 그래서 유위법과 무위법은 하나이면서 다만 구분을 할 때 둘로 표현이 된다고 하겠다.

     • 유위의 세계는 생사거래, 생멸, 흥망성쇠가 물결치는 세계이다. 그래서 행복도 불행도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난무한다. 그 반면, 무위의 세계는 그러한 것이 없는 세계이다. 생사(生死)도 거래(去來)도 행복도 불행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인위적인 그 모든 것이 없는 세계가 무위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이기도 하다.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란, '모든 것이 일어나는 세계'이다. 우리가 단지 이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무심히 지내왔을 뿐이다.

 

 

*유위법(有爲法) 81가지---유위법이란 글자 그대로 함이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하면 차별상, 속제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조건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삼라만상이 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상대적이며 인연화합으로 생겨나고 인위적인 것도 있으며 분별상을 갖게 된다.

    반면에 무위법(無爲法)이란 글자 그대로 함이 없는 법이라는 뜻이다. 차별이 없고 조건이 없는 절대적인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 상대적인 것을 떠나 있으며 집착이나 인연에 상관없이 여여부동한 것으로, 다른 말로 무상의 도리라고도 하며,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닌 공적한 상태, 최고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는 오로지 치우친 소견을 버려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상(相)에 집착하면 삿된 소견을 길러 실상을 모르게 되며, 그렇다고 공(空)에 집착하면 아예 없다고 알게 돼버리니 이것도 어리석음을 기르게 된다.

    부파불교에서 의미하는 유위법은 마음속에 있는 세속적인 의식작용들을 의미하며, 그것이 81가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념처경>에 나오는 것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부파에 따라서는 89가지로 나누기도 하고 120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다르게 분류하는데 설일체유부는 일체법을 색법(色法) 11가지, 심법(心法) 1가지, 심소법(心所法) 46가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14가지, 무위법(無爲法) 3가지의 5위 75법으로 분류했고, 이 분류에서 3가지 무위법(無爲法)을 제외한 나머지 4위(位), 즉 색법(色法) · 심법(心法) · 심소법(心所法) ·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의 총 72가지 법은 모두 유위법(有爲法)이다.

 

    

*유위사상(有爲四相)---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이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변화를 유위사상(有爲四相)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의 존재도 우주 공간으로부터 먼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물을 포함해 과거, 현재, 미래세의 삼세(三世)를 통해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무너지고(壞-異-달라지고/變), 없어지고 마는(滅) 사상법칙(四相法則)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유위사상이라 한다. 따라서 생ㆍ로ㆍ병ㆍ사와 생ㆍ주ㆍ이(괴)ㆍ멸이 곧 유위사상이다.

    즉,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으로 인해 생겨나서 일시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마침내 생·주·이·멸로 없어지게 된다.

 

              

 

*유위상(有爲相, 산스크리트어 samskrta-laksana)---유위법을 유위법으로서 성립하게 하는 특질을 말한다. 발생하고(生), 소멸하고(滅), 머물고(住), 변화하는(異) 모습을 말한다. 유위(有爲)는 꾸미거나 조작하는 것, 인위적으로 만든 것 등을 말하는데, 생 · 주 · 이 · 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모양을 유위사상(有爲四相)이라 한다.

    유위(有爲)의 법은 인연으로 인해 생겨나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며, 그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드디어는 없어져 버린다. 그것을 4상(四相)이라고 한다. 4상(四相)은 생멸(生滅)하는 존재, 보다 정확히는 생멸변천(生滅變遷)하는 존재로서의 모든 유위법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4가지 성질인 생(生) · 주(住) · 이(異) · 멸(滅) 또는 생(生) · 주(住) · 노(老) · 무상(無常)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이 4가지 성질은 유위법으로 하여금 유위법이게 하는 유위법의 본질적 성질로서 어떤 법이 이 4가지 성질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은 유위법이다. 그리고 이 4가지 성질이 없으면 그 법은 무위법이다. 이러한 유위법을 유위상(有爲相) · 4유위(四有為) · 4유위상(四有爲相) · 유위4상(有爲四相)이라고도 한다.

 

    

*유위전변(有爲轉變)---세상의 사물은 모두 상주불변한 고정적 실체를 가지지 않으며,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없어진다. 이것을 유위라고 하며, 그 무상변화하는 것을 유의전변이라 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과 수행---세상에는 「공명(共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말이다. 비유를 들어보면,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한다.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어떤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하고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것들을 살펴보면 자명종의 추가 모두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한다고 한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다.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돼 공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예를 들어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한다. 또 다른 예로 세계사에 「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 가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센 스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이다.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간다. 파장이 같아지는 것이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것이다.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온다.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돼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한다.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말이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된다.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意業),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니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법상 스님

 

    

*유유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법화경>에 나오는 말로서, <법화경>의 종지(宗旨)이며, 불교의 최고 종지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오직 부처님만 있을 뿐, 이승(二乘)도 없고, 삼승(三乘)도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때로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겪는 온갖 경험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연각의 길도 설하신다. 사성제나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설이 그것이다. 불교에는 가르침이 참으로 다양하다. 흔히 표현하기를 8만 4천 근기에 따른 8만 4천 법문이라고 한다. 불교경전을 8만대장경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이다. 하지만 수많은 가르침도 결국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종점에 귀결된다. 어쩔 수 없어서 근기를 따라 각양각색의 법을 펼쳐놓지만 사실인즉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깨eke는 것이 그 종점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또 그것이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수한 생을 거듭하면서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으로 출발해 끝내 부처님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달리 다른 일은 없다. 처음도 부처님이요, 중간도 부처님이요, 끝도 부처님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부처님 위에 부처님 없고 부처님 밑에 부처님 없다. 데바닷다도 부처님이요, 석가모니도 부처님이다. 이것을 <법화경>은 ‘유유 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이라고 한다. <법화경>의 종지(宗旨)이며, 불교의 최고 종지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부처님만 있을 뿐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고 팔만 사천이라는 각각의 다름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빼앗거나 침범하거나 살상을 하거나 하는 일을 없애고 전쟁도 없애서, 전 인류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는 길은 오직 이 한길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인류는 행복을 위해, 평화를 위해 온갖 분야에서 각양각색의 노력을 쏟고 있으나 최종적으로는 오직 이한 길,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길뿐이다. ‘유유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이라는 말이 이것을 의미한다.

   <법화경>에서 ”삼승은 곧 일불승“이라는 교설은 단순히 대ㆍ소승의 교단적 분열 대립을 지양하기 위해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기보다는, 붓다의 본회(本懷-속마음)를 서술한 것이요, 대ㆍ소승의 분별은 그런 본원(本願)에 입각한 방편시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법화경>은 이러한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법화경>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수한 중생이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 출발을 해 끝내 부처님이 돼서 돌아오는 일이다. 달리 다른 길은 없다. 처음도 부처님이요, 중간도 부처님이요, 끝도 부처님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말한 ‘유유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의 일불(一佛)사상이다.

 

  

*유작(唯作, kiriya)-유작심(唯作心, kiriyacitta)---부파불교시대에 남방 상좌부에서 마음을 분석할 때 쓴 용어인데, 단지 기능만 하고, 업을 만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유작심은 아라한(阿羅漢)의 마음이다. 아라한이 된 성자들이 무색계의 선정에 들면 유작심이라 한다. 위빠사나 명상으로 아라한이 돼도 보통의 세계에서는 보통의 지식으로 살고 있으므로 몸에 괴로움이나 통증, 병이 생기기도 해서 매우 어렵다. 그래서 선정에 들어 있는 쪽이 편하다. 선정에 들면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업(kamma)이 되지 않는다. 재생도 하지 않는다. 선정에는 들어 있지만 아라한이 된 사람들의 명상은 업(業)을 만들지 않으므로 유작심(唯作心)이라 한다. 업이 되지 않는,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 단지 행위로서 끝난다.

 

*유작사유(有作思惟)---<원각경>에 나오는 말로서, 짓는 것이 있는 생각을 말한다. 유작(有作)의 사유(思惟)는 유위(有爲)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진실한 심체(心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사유를 이용해서 부처님 경계를 찾는다면, 마치 허공의 꽃이 다시 허공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망상만 더해간다고 한다.

  

 

*유전문(流轉門)---12연기를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순관(順觀)이라고도 한다.---→십이연기(十二緣起) 참조.

 

*유전연기(流轉緣起)---연기설에 있어서 선ㆍ악업과 그 과보의 관계에서,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緣起의 順觀) 혹은 순연기(順緣起)라고 한다.

연기의 순관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명(無名)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연해서 수(受)가 있으며,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으며,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으며, 생에 연해서 노사(老死) ·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고 하는 정형적(定型的)인 글로 표현된다.

     무시이래로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연기는 유전연기(流轉緣起)이다. 반면 수행해서 해탈하는 연기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이다.---→환멸연기(還滅緣起) 참조.

  

 

*유정(有情, 산스크리트어 sattva)---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옛날에는 중생이라 번역했고 현장(玄裝) 이후의 새로운 해석에서는 유정(有情)이라 한역했다. 정은 마음이란 뜻이고, 무감각한 초목과 산하를 비정(非情)이라던가 무정(無情)이라고 하는 것에 반대되는 말이다. 즉, 마음을 가진 살아 있는 중생(衆生)을 뜻하며, 인간도 물론 유정이다.

   ‘보리살타(보살)-bodhisattva’에서 보리(bodhi)는 깨달음, 살타(sattva)는 살고 있는 존재, 즉 유정(有情)을 뜻한다. 따라서 ‘보리살타’란 깨달은 유정, 깨달은 사람이란 말이고, 무정(無情)이란 돌멩이 같이 정신작용이 없는 무생명체의 총칭이다. sattva를 처음 한역할 때 구마라습은 중생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유정이라 번역했다. 유정은 움직이는 생명체고, 무정은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이다.

다르게 설명하면, 유정(sattva)이란 정(情)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정이란 정식(情識)이나 업식(業識)을 지칭한다. 정식(情識)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수용능력을 의미하고, 업식은 업상(業相), 즉 무명업상(無明業相-헛된 생각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유정이란 ‘감각적 수용능력을 지니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따라 행위 하는 것’, 즉 감수성(情)과 의지성(行)과 행위성(業)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유정(惟政,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장.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의 제자.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법명은 유정(惟政). 경남 밀양 출신. 14세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해, 임진왜란 때에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승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란 후 일본과의 외교 및 부국강병책에 의해 국가에 크게 기여했다. 1604년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돼 1605년, 왜군이 강탈해간 통도사 진신사리를 돌려받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유정천(有頂天)---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다른 이름이다. 무색계 4천(四天)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을 말한다. 삼계(三界)의 가장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

 

 

이라고 한다.

  

*유진 부르누(Eugne Burnouf, 1801~1852)---프랑스대학 산스크리트어 담당교수였다.

부르누는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브라이언 호튼 헛즈슨(Brian Houghton Hodgson, 1800~1894)이 네팔에서 수집한 산스크리트어 불교문헌들을 검토한 후, 그 중요성을 알아채고 이 문헌들을 연구해 1844년에 <인도불교사개론>을 출판했다. 이 책은 유럽의 불교연구 기초를 놓은 저작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부르누는 19세기 유럽 산스크리트학의 연구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라 하겠다. 부르누는 또한 아소카왕 석주에 관해 자세한 연구를 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법화경> 번역에 착수했으나 그의 <법화경> 번역본은 사후에 출간됐다.

    

 

*유체이탈(幽体離脱, Out-of-Body Experience)---유체이탈은 영혼이 자신의 신체를 빠져나온 상태에서의 감각 체험을 일컫는 말이다. 영혼이 빠져나온다는 점은 임사체험(臨死體驗-Near-Death experience)과 유사하나 사후세계와 관련된 장소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유체이탈은 잠재의식 속에서의 경험이다. 일방적으로 꿈에 휩쓸리는 상태보다는 유체이탈 상태는 비교적 의식이 잘 깨어있고 이성적으로 상황판단이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경험의 연속성이 꿈 상태보다는 더 의미가 있고, 선명도도 꿈보다는 좋다고 한다. 유체이탈을 하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부족하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꿈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요즘은 언론이나 네티즌들을 통해서도 '유체이탈'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말과 행동이 다른 정치인에게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을 한다. 이러한 유체이탈에 대해, 위키백과사전에는 '유체이탈(幽体離脱, Out-of-Body Experience)은, 영혼이 자신의 신체를 빠져나와 육체의 바깥에서 세계를 바라보거나 경험하는 일' 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유체(幽体)'라는 말이 애매하다. 한자로 '유(幽)' 자가 '그윽하다, 숨다, 멀다, 아득하다'는 뜻인데, '유체(幽体)'를 한자로만 봐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체외이탈(體外離脫)'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유체이탈은 사람이 기절하거나 죽은 상태, 즉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영혼)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간 걸 자신이 인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영혼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이다. 즉, 자신의 몸에서 또 다른 자신이 몸에서 빠져나가 공중에 떠 있거나 옆에 서서 의식이 없는 자신의 육체를 보고 있는 현상이다.

   유체이탈은 흔히 교통사고, 병원에서 혼수상태일 때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관련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는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경우 100명 중 1~2명은 유체이탈 경험을 한다고 한다. 제법 흔한 현상이라는 뜻이다.

   또 기(氣) 수련이나 명상 수련자들, 깊은 잠을 잘 때, 수술을 위해 마취중일 때, 굉장히 피곤해서 비몽사몽일 때, 극도의 공포심을 느낄 때, 극도의 영양실조일 때, 마약에 취했을 때, 이러할 때도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는, 특히 뇌 과학자들은 유체이탈 현상이 두뇌의 측두엽을 자극하면 인공적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체이탈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유체이탈을 경험한 사람이 자기가 의식이 없을 때 건물 옥상 위에 떠 있었는데, 그곳에서 본 옥상의 모습을 깨어난 뒤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옥상 모습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의식이 없던 환자가 병원 옥상에 직접 가봤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렇게 유체이탈 현상이 자주 일어나자 관련 학자들은 어떤 경우가 유체이탈 현상인지 그 기준을 정하기도 했다. 꿈이나 단순 환상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자신의 의식(영혼)이 공중으로 떠오를 것.

    둘째,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바깥쪽에서 볼 수 있을 것.

    셋째, 생각만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을 것.

    넷째, 꿈이 아니라는 걸 본인이 인식할 것 등이다.

  유체이탈이 실재한다면 그 말은 곧 영혼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는 유체이탈(체외이탈)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거나 혹은 자기 자신도 자신이 경험한 그 일을 믿지 못하고 헛것을 봤다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어찌됐든 유체이탈 현상에 대해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유체이탈 현상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상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헌데 불교에서는 자기 자신을 관찰함에 있어서 자기를 객관화시켜서 바라보라고 한다. 수행의 한 방편이다. 이것이 유체이탈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일종의 유체이탈 현상을 모방해서 스스로를 관찰하는 기법이라 하겠다.

 

   

*유학(有學, 빠알리어 sekha, 산스크리트어 śaikṣa)---소승불교에 있어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했으며, 해야 할 바를 다했고, 윤회에서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 무학위를 간단히 무학(無學)이라 하고, 아라한과 이전의 단계를 통칭해 유학위(有學位: 배울 것이 있는 계위) 또는 유학(有學)이라고 한다. 즉, 유학은 이미 불교의 진리인 사제법(四諦法)의 이치를 알고는 있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해 누진 즉 번뇌를 아주 끊어 깨침을 얻기 위해 즐겨 계ㆍ정ㆍ혜 삼학을 수학 하는 이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삼도(三道), 즉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 중에서 견도ㆍ수도를 닦은 성자를 말한다. 그리고 초기불교 성문(聲聞)의 수행 단계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사과(四果=사향사과, 성문사과) 중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에 이른 성자, 즉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를 유학(有學, sekha/sekkha)이라 한다.

   즉, 불교교학에서는 성인을 예류ㆍ일래ㆍ불환ㆍ아라한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아라한과(果)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이라 한다. 하지만 <능엄경>에 유학이승(有學二乘)이란 말이 나온다. 이럴 경우, 성문과 연각을 지칭한다.

 

     

*유학정견(有學正見)---3정견(三正見)의 하나. 유학위(有學位)의 정견을 유학정견이라 한다. 세친(世親, 바수반두)이 지은 <구사론>에 따르면, 견(見)은 유신견(有身見) ․ 변견(邊見) ․ 사견(邪見) ․ 계금취견(戒禁取見) ․ 견취견(見取見)의 5염오견(汚染五見: 5종의 그릇된 견해)과 세간정견(世間正見) ․ 유학정견(有學正見) ․ 무학정견(無學正見)의 3정견(三正見: 3종의 바른 견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통칭해 8견(八見)이라 한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구사론>에 따르면 8정도의 정견(正見: 바른 견해)이 곧 세간정견 ․ 유학정견 ․ 무학정견의 3가지로 세분돼 정의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간정견은 유루혜에 속하고 유학정견 ․ 무학정견은 무루혜에 속한다. 불교에 따르면, 무루혜의 일부라도 성취하면 성자가 된다.

    

 

 

*유행경(遊行經)---빠알리어 디가니까야(長部) 제16경을 일컫는 말인데, 원명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parinibbana-suttanta)>이며, <장아함경(長阿含經)>의 제2경으로 한역한 것이 <유행경>이다. 이는 열반경 중 소승열반경에 속한다.

     한역본으로는 4세기 초 서진(西晋)의 백법조(白法祖)가 번역한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과 418년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이 9권으로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 있다.

<유행경>은 붓다 최후의 법문으로 붓다가 열반을 앞두고 아란 등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행길에 올라 여러 곳에 다니실[유행(遊行)] 때 일어난 온갖 사건을 인연으로 해서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니 붓다 열반 직전의 모습이 묘사돼 있는 경전이다.---→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대반열반경, 열반경 참조.

    

*유행기(遊行期)---브라만교에서는 바라문이 평생 동안 밟아야 할 단계가 규정돼 있는데.

    • 학생기[범행기(梵行期), 25세 이전],

    • 가주기[(家住期, 가장기(家長期), 26세-50세)],

    • 임서기[(林棲期, 51세-75세)],

    • 유행기[(遊行期, 76세 이후)]의 네 가지 시기로 구분했다.

    앞의 세 시기를 통해 인생의 필요한 수행과 의무를 다했을 때 그들은 머리를 깎고 누더기를 걸치고 지팡이와 물통을 차고 목에는 두타(頭陀) 주머니를 걸고, 몸을 운수(雲水)에 맡기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여행을 즐기는 생활로 들어가는 시기를 유행기라 한다.

      

*유화질직자(柔和質直者)---부드럽고 정직한 이를 말한다. 부드럽고(柔和)란,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한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집(我執)의 생각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자기라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니까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해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그런 아집이 없이 남의 입장도 배려해, 대승적(大乘的) 관점에서 전체를 보고, 바르게 인도하는 승승(勝勝)의 사람의 품성을 <법화경>에서는 유화(柔和)라고 한다.

 

    

*유희(遊戱)---일반적으로는 즐겁게 노는 오락을 의미하지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 함을 뜻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일대기를 기술한 <대장엄경(大莊嚴經)>을 <신통유희경(神通遊戱經)>이라고도 한다.

 

 

*유희삼매(遊戱三昧)---부처의 경지에서 노닐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음을 말한다. 유학을 전공한 옛 선비들도 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유희삼매의 경지, 세상사에 초탈한 경지를 즐겼다.       

 

    

*유희신통(遊戱神通)---신통유희(神通遊戱)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신통이란 붓다의 초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며, 유희란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신통에는 삼통(三通)이 있으며, 삼명(三明)이라고도 한다. 이 유희신통의 출전은 <유마경(維摩經)>이다.

    • 숙명통(宿命通) - 자기와 남의 무한한 과거로부터 생사의 모습을 두루 알 수 있는 능력.

    • 천안통(天眼通) - 자기와 남의 무한한 미래에 되풀이 될 생사의 모습을 두루 예견할 수 있는 능력.

    • 누진통(漏盡通) - 현재의 인생의 고뇌를 남김없이 관찰해서 번뇌를 완전히 없애는 능력.

 

    

*유희야경(蕤呬耶經, 산스크리트어 구히야/guhya)---<유희야경>은 만다라 작법(曼陀羅作法 - 불교 춤인 나비춤의 하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경전으로 매우 중요한 밀교경전이다. 그러나 이 경에 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라서 그 성립시기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단 경전구성으로 볼 때 <대일경(大日經)>보다 약간 빠른 7세기 초반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대일경>의 선구적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이 언제 중국에 전해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당나라시대 중국밀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공(不空, 705~774)에 의해 한역됐다.

 

 

*육가칠종(六家七宗)---중국 동진(東晋)시대 반야학의 파별을 말한다. 동한(東漢-후한) 말기 지루가참(支累迦讖)이 <도행반야경>을 번역한 이래 인도 반야경전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위진(魏晉) 때에는 불교학자들이 현학(玄學)의 관점에서 반야경을 이해하고 논석(論釋)하는 과정에서 여러 파가 생기게 됐다.

