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꼭 볼 이미지 팩토리-

신현림 2011. 2. 7. 13:30

 

김홍도 그림을 보면 눈물이 어른거린다... 이런 서민들의 모습을 그리는 넘 인간적일 김홍도 할아버지의 품이 느껴지기에

 

 

 

 

 

 

 

 

 

 

 

 

 

 

 

 

 

 

 

 

 

 

 

 

 

 

 

 전문가들이 호랑이 그림 중 세계최고라고 하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 비단에 채색 90.4x43.8cm 호암미술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로 표현한 이 그림은 

수천 수만 번의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호랑이의 털을세밀하게 표현한 점과

소나무 가운데 가로로 나있는 호랑이 발톱 자국을 표현할 만큼의 사실적인 묘사는 보는 이에게 경외심마저 느끼게 합니다.

호랑이에게 쫓겨 도망치다 절벽에서 떨어져 겨우 목숨을 건진 후 다시 만난 정조에게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뻔한 호랑이 그림을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물론 김홍도가 실제 호랑이를 보고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풍속화가 정도로만 알려진 김홍도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현재 200여 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의 변화는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에는 전기에는 원체화적(院體畵的) 경향을 띤 정형산수를 많이 그렸는데,

1778년 작인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6폭병풍과 선면화(扇面畵) 등에 잘 나타난다.

50세 이후의 후기에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檀園法)이라 불리는

보다 개성이 강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석법(石法)과 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고도의 회화감각으로 처리된 탁월한 공간구성과 변형된 하엽준(荷葉),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화조 등을 그려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다.

도석인물은 전기에는 주로 신선도를 많이 그렸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소방하면서 농익은 필치로 바뀌게 된다.


김홍도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는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광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나란히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당시 속화체(俗畵體)로도 불렸던 그의 풍속화풍은 현실적인 소재를 소박한 생활정서와 풍류적 감성이 가미된

생동감 넘치는 기법으로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평가 및 영향>

홍백화(洪白華)의 글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활달해서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한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김홍도가 이룩했던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

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화 발전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견(安堅)·정선·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켜 김홍도파 또는 단원파(檀園波)라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개인소장의 〈단원도〉(1784년작)·〈금강사군첩〉·〈섭우도 涉牛圖〉·

〈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圖〉(1804년작), 간송미술관 소장의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단원화첩〉(1796년작, 보물 제782호) 등이 있다.


  백묘화     단원도  단원풍속도첩



 단원풍속도첩 단원화첩 서직수초상



단원풍속도첩 모당평생도 고산구곡시화병



 군선도 군선도병 단원풍속도첩

신선취생도 부벽루연화도 서원아집도



 모당평생도 단원풍속도첩 단원풍속도첩



 무동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또는 鳴國(1600~1662년 이후)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1636년과 1643년 2차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술에 취하여 붓을 든다고 해서 취옹醉翁이란 호도 있다. 연담은 선종화禪宗畵 특히 사진에서 보는 달마도達磨圖를 잘 그렸다. 당시 왜인들이 연담의 선종화에 푹 빠져 돈과 술을 준비하여 줄서서 받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 다음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 만에 재개된 조선 인조때인 1636년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김명국이 처음으로 동행하면서 자신이 쓴 일기의 일부분이다.

 

 

 

병자년(1636년) 12월22일, 맑음, 저녁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중략)

 

이들이 왜 내가 그린 달마도에 열광하는지를 이제 알 것 같다. 선종이 무엇인가? 경전이나 문자에 의지하기보다는 직관적인 정신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것이 선종이 아닌가? 자신이 세운 화두를 깨닫기 위해 일생을 거는 종교가 선종이 아닌가? 그래서 얻게 된 깨달음의 순간을 일필휘지로 그려 내는 것이 바로 선종화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화에서는 다소 거칠고 부족하더라도 세세하게 꾸미거나 채색을 칠하는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비록 왜인들의 요구에 의해 선화를 그려주기는 했지만,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선화가 나의 기질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중략)

 

이틀전에 왔던 어떤 중은 내가 준 달마도를 보더니 갈 생각을 않고 내게 절을 해 대는 통에 민망하기까지 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달마대사의 모습을 친견하게 되었다나 뭐라나 하면서...

