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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 돌봄 – 공공성 - 사회적 돌봄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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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21

2021. 6. 7.

발달장애인 - 돌봄 공공성 - 사회적 돌봄

 

발달장애인

 

사실 모든 세계는 코끼리이고 우리는 장님이다. 살아가려면 세계에서 알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모두 장님이니 나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코끼리를 경험하면서 상상(像想)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장님들이 코끼리를 뱀이나 무슨 기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받아야 한다. 다만, 현재 내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장님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니 언제든지 새롭게 수정( 교정 확장 심화 수용 등등) 될 수 있는 잠재적 개방적 결론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조건에서 그렇다.

발달장애인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그러하다. 모든 유형화는 개별적 존재들을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맞추기 위해 늘이거나 잘라내야 한다. 하나 범주화는 그런 살상의 위험을 염두에 두면서 소통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렇게 주절주절이 서론이 긴 것은 실은 발달장애인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는 그런데도 무언가 말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은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지적 장애인은 지능지수가 70이하이며, 이와 관련된 학습속도가 매우 늦거나 학습능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나이에 맞게 기대되는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어렵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내부 외부 자극을 감지하는 감각기능이 통상적인 경우와 매우 달라 타인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소통에 심각한 곤란을 겪어 역시 기존 사회와 관계맺는 것이 심각한 고난을 겪는 경우이다. 두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생애 전반에 걸쳐서 맞이하는 발달단계에 따라 기대되는 발달과업을 원만하게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달장애라 부른다. 해서 발달장애인을 돕는 방식은 성인기 이전에는 주로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초 기능 즉, 언어, 인지, 신체활동에 대한 기능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하는데 이를 교육, 훈련, 재활, 치료 등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성인기 이후에는 직업지원, 낮활동, 여가 등등의 사회참여활동 지원이 이루어진다. 사회적 지원과 관련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나름의 조건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수준이 다양하지만 여하한 평생에 걸쳐 지원이 있어야 한다. 가령 이런 경우도 있었다.

 

지은씨(가명, 26)와 편의점 이용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동네길을 가는데 지은씨가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은 파란불 빨간불 구별해서 잘 건너시는데, 신호등이 없는 2차선 찻길은 건너지를 못하시는 거예요. 파란불 빨간불이 없으니까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응용이 안되나요? (사회복지사)

 

과거에는 이런 지원을 개별적으로 비발달장애인과 어울려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고 또 개인의 무능을 사회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인권의식의 취약으로 일반 사회의 격리되어 집단적으로 생활시설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현재의 믿음은 그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원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고 다수가 여기고 있다. 그러나 가족에게 과도한 부담을 사회 전체 영역에서 부여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발달장애인이 있는 가족들은 대개의 경우 특히 성인기 이전이라면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사회생활을 포기한 채 그 사람을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족 중 누군가라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 엄마나 할머니들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 돌봄, 돌봄부담, 돌봄사각지대

 

사람은( 혹은 모든 생명체는) 누구나 일생에 걸쳐서 돌봄이 서로 필요하다. 어린아이나 노인처럼 특히 취약해질 때 더욱 많은 도움이 지속적으로 필요하지만 사람들은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어느 때인가 심리사회적으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먹고 입고 자는 어떤 영역에서든 누군가의 돌봄이 전혀 필요없는 사람들은 없다. 당연히 누군가가 어떤 수준에서이든 돌봄노동을 통해서 우리를 돌보고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별일없이 물 흐르듯 흘러갈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품사회에서 묘하게도 이 돌봄노동은 제대로 값(그러니까 가치를)을 제대로 쳐주지 않고 있다. 해서 이를 그림자노동(shdow work)이라고 했던가.

돌봄노동은 간병이든 수발이든 청소든 세탁이든 조리든 목욕이든 안전한 이동지원이든 혹은 같이 놀아주는 것이든 구체적이고 물리적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 각자의 숙련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언정 사회적 지위와 소득에 차이를 두지 않고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을 투여해야 한다. 의사의 시간과 잔디깍기의 시간이 돌봄에서는 모두 같다. 특히 사람을 돌보는 노동은 돌봄이 필요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다.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24시간의 일부를 실제로 잘라서 누군가를 위해서 써야 한다.