    6가(六家)란 도안(道安, 314-385)의 본무종(本無宗), 지도림(支道林, 314-366)의 즉색종(卽色宗), 우법개(于法開)의 식함종(識含宗), 도일(道壹)의 환화종(幻化宗), 우도수(于道遂)의 연회종(緣會宗), 지민도(支愍度)의 심무종(心無宗)이고, 7종이란 위의 육종과 본무종(本無宗)에서 갈라져 나온 축법심(竺法深; 竺法汰)의 본무이종(本無異宗)을 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본무종(本無宗), 즉색종(卽色宗), 심무종(心無宗) 3가(家)가 가장 유력했다.

    

 

 

*육감(六感, 영어 Sixth Sense)---불교용어는 아니다. 분석적인 사고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즉, 이치나 경험으로부터의 지적 판단을 통한 결론에서가 아니라, 직입적(直入的)인 감성, 즉 직감을 의미한다. 육감은 어설픈 분석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정신 작용이다.

   “사람의 감각작용은 오감(五感)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감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의 다섯 가지다. 오감을 맡은 다섯 감각기관, 즉 오관(五官)은 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 등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것 말고도 여섯 번 째 감각이 있다. 이른바 제육감(第六感)이다. 육감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가는 지금까지도 신비에 싸여 있다. 모든 심리학자들을 괴롭히는 연구과제의 하나가 바로 육감의 정체를 푸는 문제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육감의 존재에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최근 외신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한 대학 연구 팀이 육감은 뇌의 전두대피질(前頭帶皮質)에서 나온다고 발표했다.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게재된 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육감이 나오는 곳은 구체적으로 좌뇌반구와 우뇌반구를 가르는 부분이라고 한다. 정신질환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전두대피질의 바로 이 부분이 정신분열증과 강박신경장애를 일으키는 곳임을 일찍이 밝혀낸 바 있다. 그래선지 육감의 본래 기능도 ‘위험을 사전에 알아채는 능력’이라고 연구팀은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우리의 뇌는 미묘한 경고신호를 포착하는데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능숙하다”고 설명한다. 또 “예전에는 실수를 저지른 뒤에야 전두대피질의 활동을 발견했지만 이번 연구결과를 잘 이용하면 실제로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육감은 오감을 뛰어 넘는 정신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감각이 아니라 사유와 추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심리학에서는 육감을 ‘초감각적지각(extrasensory perception)’으로 분류하고 연구를 진행해왔다. 육감을 직각, 직관(intuition), 예감 심지어는 영감과도 동일시하게 됐다. 때문에 그 성격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설명할 수 없는 앎의 상태’ 정도로 제한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 김성호

    그런데 이 육감은 손오공의 여의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화 할 수도 있다. 자기암시로 모양을 만들 수도 있으며, 잠재의식으로 숨겨놓을 수도 있고, 때로는 음흉하게 내흉(내숭)으로 비밀병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오감이 어떻게 기억되느냐에 따라서 그 육감의 감성은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달라지기도 한다. 육감의 감성은 자연의 원리로는 이해가 어렵고 그 결과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육감에 관해서는 요즘 과학적으로도 효모나 화초 등을 “예쁘다,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과 “미워, 미워 싫어”를 들려주는 것은 확연히 생육과 부패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심지어 물건이나 연장에도 그러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류끼리 시비(是非)만 따지다가 육감철학에 눈을 뜨지 못하면 그 끝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에서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몇 몇의 국가들은 지금도 악마보다도 더 철저히 복수에 복수를 다짐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는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했다. 사람은 사람을 존중해야 되는 것이다.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신에게서 악마의 육감이 자라고, 타에게 자비(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지면 참지혜의 육감이 떠오른다. 육감의 요소에는 ‘마음(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이 난세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세상에 성자는 많았지만 남아있는 성자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내 탓은 사라지고 남의 탓만 남는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육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육감이라 하겠다. 육감으로 볼 수 있어야 적을 동지로 만들 수 있고, 육감으로 대화할 줄 알아야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육감(영감)으로 보는 세상의 상(象)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 전기종

   

 

*육경(六境, 산스크리트어 sad-visayah)---6진(六塵), 6망(六妄), 6적(六賊), 6쇠(六衰)가 다 같은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6개의 인식기관(六根)에 각기 대응하는 6개 범주의 인식대상을 말한다. 6경이란,

    눈(眼根)의 대상인 색(色境),

    귀(耳根)의 대상인 소리(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觸境),

    의지(意根)의 대상인 법(法境)을 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주변 환경이 바로 육경이다. 우리 중생은 육경에 끌려 다닌다.

   6가지 감각의 대상은 먼지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6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사람을 미망(迷妄)에 빠뜨리기 때문에 6망(六妄)이라고도 하며, 선(善)을 쇠멸시키기 때문에 6쇠(六衰)라고도 한다. 또 모든 선법(善法)을 핍박하기 때문에 6적(六賊)이라고도 한다.

    

 

*육계(六界산스크리트어: 산스크리트어 sad-dhātava)---계(界, 산스크리트어 dhātu)는 요소를 뜻함.

   ① 모든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가지 요소.

     1) 지계(地界). 견고한 성질.

     2) 수계(水界). 축축한 성질.

     3) 화계(火界). 따뜻한 성질.

     4) 풍계(風界). 움직이는 성질.

     5) 공계(空界). 공간. 허공.

     6) 식계(識界). 분별하는 마음 작용. 분별 작용. 인식 작용.

   ② 안식계(眼識界), 이식계(耳識界), 비식계(鼻識界), 설식계(舌識界), 신식계(身識界), 의식계(意識界)를 말한다.

   ③ 모든 중생이 선악의 업인(業因)에 따라 윤회해서 가게 되는 6가지 세계. 곧 삼악도(三惡道)인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과 삼선도(三善道)인 수라(修羅), 인간(人間), 극락(極樂, 천상(天上)를 합친 여섯 세계를 말한다. 육도(六道). 육범(六凡)과 같은 말이다.

 

     

*육계상(肉髻相, 산스크리트어 usnisa)---불정(佛頂)이라고도 하는데, 초창기 부처님 상을 조성함에 있어서 정수리 위가 상투처럼 솟아오르게 한 것을 말한다. 육계상은 산스크리트어로 우스나샤(usnisa)라 하며, ‘머리장식을 붙일 수 있는 머리칼’이란 뜻이다. 부처님의 상호를 32상 80종호 라고도 하는데, 그 하나이다.

   육계상을 무견정상(無見頂相)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상(像) 중에서 최상이고 공덕(功德)이 지극히 크므로, 이것을 불지(佛智)에 견주어 최존 최승(最尊最勝)의 존(尊)으로 삼는다고 했다.

육계상은 불상이 처음 등장한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출발했다. 불상이 출현한 초기의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 부처님의 머리 위로 틀어 올린 상투는 높고 컸는데, 두 지역에서는 관습 차이로 전혀 다른 육계상을 창안해냈다.

    마투라는 야무나 강 서쪽에 있는 고대 인도의 상업도시이자 종교도시였다. 역사시대(기원전 6세기)에는 16대국의 하나로 슈라세나국의 수도였고, 중인도를 경유해 인도 서해안의 무역항에 이르는 루트의 중계지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신앙의 중심지로 번성해 ‘신들의 도시’로 서방 세계에도 알려진 곳이다. 역사시대 이후는 불교 및 자이나교의 거점으로 종교미술의 일대 제작 중심지였다.

   간다라 불상은 ‘헬레니즘화 된 부처’ 또는 ‘인도화 된 아폴로’라고 명명되듯이 그리스의 신상(神像)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서양의 신상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육계상으로, 간다라에서는 수염이 풍성한 장년층의 얼굴과 물결 모양의 풍부한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은 상투를 튼 불상을 만들었다.

   마투라 불상은 인도의 신상 조각 전통에 연원을 둔 것으로 간다라와 거의 동시에 인도 본토의 마투라에서 태동했다. 인도 전통이 강하게 반영된 마투라 불상의 육계상은 성년식을 치른 청년의 머리 스타일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즉, 주변머리를 깎고 중앙의 머리칼만을 남겨 올려 묶은 소라껍질 모양의 나계(螺髻)가 그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마투라 불신관(佛身觀)은 부처님 몸은 항상 젊고 늙지 않는다(佛身常少不老)는 불신소년신관(佛身少年身觀)으로, 마투라 불상의 상호는 처음부터 소년 얼굴을 모델로 했다. 마투라 불상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 표현은 <다라니집경>에서 ‘여래의 형상은 16세 동자와 같다’는 경전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마투라의 상투 역시 간다라와 마찬가지로 양식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당시 인도 청년의 헤어스타일이 모델이었던 육계상은 부처님의 신격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형식화된 횡선(橫線)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뿔이 하나 솟아있는 일각두(一角頭) 형태가 된다.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의 육계상은 3세기 이후가 되면 그 지역의 관습이 반영된 사실적인 머리칼은 점차 사라지고, 머리칼 전체가 고동이 머리에 붙은 듯한 나발(螺髮)로 전환된다. 이것은 부처님의 신격화와 그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육계상은 불상과 자이나교 상을 구분하는 한 특징이 됐다. 즉 자이나교를 창시한 마하비라의 상은 불상과 달리 육계의 표현이 없는데, 이것은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육계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육관음(六觀音)---6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나타낸 6종의 관음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을 역할의 특성에 따라 여섯 종으로 구분한 것임. 육관음은 다음과 같다.

    1)성관음(聖觀音) - 모든 관세음보살의 원형이다.

    2)천수관음(千手觀音) - 천 개의 손과 눈은 관음의 무한한 자비심[대비(大悲)]을 상징한다.

    3)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 죄나 병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복을 주는 관음으로, 11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4)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 여의주와 법륜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으로 소원을 모두 성취시며 준다.

    5)준제관음(准提觀音) - 재앙을 막아주고 수명을 연장해주며, 모성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6)마두관음(馬頭觀音) - 머리에 말의 머리를 이고 있으며, 축생도(畜生道)를 제도한다.

    • 불공견삭관음(不空羂索觀音) - 6관음에 불공견삭관음을 포함시키면 7관음이 된다. 불공견삭관음은 대자대비의 견삭(羂索)을 가지고, 생사의 고해(苦海)에 떠도는 중생을 건져 제도하는 관음이다. 견삭은 고해에 떠도는 중생을 건지는 불구이다.

 

    

*6근(六根) ․ 6경(六境) ․ 6식(六識)---6근(六根)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의 여섯 기관인데, 여기서 ‘근(根)’은 산스크리트어 인드리야(indriya)의 한역어로서, 감각기관과 그 기관이 가지는 능력을 의미한다. 6근은 바로 우리 몸 그 자체를 말한다.

   육근(六根)은 ‘나’라는 존재를 가리키고, 육경(六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말한다. 이 둘을 합해서 12처(十二處)라 하고, 여기에 육식을 더한 게 열여덟 개의 경계, 십팔계(十八界)이다. 그리고 육근을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문(六門), 육정근(六情根)이라고도 한다.

   헌데 이 6근이 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잘못이 이 6근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결정한다. 이러하니 모든 나쁜 것을 접할 수 있는 근본 그 자체이므로 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을 통해 육근청정(六根淸淨)을 이루어야 한다.

    불교에서 6개의 인식기관(六根)에는 각기 그에 대응하는 6개의 인식대상이 있다고 본다. 이 6근의 대상을 6경이라 한다.

     눈(眼根)의 대상인 색(色境),

     귀(耳根)의 대상인 소리(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觸境),

     의지(意根)의 대상인 법(法境)을 합해서 6경(六境, 산스크리트어 sad-visayah)이라 한다.

   그리고 6근(六根, skt. Sad-indriya)이 그 대상인 6경(六境)을 만났을 때 각각의 감각 장소[육근]를 통해서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6식(六識, skt. sad-vijnana)이라 한다. 6근 ․ 6경 ․ 6식의 관계를 보면,

   제1식, 눈(眼)이 그 대상인 색경(色境)을 보면 안식(眼識, cakkhu-viññāṇa)이 일어나고,

   제2식, 귀(耳)가 그 대상인 소리(聲境)를 들으면 이식(耳識, sota-viññāṇa)이 일어나고,

   제3식, 코(鼻)가 그 대상인 냄새(香境)를 맡으면 비식(鼻識, ghāna-viññāṇa)이 일어나고,

   제4식, 혀(舌)가 그 대상인 맛(味境)을 보면 설식(舌識, jivhā-viññāṇa)이 일어나고,

   제5식, 몸(身)이 그 대상에 닿으면(觸境) 신식(身識, kāya-viññāṇa)이 일어나고,

   제6식, 뜻(意)이 그 대상인 법경(法境)을 접촉하면 의식(意識, mano-viññāṇa)이 일어난다.

      ※여기서 법이란 생각의 대상, 혹은 뜻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사물)을 말한다. 법경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대상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육식(六識)이 드러난다. 그리고 제1식인 안식에서 제5식인 신식까지를 전5식이라 해 감각(感覺)을 말하고, 제6식은 지각(知覺)을 말한다.

    그런데 제6식(의식)은 전5식과 늘 함께 작용을 해서 전5식이 감각한 것을 지각하게 된다. 예컨대, 눈이 번쩍하는 것을 봤을 때, 번쩍하는 걸 감각적으로 느끼는 게 안식이라면, 제6식(의식)이 “이 게 폭죽이구나!” 하고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식과 의식이 동시에 작용을 한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즉, 전5식과 제6식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때 전5식 감각기능의 75%는 안식이고, 이식이 15%를 담당해서 안식과 이식이 여러 감각의 90%를 차지한다. 나머지 10%가 비식, 설식, 신식의 기능이다. 보고 듣는 게 감각기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육식(六識)은 현식(現識)과 장식(藏識)으로 갈라진다. 즉, 지금 현재를 느끼는 육식인 현식과 기억속의 육식인 추억의 장면인 장식으로 갈라진다. 시간은 흐르고 있기에 ‘지금’을 인식 하자마자 과거라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현식과 장식은 따로 떨어졌다고 할 수가 없고, 지금과 과거도 역시 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판단하자마자 곧 기억이 되듯이 현식이 곧바로 장식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 태어날 때 눈과 귀, 코와 입, 몸과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 육근(六根)을 구비하고 태어난다. 이 가운데 몸에는 팔, 다리 육체적인 모든 부분이 포함돼 있다. 이 여섯 가지를 육근이라고 하고 육근이 만나는 대상을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라 하는데, 이 여섯 가지 상대를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이라고 한다. 이 여섯 가지 대상이 깨끗하지 못하고, 먼지처럼 더러운 것이라 해서 육진이라 한다. 또 육경이 사람을 미망(迷妄)에 빠뜨리기 때문에 6망(六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오근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 의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내부정보는 법(마음의 대상)에 의해 받아들인다. 이렇게 받아들인 삼라만상, 현상계의 일체 세상법을 제6의식이 판단하고 정리한다.  

    그런데 판단하는 의식이 사실 있는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과거에 경험한 것, 즉 업(業)에 의해서 판단한다. 따라서 그 판단이 자기중심적이어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눈과 귀, 코와 입, 몸 다섯 가지 오근(五根)이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내부의 식(識)인 의근(意根)은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과거의 습관화된 잠재의식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한다. 즉, 자기가 익힌 경험, 습관, 업(業)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그릇되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그러니 육진(六塵)은 육근의 그림자요, 육근(六根)은 업(業)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육근(六根)을 구비하고 나온다. 이 육근이 육경을 만나는데, 즉 주관인 육근이 만나는 객관인 6가지 감각의 대상[육경(六境)]은 먼지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6진(六塵)이라고도 한다.

    주관인 눈(眼)이 객관인 색(色)을 만나면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일으킨다. 또는 ‘저산에 핀 들국화가 흰색이다, 보라색이다’라고 분별을 한다.

    예를 들어 귀(耳)로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할 때 그냥 듣기만 한다면 귀는 이근(耳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음악소리는 클래식이다, 이 소리는 판소리다, 아니면 흥타령이다, 하고 분별하는 식(識)이 나온다. 이러한 분별이 내 잠재의식에 익힌, 잠재의식으로 저장된 정보에 따라 그렇다 아니다, 좋다 나쁘다 하고 분별식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에 따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라는 육식(六識)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육근(六根), 육경(六境=六塵), 육식(六識)을 합해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세계가 이 십팔계 안에 포함된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심적 활동에서, 인식기관인 6근(六根)이 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나는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인식기관과 대상이 접촉을 하면 반드시 식(識)이 일어난다. 이렇게 6근ㆍ6경ㆍ6식 만나는 것을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 한다. 삼사화합이 이루어짐으로써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이 일어나서. 대상을 분별하게 된다.

    육근을 육진(六塵)이라 하는 것은 육근이라는 감각기관이 범부중생에게는 번뇌의 산실이고, 구속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에게도 육근이 있지만 그 안에는 무명이 존재하지 않고, 그 바탕은 보리심이요, 지혜로서 청정해 더러움이 없어 번뇌의 산실이 아니고, 구속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 그 육근 속에 무명을 걷어내려고 노력해, 육근이 더 이상 번뇌와 구속의 원인이 아니라 지혜의 바탕이 되도록 해야 한다.---→삼사화합(三事和合),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참조.

 

    

*육근청정(六根淸淨)---육근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이며, 여섯 가지 몸 부위로서, 사람의 몸이 가지고 있는 여섯의 기본기능을 의미한다. 이 육근에 의해 사회적인 악, 개인적인 악 등 온갖 몹쓸 짓이 다 일어나므로 육근을 청정하게 하란 말이다. 육근을 통해 일어나는 육식(六識)에는

    • 안(眼) - 사람을 보든지 사물을 보든지, 좋은 것 만 골라서 보고, 오염되고 나쁜 것은 보지 말라는 뜻이다. 미운 사람도 예쁘게 보고 더렵혀진 것 도 새것과 같이 볼 것이며, 사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라는 뜻이다.

    • 이(耳) - 악하고 불순한 이야기는 듣지 말고 선하고 좋은 말만 골라서 들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악하고 독한 소리는 듣기 싫어한다. 남을 욕하고 비판만 하는 소리도 듣기 싫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옛말과 같이 불필요한 이야기는 나에게 백 해 무익이다. 그래서 듣기 싫은 이야기는 빨리 잊어버리고 좋은 말은 오랫동안 기억해 두라는 뜻이다.

    • 비(鼻) - 코를 깨끗이 하라는 것이 아니고 냄새를 잘 맡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향기보다 쿠린내 나는 악취가 더 많이 깔려있다. 되도록 나쁜 냄새(나쁜 일)는 피하고, 좋은 냄새(좋은 일)만 맡으라는 말이다.

    • 설(舌) - 맛 좋은 것만 찾지 말고, 몸에 좋은 것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쁜 말을 하지 말고, 좋은 말만 가려서 하라는 말이디고 하다. 혀를 잘못 놀려 패가망신하는 수도 있고, 말 잘 해줘서 용기를 불러일으켜 일어서게 해 줄 수도 있다.

    • 심(心)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인간의 심성엔 욕심, 야심, 질투, 시샘, 성냄, 어리석음 등 온갖 나쁜 것이 많다. 따라서 보시, 봉사, 자비, 은혜, 사랑 등 좋은 심성을 길러 남을 배려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이 사회가 바로 진여의 세계, 열반적정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 신(身) - 선ㆍ악은 마음으로 짓지만, 몸으로 표현하게 된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은 지옥이다. 각자 자기 몸을 잘 관리해서 악행의 근본이 되는 몸을 청정하게 해야 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육근청정이라. 육근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념(欲念)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무애(無礙)의 경지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열반적정을 구현할 수 있다. <법화경> ‘법사공덕품’에서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공덕에 대해 설하고 있다.

 

     

 

*육근호용(六根互用)---육근호용이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가며 쓴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귀는 듣는 것인데 귀로 보고, 또 눈은 보는 것인데 눈으로 듣는다는 말이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 육근을 서로 바꾸어 쓴다는 말은 본래 불교의 독특한 말이다. 그래서 오조 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도 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중생의 번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 수 없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 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 통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육근호용이다. 사람은 누구나 수행만 하면 육근호용이 돼 모든 것에 무애자재한 경계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오장육부도 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아픈 데가 어디고 빛깔이 어떤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견안문(耳見眼聞)이라고 해서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다는 말로서,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만 업식(業識)으로 막혀 있을 뿐 실제로 해탈경계인 우리의 본래마음에는 그런 무애자재함이 있다고 한다.

    최근 중국 사천에 사는 열한 살 된 어린이가 모든 것을 귀로 본다는 일화가 보도됐다. 눈을 아무리 가려놓아도 무엇이든지 다 보며, 또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본다고 한다. 결국 이 아이는 귀로써 모든 것을 본다는 말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래서 전세계 언론에서 보도한 바 있다. 그리고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에도 그러한 사실을 소개한 글이 있다.

    

*육난구이(六難九易)---<법화경> ‘견보탑품’에 나오는 말로서, 석가세존께서는 영축산 보탑회상의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널리 펼 것을 간절히 원하시고, 한편으로는 육난구이의 법문을 통해서 <법화경> 전파의 교학불사(敎學佛事)의 마음자리를 설해주셨다.    

    <육난(六難)>

    ① 설경난(說經難) ― <법화경> 경전의 깊은 뜻을 설하기가 무척 어려움을 말한다.

    ② 서지난(書持難) ― 일불승 <법화경>을 쓰고 받아 가지기 어려움을 말한다.

    ③ 잠독난(暫讀難) ― 진실의 가르침 <법화경>을 잠시라도 읽어보기 어려움을 말한다.