 

 

 

며칠 있으면 이곳도 떠나게 된다. 그동안 고생도 많았지만 가는 곳마다 선물꾸러미를 바치는 왜인들의 정성을 거절하기도 벅찼다. 내가 통신사의 일원인 탓도 있지마, 화원이면 무조건 멸시하는 조선과는 달리 극진히 대접하는 왜인들의 모습을 보고 조선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림만 잘 그려도 사람 대접을 받다니......

 

 

 

이상의 글은 조정육 지음,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2, "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2002, 고래실)에 실린 글을 발췌정리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고 오주석 지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주)월간미술]에 <달마도>에 대한 감상글을 발췌정리해 본다.

 

 

 

오주석은 <달마도>를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고매한 기상'이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억센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눈, 풍성한 눈썹과 콧수염, 그리고 한일자로 꽉 다문 입. 화가는 턱선 따라 억세게 뻗쳐 나간 구레나룻을 마치 달아오른 장단에 신들린 고수처럼, 점점 길게 점점 더 여리게 연속적으로 퉁겨내듯 그렸다. 옷 부분은 진한 먹물을 붓에 듬뿍 먹여 더 굵고 빠른 선으로 호방하게 쳤다. 꾹 눌러 홱 잡아채는가 하면 그대로 날렵하게 삐쳐 내고, 느닷없이 벼락같이 꺾어 내서는 이리 찍고 저리 뽑아냈다. 열번 남짓 질풍처럼 여기저기 붓대를 휘갈기고 나자 달마(?~534년 추정)의 몸이 화면 위로 솟아올랐다. 두 손은 마주 잡고 가슴 앞에 모았다. 윗몸만 그려졌지만 그는 분명 앞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딛고 있다.

 

 

 

지그시 화면을 바라본다. 구레나룻 오른편 끝이 두포의 굵은 획과 마주친 지점에 먹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슬쩍 붓을 대어 위로 스쳐준다. 훨씬 좋아졌다. 다시 구레나룻 아래 목 부분에 날카롭게 붓을 세워 가느다란 주름을 세 줄 그려넣었다. 이제 달마의 얼굴과 몸은 하나가 되었다.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그림 속의 필선은 각각 서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가? 선線과 선線 사이로 하나의 매서운 기운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이른바 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필단의연筆斷意連' 그것이다. 이 호쾌한 선線들을 관통하는 기氣의 주인은 연담인가, 달마인가?

 

 

 

달마는 인도스님이다. 석가모니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올렸을 때 스승 뒤편에서 조용한 미소로 답하여 그 심법心法을 전수받았다는 가섭 이래 제28대 조사祖師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와서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최초로 펼친 중국 선禪의 제1대 조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달마는 선禪의 대명사다. 그는 9년 동안이나 벽을 마주하고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달마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진정한 대장부였던 것이다. 그 무서운 집중력은 어떠한 원력願力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일까? 그토록 용맹정진할 수 있었던 심지는 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달마도>를 보면 달마를 알 수 있다. 거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이 아닌, 바탕이 아닌 온갖 부차적인 껍데기들은 모조리 떨구어낸 순수형상이다. 그러므로 몇 줄의 짙고 옅은 먹선으로부터 강력한 의지와 고매한 기상이 곧바로 터져 나온다. 아무도 곁눈질할 수 없게 하는 이 맹렬함, 이것은 바로 선禪이 아닌가? 그러나 저 눈빛을 보라. 달마는 한편 이 모두가 허상이라는 듯 진정 거짓말처럼 깊고 고요한 눈매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아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달마도>는 결국은 달마가 아니다. 그냥 약동하는 선禪일 뿐인다.