돌봄노동은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돌봄노동은 실행되면 별 일이 없는 것이지만 돌봄노동이 없으면 일상은 순식간에 훼손된다. 근데 사람들은 그 가치를 잘알아주지 않는다. 알아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외롭고 좌절한다.

 

상당한 비만으로 덩치가 커진 진수(가명)는 으으 혹은 비명소리로 들리는 의성어와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이를 어느 정도라도 알아듣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진수는 입학 전부터 중3인 지금까지 그러니까 십년 넘게 우리복지관을 이용했다. 중증의 자폐성향을 가진 진수는 어릴적 낯선 사람들과의 접촉에 깜짝 놀라며 움츠리곤 했지만 작고 귀여웠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급격하게 불은 체중과 체격으로 물리적 통제력을 상실한 엄마는 언제든지 어디로든지 뛰쳐나가려고만 하는 진수로 인해서 점점 버거운 표정이었다. 고급 승용차에 송도신도시에서 거주하며 럭셔리한 차림새를 보이는 진수엄마의 눈빛은 돌이켜 보니 언제부터인가 지침을 넘어서 체념이 가득했고, 문득 문득 파란 빛의 분노도 본듯하다고 담당 직원이 울먹이며 말했다. 진수 엄마의 자살 소식을 듣고 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어느 날 이야기다. 진수 엄마가 집 화장실에서 목을 맨 이유는 진수를 독박으로 돌봐야 하는 끝없는 멍에였지만, 사업을 핑계로 돈은 풍족하게 줬지만 아이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이 바깥으로만 돌며 외도의 징후까지 보이는 남편과의 관계단절이 방아쇠가 되지 않았을까. (사회복지사)

 

황지우는 결국, 사람이란 自己(자기) 알아달라는 건데, 그렇지 못하니까 미쳐버린 거다/ 권력도/부부싸움도 그렇다/ 自己 알아달라는 痴情(치정)이다 요한 병원을 나오며라고 말한 것은 현실이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 그 자체보다 그 고난이 아무런 고난이 없는 의미라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곤 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겪고 있는 명확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은 타인이 알아줄 때 무언가 생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진수엄마의 자살 충격에 벗어나기도 전에 복지관 직원들은 진수의 처지 문제로 주의를 옮겨야 했다. 진수를 복지관에 아빠가 데려오기도 하고 이모라는 여자가 데려오기도 했지만 그들은 진수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진수도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심각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다. 집에만 갖혀 지내는 듯 하다가 어느 날 불쑥 복지관에 데려왔다가 우왕좌왕하던 진수 아버지는 결국 진수를 단기보호시설에 맡겼다. 장기생활시설은 고소득의 진수가족은 해당 사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수와 엄마의 사건으로 우리 복지관에서 무언가 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수의 경우처럼 느닷없이 주돌봄자의 신상에 문제가 발생하고, 발달장애인이 순식간에 방치되는 사태는 또 어디선가 예상되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발달장애 자녀를 돌보는 부담을 더 적극적으로 나누어 진수엄마와 같이 비극적 선택을 하기 이전에 숨쉴 여력을 만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긴급돌봄을 주제로 제안서를 냈고, 채택이 되었다.

 

돌봄사각지대

 

이 사업을 통해 지난 3년가까운 세월 동안 돌봄이 필요한 발달장애인 164명에게 이러저러한 돌봄서비스를 제공하고, 254가정에 돌봄부담으로 인한 심리사회적으로 고통받는 가족들을 지원했다. 이들을 만나면서 우선 알게 돌봄사각지대가 다양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회 곳곳에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위기로 다가왔다. 발달장애인들(아이든 어른이든)에게 어떤 의미에서 사회생활은 돌봄의 확장이었다. 특히 학교나 복지관과 같은 공공영역이 제공하는 돌봄서비스는 발달장애인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사회생활이었고, 가족들에게는 돌봄부담에서 잠시라도 놓여나는 숨쉴 틈이었다는 것을 코로나19팬데믹으로 알게 되었다. 코로나19팬데믹 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모이는 것은 금지되었고, 복지관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우리들은 가정에 찾아가는 발달장애인 개별화된 맞춤형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발달장애인도 필요한 도움이나 지원이 각자 다 다르기 때문에 개별화된 서비스 프로그램은 오랜 숙원이었고, 그 동안은 비용효율성으로 인해서 시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가족들도 발달장애인당사자들도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아침에 일어나 어딘가 갈 곳이 있고, 그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련된 프로그램 맥락에서 어울리다가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은 가족 이외에 유일하게 친구나 사회복지사들을 만나는 기회였으며, 가족들은 돌봄부담에서 벗어나 다른 필요한 활동을 하거나 여유를 찾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코로나팬데믹은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사각지대 정도의 범위를 넘어 코로나 돌봄빙하기는 아니더라도 돌봄한랭기후로 작용했다.