    ④ 설법난(說法難) ― <법화경>을 알기 쉽게 남에게 설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⑤ 청수난(聽受難) ― <법화경>을 듣고 제대로 깊은 뜻을 받아 가지기 어려움을 말한다.

    ⑥ 봉지경난(奉持經難) ― <법화경>을 받아가져 실천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구이(九易)>

    ① 여경설법이(餘經說法易) ― <법화경> 이외의 무수한 경을 설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② 수미척치이(須彌擲置易) ― 수미산을 번쩍 들어서 다른 국토에 던지는 것은 오히려 쉽다.

    ③ 세계족척이(世界足擲易) ― 발가락으로 모든 세계를 우주 공간에 던지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④ 유정설법이(有頂說法易) ― 천상계 유정천에서 한량없는 경을 설법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⑤ 파공유행이(把空遊行易) ― 맨손으로 허공을 휘어잡고 걸어 다니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⑥ 족지승천이(足地昇天易) ― 대지를 발톱 위에 놓고 높은 하늘에 오르는 것은 오히려 쉽다.

    ⑦ 대화불소이(大火不燒易) ― 겁화(劫火)의 불속으로 마른 풀을 지고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쉽다.

    ⑧ 광설득통이(廣說得通易) ― 모든 법장으로 모든 중생이 육신통을 갖게 함은 오히려 쉽다.

    ⑨ 대중라한이(大衆羅漢易) ― 법을 설해서 많은 사람이 아라한에 이르게 함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이상으로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을 펴는 여섯 가지 어려움, 곧 육난(六難)을 말씀하시면서. <법화경>을 펴는 일 이외의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없다고 구이(九易)를 말씀 하셨다. 그만큼 법화경을 설하고 펴는 일이 어렵다는 비유의 말씀이다.

    육난구이 법문은 인도 전형의 과장이 심하다. 그래서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을 전제로 한 <법화경> 가르침은 곧 일체중생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구제한다는 거룩한 생명의 경전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세상에 널리 펴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굳은 각오로 법화경을 수용하고,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육념(六念, 산스크리트어 ṣaḍ-anusmṛti)---6념법(念法) 혹은 6수념(隨念)이라고도 한다. 염(念)의 마음작용을 사용하는 수행체계엔 4념처(四念處)ㆍ6념처(念處)ㆍ10념처(十念處) 등이 있고, 6념은 6념처와 동의어이다.

    6념은 여섯 가지 생각으로 번역되며, 다음의 6가지 염(念)을 사용한 수행을 육념법이라 말한다. <잡아함경> 제33권 <931. 수습주경(修習住經)>의 용어와 표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염불(念佛) - 부처님은 10호(號)를 구비하고, 대자대비한 광명을 놓으며 신통이 무량해 중생의 고(苦)를 구제하니 나도 부처와 같아지려고 염원(念願)하는 것.

    ② 염법(念法) - 여래의 설하신 법은 큰 공덕이 있어서 중생에게 좋은 일이 되니, 나도 이를 증득해 중생에게 베풀고자 염원하는 것.

    ③ 염승(念僧) - 스님들은 여래의 제자로서 무루법(無漏法)을 얻고 계ㆍ정ㆍ혜(戒定慧)를 갖추어 세간의 좋은 복전(福田)이 되니 나도 승행을 닦으려고 염원하는 것.

    ④ 염계(念戒) - 모든 금계(禁戒)는 큰 세력이 있어서 중생이 착하지 아니함을 제하니 나도 정진해 계를 호지(護持)하려고 염원하는 것.

    ⑤ 염시(念施) - 보시행은 큰 공덕이 있어서 중생의 간탐(慳貪:몹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음)하는 중병(重病)을 제하니 나도 보시해 중생을 섭수(攝收)하려고 염원하는 것.

    ⑥ 염천(念天)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하늘들이 자연히 쾌락을 받음은 일찍 지계하고 보시하는 선근(善根)을 닦은 연유이니 나도 공덕을 쌓아서 저 하늘에 나려고 염원 하는 것.

   경에 사람들이 만일 이 육념(六念)을 잘 닦으면 마음에 선정을 얻어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육단심(肉團心, 산스크리트어 hṛdaya)---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을 연려심(緣慮心), 육단심(肉團心), 진여심(眞如心)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연려심은 다가온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중생의 평소 마음상태를 가리키고,

    육단심은 만용을 부려 억지로 하는 것으로, 보통 때는 일어나지 않다가 큰 욕심이 일면 생겨나게 된다. 육단(肉團)이란 살덩어리, 근육 덩어리란 말이니, 전혀 수행이 안 된 육체를 말한다.

    진여심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자리로서, 아주 특별한 때만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육단심은 연려심보다 좀 더 강한 마음이다. 육단심은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다가 큰 욕심이 생기기 시작 하면 일어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집에 불이 나자 자기키보다 더 큰 장 단지를 번쩍 들고 나왔는데, 나중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육단심이다. 그래서 "욕심으로 하는 일은 보통 때 보다 다섯 배의 힘이 생긴다."고 했다. 따라서 육단심 정도는 돼야 기도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육단심을 직역하면 심장, 마음이지만 수행이 부족한 욕심을 숨긴 거친 마음이다. 그래서 육단심을 비하해서 음식을 함부로 먹는 것 같은 물질적인 마음이라고 했다. 바른 의정(疑情)이 확립되지 않아 산만한 마음이 일어나서 온갖 잡심이 발동해 바른 공부를 등지게 하는 오염된 마음이 육단심이다. 참선하다가 육단심(肉團心)이 생긴 이유는 공부를 빨리 얻으려고 재촉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렇다. 마음을 엉뚱한 곳에 두어 바른 의정이 없으면 여지없이 급하게 이루려는 마음이 생기기도하고, 산만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며, 본능적인 욕심에서 우러나기도 하고,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거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며, 온갖 잡심이 동해 바른 공부를 등지게 된다. 그런 게 다 육단심이다.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練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불교에서는 마음을 4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즉,

․ 육단심(肉團心) - 본능적인 욕심에서 우러나는 거친 마음.

․ 연려심(練慮心) - 보고 듣는데서 분별하는 마음으로서 중생의 평소 마음을 일컬음.

․ 집기심(集起心) -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으로 제8식 아뢰야식을 말함.

․ 견실심(堅實心) - 본성으로서 부처님 성품과 같은 불성, 참마음, 진여심이다.

   이 견실심이 바로 부처의 마음자리이다. 바로 참선은 부처의 마음자리인 진여심(眞如心)이다. 참선은 이러한 여러 마음들을 고요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禪)은 만법의 근본이고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교법은 이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 데에 근본이 있다.

    또 불경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 육단심(肉團心) -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거친 마음이다.

․ 적취심(積聚心) - 좀 더 깊은 곳에서 자리한 마음이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의해서 형성된 마음으로, 지성이나 이성이라고 일컬어진다.

․ 진실심(眞實心) - 적취심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음이다. 이것은 깊은 물속에 흘러 아무리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어떤 경우이든 육단심은 기피해야 할 마음자리이다. 마음가짐이 조급하면 육단심이 흔들려 혈기가 고르지 못하는 따위의 병통이 생겨날 것이니, 이것은 바른길이 아니다. 그래서 선을 하려면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하고, 육단심을 경계해야 한다.

    육단심이라 하는 것은, 우리 몸속에 있는 것으로서, 부모님의 혈기(血氣)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진여심의 힘은 평소에는 느낄 수 없지만, 특별한 경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이를 세속에서는 사력(死力)이라고들 한다. “죽을힘을 다하면 열 배의 힘이 생긴다(死力十增培).”는 말은 바로 이 진여심과 관련돼 있다.

         

 

*육대(六大, 산스크리트어 sad-dhātu)---밀교에서는 연기(緣起)의 근원이 되고 우주와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본체를 육대(六大)로 파악하고 있다. 대(大)라고 하는 것은 보통 크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히 큰(maha), 그래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여섯 가지는 만유를 생성하는 원소로서 우주에 가득함으로 대(大)라고 한다. 세계 내의 모든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의 근원, 모든 힘의 근원인 육대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인데, 각각 자연계 및 의식계의 단위이면서 상호가 침투해 방법의 보편성을 설하고 있다. 육대는 육계(六界, sad-dhātava)라고도 한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를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는 근본이라 했다. 곧 지(地)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본이며, 수(水)는 만물을 성장시키는 습기와 액체이다. 화(火)는 만물을 성숙시키는 에너지, 풍(風)은 만물을 변화시키는 움직임을 말한다. 그 외에 공(空)은 안팎의 간격을 의미하며 걸림이 없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생장의 원인이 된다. 식(識)은 결단하고 판단하는 작용을 말한다.

     앞의 오대(지수화풍공)가 물성으로 물질의 근원을 이루는 요소이고, 불교용어로 색법(色法)이라 하는 데 비해, 식대(識大)는 앞의 오대가 생존하기 위해 의지할 곳이 되는 정신작용을 말하며, 이를 색법에 대비해 심법(心法)이라 부른다. 이렇게 볼 때 육대는 만물이 물질과 정신으로 나뉘는 이원론에 가깝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6대(大)를 일체제법의 체성(體性)이라 하고, 육대가 우주에 가득해 먼지 하나 터럭 하나도 육대를 갖추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으며, 대일여래(大日如來)와 인간을 모두 오대와 식대를 합친 형태, 곧 전체로 파악한다. 그리고 각 대(大)는 그 안에 나머지 대를 내포하므로 서로 같은 종류일지라도 걸림이 없으며 다른 종류일지라도 경계가 없어 다함이 없는 연기의 세계가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밀교의 육대연기설(六大緣起說)이다.

  

*육도(六道, 六度, sad-gati)---6도를 6취(趣)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중생관이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1권 471경에 사제(四諦), 육도(六道), 팔정도(八正道) 등을 설했다.

   육도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무지한 중생이 업인(業因)에 따라 윤회전생하게 되는 6가지 세계를 말한다. 즉, 망자가 죽어서 가게 되는 곳 중에 가장 좋지 못한 곳인 삼악도(三惡道)는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이며, 삼선도(三善道)는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로서, 이 여섯 갈래가 육도이다. 그리고 여기에 삼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가 더해져서 삼계육도(三界六道)라고 부른다. 마지막의 천상도ㆍ인간도는 선취(善趣)이고, 앞의 네 가지 도는 악취(惡趣)에 해당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지옥(地獄, niraya)은 육도 중 가장 고통이 심한 곳으로 분노심을 일으켜 남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즉, 지옥은 진에(瞋恚-성냄)의 세계이다.

    ② 아귀(餓鬼, peta)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상징되는 세계로 생전에 욕심을 부리고 보시를 하지 않은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즉, 아귀계는 탐욕의 세계이다.

    ③ 축생(畜生, tiracchana-yoni)의 세계는 고통이 많고 낙이 적은 곳으로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즉, 축생계는 우치(愚痴)의 세계이다.

    ④ 아수라(阿修羅, asura)의 세계도 5계 10선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곳으로 이곳은 지혜는 있지만 싸우기를 좋아하는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즉, 아수라는 다툼의 세계이다.

    ⑤ 인간세(人間世)는 5계(戒)와 10선(善)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세계로 탐욕ㆍ분노ㆍ어리석음이 잠재돼 있어 불법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곳이다. 즉, 인간계는 평정(平正)의 세계라고 한다. 앞의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수라(修羅)의 네 가지의 마음은 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멈출 수 있는 곳이다.

    ⑥ 천상(天上ㆍ天界)은 모든 욕망이 충족되고 모든 즐거움이 온전히 갖추어진 세계이지만 아직 열반의 세계에는 이르지 못하는 세계로서 선정(禪定)을 익히고 닦아야 하는 곳이다. 즉, 천상계는 환희의 세계이다.

그러나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육도가 어떠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상태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라 했고, 범부가 끊임없이 욕망에 지배당해 좌우되는 것을 육도윤회라고 했다.---→육취(六趣) 참조.

   

*육도(六度)---육도(六道)를 말하기도 하고,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6바라밀(六波羅蜜)을 뜻하기도 하므로 앞뒤 문맥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육도(六道), 6바라밀(六波羅蜜, 산스크리트어 sat-paramita) 참조.

      

*육도만행(六度萬行)---여기서 육도(六度)란 육바라밀(六波羅蜜)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육도만행이란 보살 혹은 중생이 육바라밀을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하는 일. 육바라밀을 여러 가지로 실천하며 행하는 것을 말한다.---→만행(萬行) 참조.

    

*육도무극(六度無極,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육바라밀(六波羅蜜), 육도피안(六到彼岸)과 같은 말이다.

  

*육도윤회(六道輪廻)---생명이 있는 중생이 삼악도(三惡道)인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와 삼선도(三善道)는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을 육도윤회라 한다. 이러한 육도윤회사상은 대승불교 일반의 이론이 아니라 오직 밀교(密敎)의 교의일 뿐이란 점을 확실해야 한다.---→육도(六道) 참조.

    

*육도집경(六度集經)---여기서 육도(六度)는 육바라밀(六波羅蜜)과 같은 말이다. <육도집경>은 부처님이 보살이었을 적의 이야기, 즉 전생담(자타카)을 모아 기록한 경전이다. 전체 91개의 전생담을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라는 육도(바라밀)에 각각 배당해 모았기 때문에 <육도집경>이라 한다.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은 사제(四諦)와 12연기를 관해서 응분의 깨달음을 얻지만 보살은 이 육바라밀을 실천 수행해서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른다는 것이다. 

    AD 3세기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에서 강승회(康僧會)가 번역했다. 강승회는 원래 강거국(康居國) 사람으로,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대에 중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원전은 사라져 전하지 않으나 한역은 이른바 고역(古譯)에 속하는 3세기의 것이다. 내용 등으로 유추해 볼 때 2세기에는 그 근간이 성립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전은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보살행을 고양하는 데에 주된 목적을 두고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와 함께 미륵의 전생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는 점 등이 특색이다.---→강거국(康居國) 참조.

 

*육묘문(六妙門)---육묘문(六妙門) 혹은 육묘법문(六妙法門)이란 여섯 가지 문으로 들어가서 절대 안온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뜻으로 지어진 관법의 문이다.

    이 육묘문의 근본이름은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이고, 이 이름으로 된 경전이 <아나파나사티수타(anapanasatisutta)>이다. 이 경전의 내용이 육묘문이다. 여섯 가지 오묘한 문으로 돼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의 천태 지의 대사가 가장 소중히 여겨 항상 이 관법을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역경전에는 <안반수의경>으로 나온다.

     안(安)은 ‘an’, 반(般)은 ‘pan’ 사티(sati)는 뜻으로 수의(守意)라고 해서 <안반수의경>이라고 했다. 안은 입식(入息)을, 반은 출식(出息)의 뜻이다.

     이와 같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수행법은 열반의 세계로 가게 하는 오묘한 문이다. 호흡을 명상하는 이 오묘한 관법은 여섯 가지 종류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육묘문이라고 한 것이다. 육묘문은 아래와 같다.

     ① 수식문(數息門)---몸과 마음을 조화하여 숨을 헤아리는 방법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관문.

 

     ② 수식문(隨息門)---숨을 헤아리기를 그치고 미세한 마음으로 들이쉴 적에는 들

어감을 알고 내어쉴 적에는 나가는 것을 알아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관문.

     ③ 지문(止門)---마음을 응연(應然)케 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는 관문.

     ④ 관문(觀門)---대경(對境)을 분명하게 관찰하여 경계가 허망한 줄을 아는 관문.

     ⑤ 환문(還門)---바꾸어 능관(能觀)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마음의 허망무실(虛妄無

實)함을 아는 관문.

     ⑥ 정문(淨門)---마음이 부주불착(不住不着)하여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청정한 관

문.

    마지막으로 이것도 저것도 다 떠나서, 차별도 없고, 능소도 없고, 분별시비를 떠나버린 정문(淨門)이며, 이와 같이 성불로 간다는 것이 육묘문(六妙門)의 법문이다.---→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참조.

     

 

*육문(六門)---육근(六根)과 같은 말이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眼耳鼻舌身意) 여섯 가지 신체부위를 여섯 감각기관[六根]이라 한다. 이 육근을 통해 외부의 인식이 들어오므로 그럴 때는 육문(六門)이라 한다. 즉 기능적 측면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같은 용어지만 용처와 용례에 따라 상이한 형용사를 붙여 구별하는 경우가 있다. 즉,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眼耳鼻舌身意)에다가 ‘근(根)’이란 말을 붙여 인식을 관장하는 감각기관임을 나타내고, ‘문(門)’을 붙여 안문(眼門), 이문(耳門)… 이런 식으로 육문(六門)이라 해서, 곧 인식이 들어오는 곳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식(識)’을 붙여 인식이 일어나는 현상을 나타내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 이런 식으로 해서 육식(六識)을 설정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동일한 현상이더라도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작용이 다르므로 그럴 때는 이름을 바꾸어버린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여러 가지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 기능에 맞추어 말을 바꾸는 것이다. 단순히 눈(眼)만이 아니고 안문(眼門)이라 해서 문(門)을 첨가하면 ‘정보가 들어오는 입구’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안계(眼界 cakkhu-dhātu)와 같이 계(界, dhātu)라는 말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다시 다른 기능의 눈, 안식(眼識)의 범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안(眼) 하나를 가지고 안근(眼根), 안경(眼境), 안식(眼識), 안문(眼門), 안계(眼界), 이와 같이 말을 바꾸어서 각기 그 입장과 기능을 나탸낸다.

    단순히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하면 감각기관의 명칭을 늘어놓은 것일 뿐, 어떤 기능도 아직 표시하고 있지 않다. 구체적인 기능을 표시하는 경우에는 각각의 기능을 표시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이 해서 술어가 증가한다. 술어가 증가하지만 내용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6문(六門)이란 인식이 들어오는 장소, 그리하여 마음이 생겨나는 장소가 6개 있다는 말이다.

    즉, 육문(六門)이라 할 때 문(門, dvāra)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根, indriya)을 통해 인식이 들어오는 장소, 마음이 일어나는 장소란 의미가 된다.

   안식(眼識, cakkhu-viññaṇa)은 눈(cakkhu)을 문으로 해서 대상을 인지하고, … 신식(身識, kāya-viññaṇa)은 몸뚱이(kāya)를 문으로 해서 대상을 인지하며, 의식(意識, mano-viññaṇa)은 마음(意, mano)을 문으로 해서 대상을 인지한다. ---→문(門, dvāra), 의문(意門) 참조.

 

    

*육바라밀(六波羅蜜, 산스크리트어 sat-paramita)---육바라밀을 육도(六度)라고도 한다. 바라밀은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며,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한 것이고, 산스크리트어 최고라는 뜻의 파라마(parama)에서 파생된 말이어서 ‘완성, 완전한 상태, 구경(究竟)의 상태’를 뜻한다. 몸에 배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 바라밀이고, 이것이 제법이 공(空)한 도리이기도 하다.

   원래 바라밀의 개념은 초기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파불교의 논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보시 ‧ 지계 ‧ 정진 ‧ 반야의 4가지 바라밀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6바라밀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삼학(三學)과 대승불교의 수행이 목표로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이념에 근거해 팔정도(八正道)를 비롯한 모든 수행법들을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 6바라밀은 곧 대승(大乘), 즉 보살의 큰 수레로 표현될 만큼 중요시됐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이라 하면, 곧 육바라밀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6바라밀의 내용과 순서 및 상호관계 등에 대한 해설은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을 비롯한 여러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여러 대승경론에 자세히 논술돼 있다.

   불교교의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안에 도달한[parami]+상태[ta]>를 말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아래와 같다.

    •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도 한다. 단(檀)은 단나(檀那)의 줄인 말이다. 번역하면 보시(布施)이다. 보시는 베풂을 뜻한다. 베풂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한 베풂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서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相)이 남아 있지 않은 맑고 청정한 베풂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한다. 그리고 보시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즉 재시(財施) ․ 법시(法施) ․ 무외시(無畏施)이다. 재시란 재물을 주는 것이고, 법시란 진리의 말씀을 베푸는 것이며, 무외시란 두려움을 제거해 마음에 평화를 주는 보시이다. 이 외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 해서 재시 외 일곱 가지 보시를 제시하기도 한다.---→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무재칠시(無財七施) 참조.

    •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이라고도 한다. 시라(尸羅)를 번역하면 지계(持戒)이다. 지계(持戒, sila)란 말은 말 그대로 ‘계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대ㆍ소승의 모든 계율(戒律)을 잘 지켜 악업(惡業)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계를 지킬 필요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가 바라밀이다.

    •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 - 인욕(忍辱, ksanti)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고, 인욕바라밀은 참음의 실천행이다. 즉, 탐(貪) ‧ 진(瞋) ‧ 치(痴) 마음 중에서 성내고 화내는 진심(瞋心)을 잘 닦을 수 있는 실천행이 인욕바라밀이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경지라야 인욕바라밀이라 할 수 있다. 억지로 참는 것은 현인(賢人) 수준이지 바라밀은 아니다.

    •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 비리야바라밀(毗梨耶派羅蜜)이라고도 한다. 비리야(毗梨耶)는 정진(精進)이다. 정진(精進, virya)이란 부지런히 노력해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나약함이 없는 부동심의 실천이며 불퇴전의 노력이다. 다른 생각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오로지 한 길을 구하는 것이다. 즉,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행을 힘써 실천해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저절로 정진이 돼야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바라밀이 아닌 현인 수준이다.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 의지만 있어도 안 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인내하되, 의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돼야 정진바라밀이다.