 

 

 

 

내 서른 살 은 어디로 갔나... 씨네21과 스파게티점매트 15만장 광고 나갔대요

                                        한예슬 표지래요

연합신문 조선과 중앙일보 기사 나왔는데... 기사의 영향력이 많지 않은 시대라며

홍보부장이 열심 뛸 거라라는 문자... 민음사에 참 감사드립니다

출판사서 작가와의 만남 할 거래요. 큰 출판사에서 나왔으니 제가 절판시키든 절판되진 않겠죠

<빵은 유쾌하다> <당신이란 시><굿모닝레터><희망블루스>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5권 다신 발간 안됩니다

...갖고 계신분은 오랜 후 기념품이  될지도 모르구요^^

 

  

 

 

그리하여

제 치유성장에세이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 > 많이 사랑해주십시오. 찾아와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현림 올림

 

 

 

 

 

 

20) 민화-책거리그림
책거리그림의 의의와 현대적 조형성
[1225호] 2008년 05월 20일 (화)  7면 임두빈 교수 dkdds@dankook.ac.kr

 

   
 


책거리 그림은 학문을 숭상했던 우리 겨레의 생각이 낳은 독특한 민화이다. 여기에는 많은 책들과 붓이나 어의, 종이, 벼루, 또는 꽃과 과일, 악기종류와 안경 및 새와 토끼 등이 책과 함께 그려진다. 민화 중에서도 책거리 그림은 그 독특한 조형성으로 인해서 매우 가치있게 여겨지고 있다.

책거리그림의 구성
첫째, 책거리 그림은 화면 전체의 구성적 측면이 매우 현대적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물상(物像)들은 각기 그 고유의 장소성과 현실성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나와 화면속의 구조적 조형미를 연출하기위한 기능적요소의 하나로 화하는 것이다. 책거리 그림이 마치 현대의 입체파 회화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점에 기인한다. 입체파 회화에서도 화면에 등장하는 각 사물들이 그 고유의 존재성에서 떨어져 나와 새롭게 화면을 구성하는 순수조형의 구조적 요소로 화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가 있다.

책거리그림과 색채효과
둘째, 책거리그림에서의 색채는 대부분 원색적이다. 사물이 지닌 고유한 색채보다 훨씬  강하고 밝은색이 각 사물의 형태 속에 칠해지고 있는 것이다. 색채추상화적 요소를 책거리그림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도 그 점에 기인한다.

