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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히고 싶다 시의 감옥에 영혼의 자유를 보장하는 그 곳에

[스크랩] 북미원주민 이야기 - 서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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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이끌어주는 작은 이야기

2015. 2. 9.

왜 인디언인가?

서정록님은 지금 거제도에 사시면서 한국 고대사를 통해 우리 문화의 전통과 정신세계를 연구하고 계십니다. 아메리칸인디언에 대한 공부뿐 아니라 주변국들과 소수민족, 제3세계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진정한 전통을 되살리는데 필요한 작업이라는 겁니다. 아메리카인디언의 정신세계는 구술과 wintercount를 통해 현재까지 많은 부분이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 고대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함께 아메리카인디언의 세계와 우리 고대문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서정록님을 글을 통해 나눌 수있기를 바랍니다.

 


 

[북미원주민 이야기1]
왜 인디언인가

검은호수 서정록

수년전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티벳 라다크인들의 소박한 생활이 어느덧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들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 혼탁한 시대에 라다크인들의 소박한 생활이 과연 우리를 일깨워 새로운 생명세계로 나아가게 해줄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 문명을 접하기 시작하자, 얼마 안 가 그들의 순수함과 소박함을 잃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너무도 착해서, 순진무구해서 자본주의의 교활한 상술에 무너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이 무너진 것은 직접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침투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들 내부의 욕망으로부터 무너졌다고 보는 쪽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에는 오체투지의 지극한 낮춤이 있는 동시에 기복(祈福)의 문화가 함께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수백 년 동안 백인들의 압제와 밀려오는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도 의연히 자신들의 본래의 모습을 지켜가려는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와 대비됩니다. 물론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백인문화에 동화되어 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의사에 의한 것보다는 백인들이 인디언 부락을 파괴하고, 그들을 거리나 보호구역으로 내몰았던 데 주로 기인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백인들의 생활방식을 따라갔던 이들과 잘 살아보기 위해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경우를 같이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19세기 중반에 백인들이 중서부의 인디언 마을을 빼앗는 과정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인디언들과의 잦은 마찰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전투를 하다보면 서로 포로가 있게 마련이지요. 백인 병사들 역시 인디언들에게 포로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다 보면 자연히 결손가정들이 생깁니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 죽거나 자식이 죽는 거지요. 그런 경우 인디언들은 포로들 중에서 자신의 남편으로 삼고 싶거나 자식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남편이나 자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가족이 되는 거지요. 인디언 가정에 들어간 백인 병사들은 곧 인디언 사회에 적응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디언 전사대의 일원으로 백인 병사들과의 전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운이 나쁜 경우 백인들에게 포로가 되지요.
그러면 백인들은 그에게 왜 백인이 인디언 전사대가 됐느냐, 백인 사회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디언 가족이 된 백인 병사들은 하나같이 백인 사회로 복귀하기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제 자신은 인디언이라고, 더 이상 백인이 아니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인 인디언이 되고자 했을까요. 도대체 인디언 사회에 무엇이 있기에?

1832년부터 8년 동안 북아메리카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하며 수백 점의 인디언 그림을 남긴 '조지 캐틀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과 현지의 생활과 풍습을 자세히 적은 그의 편지는 인디언 예술과 문학의 고전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인디언들의 삶과 우호적인 태도에 크게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극한 정성으로 늘 나를 환영해주었던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법이 없어도 정직하며, 감옥도 없고, 가난한 집도 없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십계명을 읽은 적도, 목사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지만, 그것을 잘 지키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없는, 그리고 그러한 맹세가 필요 없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성경이 없어도 신을 공경하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신 또한 그들을 사랑할 것이기에.
나는 모든 종교들이 같다고 믿으며, 종교적 적대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나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는 민족, 그런 것에 대해서 징벌하는 법조차 없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땅을 빼앗고자 그들의 영역에 침입한 자들 외에는 백인들과 싸운 적이 없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나는 신이 창조한 인류를 사랑하며, 결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신의 신성한 아이들이기에.
나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디언 민족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돈을 탐하지 않는 인디언 민족들을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뉴욕 주에 거주하는 이로쿼이 사람들이 서구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민주주의 제도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고귀한 야만인'이라 부르며 어떻게 야만인들이 저렇게 수준 높은 민주주의 정신을 구현했는지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연방 헌법의 골격이 이로쿼이 연합의 <위대한 평화의 법>에 기초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에 익숙해져 있는 분들 가운데는 여전히 인디언들을 야만인으로 인식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에 갔다가 '인디언 투어(Indian Tour)'를 하고 온 분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 보니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술 먹고 마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던데, 그런 인디언에게서 무엇을 배운다고 그러냐고 말입니다.
미국의 주류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일수록 이런 견해를 가진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사실 인디언 문화야말로 오늘날 미국의 주류문화, 이른바 신자유주의 문화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문화이기에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최고이고, 돈만 가지면 못할 게 없는 세상에서 물질보다는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나 개인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부족을 먼저 생각하며,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원시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북미 서남부의 산악지역(아리조나 주)에 사는 나바호족은 부자가 되는 것을 무척 경계합니다. 이기심과 욕심 없이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가 되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가족과 이웃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 어려운 가족과 이웃을 챙기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인디언 사회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서구와 구대륙의 문화가 물질과 축적을 숭상하는 문화라면 인디언 사회는 나눔을 숭상하는 문화라고 할 만큼, 그들은 물질을 이웃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질에 여유가 있는데도 이웃의 과부나 고아나 어려운 노인들을 돌보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것이 예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락에 축제가 있으면 서로 자신이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나와 이웃과 나눕니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조그만 것이라도 들고 나와 자신의 마음을 나눕니다.
그래서 인디언 사회에는 기본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물질을 보는 태도가 자본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자신의 형제요, 친척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지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낳아 기르듯, 어머니 대지가 우리를 낳고 기른다는 것이지요.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러한 사상을 '천지부모'라는 말로 풀어낸 적이 있습니다. 사실 대지가 없으면 이 세상에는 나무나 식물도 없고, 동물도 없고, 물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지구생명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어머니에게 의존하듯….
그래서 그들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어머니라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것입니까? 우리는 다 커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같이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바로 어머니의 살갗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걸어 다닐 때도 조심해서 걸어 다닙니다. 결코 뒤꿈치를 쿵쿵거리며 걷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인디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봅니다. 혹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존재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나 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아이들을 몹시 위합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또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일도 없습니다. 필요할 때는 부드럽게 알아듣도록 설명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다치지 않도록 말이지요.
또한 그들은 여성을 매우 존중합니다. 여성을 구타하는 남자는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습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그 사회의 각종 모임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일상적인 삶과 영적인 생활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분리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상생활 따로, 종교생활 따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하지요. 인디언들의 경우에는 양자가 언제나 일치해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적 삶이 곧 종교요, 기도인 것입니다.

철나고부터 머리 속에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갖고 살던 저는 이런 인디언들의 삶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깊이 이해하면서, 그 동안의 쓸 데 없는 고민과 번민들을 모두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고(故)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있을 때도 풀리지 않던 의문들이 인디언을 알게 되면서 눈 녹듯 녹는 것이었습니다. 제 내면의 허구의식도 바로 보게 되었고요. 물론 오랫동안 도시생활을 하며 몸에 쌓인 습이야 하루아침에 털어지지 않겠지만, 이젠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인류의 황금시대가 있었고, 그 뒤에 은의 시대가 있었고, 청동시대가 있었고, 철의 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아니더라도 과거에 황금시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많은 민족 신화에 등장합니다. 저는 북미 인디언들이야말로 인류의 황금시대를 산 사람들이라고 주저 없이 말합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중동지방에 1만여 년 전 실제로 황금시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수렵채집시대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유골들의 건강상태를 보더라도 그 뒤의 농경시대보다 더 건강했고요. 하지만 그 시기는 불과 500여 년으로 끝나고 맙니다. 인류가 노력해서 만들어진 황금시대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진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광활한 숲과 풍부한 물, 그리고 다양한 수렵 동물들과 채집식물들이 많았던 점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한 문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역사상 인간이 가장 사람답게 산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위해주고,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천지만물을 모시고 언제나 진실 되게 살고자 했습니다.

요즈음 생태공동체 비슷한 것들이 이곳저곳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현재의 자본주의의 주류문화에서 벗어나 대안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도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뚜렷한 방향과 지표와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방황하거나 실패할 위험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도 남다른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북미 인디언 속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완전한 답은 아니더라도 그 정신과 방향만은 말입니다.

앞으로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조금씩 써보려고 합니다. 같이 생각하고 나누는 그런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정록: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왔으며 한살림운동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고대 동북아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글쓴이는 인디언의 삶과 정신세계에 크게 감명받아 지인들과 조그만 인디언 모임을 가지며 현재 거제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백제금동대향로-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를 찾아서』(학고재)가 있고, 역서로는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나무심는사람)가 있습니다.

**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3년8월호

 

 

 

[북미 원주민 이야기2]
인디언에 대한 오해

검은호수 서정록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자란 환경이 다르면 성격과 품성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이지요. 각자의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요. 혼자서는 못 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어떤 문화에서 성장했는가가 결국 그 사람을 결정짓는다는 뜻이 됩니다. 특히 거의 도그마화한 종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소지가 높습니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탄압한 역사를 보면, 종종 서구에 의한 문화적 폭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어머니 대지를 과학과 발전의 이름으로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유럽 사람들의 직접적인 조상은 스키타이-흉노계통의 유목민인 게르만입니다. 기원후 3세기경, 동북아에서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흉노족(훈족)이 동부 유럽지역에 출현하면서 고트족, 반달족 등 게르만의 연쇄 이동을 가져왔고, 결국 유럽은 게르만족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히고 맙니다. 그 여파로 로마 또한 문을 닫고, 유럽은 중세로 넘어가지요.
유럽사는 이 시기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현 유럽인들의 조상이 게르만 유목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유럽에 정착한 뒤 로마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조상이 수천 년간 믿어왔던 샤머니즘 문화도 철저히 배격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유명한 중세의 마녀사냥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수십만 명 이상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마녀라 규정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샤머니즘을 신봉하거나 무당의 소질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유럽을 정복한 유목민들은 골수 기독교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예부흥시대를 거쳐 해외로 본격적인 식민지 전쟁에 나섭니다. 콜럼버스가 바다로 나갔던 것도 사실은 식민지 확보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메리카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인디언들의 문화는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만, 유라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페르시아 등 이웃 제국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국가와 계급과 신분, 빈부격차 등 전통사회에서 흔히 보는 그런 요소들을 함께 갖게 됩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는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당시 국가도 없었고, 계급과 신분제도도 없었습니다.(중남미의 경우는 약간 사정이 다릅니다)
따라서 북아메리카는 국가가 들어서고 계급과 착취와 축적의 문화가 들어오기 전의 샤머니즘의 원형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아마도 피상적으로 인디언을 아는 많은 분들은 인디언들의 모습에서 그저 원시인의 모습만을 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문화에는 적어도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국가의 지배, 자본의 횡포, 빈부의 격차와 착취 등의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친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자연에서 수렵과 채집, 어렵 등을 통해 먹을 거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또 축적 대신 나눔의 문화를, 내 것보다는 이웃과 부족과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는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또 동식물과 바위 등 모든 존재는 생명을 갖고 있으며, 우리 인간과 형제요, 친척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럽의 백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욕심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 인디언 문화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백인들의 조상들이 믿던 것과 같은 종교를 믿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아니 그들의 조상보다도 훨씬 더 정제된 샤머니즘을 들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백인들의 눈에는 그저 헐벗은 야만인 이교도로밖에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성인'이라는 오만과 착각 속에서 인디언들의 각종 의례를 미신으로 매도하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문화적 독선과 폭력이지요.
백인들이 하는 짓을 보다 못한 호피족 노인이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백인들의 눈에 우리는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당신들이 당신들의 신을 믿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신을 믿는다. 우리의 신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준다. 우리의 신은 우리에게 비구름과 햇빛과 옥수수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다. 우리의 신은 우리가 당신들의 신에 대해서 듣기 훨씬 전부터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주셨다.
만일 당신들의 신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그분에게 말해서 나의 신이 내게 하는 것처럼 내게 말하게 해주기 바란다. 백인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슴을 통해서 말이다. 당신들의 신은 잔인한 신이며, 강력하지도 못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늘 사악한 것을 입에 담고 있으며, 사람들이 죽은 후에 지옥에 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은 아주 강력하며, 늘 좋은 일만 하신다. 삿된 점이 없을 뿐더러 우리가 죽은 뒤에 가는 지하세계에는 지옥과 같은 것이 없다. 당신들의 종교로 개종하느니 차라리 나의 신과 나의 종교를 고집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종교 속에 있을 때보다 나의 종교 속에 있을 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Festivals of the Hopi : Religion, the Inspiration, and Dancing, an Expression of Their National Ceramonies' in The Craftsmen, No.12, 1907에서)

결국 백인들은 광활한 아메리카 땅을 빼앗기 위해 인디언들을 그들의 터전에서 내쫓기 시작합니다. 미국정부는 "신이 아메리카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종교적 슬로건까지 내세우며, 십자군 전쟁-그것이야말로 중세에 유럽이 중동에 가했던 문화적 폭력이지요.-을 하듯이 인디언들을 싹 쓸어버리기 시작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할 당시, 북미 인디언들의 수는 최소한 6~7천만명에서 1억 내지 1억2천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당시 중국의 인구가 1억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95%가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가지고 들어온 질병들-홍역, 콜레라,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이질 등-에 감염되어 죽고 맙니다. 끔찍한 이야기지요.
그리고 살아남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 또한 그들이 살던 땅을 지키기 위해 백인들과 싸우다 대부분 살육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많던 인디언들이 20세기 초에는 불과 수십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백인들이 지정한 보호구역(Reservation)에 갇혀서 배급생화을 해야 했습니다. 말이 보호구역이지 철조망 친 포로수용소였지요. 백인들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게 시민권은커녕 영주권조차 주지 않은 채, 문자 그대로 포로로 가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저는 유럽인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묘한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기원후 수세기까지도 샤머니즘을 신봉했던 이들입니다. 이른바 '북유럽신화'니, '오딘신화'니 하는 것들은 우리 동북아나 시베리아, 그리고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두루 믿었던 바로 그 샤머니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른바 진보의 이름으로 인류의 소중한 원주민 문화-특히 제3세계의 많은 민족문화-를 짓밟는 야만을 자행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북아메리카인들은 찬란한 '인류으 황금시대'를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공경하며 인간답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축적이 가져오는 해악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것을 나눔의 문화로 발전시켰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자연과학으로 무장한 유럽인들의 눈에는 그런 참다운 가치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번지르한 물질문명만이 최고라는 생각에, 그런 물질문명을 갖지 못한 민족들을 원시인, 야만인으로 몰아 학살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백인들은 서부로 진군하면서 인디언들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전사 집단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야만 여론을 움직여 그들을 공격할 정치적 명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미국정부의 그와 같은 악의적인 선전 탓에 많은 백인들이 실상도 모른 채 '인디언'이라면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인디언들도 부족끼리 더러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규모의 전쟁이 아닙니다. 인디언의 각 부족에는 일반 추장 외에 따로 '전사 추장'이 있습니다. 일반 추장이 부족의 대소사와 행정적인 일을 맡는다면, 전사 추장은 일종의 군사책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족이 쳐들어오거나 다른 부족을 응징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가 발의를 합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므로 언제 공격하려고 한다. 이에 동의하는 전사들은 모여라."하고 말이지요. 거기에 동의하는 전사들이 모이면-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당연히 모이지 않지요.-그것이 바로 '전사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가 대개 20명 안팎이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부족 간의 분쟁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디언 사회는 여성중심의 사회입니다. 여성중심의 사회라는 것은 여성문화가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성들의 경쟁, 권위, 갈등, 대립의 요소보다는 자연히 여성들의 협동, 우애, 공존, 화해의 요소가 우세합니다. 따라서 인디언 사회를 폭력적인 전사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공격하여 그들이 살던 땅을 빼앗기 위한 마타도어(흑색선전)였던 것입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으면서 수많은 조약을 써주었습니다.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 만들어진 조약들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땅이 탐나면 번번이 자신들이 맹세한 그 조약을 위반하고 침략을 했습니다. 그렇게 야금야금 거대한 아메리카 땅덩어리를 모두 빼앗았던 것입니다.
19세기 말, 수우족의 유명한 전사 추장이었던 '앉은 소(Siting Bull)'는 자신을 비난하고 모함하는 백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인들이 만든 조약을 우리 붉은 사람이 깬 적이 있는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백인들은 우리와 만든 조약을 지켰는가?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세계는 우리 수우족의 것이었다.
우리의 땅에서 태양은 뜨고 졌다. 우리는 만 명의 기병을 전쟁터로 보냈다.
전사들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우리의 땅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들을 소유했는가?
내가 백인들의 땅을 한 조각이라도 훔친 것을 본 자가 있으면
지금 내 앞에 나서 보라.
내가 단 1페니라도 훔친 것을 본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
그럼에도 그들은 나보고 도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백인 여자가 포로로 잡혔을 때 내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나쁜 인디언이라고 말한다.
내가 술 마시는 것을 본 백인이 있는가?
배고픈 사람이 내게 왔을 때 내가 굶긴 채로 보낸 적이 있는가?
내가 아내를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또 내가 법을 어긴 적이 있는가?

내가 나의 민족을 사랑한 것이 잘못인가?
나의 피부가 붉은 것이 죄인가?
아니면 내가 수우족이기 때문에?
내가 내 아버지가 시시던 곳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나의 민족과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백인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의 땅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보호구역에 거주하던 인디언들이 외부로 나가면서 일부 보호구역에 거주인구가 줄어들자, 그 땅마저 빼앗기 위해 온갖 시비를 거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의 탐욕은 그칠 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비단 백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 사회 또한 모두들 물질을 신봉하고 있지 않나요? 서구문화를 따라간답시고 이 땅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모는 어리석음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지는 않던가요?
우리는 누구인가요?
흔히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지역의 문화를 보존·발전시키되, 그 정신만은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지구적 차원으로 성숙해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서정록/ 고대 동북아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깊은 관시을 갖고 있는 글쓴이는 인디언으 삶과 정신세계에 크게 감명 받아 지인들과 조그만 인디언 모임을 가지며 현재 거제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 생태공동체를 일구는「이장」, 2003년9월호.

 

 

 

[북미 원주민 이야기3]
샤머니즘이란 무엇인가

검은호수 서정록

민속학을 하는 임재해 교수에 의하면, 안동댐이 들어선 뒤 10년쯤 지나 댐 주변의 마을들을 답사한 결과 마을에 남아 있던 당나무들이 완전히 말라죽은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마을사람 몇이 남아 마을을 지키며 동제를 지내는 경우에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고 하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지역 주변의 마을은 예전보다 물이 더 풍부해졌으므로 나무가 번성해야 하는데 말라죽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정에 굶주려 죽은 것입니다. 정이란 무엇입니까? 영혼의 교감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나무도 영혼을 갖고 있고 사람들과 교감을 합니다. 늘 당나무 주변에 모여 살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정에 굶주린 당나무들이 결국 죽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현재 서양 사람들의 사고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에서는 나무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틀 속에서 그들은 물질과 정신을 나눕니다. 양자는 물과 기름 같아서 섞일 수 없으며, 섞여서도 안 되지요. 그것이 서양 사람들이 몸과 영혼, 물질과 정신, 선과 악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고는 우리의 몸과 자연의 존재들을 신성치 못한 것으로, 인간의 정신에 견주어 저급한 것으로 여깁니다. 자연히 우리의 일상생활과 이 세상의 삶 또한 세속적인 것으로, 신성치 못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신성함은 오로지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한한 이 세상의 삶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죽음을 악으로 보는 시각도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오직 영혼이 돌아갈 천국만이, 세속을 벗어난 신적인 가치만이 최고의 선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사고는 필연적으로 인간 이외의 자연의 존재들을 도구적 대상으로, 단순한 물질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와 역사 또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역사적 유물이란 영혼이 없는, 또는 영혼이 떠난 딱딱하게 굳은 골동품에 불과하니까요. 따라서 과거의 역사란 언제든 돌아가야 할 근원과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되기보다는 부정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그들의 발전, 진보적 사관은 바로 이런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의 직선적인 시간관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기지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발전이 없는 역사란 곧 정체요, 퇴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발전된 물질문명을 갖지 못한 사회를 야만인, 원시인으로 여겼습니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그처럼 철저히 짓밟은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서구의 이원론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인디언과 제3세계의 주민들뿐이겠습니까! 어머니 대지 또한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얼마나 함부로 파헤쳐지고 파괴되었던가요!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인류의 생태적 위기, 전 지구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 서양인들 역시 그들의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생태주의적 사고입니다. 그 중에서도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는 환경문제를 기술 중심으로 접근해 오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과 환경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간, 가장 발달된 인식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심층생태주의가 전통적인 서구적 사고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다른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의 에고(ego)로부터 출발하니까요. 그런데 나의 에고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 주관, 내 관점에서 행동합니다. 하지만 나의 주관대로, 즉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다른 존재들로부터 반발과 제재가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부득이 다른 존재 역시 '무언가(something)'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타자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모든 게 이런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되 그 방식이 매우 관념적이고 소극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미 인디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마니즙을 신봉하는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들이나 호주의 원주민들,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합니다. 왜? 그들이 보기에는 동식물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심지어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신성하고 평등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생명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주재자인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동식물은 물론 바위나 해와 달, 별, 심지어 산, 강, 바람, 구름, 비 또한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존재방식이 다를 뿐 우리 인간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서양 사람들이 정신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없다고 여긴 몸과 물질에도 신성함(spirituality)이 있다고 봅니다. 물질에도 신성함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단순히 물질덩어리로 이루어진 대상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 다 영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하나도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소중하듯, 이 대지 위에 사는 다른 동식물과 바위 등도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내 새끼들이 귀하듯, 동물이나 벌레들의 새끼들도 귀하고, 다른 존재의 새끼들도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미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공경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동식물은 물론 벌레조차 공경하도록 가르칩니다. 결코 벌레들을 징그러운 대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그들만의 임무와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의 몸과 자연의 존재들에 영적인 요소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일상 생활에는 신성함이 깃들게 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일상적 삶이 곧 그들의 종교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성 속에 깃든 신성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세속적인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일상적 삶과 종교는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聖)과 속(俗)이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을 신성한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행위와 춤과 노래 또한 신성한 것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서양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를 부정시했습니다. 정신이 아닌 몸을 사용하는 행위는 세속적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종교적 의례나 축제 따위를 제외하면 평상시에는 춤추며 노는 것을 멀리했습니다.
서양인들의 몸에 대한 이러한 관념을 바꾼 사람이 바로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입니다. 그녀는 몸으로도 영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서양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녀 이후 현대무용은 몸으로 어떻게 영혼의 노래를 표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적인 요소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은 물론,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춤과 노래야말로 신성한 것임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춤과 노래야말로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고 나누는 영적인 행위임을, 기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천지만물을 기쁘게 하고, 신들을 기쁘게 하며 서로 마음을 누누었던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몸과 자연과 다른 존재들을 구성하는 물질에도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과거와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이란 기본적으로 신성할 수밖에 없기-최악의 경우에조차-때문이지요. 자연히 우리의 조상들이 겪은 과거의 경험과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겪는 경험에는 신성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랫소리, 시냇물이 흐르던 모습, 태풍이 대지를 휩쓸며 정화하던 일, 봄이면 남풍이 불어오고 들판의 새싹들이 돋던 일들, 우리를 먹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던 동물들, 마른 대지에 내리던 단비, 가슴이 답답할 때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던 바람소리..., 그 모든 것이 영적이고 신성한 것이 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늘 자신을 낮추고 주위의 동식물들로부터, 그리고 자연현상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서 삶이란, 그리고 과거의 삶이란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지혜와 신성함의 보고가 됩니다. 신성한 이야기가 되고 신화가 됩니다.
그래서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현재 못지않게 과거와 역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속에 미래와 지혜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요시 여깁니다. 자연히 옆과 아래를 바라보기보다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땅은 신성치 못한 곳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만물을 실어 기르는 대지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어머니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지극한 것입니다.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지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대지는 한낱 물질덩어리에 불과하니까요.

북미 인디언들과 구대륙의 샤마니즙을 신봉하는 이들이 생태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존재의 영을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사냥을 할 때 동물신령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허락없이 사냥하는 것은 다른 존재의 영혼을 해치고, 생명을 해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사냥을 한 뒤에는 반드시 감사를 하고, 나에게 몸을 준 동물의 영혼이 다시 재생, 환생하기를 빌어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작은 형제여, 너를 죽여서 미안하다
그러나 네 고기가 필요했단다
내 아이들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라며 울고 있거든
작은 형제여, 나를 용서해 다오
너의 용기와 힘, 그리고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마
자, 이 나무 위에 너의 뿔을 매달아 줄게
그리고 붉은 리본으로 장식해 주마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너를 기억하고 너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마
너를 죽여서 미안하다
작은 형제여, 나를 용서해 다오

아마도 샤마니즘 하면 우리는 맨 먼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무당의 푸닥거리를 떠올리겠지요. 신을 모신다고는 하지만 다분히 기복적(祈福的)인 그들의 모습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가 들어오고, 계급과 신분과 착취와 축적의 요소가 들어온 뒤에 변질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샤마니즘은 구석기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종교적 정신의 근원입니다. 그 당시에는 국가도 없었고, 계급과 신분과 착취와 축적의 요소도 없었습니다.
북미 인디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저는 국가와 계급과 신분과 축적이 개입하기 전의 샤마니즘의 모습을 보려면 북미 인디언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착취와 기복이 없습니다. 나보다는 늘 내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먼저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도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지식과 편견과 물질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질 못하지요. 편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사람에 대한 태도가 그러할진대, 동식물이나 벌레나 바위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유로울 리 없겠지요. 그와 같은 편견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둘러싼 대상들을 찬찬히 살펴보세요.
산을 바라보세요.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세요. 하늘의 구름과 강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 앞에 서 보세요. 비를 맞아 보세요. 아침에 동녘에서 뜨는 해를 보세요. 그 바람을, 그 비를, 그 아침해를 그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 다른 나무와 동물과 풀의 숨결과 섞입니다. 그리고 산과 구름과 비와 강과 바위의 숨결과도 섞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숨결과도 섞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들이쉬고 내쉬는 바람에는 다른 존재들의 숨결이 들어와 있고, 나의 숨결은 다른 모든 존재들의 숨결에 갈마듭니다.
숨을 쉬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우리는 영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숨을 쉬는 이 몸을 한낱 물질덩어리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영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신성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숨을 쉬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숨을 쉬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요. 그것보다 더 영적인 것이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샤마니즘입니다.

