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댓글 0

북리뷰

2020. 4. 22.

여행의 이유

김영하

문학동네

 

[목차]

추방과 멀미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오직 현재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노바디의 여행
여행으로 돌아가다

작가의 말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일종의 여가 생활 지원비가 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쇼핑몰의 물건을 사거나 의료, 여행, 취미생활, 자기계발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금액에 대해서 삼성 SFC 카드를 사용한 청구 금액을 가용한 포인트 내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이다. 쇼핑몰에는 마땅히 구미를 끌만한 품목이 많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비나 여행비용으로 포인트를 소진시키는데, 올해 같은 경우에는 그런 항목마저 계산해 넣기 힘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책 충동구매' 를 하게 되었다. 많은 책들을 왕창 사버렸는데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도 그 중 하나였다. 사실 베스트 셀러 코너에는 눈길이 인색한 편인데, 이 책은 대중교통을 타거나 카페에서 가볍게 꺼내 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매했다.

 

 

<충동구매한 책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행의 이유는 오래 간직해 놓고서 여러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베스트 셀러라서 긍정의 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되새겨 볼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베스트 셀러일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책 꽂이에 꽂아놓고,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매번 책 가방을 꾸릴 때마다 다른 책들과의 우선순위 경쟁을 할만한 그런 책이다.

작가의 단편적인 여행기를 짜깁기한 것 처럼 책을 펴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수 차례의 배낭여행과 타 도시에서의 여행자로서의 삶을 통해 진정한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 작가 스스로 되 묻는 형식을 취한다. 그 질문의 한 토막, 한 토막들이 책의 절을 이루고 각 절에는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여행의 역사와 여행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한 금쪽 같은 해석들이 나타난다. 책은 상하이 푸동 공항에서 작가가 추방당하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추방당하면서 과연 잠시 공항에 머물렀다가 온 것은 여행인가 아닌가를 질문하게 된다. 작가는 단지 출국-상하이-체류-집필-귀국의 순서에서 출국-상하이 체류-귀국-집필로 바뀐 것 뿐이지 않지 않냐고 생각해 본다. 애초에 여행을 시작한 동기는 상해에서 원하는 원고를 쓰고자 함이었는데, 추방으로 인해서 애초에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진 못한 허망함을 애써 달랜 것이었다. 고대로부터 모든 여행은 뭔가 소중한 것을 얻어와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첫 여행은 그렇게 소중한 기회를 헛되이 버리지 않고 뭔가를 얻어와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출발한다.

나 역시 첫 해외 여행 (독일 교환학생으로 가는 비행기 였다.) 의 긴장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처음보는 서양의 풍경에 연신 와! 와! 했었고, 스스로 떠난 유럽 배낭 여행에서는 하나라도 놓칠라 매일 매일 노트에 일기를 적고 또 여행지마다 기념품샵에 들러 기념 엽서를 수집하곤 했었다. (언젠가 사용되겠지 했지만,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고스란히 모셔져 있다.) 그런 경험뒤에 재 방문한 경우에는 한결 여유가 생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열심히 사진 찍기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 고품질로 촬영한 이미지가 온라인에 이미 있는데 내가 찍은 이미지를 어따 쓰랴.) 차라리 그 시간에 실물을 제대로 영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차원으로 간접적으로 접하는 이미지와 달리 현장에서 접할 때의 감동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작가가 산뜻하게 제시한 여행의 목적이 과연 여행의 모든 것을 의미할까? 작가는 계속하여 '여행이란 무엇' 인지 탐색해 본다. 작가 자신은 호텔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프로그램의 근원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이 있었는데, 작가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성격 창조 워크숍' 이라는 수업에서 학생들이 만들어온 인물들에 대해서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에요' 라는 대답을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그럴 때 작가가 선생으로서 하는 말은,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이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는 스프레드시트에 표를 만들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들을 끝까지 파헤쳐 표로 만든다고 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인물의 내면이고, 가장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프로그램' 이라고 한다. 여기서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 이다. 특정 상황에서 해당 인물이 내 뱉는 대사나 취하는 행동들이 내면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작가는 자신이 호텔을 찾는 이유를 어쩌면 자주 이사를 해야했던 유년시절의 프로그램에서 찾는다. 이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탁월한 부분이 있어 인용한다.

 

만약 내가 영화나 연극의 등장인물이고, 인물이 낯선 도시의 호텔에 도착하는 경험을 주기적으로 필요로 한다면, 배역을 맡은 배우는 아마도 작가나 연출자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이 인물은 호텔을 좋아한다고 말하네요."

"네, 그런 인물이에요."

"여행도 자주 하겠네요?"

"자주 해요."

"인물 내면의 어떤 프로그램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 인물은 그냥 호텔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도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해요."

"그건 취향이지 프로그램이 아니잖아요. 프로그램은 인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이잖아요."

"맞아요. 모르니 말로 내뱉을 수가 없죠. 오직 극중의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서 이런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자기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뭐냐니까요?"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작가는 '알쓸신잡' 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출연자들 각자가 자신만의 계획에 의해 (때로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저녁에 함께 모여 각자의 여행에 대해 공유한다. 하루의 여행 분량은 18시간 정도가 된다. 각 출연자들은 자신의 여정은 알고 있을지라도 다른 이들의 여정은 프로그램이 최종 반영될 때에서야 비로소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장 많은 하는 말은 다른 출연자들의 여행 경험을 듣다가 "아, 그래요?" 같은 반응을 보이며 호응하는 것이다.