자유분방한 다시점
셋째, 특정한 시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점(視點)의 이동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다시점(多視點)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책거리그림의 다시점은 넓게 보면 정통회화(正統繪畵)에서 볼 수 있는 다시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화는 정통회화보다도 더욱 자유분방한 다시점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다시점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우리와 다른 서구문화권의 회화는 르네상스 이래 일시점(一視點) 원리를 최고의 시점원리로 존중해왔다. 그들 문화권의 뛰어난 회화는 일시점에 의거한 대상파악을 기본으로하는 논리적 시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우리의 동양화에서는 시점이 이리저리 이동해 나아가는 다시점을 중요한 시형식으로 존중해온 역사를 지닌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시형식을 보이게 된 데에는,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는 두 문화권의 사상적 시각의 차이가 절대적 원인이 되고 있다. 동양은 그 사유형태의 근원이 불교사상과 노장사상 및 유가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신비적 직관에 의거한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세계의 전체상을 지향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서양은 주객분리의 대립적이고 분석적이며 분할적인 사유형태를 강하게 들어내 보이고 있다. 그로인해서 동양은 자아의 개별적 주관성보다 세계와 하나됨으로 있는 전일성(全一性) 내지 합일성이 주요시되고 현상과 실체의 이분을 용납치 않는 전원적(全元的)일원론(一元論)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양은 세계와 자아를 대립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고 자아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서양적인 사고에 의하면 ‘나’는 우주 만물과 별개의 것으로 존립하면서 만물을 타자(他者)로서 바라보는 주관성이지만, 동양의 사유 속에서 ‘나’는 우주만물과 하나로서 일체화된 ‘나’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태도는 그대로 회화양식에 반영되어 서양에서는 그리는 자의 시점과 자연경관이 어디까지나 대립관계에 놓여짐으로써 ‘나’라고 하는 한 시점의 정지된 주관성이 강조되는 일시점 원리의 회화양식이 이루어졌던 것이며, 동양에서는 ‘나’와 ‘자연’과의 합일적 관계 속에 회화에 있어서 그리는 자의 시점이 자연경관 속에 일체가 되어 그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나아가는 다시점의 유동성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다시점 현상은 정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나’와 ‘우주’와의 합일적 관계에서 비롯된 시 형식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보다 정확하게는 ‘나’라고 하는 개별적 주관성이 소실되는데서 비롯된 주체와 대상과의 미분화 상태에서 나온 다시점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화는 정통회화에서 보다도 훨씬 자유분방한 시점의 이동 현상을 한 화면 속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우상하로 거침없이 시점을 이동해 가면서 사물을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그림 속에 여러 개의 시점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그려진 대상물들은 현실적인 물체감위에 여러 상황의 관념적 공간들이 동시에 펼쳐져 보이는 신선한 복합상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다시점에 의한 사물 포착법은 몇몇 책거리그림들에서 마치 현대의 큐비즘(Cubism)회화와 유사한 분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책거리그림의 현대적 조형성
책거리 그림은 그 구성적인 측면에서 기하학적 추상미의 요소를 듬뿍 지니고 있다. 특히 수많은 책들만으로 이루어진 책거리 그림은 그것 자체가 그대로 현대회화로 평가되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현대적 표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책거리그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수직과 수평선의 다양한 짜임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구조의 틀은 그 틀을 메우고 있는 원색조의 강렬한 색채와 어울려 마치 신조형주의 화화에서와 같은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책거리 그림은 거기에 그려진 물상들 하나하나가 현실적인 연관성을 떠나 새로운 공간질서를 부여받고 그려짐으로써 독특한 형태성과 장소성을 지니게 된다. 난데없이 책이나 안경, 악기 등이 공중에 떠 있다든가, 하나의 꽃병이나 사물들이 어떤 부분은 입체인데 다른 부분은 평면으로 그려져 있는 것 등, 현실적인 형태성을 왜곡 변형함으로써 타성적인 시각적 관습에 충격과 자극을 주어 신선한 시각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형이상학파 회화에서의 불가사의한 정조와 입체파 회화에서의 형태구성의 신선함이 결합된듯한 새로운 회화표현상의 감흥을 느끼게 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우리 겨레 고유의 정서가 넘쳐흐르고 있으니, 책거리 그림에서 우리는 전통과 현대의 깊은 결합상 내지 전통의 현대적 표현에 대한 창조적 발상의 한 부분을 시사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임두빈, 한국의 민화Ⅳ, 서문당, 1993) 

 

 

 


 

민화(民畵)는 민중의 정서와 생활풍속, 고유한 신앙을 담은 그림을 말한다.
조선의 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그 전성기는 조선 후기 영조시대이다.
민화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일본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이다.
그 이전에는 '속화'나 '민중화', '농민화' 등으로 불렸다.
조선의 미술을 무척 좋아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민화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民畵
란 용어를 만들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 기도 했다.
'민화화란 민중 속에서 태어났으며,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해 구입되는 그림을 말한다.'

