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뿌리*

고향초 2005. 11. 2. 21:43
*삼원회[창원의뿌리]* (0/2)
삼원회[사단법인] 200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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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삼원회**

삼원회란 현 창원시의 중심지이며 뿌리가 되는 옛 창원군의 세개면이었던 창원면,상남면,웅남면에서 삶의 바탕을 마련한 사람들이 옛고향의 모습을 그리워하여 향인으로서 정분을 두터이 나누고,그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그리고 아름다운 풍속을 대대 후손들에게 깨우쳐 줌으로써 고장의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뜻으로 이러한 순박한 마음이 한데 어울려 이룩한 모임의 이름입니다 말하자면,빛나는 창원을 길이 이어 가자는 세 뿌리의 모임 이란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의 텃밭인 이곳은,현 창원시청을 기준으로삼아 동경128도40분,북위35도12분에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의 반룡산,북서쪽의 천주산,북쪽의 봉림산과정병산.비음산,동쪽의불모산,남쪽의 장복산에 에워싸여있고,불모산에서 발원하여 상,웅남면을 가로지르는 남천,정병산을 근원으로하여 창원,웅남면을 경계하여 흐르는 두대천,천주산 물을모아 창원면을 관통하는 내동천, 이 세 큰물줄기 모두 남서쪽 마산만을 향해 흘러 저 진해만으로 굽이쳐 가는 아득한 고장입니다  이곳에는

 

까마득한 옛날 신석기 이후 청동기 시대 늦어도 기원전 300년경부터는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는 여기서 흔하게 발굴된 무문토기를 비롯하여 패총,고분,옹관묘,지석묘,철기등을 통해서 잘 알 수있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의 한전에의하면 이곳 우리조상들은 배를 타고 어업을 하며 철기문화를 빛내었던 해양 겨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한 시대의 변한 12국의 하나로 주조마국이  있었으니, 이부족이 바로 우리고장 창원의 옛 조상입니다, 그 뒤 기원전 1세기경에 변한 가운데 농경지를 배경으로한 강대세력이 오늘날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6 가야국으로 개편하자 이에맞서 옛 주조마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이 따로 포상팔국을 형성하였는봐 이중 골포국이 바로 우리 창원의 옛 이름입니다 주조마는 달리는 뱃말 즉 배를일컫고, 포상 또한 갯가 요 골포도 골짜기 개, 즉 골짜기 바닷가 란 뜻이니 이곳이 먼 옛날에 바다가였음을 말해 주는것인데 ,15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 깊국한 곳까지 바다였음을 증언하는 숱한 애기가 전해오고 대구바다,염창[소금가마]도랑,사화,해정,간들[소금들판],성산패총[조갯더미] 그런 지명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고장 창원군,창원시의 행정명이나 그구역이 수없이 변천해 왔지만 최근까지 불러 온 창원면,상남면,웅남면 일대가 바로 옛날의 골포[골개]입니다ㅇ

 

강성한 세력으로 융성하던 골포국은 그 자주 산너머 이웃의 6가야국 중 하나였던 아라가야의 후신인 현 김해지구의 금관가야를 병탄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신라의 힘을빌린금관가야에패퇴하여 결국 이에 예속되고 말았으며,금관가야도 끝내는 신라에 합병되고 말았으니, 때는 신라 법흥왕19[서기532]이었습니다.이때부터 우리 고장도 신라의 영토가 되여 문무왕 16년[676]에는 삽량주[현 경상남도지역]의 한 고을인 굴자군이되고, 그 예속의 골포현으로 굳어졌습니다.골포현은 그 뒤 경덕왕16년[757]에 의안군으로 되었다가,고려현종9년[1018]엔금주[지금의 김해]에 예속되었으나 충렬왕8년[1282]에 다시 독립하여 의창군과회원현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태종8년[1408]에  다시 의창과 회원을합쳐 창원부로 확장개칭되었으며 ,곧이어 태종15년[1415]엔 창원도호부로 승격하였습니다. 이때 이곳은 부내면과남면으로 구역되었는데, 그 뒤 부내면이 창원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임진오ㅔ란때[1592]는 이곳 백성들이 한 사람도 항복함이 없이 대동단결,옛날 해양 겨레의 그 억센 용맹성을 십분발휘하여 왜구를 물리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이리하여 그 공로로 선조34년[1601]에 드디어 창원대도호부로 승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종2년[166엔 문묘 전패를 분실하였다 하여 다시 창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곧이어 현종 11년[1607]에 창원대도호부로 환원되었습니다