서정록 / 고대 동북아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글쓴이는 저서로 『백제금동대향로-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학고재)가 있고, 역서로는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나무심는사람)가 있습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3년10월호

 

 

북미 원주민 이야기4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것

검은 호수 서정록

야스퍼스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유대교의 이사야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중국의 공자와 노자, 배화교의 졸아스트,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인류의 스승들이 출현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종교를 창시한 이 시기를 인류의 추축시대(樞軸時代)라 말한 바 있습니다. 인류의 사표가 될 큰 가르침들이 출현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불교, 기독교, 유고와 같은 큰 종교가 태동되었으니, 그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창시한 종교를 고등종교라 하여 다른 종교와 구별해서 부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오해가 있습니다. 만일 조로아스트나 이사야, 예수, 공자와 노자, 석가모니오 같은 인류의 스승들이 태어난 시대가 살기 좋은 때였다면,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은 새로운 종교를 일으켰을까를 생각해 볼 때, 분명히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태어난 시대가 화평한 시대였다면, 그들은 그저 범부로 살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기에, 도탄에 빠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견디고 연마한 끝에 인류를 구원할 가르침을 창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석가모니가 생로병사로 고뇌하는 주민들을 보면서 번뇌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했던 것이나, 예수가 로마의 지배 아래 도탄에 빠진 유대민족과 다른 민족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제후들이 득세하여 전횡하던 춘추시대였습니다. 조로아스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라시아의 초원시대에서 가축을 키우며 이동생활을 하던 아리안족이 중앙아시아로 남하할 무렵, 중동의 사치스런 물질문화를 접하면서 혼란에 빠져들자 조로아스트는 그들의 삶을 일깨우기 위해 배화교를 창시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대민족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을 때,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장차 새로운 구세주가 나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의 기성종교가 태동되던 시기를 살펴보면, 극도의 혼란기로 치닫던 시기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렸으며, 정치는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기성종교들은 당시, 이를 보다 못한 인류으 스승들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시한 종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인류가 상고(上古)의 황금시대에서 은의 시대, 청동시대(또는 영웅시대), 철의 시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더 나빠졌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은의 시대란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 여성들에 의해 농업이 시작된 시기와 일치합니다. 여성들이 달을 숭배했기 때문에 달빛을 따라 은의 시대라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시기는 그 이전의 수렵과 채집의 시대에서 초기 농경시대로 넘어온 시기를 말합니다.
청동시대는 쟁기가 발명되면서 남성들이 농업생산에 뛰어든 시기로, 대체로 남성들이 생산을 담당하기 시작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힘센 남성들이 청동무기를 들고 다른 부족과 민족을 지배하는, 이른바 '영웅'시대이기도 합니다. 은의 시대가 이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한 평화의 시대였다면, 청동시대는 지배와 피지배가 갈리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여성보다 남성의 권위가 커지고, 힘이 법이 되고 권력이 되는 그런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철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른바 '국가'가 태동합니다. 이 때쯤 되면 지배와 피지배는 물론 계급과 신분이 나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립니다. 사람들의 삶이 극도로 고단해지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요.
야스퍼스가 인류의 추축시대라고 지칭한 시대는, 신화적으로는 바로 이 철의 시대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철의 시대는 근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추축시대에 인류의 스승들이 창시한 기성종교들은 바로 이 철의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산업시대에 들어오면서 기성종교들이 흔들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금시대를 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바로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샤마니즙을 신봉하던 이들이 살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북미 인디언들이 살던 방식은, 그리고 세계의 많은 원주민들이 살던 방식은 아마도 생산수단으로 보면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수렵과 채집의 시대야말로 국가와 계급과 신분, 지배와 피지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축적과 착취 등의 폐해가 아직 없던 시대라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농경이 시작된 뒤의 유골의 건강상태보다 그 이전인 수렵과 채집 시대의 유골들의 건강상태가 더 낫다는 고고학계의 보고입니다. 농업이 시작되면서 생산수단이 안정적으로 확보되기 시작했으므로 더 건강해져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들어오기 전의 인디언들의 건강상태가 더 나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이야길를 뒤집으면, 수렵과 채집 시대의 사람들은 수고롭게 작물을 재배하고 쌓아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만큼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생산노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을 자기수련과 내면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 수렵과 채집 시대의 종교가 바로 샤마니즘입니다. 거기에 견주어 야스퍼스가 인류의 추축시대라 칭한 기원전 5세기 전후의 시기는 농업이 활성화된 이후로 잉여가 축적되면서 국가와 계급과 신분, 지배와 피지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착취와 축적의 폐해가 여실하게 드러난 시대입니다. 이런 이유로 석가모니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조로아스트는 '혼돈의 시대'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혼돈의 시대, 고통의 바다를 헤쳐 나가도록 조로아스트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위와 올바른 말의 가르침을 베풀었고, 석가모니는 죄업을 쌓지 말고 선행을 베풀 것을, 그리고 예수는 사랑과 믿음을,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에 대한 깨달음을, 공자는 예악(禮樂)과 인(仁)을, 노자는 무위(無爲)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모두 큰 가르침들이고, 그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위의 어떤 스승도 당시의 정치적 지배양식과 생산양식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모두가 우리의 잘못된 마음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추축시대 인류의 스승들은 당시의 사회제도나 생산양식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회악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추축시대의 스승들은 그것을 변혁하기보다는 그 사회악으로부터 발생한 응어리와 고통과 아픔과 엉킨 매듭을 슬기롭게 푸는 지혜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의 가르침에는 지금 보더라도 커다란 지혜가 담겨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의 제도와 신분, 계급이라는 것은 언제든 엄청난 사회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축적과 착취, 부자와 가난한 자의 나뉨은 열심히 일해도 먹을 것을 얻기 어려운 곤경으로 사람들을 내몰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삶이 고단할 수밖에요. 모든 것을 마음 하나로 풀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각박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견주어, 초기 샤마니즘의 시대에는 국가도, 계급과 신분도, 착취와 축적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필요할 때는 채집하고 수렵해서 양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들은 물질의 축적 대신 나눔의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물론 추축시대의 인류의 스승들도 나눔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동정과 보시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물질의 여유가 있을 때만 나누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에는 나눔이 곧 생활이었지요.
물질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긴 하나 지나치면 반드시 해가 되지요. 물질을 쌓아두고 축적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북미 인디언들은 개인의 욕망을 확대하고, 물질에 집착하고, 이기심을 키우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합니다. 그것은 나와 남을 나누고 다른 사람, 다른 존재들을 나의 형제요, 친척으로 보기보다는 물질을 얻기 위해 대상으로,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틈을 열기 때문이지요.

돌이켜볼 때, 농업의 잉여로부터 촉발된 이러한 신분과 계급, 축적과 착취의 잘못된 문화는 초기 샤마니즘에서 가르친 "몸과 물질에도 영적인 요소가 있다(spiritual body)"는 커다란 가르침을 경시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의 신성함으로부터 멀어지고, 남들로부터 멀어지고, 자아와 에고의 섬에 갇히는 격리되고 외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의 도시생활은, 그리고 상품의 익명성은 이러한 자아와 에고의 섬을 더욱 강고하게 부추기는 측면마저 있습니다. 실제로 자연의 생명과 물질들의 영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도구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잘못된 사고는, 우리의 몸과 생명마저 그 신성함이 부정되고 상품성의 잣대로 취급되리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미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고, 성을 상품화하는 데서 우리는 그 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소외(疎外)'라고 했지요. 그리고 인류의 추축시대의 스승들과 달리 생산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산이 착취와 축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혁명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몸과 자연의 물질에 영적인 요소가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정치적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가 제기했던 생산과 축적의 폐해를 나눔으로 풀어야 하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즉,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한다는 가르침-에 함축된 지극한 뜻마저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했을망정, 그가 제기한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이 문제를 아주 지혜롭게 풀었습니다. 자발적인 나눔과 자신을 낮추는 공경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평등함을 구현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말이지요. 제3세계의 원주민들 또한 이 문제를 큰 어려움 없이 풀어왔던 것을 볼 때, 우리는 북미 인디언들과 제3세계의 원주민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성종교에 견주어 샤마니즘을 저급한 원시적인 종교라 무시하지만,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히려 샤마니즘의 지평이 기성종교보다 훨씬 더 넓고 자유로웠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인간답고 신성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생태적 위기가 심각해지고, 지구생명의 위기가 가시화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마음의 문제로 푸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몸과 물질에, 자연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신성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자연이 한 몸임을, 동식물과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임을,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겠지요. 나아가 기존의 지배와 축적과 착취의 문화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더 늦기 전에 다음 세대를 위해서 공경과 나눔의 문화를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북미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억압과 멸시와 탄압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3년11월호.

 

 

 

민주화된 샤머니즘

-검은 호수 서정록

얼마 전, 박기복 감독의 《영매(靈媒)-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2002년 부산영화제에서 개봉된 것으로 무당의 세계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엮은 영화입니다. 강신무, 박미정 모녀의 한과 애환도 징했지만, 특히 진도의 무당인 채정례 할머니가 자신의 언니인 채둔굴 할머니가 죽은 뒤 씻김굿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영매란 영적인 중재자란 뜻이지요. 많은 이들이 샤마니즘하면 샤만-우리는 무당이라고 하지요-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샤만은 인간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중재하는 영매로 불려집니다. 옛날에 샤마니즘을 신봉했던 집안에서는 집안에 대소사가 있으면 으레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 풍습은 지금도 남아 있지요.
이런 영매가 하는 일은 다양합니다. 길흉을 점치는 것과, 부정을 쫓고 복을 들이는 것에서부터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에 보내는 일이며, 신들린 사람으로부터 삿된 영을 쫓아 치료해 주는 일, 그리고 천지간의 신령들과 만물을 기쁘게 하는 천지굿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거의 모든 것에 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영매로서의 샤만은 시베리아와 티베트, 호주,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 널리 퍼져 있으며, 샤마니즘 문화가 있는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적인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다분히 직업화되어 있고 특권화되어 있지요.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샤마니즘이라고 해도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에는 이런 구대륙의 현상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에스키모와 북서해안과 캘리포니아에 사는 일부 부족들처럼 영매로서의 샤만을 갖고 있는 경우들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샤만보다는 치료사인 주술사가 훨씬 더 보편적인 형태입니다.
게다가 북미 주술사들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술사들이 마을의 누군가를 치료하거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면 당사자는 음식이나 옷가지 등 성의껏 선물을 준비해서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가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고마움을 표시하는 선물의 개념인 것이지요. 인디언 자료에 보면, 더러 주술사들이 대가를 요구하거나 받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백인들이 들어온 후에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물질이나 대가를 요구하는 행위는 신이 주술사에게 부여한 신성한 임무를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은 대가를 받고 영적인 일을 하거나 치료행위를 하는 것은 마술사나 하는 짓으로 간주합니다.
인디언들은 마술사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한다고 말합니다. 나바호족에는 특별히 물질을 탐하는 마술사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 있는데, '인간늑대'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탐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경우에는 인간늑대 사냥에 나서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극단적인 것이긴 하지만, 북미 인디언들이 이기심과 물질에 대한 탐욕을 얼마나 경계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그럼 주술사들은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나오지요. 주술사들은 자기 먹을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해결합니다. 자기가 직접 수렵도 하고 채집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계를 해결해 가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디언 사회에서 주술사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그만큼 고단하고 힘이 드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누군가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한밤중일지라도 즉각 달려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모호크족의 추장이었던 톰 포터는 한 연설에서 추장이나 주술사 등 지도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추장이나 지도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며 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또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은 자신의 주민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늘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마을에 가시면 추장들이 사는 집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작고, 가장 볼품없는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인디언 마을에 가시거든 그 마을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집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반드시 그 집에 그 마을의 지도자가 살고 있을 겁니다.

물론 자기 자신보다는 늘 이웃과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생활을 하는 만큼, 그들은 주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주저 없이 추장이나 주술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또 인디언 청소년들 역시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서 추장이나 주술사가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술사만이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면 영적인 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명탐구(vision quest)에 나서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신명탐구라는 것은 위대한 신령이나 동식물, 또는 다른 존재들로부터 영적인 가르침을 얻기 위해 들판이나 산으로 가서 단식하며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성들은 달거리를 하는 동안 마을에서 떨어진 그녀들만의 위그앰(blood lodge)에 가서 지내는데, 이 때 단식하고 기도하며 필요한 영적인 가르침을 얻습니다.

따라서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는 구대륙과 달리 누구나 영적 세계와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주술사는 일반인들보다 영적으로 큰 능력을 갖고 있거나 많은 신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 내에서 발생한 간단한 질병이나 영적인 문제는 우선, 할머니나 집안의 어른들 손에서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치료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그때 비로소 뛰어난 영적 능력을 갖고 있는 주술사를 모셔다 치료를 받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북미 인디언 사회에는 구대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특권적 의미의 영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북미 인디언 사회의 샤마니즘을 '민주화된 샤마니즘'이라고 말합니다. 구대륙의 샤마니즘이 샤만을 중심으로 독점적, 지배적 성격이 강하다면 북미 인디언 사회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북미 인디언의 이와 같은 민주화된 샤마니즘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서 거주하는 고아시아족인 축치족과 코리악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구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직업화된 샤만이 없습니다. 가족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가족 중에서 제일 연장자나 또는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다른 사람이 의례와 굿을 진행하지요. 학자들은 이들의 이와 같은 가족적 샤마니즘으로부터 아시아나 다른 지역의 전문화된 또는 직업화된 샤마니즘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따라서 아시아나 다른 지역의 샤마니즘도 고대에는 축치족이나 코리악족에서 볼 수 있는 가족적 샤마니즘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것이 전문화된 또는 직업화된 샤마니즘으로 변화된 것이지요.
그런데 축치족이나 코리악족의 샤마니즘에는 샤만이 복화술(複話術)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독특한 의례가 있습니다.이러한 의식은 이른바 '흔들리는 천막(Shaking Tent)'이라는 이름으로, 에스키모는 물론 북아메리카의 오지브웨족과 대평원의 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의례가 유독 북아메리카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북아메리카의 민주화된 샤마니즘 또한 축치족이나 코리악족의 가족적 샤마니즘으로부터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북아메리카의 가족 형태를 보면 축치족이나 코리악족의 전통적인 가족이 보다 확장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축치족이나 코리악족의 가족이 우리와 같은 대가족 개념에 다시 그들과 함께 부락을 이루는 사람 모두를 포괄하는 '확장된 가족(extended family)' 개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북아메리카의 주술사들은 대부분 이런 확장된 가족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대륙의 전문화된 또는 직업화된 샤마니즘은 농업혁명 이후 시작된 잉여의 축적과 욕망의 확대, 신분과 계급, 국가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북아메리카의 확장된 가족에 기초한 민주화된 샤마니즘은 수렵과 채집 시대의 잉여와 축적과 계급이 없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샤마니즘이 다른 지역의 샤마니즘에 견주어 보다 근원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신분과 계급이 사라진 민주화시대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샤만의 지위도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도처에서 관련된 모임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샤만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큰 능력을 가진 무담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을 개인의 이기심이나 탐욕을 위해 사용하는 이들은 점차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다고는 하나 오늘날은 물질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볼 때 과거의 특권화된 샤마니즘이 지배했던 토양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길과 영적인 길은 다르지요. 물질의 길이 축적과 지배의 길이라면, 영적인 길은 모두가 하나 되는 길입니다. 또 물질의 길이 인간 중심의 길이라면, 영적인 길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평등해지는 길입니다. 또 전자가 불균형과 부조화의 길이라면, 후자는 균형과 조화의 길입니다.
그래서 멕시코의 영적인 교사인 리앤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영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의 길이다. 만일 네가 물질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지금 하던 대로 계속하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라.
만일 네가 영적인 길을 가려고 한다면, 그 때는 너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창조주를 위해서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만일 네가 칭찬과 명성을 추구한다면 너는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네가 칭찬을 듣기 원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너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위해 일한다면, 칭찬과 비난을 모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칭찬도 비난도 원치 않는다면, 그리고 정확히 창조주를 위해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참다운 삶을 위해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때는 칭찬도 비난도 마음 쓸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너를 덫에 걸려 넘어지게 할 뿐이다.

우리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민주화된 샤마니즘과 물질의 길을 먼저 멀리하고 영적인 길을 가는 그들의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위의 글에서 리앤디스는 영적인 길을 다시 둘로 나누고 있는데, 영적인 길을 가되 "너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개인의 욕망과 힘의 확대를 위해서 영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 반해 "창조주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디언들은 이 길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고, 평등해지고, 서로 하나 되는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이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길이 아닐까 합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3년12월호

 

 

 

영성에 대해 - 서정록  

 

지금은 영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성이란 말이 널리, 그리고 흔하게 쓰입니다. 또 수많은 영성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구의 생태적 위기가 가시화되고 전통시대의 공동체문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영성의 본질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영성이라고 하면서도 막상 쓰는 사람마다 그 의미와 뜻이 다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 또는 신적인 것과 관련된 것을 영성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사회적 영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나 전자의 경우는 신 중심으로 봄으로써 자칫 일상적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 속에 들어 있는 영성적 의미를 망각하기 쉽고, 후자의 경우는 자칫 모든 것을 관계의 문제로 풂으로써 '신성함'의 문제를 소홀히 다룰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생태적 균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생태적 균형과 조화가 영성 문제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자칫 생태적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영성이란 말은 영어로 spirituality입니다. spirit(영)을 의미하는 말의 추상화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이란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영이란 우선 몸(body)과 물질(matter)에 대립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물질이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면, 영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에 대해서 시베리아나 호주,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등지의 샤마니즘을 관찰해 보면 고대인들은 숨결(breath)이나 피를 언급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혼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없던 고대인들에게 생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피나 숨결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살아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 여겨졌던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의 창조 신화들을 보면 하나같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 인간과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숨결은 바람입니다. 바람은 우리가 호흡을 할 대 우리 몸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합니다. 그와 함께 다른 존재의 몸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서로의 숨을 섞습니다. 피도 마찬가지지요. 피는 물입니다. 물은 신진대사를 통해 우리 몸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면서 우리를 살아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들락날락거리는 물은 다른 존재들의 몸을 들락거리는 물과 섞입니다.
따라서 숨결이나 피 몯 관계성, 순환성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대상들 너머에 있는 것이면서 이들 대상들을 살아 있게 하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 관계짓는 것을 영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인가요? 관계란 개별적인 존재와 대상들을 연결짓고 서로 의존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함축이 많은 말이지요.
예를 들어 보지요. 인디언들의 영성과 관련된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말로 '위대한 신령'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서구의 신(god)에 해당하는 말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이해하는 위대한 신령은 그런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바람이나 물의 활동을 이해하면 이해하기가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드나들며 모든 존재들의 숨결을 서로 섞습니다. 그렇게 모든 존재들을 연결짓지요. 물 또한 모든 존재들을 넘나들며 서로의 물을 섞습니다. 어디 숨겨과 물뿐인가요. 우리의 행위 또한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은 또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나의 행위는 나를 둘러싼 관계의 관계망을 돌아 결국 내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지요. 나의 생각은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관계의 관계망을 돌아 다시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된 모든 존재들의 관계와 그 의미의 총합이 바로 위대한 신령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신령은 서양이나 아시아의 신처럼 인격적인 그런 신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존재의 진상이면서 각각의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인디라망과 같은 궁극적인 그 무엇인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영(혼)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모두 영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때 영은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의 주재자를 의미합니다.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을 그들은 영이라 했던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족적인 존재라면, 굳이 다른 존재가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나 이외의 다른 존재들이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이중 삼중으로 결함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재자로서의 나의 영을 말하려면, 나를 둘러싼 관계망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내가 할 일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다못해 음식을 먹고 마시려고 해도 다른 존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존재의 희생 없이는 말이지요.
따라서 주재자로서으 영은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이 세상의 관계망의 작은 매듭으로서만이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이되 내가 아닌 것이 나의 주재자의 실상이며, 그것을 아는 것이 소위 깨달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소중하면 다른 존재들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소중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모두 다 위대한 신령의 한 부분이요, 관계의 그물망의 한 축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동식물을 취해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생명만을 먹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딱한 모습입니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선생은 이것을 가리켜 "생명으로 생명을 먹인다(以天食天)"했습니다. 『예언자』의 작가인 칼릴 지브란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풉니다.

네가 대지의 향기를 맡으며 살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햇빛을 받고 살아가기를 빈다.
그러나 너는 먹기 위해 생명을 죽여야만 하고, 너의 갈증을 축이기 위해 새로 태어난 생명을 위해 생산해 낸 우유를 빼앗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의 식사가 숭배의 행위가 되게 하라. 그리고 숲과 평원의 순수하고 무구한 존재들이 희생되는 식탁을 너의 제단이 되게 하라. 그들이 사람 안에서 더 순수하고 무구해질 수 있도록...

동물을 죽일 때 그에게 가슴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라-
너를 죽인 똑같은 힘에 의해서 나 역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먹힐 것이다. 너를 나의 손에 가져오게 한 자연의 법칙은 나를 보다 더 강력한 손에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피와 나의 피는 그렇게 사라지지만 우리의 수액은 하늘의 나무의 목을 적실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깨물 때 사과에게 가슴으로 말하라-
너의 씨앗들은 내 몸에서 자랄 것이다. 어느 날 네 꽃봉오리가 내 가슴에서 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향기는 나의 숨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사계절 내내 기뻐할 것이다.

그의 말은 우리가 살아 있는 생명을 취하는 행위가 숭고한 기도의 행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디 먹는 것뿐입니까? 우리가 입는 것, 또 우리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곡식을 기르기 위해 땅을 파는 문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디언들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불필요한 살생을 금하라고 말이지요. 그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르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먹는 것도 기도이고, 일하는 것도 기도이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내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사의 길을 가는 것도 기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기도입니다. 가족이 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카신에 예쁜 꽃이나 기하학 문양을 그리는 것도 기도입니다.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기도입니다. 시냇가에 물을 뜨러 가는 것도 기도입니다.
이처럼 북미 인디언들은 그들의 일상적 행위가 살생이 되지 않도록, 폭력이 되지 않도록, 저주가 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나와 다른 존재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언제까지나 그 평화가 계속되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균형과 조화가 유지되도록 위대한 신령께 기도합니다. 그들은 24시간 내내 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이러한 지극한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살생과 폭력의 행위를 신성하게 만들어 주는 의례가 없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비규환의 지옥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 기자인 스티브 윌이 이로쿼이 연합의 의장이었던 레온 세난도어 추장에게 인디언들은 왜 그렇게 의례를 많이 하느냐고 물었을 때, 만일 인디언들이 그러한 의례를 행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영성이란 관계의 그물망인 동시에 그와 같은 기도를 가능하게 해주는 그 어떤 신성한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만을 말하고 일상의 행위를 소홀히 하는 종교는 형식과 권위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반대로 사회적 영성만을 말하는 것은 자칫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살생과 폭력으로 점철되도록 방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우리가 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동시에 그 관계망 속에서의 우리의 행위가 의미를 갖도록,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 주는 근원적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 문제의 일차적 과제는 잃어버린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동식물과의 관계, 해와 달·별과의 관계, 공기와의 관계, 바람과의 관계, 산과 강과의 관계 등등 이 세상의 모든 관계성을 말이지요. 그러나 그 관계성은 반드시 평등한 것이어야 합니다. 차별지어지고 계급화된 관계성은 이미 영성을 왜곡하고 차등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 내지 특정집단 중심의 관계망을 다른 존재들에게 강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등 없이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와 안식이 없는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는 영적인 힘을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이기심과 탐욕을 위해 사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영성의 길에는 언제나 평화와 평등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있습니다. 침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를 낮추고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공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위대한 신령에게 말하거나 기도할 때, 또는 그와 대화할 때, 위대한 신령은 단순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닙니다. 내게 복을 주기를 기원하는 대상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한 마음으로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그 앞에 자신을 낮추고 서 있는 한없이 신성한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디언 영적 교사들은 말합니다. 그 때 비로소 위대한 신령은 그대 안에 있고, 그대는 위대한 신령 안에 있다고... 그대가 바로 신이라고...

*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1월호.

 

 

 