민화 중에서 책거리 그림이 있는데 바로 이 그림이 입체주의와 쌍벽을 이룰 만큼 다시점(多視點)점을 절묘하게 활용하고 있다.
책거리란 책과 그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그린 것을 말하며, 책과 문방사우가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종이, 붓, 벼루, 먹 등 네 가지를 가리킨다. 또한 문방사우 이외도 선비들의 방에 놓여진
화병, 꽃, 필통, 과일, 등잔, 도자기, 부채, 안경 등도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다.
책거리 그림은 주로 사랑방을 장식했다. 이조시대는 책이 무척 귀했던 시절이니까,
이를 통해 늘 책을 곁에 두고 싶었던 서민들의 책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조인들은 책거리 병풍을 보면서 글공부의 게으름을 뉘우쳤으며,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즉 책거리 그림은 글공부를 좋아 하고 면학 분위기를 권장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책거리 그림은 특이하게도 감상자가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감상자를 바라보는 역 원근법적 화법으로 그려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잔과 입체파 화가들이 그토록 탐구하던 새로운 공간을 조선의 이름 없는 화가들이 훨씬 먼저 시도한 것이다.
책거리 그림이 어떻게 이처럼 현대적인 화법을
개발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근법의 구속을 받아본 적이 없는 조선의 무명화가들이 과학적 사고를 그림에 반영할 리는 물론 없었겠지요.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해 보았어요. '감각지각. 즉 겉모습이 아닌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은
과학자 뿐 아니라 화가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의 민초인 화가들 역시 진실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싹텄을 것이며. 공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 었으리라.
즉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조선화가들의 자각이 이런 초현대적인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야나기 요시무네(柳宗悅

도쿄[] 출생.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10년 가쿠슈인[] 고등과 재학 중 시가 나오야[],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등과 함께 문예잡지 《시라카바[]》를 창간하였다. 종교철학을 연구하고 유럽 유학을 마친 후로는 저술에 종사하는 한편, 도요[]·메이지[]·도시샤[]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또 동양미술국제연구회 상무이사를 역임하였다.

미술사와 공예연구 및 민예연구가로 활약하면서 도쿄에 민예관을 설립하여 공예지도에 힘을 쏟았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의 건축을 위해 서울의 상징적 건물인 광화문의 철거가 논의되었을 때 그는 이에 적극 반대하는 등 한국의 민속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또한 1924년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저서로 《조선과 그 예술》 《종교와 그 진리》 《신에 대하여》《차()와 미()》 등이 있다.

 

                               <읽은 책에서 발췌하고 재구성하였음> 

[

  Voices / Joan Fauikner

 

 

 

훈민정음 창제한 시, 서, 화의 명인 강희안

생몰년대: 1418~1464
조선 초기의 문신ㆍ학자.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가족관계: 지돈 령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장남,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 좌 찬성 강희맹(姜希孟)의 형, 세종의 이질.

생애

선생은 21세(143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1441)에 식년시 정과에 13등으로 급제 하여 한림에 제수된 뒤 주부ㆍ예조좌랑을 거쳐 26세에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덧붙였으며, 27세에 돈령부 주부가 되었다. 이때 중국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던 성삼문ㆍ정인지ㆍ박팽년ㆍ신숙주ㆍ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의 편찬과 집필에 참여했다. 이어 28세 되던 해(1445) 4월에 정인지ㆍ안지ㆍ권제 등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를 찬진케 했으나, 그 내용이 만족 스럽지 못하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사업에 선생을 비롯하여 성삼문ㆍ신숙주ㆍ박팽년ㆍ 최항ㆍ이개 등과 함께 보완하여 2년 뒤에 간행하였다. 이해(1447)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이어 성삼문ㆍ이개ㆍ최항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고사관수도(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33세에 부지돈령으로 있을 때 세종이 위독하자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을 썼으며, 이듬해 8월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지사간원사를 역임했다. 이어 37세에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학문연구에 전념하면서 화초재배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1455) 원종공신 (原從功臣) 2등 녹훈되었다. 이 해 동활자인 올해자(乙亥字)를 주조할 때 자모의 글씨를 썼 다. 이 활자는 앞서 주조된 갑인자(甲寅字)보다 획이 곧고 바르며 옆이 넓은 게 특징이다. 39세 때인 세조 2년(1456)에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했으나 성삼문의 변호와 특히 세조와는 이종사촌 사이인 관계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그 뒤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 이종검(李宗儉)이 선생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임금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 뒤(1460)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45세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서 예조참판 김계희 (金係熙)와 함께 사은부사가 되어 표ㆍ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에 갔는데, 그 곳 사람들이 선 생의 문장과 서화를 크게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있다가 인수부윤 재임시에 병을 얻어 10월 9일에 항년 47세에 사망했다. 임금이 관곽(棺 槨)을 부의로 내려주었다.선생은 누대에 걸친 문신 관료의 후손으로 태어나 선생 자신도 문인 기질의 사대부로서 학자인 동시에 시(詩)ㆍ글씨(書)ㆍ그림(畵)에 모두 뛰어난 ‘삼절(三絶)’의 예술가였다. 학자로 서의 선생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해례본』과 『동국정운』 및 『용비어천가』 의 보완, 주석에 참여했다. 학문으로서의 선생은 성리학ㆍ중국음운학ㆍ역사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왕명에 의해 공동 집필한 관계로 선생이 집필한 부분을 찾아낼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선생의 묘소에서 출토된 수저 및 관자