 

고종32년[1895]행정 개편에 좇아 영화를 누리던 커다란 고을 창원대도호부가 창원군으로 개칭되고, 그 뒤 1914년에 마산시가, 1955년에 진해시가 독립해 나가고,1973년에 이곳 창원면,상남면,웅남면이 일시 마산시에 포함되었다가 이듬해 1974년에 공업단지로 지정, 산업기지 개발촉진지역으로 확정되어 창원 지구 출장소로 되었다가, 1980년에 창원시로 독립 승격하였으며, 1983년에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이전해오고,1996년엔 나머지 창원군의 면들을 일부 포함하여 오늘의 창원시로 확정되었습니다

 

마산만 바닷물이 봉암 협곡을 굽이처 올라온 곳, 까마득한 옛 조선들은 고기잡고,소금 구워 살았었던  모양이나, 차츰 개펄이 쌓이고 쌓여 기름진 들판이 되자 이를 논밭으로 일구어 농사를 짓기 시자ㄱ하였습니다 벼,보리 농사를 주로 하였으나 밀,콩,고구마,목화,삼도 재배하였고 감,밤,대추 등의 과일이나 여러가지 채소들도 가꾸었습니다. 남서쪽으로 마산만의 해안인 삼귀 어촌에선 어업으로 살았으며, 웅남의 덕정마을엔 드너른 염밭이 있어 1960년대까지도 소금을 많이 구워 내어 돛단배로 마산으로 실어 날랐습니다또 이곳은 갈대밭이 우거졌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꼬시래기[문절망둑], 가자미 모챙이[모찌] 경쟁이[곤쟁이],게 재첩 따위를 잡았으며 해수욕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고장의 풍속은 다양하여 설 명절때면 마을마다 하얀 옷을 입은 세배꾼들이 줄을 이었고, 정월 대보름엔 크고 작은 산봉우리마다 달집을 살랐으며 다달이 닥치는 명절에는 마을 산봉우리에 올라 풍악을 우리리며 회취를 즐기기도 하고, 신파극을 만들어 공연함으로써 그뛰어난 기예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추석때는 남천내 징검다리나 두대천 유목정 등지의 모랫벌에 쇠쌈 대회를 열어 장관을 이루었고,가을벌초나 묘사때는 성묘객들이 산골을 하얗게 수놓았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로는 여름엔 땅따먹기,낫꼿기 숨박꼭질,겨울이면 연날리기,제기차기,자치기,얼음치기 등이 있어 우정을 다졌습니다

 

마을마다 친목계나 향약이있어 길흉사엔 온 이웃이 정성껏 도왔고 보리타작 모내기 가을걷이 등의 농사철에는 품앗이로 마을전체가 힘을 한데로 모앗으며 장유의 위계질서와 예의범절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기제사나 생일같은 조그만한 행사에도 반드시 음식상이 이웃을 찿았고 어른들을 모셔와서 박주한 잔이라도 나누었던 것입니다 광복 이후에는 마을 대항 축구 대회가 자주 열려 마을들의 결속력을 다짐은 물론 이웃 마을과의 교류도 두터이 하였으며 더러는 노래 경연 대회도 열어 노고도 풀고 정분도 나누었습니다

 

우리 고장의 사찰로는 곰절이라 일커는 성주사가 유명하여,그 곳 불모산 게곡의 물은 청옥같아 학생들의 소풍지로 고정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밖에 사파정의 불곡사, 천주산의 천주암 등이 있어 불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봉림산 자락에 대사찰 봉림사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자취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곳의 장터로는 5일장인 2,7일의 창원장과 4,9일의 상남장이 유명하여 풍성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이날은 온갖 토산물과 가축의 매매는 물론 이웃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나 인사치례, 또 여러 가지 소식을 주고받으며 막걸릿잔을 나누는, 그야말로 인정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완암과 아민등지에도 장터가 섰다고 합니다1

 