가장 자주 발생하는 발달장애인 돌봄사각지대는 장애가 심한 경우다. 의사표현의 방법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꼬집거나 때리는 경우, 혹은 과도한 자기자극 행동 ( 자폐스펙트럼 장애인 가운데 자기만의 평온을 찾기 위한 자극추구 방식 중 하나로 지속반복적으로 자기머리를 때리는 것과 같은) 경우 즉 자타에게 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경우는 갈 곳이 없다. 대소변을 스스로 잘처리하지 못하는 경우나 원인을 알 수 없어 육체활동이 어려워 누워지내는 경우도 학교든 다른 장애인복지기관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이처럼 이른바 중증의 발달장애인 엄마들이 학교나 복지기관에서 반복적으로 이용을 거절당하면 상처투성이 심리를 갖게 된다.

 

더 이상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겠다. 학교든 복지관이든 보내지 않고 내가 끌어안고 살겠다. 조금 도와주며 아이양육에 대해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거나 시설에 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친정엄마도 형제들과도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 그러다 안되면 안되면 뭐 끝내는 거지 (발달장애아들 11, 지적장애아들 8살 한부모 엄마)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노래하며,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지다. 허나 동네에서 보이지 않게 섬처럼 고립되어 사는 발달장애인과 엄마라는 섬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또한 이용자 명단에 등록시켜 놓고 하염없이 연락을 기다리는 대기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인천만에도 중증발달장애인의 낮보호기관에 대기자가 약 200명 정도이다. 이 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실태조사라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학교 방과 후, 혹은 야간 , 방학 등은 아동 발달장애인들에게 왕왕 돌봄사각지대로 된다. 5일의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쉬어야 할 주말에 모든 발달장애서비스 활동도 멈춘다. 당연히 그 가족들은 쉬지 못한다.

저소득층 가족이 아니더라도 발달장애자녀가 있는 가정은 더 벌지못하고 더 많이 지출해야 하기 때문에 유료프로그램도 접근성을 가로막는 돌봄사각지대다. 모든 안테나를 행정기관이나 복지관을 향해 항상 켜고 있어 새로운 프로그램에 늘 일등으로 선착해 기회를 독차지 하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이런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정보격차도 역시 돌봄사각지대를 만드는 원인이다.

또한 발달장애인 가족들 중에는 여유가 있어서 나름 두터운 돌몸지지체계가 마련된 경우도 있었으나,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근처에서 위태롭게 버텨내는 경우도 많았다. 한부모 가정이 저소득맞벌이가정 혹은 조손가정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낮동안에 발달장애인 자녀를 위해 보낼 물리적 시간 자체를 허용할 자원이 없었다. 만약에 병이라도 들거나 다른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대로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홀로 지적 장애 아들을 키우던 아빠가 상복을 입고 아이를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자동차 열쇠를 온힘을 다해 쥐고 낯선 곳이 무서워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차에 타려는 아이를 30분도 넘게 씨름해서 겨우 복지관 프로그램실에 들여보내느라 땀에 젖은 검은상복 속에 흰아이셔츠와 만성적 난감을 견디느라 보낼 곳을 찾지 못하던 그 시선을 차마 정면으로 응시하기 어려웠다.