    •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 선(禪)은 선나(禪那)의 줄인 말이다. 선정(禪定, dhyana)의 정(定)은 삼매(三昧)란 뜻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진리를 바르게 사색하는 것’을 뜻하며, 이를 정려(靜慮)라고 한다. 정(靜)은 지(止)에 해당하고, 려(慮)는 관(觀)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요히(靜) 생각하는 것(慮)’이 선정이다. 불교에서는 선정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언제나 마음이 평정돼 있고, 안정돼 있는 것을 말한다. 흔히 선정이라 하면, 앉아 가지고 도를 닦아서 목석처럼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망부석에 지나지 않는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삼매에 들 수 있어야 한다.

    •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의 번역이다. 반야(般若, prajna)란 ‘수승한 지혜’라는 뜻이고, 이때의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 지혜란 “공에 대한 지혜이며, 집착 혹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읜 지혜이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혜이다.” 즉, 모든 분별지(分別知)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라는 말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곧 부처님 지혜라는 것에 귀착되므로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가지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다른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그리고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은 머리, 지계바라밀과 보시바라밀은 양 팔, 인욕바라밀과 정진바라밀은 마음(혹은 몸통)에 해당한다.

    헌데 어리석은 중생이 이 육바라밀을 한꺼번에 다 행하기는 어려우니 다만 하나만이라도 열심히 수행하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공덕이 있을 것이다.---→바라밀(波羅蜜) 참조.

 

 

*육방예경(六方禮經, 빠알리어 Siṅgālovada-suttanta)---<육방예경>에는 몇 가지 이본이 있는데, 후한(後漢) 때 AD 2세기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불설시가라월육방예경(佛說尸迦羅越六方禮經)>과 서진(西晉)시대 지법도(支法度)가 번역한 <불설선생자경(佛說善生子經)> 등이 알려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줄여서 <육방예경> 또는 <선생자경(善生子經)>, <선생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의 재가자가 지켜야 할 실천규범을 설한 경전이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인간관계에서 예의범절의 중요성과 연기법의 실천적 수행을 가르치는 경전으로 일상생활의 지침을 제시한 경전이다.

    원명 <불설시가라월육방예경(佛說尸迦羅越六方禮經)>의 약칭으로 <장아함경>과 <중아함경> 속에 나오는 경이다. 원형은 아소카왕 이전 BC 3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

    <육방예경> 속의 주인공 이름이 ‘싱갈라(尸迦羅越, 빠알리어 Siṅgālaka)’인데,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선생(善生)’이다. 착하게 태어난 사람이란 말인데, 그래서 <선생경>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당시 ‘싱갈라’라고 하는 어느 장자(長者) 아들의 이야기이다.

    장자의 아들인 싱갈라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침마다 동서남북과 위아래의 여섯 방향을 향해 예배하는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 각각의 방향에 대해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①동쪽은 부모와 자식의 윤리,

    ②서쪽은 남편과 아내의 도리

    ③남쪽은 제자와 스승의 윤리,

    ④북쪽은 친구간의 윤리

    ⑤상방(위쪽)은 사문과 시주의 윤리

    ⑥하방(아래쪽)은 하인이나 고용인과의 윤리를 배정하고 서로의 인간관계를 생각하면서 예를 지키라는 것이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아내의 위치를 중시하고, 주종관계에서는 고용인의 입장을 이해할 것을 제시해 자만심과 권위의식을 버리라고 권유한다. 또한 진실한 친구 선택의 중요성과 근검절약의 교훈을 설하고 있다.---→선생자경(善生子經, 빠알리어 Sigalovada Sutta) 참조.

 

     

*육번뇌구(六煩惱垢) 또는 육구(六垢)--- 뇌(惱) · 해(害) · 한(恨) · 첨(諂) · 광(誑) · 교(憍)의 6가지 수번뇌(隨煩惱, 산스크리트어 upakleśā)를 말한다. 수번뇌란 근본번뇌에 의해 파생된 것으로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도 한다. 번뇌구(煩惱垢)의 문자 그대로 뜻은 ‘번뇌의 때’ 또는 ‘근본번뇌의 때’를 말한다. 구(垢)는 몸의 때로서 마음의 번뇌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번뇌구는 근본번뇌, 즉 수면(隨眠, 산스크리트어 anuśaya, 빠알리어 anusaya)으로부터 생겨난 2차적인 번뇌 즉 수번뇌로서, 심한 번뇌라임을 뜻한다. 6번뇌구가 생겨나는 원천으로서의 근본번뇌는 다음과 같다.

     • 뇌(惱) - 5견 가운데 견취(見取)로부터 생겨난다.

     • 해(害) - 진(瞋)으로부터 생겨난다.

     • 한(恨) - 진(瞋)으로부터 생겨난다.

     • 첨(諂) - 온갖 견(見)으로부터 생겨난다. 5견 가운데 어느 것으로부터도 생겨날 수 있다.

     • 광(誑) - 탐(貪)으로부터 생겨난다.

     • 교(憍) - 탐(貪)으로부터 생겨난다.

 

 

*육범(六凡)----육도(六道)와 같은 말.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 ․ 천---→육도(六道, sad-gati) 참조.

       

 

*육범사성(六凡四聖)---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의 6계를 6범(凡)이라 하고, 성문(聲聞) · 연각(緣覺) · 보살(菩薩) · 불(佛)의 4계를 4성(聖)이라 한다.

 

  

*육법(六法)---비구니가 되기 위한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 2년 동안 수행하는 자를 식차마나(式叉摩那)라 하는데, 그 식차마나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계율이다.

    1) 음란한 마음으로 남자의 몸에 접촉하지 않음.

    2) 남의 돈을 훔치지 않음.

    3) 축생을 죽이지 않음.

    4) 거짓말을 하지 않음.

    5) 때 아닌 때 먹지 않음.

    6) 술 마시지 않음.

 

 

*육법공양(六法供養)--불교에서 지계, 지혜, 인욕, 선정, 보시, 정진 등 육바라밀에 해당하는 의미로 향(香), 등(燈), 꽃(花), 차(茶), 쌀(米), 과일(果)의 여섯 가지를 불전에 공양하는데, 그 의식을 육법공양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공양물은 각기 해탈향, 반야등, 만행화, 감로다, 선열미, 보리과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육법공양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향(香)은 계·정·혜(戒香·定香·慧香)를 뜻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해탈을 이루려 하는 해탈향(解脫香)을 의미한다.

    ② 등(燈) 즉, 등불은 무명의 어둠속에서 길 잃은 중생들을 위해 지혜의 길을 밝혀 주는 반야등(般若燈)을 의미한다. 해탈의 마음, 반야의 자리이다.

    ③ 꽃(花)은 피기 위해 온갖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 그처럼 우리 중생들도 성취의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수행을 해야 한다. 즉, 꽃은 만행과 만행화(萬行花)를 상징한다.

    ④ 차(茶)는 중생이 해탈 세계에 이르는데 생명수(水)를 뜻하는 것이며, 중생의 삼독심(三毒心)을 씻어주는 청정한 물, 감로다(甘露茶)를 의미한다.

    ⑤ 쌀(米)은 농부에게 있어서 곧 기쁨이다. 수확한 쌀을 손에 든 농부는 환희로 가득하다. 쌀의 공양은 이처럼 가쁨과 환희를 준다. 그리고 쌀은 몸과 마음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음식의 의미인 선열미(禪悅米)를 뜻하고, 법락(法樂)을 의미하며, 또한 바른 법(깨달음)을 구하는 행자의 바른길(行道)을 의미하기도 한다.

    ⑥ 과일(果)은 수행과 공부에 의한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거둠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일은 자비행의 결과인 보리심(菩提果)을 뜻한다.

 

 

*육불공지(六不共智, 빠알리어 asadhjarana-nana)---<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벽지불과 아라한 들에게는 없고, 오직 부처님에게만 있는 여섯 가지 지혜를 말한다.

    ① 잠재성향을 아는 지혜 ― 중생, 제자들의 기질과 잠재성향(능력, 기질)을 아는 지혜, 제자들의 잠재성향을 알아야 그에 적절한 수행주제를 줄 수 있다.

    ② 근기의 성숙도를 아는 지혜 ― 중생들 근기의 성숙도(차원)를 아는 지혜, 제자들이 진리를 깨달을 만큼 지혜가 무럭 익었으며, 해탈할 수 있는지 아는 지혜.

    ③ 일체지(一切智) ―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지혜, 그래서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 혹은 전지자(全知者)라 한다.

    ④ 장애가 없는 지혜 ― 부처님 지혜는 끝이 없고, 지혜를 일으키는데 아무 장애가 없다.

    ⑤ 쌍신변(雙神變)의 지혜 ― 물과 불이라는 정 반대되는 성질을 동시에 몸에서 뿜어내는 신통력.

    ⑥ 대연민 삼매의 지혜 ― 부처님은 거친 윤회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중생들에게 크게 연민심을 일으켜 매일 새벽이면 삼매에 들어 그날 어떤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인연이 무럭 익었는지 살폈다. 그리고 가사와 발우를 들고 그를 찾아갔다고 한다.---→10력(十力, 빠알리어 dasabala nana) 참조.

 

*육사외도(빠알리어 ṣaḍ samānā, 六師外道)---붓다와 거의 같은 시대에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베다 성전(veda聖典)의 권위를 부정한 여섯 명의 사상가들을 말한다. 당시 363 가지의 사상이 주장됐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들 사상과 학설을 정리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여섯 개의 학설을 ‘육사외도’라고 통칭했다. 이들은 불교와 더불어 브라만교와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반기를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불교 관점으로는 이들 역시 이단(異端)이었으므로 육사외도라 불렀다. 후의 육파철학(六派哲學)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육파철학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철학이다.

   육사외도의 대표자는 푸라나 캇사파, 마칼리 고살라, 산자야 벨라지푸타, 아지타 케사캄발라, 파구타 캇차야나, 니간타 나타풋타의 여섯 사상가들이다.

    ① 푸라나 캇사파(富蘭那迦葉, 빠알리어 Purana Kassapa)---도덕 부정론자(道德 否定論者)였다. 그는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윤리에 대한 회의를 표명해 도덕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을 해도 악을 행한다고 할 수 없으며 악의 과보도 생기지 않는다. 또 제사, 보시, 극기, 진실한 말 등을 행해도 선을 행한다고 할 수 없으며 선의 과보도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해 당시 일반 세간에서 인정되고 있던 선ㆍ악의 행위와 그 행위가 미래에 초래하는 과보를 모두 부정했다.

    ② 마칼리 고살라(末伽梨拘賖梨子, 빠알리어 Makkhali Gosala)---숙명론자(宿命論者)로서 명외도(邪命外道)로 불리기도 했다. 아지비카(Ajivika)라는 교단의 개조인 막칼리 고살라는 숙명론자(宿命論者)였다. 그의 교도들을 불교도들은 그릇된 생활 방법을 취하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폄하했다. 흔히 '사명외도(邪命外道)'라 부르는 이 유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 숙명적으로 결정돼 있다는 입장을 취해 인간의 삶에는 인연이 작용하지 않고 모든 자연현상에는 고유의 생명이 있다고 주장했다. 윤회의 생존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혹은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 그 모두는 원인이 없다고 했다. 살아가는 데는 지배력도 의지력도 없으며 다만 자연의 정해진 상황과 본성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고 했다. 사명(邪命)이란 삿된 생활, 그릇된 생활방식, 남을 속이는 삿된 행위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을 말하며, 팔정도에서의 정명(正命)의 반대말이다. 마약밀매, 고리대금, 다단계 속임수, 인신매매, 매춘, 밀수, 뇌물수수, 부정입학, 병역기피, 도박, 불량식품 제도 판매… 이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에 근거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업(業)에 의한 윤회전생을 부정하는 등 일종의 결정론적인 숙명론자였다. 그는 윤회의 주체로서 영혼(jiva)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이것을 상주하는 물질적 존재라고 생각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虛空) 등의 원소와 같은 원리로서 파악했다.

    ③ 산자야 벨라지푸타(刪闍耶毘羅胝子, 빠알리어 Sanjaya Belattiputta)---회의론자(懷疑論者)로서 불가지론(不可知論)라고도 한다. 지식이란 주관에 따라 달라지므로 객관적인 지식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모든 지식을 버리고 오직 수행만을 중요시했다. 즉,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서 기분파라고도 했다. 부처의 십대제자 중 목건련과 사리불이 이 유파에 속했으나 후에 붓다에게 귀의했다. 이들은 윤리적 또는 실천적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애매한 대답을 해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뱀장어처럼 미끈미끈해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교설로 일컬어졌다.

    ④ 아지타 케사캄발라(阿耆多翅舍欽婆羅, 빠알리어 Ajita Kesakambala)---유몰론자(唯物論者)들이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몰론자이다. 도덕을 부정하고 현실의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주장해, 순세파(順世派)라고도 했다. 이 유파에서 내세우는 우주의 구성원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는 인도의 모든 사상체계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 해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단멸하고 신체는 모두 네 가지 원소로 환원된다. 내세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현세가 인생의 전부이며, 선악의 행위를 짓더라고 죽은 후 그 과보를 받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는 일종의 감각적 유물론 내지는 쾌락주의의 입장이었다.

    ⑤ 파구타 캇차야나(迦羅鳩馱迦卯延, 빠알리어 Pakudha Kaccayana)---불멸론자(不滅論者)였다. 생명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불생불멸을 주장해 죽이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으며, 가르치는 자도 없고 가르침을 받는 자도 없다고 했다. 인간의 생명이나 특질은 영원하다는 점에서 유물론과 반대이나 선악의 인과를 부정하는 면에서 도덕부정론에 가깝다. 이들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 원소 이외에 고(苦), 락(樂), 영혼(命我) 등 세 가지 원소를 더하여 일곱 가지 요소의 실재를 주장했다. 영혼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은 아지타와는 다른 이원론의 입장처럼 보이지만 파쿠타가 인정하는 영혼은 물질적인 것으로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독립적인 것으로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테면 사람을 죽여도 다만 날카로운 칼날이 7요소 사이를 관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시 실천적으로 도덕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⑥ 니간타 나타풋타(빠알리어 Nigantha Nataputta)---니간타 나타풋타는 자이나교의 개조, ‘마하비라(Mahavira)’라고도 한다. 크게 깨쳤다고 해서 마하비라(위대한 영웅) 혹은 지나(jina, 수행을 완성한 자)로 존칭되고 있다. 나타풋타는 나타족 출신의 사람이란 뜻이다. 본명은 밧다마나(Vaddhamana)으로서 베살리(vesālī) 부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30세에 출가해 12년간 고행 끝에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 후 30년간 교화하다가 베살리 부근에서 72세에 입적했다. 이들은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고, 인내를 강조하는 극단적인 고행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강조했다. 특히 불살생(不殺生)을 강조해 생명을 해칠 수밖에 없는 농업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장려했다. 자이나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교와 유사하고 가깝지만 사상적으로는 매우 다르다. 마하비라는 석존과는 달리 자연세계나 물질에 대한 관찰에 관심을 나타내 매우 색다른 형이상학적 고찰을 모색했다. 우주는 많은 요소로 구성돼 있는데 그것들을 크게 영혼(Jiva, 命我)과 비영혼(ajiva, 非命我)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영혼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처럼 상주편재(常住遍在)하는 자아가 아니라 다수의 실체적 개아(個我)로서 지 ‧ 수 ‧ 화 ‧ 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원소나 동식물에도 내재돼 있다고 해 영혼(지바/Jiva)을 실체적인 것이라 파악하고 인정했다.

    마하비라는 윤회와 해탈의 문제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교설을 세우고 있다. 그는 업(業)을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되고 부착해 영혼을 속박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했다. 마하비라가 업을 물질로 간주한 것은 붓다 교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해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 물질이 영혼에 유입하는 것을 제어하고 이미 영혼에 부착된 업 물질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는 철저한 고행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 육사(六師)는 한결같이 <베다>의 권위를 부인하고 브라만교에 반항했다. 그들은 신흥도시의 왕후 귀족과 부호들의 정치ㆍ경제적 원조 밑에 활약했다. 이들 각 유파의 형성은 그 기원·성립연대가 다른데, 기원전 5세기∼기원적 3세기 사이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베다 성전을 부정하는 세력으로 육사외도가 존재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이 시대에 사상의 자유가 확보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500여년 후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가 성립할 당시 사상 탄압을 받아 예수가 처형당한 사실과는 대조적이다. 그렇게 확보된 사상의 자유 가운데에 위대한 불교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상원융(六相圓融)---‘육상원융’이란 화엄종의 교리로, 우주 법계의 구성 원리로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여섯 가지 상(相), 즉 총상(總相)ㆍ별상(別相), 동상(同相)ㆍ이상(異相), 성상(成相)ㆍ괴상(壞相)을 갖추고 있고, 그 전체와 부분 또 부분과 부분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돼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말로 ‘인다라(因陀羅) 그물망’이란 게 있다. 인드라의 보석 그물이라는 뜻이다. 인다라(因陀羅)란 제석천(帝釋天)을 말한다. 제석천은 도리천(忉利天) 33천의 주인이다. 제석천의 궁전인 선견성(善見城)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보석그물이 인다라망(因陀羅網)이다. 그래서 인다라망을 흔히 '제망(帝網)' 이라고도 한다.

    제망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수많은 보석 하나의 구슬마다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비치며, 구슬마다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쳐 무수한 보주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춘다. 이처럼 이 세계 혹은 우주 삼라만상이 서로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 인다라망이다.

    마찬가지로 일체제법도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상징하며, 나아가서 절실하게 자신을 아는 개체는 전체를 안다고 하는 불교철학을 상징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서로 연결돼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화엄경>의 중중무진(重重無盡), 상즉상입(相卽相入), 법계연기(法界緣起), 무진연기(無盡緣起)란 말들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리하여 화엄철학에서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고 해서 모든 현상은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포용하고, 또 포용돼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는 부처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 등장하는 마찬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 육상원융(六相圓融)이다. 육상(六相)이란 모든 현상의 여섯 가지 상태를 말한다. 즉,

     ① 총상(總相) - 여러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② 별상(別相) -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개별특성.

     ③ 동상(同相) - 여러 모습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전체의 모습.

     ④ 이상(異相) - 여러 모습이 서로 어울려 전체를 이루면서도 각각의 개별특성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

     ⑤ 성상(成相) - 여러 역할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의 역할.

     ⑥ 괴상(壞相) - 여러 역할이 모여 전체를 이루면서도 유지되고 있는 각각의 역할.

   예를 들어, 얼굴의 특성을 총상이라 한다면, 눈ㆍ귀ㆍ 코ㆍ입 등의 특성은 별상이다. 눈ㆍ귀ㆍ코ㆍ입 등이 서로 어울려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동상이라 한다면, 눈ㆍ귀ㆍ코ㆍ입 등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이상(異相)이다. 눈ㆍ귀ㆍ코ㆍ입 등의 역할이 서로 의존하면서 얼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성상(成相)이라 한다면, 눈ㆍ귀ㆍ코ㆍ입 등이 각각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괴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는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상태를 잃지 않고,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융합돼 있다고 해서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 한다.

    그리고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한 몸이 돼 원만하게 융화돼 있다는 것이다.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 스님은 집에 비유해 육상을 설명하고 있다.

     • 총상(總相)은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의 인연이 모여서 성립되는 것처럼, 기둥, 서까래, 대들보 등을 총괄해 형성된 집이라는 보편성을 뜻하며,

     • 별상(別相)은 기둥, 서까래, 대들보 그 자체가 지닌 특수성을 말한다.

     • 동상(同相)이란 기둥, 서까래, 대들보 등이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조립하고 있는 유사성을 의미하며,

     • 이상(異相)은 별상이 전체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제각기 상을 잃지 않는 것처럼, 기둥은 세로로, 대들보는 가로로 있어 다른 유형이 되고 있듯이 다양성을 의미한다.

     • 성상(成相)이란 기둥, 서까래, 대들보 등이 각각 구조적 인연이 돼서 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처럼 통합성을 나타내며,

     • 괴상(壞相)이란 기둥, 서까래, 대들보 등이 집을 성립시키고 있으면서도 각기 스스로 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별상이 제각기의 개성을 지키어 총상으로 혼융되지 않는 차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육상의 원칙은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 화합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각 상들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주 법계의 실상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십현연기(十玄緣起)와 더불어 육상원융 또한 화엄무진연기(華嚴無盡緣起)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 다른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다. 육상에서 총별(總別), 동이(同異), 성괴(成壞)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 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法界緣起)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다 육상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연기로써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 연(緣)이 모여 성립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성립된 총상(總相)은 부분을 총괄해 전체를 만들고 있다. 또 별상(別相)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을 말하는데, 이것이 총상에 의지해 원만하고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총상이 없으면 별상이 없고 따라서 총상 밖에 별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 육상의 관계를 체ㆍ상ㆍ용(體相用)의 관계로 나누어 보면, 총상과 별상은 연기의 체(體)라고 보고, 동상과 이상은 연기의 상(相)이라고 하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의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총상은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는 측면이고, 별상은 그 총상에 의지해 완성시키는 측면이다. 동상은 서로의 공통점이며, 별상은 서로 다른 개별적인 측면이다. 성상은 이 모든 뜻이 서로 연결돼 있는 측면이고, 괴상은 모든 뜻이 각각 자기의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측면이다. 이 육상 중에 별상ㆍ이상ㆍ괴상은 서로 다른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항포문(行布門)이라 하고, 총상ㆍ동상ㆍ성상은 하나로서 전체를 포섭하므로 원융문(圓融門)이라 한다. ‘항포(行布)’이란 벌여놓다, 순서대로 늘어놓는다는 말이고, 이때 행(行)을 ‘항’으로 발음한다.