숲의 사람들 - 서정록  

검은 호수 서정록

숲은 뿌리를 땅에 박고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사람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동시에 살아 있는 뭇 생명들의 쉼터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나무를 '서 있는 사람' 또는 '키 큰 사람'으로 부르지요. 굳이 인디언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류의 등불이 된 큰 스승들이 큰 나무 밑에서 지혜를 길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시인 시드니 레이니어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는 혀가 없는 나무를 위해서 말한다
봄이 가고 다시 봄이 올 때마다 나무는 더욱더 고귀해진다
그리고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하는 굳센 팔들을 쭉 펼치고는
커다란 축복의 가지들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나무는 서 있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이 시구는 많은 여운을 줍니다. 그런 나무들이 모인 숲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영적인 개안을 하게 해 주고, 때로는 용기와 위로를 주고, 때로는 친구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숲과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들과 콘크리트 도시에서 자란 사람 간에는 정서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인도의 수행자들이 나이가 들면 숲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됩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존재는 공기나 물과 마찬가지로 숲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위 문명이 싹튼 곳들을 보면 예외없이 이 숲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수메르와 그 뒤의 바빌론 문명이 발생한 중동 지역이 과거에 나무들이 있는 초원 지역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적어도 구약 시대만 해도-대략 기원전 2천 년에서 1천 년경만 해도-틀림없이 숲과 초원이 같이 있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그것이 과도한 양과 염소 유목으로 인해 지금처럼 황무지로 변했습니다.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한 미케네 지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였던 곳이지만,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 온통 숲의 신과 정령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곳이었지만, 오늘날은 민둥산만이 남아 있는 그런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넘쳐나는 현대 문명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숲과 우리의 삶은 과연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전그렇지 않은 증거를 북미 인디언들에게서 봅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동부와 서부의 광대한 산림을 배경으로 인류사에 다시없는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입니다. 수우족, 샤이엔족 등이 동부의 백인들에게 밀려 대평원에서 버펄로 사냥을 하는 유목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18세기 말엽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 역시 다른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광활한 산림을 무대로 수천 년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 인디언 하면 몽골리안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당연히 아시아에서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간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이야기라 할 수 있지요. 무슨 이야기나 하면, 혈통상 또는 유전적으로는 그렇게 아시아에서 건너갔을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아메리카에서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문명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문명을 꽃피운 곳은 고대의 마야 지역입니다. 지금의 멕시코 남부에서 유카탄 반도에 이르는 지역이지요. 이들 지역에서는 기원 전후부터 본격적인 문명이 발생하고, 그 꽃은 북미와 남미 대륙으로 퍼져나가 아메리카에 찬란한 인디언 문화를 이룩하게 됩니다.
얼마 전, 인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굳이 아시아에서 건너갔네, 안 갔네 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문화적으로 어떻게, 또 어떤 꽃을 피웠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아메리카의 인디언 문화는 분명히 구대륙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백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왜곡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런데 같은 아메리카라고 해도 중남미 지역과 북미 지역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중남미에서는 일찍부터 잉여와 축적, 계급과 신분 구조, 국가의 지배 구조 등이 나타나면서 중동이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숲을 파괴했습니다. 소위 마야제국, 아즈텍제국, 잉카제국 등이 바로 그러한 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 견주어 북미 인디언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물론 그들의 문화에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고,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미 인디언 문화와 중미 지역의 인디언 문화에는 유사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은 중남미 인디언과 달리 잉여를 축적으로 만드리 않았고, 신분과 계급, 국가와 같은 것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숲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즉 자연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발전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들이 처음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끝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거대한 숲, 그것도 키가 백 미터 가까이 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들을 보고는 그 웅장함에 경탄을 연발했다고 합니다. 사실 북미 인디언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높은 수준의 영적 삶을 살았던 데에는 바로 그와 같은 울창한 숲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울창한 숲 가장자리에 살다 보면 큰 마을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자연히 작은 친족공동체 단위로 숲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마을이 형성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살던 그 숲의 마을을 생각해 보십시오. 뒷산에 가도 앞산에 가도, 몇 사람이 팔을 잡고 둘러싸야 겨우 품에 안을 수 있는 그런 큰 나무들이 빽빽했을 것입니다. 아니, 마을 자체가 그런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겠지요. 요즈음 우리 주변의 산들은 거의가 팔뚝 굵기보다도 작은 나무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북미 대륙에는 수백 년씩 묵은 큰 나무들이 즐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 나무들을 당산나무, 또는 신목(神木)이라 해서 숭배하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큰 나무들은 인간보다도 오래 살아 대지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요. 그 앞에 서면 아무리 감성이 무딘 사람이라도 경건해지게 마련이니, 신령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북미 대륙의 광활한 산림에 미쳐 일생을 산 존 뮤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인들에 의한 서부개척 시대가 끝났을 때 곳곳에 남아 있던 몇몇 울창한 산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의 개념을 창안해 이를 실현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일대의 울찬한 산림들을 순례하며 많은 글과 그림들을 남겼는데,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나무들이 하나같이 엄청나게 굵고 키가 백미터 이상 되는 신령스러운 나무들입니다. 그런 나무들이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숲, 그것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과 맞닿은 숲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숲에서 나무들과 숨결을 나누며 쓴 글들은 주옥처럼 아름답게 빛납니다.
동부 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인들이 이주 초기에 남긴 글과 그림들을 보면 숲이 얼마나 울창하던지, 신비스러울 정도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살았던 숲은 바로 그런 경이와 아름다움과 꿈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숲이 울창하면 계곡에 물고기도 많은 법. 그들은 그런 나무-사람들이 모인 숲 가장자리나 물이 있는 골짜기에 살면서 수렵과 어렵, 그리고 채집 생활을 하며 '풍요로우면서도 소박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워낙 숲이 울창하다 보니 야생 과실과도 많았었나 봅니다. 특히 야생 딸기 등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철따라 산에서 나는 이런 과실들과 인디언 상추로 알려진 왕고들빼기 등의 야채를 거두어다 먹었습니다. 모든 게 자연 그대로의 것이었지요. 비료 치고 농약 쳐서 재배한 요즈음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발도르프 학교의 설립자로 유명한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어떤 사람이 "요즈음은 왜 과거의 위대한 스승과 같은 분들이 잘 안 나옵니까?" 하고 묻자, 슈타이너가 먹는 것이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을 겁니다. 요즈음처럼 화학비료로 키운 작물과 자연에서 제 스스로의 힘으로 우주의 기운을 받아 성장한 작물은 그 영적인 힘이나 기운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인디언들이 그처럼 높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던 데는 이처럼 산림을 잘 보존하고, 자연에서 나는 튼실한 것들을 취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늘 감사하면서 말이지요.
게다가 그들은 아시아처럼 통나무집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땔감 또한 반드시 죽은 나무만을 모아다 썼습니다. 그러므로 숲이 파괴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땔감을 담당한 것이 여성이었다는 점과 그들에게 나무를 찍어 넘어뜨릴 도끼가 없었다는 것이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그래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숲과 강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들은 인류사에서 찬란히 빛나는 '나눔의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나눔의 문화야말로 어려운 시절에 굶주림과 기아를 피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사냥에 실패해도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같이 먹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캘리포니아의 해안 지대에 사는 오론네족의 경우, 사냥해 오면 4분의 1가량만 가기가 취하고, 나머지는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극한 나눔의 실천은 북미 인디언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들은 나 개인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본이 되고, 서로를 챙겨주는 가족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인디언들은 혈연가족뿐 아니라 같이 마을을 이루며 사는 이들을 모두 가족으로 여겼습닏. 이른바 '확장딘 가족'이지요. 이런 확장된 가족은 사회경제적인 공동체이기도 하면서 영적인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확장된 공동체의 배경에는 울창한 숲과 자연이 있고, 동식물이 있습니다. 산과 강이 있고,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있고, 냇물이 있고, 해와 달과 별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큰 나무를 '서 있는 사람', '키 큰 사람'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숲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그저 불쏘시개나 건축물의 재료로만 생각하는 그런 문화에서는 그런 감성이 나올 수 없지요.
숲은 결코 문명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는 길을 낸다며 산들을 깎고 동강내도 허리를 뚝뚝 잘라 버립니다. 그리고 함부로 나무를 잘라내고 파헤칩니다. 심지어 지구의 허파라는 열대 우림마저 무차별로 베어 냅니다. 인디언 식으로 말하면 숲은 어머니 대지의 피부이지요. 인디언의 어법이 아니더라도 산이나 구릉은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산신령을 말하고, 산에 들어갈 때나 무덤을 쓸 때 먼저 산신께 제를 지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산과 숲을 함부로 파헤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파헤쳐진 산을 지날 때면 산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파서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동물들이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그 비명이 귓전을 때립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대지 위에 팔을 벌리고 서면 우리 또한 나무라고...., 그렇게 움직이는 나무일 뿐이라고..., 나무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만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서 있을 뿐이라고..., 우리는 나무로부터 대지에 부리를 박고 서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나무의 생명이 곧 사람의 생명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나무의 그늘을 떠나 멀리 방황한다면,
나무의 과실의 자양분을 찾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또는 사람들이 나무에 등을 돌리거나 그들을 파괴하려고 한다면,
큰 슬픔과 재앙이 내릴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힘을 잃을 것이다.
꿈을 꾸고 신명 보기를 그칠 것이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말다툼을 벌일 것이다.
진실을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서로 정직하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는 법마저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서서히 독으로 채울 것이며,
그들이 손대는 것마다 독으로 변할 것이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이장』, 2004년1월호.

 

 

 

인디언 걸음걸이의 비밀- 서정록  

숲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걸었을까요? 나무들이 울창한 야생의 자연에서 생활했던 그들이니만큼, 아무래도 요즈음 아스팔트 위를 걷는 우리와는 걸음걸이가 달랐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인디언들의 Foz-walk를 사람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여우걸음이 되는데, 여우가 걷는 방식으로 들판이나 산길을 걷는 것입니다. 무게 중심을 뒷발에 두고 앞발을 발바닥 앞쪽과 바깥쪽이 먼저 땅에 닿게 해서 완전히 땅에 착지했을 때, 무게 중심을 앞발로 옮기고 뒷발을 앞으로 내서 똑같은 방식으로 걷는 걸음걸이였습니다.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눈의 시야를 넓게 열고서 천천히 한발 한발 옮기다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새벽에 해맞이 하러 뒷산에 갈 때와 내려올 때면 늘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도 신선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좋아서 맨발로 걷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여우걸음을 걸으며 인디언들의 걸음걸이를 공부했지만, 정작 인디언 걸음걸이의 깊은 의미를 안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인디언들의 일상적인 걸음걸이는 무릎을 살짝 구부린 다음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시야를 넓게 멀리 두고 걷는 것이지요.
그런데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러한 걸음 속에 바로 인디언 걸음걸이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무릎을 살짝 구부린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왜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걸었을까요? 단순히 동물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서일까요?
현대인들은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와 같이 평탄한 길을 걷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발 밑을 쳐다볼 필요도 없습니다. 돌부리에 걸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대인들의 허리가 비정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척추가 역S자로 완곡히 돼야 하는데, 무릎을 쭉 펴고 걷다 보니 꼿꼿하게 선다는 것입니다. 척추가 긴장하다 보니, 자연히 의식이 깨이게 됩니다. 그리고 배의 근육(복근)도 당겨지게 되지요. 때문에 오랫동안 서 있으면 몸이 경직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해집니다.
그런데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걷는 인디언들의 걸음은 이와 달리,허리가 편안해지고 몸이 이완되며 정서적으로도 안정됩니다. 복근도 당기지 않고요. 현대인들의 걸음걸이와 인디언들의 걸음걸이의 차이점이라고 해 봐야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것 정도인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요? 인디언들의 걸음걸이에는 분명히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인류학자 펠리타스 굿맨에 의하면,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걷는 인디언들의 걸음법은 인디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수렵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모두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석기시대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인물들이나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그려진 인물들, 그리고 고대 중국의 화상석에 그려진 동양의 무사들의 자세를 보면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냥꾼이나 제3세계의 원주민들의 수렵인들 역시, 자세히 보면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펠리타스 굿맨은 무릎을 살짝 구부린 자세가 고대 수렵시대의 보편적인 자세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자세는 심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원주민들이 신성한 의례나 치료할 때의 자세를 보면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자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펠리타스 굿맨은 고대인들의 이런 자세를 영적으로 "무아경에 빠지는 자세(trance posture)'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현대인들도 직접 그런 자세를 취해 보면 누구나 곧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중국 기공의 전문가이며 인디언 문화에 정통한 케네스 코헨은 고대인들의 자세와 현대인들의 자세의 차이를 느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볼 것을 권합니다.
먼저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허리를 편 뒤, 한쪽 손을 등으로 가져가 손가락을 척추 끝에 갖다 댑니다. 이 때, 발은 어깨 넓이로 자연스럽게 벌립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척추 끝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껴 봅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렇게 무게 중심이 한 쪽 발에서 다른 발로 옮겨질 때마다 척추 끝이 그에 상응하여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무릎을 쭉 펴고 서서 마찬가지로 한 쪽 손을 등으로 가져가 손가락을 척추 끝에 갖다 댄 다음, 천천히 걸어봅니다. 놀랍게도 아까와 달리 척추 끝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척추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릎을 쭉 펴고 걷는 현대인들의 걸음걸이에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인디언처럼 무릎을 구부리고 걷다가 무릎을 쭉 펴고 걸어보십시오. 척추 끝의 변화말고도 무언가 또 다른 변화가 느껴질 것입니다. 갑자기 호흡이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릎을 쭉 펴는 순간, 왜 호흡이 불편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릎을 쭉 펴는 순간, 복근이 당겨지면서 횡경막이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횡경막이 올라가니 자연히 폐활량이 줄어들게 되고, 호흡이 불편해지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다시 무릎을 살짝 굽혀 보십시오. 다시 호흡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올라갔던 횡경막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폐활량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호흡의 중심이 복부의 단전으로 내려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울러 심신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이리저리 걸어 보십시오.
이때, 결코 숨을 깊이 들이쉬려고 애쓰거나 내뱉으려고 힘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숨이 들고 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호흡법은 복부 단전에 제 스스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깊은 복식호흡은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까지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 주지요.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면 호흡횟수는 서서히 떨어집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 성인들의 호흡횟수가 1분에 평균 17회인데, 이렇게 무릎을 구부리고 걷는 연습을 계속하면 호흡횟수가 1분에 5회 정도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세로 걸으면 자연스럽게 우리들 내면에 있는 치료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심신이 편안해지면서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런 변화는 특히 손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손바닥이 홍조를 띤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손가락 끝에 탄력이 붙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생리적으로 몸이 이완되고 모세혈관이 열리면서, 전체적으로 혈액순환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손에 점점 생명의 에너지가 충만해지면서 강한 전기가 흐르는 전선처럼 에너지장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영적인 치료사들의 손이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하지요. 이러한 손은 마치 수맥을 찾는 막대기와 같아서 보이지 않는 에너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아파치족의 주술사인 로젠은 걷다가 손바닥이 붉은 홍조를 띠고 손가락에 탄력이 붙은 것이 느껴질 때, 그 자리에 멈춰 선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눈 앞에 뭔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동물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을 해치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 자세를 유지하고 걷다 보면 그처럼 주변의 환경 변화에 민감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예기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알아채게 된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은 이것을 '예지(awaredness)'의 능력이라고 하지요.
고대의 사냥꾼들은 주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결코 긴장해서는 안 되지요.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그리고 언제든지 몸을 날릴 수 있는 유연한 상태에서 동물을 추적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릎을 살짝 굽힌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스포츠 선수들 또한 경기 중에는 언제나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지요. 그래야 몸이 유연해지고 상황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과 고대인들의 자세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케네스 코헨은 이런 고대인의 자세를 세 가지 형태로 나눕니다.
첫번째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허리를 세운 뒤 고개를 들고 시야를 넓게 보고 걷는 것입니다. 이때, 양 손은 아래로 내려서 대지의 생명의 기운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손바닥의 색깔이 붉은 홍조를 띠게 되고 손가락에 탄력이 붙습니다.
두번째는 이른바 '곰의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첫번째의 자세에서 양 손을 복부의 단전에 가볍게 갖다 대고 걷는 것입니다. 이 자세는 복부의 단전호흡을 자극하고, 정신적 평오능ㄹ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자세를 해 보면, 아래 복부가 달아오르면서 차츰 온몸이 덥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곰은 인디언은 물론 원주민들 사회에서도 대표적인 치료동물(healing animal)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신명탐구 때, 곰신령으로부터 치료에 대한 가르침을 얻는 것은 유명합니다. 또 인디언들이 향초(香草)로 사용하는 쑥은 라틴어로 Artemisia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근 'art-' 또한 곰을 의미합니다. 그러고 보면, 단군신화에서 곰이 동굴 속에 들어가 삼칠일 동안 쑥을 먹고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는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인디언들이 신성한 의례 때 피우는 쑥의 향기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침전되어 있는 과거의 영적인 기억들을 깨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번째는 샤만의 자세입니다. 역시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한 손은 머리 위로 올리고 다른 한 손은 대지를 향해 아래로 내리고 걷는 것입니다. 샤만이나 주술가가 의례를 행하거나 치료를 할 때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세는 위대한 신령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는 동시에, 위의 하늘과 아래의 대지의 기운과 소통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의례와 치료를 위한 자세라고 해야겠지요.

인디언이나 고대인들처럼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걷게 되면, 언제나 발바닥 앞쪽이 먼저 땅에 닿게 됩니다. 발꿈치가 먼저 땅을 디디는 일은 거의 없지요.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선생이 낮잠을 주무시고 계실 때였습니다. 어떤 아이가 옆으로 쿵쿵거리며 뛰어가자, 잠에서 깨어나신 해월 선생이 어머니 대지가 깜짝 놀라셨다는 말씀을 하시며 가슴을 쓸어내리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발뒤꿈치로 쿵쿵거리며 걷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지요.
인디언들은 대지에 씨앗을 심듯, 발을 대지에 심으며 걸으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지에서 다음 세대가 자라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릎을 살짝 구부린 균형 잡힌 자세로 걸으면, 스프링처럼 대지가 밀어올려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몸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때, 발이 나무처럼 땅 속에 박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머리는 하늘에 두고 발은 대지에 심는 것이라고...
발을 대지에 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맨발로 걷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옛날의 인디언들이 사슴가죽으로 밑창을 댄 얇은 모카신을 신은 데는 깊은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카신은 맨발로 걷는 거나 다름이 없으면서도 대지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풀이나 벌레를 밟아도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디언들은 달리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달리기 실력은 오늘날의 마라톤 선수들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지요. 만화영화 '포카혼타스'에서도 포카혼타스를 호위하는 전사 우타마토마킨은 차를 타지 않고 언제나 달립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지요. 19세기 중엽, 라코타족의 대추장이었던 외뿔 또한 달리기 선수로 유명합니다. 그리스 조각보다도 얼굴의 윤곽이 더 뚜렷한 그는 달리기에 관한 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요.
나바호족의 사냥꾼 검은말은 말합니다. "사냥꾼은 발걸음이 매우 가볍다. 그래서 그는 빨리 달릴 수 있다. 우리는 걸을 때나 앉을 때,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무릎을 살짝 구부린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면 사냥꾼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
인디언 전사들은 마치 관목 위를 밟고 달리듯이 가볍게, 그리고 먼 거리를 지치는 법 없이 달렸다고 합니다. 그 달리기의 비밀은 바로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걷는 걸음법에 있었던 것입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3월호.

 

 

 

여성적 가치가 중심을 이루는 사회- 서정록  

인디언 사회는 전통적으로 여성 중심의 사회입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전사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전사의 이미지는 19세기에 백인들이 서부로 진출하면서 인디언들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인디언들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민족으로 왜곡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디언 사회는 가정과 살림은 여성과 어르신들 중심으로, 그리고 사냥과 전투는 남자들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자들은 가사에 간섭하는 일이 없습니다. 티피(Tepee, 모피로 만든 북미 인디언의 원뿔형 천막) 안의 모든 일은 여성들이 결정합니다. 물론 중요한 일은 남편과 상의하지만, 최종 결정은 여성들이 내립니다.
그래서 인디언 여성들은 물 긷고, 살림하고, 옷 짓고, 빨래하고, 땔감 하는 것은 물론, 곡물을 기르고 채집하는 것, 남자들이 사냥해 온 동물의 고기를 말리는 것,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 살림에 필요한 바구니 등 도구를 만들고, 모카신을 만들고, 옷이나 장신구에 수를 놓는 것, 그리고 계절에 따라 티피를 옮기는 것 등 일이 아주 많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7,8세에 이를 때까지 교육도 책임집니다.
이런 이유로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들이 혹사 당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디언 여성들의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과거의 다른 전통사회에 비추어 특별히 인디언 여성들의 일이 많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일일이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연히 여성의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전통시대 인디언 여성들의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남성들은 여성을 매우 공경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인디언 남성을 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성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지요.

다코타족 출신의 작가인 엘라 델로리아는 19세기 다코타족 여성들의 삶을 소재로 「수련」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엘라 델로리아는 『신의 피부는 붉다(God is Red)』 등의 책을 쓴 유명한 인디언 학자 벨라 델로리아의 이모 되는 사람으로, 20세기 전반에 프란즈 보아즈, 루스 베네딕트 등 당대의 대표적인 인류학자들과 함께 대평원의 인디언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백인들이 인디언 사회를 남성 중심의 전사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을 보고 인디언 여성들의 삶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은 다코타족의 두 여성, 즉 '파랑새'와 그녀의 딸 '수련'의 성장과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인디언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등을 자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파랑새의 남편은 의처증이 있는 성실하지 못한 남자였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만나는 것은 아닌지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마을의 축제가 있던 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물을 긷거나 땔감을 해 올 여성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아내를 데려가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 파랑새는 정숙한 여자였을 뿐 아니라, 갓 태어난 딸을 돌보느라 축제에도 못 나올 만큼 가정에 헌신적인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남자들이 아내를 공개적으로 버리는 일-곧, 이혼-은 드물긴 하지만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남자의 말을 모든 사람이 신뢰할 때, 그리고 그의 아내가 부도덕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인정할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파랑새의 남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또 그의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황해서 슬슬 그 자리를 빠져 나갔고, 마을 축제가 벌어지는 마당에는 그 혼자만 남았습니다. 인디언 사회는 명예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회입니다. 결국 마을 사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휩싸여 스스로 마을을 떠나고 맙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와 헤어지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내와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그래, 정말 네 아내와는 같이 살 수 없겠다"고 인정하면 아내는 그 마을을 떠나 본가로 들어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위의 경우처럼 오히려 그가 마을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자들이 여성을 버리는 일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성들이 남편과 헤어지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남편의 옷가지와 사냥도구들을 챙겨 티피 밖에 내놓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입니다. 그런 경우 남자는 티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개 그 길로 마을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확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것 역시 철저하게 여성들의 몫입니다. 여성들이 원치 않는 결혼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여성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들이 존중 받는다면, 일은 왜 그렇게 많은 걸까? 남성들이 그 부담을 좀 줄여 줄 수는 없을까?"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인디언 여성들은 전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대의 인디언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치프와족의 레니 세노글리는 말합니다.

원주민 여성과 백인 여성운동가의 차이는 백인 여성운동가들이 그들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는 반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만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의 책임은 이 세계에서 가족과 이웃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돌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디언 여성들의 시각은 현대 여성운동가들의 시각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한 존재입니다. 내부에 '생명의 불꽃'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존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에 대한 지혜를 갖고 태어나지요. 여성이 없으면 '생명의 원'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여성을 신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에 반해서 남자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내부에 '생명의 불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밖에서' 자신의 영혼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지혜를 가져와야 합니다. 인디언 남자들이 신명탐구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벌판이나 산에 홀로 가서 구덩이를 파고 앉아(또는 서서) 그들은 위대한 신령께 기도합니다. "저는 누구입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왜 이곳에 보내졌습니까? 제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게 주어진 임무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묻고는 그 답을 기다립니다. 만일 위대한 신령으로부터 답을 받지 못하면, 그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로 남게 됩니다. 때문에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신명탐구를 해서 신의 가르침을 구합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남자들이 사냥과 전사의 일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헌신하는 것이 바로 영적 수련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가 무엇인가를 알 때 그의 삶은 완성될 수 있고, 비로소 한 남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디언 여성들이 서슴없이 자신들의 일은 "가족과 이웃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남자들이 그들의 영적 탐구를 완성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디언 사회는 여성들의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 대지의 가슴에 둥지를 짓고 살듯이... 어머니 대지가 주신 곡식과 열매와 과실 들을 먹고 살듯이... 그래서 인디언 부모들은 사내아이들에게 단단히 가르칩니다.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어머니 대지에게 함부로 하는 것과 같다고...

전통시대의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가치는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 남성들은 인디언 여성들의 그와 같은 헌신적인 배려 속에서 한 사람의 온전한 남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디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내적 균형과 평화를 삶의 최고의 가치로 여겼으며,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보호구역에 갇혀 그들의 전통적인 방식을 잃어버린 뒤로 인디언 남성들은 그들 본연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차별했습니다. 때문에 인디언 남성들은 백인들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또 다른 패배자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인디언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에 빠졌습니다.
조상들이 가르친 대로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해도, 백인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다 못한 인디언 여성 레지나 브레이브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지고, 알코올에 중독되고, 자살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우리의 남자들을 보는 데 지쳤다.
우리는 아이들을 길렀지만, 우리의 언어와 관습과 문화를 파괴한 백인들에 의해 세뇌되고 말았다.
우리는 남자 형제들과 아들들을 보는 데 지쳤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끝내 미국 정부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백인들이 온 지 483년-우리는 병들고 지쳤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남자들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곳 전쟁터에 섰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누리던 자유를 알게 하기 위해...
우리의 젊은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잃어버린 영성을 되살리고 빼앗긴 위엄과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 여성들이다!

1976년에 인디언 신문 「와칸사스네」에 실렸던 글입니다. 인디언 사회의 반쪽인 남자들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그래서 이제는 인디언 여성들이 나서야 할 때임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있는 글입니다. 켄트 너번의 책 『상처 받은 무릎, 운디드니(Neither Wolf Nor Dog)』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오지브웨족 댄 할아버지의 손녀인 대널은 켄트 너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백인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인디언들에게는 우리 여성들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 문화가 사라지면 우리도 없어져요. 우리 어르신들이 절실히 추구해 왔던 것,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고요.
보세요.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남자들을요. 그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인디언 여성들의 차례란 말입니다. 남자들은 지쳤어요. 그들은 200년 동안이나 싸워 왔어요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그들은 전사였어요. 그들은 우리를 위해 나가서 싸웠죠. 하지만 당신네 백인은 수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 남자들은 싸움에서 졌고, 모두 패배자가 되었어요. 그들은 분노했고,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 분노와 수치심은 지금도 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어요. 그들은 계속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들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결코 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종족으로서 여전히 강인하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명예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싸우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할아버지가 언어를 가지고 싸우고 있듯이... 하지만 역시 그들은 패배자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어요. 당신네 백인들이 한 짓이지요. 당신들은 인디언 남자들의 정신을 빼앗아가고 수치심만 남겨 주었죠.
우리는 가슴 속에서, 그리고 두 손 안에서 모든 것을 살려서 지켜왔어요. 백인들은 우리를 무시했지요. 그동안 우리는 한낱 여자일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문화를 살리고 지키는 건 언제나 우리 여자들 몫이었죠. 그게 우리가 여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할 일이었습니다. 늘 그래 왔지요. 우리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요리를 하고 바느질을 합니다. 이웃의 노인들에게 음식을 해드리고 따뜻하게 보살펴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요. 남자들은 패배했는지 몰라도 우리 인디언 여자들의 마음은 변함없이 강해요.
그래요. 인디언보호구역에서는 폭력이 많이 발생하죠. 물론 술에다 그 원인을 돌린 수도 있어요. 하지만 좋은 가족들도 아주 많습니다. 당신네 백인 가정보다 훨씬 더 사랑이 넘치고, 여러 세대가 함께 살고 있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가족들 말입니다. 내가 우리 인디언 여성들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건 바로 그런 의미예요. 우리는 항상 중심에 있어 왔어요. 인디언 가정은 하나의 원과 같아요. 그 중심엔 언제나 여자가 있죠.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남자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겁니다.
우리 여성들은 밖으로 나가 백인들과 함께 일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밤에 집으로 돌아온 뒤에 우리들 자신을 팔아 치웠다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일한다고 해서 우리의 명예가 훼손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해요. 일을 하기 위해 백인들에게 가면 그들은 치욕을 느낍니다. 말로 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 치욕을 떨쳐 내려면 자신의 피를 포기하고 백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기를 원치 않아요. 그러나 그들이 인디언 보호구역에 남아 있으면 일자리가 없어요. 일자리가 없으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죠. 가족을 부양할 수 없으면 거주지를 떠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우리 여성들에게 화를 내지요. 당신들은 오로지 폭력과 술만 보죠. 백인 여자들은 우리의 침묵과 몸에 난 멍들만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건 망가진 원이에요. 우리는 그 원을 다시 온전하게 되살려 낼 겁니다. 이건 남자와 여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의 전체로서 우리 문화와 우리 조상들과 우리 후손에 관한 문제예요. 그것이 우리 인디언 여성이 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여자인 우리가 나서야 할 차례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확실히 인디언 여성들은 현대 여성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억압과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인디언 사회가 지금껏 전통을 보존하고 영적인 가르침을 실천해 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디언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비단 북미 인디언 여성들만의 문제일까요?
현대의 남성들은 피말리는 경쟁에 내몰려 있습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 안으로 무너져 갑니다. 아버지로서의 위치도 점점 잃어버리고요. 이 잘못된 경쟁과 이기주의의 문화를 바꿀 힘은 이제 남성들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살아 남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이들에게 잘못된 사회의 틀을 바꿀 새로운 창조적 힘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남미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지금은 여성적 가치의 녹색권력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여성들은 남성과 달리 경쟁과 갈등보다는 공존과 평화와 화해와 협동의 가치를 더 소중히 하는 이들입니다. 때문에 모성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들이 나설 때, 경쟁과 갈등으로 찌든 우리 사회는 비로소 치유될 수 있으며, 오직 그 때에만 미래의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태 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4월호

 

 

 

길과 도(道) - 서정록  

북미원주민이야기 10


우리가 흔히 쓰는 '도(道, Tao)'라는 말은 '길'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한자도 '길 道'자를 씁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길이라는 말보다 도(道)라는 말을 선호하게 되었고, 도라고 하면 뭔가 그럴 듯한, 또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도인(道人), 도사(道師)라고 하면 깨달은 자, 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도(道)라는 말은 길과 같은 근원에서 나왔지만 어떤 완성, 최종적인 결과, 세속을 초월한 상태, 이상적인 경지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말은 멋있긴 하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분히 교훈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그에 견주어 길이라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때문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도 있고 저 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 보면 논밭도 지나게 되고, 사람도 만나고, 동무도 만나고, 벌레도 만나게 됩니다. 또 꽃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숨결을 나누며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다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회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길을 잘못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낯선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날 수도 있으며, 첫사랑의 여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남의 집에서 음식물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흥분하게 합니다.
길에는 그렇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도(道)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道)는 규정된 길을 규정된 태도로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정해진 대로 따라야 하며, 가르침 받은 대로, 훈육 받은 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이미 도(道)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 받습니다.