선생은 문신이자 학자이며 또한 서화가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를 저술한 최초의 원예학자였다. 최초의 원예서는 곧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을 말하는데, 이 책은 선 생이 죽은 지 10년만인 성종 5년(1474)에 아우 강희맹이 자신의 할아버지ㆍ아버지ㆍ형(강 희안)의 문집을 엮은 『진산세고(晋山世稿)』 4권에 넣어 함양군수 김종직(金宗直)에 의해 간행되었다. 『양화소록』ㆍ『양화묘방』ㆍ『청천양화록』 등의 책은 모두 『양화소록』의 이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완상(玩賞)하여 온 꽃과 나무 몇십 종을 들어 그 재배법 및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꽃에 인공을 가하여 빛깔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 고, 화훼 끝분에 괴석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수석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다음으로 화분에 꽃나무 심기, 개화를 촉진하는 방법, 꽃꽂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이 책을 서술함이 있어 『제민요술(齊民要術)』ㆍ『죽보(竹譜)』 등 30여 종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였으나 단순한 문헌 인용뿐이 아니고 우리 나라 재배기술의 전문(傳聞)과 선생 자신 체험을 토대로 저술했기 때문에 이 책은 우리 나라 화훼원예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양화소록』은 양화서(養花書)의 기본이 되는 책으로 『임원경제지』 등에 인용되었고, 특 히 일본에 건너가 에도시대(江戶時代)의 본초(本草)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는 기록으로 보 아 선생의 『양화소록』은 큰 업적이다.

선생은 두어 살 때부터 담장과 벽에 손 가는 대로 글씨 혹은 그림을 그렸는데 격식에 맞 지 않는 것이 없을 만큼 어려서부터 예능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선생의 서법은 중국 왕 희지의 진체(晋體)와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28세 때(1445) 황금 125냥으로 제작한 금인소신지보(金印昭信之寶)는 선생의 글씨이며, 세종이 명나라에서 보내온 체천목 민(體天牧民) 영창후사(永昌後嗣)의 8글자로 옥쇄를 만들고자 할 때 선생의 전서(篆書)여야 한다고 대신들이 추천했다. 세종의 장례 때 중국 사신이 와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씨를 보고자 했을 때에도 선생이 천거될 만큼 당대 서예의 대가였다. 선생을 특히 전서ㆍ예서(隸 書)와 8분(八分)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필적

시(詩)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을 들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 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문집이 없다. 선생이 양주누원(楊州樓院)에 올라가 “어딘들 뫼 있으 면 집을 삼지 못하리요. 푸른 산을 마주앉아 한 번 거처해 보노라. 십 년을 벼슬 하다 이 몸이 늙어가 고향에 돌아감을 백발 되기 기다리지 말라.”라는 시를 지었는데, 영천군(永川 君) 정(定)이 이를 보고 절하고 그 밑에 비평을 쓰기를 “서(徐 : 서거정)가 아니면 곧 이 (李 : 이승소)의 솜씨다.”라고 하였다. 뒤에 어떤 사람이 그 밑에 “이 시는 강산의 아휘가 있고 한 점도 티끌 낀 태도가 없으니 반드시 세속 선비의 결습(結習)에 구애된 자가 지은 바는 아닐 것이고, 또 천지가 넓으니 어찌 인재가 없을 것이랴. 하필 서ㆍ이를 칭송하였으 니 어찌 인재를 멸시함이 이다지 심한가.”라고 써서 선생의 문재를 높이 평가했다.