    즉, 총상ㆍ동상ㆍ성상의 삼상은 그 통일성, 유기적 동질성의 양상들이고, 별상ㆍ이상ㆍ괴상의 삼상(三相)은 각각 위의 삼상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그 모든 구성분자들이 갖는 개별성, 특이성의 양상들이다.

    그러면서 항포와 원융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를 들면 전체가 따라오는 것과 같이 전체가 하나에 포섭돼 원융(圓融)과 항포(行布)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원융문과 항포문의 각 상들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주법계의 실상이다.

    또한 육상의 관계를 체(體)ㆍ상(相)ㆍ용(用)으로 나누어보면 총상과 별상의 2상은 연기 제법의 체의 측면이고, 동상과 이상은 상의 측면이며, 성상과 괴상은 용의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리고 육상 가운데 총상ㆍ동상ㆍ성상의 3상은 또 같은 관점에서 논의 되고 있는 것으로 이를 원융문(圓融門)이라 하고, 별상ㆍ이상ㆍ괴상도 공통된 관점에서 파악된 개별이어서 이를 항포문(行布門)이라 한다. 원융문은 평등문이고 항포문은 차별문이다.

    그런데 무차별의 원융문은 차별을 나타내는 항포문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항포 자체가 분명하면서도 항포가 곧 원융이 된다. 여기에 전체와 부분, 하나와 무량이 무애한 무진법계의 연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원융무애(圓融無礙)를 기반으로 전개된 육상원융 사상은 불교의 최고 원리인 중도사상(中道思想)을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원융무애의 사상은 주로 천태종과 화엄종에서 교리적인 발전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천태종의 삼제원융설(三諦圓融說)과 화엄종의 육상원융설(六相圓融說)이다. 이들에 따르면 실재를 현상적 차원에서 보면 차별상을 지니지만 실재의 본성은 평등한 것이며, 모든 현상(事)은 이치(理)에서 생긴 것이므로 이치를 여의고는 현상이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은 한결같이 평등해 현상과 이치가 서로 걸림이 없고, 나아가 차별적 현상의 사물 상호간에도 원융무애하다고 했다. 이러한 원리를 화엄종에서는 이사무애(理事無礙)ㆍ사사무애(事事無礙) 등으로 표현한다.

    즉,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은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돼 서로 융화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말들이다.

 

 

*육성취(六成就)---모든 경전은 첫머리에 여섯 가지의 필수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을 육성취라고 한다. - 오늘날 기사 따위의 문장을 작성할 때에 지켜야 하는 기본적 원칙인 육하원칙(六何原則)과 비슷한 말이다.

    ※육성취의 내용

    -붓다의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성취(信成就 : 여시/如是),---이렇게, 이와 같이

    -내가 직접 들었다는 문성취(聞成就 : 아문/我聞),-------나는 들었다

    -설법한 때를 명시하는 시성취(時成就 ; 일시/一時),--------어느 때

    -설법을 한 것이 붓다였다는 주성취(主成就 : 불/佛),--------누가

    -설법한 장소를 밝히는 처성취(處成就 : 재사위국/在舍衛國),---어디서

    -어떤 사람이 들었는가를 밝히는 중성취(衆成就 : 여대비구/與大比丘).--누구에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인 모든 경전의 시작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여대비구(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與大比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아래 실례를 든다.

   <금강경>의 경우,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스님들과 계셨다.」 모든 경전이 이런 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육손재법(六損財法)---개인이나 가정, 단체나 집단이 망하려면 갑자기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는다. 그 짐이나 징후가 조금씩 나타난다. 그러나 빠르게 망해가는 지름길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재물을 없애고, 망하는 첩경으로 6가지를 열거하시며 또한 경계할 것을 말씀하셨다.

   첫째, 술에 빠지는 것[耽湎於酒]

   둘째, 도박에 빠지는 것[博戱]

   셋째, 방탕한 생활에 빠지는 것[放蕩]

   넷째, 노래와 춤 등에 빠지는 것[迷於伎樂]

   다섯째, 나쁜 친구와 사귀는 것[惡友相得]

   여섯째, 게으름에 빠지는 것[懈墮]이다. - <선생경(善生經)>

 

*육수면(六隨眠)---수면(隨眠)이라는 말은 근본번뇌(根本煩惱)와 동의어이다. 즉 수면(隨眠)이란 다른 번뇌를 낳는 근본적인 번뇌를 의미한다.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 즉 근본번뇌로 규정하는 6가지의 번뇌를 말했다.

   즉, 탐(貪, raga) ‧ 진(瞋, pratigha) ‧ 만(慢, mana) ‧ 의(疑, vicikitsa) ‧ 무명(無明, avidya) ‧ 견(見, dṛṣṭi)을 말한다. 여기서 무명(無明)은 치(癡)라고도 하며, 견(見)은 그릇된 견해인 악견(惡見) 즉 부정견(不正見)을 말한다. 설일체유부에서 6수면(六隨眠)을 근본번뇌로 봤다는 것은, 모든 번뇌의 본질[體]을 따져보면 결국 이들 6가지 번뇌로 귀착되며, 모든 번뇌는 이 6가지 번뇌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식(六識)---현상에 나타난 마음 상태가 육식이다. 우리들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난다. 즉, 육근이 육경을 대할 때 이런 저런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육식(六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의 대상인 육경(六境)과 인식주체인 육식(六識),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삼사화합(三事和合)]에만 일어난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육감(6感)을 의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칠감(7感)을 말라식, 팔식(8識)을 아뢰야식이라 해서 근원적인 마음(모든 경험 또는 업이 저장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육식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一心)이 육근을 통해 그 대상 경계인 육경을 대해서 심적 작용을 일으킬 때 각기 식(識, 빠알리어 viññāṇa)의 이름을 얻어 육식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심(一心)이 눈을 통해 색경(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안식(眼識)이 되고, 이근(耳根)을 통해 성경(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이식(耳識)이 되며, … 이런 식으로 해서 육식이 된다는 것이다. 즉, 6근(六根) ‧ 6경(六境)을 연(緣)으로 해서 생기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을 6식이라 하는데, 그 기능은 아래와 같다.

    • 안식(眼識, cakkhu-viññāṇa)=빛을 분별

    • 이식(耳識 sota-viññāṇa)=소리의 분별

    • 비식(鼻食, ghāna-viññāṇa)=냄새를 분별

    • 설식(舌識, jivhā-viññāṇa)=맛을 분별

    • 신식(身識, kāya-viññāṇa)=촉각의 분별

    • 의식(意識, mano-viññāṇa)=모든 법(法)을 분별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중심 종교이므로 이미 초기불교에서 인간의 심식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깊어서 심식설(心識說)이 초기불교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을 초기불교에서는 육식으로 분류해 모든 정신생활을 설명했었고, 그 후에 제7식과 제8식에 대한 연구가 추가됐다.

   그런데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의 6식을 통틀어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한다. 눈앞의 경계를 분별할 수 있는 식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컨대, 와인을 음미하는데, 맛과 향은 입과 코가 한다. 즉 설식과 비식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게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것은 뇌가 한다. 즉, 의식(제6식)이 한다는 말이다.

     즉, 사과를 보는 것은 안식에 해당되지만 그것이 사과인줄 알아차리는 것은 제6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한테 '바보야'라고 하면 소리는 들리지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한테 '바보야'라고 하면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이게 전오식과 제6의식의 차이이다.  

   초기불교에서의 6식은 곧 마음[心(빠알리어, 산스크리트어 citta)]을 말하는 것으로, 부파불교에서 마음 즉 6식은 심의식 또는 심 · 의 · 식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6식은 하나의 마음의 6가지 다른 모습 또는 작용일 뿐이라고 보며, 이러한 견해를 심체일설(心體一說) 또는 식체일설(識體一說)이라 한다.---→제육 의식(第六意識, mano-vijnana=의식), 육근(六根) ․ 6경(境) ․ 6식(6識) 참조.

 

 

*6식 10명(六識十名)---제6식을 가리키는 별명 10가지를 말한다. 제6식(의식)에는 이렇게 별칭이 많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①제6식(第六識) ②의식(意識) ③반연식(攀緣識) ④순구식(巡舊識) ⑤파랑식(波浪識) ⑥분별사식(分別事識) ⑦인아식(人我識) ⑧4주식(四住識) ⑨번뇌장식(煩惱障識) ⑩.분단사식(分段死識). 이상의 열 가지 외에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한다. <종경록(宗鏡錄)> 제50권에 나온다.

 

 

*육식(肉食)의 문제---먹는 행위가 욕망은 물론 수행과도 밀접하게 관계된다. 불교 초기경전의 하나인 <수타니파타>에 의하면, 붓다는 “이 세상에서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이 부정(不淨)한 것이지 육식이 부정(不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붓다는 육식을 권장하지 않았으며 육식으로 인한 폐해도 잘 알고 있었다. 붓다 자신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한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드시고 열반에 드신 분이다.

    붓다 사후 대승 불교권에서 육식이 금지된 이유로 채식 위주로 생활한 당시 인도 브라만 집단이 불교에 참여해 불교계를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육식이 불살생계(不殺生戒) 및 불성(佛性)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설과, 육식이 건강에 이로울 것 없다는 설이 제시되고 있는데, 명쾌한 답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육식이 불살생계에 위배된다는 이야기는 어떤 전제 하에 수용돼야 할 것이다. 즉, 육식을 금지하는 것은 채식을 하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인데, 육식만 금하면 불살생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동물 뿐 아니라 식물에 대해서도 살생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채식을 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살생이다. 그러니 육식 금지라는 계율의 밑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은 살생을 최소화하려는 정신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절제하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절제하는 한 굳이 육식을 금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대승불교권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불교와 육식’ 참조. 

 

 

 

*육신보살(肉身菩薩)---육체를 가진 보살, 즉 살아있는 보살이란 말이다. 선지식을 아름답게 미화해서 불러 육신보살이라고도 한다.

 

 

*육신통(六神通, Pali:chalabhinna)---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초월적 능력을 말한다. 육신통을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고도 한다.

    ①천안통(天眼通, Pali:dibba-cakkhu-nana) - 자신과 타인의 과거세(전생)와 현생의 삶의 형태, 미래의 운명과 상태를 아는 능력.

    ②숙명통(宿命通, Pali:pubbe-nivasanussati-nana) - 자신의 과거세(전생)와 현생의 업에 따라 가는 곳을 아는 힘.

    ③누진통(漏盡通, Pali: asavakkhaya-nana) - 사성제를 통해 자신의 번뇌가 다하고, 이승을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없어졌다고 아는 힘. 중생의 번뇌를 끊는 힘. 즉, 현세의 번뇌를 모두 끊고 깨달음에 이르는 능력. 바로 멸진정(滅盡定)을 말한다.

    ④신족통(神足通, Pali:iddhi-vidha-nana) - 자유로이 원하는 곳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

    ⑤천이통(天耳通, Pali:dibba-sota-nana) - 보통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할 소리를 듣는 능력. 탄허 스님은 전화기를 천이통이라 했다.

    ⑥타심통(他心通, Pali:ceto-pariya-nana) -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

    육신통 중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등은 아라한의 경지에서도 가능하지만 누진통은 오직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육신통 중에서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이 오신통이다. 오신통이 타인ㆍ타물에게 영향을 끼치는 힘인데 비해 누진통은 자신의 번뇌를 제거한 경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다.

   불교인은 타인ㆍ타물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 번뇌를 초극하기 위해 수행한다. 따라서 오신통을 가졌지만 누진통을 이루지 못한 수행자는 범부이고, 오신통이 없더라고 누진통을 이루었으면 성자이다.

   그리고 육신통과 관련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신통력 사용을 엄격하게 금하셨다. 왜냐하면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지 신통력은 수행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할 뿐, 그 자체가 본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세, 사주, 점술, 해몽 등 부처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신통력을 발휘해 뭍 중생을 현혹하는 행위는 수행자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사악한 행위이다. 이들이 행하는 모든 것 ― 일부 신통이거나 속임수들은 업(業)으로 얻은 신통이거나 주술과 같은 것에 의해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육신통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부처님에게 여섯 가지 신통이 있어서 불가사의하다 하는데, 그렇다면 하늘의 신선이나 아수라, 혹은 큰 힘을 가진 귀신도 모두 신통이 있으니, 그것들도 모두 부처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수라가 제석천과 전쟁을 벌여 패전해서 팔만 사천 권속을 거느리고 신통을 부려 연뿌리에 있는 작은 구멍에 들어가 숨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이들을 성인이라 할 수는 없다.

    진정 신통력이란 시각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들의 유혹을 받지 않고, 청각의 세계에서 말의 유혹을 받지 않으며, 후각의 세계에서 냄새의 유혹을 받지 않고, 미각의 세계에서 맛의 유혹을 받지 않으며, 촉각의 세계에서 촉감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의지의 세계에서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생각에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라는 여섯 가지가 텅 빈 것들뿐이라는 것을 통달했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의지하는 것이 없는, 얽매임에서 벗어남이 신통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부처님도 비록 번뇌를 안고 있는 오온의 몸뚱이였지만 이 땅에서의 삶 그대로가 신통이었던 셈이다.

    부처님이 육신통을 얻으시고 성불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보살의 몸으로 이미 모든 마구니(魔軍)를 항복 받고 고요히 선정에 들어 한 마음이 투명해 우주만법이 거울 속 그림자 모양으로 소소하게 드러났다.

    밤 초경(初更)에 이르러서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마음에서 지혜 광명이 우러나며 모든 세계를 환히 비추어 보게 됐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세계도 사무쳐 보게 됐다. 이것을 천안지통(天眼智通)이라고 한다. 이 천안통(天眼通)으로 천상ㆍ인간을 다 볼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여기에서 죽어서 저 세계에 나는 것을 다 환히 보게 됐다. 곧 모든 선업을 지어서 천상이나 인간에 나는 것을 보게 되고 악업을 짓고 지옥ㆍ아귀ㆍ축생계에 나는 것도 다 환히 보게 됐다.

    다음 이경(二更)이 되자 정신이 더욱 투명해지며 지혜력을 얻게 됐다. 이 지혜로서는 과거세의 일을 모두 환히 비추어 보게 됐다. 과거세에 어떤 세상에 태어나 어떠한 일을 하다가 어떻게 죽은 것인가를 환하게 아는 지혜이다. 이것을 숙면지통(宿命智通)이라고 한다. 보살은 이 지혜를 얻음으로 과거의 일생, 이생, 삼생... 십생ㆍ백생ㆍ천생 내지 무수한 과거 세상일을 다 알게 됐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과거를 다 환히 비추어 알게 된 것이다.

    다음 삼경(三更)이 돼 선정 속에서 정신이 더욱 투명하고 지혜력이 더 밝아지면서 다른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환히 꿰뚫어 알게 됐다. 그 중생의 착한 마음ㆍ나쁜 마음ㆍ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온갖 마음을 다 환히 비추어 알게 됐다. 이것을 타심지통(他心智通)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천이통(天耳通)으로 먼 거리에 있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게 됐고,

    신족통(神足通)으로 몸이 온갖 장애물에 걸림 없이 땅속에도 들어가고 돌과 산속으로 다니기를 평지와 같이 하며 물 위와 허공에도 자유로 다니는 신통력을 얻었다.

    다음에 누진지통(漏盡智通)을 성취해 무량겁으로 익혀 온 번뇌의 습기가 완전히 없어지므로 모든 것에서 자유자재 하는 열반(涅槃)을 증득하게 됐다. 이런 육신통(六神通)을 비롯해 열 가지 큰 힘[십력(十力)]과 열여덟 가지 특이한 법[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며, 네 가지 두려움 없는 법[사무소외법(四無所畏法)]을 다 성취했다.

    그리고 다시 12인연법을 거슬러 올라가며 보고, 또 순으로 내려오면서 관찰했다. 그리하여 사경(四更)이 지나고 오경(五更)이 돼 먼동이 틀 무렵에 마침 동쪽 맑은 하늘에 떠오르는 샛별에 눈빛이 마주치는 찰라 큰 지혜 광명이 개발되며, 최상의 정각을 성취했다. 이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최상의 지혜이다. 이러함을 일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하고, 최상의 바르고 원만한 정각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고, 그것이 곧 성불(成佛)이다.---→삼명육통(三明六通) 참조.

 

 

*육십심(六十心)---밀교계통의 경전〈대일경(大日經)>의 중심사상 가운데 하나가 ‘육십심(六十心)’이다. <대일경>에는 범부의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향상시켜 가는 순세(順世)의 팔심(八心)과, 세간적인 육십심(六十心)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일경>「주심품(住心品)」에는 마음의 차별상을 말하여 60종으로 나누었는데, “탐심(貪心)ㆍ무탐심(無貪心)ㆍ진심(瞋心)ㆍ자심(慈心)ㆍ치심(癡心)ㆍ지심(智心)ㆍ결정심(決定心)ㆍ의심(疑心)ㆍ암심(暗心)ㆍ명심(明心)…” 등 60가지 마음을 말하고 있다.

          ※순세(順世)---세상일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뜻으로, 세월을 부리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말함. 승려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팔심(八心)---<대일경(大日經)>에서 선심(善心)이 점점 높아져 가는 - 마음이 점점 착해져가는 8가지 단계를 말함.

 

 

*육십이견(六十二見)---불교 이외의 가르침을 외도(外道)라고 한다. 이는 불교를 내도(內道)라고 하는데 대한 대칭으로, 외교(外敎)ㆍ외법(外法)ㆍ외학(外學)이라고도 하고, 후세에는 사법(邪法)이라고도 했다. 그 외도에 육십이견(六十二見)이 있다. 즉, 62가지의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육십이견은 불교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난 삿된 견해를 총칭한다. 즉, 62견(六十二見)은 초기불교 경전 등에서 외도(外道)의 모든 견해 또는 사상을 62종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외도의 사견(邪見)인 62견을 ‘과거에 관한 설’인 본겁본견(本劫本見) 18가지와 ‘미래에 관한 설’인 말겁말견(末劫末見) 44가지로 지적했다. 이를 합쳐 62견이라고 한다.

   - 과거에 관한 설은 -

    • 자아와 세계의 상주론(常住論) 4종

    • 자아와 세계의 일분상주론(一分常住論) 4종

    • 세계의 변무변론(邊無邊論) 4종

    • 이문이답론(異問異答論) 4종

    • 자아와 세계의 무인론(無因論) 2종 등으로 구분한다.

    - 미래에 관한 설은 -

    • 사후유상론(死後有想論) 16종

    • 사후무상론(死後無想論) 8종

    • 사후비유상비무상론(死後非有想非無想論) 8종

    • 단멸론(斷滅論) 7종

    • 현재생열반론(現在生涅槃論) 5종 등으로 나눈다.  

   그런데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달리 설명한다. 즉, <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사견은 5온(五蘊)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는 네 가지 그릇된 견해이다.

    • 물대아소(物大我小) ― 물대(物大)란 외계(外界)가 한없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가령 남이 칭찬하면 무척 기쁘고, 남이 나쁘게 말하면 몹시 기분이 나쁘다. 그와 같이 외계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는 작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자존심도 없이 남의 눈치만 보는 것이다.

    • 물소아대(物小我大) ― 그와 반대로 외계는 작고 자기는 크다고 생각하는 것. 외계는 아무래도 좋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자기만을 크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그릇된 생각이다. 아만(我慢)이 가득한 생각이다.

    • 물인아과(物因我果) ― 외계의 사실이 원인이요, 나는 과라고 하는 ― 외계의 원인에 의해 자기의 전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사람이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도둑질을 할 경우가 됐기 때문에 도둑질을 한 것이요, 당자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그릇된 생각이다. 남의 핑계만 대는 것이다.

    • 물과아인(物果我因) ― 외계의 사실은 다 결과(結果)요, 자기 쪽이 원인(原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책임감 있는 생각이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아부하는 꼴이 된다.

   위의 네 가지 그릇 된 4견에, ①색(色) ②수(受) ③상(想) ④행(行) ⑤식(識)의 5온(五蘊)이 작용해 2십(二十)이 되고, 그 2십(二十)이 삼세, 곧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다 작용해 일어나므로 모두 합하면 6십(六十)이 된다.

   여기서 다시,

   단(斷), 곧 모든 사물은 변해서 끝난다는 단멸(斷滅)의 생각과,

   상(常), 곧 모든 사물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즉 ‘무(無)와 유(有)’의 2견(二見)을 합해서 62견(六十二見)이 된다. 이와 같이 62가지의 가지가지 그릇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연달아 일어나는 것이 범부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육여시(六如是)---→십여시(十如是) 참조.

   

*육욕천(六欲天)---→욕계육천(欲界六天) 참조.