이렇게 길과 도(道)는 다릅니다. 원래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확연히 구별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과정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길(the way, the pathway)로 표현합니다. 아름다움의 길, 축복의 길, 지혜의 길, 신성함의 길, 균형과 조화의 길, 대지의 길, 전사의 길, 바람의 길, 변화의 길, 인생의 길 등등.
놀랍게도 그들의 사회에는 '종교'란 말이 따로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행위가 기도요, 의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시아나 서구에는 종교가 따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일상과 종교가 구분됩니다. 자연히 일상의 행위는 세속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종교적 행위가 성스러운 것, 또는 신성한 것으로 숭상됩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에게 일상과 종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종교란 오직 일상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고, 자신이 먹고 입고 쓰는 모든 행위가 다른 생명에 대해 살생과 폭력과 저주가 되지 않도록 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생명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노력합니다.
또 인디언들은 사람이나 동식물, 곤충, 심지어 바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영적인 차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과 분리된 종교를 갖고 있는 문화권에서는 종교적 행위가 일상의 행위보다 높은 곳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종교의 관념이나 체계를 가지고 다른 존재의 행위와 삶을 규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사고가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영적인 차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최하층민 계급인 수드라는 영적으로 하등한 존재이기에 승려 계급인 브라만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 세계 역시 인간을 최고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로 서열화됩니다. 인도의 종교적 관념이 현실과 자연 세계를 규정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사고 역시 성경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것이나 종교가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 현실을 규정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에게 현실 위에 군림하는 종교란 매우 낯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위에 군림하는 도(道)란 이미 일상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도란 늘 변화가 있고, 관계가 있고, 사랑과 공경이 있는 삶 속에, 길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디언들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상의 길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관계는 다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와 겹쳐지고 포개지면서 순환하고 발전합니다. 이것을 인디언들은 '원 안의 원', 또는 '생명의 원'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강가에 있는 조약돌의 원은 다른 돌들의 원들과 만나고, 그 원은 다시 강물의 물방울과 만나고 산의 곡선과 만나고 나무의 잎사귀들과 만나고, 하늘의 둥근 해와 만나고 구름과 만나고 동물의 부드러운 몸의 곡선과 만나면서 확장됩니다. 그런가 하면, 낮과 밤, 심지어 삶과 죽음도 하나의 원으로 이어져 순환합니다. 갓난아이는 장성해 늙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마치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관계의 확장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인디언들의 고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북미 인디언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연과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영적 교사들은 말합니다.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무엇보다 자기 내부의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청정한 의지를 유지하고, 예지의 안테나를 바투 세워야 한다고, 또 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왜냐 하면, 우리가 세상의 연못에 만드는 파문은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디언들이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들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공경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벌레보다 자신을 낮추도록 가르칩니다.
백인들은 인디언 사회에 학교가 없다고 했지만, 오히려 인디언들에게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곳의 책들은 돌들과 나뭇잎들, 풀들, 시내들, 그리고 대지의 성난 태풍과 부드러운 축복을 공유하고 있는 새들과 동물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동안 생명의 거미집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친척들과 어른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부족과 민족의 역사와 법도를 배웠고, 자신의 몸을 준 생명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친구들과 협동하고 양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어려운 가족과 이웃에게 기꺼이 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인디언 아이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생명 세계를 이해하고, 삶을 이해했습니다. 타인과 나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신과의 영적 대화를 통해 자신이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탐구했습니다. 어른들은 섣불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입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기다려 주었습니다. 결코 늦는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지식을 가르치려 듭니다. 이상과 목표를 주입하려 듭니다. 그것도 가슴이 없는 머리로만.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관계는 올바른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관계는 지식은 습득할 수 있을지언정 삶의 지혜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의 영적 교사 트윌라니치가 "교육은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슴이 이어져 있다면 진실과 평화 또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현대의 교육은 성적이 부진하거나 교과 과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낙오자나 문제아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인디언에게 낙오자란 없습니다. 문제아도 없습니다. 그들 또한 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물질에 대한 태도도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짐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을 쌓아 두고 축적하기보다는 '나눔'을 실천합니다. 가진 것이 넉넉하지 못할 때에도 그들은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재물을 내어놓습니다.
아마도 인디언들만큼 남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는 선물에는 서구식의 'give and take'의 관념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한 사람에게, 또는 감사해서 줄 뿐입니다. 때문에 인디언 사회에서 선물은 반대 급부를 지불해야 하는 부담이나 채무가 아니라, 축복이며 축제가 됩니다. 한번 시작된 선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물론 아시아나 서구에도 자선이나 보시, 기부 등 나눔의 문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덕성에 의존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시스템 자체가 나눔의 문화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인디언 사회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나눔을 실천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물질도 길을 따라 원의 형태로 움직이며 확장해 갑니다. 마치 생명들이 길 위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가듯이...
나눔은 사람을 가까워지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진정한 나눔은 보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눌 수 있어서 좋을 뿐입니다. 인디언들의 물질에 대한 태도가 이와 같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은 자유롭습니다. 거칠 것이 없으므로 쉬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물질은 종교와 같지요. 거기에 매이기 시작하면 삶을 규정하고 속박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변화를 거부하고 머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곧잘 축적과 지배의 도구가 됩니다. ... 멈추는 순간, 변화를 정지하는 순간 자연의 균형과 조화는 깨집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삶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바람과 물 같은 사람들입니다. 끝없는 변화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생명 세계의 원리임을, 그것이 자연의 법임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도(道)보다는 길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길에는 늘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나바호족 하면 직물로 유명합니다. 그들이 과거에 만들었던 직물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의 직물을 보고 기적이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입하려 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바호인들에게 직물의 최종 생산물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베레 텔킨은 『민담의 역동성』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수지 비널리의 영화 '나바호의 직물 짜는 여인들'에는 어떤 사람이 직물을 짜는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종 직물이 탄생하는 과정에 단지 몇 분만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백인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나바호인들이 직물을 짜는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직물 자체는 나바호인들에게 직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최소한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염색의 재료를 얻기 위해 약초를 모으는 과정에서 인간과 식물의 상호작용이라든지, 익숙한 풍경을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동물과 그것을 지켜보는 인간 사이의 정신적 교류와 같은, 그들의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나바호 여인이 직물을 짜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른 존재들과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직물이 완성되면 미련 없이 필요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거나 필요한 생필품과 교환했습니다. 집착은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머무는 것 같아도,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끊임없이 변하고 거듭나고 새로워집니다. 삶이 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이 야생꽃 같기를
아름다움 속에서 자유롭게 자라고
매일매일 기뻐하기를


인디언 사회에 어르신과 지혜로운 자는 있어도 도사(道師)나 도인(道人)은 없습니다. 지도자는 있어도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길 위에서는 모두가 나그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경이가 있고, 자유가 있고, 따뜻한 숨결이 있고, 나눔이 있고, 내적 발전이 있으며, 다함이 없는 생명의 순환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과 하나됨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도 아름답습니다. 실패는 또 다른 길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道)에는 관념이 있고, 절대가 있고, 권위가 있고, 군림과 차별이 있습니다. 오직 성공만이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이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백인들의 지배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영적인 지혜와 문화적 정체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거듭된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정진하며 모든 존재와 하나되는 길을 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모든 생명과 하나 되는 고귀한 길은 돌로 쌓은 높은 신전에 있지 않고 일상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적인 나를 이기는 진정한 '전사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5월호

 

 

 

어머니 대지

검은호수 서정록

북미 인디언들에게 대지는 어머니와 같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실어 기를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어머니 대지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동학의 말씀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동학의 주문(呪文)-<시천주 조하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에 나오는 '시천주'란 말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모신다'란 말입니다. 따라서 위의 주문의 내용을 풀면, '모든 생명을 내 안에 모시고 자연의 법에 따라 살며 늘 이것을 잊지 않고 실천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동학을 창건한 수운 최제우 선생은 위의 주문에 나오는 '시천주'의 '주'자를 다시 풀어 말씀하시기를 "부모와 똑같이 모시는 것이다(與父母同事者也)"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님', 곧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마음으로 모시되 부모님을 모시듯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 한 그릇이 만사지"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먹이는 것만 잘 해도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또 '천지부모(天地父母)'란 말씀도 하셨습니다. 천지가 곧 부모라는 뜻이지요.
인디언들은 사춘기가 될 즈음, 자신을 낳아준 부모 외에 또 다른 부모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하늘과 땅, 곧 우주가 바로 그들을 기르는 부모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고마움도 크지만,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자신을 길러주고 부양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대지를 어머니로 일컫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이 모두 나의 형제와 친척임을 압니다. 인디언들이 개인의 욕망을 확대하기보다는 나의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런 천지부모의 관념을 일찍 터득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늘, 즉 아버지가 좀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이끄는 존재라고 하면, 어머니 대지는 그들의 일상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살가운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엄격한 아버지보다 부드러운 어머니가 더 친근하고 따뜻한 존재이듯이... 게다가 그들이 먹고 입고 자고 쓰는 모든 것들은 어머니 대지로부터 나옵니다. 때문에 어머니 대지에 대한 인디언들의 태도는 매우 각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머니 대지에 대해서 말할 때면 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즉 "어머니 대지는 말없이 묵묵히 견딘다"라는 것입니다. 대평원에서 농사를 짓던 만단족의 상처 받은 얼굴 또한 늘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어머니 대지는 언제나 말없이 참고 견딘다(Earth always endures)"라고.... 'endure'는 우리말로 하면 '참고 견딘다', '묵묵히 견딘다', '말없이 견딘다' 정도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디언들은 그들의 고난사를 말할 때도 이 '견딘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실제로 오랜 세월 백인 치하에서 갖은 수모와 멸시와 탄압을 묵묵히 견디어 온 그들의 역사는 이 '참고 견딘다'라는 말 외에는 그 어떤 표현도 적합하지 않다고 할 만큼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네 삶이란 인디언처럼 생존을 위협하는 정도는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는 시련과 갈등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디언들의 이 '견딘다'라는 말을 자칫 그들의 수난사라든지 삶의 고통과 관련지어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인디언들이 이 말을 그들의 고난의 역사와 관련지어 사용했을 때조차 그들은 자신들이 어머니 대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삶이란 때론 고통과 슬픔도 있지만 기쁨과 신성함, 그리고 경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견딘다'는 말은 그들의 고난과 역경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마치 어머니 대지가 추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검은 땅에서 풀과 꽃을 피워 내듯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희망과 가르침과 다른 존재들과 하나 됨을 주듯이... 우테족의 기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대지는 내게 말없이 있는 법을 가르칩니다.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칩니다.
겸손하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법을 가르칩니다.
늘 용기를 잃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르칩니다.
자유롭게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체념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다시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나 자신을 잊는 법을 가르칩니다.
다른 존재의 친절함을 기억하도록 가르칩니다.

인디언들에게 대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땅 이상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그들의 조상들의 뼈와 살이 묻혀 있는 곳이며, 그들이 탯줄을 묻은 곳이며, 그들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시냇물의 속삭임과 바람 소리,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던 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산과 강, 해와 달, 별들과 함께 했던 모든 기억들이 함께 숨을 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지혜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대지는 그들의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존재의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인들이 땅을 팔라고 했을 때 시애틀 추장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대지의 온기를 팔고 산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신선한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소유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팔 수 있단 말인가?"
인디언들에게 땅을 판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파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대지란 단지 지배와 소유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에게 대지는 삶의 소중한 기억이며, 그들에게 사랑과 공경을 가르쳐 준 스승이며, 나의 정체성의 일부이며, 내가 죽은 뒤 돌아가야 할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가던 나바호족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의 희망과 염원이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사후 나의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내가 땅을 알 듯, 땅이 나를 아는 곳이다.
하지만 새로운 땅은 내가 그를 알지 못하듯
그 또한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대지는 그들이 영원히 돌아가야 할 어머니 품과 같은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지는 그들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을 알고 그것을 함께 나누어 온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푸에블로 타오스족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삶을 이해하지 못할 때
대지는 내가 이야기하는 벗이다.
왜 내 말에 귀를 기울리지 않느냐고 말할 필요가 없다.
대지는 언제나 내게 같은 노래를 불러 주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눈물이 태양을 덮었을 때도
대지는 아버지를 위해 그 노래를 불러 주었다.

봄이 한겨울에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리고 죽음이 탄생과 더불어 어떻게 시작되는지
내가 잊어버릴 때마다 대지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칭찬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나는 가서 춤을 추어야 한다.
발 밑의 먼지가 내 걱정거리를 받아 줄 때까지 나는 춤을 춘다.
먼지는 내 걱정거리를 산으로 가져간다.
산은 내 걱정거리의 먼지들로 자란다.
산은 내 걱정거리가 쉬는 곳이다.

여기서 산은 대지와 같은 말입니다. 어머니 대지는 모든 것을 받아 줍니다. 마치 어머니가 갓난아이의 어리광을 기쁘게 받아 주듯이. 그래서 그들은 걱정거리가 생길 때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춤추러 간다고 말합니다. 춤추는 동안 어머니 대지의 창조적 에너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대지는 그들의 걱정거리를 받아 줍니다. 그리고 어머니 대지로부터 독수리처럼 높이 나는 법과 바다 밑에 잠겨 있는 거대한 빙하의 침묵을 배웁니다. 인내와 용기를 배웁니다. 라코타족의 추장이었던 두발로 선곰은 인디언들의 이런 대지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라코타 사람들은 대지와 대지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연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노인들은 너무도 흙을 사랑한다. 그래서 대지 어머니의 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땅에 앉거나 기대는 것을 좋아한다.
대지에 맨발로 서는 것은 좋은 일이다. 노인들은 모카신을 벗고 맨발로 신성한 대지 위를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티피 역시 땅에 세워지며, 제단도 흙으로 만들어진다. 창공을 나는 새들도 쉴 때는 땅 위에 내려앉는다. 땅은 살아 움직이고 자라는 모든 것들의 마지막 휴식터다. 흙은 생명을 진정시키고 활기를 주며, 부정한 것을 정화하고 치료해 준다. 때문에 인디언 노인들은 생명을 주는 대지와 맞서 기력을 소모하기보다는 땅에 앉는 것을 더 좋아한다. 땅 위에 앉거나 누움으로써 노인들은 더 깊고 더 섬세하게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보다 뚜렷하게 생명의 신비를 볼 수 있으며, 그들을 둘러싼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더욱 따뜻한 형제애를 느낀다. 대지는 옛 인디언들이 듣던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 소리를 보다 잘 듣기 위해 땅에 귀를 갖다 대기도 한다. 라코타의 선조들은 땅의 방식을 이해할 때까지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다. 마치 그들이 태초에 땅의 일부였던 것처럼.


캐나다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아베나키족의 큰천둥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다. 그녀는 우리를 기르신다. 그리고 우리가 땅에 넣어 주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돌려 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명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주신다. 상처를 입으면 우리는 어머니 대지한테 달려간다. 그리고 상처 입은 부위가 낫도록 그녀의 몸에 갖다 댄다. 동물도 우리와 똑같이 한다. 그들도 상처 입은 부위를 대지에 갖다 댄다.

따라서 인디언들에게 어머니 대지는 단순히 나를 실어 기르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며 나를 일깨우고 격려하고 삶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는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나의 삶은 대지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런 대지와의 깊은 그들의 이야기와 신화와 노래, 언어에서 때로는 꽃처럼 피어나고, 때로는 비처럼 우리를 적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쉼 없이 속삭이듯 바람과 시냇물이 있습니다. 해와 달이 있습니다. 새들이 있고 벌레와 동물들이 있습니다. 나무와 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 대지에게로 돌아갑니다.

낙엽들이 쌓인 곳에서
나는 땅을 바라보며 엎드린다.
그리고 순수하고 맑고 푸른 잎들의 탄생을 기도하며
떨리는 몸으로 젖은 대지의 향기를 맡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흙을 만진다.
그리고 흙이 이전의 모든 탄생과 죽음을 지니고 있음을 안다.
나는 깨어나는 대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를 찾기도 합니다. 그리고 침묵하며 자연의 수많은 존재들이 내게 들려 주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 박동 뒤로 울리는 어머니 대지의 박동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어머니 대지와 하나 됨을 그리워합니다.
따라서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견딘다'라른 말은 결코 시련과 인내를 가리키는 어두운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자식들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엄과 지혜가 있으며, 다함이 없는 '생명의 원'이 있습니다. 또 모든 존재가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성숙과 완성을 향한 또 다른 탄생과 거듭남을 위한 삶의 태도와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냥을 나간 젊은이가 봄의 아름다운 신록에 입을 다물지 못하듯이 경이가 있습니다. 또 들판에 핀 꽃을 보고 소녀가 탄성을 지르듯이 아름다움과 설렘이 있습니다. 새들이 아침마다 나뭇가지에 앉아 밤 사이에 벌어진 세상 소식을 전해 주듯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람에 든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며 부드럽게 속삭이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 대지는 말없이 묵묵히 견디며 꽃을 피워 내고 초목을 기릅니다. 또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상처 입은 자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렇게 세상에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잠시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렇게 어머니 대지는 늘 경이와 신성함을 몰고 다닙니다.
그래서일까. 이런 어머니 대지를 나바호인들은 '변화하는 여인'이라 부릅니다. 겨울이 왔는가 하면 어느새 봄이 저만큼 와 있고, 여름이 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달이 차 오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느새 기울고 해가 쨍쨍한가 하면 순식간에 눈보라가 날립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균형과 조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달픈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창조적인 힘이 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여명이 밝아 오듯이...

우리말에도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쓰는 '견딘다'라는 말과 달리, 씀바귀처럼 쓰디쓴 회한이 묻어납니다. 밝음은 좀처럼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의 '견딘다'는 말에는 삶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관하지 않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과 종교와 기도를 하나로 보았던 그들의 진지한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는 고난 속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식과 가족들을 보살피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모르는 어머니처럼... 그러고 보면 성숙한 인디언 남성들이야말로 어머니의 이런 고귀한 마음가짐을 깊이 체득하고 있는 이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극도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전쟁보다는 평화와 양보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바라보는 이런 깊은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것입니다.
자칫 서양의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완고해지기 쉬운 이 '견딘다'라는 말 속에서 오히려 삶의 기쁨과 경이를 보게 해 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신성하게 해 준 인디언들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6월호.

 

 

 

침묵과 듣기 1- 서정록  

침묵과 듣기 1


인디언들은 말보다는 침묵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로저 해머 같은 사람은 인디언들의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주의 깊게 선택된다. 마치 외과 의사의 칼처럼 정확하게... 그리하여 수술용 칼이 썩은 부위를 잘라내듯 삶의 부조리와 거짓을 잘라낸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눈보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잎들이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듯 부드럽고 가볍다. 그리고 간략하다. -겨우 한 생각을 말한 것처럼...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따금 그들의 언어는 매우 길다.-담요를 짜는 이가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엮듯...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말을 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마도 우리 인디언들처럼 늘 생각을 하며 사는 이들도 드물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은 돌처럼 가슴 속 깊이 가라앉아 결코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고...
잘 알려져 있듯이, 인디언들은 백인들과 수많은 조약을 맺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조약을 깬 것은 언제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해서 조약을 체결하곤 늘 그들이 다시 와서 깼습니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과 행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말과 행위가 다른 사람은 거짓말쟁이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디언 사회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그만큼 인디언 사회에서 말은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그처럼 무거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침묵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우족 출신의 찰스 이스트맨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균형의 증거인 침묵의 힘을 깊이 신뢰한다. 침묵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절대적인 균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햇빛이 비치는 수면 위에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그렇게 지식에 물들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의 마음을 갖는 것을 우리는 이상적인 삶의 태도로 여긴다.
만일 당신이 "침묵이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신령이다. 신성한 침묵은 신의 목소리다."라고...
만일 당신이 "침묵의 열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나 자신을 다스림, 진실한 용기, 또는 인내, 참을성, 위엄, 그리고 존경심과 같은 것들이다. 침묵은 인격의 초석이다."


침묵은 그들에게 성숙한 인간의 표식이자, 훌륭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뉴욕 지방의 세네카인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에게 침묵은 일상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에 낀 갖가지 감정의 때를 벗어버리고 청정의 상태에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묵에 드는 동안, 그들의 육신과 영혼은 청정해지고 새로워진다고 말이지요. 따라서 침묵은 그들에게 일상에 낀 부정을 제거하는 일종의 정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침묵은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찰스 이스트맨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신한 여성은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며, 가능한 한 혼자서 정적에 둘러싸인 울창한 숲이나 아무도 밟지 않은 들판의 풀밭을 거닐며 기도한다. 그녀의 시적인 마음 속에서 곧 다가올 아이의 탄생은 위대한 신령의 현신-영웅이나 또는 영웅들의 어머니-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생각은 자연의 순결한 품 속에 있거나 깊은 침묵 속에서 꿈꿀 때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소나무의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시원한 폭포소리만이 그녀의 상념을 깰 뿐이다.

한 마디로, 인디언들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침묵과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디언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 제일 먼저 침묵과 공경을 가르칩니다. 루페르토 코스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은 그들의 후각, 청각, 시각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의 깊게 보는 법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서 듣는 법을 배운다.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는 반 푼으로 치부되며, 그의 주위의 세계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인디언 아이들은 일찍부터 침묵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새나 동물, 곤충, 그리고 나무, 시내, 바람, 해와 달, 별 등 자연의 친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웁니다.
이렇듯 침묵은 인디언들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루페르토 코스토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신령들의 목소리는 외딴 장소에서 홀로 고독하게 있을 때, 또는 저녁에 티피에서 조용하게 침묵하고 있을 때 들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좋은 신령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는 많다. 조용한 곳에 가서 침묵을 불러 가슴과 마음을 가르치면 많은 좋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조용한 장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곳은 집 안일 수도 있고, 산이나 들, 또는 숲이나 물가일 수도 있습니다. 조용히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고, 위대한 신령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 없습니다. 그들은 틈날 때마다 그 곳에 가서 조용히 침묵에 듭니다.
포리스트 카터가 쓴 『작은나무의 교육』(The Education of Little Tree)[국내에서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글쓴이]이란 책에는 '작은나무'가 자신의 비밀 장소를 발견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나는 실개천 위쪽으로 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비밀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은 실개천 너머 산 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었으며, 월계수나무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나 사방에 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특히 허리가 굽은 향내 나는 늙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곳을 처음 발견한 순간 나는 즉시 그 곳을 나만의 비밀 장소로 정했으며, 그 뒤로는 시간만 나면 그곳에서 보내곤 했다.
그 곳에 갈 때면 나는 으레 늙은 개 마우드를 데려가곤 했다. 마우드 역시 그 곳을 좋아했으며, 우리는 늙은 단풍나무에 기대고 앉아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여기저기를 바라보곤 했다. 마우드는 그 곳에만 가면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우드 역시 그 곳이 비밀 장소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어느 날 늦은 오후, 내가 마우드와 함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여기저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내 비밀 장소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도 숲 속을 걸어다니실 수 있었다. 뒤를 따라가 보니, 할머니는 식물의 뿌리를 캐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곧장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뿌리를 다 캔 후, 나는 할머니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뿌리들을 종류별로 나누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참지 못하고 할머니께 내 비밀 장소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 얘기를 들으신 할머니는 전혀 놀라지 않으셨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놀라게 했다.
할머니는 체로키 사람들은 누구나 비밀 장소를 하나쯤은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역시 비밀 장소를 갖고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 나도 비밀 장소를 하나 갖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육신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마음, 즉 영혼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삶을 담당하는 마음만 발달시켜 탐욕스러운 생각에 몰두하거나 남에게서 이득을 취할 방법을 찾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마음은 히코리 도토리 크기로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근육과 똑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진다. 영혼을 크고 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영혼에 이르는 문이 열리면 이해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해의 길을 가면 갈수록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점점 더 커진다고 한다. 나는 앞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 영혼이 히코리 도토리 크기만해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의 영혼이 더욱 크고 깊어지게 되면 언젠가는 내 과거의 육신들이 살아 온 과정도 다 알게 될 것이며, 차츰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내 비밀 장소에서 그러한 과정의 일부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얼음이 풀리고 봄이 되어 만물이 탄생할 때면-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탄생할 때도 그렇지만, 모든 것이 새로 탄생할 때는-태풍이 오듯이... 그리고 피와 고통 속에서 아기가 탄생하듯이... 할머니는 그런 폭풍우는 영혼이 다시 물질의 형태 속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소동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내 비밀 장소에 있는 향기로운 단풍나무 역시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다.

작은나무에게 그의 비밀 장소는 그의 영혼을 만나고 자연의 다른 존재들의 영혼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동시에 그 곳은 그와 우주가 만나는 신성한 곳인 동시에 우주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마릴루 아위악타가 정리한 것으로, 착토족 할머니 이쉬토우아가 손녀인 '작은사슴'에게 침묵과 그것을 통해서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너는 씨옥수수를 골라야겠다."
나무 테이블의 한 편에 작은사슴은 껍질에 싸인 옥수숫대를 수북이 올려놓았다. 어떤 옥수수는 짙은 오렌지 빛깔이었고, 어떤 것은 황금빛 바탕에 적갈색과 옅은 검정색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밭에 심을 씨옥수수를 고르는 일을 맡았다. 네 아버지와 오빠는 씨옥수수를 담을 자루를 만들 사슴 가죽을 가져왔다. 모피는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 씨앗이 건조한 상태로 있게 해 줄 것이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넓은 들판에 옥수수를 심으려면 씨앗을 넉넉하게 골라야 할 게다. 옥수수는 우리 부족의 친척이다. 옥수수는 그들 옥수수부족으로부터 힘을 끌어온단다. 줄기 하나로는 아무것도 맺지 못하는 법이거든."
할머니는 옥수수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셨다. 할머니가 옥수숫대를 양 손으로 붙잡고 비틀자 옥수수 알갱이들이 테이블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작은사슴은 재빨리 낱알들을 버드나무 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가 가득차자 작은사슴은 낱알들을 테이블 위에 쏟았다. 두 사람은 씨앗의 빛깔이 너무 검거나 단단해 싹이 트기 어려운 것들을 골라 내었다.
"할머니, 서쪽에는 새로운 하늘이 있겠지요? 옥수수를 심을 시기를 알려 주는 북두칠성도요?"
그녀의 질문은 할머니를 웃게 만들었다.
"물론 있고말고. 오직 땅만 바뀐단다. 하늘은 똑같아. 북두칠성이 한 바퀴 돌아 국자 모양이 거꾸로 돼서 물이 쏟아지는 형태가 되면, 우리는 안다. 어머니 대지가 씨앗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위대한 신령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만드셨거든. 위대한 신령의 지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속에 다 들어 있단다."
할머니는 말씀을 마치고는 동그란 황갈색 씨앗 하나를 작은사슴의 손바닥에 꼭 쥐어 주셨다.
"씨앗의 가슴은 신성한 불의 조그만 불꽃과 같단다. 하지만 느껴 보거라. 껍질이 얼마나 단단한지! 너는 씨앗을 들판에 던질 수도 있고,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네 손에 가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씨앗을 오직 따스한 토양에서만 싹이 튼단다. 너무 일찍 싹이 돋아도 그만 죽고 말지. 그래서 씨앗은 안전하게 싹을 틔울 수 있을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씨앗의 지혜다. 그렇게 씨앗은 싹이 트기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이 들어가 산다."
옥수수 알갱이들 쪽으로 작은사슴의 손을 가져간 할머니는 나무의 뿌리처럼 생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조그만 주먹을 꼭 쥐셨다.
"서쪽으로 가는 길은 힘들게다. 그리고 많은 인내를 감내해야 할 거야. 씨앗처럼 해라. 그리고 너 자신을 지켜라.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네 영혼 속에 깊이 들어가서 살아라."
작은사슴은 할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말했다.
"네 안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거라. 그 곳에서 위대한 신령이 네게 말씀해 주실 게다."
"그럼 할머니도 불 앞에서 기도하실 때, 귀를 기울이고 계신 거예요?"
"불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태양의 친척이란다. 불은 위대한 신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도와 주거든. 기도할 때 나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 내 영혼의 눈과 귀로..."
작은사슴은 화덕의 불을 쳐다보았다.
"불꽃을 보고 있지만, 탁탁 튀는 소리와 불길이 치솟을 때 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그건 네가 네 몸의 눈과 귀로 들으려 하기 때문이란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손가락 끝으로 작은사슴의 가슴을 톡톡 치셨다.
"네 영혼의 눈과 귀로 들어야 한단다."
"제게 듣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할머니는 머리를 가로저으셨다.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네 스스로 불의 신성한 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라."
그날 밤, 작은사슴은 할머니 곁에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작은사슴은 눈을 화덕의 불꽃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방 안의 이곳 저곳을 옮겨다녔다. 문가에 쌓아둔 옥수수를 담을 두꺼운 사슴 가죽 자루들, 오빠가 잠자고 있는 건너편 다락,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무시고 있는 구석의 침상, 설탕과 옥수수 가루가 담긴 호로박, 물레와 아버지의 총, 과실과 콩, 호박 주머니, 구슬이 장식된 그녀의 모카신 위에서 춤추는 화덕의 불빛, 그녀의 붉은 옷에 장식된 뱀가죽 무늬, 그녀의 목에 걸린 씨앗이 든 조그만 주머니, 할머니의 눈.
작은사슴이 마주친 할머니의 눈은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는 듯 가만히 미소짓고 있었다.
"불의 신성한 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단다. 너는 아직 어리다. 때가 올 거다."
할머니가 주무시기 위해 다락으로 올라가신 뒤에도 작은사슴은 한참 동안 담요 위에 앉아서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았다. 몸이 따스해지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위의 이야기에서 할머니는 침묵을 단단한 껍질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씨앗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려면 흙과 물,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들의 영적인 씨앗이 발아하려면 적당한 기다림과 집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침묵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 침묵과 듣기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7월호.