1945년 조국 광복 이후의 이곳 창원,상남,웅남면 일대의 상황을보면, 창원면 북쪽으로 경전선 철도가 놓였고, 창원역에서 갈려 진해선 철도가 상남역을 거쳐 남쪽의 장복산 터널을 빠져 진해로 향하였는데,이것이 외지로 나가는 유일한 현대적 교통 수단이었습니다.도로는 마산에서 창원을 거쳐 부산 방면으로 가는길,창원에서 상남을 가로질러 웅남 아민고개를 넘는진해행의 길, 이길의 중간 지점인 상남 서곡에서 갈려 북쪽을 빙 돌아 큰길로 합쳐지는 길,상남에서 웅남을 거쳐 봉암다리를 건너 마산으로 내려가는 길과, 이 길 중간 신촌에서 갈려 새방골을 따라 올라가 마진터널로 빠지는 진해행 길과 웅남 연덕에서 성주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큰길에도 장터로 오가는 화물자동차가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아주 드물게 다녔을 따름 정기적인 버스 한 대 다니지않아, 기차를 놓치면 마산이나 진해 등지의 삼사십릿길도 걸어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공공기관이라곤 세 개 면사무소와 창원,상남의 우편국,창원,상남,성주,웅남의 경찰 지서 정도요 교육 기관으로는 창원,상남,지귀,사화초등학교가 섰으며 그 뒤 남면,창원 두 중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엔 중등학교 진학생들은 마산이나 진해 등지로 유학,고된 기차통학을 하였습니다

 

때를 거슬러, 엣날엔 대도호부 동현이 자리잡았던 창원면 농사 이외엔 봉급 생활자로는 진해 공창에 다녔던 해군문관들도 상당히 많았엇는데 니들도 모두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마굿간 같은 기차를 타고 통근을 햇습니다 동정동을 중심으로 하여 이웃 각처엔 여러 향교와 서원들이 있어

유림들이 많았었는데 지금까지도 유림들은 맥을 이어 우리의 전통 문화를 가꿔 오고 있습니다

저 1919년 3.1운동 때는 창원읍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격렬하게 일으켰으며,일제때는 죽음으로 항거한 애국지사가 줄을 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정게,관계,학게,교육계,재게 등에서 두드러진 공적을 남긴 유명 인사들이 숱하게 배출하였고, 오늘날에도 전국 각처에서 훌륭한 일꾼으로 국가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음은 우리 고장의 가장 값진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고장 창원 사람들은 대를 이어 용기가 넘쳤으며 충절을 생명으로 지켯으되 두터운 정분을 늘 이웃과 나누었으며 농사로 생계하여 가난을 멍에하였으되 윤리 도덕을 보옥같이 갈고닦아 평화로운 풍속을 가꾸면서 상부상조하는 전통을 이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 우리 고장 창원은 일대 변혁을 맞이하게되었습니다 민족 중흥,공업입국을 부르짖던 거센바람은 드디어 우리 고장을 중공업단지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1970년대 그때으; 창원,상남,웅남, 3개 면의 현황을 보면,겨우 7,800여가구에서 42,000여명이 4,000정보가 채 안되는 논밭을 삶의 텃밭으로 삼아 77개의 자연 마을을 이루어 살아왔는데, 갑자기 우리나라최초의 계획도시로 바뀜에 따라 옛날의 산천은 깡그리 헐리고, 정든 고향집은 전부 뜯곁으며,부조의 묘소들은 거의가 파헤쳐졌습니다