   

*육위심소(六位心所)---심왕은 여덟 가지(8識)로 한정돼 있지만, 심소는 매우 다양하다. 유식학에서는 다양한 심소들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해, 이것을 심소(心所) 육위(6位)라 했다.

    ① 변행심소(邊行心所) 5가지

    ②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③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④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⑤ 선심소(善心所) 11가지

    ⑥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이렇게 6위에 모두 51가지 심소가 있다. 학파에 따라선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육위의 심소들은 마음작용에 나타나는 그 기능과 성질별로 구별한 것이다. 이들 6위 심소 하나하나의 뜻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① 변행심소(遍行心所)---변행심소는 심식의 종류를 불문하고, 어떤 심식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반드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심왕)이 일어날 때면 모든 심식에 두루 나타나면서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심소로서 그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한다. 여기에는 5종의 심소가 있는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등을 말한다.

     • 촉(觸)이란 심소는 8식(八識) 가운데 한 식(識)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최초로 그 심식의 작용이 대상에 닿는 것을 촉이라 한다. 예를 들면, 눈의 시선(眼識)이 보고자 하는 대상물(色境)에 닿거나, 또는 귀로 듣는 마음(耳識)이 어떤 소리에 닿았을 때의 찰나를 촉이라 한다. 이는 오관을 통해 객관계의 대상물에 마음이 닿는 순간을 뜻한다.

   예컨대 큰 소리 때문에 촉이 성립된다면, 그 즉시 마음 안에는 경각심이 나타난다. 이를 작의(作意)심소라고 한다. 이 작의심소는 갑자기 큰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는 등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을 뜻한다.

     • 그 다음에 수(受)심소가 일어난다. 이는 작의심소가 앞에 무엇이 나타났다고 경종을 울려주면 그 대상의 내용을 접해 사실 그대로 안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고[고수(苦受)], 또 마음에 알맞으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낙수(樂受)] 된다. 그리고 대상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면 그저 그런대로 좋고 나쁜 생각 없이 무심히 받아들이게[사수(捨受)] 된다.

     • 상(想)심소는 밖을 통해 어떤 대상이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대상의 모습을 구별(取像)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 사(思)심소는 마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의 모습에 대해 선(善)이다, 악(惡)이다 하는 선악의 결정을 내려주는 작용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심소를 5변행심소라고 하는데, 이들 작용은 어떤 심식에든지 반드시 나타나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주는 정신작용이다.

    ② 별경심소(別境心所)---별경심소란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의 5 가지로서, 온갖 마음에 두루 통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심왕이 특정한 경계에 대해서 일어날 때에만 그 심왕과 함께 일어나는 심소이다. 그러니 모든 심왕에 두루 작용하는 변행심소에 반대되는 심소이다.

예를 들면, 좋은 경계를 만나면 욕(欲, 욕심)의 심소가 일어나고, 결정하고 선택할 필요로 하는 경계를 만나면 승해(勝解)의 심소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승해(勝解)란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해 확신하는 마음작용 혹은 대상을 확실하게 이해해 굳게 믿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염(念)은 기억하거나 알아차림, 마음챙김의 작용을 말하고, 정(定)은 선정, 삼매를 말한다. 그리고 혜(慧)는 정(定)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 분별, 반야, 관(觀), 의심 끊음 등 지혜의 마음작용이다.

    ③ 부정심소(不定心所)---사(伺, 세밀하게 고찰), 심(尋, 개괄적인 고찰), 수면(睡眠, 잠자는 것), 악작(惡作, 후회하는 마음작용) 4가지로서, 그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어서 널리 선 ․ 악 ․ 무기(無記) 3성에 통하면서도, 일체 마음에 반드시 수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닌 마음작용을 말한다.

    ④ 선심소(善心所)---선심소(善心所)는 그 성질이 오로지 선(善)인 마음작용(심소법)들의 그룹을 말하는데, 달리 말하면, 오직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과 상응해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을 말한다. 여기에는 신(信, 믿음), 참(慚, 자기가 과실을 자기 스스로 반성하는 것), 괴(愧, 남에 대한 잘못을 반성하는 것), 무탐(無貪, 무집착), 무진(無瞋, 성 내지 않는 것), 무치(無癡, 지혜, 어리석지 않는 것), 근(勤, 정진), 경안(輕安, 평온한 마음 상태, 혼침이 없는 것), 불방일(不放逸, 방종하지 않음, 성실), 행사(行捨, 적정/寂靜, 고요함, 마음의 평정), 불해(不害, 중생을 해치지 않는 마음, 자비) 등 11가지 심소를 말한다.

    ⑤ 번뇌심소(煩惱心所)---근본번뇌를 총칭하는 말이다. 근본번뇌(根本煩惱)ㆍ본번뇌(本煩惱) ․ 근본혹(根本惑) ․ 본혹(本惑)이라고도 하며, 모든 번뇌 가운데서 그 근본이고 자체인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 6가지 번뇌를 말한다. 이들 중 치(癡)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하며, 악견(惡見)은 부정견(不正見)이라고도 한다.

번뇌심소는 모든 번뇌의 근간인 근본번뇌들로 구성된 마음작용들의 그룹이다. 즉, 번뇌심소는 내면의 마음(8식, 즉 심왕, 심법)으로 하여금 항상 오염된 상태에 있게 함으로써 그 결과 유정으로 하여금 생사를 윤회하게 만드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이다.

    ⑥ 수번뇌(隨煩惱)---근본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번뇌로서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도 한다. 분(忿, 분노), 한(恨, 한탄), 뇌(惱, 번뇌), 부(覆, 죄를 감추는 것), 간(慳, 인색함), 질(嫉, 질투), 광(誑, 속이는 것), 첨(諂, 아첨), 해(害, 남을 해치는 것), 교(憍, 교만함), 무참(無慚, 부끄러워할 줄 모름), 무괴(無愧, 악한 짓 을 하고 뉘우침이 없음), 혼침(惛沈, 혼미하고 침울한 마음상태), 도거(掉擧, 들뜨고 혼란스러운 마음상태), 불신(不信, 못 믿음), 해태(懈怠, 게으름), 방일(放逸, 방종), 실념(失念, 집중하지 못해 기억할 수 없는 마음상태), 산란(散亂, 대상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것), 부정지(不正知, 대상을 잘못 파악하는 것) 등 20가지 번뇌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심소가 51가지인데, 오온(五蘊)으로 설명할 때 식(識)은 마음이고, ‘수(受) ․ 상(想) 행(行)’은 마음작용이다. 그런데 오온에서 말하는 ‘행(상카라)’이 심소(心所) 51개에 해당한다. 행에서 수(受, 느낌)와 상(想, 인식)을 따로 떼어 놓은 것은, 느낌과 인식이야말로 마음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행(行)에서 따로 떼 내어 설명한 것이다. 그러니 마음작용은 위의 심소 51가지 외에 ‘수 ․ 상’도 있는 것이다.

 

 

 

*육인(六因)---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6인(六因) ‧ 5과(五果) ‧ 4연(四緣)의 인과설에서의 6인을 말한다. 그리고 설일체유부 교학을 정리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인과 연을 다시 자세히 분류해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6인은 모든 직 ‧ 간접 원인을 6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6인은 아래와 같다.

    ① 능작인(能作因, karana-hetu)---능작인이란 어떤 결과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체를 제외한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조력하는 모든 조건의 총칭이다. 즉, 어떤 것이 생겨나는 데 도움이 되는 원인[적극적인 원인], 또는 방해되지 않는 원인[소극적인 원인]을 말한다. 그러니 직 ․ 간접의 원인 모두를 통틀어 능작인이라 한다. 일체의 유위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위 ․ 무위법을 능작인으로 삼는다.

   능작인에는 결과를 낳는 힘을 갖는 유력능작인(有力能作因)과 결과를 낳는 데 장애함이 없는 무력능작인(無力能作因)이 있다. 유력능작인은 적극적으로 작용해 결과를 낳게 하는 인(因)을 말하고, 무력능작인은 소극적으로 결과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는 인이다. 일체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신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법에 대해 능작인이 된다고 하는 말은 직접으로 결과를 낳게 하는 유력능작인과 결과를 낳는데 장애하지 않는 무력능작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설명이라는 뜻이고, 이는 증상연(增上緣)과 동일한 개념이다.

          ※증상연에는 유력과 무력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유력의 증상연은 뚜렷하게 힘이 되는 조건이다. 이에 대해 무력의 증상연은 구체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조건이다.

    ② 구유인(俱有因, sahabhu-hetu)---서로 간에 과(果)가 되는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 즉, 구유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는 법으로 어떤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결과와 동시 병존하는 원인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이 되고 과(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공간적인 의존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팡이 세 개를 서로 의지해 세웠을 경우 각각의 지팡이는 다른 지팡이의 구유인이 된다는 말이다.---→구유인(俱有因) 참조.

    ③ 동류인(同類因, sabhaga-hetu)---동류인이란 결과와 유사한 성질을 지닌 원인으로 같은 성질의 사물이 같은 성질의 결과를 낳게 되는 원인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과거의 선행이 원인이 돼 현재의 복이 된다면 과거의 선행은 동류인이 된다. 즉, 선한 오온은 선한 오온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시간적인 선후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동류인(同類因) 참조.

    ④ 상응인(相應因, 산스크리트어 samprayuktaka hetu)---구유인 중에서 심(心)과 심소(心所)의 관계를 말한다. 심(心)과 심소(心所) 또한 평등한 관계로써 함께 작용하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심리적 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각각의 심리적 요소들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갈대를 한 대씩 따로따로 세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여러 대 합해서 단으로 묶으면 세울 수 있는 것처럼, 심리적 요소들은 여러 개가 상응인이 돼 서로 어울릴 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심리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구사>에서는 심소(心所)의 달마는 심왕의 움직임을 원인으로 하고, 심왕은 심소의 작용을 원인으로 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경우도 심왕과 심소는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되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원인에 수반해서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결과는 원인보다 찰나의 늦음이 있는 점에서 구유인과 다르다.---→5과(五果), 4연(四緣) 참조.

    ⑤ 변행인(遍行因, sarvatraga-hetu)---동류인(同類因) 중에서 힘이 강한 번뇌가 원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세운 것. 즉, 동류인 중에 번뇌가 일어나는 경우를 따로 독립해서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강력한 번뇌가 특정한 대상에 한하지 않고 널리 여러 번뇌를 일으킬 때의 그 원인을 말한다. ‘나’에 대한 집착과 같은 잘못된 견해, 의혹, 무지 등의 번뇌는 그것이 원인이 돼 다른 번뇌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어떤 번뇌가 다른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를 특별히 변행인이라 한다.---→변행인(遍行因) 참조.

    ⑥ 이숙인(異熟因, vipaka-hetu)---이숙(異熟)의 뜻은 달리 숙성(熟成)된다는 의미로서, 다른 성질의 존재로 변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숙인이란 다른 시기와 다른 장소에서 성숙하는 것이란 말인데, 성질이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을 말한다. 즉, 원인과 다른 결과를 나타내는 원인이 이숙인(異熟因)이다. 이 경우의 성질이란 선악의 성질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현생에서 악업을 지어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졌다면 현생에서 지은 악업은 이숙인이 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받은 몸은 이숙과가 된다. 그런데 지옥에서 받은 몸은 선악의 성질로 볼 때에는 중성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고 한다. 인과관계에 의해서 악업이 악업의 재생산에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선의 행위(업)는 즐거움의 경우를, 악업은 고의 경우를 오게 한다고 불교에서는 생각하고 있다. 이 경우 결과는 행위가 이루어진 찰나가 아니고, 어떤 시간(결과를 생기게 하기 위한 성숙되는 시간)을 두고 결과가 나타난다. 더구나 원인이 선이나 악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라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이러한 성질을 무기라고 한다)성질이 다른 경우가 되기 때문에 선악에 관계되는 원인을 이숙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인과관계 의해서 악업이 악업의 재생산에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전제로 해서 어떤 나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자도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부단히 정진하면 미래에 나쁜 과보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윤리적 또는 수행상 논리를 세우고 있다.

 

*육인(六因)ㆍ사연四緣)ㆍ오과(五果)---<구사론(俱舍論)〉에서는 설일체유부의 교의인 인과 연을 다시 자세히 분류해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는 연기(緣起)를 보다 분석적으로 이해해, 육인(6因), 사연(4緣), 오과(5果)로 해석했다. 모든 원인을 6종으로 분류해 육인(6因)이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일체의 원인을 4종으로 분류하여 사연(4緣)이라 했다.

   인(因)과 연(緣)은 결과에 대한 원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불교 용어에서는 구별해 사용한다. 인(因)은 결과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고, 연(緣)은 간접적으로 결과가 생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조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구별돼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분류방법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유부에서 인(因)은 법과 법의 관계가 아니라 법이 갖는 힘이다. 육인이란 능작인(能作因), 구유인(俱有因), 동류인(同類因), 상응인(相應因), 변행인(遍行因), 이숙인(異熟因)을 말한다.

    • 능작인은 자신을 제외한 일체법은 능작(能作)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 구유인은 인과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로서, 서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 경우이다.

    • 동류인은 같은 성질의 법이 다른 성질의 법을 생기(生起)하는 인이 되는 것이다.

    • 상응인은 심(心)과 심소(心所)의 상응관계를 말한다.

    • 변행인은 동류인 가운데 특수한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특정의 강력한 번뇌가 두루 심(心)과 심소(心所)를 물들이는 것을 말한다.

    • 이숙인은 다른 성질의 법이 법을 생기(生起)하는 인이 되는 것이다. 이숙이란 인(因)과 과(果)가 다르게 성숙한다는 의미로, 인은 선악이지만 과로서의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라는 것이다.

   오과(5果)란 이숙과(異熟果), 증상과(增上果), 등류과(等流果), 사용과(士用果), 이계과(離繫果)이다. 이숙과는 이숙인에 대응하는 것이다. 선악의 업과 그 과(果)의 관계로 인(因)이 선행하고 후에 과(果)가 생기하며 인(因)과 과(果)는 동류가 아니다. 증상과는 뛰어난 과(果)라는 의미로서 능작인의 과(果)이다. 동류인과 변행인은 등류과를 가져온다. 구유인과 사응인의 과(果)를 사용과라고 한다. 이계과란 깨달음을 말한다. 이는 수행의 힘에 의해 증득되는 것이다.

    사연(4緣)이란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이다.

    • 등무간연은 물질에는 없고 심법과 심소법에만 있는 것이며, 심과 심소가 연속하여 일어나는 경우에 앞의 심과 심소가 멸하는 것이 다음의 심과 심소가 일어나는데 조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前)찰나의 심과 심소를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 소연연은 인식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 증상연은 육인(6因) 가운데 능작인과 같다. 인연은 육인(6因) 가운데 능작인을 제외한 오인(5因)을 통합한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12연기가 윤회의 상태를 밝히는 것이라고 보고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했으며, 또한 연기에 대해서는 육인, 사연, 오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적 이해는 오히려 본래의 취지를 퇴색시키고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육인(六因), 사연(四緣), 증상연(增上緣), 오과(五果) 참조.

 

 

 

*육입(六入, 빠알리어 sa.laayatana, 산스크리트어 Sad-āyatana)---12연기에 있어서, 무명(無明)을 원인으로 행(行)이 일어나고, 행(行)을 원인으로 식(識)이 일어나고, 식(識)을 원인으로 명색(名色)이 일어나고, 명색(名色)을 원인으로 6입(六入)이 일어나고, 육입(六入)을 원인으로 촉(觸)이 일어난다. 여기서 식(識)은 육식이고. 명색(名色)은 오온을 말한다.

   육입(六入)은 육근(六根), 육처(六處)를 말하며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 또는 감각 장소, 또는 그 작용을 말하기도 한다.

   육입(六入)의 여섯 가지 감각 장소는 다섯 가지 물질의 감성이다. 이는 눈, 귀, 코, 혀, 몸의 감성을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의입(意入)으로 마음을 말한다. 마음도 감각기관의 하나로 본다. 이때 의입(意入)이라는 감각 장소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32가지 과보심(果報心)이다.

    욕계에서는 육입이 모두 일어난다. 그러나 그 중에 색계에서는 안(眼), 이(耳), 의(意)라는 감각기관만 일어난다. 그리고 무색계에서는 의(意)라는 감각기관만 일어납니다. 무색계는 정심(마음, 마음작용)만 있는 곳이란 말이다.

    육입(六入)은 마음이 머무는 곳 6가지이다. 이는 6문(六門)과 관계된 법이 생기도록 노력하는 특성이 있다. 육입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고, 아는 것을 말한다. 육입은 마음이 머무는 6곳이다. 그래서 육입처(六入處)라 한다. 이는 6근(六根)과 관계된 법(생각, 사물, 진리)이 생기도록 노력하는 특성이 있다.

   여섯 가지 입처를 원인으로 여섯 가지 접촉의 법이 일어난다. 6입처에서 입처는 장소를 말한다. 모이는 장소, 감각장소를 말한다.

   그런데 6입처는 육체과 정신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접촉은 6입처(六入處)가 원인이고, 6입처가 발생시키며, 6입처가 생기게 하고, 6입처가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6입처(六入處)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게 됐는가. 6입처(六入處)라는 말은 소위 감각기관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이 인식과 마음작용이 일어나고 커지게 되는 곳이란 뜻이다. 6식(六識)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6가지 내적인 어떤 것(곳)이란 말이다. 육입처는 단순히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해 육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삼사화합되는 곳=촉)이 육입처라는 말이다.

 

 

*육자진언(六字眞言)---<천수경>에 나오는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관세음보살진언을 이른다. 성철 스님이 50여 년 전에 ‘옴 마니 파드메 훔’이라고 고쳤으나 아직도 ‘옴 마니 반메 훔’ 쪽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진언을 부르면, 여러 가지 재앙이나 병환, 도적 등의 재난에서 관세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을 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고 한다.---→옴 마니 반메 훔(唵嘛呢呗美吽) 참조.

 

 

*육재일(六齋日)---불교에서 신자들에게 경건하게 보낼 것을 권한 여섯 재일(齋日). 재일이란 부처님이나 승단에 공양을 올려 공덕을 쌓는 의식을 갖는 날을 말한다. 사부대중의 경우 한 달에 6일(매달 음력 8 ․ 14 ․ 15 ․ 23 ․ 29 ․ 30일)은 소식(素食)이다. 이 날은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보내는 육재일이다. 이날은 사천왕(四天王)이 천하를 순방하면서 사람들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고, 또한 악귀가 사람의 빈틈을 노리는 날이어서 계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한다.

   6재일 가운데 14일과 15일, 29일과 30일이 잇달아 있는 것은 보름 단위로 계목(戒目)을 읽으면서 자기가 받은 계를 잘 지켜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는 포살일(布薩日)이기 때문이다. 포살은 보름마다 동일한 지역 내에 거주하는 출가자들이 한 곳에 모여 지난 보름간의 자기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참회하는 의식이다. 이 포살 의식에 동참하는 재가자는 8가지 계를 받아야 하는데, 그 8가지 계를 팔관재계(八關齋戒)라 한다.

   이 육재일을 살펴보면 부처님 시대에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의 재가불자들은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가 수행자들의 수행을 체험적으로 경험시키는 제도를 두었다. 그러므로 육재일은 불자들이 피상적으로만 불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출가의 삶을 본받아 정진하는 정진일(精進日)이다.

   이러한 육재일에 대한 불교전통이 차차 변해 10재일로 바뀐 듯하다. 10재일은 6재일에다 1일, 18일, 24일, 28일을 더한 것이며, 각 재일에 특정한 불보살을 배대(配對)해 의미를 두었다. 각 재일에 배대된 특정한 불ㆍ보살을 보면,

    1일은 정광불(定光佛), 8일은 약사여래(藥師如來),

    14일은 보현보살(普賢菩薩), 15일은 아미타불,

    18일은 지장보살(地藏菩薩), 23일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24일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28일은 비로자나불,

    29일은 약왕보살(藥王菩薩), 30일은 석가모니불이다. 이것을 십재일불(十齋日佛)이라 부른다.---→팔관재계(八關齋戒) 참조.

 

*육적(六賊)---달마 대사께서 첫 제자 이조 혜가(慧可)의 물음에 “삼독(三毒)은 하나인 본체에서 스스로 삼독이 됐거니와, 만일 육근(六根)에 맞추어 나타나면 육적이라고도 하나니, 육적(六賊)이라 하는 것은 곧 육식(六識)이다. 이 육식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모든 뿌리로 출입해 온갖 것에 물들어 자연히 악업을 일으켜 진여(眞如)의 바탕을 장애한 까닭에 육적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도둑(賊)이라 한 것은 번뇌 망상은 우리들의 참 성품을 해롭게 하므로 번뇌를 가리켜 도둑이라 했다. 즉,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라는 육근이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육경(六境)을 매개로 해서 참 마음을 빼앗아 가므로 도적에 비유해서 육적이라 한다..

 

 

*육정(六情)---① 사람의 여섯 가지 성정(性情)을 말한다. 곧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ㆍ애(愛)ㆍ욕(慾)을 육정이라 한다. ② 육근(六根)을 육정이라고도 하는데, 근(根)에는 정식(情識)이 있기 때문이다. ③ 육근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번뇌 망상을 일컫기도 한다.