 

 

 

침묵과 듣기 2



인디언들은 말보다는 침묵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로저 해머 같은 사람은 인디언들의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주의 깊게 선택된다. 마치 외과 의사의 칼처럼 정확하게... 그리하여 수술용 칼이 썩은 부위를 잘라내듯 삶의 부조리와 거짓을 잘라낸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눈보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잎들이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듯 부드럽고 가볍다. 그리고 간략하다. -겨우 한 생각을 말한 것처럼...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따금 그들의 언어는 매우 길다.-담요를 짜는 이가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엮듯...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말을 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마도 우리 인디언들처럼 늘 생각을 하며 사는 이들도 드물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은 돌처럼 가슴 속 깊이 가라앉아 결코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고...


잘 알려져 있듯이, 인디언들은 백인들과 수많은 조약을 맺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조약을 깬 것은 언제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해서 조약을 체결하곤 늘 그들이 다시 와서 깼습니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과 행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말과 행위가 다른 사람은 거짓말쟁이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디언 사회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그만큼 인디언 사회에서 말은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그처럼 무거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침묵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우족 출신의 찰스 이스트맨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균형의 증거인 침묵의 힘을 깊이 신뢰한다. 침묵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절대적인 균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햇빛이 비치는 수면 위에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그렇게 지식에 물들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의 마음을 갖는 것을 우리는 이상적인 삶의 태도로 여긴다.


만일 당신이 "침묵이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신령이다. 신성한 침묵은 신의 목소리다."라고...

만일 당신이 "침묵의 열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나 자신을 다스림, 진실한 용기, 또는 인내, 참을성, 위엄, 그리고 존경심과 같은 것들이다. 침묵은 인격의 초석이다."


침묵은 그들에게 성숙한 인간의 표식이자, 훌륭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뉴욕 지방의 세네카인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에게 침묵은 일상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에 낀 갖가지 감정의 때를 벗어버리고 청정의 상태에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묵에 드는 동안, 그들의 육신과 영혼은 청정해지고 새로워진다고 말이지요. 따라서 침묵은 그들에게 일상에 낀 부정을 제거하는 일종의 정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침묵은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찰스 이스트맨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신한 여성은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며, 가능한 한 혼자서 정적에 둘러싸인 울창한 숲이나 아무도 밟지 않은 들판의 풀밭을 거닐며 기도한다. 그녀의 시적인 마음 속에서 곧 다가올 아이의 탄생은 위대한 신령의 현신-영웅이나 또는 영웅들의 어머니-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생각은 자연의 순결한 품 속에 있거나 깊은 침묵 속에서 꿈꿀 때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소나무의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시원한 폭포소리만이 그녀의 상념을 깰 뿐이다.


한 마디로, 인디언들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침묵과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디언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 제일 먼저 침묵과 공경을 가르칩니다. 루페르토 코스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은 그들의 후각, 청각, 시각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의 깊게 보는 법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서 듣는 법을 배운다.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는 반 푼으로 치부되며, 그의 주위의 세계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인디언 아이들은 일찍부터 침묵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새나 동물, 곤충, 그리고 나무, 시내, 바람, 해와 달, 별 등 자연의 친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웁니다.


이렇듯 침묵은 인디언들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루페르토 코스토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신령들의 목소리는 외딴 장소에서 홀로 고독하게 있을 때, 또는 저녁에 티피에서 조용하게 침묵하고 있을 때 들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좋은 신령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는 많다. 조용한 곳에 가서 침묵을 불러 가슴과 마음을 가르치면 많은 좋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조용한 장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곳은 집 안일 수도 있고, 산이나 들, 또는 숲이나 물가일 수도 있습니다. 조용히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고, 위대한 신령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 없습니다. 그들은 틈날 때마다 그 곳에 가서 조용히 침묵에 듭니다.


포리스트 카터가 쓴 『작은나무의 교육』(The Education of Little Tree)[국내에서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글쓴이]이란 책에는 '작은나무'가 자신의 비밀 장소를 발견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나는 실개천 위쪽으로 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비밀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은 실개천 너머 산 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었으며, 월계수나무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나 사방에 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특히 허리가 굽은 향내 나는 늙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곳을 처음 발견한 순간 나는 즉시 그 곳을 나만의 비밀 장소로 정했으며, 그 뒤로는 시간만 나면 그곳에서 보내곤 했다.


그 곳에 갈 때면 나는 으레 늙은 개 마우드를 데려가곤 했다. 마우드 역시 그 곳을 좋아했으며, 우리는 늙은 단풍나무에 기대고 앉아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여기저기를 바라보곤 했다. 마우드는 그 곳에만 가면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우드 역시 그 곳이 비밀 장소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어느 날 늦은 오후, 내가 마우드와 함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여기저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내 비밀 장소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도 숲 속을 걸어다니실 수 있었다. 뒤를 따라가 보니, 할머니는 식물의 뿌리를 캐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곧장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뿌리를 다 캔 후, 나는 할머니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뿌리들을 종류별로 나누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참지 못하고 할머니께 내 비밀 장소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 얘기를 들으신 할머니는 전혀 놀라지 않으셨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놀라게 했다.


할머니는 체로키 사람들은 누구나 비밀 장소를 하나쯤은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역시 비밀 장소를 갖고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 나도 비밀 장소를 하나 갖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육신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마음, 즉 영혼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삶을 담당하는 마음만 발달시켜 탐욕스러운 생각에 몰두하거나 남에게서 이득을 취할 방법을 찾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마음은 히코리 도토리 크기로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근육과 똑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진다. 영혼을 크고 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영혼에 이르는 문이 열리면 이해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해의 길을 가면 갈수록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점점 더 커진다고 한다. 나는 앞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 영혼이 히코리 도토리 크기만해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의 영혼이 더욱 크고 깊어지게 되면 언젠가는 내 과거의 육신들이 살아 온 과정도 다 알게 될 것이며, 차츰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내 비밀 장소에서 그러한 과정의 일부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얼음이 풀리고 봄이 되어 만물이 탄생할 때면-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탄생할 때도 그렇지만, 모든 것이 새로 탄생할 때는-태풍이 오듯이... 그리고 피와 고통 속에서 아기가 탄생하듯이... 할머니는 그런 폭풍우는 영혼이 다시 물질의 형태 속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소동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내 비밀 장소에 있는 향기로운 단풍나무 역시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다.


작은나무에게 그의 비밀 장소는 그의 영혼을 만나고 자연의 다른 존재들의 영혼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동시에 그 곳은 그와 우주가 만나는 신성한 곳인 동시에 우주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마릴루 아위악타가 정리한 것으로, 착토족 할머니 이쉬토우아가 손녀인 '작은사슴'에게 침묵과 그것을 통해서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너는 씨옥수수를 골라야겠다."


나무 테이블의 한 편에 작은사슴은 껍질에 싸인 옥수숫대를 수북이 올려놓았다. 어떤 옥수수는 짙은 오렌지 빛깔이었고, 어떤 것은 황금빛 바탕에 적갈색과 옅은 검정색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밭에 심을 씨옥수수를 고르는 일을 맡았다. 네 아버지와 오빠는 씨옥수수를 담을 자루를 만들 사슴 가죽을 가져왔다. 모피는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 씨앗이 건조한 상태로 있게 해 줄 것이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넓은 들판에 옥수수를 심으려면 씨앗을 넉넉하게 골라야 할 게다. 옥수수는 우리 부족의 친척이다. 옥수수는 그들 옥수수부족으로부터 힘을 끌어온단다. 줄기 하나로는 아무것도 맺지 못하는 법이거든."


할머니는 옥수수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셨다. 할머니가 옥수숫대를 양 손으로 붙잡고 비틀자 옥수수 알갱이들이 테이블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작은사슴은 재빨리 낱알들을 버드나무 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가 가득차자 작은사슴은 낱알들을 테이블 위에 쏟았다. 두 사람은 씨앗의 빛깔이 너무 검거나 단단해 싹이 트기 어려운 것들을 골라 내었다.


"할머니, 서쪽에는 새로운 하늘이 있겠지요? 옥수수를 심을 시기를 알려 주는 북두칠성도요?"


그녀의 질문은 할머니를 웃게 만들었다.


"물론 있고말고. 오직 땅만 바뀐단다. 하늘은 똑같아. 북두칠성이 한 바퀴 돌아 국자 모양이 거꾸로 돼서 물이 쏟아지는 형태가 되면, 우리는 안다. 어머니 대지가 씨앗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위대한 신령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만드셨거든. 위대한 신령의 지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속에 다 들어 있단다."


할머니는 말씀을 마치고는 동그란 황갈색 씨앗 하나를 작은사슴의 손바닥에 꼭 쥐어 주셨다.


"씨앗의 가슴은 신성한 불의 조그만 불꽃과 같단다. 하지만 느껴 보거라. 껍질이 얼마나 단단한지! 너는 씨앗을 들판에 던질 수도 있고,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네 손에 가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씨앗을 오직 따스한 토양에서만 싹이 튼단다. 너무 일찍 싹이 돋아도 그만 죽고 말지. 그래서 씨앗은 안전하게 싹을 틔울 수 있을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씨앗의 지혜다. 그렇게 씨앗은 싹이 트기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이 들어가 산다."


옥수수 알갱이들 쪽으로 작은사슴의 손을 가져간 할머니는 나무의 뿌리처럼 생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조그만 주먹을 꼭 쥐셨다.


"서쪽으로 가는 길은 힘들게다. 그리고 많은 인내를 감내해야 할 거야. 씨앗처럼 해라. 그리고 너 자신을 지켜라.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네 영혼 속에 깊이 들어가서 살아라."


작은사슴은 할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말했다.


"네 안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거라. 그 곳에서 위대한 신령이 네게 말씀해 주실 게다."


"그럼 할머니도 불 앞에서 기도하실 때, 귀를 기울이고 계신 거예요?"


"불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태양의 친척이란다. 불은 위대한 신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도와 주거든. 기도할 때 나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 내 영혼의 눈과 귀로..."


작은사슴은 화덕의 불을 쳐다보았다.


"불꽃을 보고 있지만, 탁탁 튀는 소리와 불길이 치솟을 때 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그건 네가 네 몸의 눈과 귀로 들으려 하기 때문이란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손가락 끝으로 작은사슴의 가슴을 톡톡 치셨다.


"네 영혼의 눈과 귀로 들어야 한단다."


"제게 듣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할머니는 머리를 가로저으셨다.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네 스스로 불의 신성한 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거라."


그날 밤, 작은사슴은 할머니 곁에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작은사슴은 눈을 화덕의 불꽃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방 안의 이곳 저곳을 옮겨다녔다. 문가에 쌓아둔 옥수수를 담을 두꺼운 사슴 가죽 자루들, 오빠가 잠자고 있는 건너편 다락,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무시고 있는 구석의 침상, 설탕과 옥수수 가루가 담긴 호로박, 물레와 아버지의 총, 과실과 콩, 호박 주머니, 구슬이 장식된 그녀의 모카신 위에서 춤추는 화덕의 불빛, 그녀의 붉은 옷에 장식된 뱀가죽 무늬, 그녀의 목에 걸린 씨앗이 든 조그만 주머니, 할머니의 눈.


작은사슴이 마주친 할머니의 눈은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는 듯 가만히 미소짓고 있었다.


"불의 신성한 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단다. 너는 아직 어리다. 때가 올 거다."


할머니가 주무시기 위해 다락으로 올라가신 뒤에도 작은사슴은 한참 동안 담요 위에 앉아서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았다. 몸이 따스해지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위의 이야기에서 할머니는 침묵을 단단한 껍질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씨앗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려면 흙과 물,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들의 영적인 씨앗이 발아하려면 적당한 기다림과 집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침묵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담긴 '창조'의 의미

북미 인디언들은 24시간 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잘 되게 해달라고, 잘 살게 해달라고, 복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사에 감사하는 기도이고, 생명을 살리는 기도이고, 삶에 의미를 창조하는 기도이지요. 그들은 말합니다. 기도가 있어 인생은 풍요롭고 살 만한 것이라고...

<시계가 없는 나라>의 작가인 이반 프리챠드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크맥어로 기도는 ‘올수터미’이다. ‘대화를 통해 누군가와 하나 된다’는 뜻이다. 그대는 기도하기 위해 특정한 시간에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와 대화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그리 한다면, 그대의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이때 그 누군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이나 식물이 될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와 온전히 하나 되어 생각하고 대화하며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가에게는 혼신의 힘을 다바쳐 하는 예술행위가 기도요, 명상하는 이에게는 침묵이 기도요, 운동선수에게는 경기에 열중하는 것이 기도요, 가족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짓는 어머니의 행위 또한 기도요, 전쟁터에 나간 전사의 희생적인 행위 또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할 때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절대자나 전능한 자, 힘있는 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기도라 여겨왔던 우리의 통념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인디언들이 쓰는 창조와 진화의 개념을 보면 우리가 쓰는 것과는 사뭇 그 의미가 다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흔히 창조라고 하면 태초에 우주가 생겨난 일이나 신이 이 우주를 만든 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시초이면서 출발점이 되는, 또는 없던 것이 생겨나는 그 어떤 발생적 사건을 우리는 창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진화라고 하면 대개 과거나 이전보다 좋아지는 것, 또는 나아지는 어떤 상태나 조건을 말하지요.

아시다시피 창조냐 진화냐 하는 것은 서구 사상사의 오랜 논쟁주제입니다. 기독교는 창조론을 말하고,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주장해왔습니다. 양쪽 다 일리가 있고, 자체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은 쉽게 결말을 보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창조론을 보지요. 창조론은 창조의 주체가 있기 마련입니다. 기독교의 여호와, 즉 창조자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고 그 각각에 대해 생명과 의미와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창조와 함께 문득 이 세상은 질서와 조화가 가득한 세상이 됩니다. 자연히 모든 의미는 창조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일종의 연역법인 셈이지요. 그래서 후대의 모든 사건과 행위와 존재의 의미는 창조의 순간으로 되돌아가서 찾아야 합니다. 모든 가치와 의미는 신의 창조적인 행위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신성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창조론에 기초한 신화들을 보면 창조 이후에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가 나올 것이 더 이상 별로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시초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졌고 구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선만 있는게 아니라 악도 존재합니다. 균형과 함께 불균형, 조화와 함께 부조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악과 불균형, 부조화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끌어들였습니다. 각자의 행위와 그에 대한 책임은 행위자의 선택과 의지로부터 비롯된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논리 속에도 결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수많은 사건들이 모두 행위자의 선택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건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를테면, 국가 간의 전쟁과 같은 것은 한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교통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도로의 중앙선을 잘 지키며 가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해 들이받는 경우처럼 이 세상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와 우연적인 요소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행위자의 선택과 그 결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어떤가요?

진화론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래 과학계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기정의 사실이 되었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에 대해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돌연변이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진화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수많은 돌연변이 중에서 환경과 조건에 부합하는 것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습니다.

물론 진화론은 창조론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지요. 또 환경과 삶의 조건의 변화를 중요한 변수로 끌어들임으로써 개인의 행위와 그 환경과 조건을 함께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부적절한 발전론, 진보론을 낳음으로써 과도한 개발과 자연파괴를 낳았습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과 환경 파괴는 이런 무모한 발전론과 진보론에 편승한 것입니다.

결국 서구의 창조론이나 진화론 모두 훌륭한 이론임엔 틀림없지만, 우리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미 인디언들은 창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물론 인디언들도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태초의 창조를 말합니다. 그 점에서 인디언들의 창조론은 얼핏 서구의 창조론과 대동소이해 보입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은 또 하나의 창조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로 이 세상의 뭇 생명과 존재들의 일상적 행위가 바로 창조 행위라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존재는 영혼을 갖고 있다고. 그리고 모든 생명은 영적으로 평등하다고. 그리고 모든 생명과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래서 이 세상은 마치 거대한 거미집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그리고 거미집의 어느 한 곳을 건드리면 거미집 전체가 출렁인다고.

그런가 하면 인디언들이 말하는 위대한 신령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절대자도, 전지전능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리고 분노하고 화를 내는 인격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존재들을 하나로 관통하며 흐르는 생명력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위대한 신령은 모든 존재들의 총합이며,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총합이며, 그 각각의 존재와 관계가 낳는 가치와 의미의 총합이라고. 그리고 모든 존재는 위대한 신령 안에 있고, 위대한 신령은 모든 존재 속에 있다고.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속에는 신성함이 있다고.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우리가 숨쉬고, 물을 마시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사물을 보고, 맛을 보고, 피부로 감촉을 느끼는 모든 행위에는 신성함이 있다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에는 신성함이 있다고.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위대한 신령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은 수많은 생명과 존재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한다고. 잠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모든 생명과 존재는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 흐름, 결, 떨림의 물결 속에서 변한다고.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결국 이 세상의 존재들이 함께 부대끼고 어울리며 낳은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그냥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들의 행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돌고 돌아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오직 변화와 새로워짐과 재생만이 있을 뿐입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듯이 그렇게 돌고 도나, 새로 오는 봄은 지난 봄과 같지 않습니다. 한번 흘러간 강물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각각의 존재의 행위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우리의 삶과 자연은 변화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한 개인의 독립적인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 자연 속에서의’ 행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행위는 나 혼자의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영향 속에서, 주고받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봅니다. 혹시나 자신의 행위가 다른 존재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가 하고. 그렇게 인디언들은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신성함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선함을 위해 노력합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자신들은 위대한 신령과 함께 이 세상을 매일 새로 창조한다고. 그럼으로써 나와 이 세상은 거듭나고 새로워진다고. 자신들이 매일 아침 해맞이로써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창조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창조는 태초에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 중인 사건이라고. 창조야말로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 조건이라고. 창조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고 내일의 성장이 있다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고.

그러므로 인디언들은 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축복하라고 말합니다.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와 일어나는 일들을 축복하라고 말이지요. 2000년 전에 있었던 일은 신화일 뿐이라고. 창조는 지금 이 순간 우리들 안에서, 밖에서, 들판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먼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들고나는 숨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오직 그때에만 우리의 삶은 기도가 되고 종교가 되고 거룩해진다고 말입니다.

숨쉴 때마다 우리는 우주가 된다

창조의 그 순간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 안에 있나니

바위와 나무와 동물과 물고기에게로 전해진다


노인들은 말한다 -

생명의 본질은 물 속에, 바람 속에, 흙 속에,

그리고 숨결 속에, 불 속에, 뼈 속에 있다고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진화론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인디언들은 진화를 말하기보다는 변화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그 변화 속에서 그들은 선함을 위해 힘쓰고,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와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한다고. 물론 인디언들도 생물학적 진화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런 진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학적 견지에서는 생물학적 진화론이 중요할지 모르나, 인디언들이 보기에는 일상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의 균형과 평화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북미 인디언들에게 서구인들이 말하는 그런 진화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서남부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창조신화에 보면,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세는 제5세계로 태초의 곤충-사람들이 살던 제1세계로부터 변화해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과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히려 위대한 신령과 더불어 매순간 순간 수많은 존재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온 창조적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은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려고 노력하느냐, 그렇지 않고 나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고 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위는 선도 되고 악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반드시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되어 있다고. 그러므로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인생은 고달프고 걱정거리가 끊일 새가 없지만 그럼에도 늘 경이와 감사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고.

인디언들은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가면 다시 아침이 오듯이, 우리의 행위 또한 돌고 돌아 다시 내게 돌아온다고. 그렇게 시간은 나선형처럼 감기었다가는 풀어지고, 풀어졌다가는 다시 휘감기며 돌고 돈다고.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돌고 돈다고. 인연도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다고.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을 그리며 돌고 돈다고. 안으로도 돌고 밖으로도 돌며 그렇게 넘나든다고. 그렇게 확장해가며 하나가 된다고. 그러는 동안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도 깊어진다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존재들이 위대한 신령과 함께 만드는 창조의 모습이라고.

만일 인디언들이 서구인들처럼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졌다면 그들 또한 앞만 보고 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하나가 되어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런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북미 인디언들의 그 높은 영적인 삶과 문화도 나올 수 없었을 거구요.

불행하게도 서구는 오직 태초의 창조에만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직선적 시간관을 낳았습니다. 오직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높은 곳만 바라보았습니다. 땅은 멸시했습니다. 낮은 것은 무시했습니다. 오직 미래의 신적이고 이상적인 것만이 그들의 눈과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영적인 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직 높은 곳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은 과거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조상들의 삶을 언제든 되돌아가 물어야 할 영적인 지혜의 창고로 여겼습니다. 만일 조상들의 균형과 조화를 위한 창조적인 행위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들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어느 세대에나 문제가 있고, 불균형과 부조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인디언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반드시 다음 세대에 끼칠 영향을 먼저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들의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그 결정을 폐기했습니다. 그들의 행위에 지혜와 신성함이 가득한 것은 이런 남다른 노력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이 그처럼 영적 탐구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을 찾고자 애쓰는 것은 그것이 바로 창조주의 일에 동참하고 모두와 하나가 되고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자면 위대한 신령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가 같이 협력해서 균형과 조화와 평화와 질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만이 비로소 창조는 일어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일까 오지브웨족, 이로쿼이족, 체로키족 등 알곤킨계 인디언들의 창조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대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물로 가득 차 있을 때입니다. 어떤 이유로 하늘에서 천상의 여인이 떨어집니다. 그 여인이 다치지 않도록 새들은 하늘로 날아가 그녀를 받치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물 위에 있던 동물들은 그 여인이 살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바다 속에 있는 진흙을 가지러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갑니다. 여러 동물들이 시도한 끝에 마침내 사향들쥐가 진흙을 가져오는데 성공하고, 동물들은 그 진흙을 펑퍼짐한 거북의 등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지가 만들어지고, 여인은 그곳에서 자손을 퍼트린다는....

이런 류의 창조신화는 시베리아의 창조신화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요. 그러나 시베리아 쪽의 창조신화가 단편적으로만 전해지는데 반해 북미 인디언들의 창조신화는 보다 원형적이며 완결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창조신화는 서양의 창조신화와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동물들조차 창조의 주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인디언들이 말하는 창조는 늘 이런 식입니다.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위대한 신령과 더불어 협력해서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태초에 위대한 신령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뭇 생명을 만드셨을 때 천상의 수많은 영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지상으로 내려와 뭇 생명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이지요. 영들 또한 육신을 갖고 있는 이 세상의 생명들이 겪는 고통과 기쁨, 애환을 몸소 겪을 때만이 이 세상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완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지상의 모든 존재들과 하늘의 영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행위가 창조적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평화를 위한 목소리가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선함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싹트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참다운 평화는 평등이 없는 곳에서는 피지 않습니다. 오직 평등이 있을 때, 그리고 자기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할 때만이 평화는 싹틀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창조적인 행위가 될 것이고 우리가 떼는 발걸음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나비와 벌이 날아들 것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우리의 상황을 축복하라

역경과 고통을 축복하라


굶주림과 목마름을 축복하라

베짱이와 가뭄을 축복하라


옳지 않은 것들을 축복하라

모든 것을 가져가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은 자들을 축복하라


힘든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너의 성장을 계속하라

그리고 성장 속에서 잡념을 제거하라

그리고 맑은 정신 속에서 내적 신명을 찾아라


거기에 평화와 행복이 있나니

아름다운 세상이 있나니

 

 

 

노래와 춤1-덴스모어와 인디언 음악-서정록  

북미원주민 이야기 15

검은호수 서정록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덴스모어(Frances Densmore)'라는 백인 여성 음악가가 바로 그입니다. 그녀는 대평원과 알곤킨족 인디언들을 두루 답사하면서 그들의 음악을 채록하고 분석하였으며, 음악과 관계된 그들의 문화를 소상히 조사하여 10여 권의 책과 100여 편의 관련 글들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유실될 뻔한 많은 북미 인디언 음악들이 채록되었습니다. 또한 그녀가 수집한 많은 이야기들과 사진 자료들은 귀중한 민속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수우족으로부터 채록한 곡만도 240곡에 이르며, 다른 부족들로부터 채록한 곡들까지 합치면 발표된 곡들이 모두 1000곡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녀는 1867년에 미시시피 강둑에 있는 작은 도시 '레드 윙'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인디언 음악을 연구하게 되었냐고 물으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인디언 북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들은 인디언 북소리를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인디언 북 소리는 무의식 속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플로리다의 에버랜드까지, 그리고 대평원과 산악 지대를 넘고 황무지를 가로질러 그 소리를 따라갔다. 늘 인디언들의 북 소리는 나를 불렀다. 나는 낯선 곳에서도, 새벽에도, 그리고 한밤중에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는 뭔가 모를 신비한 감동과 울림이 있었다.
내 어릴 때 집은 미시시피 강 근처에 있었다. 그때 도시 건너편에 있는 강 가운데 있는 섬에는 수우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면, 우리는 북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모닥불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저녁 하늘이 검붉게 변하고 내가 잠자리에 들 때쯤 나는 늘 그들의 북 소리를 듣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인디언들은 우리와 다른 관습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미시시피 강 저 편의 선한 사람들에 대한 환상에 가득 차서 잠이 들었다.
성장해서 나는 피아노 교사와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늘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던 강 건너 인디언들에 대한 경이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인디언 음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1893년 시카고 박람회 때였습니다. 당시의 느낌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디언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소리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노래는 너무도 신성하고 영적이어서 나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뒤로 인디언들에 관한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903년 레드 윙 근처에 있는 다코타 보호구역에서 처음으로 '착한곰여인'이라는 이름의 한 인디언 여인이 부르는 노래를 채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04년 세인트루이스 전람회에서 아파치족의 유명한 전사 추장 '제로니모'를 만나 그의 노래를 채록하게 됩니다. 그때의 일을 그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는 쇠테 안경 뒤의 예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전사라기보다는 철학자처럼 보였다. 당시 제로니모는 전쟁 포로였다. 그는 무려 25년 동안이나 백인 병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불굴의 전사였다.
나는 며칠 뒤 그가 앉아 있는 울타리로 다가갔다. 한 소년이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제로니모의 천막에는 그의 상징인 기품 있는 녹색의 천둥새가 그려져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제로니모에게 내가 그와 악수하고 싶어한다고 말해 줘."
늙은 전사는 주저없이 나의 청에 응했다. 그때 내가 잡은 그의 손은 전사의 손이라기보다는 여인의 손처럼 가냘프고 부드러웠다.
나는 다시 소년에게 말했다.
"제로니모에게 말해 줘. 내가 인디언 노래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한다고."
그러자 쇠테 안경 뒤의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불러 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소년을 통해 거듭 내 의사를 전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는 화살을 손질하며 콧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주위를 끌지 않으려고 그의 뒤에 숨어서 그의 노래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는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리듬에 맞춰 발을 굴렀다. 다행히 전람회에 구경 온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알아듣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들은 한 늙은 인디언이 그저 상자에 앉아 화살을 다듬고 있거니 하며 지나갔다. 그러나 제로니모의 눈앞에는 대평원과 산맥들이 펼쳐져 있었고, 결코 백인들은 그 아름다움을 막을 수 없었다.