 

분명 함께 여행을 갔는데도 저녁식사 자리에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출연자의 여행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이 프로그램의 이상한 점은 '간접성'에 있다고 한다. 같은 여행지에 갔으나 서로의 모습이 어떻게 편집되어 나올지 미리 예측할 수도 없고, 전체적인 컨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제작진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총괄 프로듀서 조차도 일주일 사이에 모든 영상을 다 보고 전체 편집을 세세히 챙길 수 없기 때문에 각 여행의 편집본을 보게 되니, 실제로 각 출연진들은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이 방영될지를 모르는 일종의 '카프카' 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작가는 여기서 여행의 '간접성'을 말하고 싶어 한다. 분명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테네, 전주, 피렌체, 부산 등을 갔다 왔지만 작가 자신이 경험한 것은 지극히 여행지의 일부분이지 않는가? 다른 출연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작가는 이런 간접 경험들도 여행이라고 말한다. '탈여행' 이라는 개념은 믿을 만한 정보원을 시켜 여행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먹으면서 전세계를 누볐다고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방구석 여행자' 라고 비꼬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어느 정도 방구석 여행자들이다. 여행 에세이나 TV 를 통해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시간과 비용이 허락하면 동경하던 곳으로 떠난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그곳을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또다른 여행기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의 직접 경험에 누적되어 발효되면서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된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어떤 곳을 여행하고 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그 도시의 전부를 속속들이 다녀온 것은 아니다. 설령 그 도시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그 도시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지역은 아주 한정돼 있다. 그런데도 외국인이 서울에 대해 물으면 마치 서울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세한다. 때로는 서울에 대해 책을 읽은 외국인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총체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알고 있을 때가 많다. 오히려 나는 서울에 대한 책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르의 말처럼 우리는 간접적으로 타자를 통해 좀더 깊이 있는 여행을 경험한다. <알쓸신잡>은 이중, 삼중으로 탈여행을 수행한다. 제작진들은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출연자들의 행적을 종합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현장에서는 이야기로만 들은 다른 출연자들의 여행을 몇 주 후에나 영상으로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도 어쩌면 '방구석 여행자' 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가끔 여행을 가자고 하면 비싼 돈을 들여서 뭐라고 가야 돼냐.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 히말라야도 가고 전 세계 멋있는 곳 전부 다 가볼 수 있다고 말하신다. 엄밀히 간접경험으로서 여행을 말씀하신 거라면 틀린 말은 아니라해도, 직접 눈으로 그런 것들을 (특히 서양 문물) 확인하고 난 후에는 어머니 생각도 어느 정도 바뀌실 거라 생각되고 다녀온 곳들을 다시 TV 로 보게 될 때마다 무용담 처럼 자랑 하실수 있을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부모님과 동행하는 일정을 맞추는 것은 여간 쉽지가 않다. 조만간 같이 로마의 콜로세움을 누비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모나리자를 보고 또, 스위스의 융프라우 전망대에서 같이 신라면을 먹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판 댓가로 엄청난 부를 얻는다. 하지만 '그림자' 라는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질여 질수 있는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리 같은 것이었다. 여행을 경험한 뒤에 돌아올 근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지켜야 한다. 방랑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지키는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할까? 아니면 그림자를 판 댓가로 전세계를 누비는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작가도 계속하는 고민이라고 한다.

종종 여행지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여행지의 신선함, 이국적인 풍경과 마주쳐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어떤 누군가 (Sombody) 가 아닌 노바디 (Nobody) 가 되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참여자가 되지는 못한다. 주권이나 시민권, 투표권도 없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Sombody 가 되고 싶어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며, 그가 겪은 모든 고난은 여행지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한 무모한 시도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즉, 여행지에서의 약탈자가 되어선 안 되고 Nobody 로서의 존재를 인지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성숙한 여행의 관건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고 묻고 싶은 충동 등을 억제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한다.

어쩌면 여행은 '아무것도 아닌자' 가 되고 싶은 욕망에 의해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작가의 의견을 싣고 리뷰를 마친다.

 

 

실뱅 태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키클롭스 동굴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는『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오디세우스와 열두 명의 부하는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로 입구를 막아놓았기 때문에 출구는 없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자신들이 가져온 포도주를 키클롭스에게 선물한다. 포도주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어로는 우티스Outis, 영어로는 노바디Nobody, 우리말로는 '아무도안'이라고 답한다. 기분이 좋아진 키클롭스는 포도주 선물에 대한 답례를 하겠다고 한다. 가장 마지막에 '아무도안'(인 놈을) 잡아먹겠다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한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은 부하들과 함께 술에 취해 잠든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눈을 찌른다. 비명을 듣고 동굴 밖으로 몰려온 다른 키클롭스들은 누가 괴롭히느냐고 묻는다. 키클롭스는 대답한다. '나를 죽이려는 놈은 아무도안이야.' 영어로는 'Nobody is killing me'로 번역되는 이 말은 재미있는 말 장난으로 우리말로는 어떻게도 완벽하게 번역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자기를 죽이려는 놈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 된다. 다른 키클롭스들은, 아무도 죽이려는 이가 없는데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미쳤나보다 생각하고 돌아가버린다. 

여행자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흥미롭다. 여행자 오디세우스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그의 허영심이었다. 그가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스스로를 노바디로 낮춘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