선생의 아우 강희맹은 형(희안)의 시사(詩思)와 화취(畵趣)를 왕유(王維)의 경지에 이르렀 다고 평했으며, 성현(成俔)은 산수와 인물을 칭찬했는데 특히 선생의 『여인도(麗人圖)』가 걸작이라고 했다. 김안노(金安老)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강희안은 시ㆍ서ㆍ화 를 당시 삼절이라 하였다. 묵화도 산수조경과 충조(蟲鳥)ㆍ초목ㆍ인물 등을 그린 것이 자못 소탈하면서도 저절로 생기가 있었다. 그 조화롭고 농욱한 때깔은 화원들의 색상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시옹의 연원은 화사(畵使)의 격 외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또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강희안은 시ㆍ서ㆍ화 삼절로 한 세상에 뛰어났으나 시는 위응 물ㆍ유종원과 같았고, 그림은 유송년(劉松年)ㆍ곽희와 같고, 글씨는 조맹부ㆍ왕희지와 같았 다. 사람이 재주있고 덕이 있어 참으로 대인군자”라고 했다. 미술평론가 김윤수(金潤洙)는 “고도의 수양이 있는 선비가 아니고서는 낼 수 없고, 또 추가할 수 없는 완전함을 이루는 고매한 품격과 당ㆍ송ㆍ원의 고법을 융합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호단의 조화는 그 특유의 것 이다. 말하자면 필력이 호탕하면서도 일점 원화(院畵)의 누습이 보이지

않은 한편 서권기(書 券氣)가 충만한 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서화 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유전되면 이름에 욕이 된다.”며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해서 남은 작품이 많지 않다. 안견ㆍ최경과 함께 조선 전기의 3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기록상에 전하는 선생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와 묵화를 즐겨 그렸고, 영모화 (翎毛畵)ㆍ산수화ㆍ인물화에도 두루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전술한 「여인도」 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ㆍ「청천강(靑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37세 때(1454) 산천 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팔도 및 서울의 지도 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그림은 전술한 강희맹ㆍ서거정ㆍ성현ㆍ김안로 등이 소견한 바를 서술한 것을 조사하면 수십 점에 이르나 현존하는 것은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ㆍ「산 수인물도(山水人物圖)」ㆍ「고사관수도(古士觀水圖)」ㆍ「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 8점 정도이며, 글씨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ㆍ「윤공간공묘비(尹恭簡公墓 碑)」가 있다.


신도비

선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ㆍ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싫 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부귀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오해를 받은 바 있었다. 부인은 고성 이 씨와 언양 김씨로 슬하에 딸만 넷을 두어 후사가 없자 사후 12년 만인 성종 17년(1476)에 양자 문제를 조성에서 논의해 희맹의 2남 학손(鶴孫)을 양자로 입적케 하라는 결정이 내려 졌다.

사후 537년만인 2000년 10월에 경기도가 ‘이달의 인물’로 선정했고, 아울러 진주강씨 문양공파종중에 의해 한글창제비(글씨 : 한갑수)가 세워졌다.

본래 장단군 낙화창(落花 倉) 판원촌(板院村)에 있다가 1987년 5월 선생의 아우 강희맹의 묘가 있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연꽃마을)로 이장되었다. 묘역에는 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이 선생의 행장을 엮은 묘갈이 있었다.

 

 

 

 

 

 

 

 

그림 감상 잘하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님도 오는 봄속에서 행복하세요~
정작 김홍도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기셨던건지..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요..^^
현빈같이 생긴 걸로 알고 있어요 거기에 신선같은 풍모까지... 당대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감사함니다
ㅠ(ㅎ)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