제로니모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녀는 1905년부터 틈 날 때마다 여동생과 함께 오지브웨족, 다코타족, 히다차족, 만단족 등의 음악을 채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인디언 음악을 채록하기 시작한 것은 북부 다코타에 있는 수우족 보호 구역에 머물며 그들의 음악을 채록하기 시작한 1911년부터였습니다. 마침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당시 새로 보급되기 시작한 왁스 실린더 녹음기를 그녀에게 제공했던 것입니다. 이 녹음기의 도움으로 그녀는 좀더 수월하게 채록 작업을 할 수 있었음은 물론, 그들의 생생한 노래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테톤 수우족 음악』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그녀의 인디언 음악 채록 여행은 우테족, 포니족, 파파고족, 마카족, 위넨바고족, 메노미니족, 유마족, 아코마족, 모하브족, 야키족, 그리고 멀리 알래스카와 플로리다까지 이어지면서 계속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1957년에 죽을 때까지 여동생의 도움을 받으며 인디언 음악을 채록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마치 에드워드 커티스가 인디언들의 모습을 찍는 데 평생을 헌신한 것처럼. 실제로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사람은 인디언 음악을, 또 한 사람은 인디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작업을 했으며, 두 사람 모두 인디언 문화를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역사에 남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평생 동안 그녀를 사로잡은 인디언들의 음악에 대해 그녀는 한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디언들의 노래는 그들의 삶과 관습의 역사와 전쟁과 종교 의례,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냥꾼은 동물들에게 주술적 힘을 발휘하는 노래들을 알고 있었고, 덫을 놓은 후 동물들에게 그 노래를 들려 주었다. 마을의 아이들은 조약돌을 공중에 던진 다음 다른 손으로 받으며 돌을 잘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내 대장을 따르라'라는 노래를 부르는 다른 아이들과 합세했다. 천둥 번개 꿈을 꾸는 이들은 그들의 얼굴에 천둥의 빛깔인 푸른 반점을 칠하고 태풍의 신비로운 영을 불렀다. 그들은 비를 부르는 힘을 갖고 있었고, 적을 치기 위해 번개를 부를 수도 있었다. 그들의 노래는 활이었고, 불타는 번개는 그들의 치명적인 화살이었다. 종종 사람들이 아플 때면 그들은 환자들이 쾌차할 수 있도록 영적인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들의 조롱박을 흔들었으며, 신성한 주술을 행하였다. 그러면 환자는 나았다. 이른 아침 장밋빛 여명이 천막에 비칠 무렵, 젊은 청년은 천막 옆에 서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연인을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저녁이면 여인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모닥불 근처에 모였고, 그때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토끼는 어떻게 해서 꼬리가 그처럼 짧아지게 되었을까]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인디언들은 그들의 신인 '와칸탕카'를 위한 제단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기도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공터에서는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합창을 하며 몇 시간이고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인디언들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디언들은 보호 구역 생활을 하며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백인들의 방식으로 인디언들의 음악을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았던 듯합니다. 1954년에 쓴 한 글에서 인디언의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인디언 음악에 접근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인디언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인디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우리는 인디언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인디언 음악을 들은 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커다란 북 소리와 거친 노랫소리를. 아마도 인디언들은 우리의 재즈 음악에 대해서도 똑같은 그런 불편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춤에 수반되는 것들이다. 인디언들은 다양한 형식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노래를 번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디언들이 노래를 부르는 방식은 그들만의 것이다. 나는 일찍이 내게 노래를 불러 준 '작은늑대'에게 내가 옮겨 적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를 테니 한번 들어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멜로디는 옳지만, 당신의 목소리는 전혀 인디언답지 않습니다."
인디언들은 결코 예쁘고 아름답게 꾸며 노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인디언들은 결코 많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데 두세 개의 어휘면 충분한 것이다. 그 단어들은 노래의 중간쯤에 나타난다. 노래의 나머지 부분은 그들의 독특한 인디언 발성으로 채워진다. 오마하 인디언은 만한다.
"우리는 노래할 때 많은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많은 '꿈 노래'는 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신령스러운 새나 동물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대평원의 인디언들은 버펄로나 늑대의 영들이 준 노래를 부르고, 북서 해안의 인디언들은 고래의 영이 준 노래를 부른다. 아마도 이런 노래들은 우리 서구인들에게 의미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인디언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노래들 속에서 인간을 돕고자 하는 자연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노래들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킨다. 우리는 자연의 정복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것은 인디언 방식이 아니다.
북서 해안에서 내가 밴쿠버 섬의 서부 지역 출신의 한 여인으로부터 노래를 채록할 때였다. 그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는 "성난 바다야, 조금만 더 부드럽게 파도치거라."하며 성난 바다를 진정시키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사람들에게 "바다가 정말로 사람들에게 성이 났는냐?"고 묻자, 그들은 몹시 놀라서 수군대었다. 잠시 후 통역사가 말했다. "사람들은 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음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데, 어떻게 바다가 우리에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인디언 문화에 깊숙이 배어 있는 자연과의 소통은 그들 음악의 핵심이다. 그것은 우리 같은 이방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심오한 것이다.

그녀는 인디언들의 노래 속에는 인디언 문학의 보고인 귀중한 시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인디언 노래를 채록하며 많은 인디언 신화와 전설, 이야기를 모았고, 각 민족의 음악을 정리해서 책으로 낼 때마다 채록한 곡들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나 민속을 자세히 수록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녀의 저서들은 인디언 음악뿐 아니라 인디언 문학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알려진 많은 인디언 시들은 그녀가 채록한 인디언 악보 속에 들어 있는 시구이기도 합니다.

인디언의 노래 속에는 그들의 시가 보존되어 있다. 한번은 파나마 출신의 툴르족 인디언이 워싱턴에 왔을 때였다. 그가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그 중의 한 노래는 배가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었다.
"돛대에 부는 바람은 새의 노랫소리 같고, 마스트를 치는 소리는 구름 소리 같네."
통역사는 이 노래를 이렇게 해석해 주었다.
"그 말들은 배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족의 노래에는 종종 멜로디 전체를 통해서 장대한 시가 불려지곤 한다. 이 노래말 시구들은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 이삭이나 수확에 관계된 것이거나 그들이 본 자연에 대한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치프와족의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덤불이 나무 밑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통역사에게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나무 밑에 있는 덤불이 그의 신성한 힘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같은 노래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사슴이 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치프와족의 한 노래는 프레이리 들파넹 찾아오는 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 눈이 프레이리 들판에 머물 때
나는 봄 속에서 여름을 느낀다

아직 봄의 징후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데, 인디언들은 그 봄의 공기 속에서 벌써 여름을 느끼는 것이다. 북서 해안의 마카족의 한 '고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나는 걸어온다
두 발로 걷지 않고 파도를 타고서
나는 사람이다

파파고족의 소녀 '코와카'의 성년식에서 불려진 노래에는 그 의미가 알려지지 않은 아래와 같은 시구가 있다.

서투른 사람은 노래를 손에 쥐고
해에게 바치려고 다가가지만
미처 노을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뜨린다
보아라, 코와카야
달려가 그 노래를 손에 쥐고는 노을 밑에 공손히 놓거라


덴스모어는 그녀의 책 『누트카족과 퀼류트 음악』(1939)에서 북서 해안의 누트카족에서 만난 한 늙은 맹인 여인 '토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매우 가난했으며 집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벽을 두드리며 고운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너의 노래를 불러라

이 노래는 이 세상에 내재한 무한한 신성함이 얼굴에 비친 따뜻한 햇살처럼 만져질 수 있음을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찾아오는 것을 늘 기쁘게 맞았으며, 먹을 것을 갖다 주곤 하였는데, 그녀가 가는 곳마다 늘 행복을 선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덴스모어는 많은 인디언들을 만났고, 그들의 음악에 미쳐 평생을 보낸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 덕분에 많은 인디언 음악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인디언 음악과 문화 속에 담긴 그들의 영혼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20세기 초의 파괴된 인디언 문화도 그들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 듯하고요.
그렇긴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그녀가 일생을 바친 태도는 많은 점에서 특별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시의 백인들은 대부분 인디언들의 보닛 모자나 전설 등에만 관심이 있을 뿐 낯설고 거칠어 보이는 인디언들의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만년에는 국회도서관에서 왁스 실린더에 녹음된 2500여 곡의 인디언 음악들을 정리하며 보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인디언 음악 자료들은 현재 스미소니언박물관에 민속음악 자료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그 음악 자료들은 1980년대 이후 인디언 문화가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민속 음악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일부 곡들은 새롭게 리바이벌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New Age)음악의 상당 부분이 인디언 계열의 음악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4년10월호.

 

 

 

노래와 춤 2-서정록  

북미 원주민 이야기

검은 호수 서정록

북미 대평원 인디언들의 하루는 "아침이 되었다!"고 알리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합니다. 외치는 자가 마을을 돌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웅얼웅얼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노인들이 아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노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면 맨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먼 옛 노래서부터 신에게 감사하는 노래 등등. 그러는 동안 마을은 분주해지기 시작하고, 늦잠 자던 아이들도 더는 꾀를 부리지 못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해맞이 준비를 합니다. 그러니까 인디언의 하루는 노래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패스코커디족의 전통 가수인 마가렉 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딜 가든지, 또 어디에 있든지 늘 노래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노래로 모임을 엽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든 모임을 시작하도 닫는 방식입니다.

미국의 민속음악 학자 나탈리에 커티스는 인디언들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시인들의 노래는 대부분 영적인 노래다. 가장 원시적인 리듬과 선율만을 갖고 있으며, 이 가운데 특히 리듬이 매우 발달해 있다. 화음은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생활과 예술은 자연의 소리에 어떤 화음을 부여하고있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그들이 야외에서 부르는 노래는 자연의 소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인디언들의 노래는 바람 부는 탁 트인 벌판과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 들어보지 않으면, 자연 교향곡의 진정한 맛을 느끼기 어렵다. 게다가 어떤 문명의 음악도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복잡하고 세련되며 변화가 심한 리듬을 갖고 있지 않다.

커티스의 지적처럼, 인디언 음악은 가수나 악사의 연주와 바람 소리, 물소리, 새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태풍, 하늘, 그리고 대지 등 자연이 내는 소리가 조화될 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음악이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서양의 음악이 평균율의 토대에서 화성과 선율을 발전시켜 온 것과 크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실내가 아닌 대지의 열린 공간에서 노래를 들으면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 등이 자연스럽게 노래와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들이 그 순간 살아 있는 생명의 노래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인디언의 노래는 우주의 노래, 생명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숨결로 부르는 그들의 노래는 그 자체가 기도이기도 합니다. 에반 티 프리처드는 『시계가 없는 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노래는 대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그리고 그 기도는 대부분 가락을 동반하고 있다.
레ㄴ프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두루마기 '왈룸 올룸(Wallum Olum)'은 노래로 되어 있으며, 티베트의 사자(死者)의 서(書) '바르도'는 죽은 자를 위해 불려지는 노래다. 초기 베다의 찬가들도 특별한 가락과 장단을 지닌 노래로 불려졌다. 초기 기독교의 찬가도 단순한 가락으로 불려지다가 점차 합창곡으로 발전했다.
알곤킨 부족의 기도도 그들의 찬가와 같다. 어떤 노래는 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이젠 그 뜻을 잘 알 수 없는 말로 된 경우가 많으며, 또 어던 노래는 신명 탐구 중에 나타나 조상이나 도움을 주는 영들에게 우리를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인디언들의 음악은 그 어떤 음악보다도 영적인 감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일상적 삶이 기도이듯이, 노래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소통하는 기도와 축복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나무가 몸을 흔드는 것도, 물결이 넘실대는 것도, 바다가 파도치는 것도, 풀잎이 바람에 눕는 것도, 해님이 이 세상에 행복의 빛을 가득 뿌려 주는 것도, 달이 달무리를 만들며 그림자를 만드는 것도, 비가 내리는 것도, 불꽃이 너울대는 것도 모두 춤과 노래가 아닌 것이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존재는 춤과 노래로써, 또는 말로써 그 마음과 영혼을 표현하는 법이라고.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산도 춤추고, 바위도 춤추고, 나무 기둥도 춤추고 노래합니다. 심지어 옥수수 씨앗도 춤추고 노래하지요. 봄이 되면 어서 나를 들판에 심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체로키족의 영적 교사 다이아니 야후는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숨결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고, 숨결은 우리의 신성한 마음을 다른 존재들의 가슴에 실어 나른다고.
인디언들에게 노래는 말로 하는 영적인 행위요, 춤은 몸으로 하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노래는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지요. 말은 숨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요. 그러므로 노래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나의 숨결은 다른 존재들의 숨결과 섞입니다. 그리고 나의 숨결에는 다른 존재들의 숨결이 들어와 있지요. 그렇게 우리는 숨쉬는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숨결은 또한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창조주가 흙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존재에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남서부의 주니족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태초에 생명을 준 것은
바람이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이 불기를 그칠 때
우리는 죽는다.

손가락 끝에서
우리는 바람의 흔적을 만난다.
그곳에서 우리는
맨처음 조상들이 창조되었을 때
불던 그 바람을 본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우리가 평소에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결로 이루어진 말과 노래는 신성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네칠크 에스키모족의 주술사이며 시인인 오르핀칼리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노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나의 숨결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내가 숨쉴 때와 마찬가지로 노래를 부를 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춤을 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춤을 '생명의 숨결이 가시화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추는 춤이 신성한 행위가 될 수밖에요. 하지만 서구인들은 20세기 초까지도 춤을 통해서 다른 존재들과 영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춤은 한낱 축제 때 사람들과 어울리는 유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에게는 파이프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도자기에 동물과 꽃을 그려 넣는 것이나 이른 먼동의 햇살을 들이마시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축복하는 것이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나 모두 바람 또는 생명의 숨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아니 야후는 말합니다. 춤과 노래야말로 숨을 온전하게 쉬는 법을 알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그녀는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연기조차 하늘에 올라갈 때는 나선형 춤을 춘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만날 때면 늘 노래와 춤이 있듯이."
하지만 우리의 숨결이 언제나 노래가 되고 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관계와 기다림과 집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느핀칼리크는 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은 조류에 몸을 맡긴 채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부빙(浮氷)과 같아. 그가 기쁨을 느낄 때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슬픔을 느낄 때도 그의 마음은 부빙처럼 조류에 내맡겨져 있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때로는 그의 가슴을 헐떡거리게 하고, 때로는 그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며 홍수처럼 그를 씻어내기도 해. 그리고 서서히 물러가는 추위처럼 무언가가 그의 내면의 얼음들을 녹게 하지. 그럴 때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지.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들은 결국 제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아. 우리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말들이 문득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얻는 거야.

이것은 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부르는 노래이거나 추는 춤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나와 연결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밀하게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술가들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노래가 탄생한다고 말하지요. 오르핀칼리크 역시 같은 말을 합니다. 노래는 '고독할 때의 친구'라고.

노래는 사상이다. 일상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의해서 내 마음이 움직일 때 나는 숨결로 노래를 부른다. 나의 존재 전체가 노래이며, 내가 숨을 내쉴 때 나는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인디언들의 노래는 종종 침묵의 순간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많은 경우 관객을 의식한 노래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대한 열림, 관계, 충만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 그들의 노래는 남에게는 그저 침묵이나 혼자 흥얼거림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함과 신성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깊은 고독 속에서 솟아나온 이런 노래들은 매우 영적입니다. 한 마디로, 인디언 노래의 진수라고 할 수 있지요. 요즈음 우리의 노래와 춤에는 침묵이 없습니다. 내면의 고요가 없습니다. 열림이 없습니다. 관계가 없습니다. 충만함이 없습니다. 그저 시끄럽고 요란하기 일쑤이지요. 그러나 인디언들이나 제3세계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노래와 춤은 다릅니다. 우리는 수많은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고, 노래와 춤은 바로 그들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 과정은 때론 시끌벅적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지극히 내밀하고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내적 열림과 충만함은 인디언들의 축제인 '파우와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축제라면 으레 떠들썩하기만 할 것 같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고요와 침묵이 있는 것입니다. 프랜 깃털과 리타 로빈슨은 파우와우 축제에서 치는 인디언 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북의 가죽을 치는 소리는 종종 '대지의 고동 소리'로 불려진다. 그리고 그 소리는 춤추는 사람들에게 스텝을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북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 모든 자연과 고대의 것들과 조화 속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가 전통의 춤을 출 때, 우리는 위대한 전사들의 자부심과 할머니들의 온화한 아름다움과 만나게 되고, 우리의 유산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 발을 구를 때마다 우리는 발 밑에서 어머니 대지의 배꼽을 느낀다. 어머니 대지는 힘과 용기와 원주민들의 자부심을 보내주고, 그것은 우리의 몸을 통해 흐른다. 우리는 발바닥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그것을 느낀다.
춤을 출 때 걸치는 긴 숄의 술들은 내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이전의 세대들과 춤을 출 때 나의 가슴에서 출렁이며 나부낀다. 저도 춤을 추는 듯이, 나의 딸들은 마을 부인들의 둘레를 돌며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의 시윽러운 젊음과 아름다움을 부인들의 노년의 지혜와 섞는다.
춤추는 동안, 나는 이 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 어떤 화려한 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땅에서 사람들과 이렇게 어울리며 사는 삶 이외의 어떤 삶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렇게 창조의 움막에서 함께 만난다. 그 때 북의 고동 소리는 우리의 심장 박동 소리가 되고, 심장 박동 소리와 창조의 이야기는 하나가 된다. 젊은이들의 노랫소리는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 소리, 그리고 우리에게 옥수수를 가져다 준 태양의 불꽃과 한데 섞인다. 우리는 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북의 고동 소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왔는지 말해 주는 소리다. 우리가 다시 모여 하나가 된 것을 기뻐하는 소리다. 그리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자연의 법칙에 우리가 변함없이 헌신하는 것을 축복하는 소리다.

이처럼 인디언들의 노래와 춤은 의미 없는 발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하나하나의 행위가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과의 만남과 교섭과 소통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인디언 사회에서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서남부 인디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비구름은 조상들의 혼령이 자손들을 위해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은 뒤 비구름이 되어서 온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비구름은 바로 자손들을 위해 비를 뿌리기 위한 조상들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생전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춤과 노래도 부르지 않으며 외톨이로 지낸 사람들은 죽은 뒤 비구름이 되어 오지 못하고, 마른하늘에 조각구름이 되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자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돌아오긴 하지만 비를 내리는-다시 말해 축복을 내리는-먹구름은 되지 못하고, 솜털 같은 조각구름이 되어 빈 하늘을 홀로 쓸쓸하게 떠돌다 돌아간다고 말하지요.
이 이야기 뒤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춤과 노래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먹구름과 같은 영적인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세네카의 영적 교사인 한밤중의 노래 같은 이는 인디언들의 춤과 노래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하게 해 주는 동시에 삶의 생기를 북돋워 주는 놀라운 영적인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춤과 노래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행위라고 말이지요.

*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4년11월호

 

 

 

노래와 춤 3- 서정록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자기의 노래와 춤을 갖고 있다고. 그래서 너의 노래를 부르라고, 너의 춤을 추라고 말합니다. 우테족 주술사 찰리 나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다 노래를 가지고 있어. 신은 우리에게 각각의 노래를 주었지.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방법이야. 우리의 노래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 주거든. 물론 다른 노래도 있어. 다른 존재에는 다른 노래가 있듯이. 이를테면, 어떤 것은 춤을 위한 노래고, 어떤 것은 부르기 위한 노래고, 또 어떤 것은 치료를 위한 노래식으로 말이야.

그래서일까 인디언들은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비가 노래한다고, 춤춘다고 말하고, 바람이 부는 것을 바람이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산이 웅얼대는 소리를 산이 노래한다고 말하고, 바다가 파도치는 것을 바다가 춤을 춘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우가 우는 소리를 여우가 노래한다고 말하고, 늑대가 우는 소리를 늑대가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콩이 노래한다고, 풀이 노래한다고, 나무가 노래한다고, 춤을 춘다고...
그런데 인디언들의 신화에 의하면 식물들은 동물들을 치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원주민은 많은 치료약을 식물로부터 얻습니다. 이 점은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에 의하면, 이 식물들은 치료의 힘을 영적인 노래와 춤을 통해서만 드러내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페루의 메스티조인들은 치료의 힘을 갖고 있는 모든 식물은 그 각각의 노래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식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거나 영적 반응을 보일 때면, 그 식물은 신명(vision)이나 꿈 속에서 그 노래를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이 치료의 노래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데, 식물의 노래를 부르면 그 식물의 영과 치료의 힘이 깨어나 도와준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물론, 제3세계 원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약초를 가지고 치료할 때 반드시 신명이나 꿈 속에서 영이 가르쳐 준 노래와 춤을 춰야만 치료의 힘이 제대로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식물이나 동물의 영이 가르쳐 준 영험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지 않으면, 약초를 써도 효험이 없거나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춤추는 치료사들』의 저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해머쉴라그가 근무하던 산타페의 인디언 병원에 산토도밍고 출신의 푸에블로 추장인 산티아고가 출혈성 심장 질환으로 입원했을 때 일입니다.

갑자기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내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치료하는 법을 배웠나?"
나는 이 노인에게 나의 학교 졸업장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의학 수업과 인턴 과정과 자격증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말했다.
기쁨에 넘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춤추는' 법을 아는가?"
노인의 질문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의 침대 옆으로 가서 스텝을 몇 발작 밟아 보여 주었다. 산티아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그의 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을 치료하려면 먼저 춤을 출 줄 알아야 하지."
그가 말했다.
"그러면 내게 당신의 춤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나는 나이든 사제에게 버릇없이 물었다. 산티아고가 고개를 끄떡였다.
"좋지. 그대에게 내 춤을 가르쳐 줄 수 있고말고. 하지만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의 노래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네."

여기서 사제가 춤추는 법을 가르쳐 주기 전에 먼저 너 자신의 춤을 추라는 말은, 먼저 너 자신의 노래를 부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너의 춤과 노래를 부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요?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춤과 노래란 영적인 춤과 노래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영적인 춤과 노래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북미 인디언이나 시베리아의 소수 민족, 그리고 제3세계의 원주민들이 말하는 영성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 개념에 기초합니다. 첫째로 모든 존재는 생명(영혼)을 갖고 있으며, 둘째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셋째로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으며, 넷째로 각각의 존재는 그 관계를 통해서 영적인 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제각각의 영적인 길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노래와 춤을 부르라는 말은 곧 너의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 만일 살고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라는 말입니다. 산티아고 추장의 말은 이처럼 '네가 온전한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하는 근본적인 물음인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길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영적인 삶이 담긴 노래와 춤을 배운다는 것은 자칫 그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길을 가려는 사람은 우선 먼저 자신의 영적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나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왔으며, 이곳에서 할 일이 무엇이며, 내가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신명 탐구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치프와족 주술사 태양곰 또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대지와 모든 생명에 대한 너의 참된 관계를 찾은 뒤에야, 너는 비로소 너 자신의 춤을 출 수 있다. 일단 네가 네 자신의 신명을 찾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늘 너의 삶을 앞으로 이끌어 주는 무엇인가가 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노래를 갖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존재는 자신의 영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메시지며, 아울러 자신의 영적인 길을 가는 모든 존재들을 진심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이 아이들에게 풀벌레보다도 자신을 낮추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하찮은 미물처럼 보이는 벌레일망정 그들 또한 자신만의 영적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벌레만 그런가요. 해와 달, 별, 동물과 식물, 산과 강 등 우리 주위에는 자신의 영적인 길을 가며 우리를 밝혀 주는 존재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노래와 춤은 영적인 세계를 여는, 또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와 같은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호족의 영적 교사인 메리 리트카는 "노래는 영적인 세계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노래는 영적 세계와 대화를 하게 해 줘요. 모든 노래에는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모든 노래는 중요해요. 내가 강가로 내려갈 때면 부르는 열매들의 노래가 있어요. 몸을 감추고 싶을 때는 그곳에 캠프를 쳐요. 이 노래는, 그것은 슬픈 노래예요.
하지만 그것은 의미를 갖고 있어요. 그것이 말해요.
"열매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 덤불들의 소리가 들려. 덤불들이, 장과들이 오고 있다고 내게 말해. 덤불들의 소리가 들려. 그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려. 나무 열매들의 냄새가 나. 딸기와 연어알의 냄새가 나. 덤불들이, 열매들이 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덤불들이, 열매들이 오고 있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열매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

또한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돕는 중요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인디언들이 작물이 잘 자라라고 노래를 불러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그들은 밭 가장자리에 간단한 원두막 같은 것을 지어 놓고는 그 위에 걸터앉아 틈나는 대로 노래를 불러 줍니다. 그런가 하면 병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도 그가 영적 세계로 가는 것을 돕기 위해 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음은 메리 리트카의 할아버지가 죽은 딸을 위해 노래를 부른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받은 것은 그 분의 딸들 중 하나가 죽었을 때였어요. 그 노래는 할아버지의 딸이 신령 세계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노래였어요. 노래는 신령 세계와 대화를 하게 해 주거든요.
할아버지는 슬픔 속에서 강가에 내려가 3일 동안 있었어요. 그 때 문득 나무들 꼭대기에 카누가 얹혀져 있는 것이 보이더래요. 카누에는 할아버지의 딸이 타고 있고요. 그런데 웬 남자들이 나타나더니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그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더래요. 그러고는 카누를 저어 저승으로 가더래요. 너무도 슬픈 노래예요.

북미 인디언들이 부르는 이런 영적인 노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적인 용도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성원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인류학자 로딩턴은 브리티시 콜롬비아에 사는 비버 인디언들의 두 가지 노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래가 갖고 있는 영적인 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신명 탐구 때 동물 영들이 주는 영적인 선물인 머윈(m-yine)과 샤만의 노래인 마하타윈(mahata-yine)이 그것이다. 마하타윈은 샤만 의례를 통과한 자,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때문에 마하타윈은 영적인 능력을 가진 샤먼에게만 주어진다.
머윈은 일종의 사적인 보호령으로, 나와 가족, 친구를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필요한 음식을 제공하는 영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불려진다.
머윈의 힘은 그 힘을 사용하는 자의 마음 씀에 따라 선한 일에도 나쁜 일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 마하타윈의 힘은 언제나 선한 일에만 사용된다. 때문에 공동체의 각종 의례에서는 샤만의 마하타윈만이 불려진다.