 

 

*육조단경(六祖壇經)---중국 선종 제6대조인 혜능(慧能) 선사의 자서전적 일대기로서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근본 선서(禪書)이다. <법보단경(法寶壇經)> 혹은 단경(壇經)이라고도 하며, <육조단경>에는 5가지 정도의 판본이 있다.

    그 중 「돈황본 단경」이 가장 오래 된 판본이다. 733∼80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혜능의 본뜻에 가장 근접한 판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후반 국내 불교계에서 단박에 깨우치는 돈오(頓悟)와 차츰 깨우치는 점오(漸悟) 가운데 어떤 수행법이 맞느냐 하는 이른바 ‘돈점논쟁’이 벌어졌을 때 성철 스님이 돈오를 강조하기 위해 토를 달고 번역한 판본도 바로 「돈황본 육조단경」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경(經)일 수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으로 분류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박한 사상성과 간결한 문체 때문에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의 여러 나라에서 경(經)과 같은 존숭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선사(禪師)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필, 보충한 형태로 편찬됐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둔황(敦煌)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오래돼 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미상이나 혜능의 제자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가 얼개를 구성하고, 신회의 사후, 신회의 제자 중 한명이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혜능 대사가 <단경>에 대해 내린 교지는 단경의 권위를 말해주고 있다. “대사께서 조계산에 주석하시며 소주와 광주에서 40여 년 간 중생을 교화하셨다. 문인(門人)이 출가 재가를 합쳐 3∼5천 명으로 말로써 다할 수가 없을 정도다. 만약 종지에 대해서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해 이것을 의지케 했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종지를 품승하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어느 곳에서 언제 어느 때에 누구로부터인지 그 성명을 명기해 서로 부촉하도록 해야 한다. <단경>의 품승이 없으면 남종의 제자가 아니다.” 라고 해서, 마치 혜능 이전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법을 의발(衣鉢)로써 상징하듯이 혜능 대사는 전법의 상징으로서 <육조단경>의 전승을 말했다.

    인도에서의 선정 수행방법을 중국적으로 적용시킨 것이 바로 선(禪)인데, 이런 중국적 선정을 확립시킨 사람이 혜능 선사이다. <육조단경>은 이러한 혜능 선사가 돈오(頓悟)와 견성(見性)을 기치로 남종선을 부각시킨 경전이다. 우리나라의 불교에서 <육조단경>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전통적인 소의경전이므로 이 경이 갖는 위치는 지대하다. 특히 <육조단경>은 일체법의 무상무념(無想無念)을 밝힌 구절이 유명하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는 「무념위종(無念爲宗)하고 무상위체(無相爲體)하고 무주위본(無住爲本)하라.」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바탕)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는 말이다.

    무념(無念)이란 염(念)에서 염이 없음이요, 무상(無相)이란 상(相)에서 상을 떠남이며, 무주(無住)란 사람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원수거나 간에,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한국 선종의 뿌리도 중국 남종선에 유래한 까닭에 일찍부터 <육조단경>이 유행해 이제까지 밝혀진 목판판각(板刻) 종류만도 20여종이나 되며, 주로 덕이(德異) 선사가 간행한 덕이본(德異本)이 유통돼 왔다.

    혜능 선사는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글자도 해독하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설법한 내용을 제자들이 기록하고, 그것을 읽는 것을 들어보고 그 뜻이 맞는 것인지 확인하는 형식으로 <단경>이 이루어졌으니 낱낱의 글자까지는 같은 뜻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선사가 열반하기 한 달 전까지도 제자들 간에 <단경>의 뜻을 바로 잡는데, 내가 옳다니 네가 그르다느니 하며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출판 된 <육조단경>이 조금씩 내용이 다르게 수십 종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가장 초기의 것으로 파악된 돈황본조차도 오자와 탈자가 더러 있다고 한다.---→종보본(宗寶本), 혜능(慧能),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참조.

 

 

*육종진동(六種震動)---세상에 상서(祥瑞)가 있을 때 대지(大地)가 여섯 가지 모양으로 진동하는 것을 말함. 곧 동(動:움직이는 것)ㆍ기(起:일으키는 것)ㆍ용(踊: 뛰노는 것)ㆍ진(振:떨치는 것)ㆍ후(吼:우는 것)ㆍ격(擊:때리는 것)을 말한다.

    ①동(動) ②기(起) ③용(湧)이라 하는 것은 모양이 변하는 상태가 가시화(可視化)하는 것이고, ④진(震) ⑤후(吼) ⑥각(覺)이라 하는 것은 소리가 변하는 것으로 청각적(聽覺的)인 것을 말한다. 또 아래와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① 변동(遍動) : 한 방향으로 움직임이 있는 작용.

    ② 변기(遍起) : 흔들려서 움직이는 작용.

    ③ 변용(遍涌) : 솟아올라 퍼져가고 6방으로 출몰하는 움직임의 작용.

    ④ 변각(遍覺) : 큰 소리가 나면서 깨달아 일어나는 작용.

    ⑤ 변진(遍震) : 은은하게 소리가 나는 작용.

    ⑥ 변후(遍吼) : 포효하는 듯이 꽝 하고 큰소리가 있는 작용.

 

 

*육중법(六重法)---여섯 가지 저지르지 말아야 할 중대한 법을 말한다.

    ①불살생(不殺生) ― 살생하지 아니함.

    ②불투도(不偸盜) ― 도둑질 하지 아니함.

    ③불사음(不邪淫) ― 사음하지 아니함.

    ④불망어(不妄語) ― 망념 된 말을 하지 아니함.

    ⑤불음주(不飮酒) ― 술 마시지 아니함.

   이상 오계(五戒, 산스크리트어 pañca-sila)에다가 아래 불설사중과를 더한 것이 육중법이다.

    ⑥불설사중과(不說四衆過) ― 사중의 허물을 말하지 아니함이다. 여기서 사중(四衆)이란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언하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거나 남의 잘못을 세상에 퍼뜨리지 않음을 말한다.

 

 

*육즉(六卽)---천태 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 538~597)가 <법화경>을 설하면서 한 말이다. 육즉(六卽)이란 불법(佛法)을 배우기 시작해서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게 될 때까지를 여섯 단계로 나운 것이다.

    곧, ①이즉(理卽) ②명자즉(名字卽) ③관행즉(觀行卽) ④상사즉(相似卽) ⑤분증즉(分證卽) ⑥구경즉(究竟卽)의 여섯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여섯 단계로 나누었지마는 이것은 결코 각각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연속된다고 한다. 여기서 ‘즉(卽)’은 떨어지지 않고 연속된다는 뜻이다. 여섯 단계의 경지가 각각 다르기는 하지마는 그것은 마치 층계와 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 있다는 뜻이다.

     ① 이즉(理卽) ―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고는 몇 만 년을 가도 부처가 될 수 없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즉’의 위치에 있다고 한다. 범부도 부처님이 될 불성이 있지마는 수행이라는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상태를 ‘이즉’이라고 한다.

    ② 명자즉(名字卽) ― 불교를 약간은 배워서 여러 가지 용어나 법구를 알고 있음을 말한다. 사성제(四聖諦)란 이런 것이다. 팔정도(八正道)란 이런 뜻이다, 부처님이란 이런 뜻이다, 이런 것을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이 곧 ‘명자즉’이다.

    ③ 관행즉(觀行卽) ― 자기가 배운 것과 자기가 행하는 것을 비교해 스스로 자기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관행즉’이다. 예컨대, <법화경>을 전부 알았다, 이만하면 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마는, 다시 꼼꼼히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를 배웠지마는 원래 범부 그대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내 행동의 어디엔가 잘못이 있지 않은가, 반성해 봐야 하겠다.”라고 스스로 자각 하는 과정이 ‘관행즉’이다.

    ④ 상사즉(相似卽) ― 누구나 수행을 쌓으면 겉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만으로는 부처님과 별 차이가 없이 되는 것, 곧 상(相)만은 닮은 것이 ‘상사즉’이다. 그러나 형상과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큰 소리로 남을 욕하는 일은 없지마는 마음속으로는 욕을 하면서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와 같이 형상에 나타난 모양은 부처님과 비슷하지마는 속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상이 닮았어도 마음이 이에 미치지 못함이다. 형상만이라도 부처님을 닮겠다고 노력하는 그런 경지가 ‘상사즉’이다.

    ⑤ 분증즉(分證卽) ― 자기의 처지에 따라 깨닫는 것. 자기가 실행해 봐야 비로소 ‘아, 이것이로구나.’ 하고 알 게 된다. ‘분(分)’이란 그 사람의 경지, 그 사람의 됨됨이, 그 사람의 지위, 그 사람의 환경 등 일체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분(分)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장사를 하면서 깨달을 수 있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회사에 근무하면서 깨달을 수 있다. 높은 사람은 높게, 낮은 사람은 낮게, 그 처지에 따라 각기 산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분증즉’이다. 이쯤 되면 비로소 불법(佛法)의 분(分)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일부분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또 그 일부분이라도 자기의 것이 된 사람의 일언일행(一言一行)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가 있다.

     ⑥ 구경즉(究竟卽) ― 최후의 깨달음, 곧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 ‘육즉’에 대해 너무 이론적이라는 비난도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마음가짐 하나로 바로 극락에 간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마는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깨달음을 얻기는 쉽지 않다. 범부의 마음은 항상 일정치 않아서 때로는 ‘관행즉’까지 갔다가는 다시 뒷걸음질 쳐서 ‘이즉’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누구나 자기가 생각해도 감탄할 만한 마음이 일어나는 일이 있고, 때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마음이 드는 때도 있다. 그러므로 배워 익혀서(習學) 되풀이 해 수행하는 동안에 차차 부처님 문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이 육즉이다.

 

 

*육진(六塵)---육경(六境)과 같은 말. 6경이란 눈(眼根)의 대상인 색(色境), 귀(耳根)의 대상인 소리(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觸境), 의지(意根)의 대상인 법(法境)을 합해 말하는 것이다. 6가지 감각의 대상은 먼지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6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사람을 미망(迷妄)에 빠뜨리기 때문에 6망(六妄)이라고도 하며, 선(善)을 쇠멸시키기 때문에 6쇠(六衰)라고도 하고, 모든 선법(善法)을 핍박하기 때문에 6적(六賊)이라고도 한다.

   육식(六識)의 대상계(對象界)로서 사람의 심성을 더럽히는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의 육경(六境)을 말하는데, 6경은 6근(六根)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서 우리들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덮어 흐리게 함으로 진(塵)이라 한다.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중국 수나라 때 선종 제3대 조사 승찬(僧瓚) 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육진(六塵)은 육경(六境)과 같은 말이다. 육경을 육진이라 하는 것은, 그 육경이 우리들 마음을 흔들어놓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 해서 육진이라 한다. 멋진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고, 고운 목소리를 들으면 같이 놀고 싶고, 좋은 냄새를 맡으면 먹고 싶어지고… 이렇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이기에 육진이라 한다.

    그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음이라 하는 이 말은 육진이 정각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귀(耳)라는 근(根)으로 누가 엄청나게 모함하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아니면 눈(眼)이라는 근(根)으로 남이 토해놓은 오물을 봤다거나 해도 내 본질, 내 근본 마음에 모함당한다거나 더럽다고 고통당하지 않고, 내 감정이 그에 흔들리고 끌려가지 않는다면 바로 모든 육진은 육진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좋은 것, 좋은 목소리, 좋은 냄새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육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곧 깨달음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육진이 나(본인)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데 육진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이러한 이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한다.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천번만번 일어났다 꺼졌다 하더라도 바닷물 자체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일이 본래 없는 이치와 같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거품 자체가 바닷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생(生)하고 멸(滅)하는 사실 자체가 그림자임을 깨닫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볼 때 내 안에서 육근, 육진을 통해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인 좋다, 싫다, 밉다, 곱다, 너다, 나다 하는 모든 분별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육진불오(六塵不惡)를 우리 삶에서 살펴보면 내 단점, 내 못된 성질이라는 물거품을 어떻게 다스려나가야 하는가 하는 길이 보이게 된다. 각자 자기 자신의 단점이나 모자라다고 느끼는 그 생각을 자신의 본질이라는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보고 연기공성(緣起空性)을 깨달으면 그 길이 곧 길 없는 길이다. 길 없는 길이란 말길이 끊어진 길이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길, 대자유의 길, 깨침의 길이다.

   

*육천신(六天神)---범왕(梵王-梵天王)ㆍ제석천(帝釋天)ㆍ자재천(自在天)ㆍ대자재천(大自在天)ㆍ천대장군(天大將軍)ㆍ비사문왕(毗沙門王)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육천신(六天神)의 몸으로 나타나기도 해서 법을 설한다고 한다.---→비사문왕(毗沙門王) 참조.

 

*육체도 본래불(本來佛)의 현성(現成)---‘육체는 없다’, ‘물질은 없다’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은 오관의 감각에 의해 일체존재를 번역해서 그것을 편의상 물질로 보고 육체로 보고 있지만, 그것은 일상생활의 편의상의 번역이고, 엄정하게 말하면 오히려 오역(誤譯)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번역하지 않고 그 실상을 파악하면 물질로 보이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산천초목, 국토 모두 부처의 현성’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육체로 보이고 있는 것을 오역하지 않으면 그것은 육체가 아니라 신의 생명 그 자체의 시현(示現)인 영적 실재란 말이다.

    이리해서 물질로 보이는 것은 실은 물질이 아니라 부처의 현성이고, 육체로 보이고 있는 것은 실은 육체가 아니라 영체라고 한다면, 어디에도 물질은 없고 육체는 없고 그것을 물질로 보고 육체로 보는 것은 미망이고 환상이고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은 없다’, ‘육체는 없다’고 하는 의미는 이와 같은 것이다. - 다니구찌 마사하루(谷口雅春)

 

*육추(六麤)---여섯 가지 거친 것이란 말이다. 삼세상(三細相)에 의해 주관과 객관이 나뉘고, 인식할 대상이 나타나면 본격적으로 갖가지 망상분별이 일어나 현격한 모습[추상(麤相)을 나타내게 되는 여섯 과정을 말한다. 즉, 지상(智相)ㆍ상속상(相續相)ㆍ집취상(執取相)ㆍ계명자상(計名字相)ㆍ기업상(起業相)ㆍ업계고상(業繫苦相)을 말한다.---→삼세육추(三細六麤) 참조.

 

*육취(六趣)---육취(六趣)에서 ‘취(趣)’는 산스크리트어 가티(gati)의 번역인데 도(道)의 뜻이니, 육취는 곧 6도(六道)를 말한다. 중생이 자기가 지은 행위 즉 업(業)에 따라 나아가는 생존의 상태 또는 세계를 말한다.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수라) ‧ 인 ‧ 천이 육취인데 이것은 대승에서 취하는 설이고, 소승에서는 수라를 천(天) 또는 아귀에 포함시켜 5취설을 취한다. 천 ‧ 인 ‧ 수라는 선업에 의해 태어나게 되므로 삼선취(三善趣)라 하고 지옥 ‧ 아귀 ‧ 축생은 악업에 의하여 태어나게 되므로 삼악취(三惡趣)라고 한다. 육취는 아래와 같다.---→육도(六道) 참조.

    ① 지옥취(地獄趣) - 8한(寒)ㆍ8열(熱) 등의 고통 받는 곳으로 지하에 있음.

    ② 아귀취(餓鬼趣) - 항상 밥을 구하는 귀신들이 사는 곳.

    ③ 축생취(畜生趣) - 금수(禽獸)가 사는 곳으로 인간계와 있는 곳이 같음.

    ④ 아수라취(阿修羅趣) - 항상 진심(嗔心-성낸 마음)을 품고 싸움을 좋아한다는 대력신(大力神)이 사는 곳.

    ⑤ 인간취(人間趣) - 인류가 사는 곳. 남섬부주(南贍部洲) 등 4대주(大洲).

    ⑥ 천상취(天上趣) - 몸에 광명을 갖추고 자연히 쾌락을 받는 중생이 사는 곳.---→육도(六道, sad-gati) 참조.

 

 

*육통(六通)---육신통(六神通)의 준말이다. 불법을 열심히 닦아 어느 경지(아라한 수준)에 이르면 신통력이 생기는데,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한다.---→육신통(六神通) 참조.

 

 

*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이라고도 한다. 천태종에서 선정에 대해 자세히 분별하는 여섯 가지 묘문(妙門)을 말한다. 천태사상체계는 이론체계인 교문(敎門)과 실천체계인 관문(觀門)으로 구성돼 있다. 교문과 관문을 하나로 하면서 완벽한 조화의 하모니를 이루어 거대한 대승사상의 오케스트라를 만든 사람이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이다.

   다음은 경봉(鏡峰) 스님의 6묘문(妙門)에 관한 법문이다. 경문에 나오는 ‘문(門)’은 대개 출입문이란 의미 이외에, 따위, 부류, 그런 종류, 상태, 가르침 등의 의미가 있다.

   가고 오는 것이 (道)가 아님이 없고, 삼라만상이 도 아님이 없으며, 잡고 놓는 것이 선 아님이 없는데, 처음 배우는 이들은 이렇게 말만 듣고 알아도 안 된다. 날개도 나지 않은 새가 나르려 하다가 떨어져 죽게 되는 격이다. 선(禪)에 대해서 여섯 가지의 묘문(妙門)이 있다. 이것은 참고삼아 들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지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화두를 들다가 화두를 버리고 이것을 하라는 말도 아니다. 참고적으로 한 번 들어두라는 말이다.

    1) 수식관(數息觀)----참선 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입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도 한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망상(妄想)이 복잡하게 일어날 때 숨을 고르면 망상이 어느 정도 잦아지기 때문이다.

   숨을 쉴 때, 들여 쉬고 내쉬는 이것을 열까지 세고 버린다. 왜 열까지 세고 버리느냐 하면 열이 넘으면 망상이 생긴다. 들어가는 숨을 세고 나오는 숨도 세면 분별이 많아지니 들어가는 숨은 빼고 나오는 숨만 세는 수도 있다. 열 번씩 세다가 혹은 세 번이나 다섯 번이나 일곱 번까지 세다가 망상이 생기면 잘못 세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센다. 열 번까지 가지 말고 이렇게 숨을 세는데서 다른 생각이 들어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정신이 집중이 된다.

    2) 수문(隨門)---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을 조절해 숨소리를 헤아려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릴 동안에 마음이 분산되지 아니한다면, 이를 수문(隨門)이라 한다. 호흡을 헤아리지 않고서 숨 쉬는 대로 내버려 두고 거기에다 의식만 붙이는 것이 수문이다.

    3) 지문(止門)---숨 쉬는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히 하는 것을 지(止)란 한다. 즉, 마음이 본래 고요한 것이지만 생각의 파도가 분주스럽다. 그래서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야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야 한다. 본래 고요한 자리이건만 자기 스스로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그 생각의 파도가 출렁인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서 그 마음이 밝고 밝아지면 편안해진다. 그래서 지(止)를 의지해 생각이 고요하고 요란치 않는 이것을, 수(隨)를 버리고 지(止)를 닦는 문이라 한다. 마음에 파동이 없으면 모든 선(禪)이 정(定)해지니 이것을 지문(止門)이라 이름 한다.

    4) 관문(觀門)---관문이란 분별을 방편으로 끊는 것을 이름 해 관(觀)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지문(止門)을 인(因)으로 해서 제선(諸禪)을 증득하나 지혜를 밝히지 못하면 밝지 못한 마음이 모든 선정을 혼미해지게 하나, 마음을 관(觀)해 오음(五陰)의 헛됨을 분별해서 알면 전도(顚倒)가 이미 없어지나니 새는 일이 없는 무루방편이 이로부터 개발되므로 관(觀)으로써 문을 삼는다.

    5) 환문(還門)---환문이란 마음을 굴려서 돌이켜 비추는 것을 환문이라 한다. 수행자가 관조(觀照)하는 것을 닦더라도, 그리고 만약 내가 능히 관(觀)하고 비추어서 전도심(顚倒心)을 파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의혹이 오히려 외도(外道)들보다도 더 큰 것이 남기 때문에 마땅히 마음을 굴려서 능히 마음을 관조해 헛된 가운데는 참됨이 없는 줄 요달하면 그 관조(觀照)함으로써 생기는 ‘나’를 집착하는 전도됨이 없어지고 새는 일이 없는 무루방편의 지혜가 자연히 밝음으로 환(還)으로써 문을 삼는다.

    6) 정문(淨門)---정문이란 마음이 의지할 바가 없으면 망심의 파도가 일지 않는 것을 정(淨)이라 한다. 수행자가 환문(還門)을 닦을 때에 능히 전도심을 관조해 파하더라도, 참으로 밝아 무루의 지혜가 밝지 못하면 능소(能所)가 없는 곳에 머무름이니, 곧 한 생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지혜가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나 이렇게 깨달아서 알면 머무름에 집착도 하지 않고 맑고 청정한, 즉 참되고 밝은 것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개발된다. 곧 삼계(三界)의 얽힌 의혹을 끊고 삼승(三乘)의 도를 증득함이니 이것이 정(淨)으로써 묘문(妙門)을 삼는 것이다.