게다가,한 가족처럼 지내던 이웃집 소꿉동무며 품앗이 친구들,그리고 타이르듯 이끌어 주시던 그 다정했던 어른들도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나 버렸으며,더욱이 한 마을을 이루어 살던 일가들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고 사흘이 멀다며 자주 만나 농을 부어 술잔 나누던 이웃 마을 동창들도 어디론가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남서쪽은 기계공업단지로 조성되어 400여 개의 각종공장이 건설되고,동북쪽은 거주와상업,업무지구로 확정되어 경남도청을 비롯한 여러 행정 관청과 관계기관들이 한꺼번에 이전해 옴에 따라 2000년 현제으; 인구가 30년 전의 12배가 되는 50만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 하였습니다. 옛일을 회상함은 인생을 두번 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을 희억하면 도토를 잃은 듯 애틋한 정감이 만가지로 엄습합니다. 사시사철 옥수 흘리던 샘터와 그앞 파란 미나리꽝, 거기서 피어 오르던 웃음들은 꿈길인양 그림자조차 없어졋습니다. 대나무 숲 그늘로 굽어 돌던  돌담길과 울긋불긋헝겊 나풀거리며 선들바람 안겨 주던 당산나무도. 그 길 그 나무 언저리에서 느리게 돌아가던  연자방아, 물방아도 무지개처럼 사라지고 없습니다. 쑥 캐고 나물 뜯던 밭 언덕이며 고동 줍고 미꾸라지 뒤지던 무논수렁 한 뼘 남아 있지 않아,이제는 물결치던 새파란 보리밭도 샛노란 볏논도 구경할수 없습니다.눈감으면 어려드는, 차라리 몸서리쳐지는 그리운 정물들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게 가꿔진 계획되,그래서 포장길은 사통팔달로 너르고 반듯하여 온갖 차량들이 마음껏 질주하며 고층 아파트는 하늘을 찔러 있고 나무들이 숲을 이룬 한없이 너른 공원들이 곳곳마다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우리는 기뻐해야합니다

수많은 초 중등학교가 새로 생켰으며 각급 대학들도 여럿 들어 섰습니다 현대식 상가에는 가지가지 상품들이 산더미로 쌓여 있고 온갖 편의 시설.문화 공간이 알맞게 배치되어 있어 이제는 보릿고개를 잊고 가장 현대적인 문화인 문명인으로 치세하게 되었음을 실컷 자랑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사회 환경의 도시화에 따라 . 그 평화롭고 소박했던 인심이 차츰 거칠어져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평화롭고 소박했던 인심이 차츰

거칠어져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 관계를 물질적으로 논하고 사고를  기계적으로 논단함으로써 삭막한 이기적 풍조가 팽배해 가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옛날의 그 아기자기한 삶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이제는 편리하고 고급스런 여건이 갖취졌으며 한때 혼란스러웠던 환경 분위기도 점점 안정과 질서를 찿게 되었으므로 이에 따라 우리의뿌리를 찿고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한 평화롭고 명랑한 지역 사회를 정착 시키겠다는 의식이 이심전심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이와 같은 인식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구심체가 되며 또 실제적이고 건설적인 활동을 펄쳐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들은 이 삼원회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우리의 옛 창원을 잊지 말자는 뜻의 유허비를 세워 자긍심을 키우고. 이 자랑스런 마음이 오래도록 우려 퍼지기를 바라면서 창원 대종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리고 삼원회관을 건립하여 우선 구천을 헤매는 우리 조상들의 영혼이 안주하는 전당이 되도록 하고 또 고장의 전통 문화와 역사 유물들을 보존 관리하며 계승하고 전승하는 장소가 되도록 할것입니다 또한 객지로 떠난 수많은  창원 향인들이 고향을 찿아와 향수를 달래는  휴식처로도 제공 될 것입니다

 

그리고 50만 시민의 취미 생활 권장하고 교양과 기술을 습득하며 청소년의 정서를 순화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 깨우치는 수련장으로 이바지 할 것입니다 나아가 앞으로는 우리 향민들이 상부상조하여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일을 강구하게 될 것이요 한편으로는 청소년의 장학사업을 펼침으로써 훌륭한 인재로 성취되도록 가능한 노력을 다할 것을 것을 다짐하여 이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조국 근대화와 공업 입국의 텃밭으로 바쳐진 고장. 이제는 그 아름답고 정들었던 산천의 자취는 추억의 뒤안길로 사려졌으되 대대로 이어받은 빛나는 역사 아름다운 전통은 길이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이 무려주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태어나 같이 웃고 따라 울던 선후배 벗님들이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곳 창원은 우리의 삶을 깨우쳐 준 변함없이 포근한 아식처 우리의 목마른을 달래 주는 끊임없는 샘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티없이 맑은 정의를 하나로 더욱 다져 먼 고개 바라보며 가난을  쟁기질하던 그날이 그립거든, 이곳에 자주 들러 발전하는 우리 창원을 기리고 또 기립시다

여기는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 , 우리의 핏줄 , 우리의 젖줄, 다함없는 우리 사랑 창원이여

영원하라

 

                  ****  동의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박 홍 길 짓고

                         

                                                사단법인 삼원회가 발간한다 ****

 

 삼원히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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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보네요^^k