이런 샤만의 노래는 공동체 의례의 주요한 노래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노래는 워낙 영험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계승한 사람만이 부를 수 있지요. 메리 리트카가 부르는 노래들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개인에게 사적으로 주어진 노래 또한 마하타윈 만큼은 아니지만 영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래들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부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가족 간이나 가까운 사람들 간에 대를 이어서 전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디언들이 신명 탐구를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사실은 자신의 신성한 노래와 춤을 갖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과 북서 해안 지역의 인디언들, 이를테면 우테족, 네페르스족, 살리쉬족 등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들은 겨울이 되면 여러 날씩 춤축제를 엽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신명 탐구나 꿈을 통해 신성한 노래와 춤을 얻은 사람들이 그들의 춤과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발표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춤과 노래를 추는 것을 보고는 어떤 영이 와서 도움을 주었는지 압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신명 탐구를 할 때, 그것은 사적인 노래와 춤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행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하타윈의 신성한 노래와 춤을 얻기 위해, 그리하여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신명 탐구를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을 보호하는 영을 얻거나 사적인 노래와 춤을 얻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영적인 수준이 높다고는 하지만 샤만이나 주술사와 같은 탁월한 영적인 능력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네페르스족의 유명한 전사 추장인 조셉 추장이 어렸을 때 신명 탐구에서 받은 춤과 노래를 겨울 춤축제 기간 동안 둥글게 모인 사람들 앞에 나가 발표한 이야기입니다.

겨울 어느 날, 그의 아버지 투엑카카스 추장이 임나하 계곡에 캠프를 쳤을 때, 전령의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여, 모든 것을 내려놓으세요. 이제 위대한 신령의 춤을 추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의식은 자연과 사람과 동물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신성한 것으로, 사냥이 잘 되고 따뜻한 날씨가 오기를 비는 의례였다. 곧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의례에서 입을 가장 좋은 옷을 준비하느라 바삐 서둘렀다. 그들은 저녁 때 춤을 출 수 있는 대형 천막에 모였다. 두 개의 모닥불에서 연기가 10m 가까이 올랐고, 천막 안은 겨울 춤축제를 하기에 적당할 만큼 따뜻해졌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나자 한 전사가 북의 반주 없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춤추기 시작했다. 곧 다른 사람들도 노래를 부르며 그와 합세했다. 그들은 천천히 노래에 맞추어 리듬을 타며 발을 끌었다. 늑대의 가죽을 반쯤 뒤집어쓴 그는 몸을 구부린 채 늑대의 동작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곧 춤추던 전사는 엑스터시 상태에 빠졌다.
마침내 어린 조셉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둥글게 둘러앉은 마을 사람들 안으로 나오며 위대한 신령이 그에게 가르쳐 준 신성한 노래를 불렀다. 춤을 본 사람들은 위대한 신령이 그를 '힌무투야라트케크트'란 이름으로 축복해 주셨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높은 산정으로 굴러가는 천둥'이란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어린 조셉은 부족으로부터 신성한 이름을 받았다.

이로쿼이 연합의 사람들 역시 겨울 축제 때, 그 해에 꿈에서 받은 춤과 노래를 공개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춤과 노래를 갖는 것은, 그리고 그 춤과 노래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축복이요, 행복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축제에서 대개 자신의 춤과 노래를 부릅니다. 축제란 자기의 노래와 춤을 가지고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나누고 하나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두발로선곰은 대평원 인디언들의 춤 문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디언들은 춤추기를 원한다! 춤은 그의 헌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보이지 않는 힘과 교류하는 방식이며,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아베니키족의 후예인 에반 티 프리처드는 『시계가 없는 나라』에서 인디언들의 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 인도인들에게 시바의 춤은 마하무드라, 즉 '위대한 몸짓'이었지만 오늘날 무드라는 단지 표식이나 수인(手印) 등의 상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베다 시대의 '신적인 언어'는 본래 몸짓이나 의례를 뜻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인 말이나 옴(OM) 소리 같은 것을 나타내게 되었다.
하지만 알곤킨인들에게 몸짓은 여전히 '신적인 언어'이다. 너무도 성스러워 사진조차 찍을 수 없는 '독수리 춤'이 아마도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독수리 춤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추어지는 만큼 그 형태도 다양하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모두 신명이나 기도를 체현한 것들이며, 그것들을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움직임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수리 춤은 '명예로운 춤'이라고 불리며, 노래와 함께 주로 사람들과 세상의 일들을 명예롭게 하는 데 사용된다.
독수리 춤 외에도 많은 명예로운 춤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사람들이 선물로 받은 모자나 허리띠, 모카신 등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추는 춤이 있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선물로 받은 물건을 입거나 쓰고서 춤을 춰 그것을 명예롭게 한 뒤에야 비로소 그 선물을 자기 것으로 인정받는다.
춤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말이다. 그래서 춤은 인디언들의 삶의 근원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춤은 몸으로 쓴 시(詩)다. 또한 춤은 균형과 나눔과 관계와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전통을 상징한다.

오늘날 많은 노래와 춤이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노래와 춤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영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인디언들이 깊은 침묵 속에서 신령의 숨결을 찾아 노래하듯이, 우리의 춤과 노래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균형과 조화 속에서 우러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들을 축복과 평안과 조화로 안내할 수 있을 겁니다.
인디언들의 이러한 춤과 노래에 대한 영적인 지혜는 놀랍게도 고대 이슬람의 고대 이슬람의 수피 문화에서도 공유했던 듯합니다. 수피 교도라면 빙글빙글 돌며 무아지경에 드는 사마춤(Sama Dance), 또는 회전춤(Whirling Dervishes)으로 유명하지요. 다음은 수피 문화의 『빛의 네번째 책』을 읽고 난 뒤, 그 지혜를 시로 옮겨 본 것입니다.

노 래

모든 존재는 그 안에 노래를 가지고 있다
오직 내면의 존재만이 빛과 소리와 떨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느니
신성한 악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듣기와 봉사다
바람에는 노래가 있다
우리의 숨결 속에도 노래가 있다
말을 치워 보라. 그러면 그대는 시인이 될 것이다
그대의 목소리를 바꾸어 보라. 그러면 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소리를 내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곡조를 갖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대의 내면의 노래를 불러라
그러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가슴 속의 노래는 우리가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파괴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해 준다

그대의 노래를 불러라. 그대 가슴의 제단에 있는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노래하는 자는 하늘에 가지 않느니
대신 하늘이 그에게로 내려온다

영적인 여행은 노래의 집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영혼이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은 오직 춤과 노래를 통해서다
그 때 우리의 육신 또한 떨며 노래를 부르리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2004년12월호

 

 

 

기억의 영적인 의미-서정록  

북미 원주민 이야기 18

검은호수 서정록

북미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사는 이유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확장하고, 모든 존재와 하나 되기 위한 것이라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덧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먼 과거로부터 현재는 물론 먼 미래까지 이어져 있는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아마도 영성, 또는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영성, 또는 영혼에 대해서 말할 때는 현재의 삶 못지 않게 과거의 삶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영적인 길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인디언 영적 스승들이 삶의 여정을 가리켜 'remembering'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remembering은 정확히 're-membering'을 뜻합니다. 여기서 're-'는 '다시'란 뜻이고 'membering'은 그 자체로 '기억하기'의 뜻도 있지만 '구성원이 되기'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remembering이란 말 속에는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살려내고 재구성하여 영적으로 온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re-membering의 과정이 우리의 일상적인 지식과 인지 과정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도 갓난아이 적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걸음마를 떼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5,6살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어린 시절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의 측면에서만 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산 날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교사들은 여기서 다시 '전생(前生)'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는 분명 어딘가로부터 이 곳으로 온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어딘가'에서의 삶이 바로 전생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 '어딘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 '다가라'라고 하는 부족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여인이 임신을 하면 마을의 영적 교사를 모셔 옵니다. 그리고 임산부 앞에 마주 앉아서 뱃속에 든 아이와 대화를 합니다.

너는 누구니? 어디서 왔니? 왜 이 곳에 오려고 하니? 이 곳에 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니?

그러면 뱃속에 든 아이는 영적 교사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자신은 아무개고, 이러이러해서 이 세상에 오고자 한다고... 그 후 아이는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조상님이 다시 오셨다고 정성껏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들의 영은 맑은 호수처럼 투명하지요. 그러나 커 가면서 아이들의 영이 차츰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가라 부족에서는 아이들이 사춘기에 이르면 성년식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영적 교사에게 했던 말을 다시 기억하도록 일련의 의례를 행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와 이 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다시금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영적 교사들은 현실 세계의 저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세계에서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해도 영혼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두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계와 관계된 의식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혼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는 개별적 존재들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그에 견주어 영적인 세계는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존재들을 관통하여 흐르는 생명의 에너지처럼. 따라서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는 우리의 존재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를 관통해서 흐르는 생명력, 우주 생명과 같은 것이 없다면, 개개의 생명들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양자의 존재 방식과 인지 방식은 다릅니다. 전자는 우리의 몸의 감각과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인지를 하지만, 후자는 영혼을 통해서 인지를 합니다. 인디언들은 이것을 종종 '느낌' 또는 '직관'에 의한 인지 방식이라고 말하지요. 이 때 느낌은 개별 감각에 의한 지각이 아니라 감각 전체와 마음이 동시에 작용해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지 방식은 고대인들이 숨결이나 피를 통해 영성을 이해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이 후자의 방식에 매우 서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 영적 교사들은 영성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침묵과 명상을 권합니다. 침묵과 명상은 느낌과 직관의 힘을 길러 주고, 궁극적으로 두 차원의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영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인디언들이 중요시하는 '꿈'과 '신명'도 그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이해가 가능합니다. 허나 영적인 성장은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지요. 오직 자기 자신이 영저긍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선택함으로써만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remembering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성장이라고 하면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고, 한 개인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말이지요.그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 하면 개인이 없는 집단이란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개인의 삶이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신이 그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그의 재능과 가족 관계와 환경, 사회적 조건 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그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을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에 대해 인디언들은 견해가 좀 다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영적인 성장은 개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단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아이들이 영적 성장을 위한 길을 가기 전에 먼저 조상들이 남겨 준 신화나 전설 등을 들려 줌으로써 기억이 갖고 있는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하자면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신화나 전설 등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remembering을 하는 가장 중요한 지혜의 축적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겨울철 움막 안에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어르신들이 아이들과 마주 앉아 들려 주는 이야기 마당은 매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세네카족'의 영적 지도자들이 들려 주는 '네 가지 선물'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이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고 수많은 존재들을 만드셨단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있는 대로 듬뿍 주었지. 그것이 신의 첫번째 선물이야. 그런데 이 세상의 존재들이 받는 것만 알고 주는 것은 모르는 거야. 그래서 신이 안 되겠다 싶어 각각의 존재들을 둘로 나누어 남자와 여자가 되게 한 거야. 암컷과 수컷으로 말이지. 그렇게 해서 각자가 주는 자이면서 받는 자가, 받는 자이면서 주는 자가 되게 하셨단다. 그게 두번째 선물이야.
그런데 신이 보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이 세상의 존재들에게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지. 말이란 서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이잖아.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행복해지게 되거든. 그렇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마음을 함께 나누라고 말을 주셨지. 그게 세번째 선물이야.
하지만 말이 있어도 매일 같은 말만 하면 재미없잖아. 또, 내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라면 무슨 발전이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래서 각각의 존재들이 내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직관의 힘을 주셨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것이 바로 네번째 선물이야.
이렇게 신이 네 가지 선물을 주신 다음에야 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단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북미 인디언들의 영적인 지혜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존재가 모두 신의 창조에 동참하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不移者)'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나보다는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화와 전설 속에는 이처럼 신의 태초의 창조 이야기는 물론,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토끼의 귀가 왜 그렇게 길어졌는지, 곰은 왜 그렇게 꽁지가 짧은지, 해와 달은 어떻게 생겼는지, 왜 그처럼 낮과 밤으로 교대로 뜨는지, 또 산과 강은 왜 생겼으며, 또 어머니 대지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 등등, 이 세상의 온갖 현상과 관계에 대한 영적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세네카 인디언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들 중에는 또 다음과 같은 고래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지가 생겨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야. 많은 수생 생물들은 뭍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물 속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했지. 고래도 그렇게 바다에 남았어. 그런데 어린 고래 한 마리가 뭍 위의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어하는 거야. 그는 바위로 된 해안선을 따라 들어가다가 바위에 고대인들이 기록해 놓은 글을 발견했지. 어린 고래는 그 글이 고대의 조상들이 남겨 놓은 글임을 단번에 알았어. 왜냐 하면, 고래는 어머니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임무를 가졌기 때문이지.
어린 고래는 바다로 돌아와 어르신 고래에게 그가 본 것을 말씀드렸어. 그러자 어르신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거야.
"네가 발견한 것을 알려 줄 만한 친구를 찾아보거라."
그래서 어린 고래는 다시 그 해안가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 발 달린 사람 한 명을 만났지. 그는 고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 어린 고래는 그 사람과 물가에서 헤엄을 치며 많은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자 그를 고대의 조상들이 남겨 놓은 글이 있는 그 바위로 데려갔지. 바다의 물이 빠지자 마침내 고대의 조상들이 그 곳에 적어 놓은 글이 수면 위로 떠올랐겠지. 두 발 달린 사람은 그 글을 통해서 비로소 고래가 두 발 달린 사람의 조상이라는 것과 고대애는 동물들과 새들 또한 사람처럼 말하고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과 똑같이 대화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또, 식물들도 소리와 에너지를 통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도...
그렇게 우리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존재 방식만 우리와 달랐지, 모두 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야.

대지 어머니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고래는 이렇게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것을 인간에게 알려 주었고, 우리는 비로소 인간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와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기억이 갖고 있는 이런 영적인 의미의 압권은 단연 세네카의 영적 교사 '트윌라 니치'가 들려 주는, '돌 부족(stone tribe)'의 영적 교사 '기육'이 들려 주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1991년에 『우리 이전의 또 다른 위원회의 불꽃』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바 있는 이 이야기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려서 부족의 추장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돌(stone)의 언어'에 대해 틈틈이 배워 돌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트윌라 니치는 성장해 부족의 주술사가 된 어느날, 일곱 모가 난 돌 부족의 주술사 기육으로부터 우주의 창조와 인류의 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태초에 이 세상에는 텅 빈 공간만이 있었어. 그 때 구름 같은 것이 일어나면서 창조에 필요한 빛과 생각과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 신은 영원한 대지를 만드시기 전에 먼저 물질에게 '듣는' 힘을 선물로 주셨어. 그런 다음에야 영원한 대지와 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거든. 그 다음에 해와 달이 만들어졌지. 그제야 낮과 밤이 생기고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그 때 신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거야. "너는 앞으로 기육이라 불릴 것이다. 너는 '돌 사람'이니, 이제부터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대지 어머니의 지혜를 알고 싶어하는 존재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 주거라." 그렇게 해서 나는 우주의 창조와 대지 어머니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존재가 되었지. 그리고 이 세상이 창조되기 직전에 열린 '첫번째 부족 위원회'에도 참가했어. 그 회의에는 '하늘 사람'들이 주로 참가했거든.
그 첫번째 부족 위원회에서 마침내 우리의 여섯 형제 부족의 창조를 결정했는데, 그 여섯 부족은 '식물 사람', '동물 사람', '곤충 사람', '땅 위를 기어다니는 사람', '물고기 사람', '날개 달린 사람', '두 발 달린 사람'이야.
마침내 신이 여섯 형제 부족을 차례로 창조하셨는데,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야. 하늘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영혼만 있고 몸과 가슴은 없거든. 그 하늘 사람들이 지상의 형제들처럼 몸과 가슴을 가지고 그들처럼 느끼고 나누고 경험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적인 지혜의 선물을 가지고 다투어 지상의 형제들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거야. 그드로가 하나 되기 위해... 그들은 몸과 가슴이 없는 영적인 존재만으로는 성장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 기꺼이 지상의 존재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이지. 마치 하늘에서 축복처럼 쏟아지는 비처럼 말이야. 그 하늘 사람들의 영적인 지혜 덕분에 지상의 여섯 형제 부족들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지.
그렇게 해서 드디어 첫번째 세계가 창조되었어. 그 첫번째 세계는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였지. 세상은 아름다움과 영적인 지혜가 넘쳐났어. 대지에는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들과 동물들, 그리고 새들로 가득했고, 강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행복하게 뛰어놀았지. 물론 두 발 달린 사람도 함께 말이야. 그 때 두 발 달린 사람 속에는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함께 공존했어. 그렇게 그들은 두 발 달린 사람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배웠지.
그리고 나는 '노그'라는 최초의 인간 친구를 갖게 되었지. 나는 그에게 다섯 피부 색깔을 가진 인간의 임무에 대해 말해 주었어.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최초로 내적 평화와 성장을 위한 의례들을 마련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갈색 피부를 가진 인간은 어머니 대지의 기록과 생존을 위한 본능적 지식을 갖게 될 거라는 것, 그 다음 붉은 피부를 가진 인간은 어머니 대지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들의 충실한 보호자가 될 거라는 것, 노란 피부를 가진 인간은 새로운 지식 체계를 세우게 될 거라는 것, 흰 피부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진리와 공정함을 가져오게 될 거라는 것 등등을 말이지.
첫번째 세계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어. 모든 존재가 말이 없이도 자유롭게 서로 대화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 서로가 공경하면서 말이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언어(Hail-lo-way-an)'라고 불러. 아직 인간의 언어가 태어나기 전이지. 침묵과 몸짓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어. 그 때는 하늘에 평화의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진정한 '아름다움의 길'이었지.
하지만 인간들 중에는 탐욕과 야망과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첫번째 세계는 '굽은 길'을 가는 그들 때문에 불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지.

그렇게 기육은 그 다음 얼음에 의해서 멸망했던 두 번째와 물에 의해서 멸망했던 세 번째 세계의 비극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움의 길을 잃어 갔던가를, 그리고 어떻게 사랑의 언어를 잃어 갔던가를... 그런 다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분열과 갈등의 네 번째 세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세계는 태초의 신이 이 세상에 내려 주셨던 사랑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대신 분노의 신들이 지배하는 종교들이 나타나 군림하게 되었지. 그리고 물질의 소유와 축적이 성공을 결정하는 상징물이 되었어.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영적인 삶을 잃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갔지.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에 감사하는 법을 잊어버린 거야. 어머니 대지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그뿐이 아니야. 서로 다른 피부를 가진 사람들끼리 갈라지고, 나라와 나라 사이도 갈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갈라지고... 그렇게 서로 분열하고 대립해. 때문에 이 세계는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거야. 지금이 바로 그 전환점이지. 곧 지축의 이동과 회전이 있을 것이고, 바다에는 큰 혜성이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되겠지. 그렇게 해서 다음 세계인 제5세계로 넘어가게 될 거야.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그 이전의 세계들이 닫혔다가 새로 열렸던 거와 달리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제5세계로 넘어갈 거라고 해. 제4세계 말에 평화를 사랑하는 '무지개 사람'들이 출현했기 때문이지. 제5세계는 평화의 힘이 다시 물질의 힘을 넘어 일어나는 세계거든. 그렇게 제6세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제7세계에 이르면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올 거라고 해.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되찾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우리가 한낱 무생물이라고 여겼던 돌멩이-사람의 주술사인 기육은 이렇게 자신이 태초부터 보고 들은 조상들의 이이기와 인류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 트윌라 니치에게 자세히 들려 줍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사는 제4세계가 인류의 영적 역사에서 전환점(tuning point)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인류는 태초에 신이 주신 사랑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물질과 지식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부터는 인류가 새로이 평화와 영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위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기육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re-membering, 기억의 중요성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기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제2세계라고 합니다. 제1세계가 불의 정화로 멸망하면서 태양도 비취지 않아 제2세계는 얼음으로 가득 찬 빙하의 세계가 됩니다. 자연히 사람들은 지하의 동굴에서 생활하게 되고, 추위와 싸우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어려운 시절을 맞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제1세계에서 신이 인간에게 주셨던 지혜들을 회상하며, 그 기억의 조각들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남아 있는 영적 장애들로 인해 인류는 몇 번에 걸친 시련을 맞게 되고, 그 때마다 세계는 닫고 여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제2세계에서 re-membering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이후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지식을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조상들의 삶으로부터 현재와 미래의 삶의 지혜와 가르침을 얻는 중요한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태초에 이 세상은 아름다움과 사랑이 가득 찬 곳이었기에... 그렇게 모든 존재가 하나가 되어 행복했기에...
그런데 그 기억은 언제나 우리 내면의 침묵과 명상으로부터만 찾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지적인 머리만으로는 그 기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침묵을 하며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참된 지혜와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침묵 속에서만, 느낌과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신화와 전설 등 이야기 속에는 깊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아마 우리의 옛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모두 다 이 세상의 삶은 나 한 개인의 삶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주 차원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한 개인의 영적인 깨어남은 곧 이 우주의 역사와 그 안에 살았고, 또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무수한 존재들과의 영적인 만남이라는 것, 그들과 하나 됨이라는 것, 그 만남의 중심에 바로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정확히 re-membering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것은 다른 말로 본래의 온전한 모습,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우리에게 주셨던 그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던 시절의 참 모습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1월호.

 

 

 

관계, 그 동시성의 세계-서정록  

북미원주민 이야기 19

관계, 그 동시성의 세계

북미 인디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움직임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바람, 흐름, 결, 떨림이라 생각했지요. 우리의 조상들도 같습니다. 그래서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은 "이 땅에 아름다운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포함삼교(包含三敎)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하니..."라고 하셨지요. 이런 풍류적 사고는 고구려 벽화와 이 땅의 고대 유물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풍류적 사고는 관계적 사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우리는 주관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주장을 내세우고,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나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풍류의 문화, 즉 관계의 문화, 생명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전통 세계나 제3세계에서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높입니다. 그리고 나를 낮춥니다. 왜냐 하면, 모든 존재는 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중한 존재이듯이 상대 또한 나 못지않게 귀중한 존재이기에... 이 세상은 그렇게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가진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 관계와 상호 의존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그 하나하나의 존재가 주인이며, 소우주며, 신적 존재인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이러한 사고에 대해 '원(circle)'의 상징을 가지고 말합니다. 원 위에서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또, 시작과 끝이 따로 없습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가 모두 주인입니다. 주인이되, 과정에 있습니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전체에 변화가 옵니다. 그래서 주인이되, 과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정이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만나고 섞이고 흩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북미 인디언들은 물질 역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수고해 거둔 식량이라도 위대한 신령이 가족과 이웃과 함께 나누어 쓰라고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나눔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선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고, 영혼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식량이나 재물을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사회에서는 물질이 돌고 돕니다. 서구 사회에서 선물이 종종 'give and take(주고받기)'의 대상이 되어, 일종의 거래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직 '기꺼이 나누어 줄(give away)'뿐,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성 프랜시스가 말한 것처럼 나누어 줌 속에 이미 '받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그것으로 이미 행복합니다. 더 바랄 게 없는 거지요. 더 바란다면 그것은 기꺼이 줌이 아니라 거래를 위한 줌일 뿐입니다. 그저 좋아서, 그저 감사해서 줄 뿐입니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나눌 선물이나 재물이 생겼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렇게 선물은 돌고 돕니다.
그렇게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는 모든 게 원 위에 있습니다. 사람도, 동식물도, 해도, 달도, 재물도, 모두 원 위에 있습니다. 산과 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또한 같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에 다른 존재의 숨결과 섞여 돌고 돕니다. 그렇게 원은 계속 확장해 갑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의 영혼 또한 성장해 갑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원', '원 안의 원'입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원 속에서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맺습니다. 주인으로서, 나그네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원으로 순환합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과 영혼 또한 병듭니다. 영혼이 병들면 몸이 성할 수 없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또한 기울거나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성할 수 없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또한 기울거나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원은 언제나 균형과 조화의 법칙을 그 안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원은 가정에서는 가족을 보살피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확대됩니다. 어머니는 살림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세대와 세대를 잇는 중심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이을 아이를 낳기 때문이지요. 이런 연유로 인디언들은 어머니의 모성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대지의 어머니로 연결됩니다. 대지의 어머니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실어 기르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인디언들이 말하는 '자연의 법'은 바로 이 어머니 대지의 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디언들이 말하는 원은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균형과 조화를, 평등과 상생을, 주인인 동시에 텅 빈 자리를 가르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원한 의미를 갖는 원의 핵심은 언제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나 혼자 주인 되는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주인되는 세상, 그래서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세상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곤충, 돌멩이, 심지어 먼지, 티끌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원은 존중을 가르칩니다. 라코타족의 추장이며 말하는 자였던 '고귀한 붉은 얼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원은 신성한 힘을 갖고 있다.
원을 그리고 앉을 때,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원을 그리고 앉으면, 누구도 당신 앞에 있지 않고 누구도 당신 뒤에 있지 않다.
누구도 당신 위나 아래에 있지 않다.
원을 그리고 앉아 기도하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다.

생명의 고리 역시 하나의 원이다.
이 둥근 고리 속에는 모든 종족, 모든 나무, 모든 식물을 위한 각각의 자리가 있다.
이 지구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의 그 완전성을 존중해야만 한다.

존중한다는 것은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대결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하지 않는 것이고, 놀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어른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다.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훔치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화가 나서 소리치거나 나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존재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다.
그것은 모든 삶을 위한 것이다.

그대가 한때 자유로웠음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그대가 한때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다.

이 관계의 문화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축하해 줍니다. 그 생일이란 그저 달력에 있는 몇 월 몇 일일 뿐입니다. 오직 숫자적인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 역시 태음력을 사용하므로 날짜를 기억하자면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으련만 그들은 몇 월 몇 일식으로 생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옥수수꽃이 필 무렵 태어났다든지, 첫눈이 오던 날 태어났다든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태어났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또는 딸기가 익는 날 태어났다든지, 눈이 녹는 날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전쟁터에 나가 죽은 아들의 생일을 묻는 백인에게 대답하는 한 노인처럼...

음, 그것이 정확히 몇 월 몇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 날을 기억할 수 있어.
그것은 그 해 늦은 봄,
달콤한 옥수수가 막 한 뼘쯤
땅 위로 올라왔을 때야.
그 애는 그 날 태어났어.

그러므로 그들은 생일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태어날 무렵 자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디언들에게 생일이 우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 현상의 변화를 통해서 그 아이의 삶에 어떤 조짐이 있을지, 또는 어떤 축복이 있을지를 가늠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신성한 상징으로 삼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기에.
자연히 새해 첫날을 말하는 방식도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양력이나 음력 1월1일을 설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수적으로 새로 시작하는 의미만을 가질 뿐입니다. 동양의 역법은 조금 달라서 동짓달에 벌써 천둥번개가 땅 밑에서 꾸르릉거린다고 말하지만, 역시 천문상의 변화를 시작의 기점으로 삼는 점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아니 이 땅의 고대 조상들은 그렇게 새해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북방의 민족들은 남쪽으로 날아갔던 기러기가 돌아오는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며, 남쪽의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 삼짇날을 새해 첫날로 삼았습니다. 새해라면 무언가 그에 합당한 자연의 변화와 조짐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 역시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때를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거나, 철새들의 이동, 또는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곤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새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한 생이 시작되는, 또는 한 생명의 탄생과 같은 것이고 보면, 그에 상응하는 자연의 변화가 반드시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들의 내면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란 정확히 말하면 '동시성'입니다. 안과 밖이 조응하는 세계, 나와 우주가 조율하는 세계지요.
세상엔 독불장군식으로, 저 혼자 잘나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협력하고 조우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동시성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마음의 소통에 의해서, 뜻의 일치를 통해서 옵니다.
물질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이런 동시성의 관계란 아마도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런 동시성이야말로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모습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초기의 어느 단계에서 이 동시성의 현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왠지 우산을 들고 나가고 싶어서 들고 나갔더니 정말로 뜻하지 않게 비가 왔다든지, 옛 친구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친구로부터 전화나 편지가 왔다든지,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의 난초에 꽃이 피거나, 가뭄이 들어 기도하는데 곧바로 비가 내린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동시성에 대해 어떤 이들이 텔레파시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또다른' 원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못에 이는 물결의 파문이 연못 가장자리에 동시에 전해지듯이, 밤 하늘으 별빛이 온 세상에 고루 닿듯이... 그러므로 이 동시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관계를 찾아가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가야 할 길의 지표기도 하고,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시성은 '길(道)'과 같습니다. 길은 방향과 지향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다른 길과 만나기도 하고 여러 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모래톱과 같은 흔적을 삶에 남깁니다. 영적 교사들이 말하는 re-membering은 바로 그 길이 남긴 흔적들의 의미를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포니족의 영적 교사 데이비스의 어머니가 어린 데이비스에게 말하던 것처럼...