   수행자가 만약 모든 법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것을 체득하면 곧 자성선(自性禪)을 얻게 된다. 이러한 선정을 증득하는 까닭에 이승(二乘)의 수행자가 열반을 증득한다. 보살은 선정에 의지하는 까닭에 대보리의 열매를 얻을 수 있으며 이미 얻었거나 지금 얻거나 미래에 얻게 되는 것이다. 정(淨)을 묘문으로 삼는다 함은 그 의미가 여기에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을 육통묘문(六通妙門)이라고 한다. 차례로 서로 통해 참으로 묘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것이 수행자의 방편문(方便門)이다. 하지만 말과 글로써 하루 종일 말하고 십년, 백년을 말하더라도 말은 말이요, 글은 글일 뿐이다. 어찌 이 도리를 거량(擧量)할 수 있겠는가. - 경봉 스님

이 여섯을 모두 묘문(妙門)이라 한 것은 열반에 이르는 미묘한 문이 되기 때문이다. 육묘문은 숨을 관찰해 열반에 이르는 선정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호흡을 살펴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바로 그 선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 방법은 <아함부 경전> 곳곳에 널리 설해져있으며, <안반수의경>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전해진다.

    이러한 육묘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의 셋은 정(定) 혹은 지(止), 뒤의 셋은 혜(慧) 혹은 관(觀)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여러 선정법은 오로지 선정의 즐거움에 안주해 지혜가 부족했다. 반면, 불교의 수행법은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며, 지와 관이 조화를 이루는 점에서 차별됐다. 육묘문은 그러한 불교수행의 특징을 한 눈에 보여주는 수행법이다. 천태 지의는 이 육묘문의 수행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육파철학(六派哲學)---고대인도의 브라만 계통 정통철학의 여섯 학파를 말한다. 고대인도 육사외도(ṣaḍ samānā, 六師外道)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육사외도는 브라만교를 반대하지만 육파철학은 브라만의 기본 성전인 <베다(veda)>를 어떤 의미에서든 인정하고 있는 학파이다. 그러나 육파의 분류 방법에 대해서는 전부터 여러 가지 학설이 있어 왔는데, 현재에는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각 파의 성립 연대도 서로 다르고, 그 성립과 의존하고 있는 경전의 편찬 연대에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① 상키야(Sāmkhya, 數論) 학파 - 개조(開祖)는 카필라(Kapila), BC 3세기에 성립, 소의경전은 <수론(數論, Sāmkhya-kārikā)>이다. 원리를 하나하나 열거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수론(數論)이라 한다. 이 학파는 신아(神我, puruṣa)와 자성(自性, prakṛti)의 두 원리를 상정하는데, 전자는 순수 정신이고 후자는 물질의 근원이다. 인간의 신체기관과 감각 ‧ 사유 ‧ 의욕 등은 자성(自性)에서 생성되므로 그들은 모두 물질에 속하며, 신아(神我)가 자성에 관계하는 한 괴로움의 윤회는 계속되는데, 요가 수행으로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② 유가(Yoga, 瑜跏) 학파 - 개조는 파탄잘리(Pata¯njali), BC 4~3세기 성립. 요가 수행으로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의경전은 파탄잘리(patañjala)가 지은 <유가경(瑜跏經, 요가수트라/yaga-sūtra)>이다. 이에 의하면, 요가를 마음 작용의 소멸이라 정의하고, 마음 작용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흡을 조절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수행을 거듭 되풀이하고, 대상에 대한 탐욕을 떠나야 한다고 함. 괴로움의 원인은 주관과 객관의 결합에 있고, 삼매(三昧)에 의해 주관이 객관을 떠나 독존하게 된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③ 미망사(Mīmāmsā, 聲論) 학파 - 개조는 자이미니(Jaimini), BC 2세기 성립. 소의경전은 <미망사경(彌曼薩經, Mīmāmsā-sūtra)>이다. 이 학파의 목적은, 베다(veda)에 규정된 제식(祭式)를 고찰해 정리하고 실행하는 데 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베다는 일체를 초월한 절대이며, 베다의 말은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실체라고 한다. 말은 가끔 발성에 의해 드러나지만 발성이 소멸한 후에도 말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속하며, 말과 대상의 결합 관계는 개인의 주관을 초월해 불변하다고 한다. 베다에 규정된 제식은 인간이 실행해야 할 의무, 곧 법(dharma)이며, 그것을 실행하면 번영을 누리고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④ 바이세시카(Vais′e-sika, 勝論) 학파 - 개조는 카나다(Kanāda), BC 2~1세기 성립. 소의경전은 <승론경(勝論經, Vais′esika-sūtra)>이다. 이 학파는 모든 현상은 실(實) ‧ 덕(德) ‧ 업(業) ‧ 동(同) ‧ 이(異) ‧ 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義)에 의해 생성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요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한다.

    ⑤ 베단타(Vedānta, 吠壇) 학파 - 개조는 바다라야나(Bādarāyana), BC 1세기 성립. 소의경전은 <베단경(吠壇經, Vedānta-sūtra)>, 이는 베다(veda)의 끝 부분[anta]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upaniṣad)를 가리킨다. 우파니샤드를 기반으로 해서 바라문교의 잡다한 교리를 정리한 학파. 우주의 최고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이 모든 현상을 창조하고 전개시켰다고 설하고, 인간은 브라흐만을 바르게 알고 요가수행으로 브라흐만과 합일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⑥ 니야야(nyaya, 正理) 학파 - 개조는 가우타마/고타마(Gautama), AD1~2세기 성립. 소의경전은 <정리경(正理經, nyāya-sūtra)>. 논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학파로, 인간에게 일어나는 괴로움의 원인은 그릇된 인식에 있으므로 그릇된 인식을 제거하고 계율을 지키고 요가수행을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추론의 방법으로 오지작법(五支作法)을 내세우고 있다.---→오지작법(五支作法) 참조.

 

*육폐심(六蔽心)---청정한 마음을 덮는 여섯 가지의 나쁜 마음을 말한다.

    ① 간탐심(慳貪心)-보시바라밀  ② 파계심(破戒心)-지계바라밀

 

 

    ③ 진에심(瞋恚心)-인욕바라밀  ④ 해태심(懈怠心)-정진바라밀

 

 

    ⑤ 산란심(散亂心)-선정바라밀  ⑥ 우치심(愚癡心)-지혜바라밀

 

    간탐심(인색하고 탐하는 마음), 파계심(법과 계율을 어기는 마음), 진에심(성내는 마음), 해태심(게으른 마음), 산란심(흐트러지는 마음), 우치심(어리석은 마음) 등의 마음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 6바라밀을 각각 덮어 버린다고 한다.

 

*육행(六行)---여섯 가지 덕행을 말함. ①효행(孝行) ②우(友) ③목(睦-화목) ④연(婣-부부애) ⑤임(任-책임감) ⑥휼(恤-연민)

 

*육향(六向)---→십원 육향(十願 六向) 참조.

 

*육혹시현(六或示現)---수량육혹(壽量六或)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어느 곳이나ㆍ어느 시대나ㆍ그 시대에 맞는, 중생의 근기와 욕망과 중생의 업력에 따라 그에 맞는, 다른 이름 다른 몸으로 나타나 중생을 편안하게 제도하심을 육혹시현(六或示現)의 몸으로 제도하신다고 말한다.

    육혹시현에서 여섯 육(六)이라는 수를 여섯이라는 숫자에 국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여섯은 육백(六百)도 될 수 있고, 육만(六萬)도 될 수 있고, 육억(六億)도 될 수 있으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생제도 하는 방법론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육혹시현은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 내 앞에 나타나 문득 나를 깨우쳐주심을 말한다. 육혹시현(六或示現)에서 보일 시(示)자는 신륜(身輪) 곧 몸의 작용을 말한다. 시현(示現)이라는 뜻은 몸으로 나타나서 모든 것을 보이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육혹시현(六或示現)을 달리 ‘삼륜(三輪)의 묘화(妙化)’라고도 한다.

   삼륜(三輪)의 묘화(妙化)라는 것은 구원의 본불 석가세존께서 뒤를 이어 계속 나오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을 중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셋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신 덕목(德目)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말로만 중생을 구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부처님의 몸, 혹은 다른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거나 중생이 알 게 모르게 끊임없이 육혹시현의 몸으로 구제하심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 이 세 가지 작용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잠재(潛在)하고 있는 악한 것들을 제거해 편안하게 해주시는 것을 삼륜의 묘화라 한다. 삼륜이란 ① 의륜(意輪) ② 구륜(口輪) ③ 신륜(身輪)을 말한다.

    ① 의륜(意輪)은 부처님 자비를 지칭한다.

    ② 구륜(口輪)은 부처님의 말로써의 가르침, 즉 8만 4천 법문을 말한다.

    ③ 신륜(身輪)은 구제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해 세상에 나타나 구제하시는 육혹시현을 말한다.

 

 

*육화(肉化)---육화는 이론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다, 몸으로 또는 몸에서 나타나다, 몸소 표현하다, 몸으로 익히다, 하는 뜻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말과 글로 배운 것을 마음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여 내 몸의 피와 살이 되게 하는 것을 육화(肉化)하니, 이는 곧 신행을 의미한다.

 

 

*육화경(六和敬)---승려들이 공동체 수행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화합을 위해 상대와 마음이 합해지도록 공경하는 여섯 가지 원칙을 말한다.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오역죄(五逆罪)의 하나로 들고 있을 정도로 승가는 화합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육화경은 불교교단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며, 사원생활에서 생기는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불 ‧ 법 ‧ 승 삼보 가운데 승을 승가(僧伽)라 하고 화합중(和合衆)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육화경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이다. 6화경법은 신업(身業) · 어업(語業) · 의업(意業) · 이(利) · 계(戒) · 견(見) 등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신화경(身和敬) - 몸으로 부처님 행을 해 행동으로 서로 화합하고,

   2) 구화경(口和敬) - 입으로 부처님 말을 해 말로써 화합하고,

   3) 의화경(意和敬) - 뜻으로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 화합하고,

   4) 계화경(戒和敬) - 바른 행동을 해 계율로써 서로 화합하고,

   5) 견화경(見和敬) - 이념과 사상을 바로 해 바른 견해로써 서로 화합하고,

   6) 이화경(利和敬) - 이익을 조화롭게 해 균등히 분배하며,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자비와 공경을 베풀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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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기도 한다.

   1) 신화공주(身和共住) - 몸으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대중이 한 장소에서 같이 살라는 말,

   2) 구화무쟁(口和無諍) - 입으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라는 말,

   3) 의화동사(意和同事) - 뜻으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서로 협력해 함께 일하라는 말,

   4) 계화동수(戒和同修) - 계율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함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란 말,

   5) 견화동해(見和同解) - 이념과 사상면에 화합해 함께 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견(見)이란 사상, 이념, 철학 등을 말한다.

   6) 이화동균(利和同均) - 이익을 조화롭게 해 균등히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리이타(自利利他),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자비와 공경을 베풀라는 가르침이자 대립과 분열을 조화로움으로 해결하라는 계시다. 그리하여 이화동균(利和同均) 해야 비로소 불이(不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육화경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면 지혜로운 삶이 유지되고 화합의 틀이 단단해질 수 있다. 반면 육화경의 가르침이 외면되는 순간 그 조직은 늘 분란과 대립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우리 불교계는 이를 반영하듯 각종 송사(訟事)로 분쟁과 대립이 끊일 사이가 없다. 모든 송사는 이 육화경의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 의견만이 최고고, 내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므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이익과 이권이 있을 때 혼자 취하려 하면 반드시 갈등과 분란이 생긴다. 이를 서로의 양보와 이해로 풀지 못하면 송사로 이어진다.

   부처님께서는 교단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멸쟁법으로 해결하길 당부하셨다. 즉, 쟁론이 되는 것을 없애주는 7가지 법을 7멸쟁법이라 해서 교단에서 어떤 쟁론이 일어났을 때 그 해결을 국법이나 사회에 맡기지 않고 이 멸쟁법에 의지해서 풀었다.

   멸쟁법을 저 유명한 화쟁사상으로 발전시킨 이가 원효 대사이다. 또한 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해 선양한 이가 천태종의 종조 대각국사 의천이다. 의천 스님은 원효 대사의 화쟁사상이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천태종을 창종(創宗)해 화엄을 비롯한 여러 교학과 선을 일치, 통합하는데 기여했다.

   우리가 역대 선사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한국불교의 교단이 건강하고 바로 설 수 있도록 힘과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육화경의 실천이 절실히 요구된다. 끊임없이 갈등과 분란이 이어지는 이유는 이러한 기본적인 화합정신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멸쟁법(滅諍法), ‘이화(理和)와 사화(事和)’ 참조.

 

 

*육환장(六環杖)---스님이 짚고 다니는 고리가 여섯 개 달린 지팡이를 말함. 사찰에서 지장보살이 많이 들고 계신다. 육환장(六環杖)은 석장(錫杖)이라고 한다. 지팡이 머리는 탑 모양으로 만들어 큰 고리를 깨웠고, 큰 고리에 작은 고리 여섯 개를 달아, 길을 갈 때에 땅에 짚으면 고리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어 짐승이나 벌레 등을 일깨우는 것이다. 또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빌 때에 자기가 온 것을 그 집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흔드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극기라(Khakkhara)라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육환장이라 한다.

    육환장 중에서도 연수목(延壽木, 감태나무. 천둥목, 용안목/龍眼木, 갑자목/甲子木, 벽뢰목/霹雷木)이라고 해서 감태나무 중 벼락을 맞아 나무에 마치 용의 눈처럼 흠집이 많은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최고로 쳤다.

  

 

 

*윤장대(輪藏臺)---마니차(摩尼車), 전경기(轉經器)라고도 한다. 원통형 모양의 회전식 경장(經藏)으로, 전륜장, 전륜경장, 전륜대장이라고도 한다.

    외부에는 진언이 내부에는 경전이 새겨져 있으며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책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나 경전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이 이것을 한번 돌리기만 해도 불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지닌다고 한다. 티베트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고, 티베트 사람들은 작은 것을 손에 들고 돌리기도 한다.

    우리나라 윤장대는 영동 영국사, 금강산 장안사 등지에 설치 흔적과 기록이 있으나 국내에서는 예천 용문사에 유일하게 현존한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145호인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보물 제684호 예천 용문사 윤장대를 묶어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라는 명칭으로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용문사 윤장대는 중국 송나라 전륜장 형식을 수용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제작 시기는 파악되지 않았다. 대장전이 창건된 고려시대라는 설도 있고, 조선시대에 대장전 중건과 맞물려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근엔 우리나라 사찰에도 윤장대를 설치한 곳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팔각형으로 된 장궤 밑 중앙에 기둥을 세워 장궤를 돌리는 형식으로 만들고 있다.

 

   

*윤필거사(潤弼居士)---신라시대 의상(義湘) 대사 동생이란 설도 있고, 의상 대사, 원효(元曉) 대사와 함께한 도반이었다는 말도 있는 인물로서 도력이 높은 재가불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문경 공덕산(孔德山) 대승사(大乘寺), 문경 도장산(道藏山) 심원사(深源寺), 안양 삼성산(三聖山) 삼막사(三幕寺), 양평 용문산(龍門山) 상원사(上院寺) 등 여러 곳에 윤필거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거나 윤필암(潤弼庵)이란 이름의 암자가 있거나, 과거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문경 대승사의 윤필암은 비구니 사찰로 암자로는 규모도 크고 아름답다.

 

 

 

*윤회(輪廻, 산스크리트어 samsāra)---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재생(再生)신앙은 원시신앙 형태의 하나로서 세계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BC 3000년경의 인도 인더스강 서북지방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고대문명에 이미 윤회사상이 있었다. 이것을 브라만교에서 흡수했다. 브라만교는 윤회사상을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받아들인 것이다. 브라만교의 윤회사상은 BC 600년경 <우파니샤드>의 문헌에서 비롯돼 대중에게 전파됐다. 따라서 윤회는 당시 인도에 보편화된 상식이었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인간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많았다. 아마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도 죽음 이후에 삶이 계속된다고 가르쳐 왔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 비전(秘傳)의 교리,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버질은 물론 아프리카 흑인까지도 이미 오랜 옛날부터 영혼이 옮겨 간다든가 신체가 옮겨 간다는 등의 가르침을 설했다. 또한 현대사상가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 역시 죽음 이후에도 삶의 과정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인도와 우리 생각 사이에 아주 다른 것 하나가 윤회에 대한 시각이다. 인도인들은 윤회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데 반해 우리는 윤회를 믿지 않는 경향이 짙다. 그러면서 또 아주 다른 것은, 인도인들은 삶을 절대적인 고(苦)로 보고 있으므로 윤회한다는 사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공포의 고(苦)로 알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는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고, 가끔 “다시 태어나도 저는 이 일(직업)을 또 할 겁니다.”라고 하는 인터뷰에서 보듯, 지금의 삶을 그리 고통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다. 이렇게 윤회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데, 부처님의 설법은 [윤회와 고통]이 한 세트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인도인들을 상대로 펼친 법문이다. 이런 간단한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단멸론자처럼 부처님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일이 나올 수도 있다.

 

    ① 윤회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윤회설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도 단순히 사회통념상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훈계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그런 주장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부처님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사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알 수 없는 일엔 무기(無記) 하셨다. 알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쓸데없는 희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회를 하는지 않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후세계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고 불교교의는 무아(無我)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 이걸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아직도 그 답을 시원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며, 윤회의 주체는 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法體),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에서는 개아(個我, pudgala, 補特伽羅) 등이 윤회의 주체라 했으나 이는 부처님의 무아론에 배치되는 이론이다. 이에 대중부에서는 근본식(根本識)을 주장했고,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을 윤회의 주체라고 했다. 그리하여 유식학파(唯識學派)의 입장에서는 윤회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우리를 지탱하는 근본 마음인 아뢰야식을 공으로 비워야 한다고 했다. 아뢰야식이 공으로 전환될 때 우리의 마음이 청정해져서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 ― 대자유인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명확한 답이 되지 못한다. 어떠한 형태로든 윤회의 주체가 있다는 것은 무아론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 돼가는 상황에서 윤회를 어떻게 합리화 할 것인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 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業報輪迴說)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 박경준

   이와 같이 중생의 개체 수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업보윤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업보윤회에 대해 수용하기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스님들 중에도 윤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성법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윤회가 있다고 믿는 것과 윤회는 없다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쪽이 당위성을 확보하는데 더 보편적이냐가 고려돼야 한다. 기독교 같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불행하게도 불교에는 없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지적통찰과, 시대에 확정된 부정할 수 없는 현상과 사실을 모조리 동원해서 당위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중 가장 강력하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다.”

 

 

   ② 윤회에 대한 과장된 생각

   윤회가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윤회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교의를 전개시키는 종파가 밀교(密敎)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후기 대승불교인 밀교는 힌두화 된 불교이다. 그래서 그런가, 밀교에서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주장해, 중생의 영혼이 여섯 가지 길을 번갈아 떠돈다고 한다. 초기불교에서 이어온 윤회사상이 밀교에서 업보윤회(業報輪迴)사상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밀교에서는 윤회전생 하는 세계에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삼계에 지옥 ‧ 아귀 ‧ 축생의 삼악도(三惡道)와 아수라 ‧ 인간 ‧ 천상의 삼선도(三善道)를 합친 삼계 육도(三界六道)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계 육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중생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업(業)]의 결과인 과보에 의하는 것으로서, 선업을 쌓으면 선의 세계에, 악업을 쌓으면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만 윤회 전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정이 윤회 전생한다는 것이다. 그 유정이 모태에 의탁해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 그로부터 죽음까지의 사이 생전의 존재를 본유(本有), 죽음의 순간을 사유(死有), 사유로부터 다음 생유까지를 중유(中有)라고 한다. 즉, 중생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의 중간존재로서, 이때 영혼이 머무는 곳을 중유(中有), 중음(中陰) 중간계(中間界), 중온(中蘊), 혹은 중음신(中陰身) 등으로 불린다. 중유는 최소 7일에서 최대 49일의 기간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중생은 윤회한다고 한다. 밀교에서는 이렇게 7×7=49일의 중유기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에서 지내는 천도재(薦度齋) 등도 이러한 사유(四有)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중유란 명부시왕전(冥府十王殿)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기간인데, 7일마다 시왕을 바꾸어 가며 심판을 받으므로 49일 동안 일곱 번 심판을 받는 셈이다.

    따라서 죽음 즉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49일간 중유의 존재로 머문 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고 본다. 이 중유기간인 49일 동안에 천도의식(薦度儀式)을 행하며, 특별히 49일째 되는 날에 행하는 천도재(薦度齋)를 사십구재(49齋)라 한다. 이 49일 동안 유가족이 영가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며 공덕을 지어주면, 비록 나쁜 업을 지은 영가라 해도 불ㆍ보살의 가피 덕분에 고통의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고, 영가들은 훌륭한 공덕을 이루어 보다 더 좋은 인연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과정을 생략해서 마지막 49재만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러함은 전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설화로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오면서 꾸며지고 첨가된 허구의 내용들이다. 이러한 것이 자칫 외부에 알려질 경우, 불교는 미신이라는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현실에서와 같이 윤회설을 악용해 승단의 배를 채우고, 신도들에게 신앙으로서의 의무감만 더해주고 있다면, 그리하여 사찰들이나 승단이 이익단체로서 불교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불교의 미래는 결코 보장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를 들추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다만 추정일 뿐 확실한 제작 연대나 제작자를 알 수 없고, 내용이 너무 환상적이고 황당해서 그 책 자체를 믿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