존던은 망자를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종소리를 들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시에서 누구라도 온전히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륙의 일부이며, 아픈 손가락이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라고 노래했다. 아프고 고통받는 혹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종소리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들린다. 하나 그 종소리는 돌봄사각지대에 놓인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3 사회적 돌봄효과와 공공성

 

돌봄부담을 나누는 사회적 지원의 효과는 적지 않았다. 실제 돌봄서비스는 우리 복지관에서 직원들이 꺼리고 맡기 싫어했다. 돌봄서비스는 언어치료나 취업훈련프로그램 또는 평생교육강좌 운영에 비해 전문성이 낮은 폼나지 않는 활동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에게나 그 가족(엄마)들에게 사회적 돌봄은 다른 의미에서 굉장한 치유효과가 있었다.

고립된 상태에서 절망스트레스로 우울에 빠진 엄마와만 매우 단조로운 자극에 놓여있던 발달장애 아이들은 초기에 익숙하지 않는 다량의 자극에 당황하고 무서워 여러 가지 양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나 이전처럼 귀가조치를 시키지 않고 견디며 시간이 지나면 발달장애아이들은 점점 사회관계경험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어찌해서 그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또래 돌봄아이들과 종일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발화가 전혀 안되던 아이가 어눌하지만 몇 개의 단어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하고, 주변 아이들 행동에 대한 간접학습이 발생하여 관심영역이 넓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가족들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사회생활에 속해서 늦은 속도와 더 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을지 언정 분명하게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간다.

엄마들이 반응은 훨씬 뜨겁다. 주말여가활동을 위해 버스에 오르는 자녀를 보내며 세상에 이런 날이 오네라고 다른 엄마들과 감탄섞인 수근거림, 그 동안 한 가지 음식만을 고집하는 둘째 아이 때문에 외식에서 몇 년째 한 집만 가야 했던 어느 가족은 모처럼 평안 속에서 다른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외식비와 더불어 발달장애아동을 우리 기관에서 반나절 돌봐주는 프로그램 덕택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반응은 이러했다.

 

정말 국가나 사회라는 것이 있군요. 아무도 우리 아이와 가족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발달장애인 엄마 자조모임)

 

사람들은 자신들이 심리사회적으로 겪는 고통 그 자체도 힘들지만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기대하는 존재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더욱 깊은 아픔을 느낀다. 돌봄은 그 자체로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립이나 단절이 아니라 속함이나 연결되었다는 체감이야 말로 궁극적인 치료효과를 가진 것인지 모른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국민이든 시민이든 꼭 필요한 것인데 시장에서는 돈이 안되서 안하고 개인들은 자원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일에 솔선하고 수범해서 뛰어드는 것이 공공성이다.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수많은 돌봄부담이 아직도 가족들의 사랑에 기대어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가족들의 돌봄부담을 줄이는데 사회적 자원을 쏟아 부어야 한다. 인명살상무기를 구입하는데 들어가는 돈을 없애고 사람들의 목숨과 일상을 살리는 사회적 돌봄에 쏟아 부어야 한다.

하지만 돌봄의 공공성은 국가와 같은 공적 영역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민간영역의 공공성 역시 강화되어야 한다. 돌봄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체적 물리적 시간의 투여가 절대적이다. 우리 복지관에서 돌봄 프로그램이 가능했던 이유도 열정적인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얼마간의 돈을 지급하기도 했지만, 무슨 행운인지 지역사회에는 꼭 돈이 되지 않아도 이웃들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오지라퍼들이 있다. 우리 복지관에서 홀로 고립되어 지내는 발달장애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학대나 착취 혹은 생활상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지 않은지를 살피는 발달장애인 시민옹호인들이 약 40명 활동하고 있다. 복지관 직원들이 수 많은 지역사회 발달장애인들을 일일이 찾아 보기 어려운 형편에서 시민옹호인들은 튼튼한 사회의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오지라퍼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조직하는 활동이 지역사회에서 돌봄의 공공성을 증진시키는 일이다.

참고로 언급하면 40여명의 시민옹호인들은 95%가 여성이며, 연령이 50세에서 65세미만에 집중되어 있다. 지난 20년 동안 50만에서 110만으로 2배 늘어난 돌봄노동자들 역시 93%가 여성이며 50대와 60대가 주류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이 오지라퍼로 또다른 열정페이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오지랖이 중요한 사회적 자원으로 귀중하게 쓰일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필요한 일자리가 약 400만명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적 돌봄노동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