인생이란 길과 같은 거란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걸아가야 해. 만일 우리가 그만두면 그것은 길 위애서 걷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단다. 밤이 지나면 우리는 일어나 그 길을 다시 걸아야 하지.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앞에 나타나는 조그만 종이 조각들과 같은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러면 우리는 그 종이 조각들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야 해. 우리가 만나는 그 하나하나의 종이 조각들을 그렇게 주머니에 넣어 두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충분한 종이 조각들을 갖게 된단다. 그러면 그것을 한데 모아 그 조각들이 말하는 것을 읽는 거야. 누구나 충분한 종이 조각들을 가질 수 있단다.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읽은 다음, 그것을 가슴에 가져가는 거야. 그러고는 그 종이 조각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길을 계속 가는 거란다. 왜냐하면, 더 집어야 할 종이 조각들의 많이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 그들을 꺼내서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좀더 많을 것을 배우게 된단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이렇게 종이 조각들을 모은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더욱 많은 것을 읽게 되겠지. 우리가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단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워지는 거란다. 설령 지혜로워지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과거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거든.

이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성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동시성은 사람들의 이름 속에서 발견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들 축복과 함께 그 아이의 운명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저긍로 똑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음성학적으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의 역할은 하지만 영적인 의미는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개' 하는 이름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합니다.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그 때 비로소 어떤 감성이 오겠지요. 그러나 그를 모른다면?-예를 들어 봅시다. '이청강'이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의 이름은 사물을 지칭하는 기능은 지니지만, 그 이름이 주는 영적 느낌은 없습니다. 이것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 조금 낫습니다. 李靑江. 한자를 아는 이들은 금방 청강이란 이름이 '푸른 강'을 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자를 모르는 세대에게 청강이란 이름은 어떤 느낌도 주지 못합니다. 이름은 있되, 그 이름이 갖고 있어야 할 영적인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름을 지을 때는 거기에 좋은 뜻과 기원을 담아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짓는 방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출세나 명예를 얻고, 재물을 얻는 것들을 기준으로 좋다는 이름을 짓습니다. 거기에 자연의 영적인 요소가 들어갈 자리는 매우 적습니다. 게다가 듣는 사람의 귀에는 그마저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청강이란 소리만이 귓전을 때릴 뿐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 소리 하나, 물 흐르는 소리 하나에도 생명이 있고,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청강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영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그에 견주어 인디언들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늑대와 함께 춤을', '붉은 구름', '한밤중의 노래', '달과 함께 걷다', '노래하는 물', '바람을 타고 달리는 여인', '얼굴에 내리는 비', '행복하게 춤을 추는', '서 있는 옥수수', '두 발로 선 곰' 등등.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영혼이 반응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대개 신명 탐구를 통해서 받은 영적인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영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의 이름은 비로소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과정에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존재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마치 인디언들이 그들의 복장에 장식한 상징 문양이나 머리에 꽂은 독수리 깃털을 통해서 신을 보는 것처럼.
따라서 그들의 이름은 일종의 기도와 같습니다. 만트라(mantra, 眞言)와 같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영혼이 열리는.... 그렇게 그들은 이름을 통해서 영적인 내밀한 존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압니다. 이렇게 그들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그를 어떤 방향과 성격과 예지를 던져 줍니다. 그리고 예지의 공유는 자연스럽게 그를 어떤 방향으로 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바로 여기에 관계에 내재해 있는 동시성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한자식 이릉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름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영적 감성이 발동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말이지요. 왜 이런 시(詩)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릉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허나 영적 감성이 없으면 이름은 결코 꽃이 되지 않습니다. 관계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동시성이 내재하지 않는 관계는 공허합니다.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마치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그런 공허한 관계는 우리를 성장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어도 어머니 대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처럼...

관계란 이처럼 풍부한 함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주는 아름다움으로 해서 우리는 균형과 조화 속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의 원의 상징은 아주 큽니다. 우리를 내가 아닌 공동체로, 세상으로, 우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전체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서로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동시성이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서정록 /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이론만이 아닌 실천으로 함께 살기를 모색하던 중, 자연과 동화된 참된 삶을 살고 있는 북미 원주민 문화에 심취하게 되어, 그 사상과 문화 알리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백제금동대향로』,『지금은 자연과 대화할 때』가 있습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2월호.

 

 

 

질문하는 법-서정록  

질문하는 법

검은 호수 서정록

인디언 교육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제 스스로 삶의 지혜를 터득해 갈 수 있도록, 그래서 이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균형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그들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필요하면 그때그때 배워서 사용할 수 있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는 남이 대신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오직 삶의 경험만이 지혜를 가져다 준다고...
그래서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생활 속에서 다른 존재들을 공경하고 그들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칩니다. 사냥할 때도 제일 약한 놈을 꼭 필요한 만큼만 잡도록 가르치고, 과실이나 뿌리를 채취할 때도 그 중 일부만 취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가져가도 이듬해에 더 번성할 수 있을 만큼 남겨 두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야 삶은 계속될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기에...
그리고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가르칩니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행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말과 행위가 중한 것임을 스스로 깨우치게 합니다.
결코 지식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혜를 얻으면 지식은 저절로 따라오는 법. 그래서 그들은 '질문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질문하는 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질문만 할 줄 알아도 이미 절반을 안 거나 다름없다고...
다음은 찰스 이스트맨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회상입니다.

내가 열다섯 살 때까지 교육을 맡으셨던 나이 아저씨는 엄격한 훈련을 시키셨으며, 또한 훌륭한 교사였다. 아침에 내가 티피를 나설 때면 그 분은 말씀하셨다.
"불쌍한 막내야. 모든 사물을 꼼꼼히 살펴보거라."
그리고 저녁때, 내가 돌아오면 한 시간씩 내게 물으셨다.
"나무들은 어느 쪽 껍질의 색깔이 더 밝더냐? 어느쪽 가지들이 가장 균형 있게 자라더냐?"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낮동안 처음 본 새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 설명하도록 하셨다. 때문에 나는 처음 만나는 새들에게 그들의 부리 색깔이나 모양, 그들의 울음소리와 생김새, 그리고 둥지의 위치 등을 살펴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 준 새들 중에 어떤 것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내가 새의 특징을 잘못 파악하였을 경우, 아저씨는 내게 정확한 새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어쩌다 정확한 새 이름을 맞추면 따뜻한 말로 격려해 주셨다.
내 좀 더 나이를 먹어 8살이나 9살쯤 되었을 때, 아저씨의 가르침은 더욱 깊어졌다. 예를 들어, 그 분은 이렇게 물으시곤 했다.
"저 쪽 호수에 물고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지?"
"그건 말이죠, 한낮에 녀석들이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물 위로 뛰어오르거든요. 그래서 알았어요."
아저씨는 나의 자신 있는, 그러나 피상적인 대답에 미소를 지으시곤 했다.
"얕은 물 속에 모여 있는 작은 조약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물가의 모래바닥에 새겨진 작은 곡선이나 작은 모래 언덕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지?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을 어디서 보았지? 호수에 물이 드나드는 곳은 이들과 어떤 관계가 있지?"
그 분은 내게 던진 그 많은 질문에 대해 내가 정확한 대답을 할 것을 기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관찰력이 뛰어난 훌륭한 학생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불쌍한 막내야, 늑대를 보고 잘 배워야 한다. 그 놈은 놀라서 목숨을 걸고 도망칠 때조차도 마지막 은신처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멈추어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본단다. 그러니 너도 사물을 볼 때 반드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라."

인디언 아이들의 교육에서 중요한 점은 생활 속에서 제 스스로 배우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 탐구(vision quest)에서 광주리 만드는 장인이 될 신명을 받은 아이가 광주리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면, 그는 그 방면의 장인한테 도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도제 밑에서 단순히 광주리 만드는 기술뿐 아니라 갈대를 거두는 법, 제물을 바치고 갈대의 혼령을 위로하는 법, 일 년 중 어느 시기에 나무와 갈대를 거두는지, 그리고 숲과 들판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갈대를 선별하는 법 등을 함께 배웁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식물과 계절이 가져오는 변화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른을 공경하는 법, 자연의 대상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것 등을 배웁니다.
그렇게 스승이 하는 것을 열심히 따라 하는 동안,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광주리 만드는 장인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광주리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동안 그 기술과 관련된 신화에 대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공경과 경외심에 대해서 배웁니다. 말 그대로 삶 그 자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디언 어른들은 지식을 전수하기보다는 아이의 마음에 씨앗을 심어주는 겁니다. 문제를 던져 주고 스스로 풀어 가도록 말이지요.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묻지 말고 '어떻게'를 물으라고, 무엇에 대한 질문은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지식은 이 무엇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 문명도, 과학의 발전도, 의학의 발전도 모두 무엇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이룩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의 축적을 가져다 주긴 해도,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에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믿나?"
그에게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것은 한낱 지식의 나열에 불과해.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을 파동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야."
지식은 도구적인 것입니다. 삶에 필요하긴 하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의미 있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지식만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잘못된 지식은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나 핵무기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지요. 그런 지식은 결국 재앙을 만들 뿐입니다.
그에 견주어, '어떻게'에 대한 질문은 과정과 방법, 그리고 삶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들판에 핀 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걸 먹고 크는 소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고 해 봅시다. '꽃이 무엇이냐', '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막상 대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대답한다고 해도 거기엔 우리의 삶을 비춰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들판에 핀 꽃을 보며 느끼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또 그 풀을 뜯어 먹고 크는 소를 보며 느끼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또 그 풀을 뜯어 먹고 크는 소를 보며 느끼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 꽃이 아름답다거나 신선하다고 대답할 것이고, 그것은 그 꽃이 내게 주는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그 속에 나와 꽃의 관계가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주술사인 이스트치마는 후에 『일곱 개의 화살(Seven Arrows)』을 쓰게 될 그의 제자 하이유메이요스츠 태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프레이리 초원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리는 대지 위에서
인생을 만난다.
우리는 프레이리 초원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리는 대지 위에서
죽음을 만난다.

풀과 꽃들은 프레이리 초원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자라고
우리는 사람으로서 자란다.

싱그러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우리는 프레이리 초원의 꽃들 때문에 자란다.

우리는 인생을 노래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프레이리 초원의 꽃들이야말로
우리들을 향해 춤추는 질문들이다.

삶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해서

여기서 이스트치마는 꽃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녀에게 프레이리 들판의 꽃들은 그저 한낱 들판에 핀 야생화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그에게 생명을 준 존재이며, 자신이 힘들 때 친구가 되어 준 존재이며, 자신이 노래 부를 수 있게 감흥을 준 존재이며,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깨닫게 해 준 귀중한 존재입니다. 이스트치마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야생화 여인, 토마시아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버펄로를 공경하도록 가르쳤는지 듣고 싶지 않니? 토마시아사는 야생화에 대해서 말했다. 풀-꽃들이바로 버펄로라고, 버펄로들은 그들이 먹는 풀-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때문에 우리 생명의 원 추장들은 버펄로를 풀-꽃이라 부른다. 북부 지역에 사는 크리족과 오지브웨족 또한 버펄로를 풀-꽃이라 부른다. 네가 먹는 식물과 동물들을 공경하라. 삶을 공경하라. 죽음을 공경하라. 네가 살생하는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공경하라.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이 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자연히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디언들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질문에 대해서 인디언 교육 전문가인 그레고리 카제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은 영혼과 함께 시작해서
영혼과 함께 끝난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깨어남을 위해

그리고 땅을 경작하고
씨앗을 심은 뒤
세상의 영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방금 씨앗을 심었습니다.
씨앗이 잘 자라도록 도와 주시고
그에게 생명을 주소서.
그가 자신의 신명을 가질 수 있게 하소서."

한 마디로, 질문은 씨앗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는 것은 어머니 대지에 생명의 씨앗을 심은 뒤 잘 자라기를 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우를 사냥한 사냥꾼이 여우의 새끼들을 살려 주면서 그들이 건강하게 크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삶 속에서 만나는 그 수많은 질문은 늘 나의 삶과 우주 전체에 걸친 문제이고, 그 때마다 나의 선택은 곧 나의 영적인 성장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피가 돌지 않으면 두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없듯이...
우리는 수많은 관계의 차원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행위는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나는 다른 존재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은 늘 나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결코 단순한 방법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행위는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이라고, 그리고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모두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일이라고, 이스트치마는 '어떻게'와 '무엇'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위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질문은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해결하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가 쌓아 올리는 그 무엇이 아니라 쌓아올리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일하는가 하는 것, 그 모두를 의미한다! 너의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질문하고, 어떻게 너 자신을 순치시키는가야말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에게 맨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어떻게'는 네 영혼과 관계된 질문이다. 그에 반해, '무엇'은 대답을 강요하고 너를 규정한다.
'무엇'은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오직 따르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어떻게'는 대답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참된 균형과 조화의 길을 찾게 한다.
우리의 생명의 원 추장들은 늘 '질문의 원' 속에 있다. 어떤 것을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 정의의 원의 토대다.
네가 어머니 대지에게 한 질문의 답은 네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신이 네게 주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속에 있다. 너의 존재와 탄생을 축복하라. 네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너를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나를 낮추고 모두를 위해서 살 것인가...

질문은 언제나 나 자신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변화 또한 언제나 자기 자신 속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밖에서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오직 우리들 자신이 먼저 변화할 때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어머니 대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와 탄생으로부터 왔습니다.
인디언 부모들은 아이들을 끔찍이 위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버릇없게 키우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반듯하게 의젓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키웁니다.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되면 듣는 법을 가르칩니다. 어른들의 말씀과 자연의 친구들이 내는 소리를, 그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법을...
그렇게 아이들이 듣는 것에 익숙해진 뒤에야, 그들은 질문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 때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를 묻도록 가르칩니다. 그들의 신화와 전설과 이야기를 통해서... 놀랍게도 고대의 신화와 전설은 하나같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봄·여름·가을·겨울은 어떻게 생겨났고, 곰의 꽁지는 또 왜 그렇게 짧은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꽃은 어디서 오는지, 또 낮과 밤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등등. 거기에는 서사가 있고, 줄거리가 있고, 모험이 있고, 감동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격과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백인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존경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고 인디언들은 한탄합니다. 존경심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공경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령과 어머니 대지에 대한 공경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존경심을 잃어버린 아이는 끝내는 질문하는 법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 하면, 공경심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공경심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고 한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3월호.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서정록(마지막회)  

[북미 원주민 이야기21]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

검은호수 서정록

회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것입니다. 단순한 모임같지만 거기에는 참가자들의 영적인 태도와 그 사회의 문화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모두가 하나 되고 행복해지는 문화를 지향한다면 회의 방식 또한 그에 맞춰 사려 깊게 짜여질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여러 모로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언제나 '생명의 원', '원 안의 원'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원의 형태로 둥글게 둘러앉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차례로 발언을 한 뒤, 다시 보충 발언을 하며 의견을 조정·통합해 가는 방식이지요. 북유라시아 유목민들의 후예인 북유럽인들은 이러한 회의 방식을 원탁 회의라 부르는데, 기본적인 원리는 대체로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 조상들의 화백 회의 역시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서구인들은 이러한 회의 방식을 고대 그리스의 회의 전통에 따라 '만장일치제'라 합니다. 하지만 만장 일치는 그다지 썩 좋은 표현은 아닌 듯싶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말이 모두 일치했다는 뜻은 있지만, 참가자가 원으로 둥글게 앉아 서로 마주 보며, 시계 방향으로 차례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둥글게 둘러앉아, 그것도 시계 방향으로 참가자 전원이 모두 발언을 한 뒤, 부족할 경우 다시 보충 발언을 하여 조정 ·통합하는 방식에는 원이 갖는 독특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이란 모든 참가자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와 함께 모두가 평등한 주권자라는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말하는 원(Talking Circle)'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회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로쿼이 연합의 '평화의 법'에 기초한 회의 방식이 그것입니다. 전자가 일반적인 부족 회의의 방식이라면, 후자는 부족 연합의 형태를 갖고 있는 이로쿼이의 독특한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의 법은 미국의 연방 헌법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회의 방식 또한 전자의 회의 방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이라면 전자의 회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전자의 회의 방식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원으로 둘러앉는다. 모닥불이나 화롯불 등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는다.
2.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들어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자리에 앉는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이 '말하는 나무(Talking Stick)'를 들고 들어와 그 날 회의의 안건을 낸다.
3. 말하는 나무는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하며 이 나무를 가진 사람만이 발언을 할 수 있다. 말하는 나무를 가진 사람이 발언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발언 시간의 길이에는 제한이 없다.
4. 발언한 사람은 말을 마친 뒤, 말하는 나무를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넘긴다(시계 방향으로). 말하는 나무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진실된 생각을 거짓이나 왜곡 없이 발언한다. 이 때 말할 것이 없거나, 자신보다 옆 사람이 더 적절한 발언을 해 줄 것이라 생각되면 말하는 나무를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곧바로 넘길 수 있다.
5. 말하는 나무가 시계 방향으로 일순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발언한 사람은 말하는 나무를 맨 처음 발언한 사람에게 다시 넘긴다. 말하는 원이 완성되고 나면, 맨 처음 발언한 사람은 말하는 나무를 한 차례 더 순환시킬 것인지, 아니면 순환을 중지하고 가운데에 갖다 놓을 것인지 결정한다. 한 차례의 순환만으로는 기본 발언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맨 처음 발언한 사람은 말하는 나무를 다시 한 바퀴 더 돌리며, 기본 발언이 충분하다고 생각되면 말하는 나무를 원의 가운데에 갖다 놓는다.
6. 말하는 나무가 원의 가운데에 있을 때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지고 제자리에 와서 발언을 할 수 있다.
7. 발언하는 도중, 말하는 원에 참가한 사람들의 질의·응답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말하는 나무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다.
8. 회의 도중, 발언자의 순서나 회의 내용 등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회의 전에 별도로 사회자 내지 진행자를 둘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처음에 말하는 나무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마지막으로 회의 내용을 마무리한다. 별도로 사회자가 있을 때는 시작과 마무리를 사회자가 한다.

이상이 북미 인디언들의 기본적인 회의 방식입니다. 전통 시대에는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담뱃대에 불을 붙여 담배를 돌려 피우고 난 뒤에 회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생명의 숨결을 바침으로써 위대한 신령께 감사드리는 것과 함께 오직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약속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참가자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제요, 가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옛날처럼 반드시 담뱃대를 피우지는 않는 듯합니다. 회의의 성격에 따라 피울 때도 있고, 피우지 않을 때도 있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회의 진행 방식에도 다소 융통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말하는 나무를 일순하지 않고 곧바로 발언을 원하는 사람에게 넘기는 형태로 진행한다든지, 발언을 원할 때 자신이 발언을 할 수 있도록 말하는 나무를 요구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회의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든 다른 사람이 발언할 때는 반드시 침묵을 지킵니다. 그가 몇 시간, 아니 하루 종일 발언을 한다고 해도 인위적인 제지는 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나무는 보통 팔뚝 정도의 길이에 독수리 깃털을 달고 구슬이나 가죽끈으로 중요한 상징 문양 등을 장식한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무일 필요는 없으며, 깃털이나 상징성이 있는 돌 같은 것도 무방합니다. 어떤 것을 사용할 것인가는 참가자들이 그 가치와 의미를 서로 공유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다만, 말하는 원에 참석한 사람들은 반드시 다음의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1. 정직하게 가슴으로 말을 해야 하고,
2. 말할 때는 간략하고 짧게 하며,
3.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는 귀를 열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1. 인디언들은 종교 의례와 마찬가지로 회의할 때도 반드시 정화 의례를 합니다. 이 때 정화는 쑥이나 향초, 또는 시다(cedar, 서남부 지역은 향나무) 잎을 태운 향훈을 가지고 합니다. 이렇게 정화를 하는 이유는 회의 그 자체가 매우 영적인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혹시라도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기운을 정화하기 위해 쑥이나 향초, 시다 등을 태워 정화를 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이유는 우리 안에 잠자는 영적인 지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2. 인디언들은 회의를 하기 전에 먼저, 그 날 참석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위대한 신령께 감사드립니다. 그런 다음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건만,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동물 가족, 식물 가족, 해와 달, 별, 산과 강 등 자연의 존재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3. 다른 사람들이 발언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진지한 태도로 그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에 대한 공경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듣는 동안 말하는 사람의 발언 내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생각을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는 동안 한 개인의 발언은 말하는 원 전체의 것이 되고, 나아가 '사회적 명상'으로 확대됩니다. 사회적 명상이란 어떤 발언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깊이 숙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히 발언자의 의도를 넘어 좀더 넓은 차원에서 다각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명상은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들은 말하는 원에서 말한 것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말하는 원에 속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자연히 발언의 내용에 신중할 수밖에 없겠지요. 자신의 발언 내용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4. 회의를 통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 결정은 번복하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더라도 그대로 따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것은 다음 번 회의에서 수정이 됩니다.
다만, 결정된 내용이 자라나는 세대, 또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다음 세대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다시 회의를 열어 잘못된 결정을 지체 없이 폐기합니다.
5. 회의를 마칠 때는 회의를 잘 마칠 수 있도록 지켜 주신 위대한 신령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과,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만 회의에 함께 했던 자연의 존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북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사람은 물론, 동식물과 자연까지 모두 고려하는 심고원려(深顧遠慮)의 회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회의의 목표는 언제나 어머니 대지와 자연의 생태적 영적 질서에 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현대의 일반적인 회의 방식과는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서양의 브레인 스토밍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인위적으로 짜내는 회의 방식과는 그 지향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생물학적, 사회적, 우주적 차원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관계는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겠지요. 자연히 우리의 삶에 부조화와 불균형이 넘쳐날 테고요. 그래서 인디언들은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보다는 모두가 하나 되고 행복해지는 결론을 얻는 데 무엇보다 주안점을 둡니다. 이런 점은 현대의 기업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품을 내놓아야 하는 시대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추구한다면, 새로운 창조적인 아이디어보다는 어떻게 내 주위의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다 함께 행복해지는 삶을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인디언 문화에서는 말발을 세워 주는 문화가 없다는 점입니다.
인디언들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나를 내세우고 잘난 체하는 것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침묵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흔히 인디언들 보고 원시적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아마도 자기들만큼 많은 생각을 하며 사는 이들도 없을 거라고. 그만큼 그들은 많은 생각을 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말발을 세워 주기보다는 오히려 너 자신을 낮추라고 가르칩니다. 늘 겸손하라고 말이지요. 대신, 말할 때는 늘 가슴으로 말하라고 가르칩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이지요.

셋째,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생태적, 생명적, 우주적 차원의 회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북미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서구의 민주주의는 인간 중심의 회의 방식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참여하여 투표하고, 회의를 합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자연의 모든 동식물이 다 함께 참여하는 민주주의입니다. 마치 큰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 사람도 와서 쉬고, 벌레도 오고, 새들도 오고 짐승도 와서 쉬었다 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디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영혼)을 갖고 있고, 영적으로 평등하며,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과 식물, 자연의 존재들이 모두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물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요. 그러나 인디언들은 회의할 때 그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회의의 내용이 다음 세대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될 때는 지체없이 폐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다음은 이상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참고될까 싶어 두어 글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인디언들의 회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1. 이로쿼이 연합의 오논다가족의 부족 어머니 오드리 쉐난도어가 1990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로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열리고 있는 이 회의와 같은 방식으로는 모임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먼저 일일이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 다음, 공경의 마음을 전하고 감사의 말씀을 드린 뒤에야 이와 같은 모임을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생명을 키워 주시는 어머니 대지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어머니 대지의 가슴에서 자라는 가장 키 작은 풀들을 생각합니다. 아울러 대지의 모든 식물과 숲과 물을 생각하고 물고기와 동물과 새들을 생각하고, 네 방향의 바람을 생각합니다. 그런 뒤에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의 마음과 공경과 감사의 뜻을 하늘에 보냅니다. 모든 생명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할머니 달에게 우리의 마음을 보냅니다. 해와 별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존재들에게도 우리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태초에 창조주가 주셨던 가르침들을 이 위대한 '생명의 원' 속에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우리의 마음과 공경과 감사의 뜻을 신성한 생명의 원에게 보냅니다. 인간인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자유롭게 사용하는 물질을 포함한 그 모든 선물에 감사드려야 합니다(후략).

2. 다음은 나눔의 태도에 대한 인디언 추장들이 모여 회의를 한 내용의 서두 부분으로 『나누어 줌의 명예로움』이란 책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는 사람들이 인디언 방식으로 둥글게 둘러앉을 수 있도록 14개의 의자가 놓여졌다. 다만 동쪽에는 의자가 놓여지지 않았는데, 원의 동쪽을 열어 두기 위함이었다. 참가자 중의 한 사람이 위대한 신령에게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고, 동쪽의 남쪽에 앉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화는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독수리 깃털을 가진 사람이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넘김으로써 시계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오직 독수리 깃털을 가진 사람만이 말할 수 있었다. 말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할 권리를 존중했으며,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이 말을 끝내면 깃털은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졌고, 그렇게 해서 원이 완성된 뒤에는 말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독수리 깃털을 요구할 수 있었다.
말하는 사람들은 동쪽 방향을 통해서 들어왔다. 그들은 의자가 놓인 대로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며 원을 존중했다. 사람들은 한 사람씩 모두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독수리 깃털을 들고 들어온 사람은 돈 코히스였다. 난로 옆의 바닥에 있는 커다란 전복조개 안에는 네 가지 색깔-붉은색, 검은색, 흰색, 노란색-의 천이 펼쳐져 있었다. 돈 코히스는 마른 가지와 잎에 불을 붙였다. 시다와 쑥과 향초의 향기로운 향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돈 코히스:
좋은 아침입니다. 모히간족의 말로 우리는 이렇게 인사합니다. '퀴나몬타쉬라마퀴아'. 그 말은 '창조주와 잘 지내십니까?' 또는 '영적으로 살고 있습니까?'라는 뜻이지요. 오늘 햇빛은 밝습니다. 우리들-여기 있는 분들과 여기 없는 모든 분들-을 모두 비추기에 충분할 만큼. 우리는 우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해 주신 창조주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민족을 위해, 그리고 우리와 이 행성에서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의 원주민들의 주는 것에 대한 전통적 지혜를 함께 나누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균형과 조화 속에서 말하고 함께하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일 속에서 균형을 찾기를,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이 원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돈 코히스는
그의 독수리 깃털을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로널드 웰즈에게 넘겼다.)

로널드 웰즈:
이 대화는 백인들 방식의 세미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히 말하면, '대화의 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원 안에는 위대한 신령이 들어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원을 이루는 사람들은 모두 평등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똑같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말들은 가슴을 통해서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들은 나중에 그대로 고스란히 기록될 것이며,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원주민들의 구비 전통에 따라 전해질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인디언들의 지혜를 참고해서 우리가 좀더 성숙한 회의 문화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좀더 살기 좋고 모두가 하나 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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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록 /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이론만이 아닌 실천으로 함께 살기를 모색하던 중, 자연과 동화된 참된 삶을 살고 있는 북미 원주민 문화에 심취하게 되어, 그 사상과 문화 알리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백제금동대향로』,『지금은 자연과 대화할 때』가 있습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4월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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